예레미야애가 풀어 읽기 · 4장
이 장의 자리 · 4장 · 빛을 잃은 시온
순금처럼 귀하던 사람들이 질그릇이 된 날
예레미야애가 4장은 무너진 성벽이나 불타는 성전이 아니라, 빛을 잃어버린 금을 보여 주며 시작합니다.
금의 빛이 사라졌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어찌 금이 빛을 잃고, 좋은 금이 변해 버렸는가? 거룩한 돌들이 모든 거리 어귀에 쏟아졌다.예레미야애가 4:1 · 본디새김
첫 번째 질문은 물질의 변화에 관한 것처럼 보이지만, 다음 절을 읽으면 시인이 정말 말하려는 것이 드러납니다.
귀한 시온의 아들들, 순금으로 값이 매겨지던 이들이 어찌 토기장이의 손이 만든 질그릇 항아리로 여겨졌는가?예레미야애가 4:2 · 본디새김
시인은 금과 돌의 이야기를 하다가 곧바로 사람의 이야기로 옮겨 갑니다.
금은 아무 데나 버려지는 물건이 아닙니다. 반면 질그릇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물건이고, 깨지면 버리기 쉽습니다. 시인은 그 차이를 이용하여 예루살렘 사람들이 겪은 지위와 존엄의 추락을 보여 줍니다.
2절의 「여겨졌는가」라는 표현이 특히 중요합니다. 본문은 시온의 자녀들이 정말 하찮은 존재가 되었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질그릇처럼 여겨지는 현실을 탄식합니다.
1절의 「거룩한 돌들」은 성소에 속한 실제 돌들을 가리킬 수도 있고, 이어지는 시온의 자녀들을 돌에 빗댄 표현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성전이 파괴된 상황을 생각하면 전자가 자연스럽고, 2절과의 병행을 살피면 후자의 의미도 떠오릅니다. 이 둘을 반드시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거룩한 장소가 무너지고 그곳에 속한 사람들이 흩어지는 모습이 서로를 비축니다.
이 장은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를 따라 각 절이 시작되는 22절의 탄식시입니다. 금과 질그릇, 젖을 먹이는 짐승과 굶주린 아이, 귀한 음식과 쓰레기 더미, 아름답게 빛나던 몸과 마른 나무처럼 된 몸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이 대비들은 모두 하나의 물음으로 이어집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지탱하던 질서가 무너지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자칼도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데
3절은 갑자기 동물의 세계로 시선을 옮깁니다.
자칼도 젖가슴을 드러내어 제 새끼들에게 젖을 먹였다. 내 백성의 딸은 잔인해졌다, 광야의 타조들처럼.예레미야애가 4:3 · 본디새김
구약의 시적 표현에서 타조는 자기 새끼를 제대로 돌보지 않는 동물의 이미지로 사용됩니다. 욥기 39:13–17에도 타조가 알을 땅에 남겨 두고 자기 새끼에게 무정한 것처럼 행동하는 묘사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어머니들의 성품이 본래 잔인해졌다는 비난으로만 읽으면 다음 절을 놓치게 됩니다.
젖먹이의 혀가 목마름 때문에 입천장에 달라붙었다. 어린아이들이 빵을 달라고 했으나, 그들에게 나누어 주는 이가 없었다.예레미야애가 4:4 · 본디새김
아이들이 굶주리는 이유는 그들을 돌보아야 할 사람들이 단순히 돌보기 싫어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도시 전체에서 먹을 것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의도적으로 양육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관계가 무너진 모습을 보여 줍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먹을 것을 주고, 어린아이가 부모의 돌봄 아래 살아가는 일은 인간 공동체를 지탱하는 가장 일상적인 질서입니다.
그런데 전쟁과 포위는 그 질서마저 파괴했습니다.
사람들이 잔인해졌다는 탄식 속에는, 자기 자녀를 먹이고 싶어도 먹일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비탄이 들어 있습니다. 짐승에게서조차 기대하는 돌봄을 예루살렘의 아이들은 누리지 못합니다.
진홍빛 천에서 쓰레기 더미로
5절에서는 또 다른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좋은 음식을 먹던 이들은 거리에서 처참한 신세가 되었다. 진홍빛 천 위에서 자란 이들은 쓰레기 더미를 끌어안았다.예레미야애가 4:5 · 본디새김
「진홍빛 천」은 값비싼 옷감과 풍요로운 생활을 떠올리게 합니다. 과거에는 좋은 천으로 몸을 감쌌지만, 이제는 쓰레기 더미를 끌어안고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몸을 의지할 수 있는 환경 자체가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6절에서 시인은 예루살렘의 재앙을 소돔에 비교합니다.
내 백성의 딸이 받은 죄의 벌은 소돔이 받은 죄의 벌보다 컸다. 소돔은 한순간에 뒤집혔고, 그곳에 손이 미치지도 않았다.예레미야애가 4:6 · 본디새김
창세기 19:24–29에서 소돔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갑자기 멸망합니다. 본디새김처럼 「죄의 벌」로 읽으면, 바로 뒤에 이어지는 재앙의 양상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소돔은 한순간에 뒤집혔습니다. 반면 예루살렘은 포위와 굶주림 속에서 사람들이 서서히 죽어 갔습니다. 여기서 시인은 죽음의 숫자를 계산하지 않습니다. 죽어 가는 과정 자체의 참혹함을 보여 줍니다.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이었는지 시인은 다음 네 절에서 인간의 몸을 통해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그곳에 손이 미치지도 않았다」는 마지막 표현은 정확한 의미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소돔의 파괴에 인간의 손이 직접 개입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재앙을 오래 견디거나 그 과정에 손을 쓸 여지조차 없었다는 의미와 연결할 수도 있습니다.
빛나던 몸이 알아볼 수 없게 되다
7절은 매우 아름다운 표현들로 가득합니다.
시온의 나실인들은 눈보다 맑았고, 우유보다 희게 빛났다. 그들의 몸은 산호보다 붉었고, 그들의 자태는 사파이어 같았다.예레미야애가 4:7 · 본디새김
여기서 시인은 사람의 모습을 값비싸고 아름다운 것들에 견줍니다. 맑고 밝은 빛, 건강하게 붉은 몸, 잘 다듬어진 보석처럼 빛나는 자태를 떠올리게 합니다.
여기서는 종교적인 나실인들인지, 도성의 귀한 신분에 있던 사람들인지 해석이 갈립니다.
어느 쪽이든 8절과의 대조는 분명합니다.
그들의 모습은 검은빛보다 더 어두워졌고, 거리에서는 알아볼 수 없었다. 그들의 살갗은 뼈에 달라붙었고, 말라서 나무처럼 되었다.예레미야애가 4:8 · 본디새김
앞에서는 눈과 우유, 산호와 사파이어로 몸을 묘사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검은빛과 뼈, 마른 나무가 등장합니다. 굶주림과 탈수로 인해 몸이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를 묘사합니다.
여기서 1절의 금과 2절의 질그릇이 다시 떠오릅니다. 귀하고 빛나던 것이 하찮게 취급되는 변화는 물건의 값이 떨어지는 일에 그치지 않습니다. 인간의 몸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9절은 시 전체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판단 가운데 하나를 내립니다.
칼에 죽은 이들이 굶주림에 죽은 이들보다 나았다. 굶주린 이들은 밭의 소출이 없어 찔린 채 녹아내렸기 때문이다.예레미야애가 4:9 · 본디새김
칼에 맞아 죽는 것은 끔찍하지만, 굶주림으로 죽어 가는 일은 오랜 시간에 걸쳐 사람의 몸을 소모시킵니다. 「찔린 채 녹아내렸다」는 표현은 굶주림을 단순한 허기로 말하지 않습니다. 마치 무기에 찔리는 것처럼 몸속에서 생명이 소진되는 고통을 묘사합니다.
이 대조는 전쟁의 폭력이 반드시 칼과 화살을 통해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먹을 것을 빼앗긴 상태에서도 사람은 죽어 갑니다.
그리고 10절은 그 굶주림의 가장 끔찍한 결과를 말합니다.
자비로운 여자들이 제 손으로 자기 아이들을 삶았다. 내 백성의 딸이 무너질 때, 그 아이들은 그 여자들의 양식이 되었다.예레미야애가 4:10 · 본디새김
시인은 그들을 본래 잔인한 사람들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자비롭고 사랑을 베풀던 여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거나 참혹함을 줄이려는 표현이 아닙니다. 오히려 본래 자녀를 돌보고 아끼던 사람들이 극심한 기근 속에서 얼마나 끔찍한 상태에 내몰렸는지를 드러내는 대조입니다.
3절에서는 짐승들도 제 새끼에게 젖을 먹이지만 예루살렘은 그렇지 못하다고 했습니다. 10절에서는 그 비극이 극단에 이릅니다.
양육의 관계가 거꾸로 뒤집혔습니다.
이 장에서 가장 끔찍한 것은 단순히 사람들이 죽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생명을 돌보기 위해 존재하던 관계들까지 죽음의 구조 안에 갇혀 버렸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제 이 참상을 누구의 책임과 연결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조금 더 깊이
「나실인들」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네지레하(נָזִיר)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 특별히 구별되어 헌신한 나실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민수기 6:1–21에 나오는 나실인 규정이 그 배경입니다. 그러나 같은 어근은 구별되거나 특별한 지위에 있는 사람을 나타내는 데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창세기 49:26과 신명기 33:16에서 요셉을 형제들 가운데 특별히 구별된 사람으로 부르는 표현이 그 예입니다. 본디새김은 나실인들로 옮겼습니다. 이 번역을 따르면 하나님께 구별되어 바쳐진 사람들조차 굶주림과 쇠약함을 피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두드러집니다. 높은 신분의 인물들로 읽으면 특권층의 몸과 지위까지 무너진 현실이 강조됩니다. 신명기 28:53–57에는 포위와 기근이 극단에 이르면 부모와 자녀의 관계마저 파괴될 것이라는 언약의 경고가 나옵니다. 예레미야애가 4:10은 바로 그런 재앙이 일어난 것으로 탄식합니다.
아무도 함락을 믿지 않았던 도성
11절에서 시인은 예루살렘의 재앙을 다시 하나님의 행동으로 설명합니다.
여호와야훼는 자기 격분을 남김없이 쏟았고, 타오르는 분노를 부었다. 시온에 불을 질렀고, 그 불은 시온의 기초들을 삼켰다.예레미야애가 4:11 · 본디새김
집의 기초는 건물을 지탱하는 부분입니다. 기초가 무너진다는 것은 지상에 보이는 부분이 파괴된 것보다 더 근본적인 붕괴를 뜻합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의 파괴가 얼마나 철저했는지를 나타내는 시적 이미지입니다.
땅의 왕들도, 세상에 사는 모든 이들도 믿지 않았다, 적과 원수가 예루살렘의 성문들로 들어오리라는 것을.예레미야애가 4:12 · 본디새김
여기서 「땅의 왕들」과 「세상에 사는 모든 이들」을 당시 세계의 모든 사람이 실제로 예루살렘의 군사적 안전을 확신했다는 역사적 통계처럼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는 예루살렘의 함락이 얼마나 충격적인 일이었는지를 강조하는 시적 과장입니다.
예루살렘은 다윗 왕조의 도성이었고, 여호와야훼의 성전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특히 히스기야 시대에는 아시리아 군대의 위협 속에서도 도성이 보존된 경험이 있었습니다(열왕기하 19:32–36). 그런 기억은 예루살렘에 대한 특별한 확신을 강화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오래전부터 성전의 존재를 안전의 보증으로 삼는 태도를 비판했습니다(예레미야 7:4–15).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다는 사실이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을 덮어 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원수가 성문으로 들어왔습니다.
성문은 도시를 지키는 방어 체계의 일부이자 안팎을 구분하는 경계였습니다. 원수가 그 문으로 들어왔다는 것은 예루살렘이 자신을 보호할 능력을 잃었다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의 성문을 무너뜨린 원인을 이야기하면서 시인은 성 밖의 적군보다 성 안의 종교 지도자들을 먼저 지목합니다.
성읍을 지켜야 할 사람들이 그 안에서 피를 흘렸다
13절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에 대한 직접적인 고발입니다.
적과 원수가 들어온 것은 그 도성 예언자들의 죄들, 그 도성 제사장들의 죄악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 안에서 의로운 이들의 피를 쏟았다.예레미야애가 4:13 · 본디새김
이것은 앞서 2:14에서 거짓 예언자들이 헛된 환상을 보여 주었다는 지적보다 더 무거운 비판입니다. 예언자와 제사장은 본래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를 바르게 세우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야 하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들이 정반대의 행동을 한 것으로 고발됩니다.
예루살렘은 거룩한 성전이 있는 도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도성 한가운데서 의로운 사람들의 피가 흘렀습니다.
이런 고발은 예레미야서에서도 발견됩니다. 예레미야 26:7–11에서는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했고, 26:20–23에서는 예언자 우리야가 왕의 명령으로 죽임을 당합니다. 예레미야 22:3은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예레미야애가 4:13이 정확히 어느 사건이나 희생자를 가리키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종교적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 의로운 이들을 해치는 일이 예루살렘의 중대한 죄악이었다고 말합니다.
도성의 거룩함을 지켜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그 도성을 더럽혔습니다.
부정함을 경고하던 이들이 부정한 자로 쫓겨나다
그들은 눈먼 채 거리에서 비틀거렸고, 피에 더럽혀져 있었다. 그래서 아무도 그들의 옷에 손을 댈 수 없었다.예레미야애가 4:14 · 본디새김
그들은 백성에게 올바른 길을 보여 주어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자기들도 제대로 길을 찾지 못합니다. 또한 피에 더럽혀져 있다는 말은 앞절의 「의로운 이들의 피」와 연결됩니다.
「물러가라. 부정하다.」 사람들이 그들에게 외쳤다. 「물러가라, 물러가라. 손대지 마라.」 그들이 달아나 떠돌자, 민족들 가운데서 사람들이 말했다. 「그들은 더는 머물러 살지 못할 것이다.」예레미야애가 4:15 · 본디새김
이 장면은 레위기 13:45–46에 나오는 부정함과 격리의 언어를 떠올리게 합니다. 정결 규정에 따르면 부정하다고 판정된 사람은 자신의 상태를 알리고 공동체와 구별되어야 했습니다.
제사장들은 정결과 부정을 분별하고 가르쳐야 하는 직무를 담당했습니다(레위기 10:10–11). 그러나 이제는 사람들이 그들을 향해 「부정하다」고 외칩니다.
이 역전은 단지 사회적 지위의 하락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종교적 권위와 그들의 실제 행동 사이에 얼마나 큰 간격이 있었는지를 드러냅니다.
자신들의 공동체 안에서도, 다른 민족들 사이에서도 머물 곳을 얻지 못합니다.
여호와야훼의 얼굴이 그들을 흩어 놓았다. 그는 더 이상 그들을 바라보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제사장들의 낯을 세워 주지 않았고, 장로들에게도 호의를 베풀지 않았다.예레미야애가 4:16 · 본디새김
얼굴은 단순히 외모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향해 얼굴을 돌리거나 그 얼굴을 높여 준다는 표현은 관심과 인정, 호의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위로는 하나님의 호의를 잃고, 아래로는 사람들의 존중을 잃습니다.
다만 이것을 모든 제사장과 예언자가 똑같이 무죄한 피를 흘렸다는 주장으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은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이끈 지도층의 책임을 강하게 고발하고 있지만, 개별 인물의 죄책을 모두 판단하는 기록은 아닙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외부의 군사적 공격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공동체의 도덕적·종교적 질서가 안에서부터 무너진 현실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14절의 「눈먼 채」라는 표현은 그들이 실제로 시력을 잃었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문맥에서는 방향을 잃고 비틀거리는 모습을 나타내는 비유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들의 옷에 손을 댈 수 없다는 표현은 문법적으로 누구를 주어로 삼느냐에 따라 다르게 읽을 여지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옷에 닿을 수 없었다는 뜻일 수도 있고, 그들 자신이 옷을 만질 수 없었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첫 번째 방향을 따릅니다. 이 경우 다음 절의 외침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구해 주지 못할 민족을 기다리던 눈
17절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바뀝니다.
지금까지 시인은 주로 「그들」의 행동과 상태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는 「우리」라고 말합니다.
우리 눈은 여전히 우리를 위한 도움을 헛되이 바라다가 지쳐 갔다. 우리는 망보며 지켜보았다, 구해 주지 못할 민족을.예레미야애가 4:17 · 본디새김
성벽과 망대에서 먼 곳을 살피던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어디선가 군대가 나타나 자신들을 구해 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 민족이 누구인지는 본문에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예레미야 시대의 역사적 상황을 생각하면 이집트가 중요한 후보가 됩니다. 예레미야 37:5–10에는 이집트 군대가 움직이자 바벨론 군대가 잠시 예루살렘에서 물러나는 장면이 나오지만, 예레미야는 그 일로 예루살렘이 구원받으리라고 기대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따라서 17절은 이집트에 대한 기대와 연결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만으로 특정 국가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시인은 그 결과를 「눈이 지쳐 갔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외교적 판단을 잘못했다는 말보다 강합니다. 마지막 희망을 걸고 계속 바라보았지만 아무것도 오지 않는 시간을 묘사합니다.
자기 거리조차 걸을 수 없게 된 사람들
18절에서는 그 기다림이 얼마나 절박한 상황에서 이루어졌는지 드러납니다.
그들이 우리의 발걸음을 사냥하여 우리는 우리 광장들을 걸을 수 없었다. 우리의 끝이 가까워졌고, 우리의 날들이 다 찼다. 우리의 끝이 왔기 때문이다.예레미야애가 4:18 · 본디새김
광장은 본래 사람들이 오가고 만나며 일상생활을 하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공간에서도 누군가 그들의 발걸음을 노리고 있습니다. 원수들은 단지 도시를 공격하는 군대가 아니라 사람들을 먹잇감처럼 뒤쫓는 사냥꾼으로 묘사됩니다.
우리를 뒤쫓는 자들은 하늘의 독수리들보다 빨랐다. 그들은 산 위에서 우리를 바짝 뒤쫓았고, 광야에서는 우리를 노리며 숨어 기다렸다.예레미야애가 4:19 · 본디새김
도시에서 벗어나면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마저 무너집니다.
그리고 20절에서 시인은 이 추격이 가져온 결정적인 사건을 말합니다.
우리 콧구멍의 숨결인 여호와야훼의 기름 부음 받은 이가 그들의 함정들에 붙잡혔다. 우리는 그를 두고 말했다. 「그의 그늘 아래서 우리는 민족들 가운데 살아갈 것이다.」예레미야애가 4:20 · 본디새김
여기서 「여호와야훼의 기름 부음 받은 이」는 왕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숨결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왕은 단순한 행정 지도자나 군사 지휘관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생존과 국가의 지속을 보장해 줄 인물로 여겨졌습니다.
그늘은 뜨거운 햇빛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하는 공간입니다. 성경에서 보호하는 통치자를 그늘에 비유하는 표현은 에스겔 31:6과 같은 본문에서도 발견됩니다. 따라서 이 말은 왕의 보호 아래서 민족들 가운데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그들이 이미 「민족들 가운데」 살아갈 가능성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상황이 악화되어 다른 민족들 사이에서 살아가게 되더라도, 왕이 있다면 그 보호 아래 공동체의 삶을 이어 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대도 무너졌습니다.
밖에서는 구해 줄 민족을 기다렸습니다. 안에서는 왕의 보호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외국의 원조도 오지 않았고, 왕도 붙잡혔습니다.
예루살렘이 의지하던 마지막 정치적 보호 장치들이 차례로 무너졌습니다.
왕이 「여호와야훼의 기름 부음 받은 이」였다는 사실은 그 충격을 더욱 크게 만듭니다. 그가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할 왕으로 세워졌다는 신앙적 의미를 지닌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기름 부음 받은 왕이라는 지위가 패배와 포로 생활로부터 그를 반드시 보호해 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제 시는 마지막 두 절에서 시선을 전혀 다른 민족에게 돌립니다.
조금 더 깊이
19절의 독수리 이미지는 신명기 28:49와도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는 여호와야훼가 멀리서 한 민족을 독수리처럼 빠르게 오게 하실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예레미야애가는 그런 신속한 추격을 실제로 겪는 사람의 목소리로 묘사합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기름 부음의 의식을 통해 왕으로 세워질 수 있었고, 사무엘상 24:6에서도 다윗은 사울을 여호와야훼의 기름 부음 받은 자라고 부릅니다. 이 구절에서 그 왕이 누구인지는 이름으로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멸망의 역사적 문맥에서는 시드기야를 떠올리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열왕기하 25:4–7에 따르면 그는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도망쳤다가 붙잡혔습니다. 그러나 요시야를 비롯한 다른 왕을 연결하는 읽기도 있어, 이 표현만으로 특정 왕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에돔에게도 잔이 넘어갈 것이다
21절의 첫 문장은 갑작스럽습니다.
「우스 땅에 사는 에돔의 딸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네게도 잔이 넘어갈 것이다. 너는 취하여 알몸을 드러낼 것이다.」예레미야애가 4:21 · 본디새김
그런데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는 말은 진심 어린 축복이 아닙니다.
에돔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기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이 오래가지 않으리라는 경고입니다.
에돔은 이스라엘의 남동쪽에 자리한 민족으로, 구약의 족보 전통에서는 에서의 후손으로 소개됩니다(창세기 36:1, 8–9). 야곱과 에서는 형제였으므로, 이스라엘과 에돔의 관계에는 친족이라는 기억도 담겨 있습니다.
오바댜 1:10–14는 에돔이 야곱의 자손에게 폭력을 행하고, 예루살렘의 재앙을 보고 기뻐했으며, 달아나는 사람들을 막아선 일을 책망합니다. 시편 137:7 역시 예루살렘이 무너지던 날 에돔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헐라고 외쳤던 일을 기억해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구약 예언서에서 잔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25:15–29에서는 여호와야훼가 여러 민족에게 분노의 잔을 마시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목록에는 유다뿐 아니라 에돔도 포함됩니다(25:21).
이러한 배경에서 예레미야애가 4:21의 잔은 에돔에게도 하나님의 심판이 닥칠 것이라는 선언으로 읽힙니다. 잔을 마신 사람은 취하게 되고, 몸을 제대로 가누거나 자신의 수치를 감출 수 없게 됩니다. 「알몸을 드러낼 것이다」라는 표현은 심판으로 인한 수치와 무력함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이 유다를 심판하셨다고 해서 유다를 공격하고 그 재앙을 기뻐한 다른 민족들의 악행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루살렘의 죄악이 심판을 불러왔다면, 에돔의 죄악도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수 없습니다.
시온의 형벌은 끝났고, 에돔의 죄악은 드러난다
22절은 두 도성을 정면으로 대비합니다.
「시온의 딸아, 네 죄의 벌이 끝났다. 그는 너를 다시 유배 보내지 않을 것이다. 에돔의 딸아, 그가 네 죄악을 벌할 것이다. 네 죄들을 드러낼 것이다.」예레미야애가 4:22 · 본디새김
이 장의 앞부분에서는 여전히 굶주림과 파괴, 추격과 포로 생활이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마지막 두 절에 이르러도 도성이 재건되었다거나 백성들이 귀환했다는 장면은 없습니다.
따라서 「네 죄의 벌이 끝났다」는 말을 모든 고난이 실제로 종료되었다는 역사적 보고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시인은 멸망을 겪은 자리에서 시온의 심판에 끝이 있으며 다시 유배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는 회복을 향한 강한 신학적 확언이지만, 그 회복의 과정이나 시점을 이 구절만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에돔의 죄를 드러낸다는 말은 단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공개한다는 의미에 그치지 않습니다. 앞서 잔을 마시고 알몸을 드러내게 된다는 수치의 이미지와도 연결됩니다.
예루살렘은 심판을 피하지 못했지만, 그 심판이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 선언되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에돔은 지금 기뻐하고 있지만, 그 기쁨이 하나님의 판단에서 자신을 보호해 주지는 못합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에서 에돔은 「우스 땅에 사는」 존재로 불립니다. 우스의 정확한 지리적 범위를 여기서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예레미야 25:20–21에서는 우스와 에돔이 가까운 문맥에 등장합니다.
무엇이 무너졌고, 무엇이 끝나지 않았는가
예레미야애가 4장은 겉으로 드러난 영광과 실제로 사람을 지탱하는 것 사이의 간격을 보여 줍니다.
공동체의 위기를 판단할 때 건물과 제도의 손실만을 바라보면, 시인이 가장 길게 묘사한 사람들의 고통을 놓칠 수 있습니다. 또한 공동체의 지도자가 종교적 권위를 지녔다는 이유만으로 그 행동을 비판할 수 없다고 여기는 태도 역시 13–16절의 고발과 충돌합니다. 본문이 묻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과거를 가졌는가가 아니라, 그 공동체 안에서 사람의 생명이 어떻게 취급되었는가 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처음에 순금처럼 귀하다고 불렸던 사람들이 정작 굶주림과 폭력 속에서 버려졌다는 사실이 그 질문을 선명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는 에돔이 기뻐하고 있습니다.
에돔은 자신이 승리한 쪽에 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시인의 눈에는 아직 끝나지 않은 일이 있습니다.
시온의 죄가 드러나고 심판받았듯이, 에돔의 죄도 하나님 앞에 드러나야 합니다.
거룩한 돌들이 거리에 쏟아질 만큼 철저하게 무너진 도성에서도, 시인은 그 도성을 짓밟고 기뻐한 자들의 죄악이 끝내 감추어지지는 않으리라고 선언합니다.
금은 빛을 잃었고, 왕은 붙잡혔으며, 아이들의 굶주림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절에서 시인은 에돔에게 넘어갈 잔을 가리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기뻐하는 소리가 들리는 그 자리에서, 이제 그 기쁨을 심판할 날이 선언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