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애가 풀어 읽기 · 4장

이 장의 자리 · 4장 · 빛을 잃은 시온

순금처럼 귀하던 사람들이 흙 항아리가 된 날

예레미야애가 4장은 무너진 성벽이나 불타는 성전이 아니라, 빛을 잃어버린 금을 보여 주며 시작합니다.

읽는 시간 19분소단락 84장 본문 읽기 →

금의 빛이 사라졌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예레미야애가 4:1–2 본문 →

어쩌다 금이 빛을 잃고 좋은 금이 변해 버렸습니까! 거룩한 돌들이 거리 어귀마다 흩어져 있습니다.예레미야애가 4:1 · 두루새김

첫 번째 질문은 물질의 변화에 관한 것처럼 보이지만, 다음 절을 읽으면 시인이 정말 말하려는 것이 드러납니다.

순금만큼 귀하게 여기던 시온의 아들들이 어쩌다 그릇을 빚는 사람이 만든 흔한 흙 항아리처럼 여겨지게 되었습니까!예레미야애가 4:2 · 두루새김

시인은 금과 돌의 이야기를 하다가 곧바로 사람의 이야기로 옮겨 갑니다.

금은 아무 데나 버려지는 물건이 아닙니다. 반면 흙 항아리는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물건이고, 깨지면 버리기 쉽습니다. 시인은 그 차이를 이용하여 예루살렘 사람들이 겪은 지위와 존엄의 추락을 보여 줍니다.

본문은 시온의 아들들이 정말 하찮은 존재가 되었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흙 항아리처럼 여겨지는 현실을 탄식합니다.

1절의 「거룩한 돌들」은 성소에 속한 실제 돌들을 가리킬 수도 있고, 이어지는 시온의 아들들을 돌에 빗댄 표현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성전이 파괴된 상황을 생각하면 전자가 자연스럽고, 2절과 나란히 놓인 모습을 살피면 후자의 의미도 떠오릅니다. 이 둘을 반드시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거룩한 장소가 무너지고 그곳에 속한 사람들이 흩어지는 모습이 서로를 비춥니다.

이 장은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를 따라 각 절이 시작되는 22절의 탄식시입니다. 금과 흙 항아리, 젖을 먹이는 짐승과 굶주린 아이, 맛있는 음식과 쓰레기 더미, 아름답게 빛나던 몸과 마른 나무처럼 된 몸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이 대비들은 모두 하나의 물음으로 이어집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지탱하던 질서가 무너지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자칼도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데

예레미야애가 4:3–6 본문 →

3절은 갑자기 동물의 세계로 시선을 옮깁니다.

자칼도 제 새끼에게 젖을 물려 먹입니다. 그런데 내 백성은 광야의 타조처럼 잔인해졌습니다.예레미야애가 4:3 · 두루새김

구약의 시적 표현에서 타조는 자기 새끼를 제대로 돌보지 않는 동물의 이미지로 사용됩니다. 욥기 39:13–17에도 타조가 알을 땅에 남겨 두고 자기 새끼에게 무정한 것처럼 행동하는 묘사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어머니들의 성품이 본래 잔인해졌다는 비난으로만 읽으면 다음 절을 놓치게 됩니다.

젖먹이는 목이 말라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빵을 달라고 해도 떼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예레미야애가 4:4 · 두루새김

아이들이 굶주리는 이유는 그들을 돌보아야 할 사람들이 단순히 돌보기 싫어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도시 전체에서 먹을 것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의도적으로 아이를 먹이고 돌보는 가장 기본적인 관계가 무너진 모습을 보여 줍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먹을 것을 주고, 어린아이가 부모의 돌봄 아래 살아가는 일은 인간 공동체를 지탱하는 가장 일상적인 질서입니다.

그런데 전쟁과 포위는 그 질서마저 파괴했습니다.

진홍빛 천에서 쓰레기 더미로

맛있는 음식을 먹던 이들이 거리에서 처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진홍빛 천 위에서 자라던 이들이 쓰레기 더미를 끌어안습니다.예레미야애가 4:5 · 두루새김

「진홍빛 천」은 값비싼 옷감과 풍요로운 생활을 떠올리게 합니다. 과거에는 좋은 천으로 몸을 감쌌지만, 이제는 쓰레기 더미를 끌어안고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몸을 의지할 수 있는 환경 자체가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6절에서 시인은 예루살렘의 재앙을 소돔에 비교합니다.

내 백성이 받은 죄의 벌은 소돔이 받은 벌보다 컸습니다. 소돔은 사람의 손에 공격당하지도 않고 한순간에 무너졌습니다.예레미야애가 4:6 · 두루새김

창세기 19:24–29에서 소돔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갑자기 멸망합니다. 예레미야애가 4장은 그 사건을 예루살렘의 멸망과 비교합니다.

소돔은 한순간에 무너졌습니다. 반면 예루살렘은 포위와 굶주림 속에서 사람들이 서서히 죽어 갔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이었는지 시인은 다음 세 절에서 인간의 몸을 통해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시인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소돔 사람들보다 반드시 더 악했다는 식으로 그들의 죄를 상세하게 비교하지 않습니다. 두루새김은 「내 백성이 받은 죄의 벌」로 옮겨, 바로 뒤에 이어지는 재앙의 모습과 자연스럽게 연결합니다. 두루새김의 「사람의 손에 공격당하지도 않고」에 해당하는 원문 표현은 정확한 의미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두루새김은 소돔의 파괴에 인간의 손이 직접 개입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옮겼습니다. 재앙을 오래 견디거나 그 과정에 손을 쓸 여지조차 없었다는 의미와 연결해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빛나던 몸이 알아볼 수 없게 되다

예레미야애가 4:7–10 본문 →

7절은 매우 아름다운 표현들로 가득합니다.

시온의 나실인들은 눈보다 맑고 우유보다 희었습니다. 몸은 산호보다 붉었고 모습은 사파이어 같았습니다.예레미야애가 4:7 · 두루새김

여기서 시인은 사람의 모습을 값비싸고 아름다운 것들에 견줍니다. 맑고 밝은 빛, 건강하게 붉은 몸, 잘 다듬어진 보석처럼 빛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여기서는 종교적인 나실인들인지, 도성의 귀한 신분에 있던 사람들인지 해석이 갈립니다. 어느 쪽이든 8절과의 대조는 분명합니다.

이제는 모습이 새까맣게 변해 거리에서 보아도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습니다. 살갗은 뼈에 달라붙어 나무처럼 바싹 말랐습니다.예레미야애가 4:8 · 두루새김

굶주림과 몸의 수분 부족으로 인해 몸이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를 묘사합니다. 같은 거리에 살던 사람들, 서로의 모습을 알고 있던 사람들이 이제는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변해 버린 것입니다.

칼에 죽은 사람들이 굶어 죽은 사람들보다 나았습니다. 굶주린 이들은 밭에서 거둘 것이 없어, 칼에 찔린 듯 기운이 빠지며 죽어 갔기 때문입니다.예레미야애가 4:9 · 두루새김

칼에 맞아 죽는 것은 끔찍하지만, 굶주림으로 죽어 가는 일은 오랜 시간에 걸쳐 사람의 몸을 소모시킵니다. 밭에서 나오는 곡식과 열매가 사라지자 사람들은 조금씩 생명력을 잃습니다.

「칼에 찔린 듯 기운이 빠지며 죽어 갔기 때문입니다」라는 표현은 굶주림을 단순히 배가 고픈 상태로 말하지 않습니다. 마치 무기에 찔리는 것처럼 몸속에서 생명이 소진되는 고통을 묘사합니다.

이 대조는 전쟁의 폭력이 반드시 칼과 화살을 통해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먹을 것을 빼앗긴 상태에서도 사람은 죽어 갑니다.

그리고 10절은 그 굶주림의 가장 끔찍한 결과를 말합니다.

인정 많던 여자들이 제 손으로 자기 아이들을 삶았습니다. 내 백성이 무너져 내릴 때 그 아이들은 어머니들의 먹을 것이 되었습니다.예레미야애가 4:10 · 두루새김

시인은 그들을 본래 잔인한 사람들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인정이 많고 사랑을 베풀던 여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거나 참혹함을 줄이려는 표현이 아닙니다. 오히려 본래 자녀를 돌보고 아끼던 사람들이 극심한 굶주림 속에서 얼마나 끔찍한 상태에 내몰렸는지를 드러내는 대조입니다.

3절에서는 짐승들도 제 새끼에게 젖을 먹이지만 예루살렘은 그렇지 못하다고 했습니다. 10절에서는 그 비극이 극단에 이릅니다.

아이를 먹이고 돌보는 관계가 거꾸로 뒤집혔습니다.

시인은 이제 이 참상을 누구의 책임과 연결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조금 더 깊이

「나실인들」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네지레하(⁨נָזִיר⁩)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 특별히 구별되어 헌신한 나실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민수기 6:1–21에 나오는 나실인 규정이 그 배경입니다. 그러나 같은 어근은 구별되거나 특별한 지위에 있는 사람을 나타내는 데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창세기 49:26과 신명기 33:16에서 요셉을 형제들 가운데 특별히 구별된 사람으로 부르는 표현이 그 예입니다. 신명기 28:53–57에는 포위와 굶주림이 극단에 이르면 부모와 자녀의 관계마저 파괴될 것이라는 언약의 경고가 나옵니다. 예레미야애가 4:10은 바로 그런 재앙이 일어난 것으로 탄식합니다.

아무도 함락을 믿지 않았던 도성

예레미야애가 4:11–12 본문 →

11절에서 시인은 예루살렘의 재앙을 다시 하나님의 행동으로 설명합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분노를 남김없이 터뜨리고 타오르는 분노를 쏟으셨습니다. 시온에 불을 지르셨고 그 불은 시온의 기초까지 삼켰습니다.예레미야애가 4:11 · 두루새김

집의 기초는 건물을 지탱하는 부분입니다. 기초가 무너진다는 것은 땅 위에 보이는 부분이 파괴된 것보다 더 근본적인 붕괴를 뜻합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의 파괴가 얼마나 철저했는지를 나타내는 시적 이미지입니다.

세상의 왕들과 땅 위의 모든 사람은 적과 원수가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리라고 믿지 않았습니다.예레미야애가 4:12 · 두루새김

여기서 「세상의 왕들」과 「땅 위의 모든 사람」을 당시 세계의 모든 사람이 실제로 예루살렘의 군사적 안전을 확신했다는 역사적 통계처럼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는 예루살렘의 함락이 얼마나 충격적인 일이었는지를 강조하는 시적 과장입니다.

예루살렘은 다윗 왕조의 도성이었고, 여호와야훼의 성전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특히 히스기야 시대에는 아시리아 군대의 위협 속에서도 도성이 보존된 경험이 있었습니다(열왕기하 19:32–36). 그런 기억은 예루살렘에 대한 특별한 확신을 강화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오래전부터 성전의 존재를 안전의 보증으로 삼는 태도를 비판했습니다(예레미야 7:4–15).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다는 사실이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을 덮어 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원수가 성문으로 들어왔습니다.

성문은 도시를 지키는 방어 체계의 일부이자 안팎을 구분하는 경계였습니다. 원수가 그 문으로 들어왔다는 것은 예루살렘이 자신을 보호할 능력을 잃었다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의 성문을 무너뜨린 원인을 이야기하면서 시인은 성 밖의 적군보다 성 안의 종교 지도자들을 먼저 지목합니다.

성읍을 지켜야 할 사람들이 그 안에서 피를 흘렸다

예레미야애가 4:13–16 본문 →

13절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에 대한 직접적인 고발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예루살렘의 예언자들이 지은 죄와 제사장들의 죄 때문입니다. 그들은 성안에서 바르게 살던 사람들을 죽였습니다.예레미야애가 4:13 · 두루새김

예언자와 제사장은 본래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를 바르게 세우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야 하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들이 정반대의 행동을 한 것으로 고발됩니다.

예루살렘은 거룩한 성전이 있는 도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도성 한가운데서 바르게 살던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도성의 거룩함을 지켜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그 도성을 더럽혔습니다.

이런 고발은 예레미야서에서도 발견됩니다. 예레미야 26:7–11에서는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했고, 26:20–23에서는 예언자 우리야가 왕의 명령으로 죽임을 당합니다. 예레미야 22:3은 죄 없는 사람의 피를 흘리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예레미야애가 4:13이 정확히 어느 사건이나 희생자를 가리키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종교적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 바르게 살던 이들을 해치는 일이 예루살렘의 중대한 죄였다고 말합니다.

부정함을 경고하던 이들이 부정한 자로 쫓겨나다

그들은 눈먼 사람처럼 거리에서 비틀거렸습니다. 피에 더럽혀져 아무도 그들의 옷에 손댈 수 없었습니다.예레미야애가 4:14 · 두루새김

그들은 백성에게 올바른 길을 보여 주어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자기들도 제대로 길을 찾지 못합니다. 또한 피에 더럽혀져 있다는 말은 앞절에서 바르게 살던 사람들을 죽였다는 고발과 연결됩니다.

사람들이 그들에게 외쳤습니다. 「물러가라! 더럽다! 물러가라, 물러가라! 손대지 마라!」 그들이 달아나 떠돌자 다른 민족들 사이에서도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그들은 더는 이곳에 머물러 살 수 없다.」예레미야애가 4:15 · 두루새김

이 장면은 레위기 13:45–46에 나오는 부정함과 격리의 언어를 떠올리게 합니다. 정결 규정에 따르면 부정하다고 판정된 사람은 자신의 상태를 알리고 공동체와 구별되어야 했습니다.

제사장들은 정결과 부정을 분별하고 가르쳐야 하는 직무를 담당했습니다(레위기 10:10–11). 그러나 이제는 사람들이 그들을 향해 「더럽다」고 외칩니다.

거룩함을 분별해야 할 사람들이 자신들의 행위 때문에 부정한 자로 취급받는 것입니다.

여호와야훼께서 그들을 흩어 놓으셨고 더는 돌아보지 않으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제사장들을 존중하지 않았고, 백성을 이끄는 어른들도 불쌍히 여기지 않았습니다.예레미야애가 4:16 · 두루새김

위로는 하나님의 호의를 잃고, 아래로는 사람들의 존중을 잃습니다.

다만 이것을 모든 제사장과 예언자가 똑같이 죄 없는 사람의 피를 흘렸다는 주장으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은 예루살렘을 죄로 이끈 지도층의 책임을 강하게 고발하고 있지만, 개별 인물의 죄를 모두 판단하는 기록은 아닙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외부의 군사적 공격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공동체의 도덕적·종교적 질서가 안에서부터 무너진 현실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14절의 원문 표현은 그들이 실제로 시력을 잃었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문맥에서는 방향을 잃고 비틀거리는 모습을 나타내는 비유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들의 옷에 손을 댈 수 없다는 원문 표현은 문법적으로 누구를 주어로 삼느냐에 따라 다르게 읽을 여지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옷에 닿을 수 없었다는 뜻일 수도 있고, 그들 자신이 옷을 만질 수 없었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아무도 그들의 옷에 손댈 수 없었습니다」로 옮겨 첫 번째 방향을 따릅니다. 이 경우 다음 절의 외침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구해 주지 못할 민족을 기다리던 눈

예레미야애가 4:17–20 본문 →

17절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바뀝니다.

지금까지 시인은 주로 「그들」의 행동과 상태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는 「우리」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눈이 지치도록 도움을 기다렸지만 헛일이었습니다. 망을 보며 기다린 나라는 우리를 구해 주지 못할 나라였습니다.예레미야애가 4:17 · 두루새김

성벽과 망대에서 먼 곳을 살피던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어디선가 군대가 나타나 자신들을 구해 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시인은 그 기다림을 「눈이 지치도록」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외교적 판단을 잘못했다는 말보다 강합니다. 마지막 희망을 걸고 계속 바라보았지만 아무것도 오지 않는 시간을 묘사합니다.

자기 거리조차 걸을 수 없게 된 사람들

적들이 우리의 발걸음을 노려 우리는 거리도 걸어 다닐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끝이 가까워졌고 우리의 날들이 다했습니다. 참으로 우리의 끝이 왔습니다.예레미야애가 4:18 · 두루새김

거리는 본래 사람들이 오가고 만나며 일상생활을 하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공간에서도 누군가 그들의 발걸음을 노리고 있습니다.

원수들은 단지 도시를 공격하는 군대가 아니라 사람들을 먹잇감처럼 뒤쫓는 사냥꾼으로 묘사됩니다.

우리를 뒤쫓는 자들은 하늘의 독수리보다 빨랐습니다. 산에서 우리를 바짝 뒤쫓았고, 광야에서는 우리를 노리며 숨어 기다렸습니다.예레미야애가 4:19 · 두루새김

도시에서 벗어나면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마저 무너집니다.

우리의 숨결과도 같던 여호와야훼의 기름 부음 받은 이가 그들의 함정에 붙잡혔습니다. 전에 우리는 그를 두고 말했습니다. 「그의 그늘 아래서 우리는 여러 민족 사이에 살아갈 것이다.」예레미야애가 4:20 · 두루새김

여기서 「여호와야훼의 기름 부음 받은 이」는 왕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 구절에서 그 왕이 누구인지는 이름으로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숨결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왕은 단순한 행정 지도자나 군사 지휘관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생존과 나라의 지속을 보장해 줄 인물로 여겨졌습니다.

그늘은 뜨거운 햇빛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하는 공간입니다. 성경에서 보호하는 통치자를 그늘에 비유하는 표현은 에스겔 31:6과 같은 본문에서도 발견됩니다. 따라서 이 말은 왕의 보호 아래서 여러 민족 사이에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반드시 예루살렘 안에서 영원히 안전하게 살 수 있으리라는 기대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상황이 악화되어 다른 민족들 사이에서 살아가게 되더라도, 왕이 있다면 그 보호 아래 공동체의 삶을 이어 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대도 무너졌습니다.

밖에서는 구해 줄 나라를 기다렸습니다. 안에서는 왕의 보호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외국의 도움도 오지 않았고, 왕도 붙잡혔습니다.

예루살렘이 의지하던 마지막 정치적 보호 장치들이 차례로 무너졌습니다.

조금 더 깊이

17절에서 기다린 나라가 어디인지는 본문에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예레미야 시대의 역사적 상황을 생각하면 이집트가 중요한 후보가 됩니다. 예레미야 37:5–10에는 이집트 군대가 움직이자 바벨론 군대가 잠시 예루살렘에서 물러나는 장면이 나오지만, 예레미야는 그 일로 예루살렘이 구원받으리라고 기대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러나 본문만으로 특정 국가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두루새김의 「노려」에 해당하는 원문에(⁨צוּד⁩)는 사냥을 뜻하는 말이 사용된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19절의 독수리 이미지는 신명기 28:49와도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는 여호와야훼가 멀리서 한 민족을 독수리처럼 빠르게 오게 하실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기름 부음의 의식을 통해 왕으로 세워질 수 있었고, 사무엘상 24:6에서도 다윗은 사울을 여호와야훼의 기름 부음 받은 자라고 부릅니다. 예루살렘 멸망의 역사적 문맥에서는 시드기야를 떠올리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열왕기하 25:4–7에 따르면 그는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도망쳤다가 붙잡혔습니다. 그러나 요시야를 비롯한 다른 왕을 연결하는 읽기도 있어, 이 표현만으로 특정 왕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에돔에게도 잔이 넘어갈 것이다

예레미야애가 4:21–22 본문 →

21절의 첫 문장은 갑작스럽습니다.

우스 땅에 사는 딸 에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네게도 잔이 돌아갈 것이다. 너도 취해 알몸을 드러낼 것이다.예레미야애가 4:21 · 두루새김

에돔은 이스라엘의 남동쪽에 자리한 민족으로, 구약의 족보 전통에서는 에서의 후손으로 소개됩니다(창세기 36:1, 8–9). 야곱과 에서는 형제였으므로, 이스라엘과 에돔의 관계에는 친족이라는 기억도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이 무너진 일을 둘러싸고 에돔은 특별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오바댜 1:10–14는 에돔이 야곱의 자손에게 폭력을 행하고, 예루살렘의 재앙을 보고 기뻐했으며, 달아나는 사람들을 막아선 일을 책망합니다. 시편 137:7 역시 예루살렘이 무너지던 날 에돔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헐라고 외쳤던 일을 기억해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그런데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는 말은 진심 어린 축복이 아닙니다.

에돔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기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이 오래가지 않으리라는 경고입니다.

구약 예언서에서 잔은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25:15–29에서는 여호와야훼가 여러 민족에게 분노의 잔을 마시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목록에는 유다뿐 아니라 에돔도 포함됩니다(25:21).

잔을 마신 사람은 취하게 되고, 몸을 제대로 가누거나 자신의 수치를 감출 수 없게 됩니다. 「알몸을 드러낼 것이다」라는 표현은 심판으로 인한 수치와 무력함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이 유다를 심판하셨다고 해서 유다를 공격하고 그 재앙을 기뻐한 다른 민족들의 악행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시온의 형벌은 끝났고, 에돔의 죄악은 드러난다

딸 시온아, 네 죄의 벌이 끝났다. 여호와야훼께서는 너를 다시 다른 나라로 끌려가게 하지 않으실 것이다. 딸 에돔아, 그분께서 네 죄를 벌하시고 네 죄를 드러내실 것이다.예레미야애가 4:22 · 두루새김

이 장의 앞부분에서는 여전히 굶주림과 파괴, 추격과 포로 생활이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마지막 두 절에 이르러도 도성이 재건되었다거나 백성들이 돌아왔다는 장면은 없습니다.

따라서 「네 죄의 벌이 끝났다」는 말을 모든 고난이 실제로 종료되었다는 역사적 보고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시인은 멸망을 겪은 자리에서 시온의 심판에 끝이 있으며 다시 다른 나라로 끌려가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는 회복을 향한 강한 신학적 확언이지만, 그 회복의 과정이나 시점을 이 구절만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에돔의 죄를 드러낸다는 말은 단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공개한다는 의미에 그치지 않습니다. 앞서 잔을 마시고 알몸을 드러내게 된다는 수치의 이미지와도 연결됩니다.

예루살렘은 심판을 피하지 못했지만, 그 심판이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 선언되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에돔은 지금 기뻐하고 있지만, 그 기쁨이 하나님의 판단에서 자신을 보호해 주지는 못합니다.

무엇이 무너졌고, 무엇이 끝나지 않았는가

예레미야애가 4:1–22 본문 →

이 장에서 가장 끔찍한 것은 단순히 사람들이 죽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생명을 돌보기 위해 존재하던 관계들까지 죽음의 구조 안에 갇혀 버렸다는 것입니다. 본문이 묻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과거를 가졌는가가 아니라, 그 공동체 안에서 사람의 생명이 어떻게 취급되었는가 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처음에 순금만큼 귀하다고 불렸던 사람들이 정작 굶주림과 폭력 속에서 버려졌다는 사실이 그 질문을 선명하게 만듭니다.

공동체의 위기를 판단할 때 건물과 제도의 손실만을 바라보면, 시인이 가장 길게 묘사한 사람들의 고통을 놓칠 수 있습니다. 또한 공동체의 지도자가 종교적 권위를 지녔다는 이유만으로 그 행동을 비판할 수 없다고 여기는 태도 역시 13–16절의 고발과 충돌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는 에돔이 기뻐하고 있습니다.

에돔은 자신이 승리한 쪽에 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시인의 눈에는 아직 끝나지 않은 일이 있습니다.

거룩한 돌들이 거리에 흩어질 만큼 철저하게 무너진 도성에서도, 시인은 그 도성을 짓밟고 기뻐한 자들의 죄가 끝내 감추어지지는 않으리라고 선언합니다.

금은 빛을 잃었고, 왕은 붙잡혔으며, 아이들의 굶주림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절에서 시인은 에돔에게 돌아갈 잔을 가리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기뻐하는 소리가 들리는 그 자리에서, 이제 그 기쁨을 심판할 날이 선언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