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애가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3장 · 고통 속의 소망

희망이 사라진 자리에서 다시 기다리기

예레미야애가 3장에는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문장이 나옵니다.

「내 버틸 힘이 사라졌다. 여호와야훼에게서 바라던 내 희망도 사라졌다.」 그런데 불과 몇 절 뒤에 같은 사람이 말합니다. 「여호와야훼는 내 몫이다. 그러기에 나는 그를 기다리겠다.」

그 사이에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그를 괴롭히던 원수들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무너진 예루살렘이 다시 세워진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모든 고통을 끝내겠다고 약속하신 장면도 없습니다.

3장의 희망은 고통이 끝난 뒤에 얻은 확신이 아니라, 고통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하나님을 기다리기로 하는 변화입니다.

앞의 두 장은 히브리어 알파벳의 22개 글자를 차례로 사용해 22절로 구성되었지만, 3장은 각 글자로 세 절씩 시작하여 모두 66절로 이루어집니다. 첫 세 절은 알레프, 다음 세 절은 베트로 시작하는 식입니다. 고통과 희망, 성찰과 기도가 세 절씩 묶여 이어집니다.

내용은 한 사람의 고난에서 출발하여 공동체의 회개로 넓어지고, 다시 한 사람의 기도와 송사로 돌아옵니다.

처음에는 「나는」이라고 말합니다. 22절에서는 「우리가」라고 고백하고, 40절에서는 「우리의 길들을 살피고 따져 보자」고 권합니다. 그러다 48절부터 다시 자신의 눈물과 고통을 이야기합니다.

첫 절의 「고난을 겪은 남자」가 정확히 누구인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가 겪었던 박해와 닮은 점들이 있지만, 이 장은 화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예언자의 경험을 떠올리게 하는 개인적 탄식으로 읽을 수도 있고, 공동체의 고난을 한 사람의 목소리로 표현한 것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직접 상처를 입은 사람의 목소리로 말합니다.

읽는 시간 26분소단락 103장 본문 읽기 →

하나님이 길을 막고 기도까지 막으셨다

예레미야애가 3:1–9 본문 →

첫 절에서 화자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나는 그의 격분의 막대기로 말미암아 고난을 겪은 남자다.예레미야애가 3:1 · 본디새김

여기서 막대기는 때리거나 징계하는 도구입니다. 앞서 시온을 향해 쏟아졌던 하나님의 분노가 이제 한 사람의 몸에 닥친 것처럼 묘사됩니다.

그런데 처음 아홉 절에서 더욱 두드러지는 것은 그가 아무 데도 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2절에서 하나님은 그를 빛이 아니라 어둠 속으로 걸어가게 하셨습니다. 5절에서는 담을 쌓아 그를 에워싸셨고, 7절에서는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가두셨습니다. 9절에서는 다듬은 돌로 길을 막으시고 그가 다니는 길들을 뒤틀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어디론가 이끄시는 듯하지만, 그가 경험하는 것은 인도가 아니라 방향을 잃은 상태입니다. 특히 7절의 청동 족쇄는 그 고립을 더욱 무겁게 만듭니다. 실제 감옥에 갇힌 경험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이지만, 반드시 특정한 투옥 사건을 기록한 것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화자는 자신의 삶 전체가 감옥처럼 되었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8절에서는 한 가지 통로마저 막힙니다.

내가 소리치며 도움을 청해도 그는 내 기도를 막아 버렸다.예레미야애가 3:8 · 본디새김

사람이 모든 길에서 막혔을 때에도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신앙에 깊이 자리 잡은 믿음이었습니다. 시편의 탄식들은 바로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이 멀리 계셔서 자신의 소리를 듣지 못하신다고 말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기도를 막으셨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실제로 모든 기도를 거절하신다는 일반적인 진술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는 화자가 겪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단절된 것처럼 느껴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에게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통은 단순히 빠져나갈 길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갈 길조차 막힌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피할 수 없는 공격, 잊어버린 평안

예레미야애가 3:10–18 본문 →

10절부터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하신 일을 묘사하는 이미지가 바뀝니다.

그는 나를 노리며 숨어 기다리는 곰이었고, 은신처에 숨은 사자였다.예레미야애가 3:10 · 본디새김

곰과 사자는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두려워하던 맹수입니다. 여기서는 숨어서 먹잇감을 기다리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화자는 하나님을 자신을 지키는 목자가 아니라, 자신을 사냥하는 맹수처럼 경험합니다.

12–13절에서는 그 이미지가 활을 쏘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그는 자기 활을 당기고, 나를 화살의 과녁으로 세웠다. 그는 자기 화살통의 화살들을 내 콩팥에 박아 넣었다.예레미야애가 3:12–13 · 본디새김

과녁이 되었다는 말은 그가 우연히 공격을 당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겨냥한 공격을 받는 것처럼 느낀다는 뜻입니다. 여기서는 화살이 몸속 깊은 곳까지 들어오는 이미지가 고통의 강도를 드러냅니다.

14절에서는 육체적인 고통에 사회적인 수치가 더해집니다.

나는 내 모든 백성에게 웃음거리가 되었고, 온종일 그들의 노랫거리가 되었다.예레미야애가 3:14 · 본디새김

원수들만 그를 조롱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리적으로 갇힌 사람에게는 함께 고통을 나눌 공동체가 필요하지만, 그는 그 공동체 안에서도 조롱을 당한다고 느낍니다.

15절에서는 쓴 것들과 쓴쑥이 등장합니다. 화자는 하나님이 자신을 고통으로 배불리셨다고 말합니다. 본래 먹고 마시는 일은 생명을 유지하고 만족을 얻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그가 실컷 받은 것은 쓴맛뿐입니다.

16절에서는 자갈이 이를 부수고, 재가 몸을 짓누릅니다. 이제 먹는 일조차 고통의 이미지가 됩니다.

내 삶은 평안에서 밀려났고, 나는 행복을 잊었다.예레미야애가 3:17 · 본디새김

그는 단순히 기분이 나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삶을 온전하게 만들던 것들이 사라졌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행복한 일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행복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잊어버렸다고 말합니다.

그의 고통은 현재의 괴로움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과거에 누렸던 좋은 것들을 기억하는 능력마저 흐리게 만듭니다.

그리고 마침내 1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말했다. 「내 버틸 힘이 사라졌다. 여호와야훼에게서 바라던 내 희망도 사라졌다.」예레미야애가 3:18 · 본디새김

그에게 희망의 근거였던 분이 이제 고통의 원인처럼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특히 콩팥은 몸속 깊은 곳에 있는 기관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콩팥은 인간의 깊은 내면과 연결되기도 합니다(시편 7:9; 예레미야 17:10). 쓴쑥은 성경에서 쓰라린 고난과 심판을 표현하는 데 사용됩니다(예레미야 9:15; 23:15).

기억이 사람을 가라앉히다가 다시 일으킨다

예레미야애가 3:19–24 본문 →

19절에서 화자는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제 고난과 떠돎을 기억해 주십시오, 쓴쑥과 독을.」예레미야애가 3:19 · 본디새김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고난을 기억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그 고통이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됩니다.

내 마음은 기억하고 또 기억하며, 내 안에서 가라앉는다.예레미야애가 3:20 · 본디새김

고난을 겪은 뒤에는 어떤 기억을 반복해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다시 무너질 수 있습니다. 지금 화자가 경험하는 기억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21절에서 갑자기 방향이 바뀝니다.

나는 이것을 내 마음에 되새긴다. 그러기에 나는 기다린다.예레미야애가 3:21 · 본디새김

기억하는 능력 자체가 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무엇을 마음에 되새기느냐가 달라집니다.

그가 새롭게 떠올리는 것은 22절부터 이어집니다.

여호와야훼의 자애로 우리가 끝장나지 않았다. 그의 연민이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예레미야애가 3:22 · 본디새김

화자는 모든 것이 회복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미 많은 것이 파괴되었고, 여전히 고통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승리의 고백이라기보다 파멸의 한가운데에서 발견한 남은 가능성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23절에서 시는 더욱 따뜻한 언어로 바뀝니다.

「그것들은 아침마다 새롭습니다. 당신의 신실함은 큽니다.」예레미야애가 3:23 · 본디새김

여기서 「그것들」은 앞서 언급한 하나님의 자애와 연민을 가리킵니다. 앞서 밤과 어둠, 갇힘과 고통이 이어졌던 문맥에서 보면, 날이 바뀌어도 하나님의 자비가 다하지 않는다는 고백입니다.

다만 이 구절을 매일 아침 고난이 반드시 끝난다는 약속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이 장의 나머지 부분에서도 화자의 고통은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그가 희망을 다시 발견하는 이유는 자신이 강해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신은 여전히 연약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애와 연민을 완전히 거두지 않으셨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24절에서 말합니다.

내 마음이 말했다. 「여호와야훼는 내 몫이다. 그러기에 나는 그를 기다리겠다.」예레미야애가 3:24 · 본디새김

지금 예루살렘 사람들은 땅과 집과 재산, 국가의 질서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화자는 그 모든 상실 속에서 여호와야훼 자신이 자신의 몫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기다리는 이유는 자신에게 아직 많은 것이 남아 있어서가 아니라, 모든 것을 잃은 뒤에도 여호와야훼를 자신의 몫이라고 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고백은 단숨에 절망을 지워 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절망이 마지막 말이 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의 「우리가 끝장나지 않았다」는 표현을 따라 읽으면 이 고백의 의미가 더욱 구체적입니다. 파괴된 공동체 가운데 여전히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자애를 생각하게 하는 근거가 됩니다. 한편 일부 번역은 첫 문장을 하나님의 자애 자체가 끝나지 않았다는 뜻으로 읽습니다. 두 읽기는 초점이 다르지만, 바로 이어지는 「그의 연민이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말과 함께 하나님의 자비가 고갈되지 않았다는 고백을 이룹니다. 이스라엘에서 「몫」은 자신에게 주어진 분깃이나 소유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약속의 땅에서 지파들이 기업을 나누어 받았던 전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반면 레위 사람들에게는 여호와야훼 자신이 그들의 몫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민수기 18:20; 신명기 10:9). 시편 73:26도 하나님이 영원한 몫이 되신다고 고백합니다.

기다림은 무엇을 하는 시간인가

예레미야애가 3:25–33 본문 →

25–27절은 매우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야훼는 그를 기다리는 이들에게 좋다, 그를 찾는 사람에게.예레미야애가 3:25 · 본디새김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 좋다, 여호와야훼의 구원을.예레미야애가 3:26 · 본디새김
남자가 젊은 시절에 멍에를 메는 것은 좋다.예레미야애가 3:27 · 본디새김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출발하여, 그분을 기다리는 태도와 고난을 감당하는 삶으로 설명이 옮겨 갑니다. 그는 모든 고통을 좋은 것으로 바꾸어 부르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기다리는 일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26절의 기다림은 「여호와야훼의 구원」을 향합니다. 자신이 구원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여호와야훼께서 구원하실 것을 기다리는 태도입니다.

멍에는 무거운 짐과 속박을 나타내는 이미지로 사용됩니다. 젊은 시절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다는 말은 고난을 감당하며 배워야 할 인내를 긍정하는 지혜의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모든 사람에게 고통이나 억압을 일부러 찾아가라는 명령으로 읽을 근거는 없습니다.

28–30절에서는 그 기다림이 더욱 구체적으로 그려집니다.

그에게 멍에를 지웠으니, 그는 홀로 앉아 잠잠히 있어야 한다.예레미야애가 3:28 · 본디새김
흙먼지에 입을 대야 한다. 어쩌면 희망이 있을지 모른다.예레미야애가 3:29 · 본디새김
자기를 때리는 이에게 뺨을 내어 주어야 한다. 치욕으로 배불러야 한다.예레미야애가 3:30 · 본디새김

이 구절들은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 스스로를 낮추고 견디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흙먼지에 입을 대는 행동은 자신을 극도로 낮추는 모습입니다. 뺨을 내어 주는 행위는 모욕과 폭력을 당하는 처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중요한 표현은 「어쩌면」입니다.

화자는 자기에게 반드시 희망이 올 것이라고 장담하지 않습니다. 이 말에는 아직 보지 못한 구원을 바라보는 조심스러운 기대가 담겨 있습니다.

또한 30절의 뺨을 내어 주라는 권고를 폭력을 당하는 사람이 언제나 저항하지 않고 학대를 감수해야 한다는 보편적인 명령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뒤의 34–36절에서 시인은 갇힌 사람을 짓밟고 재판을 그르치며 사람을 억울하게 하는 행위를 문제 삼습니다.

본문은 고난 속의 인내를 말하지만, 인간이 다른 사람을 억압할 권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어서 31–33절에서 기다림의 근거가 밝혀집니다.

주가 영원히 내버리지는 않기 때문이다.예레미야애가 3:31 · 본디새김
그가 슬프게 하더라도, 그의 풍성한 자애에 따라 불쌍히 여길 것이다.예레미야애가 3:32 · 본디새김
그가 사람들을 괴롭히고 슬프게 하는 것은 마음에서 우러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예레미야애가 3:33 · 본디새김

하나님은 실제로 슬프게 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괴롭히시고 슬프게 하시는 일이 하나님의 본래적인 즐거움이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직 구원을 보지 못하면서도 기다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일을 다스리신다면, 인간의 불의도 정당한가

예레미야애가 3:34–39 본문 →

34절부터는 화자의 시선이 자기 고난에서 다른 사람들의 억울한 처지로 옮겨 갑니다.

땅의 모든 갇힌 이들을 자기 발아래 짓밟는 일,예레미야애가 3:34 · 본디새김
가장 높은 이의 얼굴 앞에서 사람의 재판을 그르치는 일,예레미야애가 3:35 · 본디새김
송사에서 사람을 억울하게 하는 일을 주가 보지 않았겠는가?예레미야애가 3:36 · 본디새김

갇힌 사람을 발아래 짓밟는 것은 이미 자유를 잃은 사람에게 가하는 폭력입니다. 사람의 재판을 그르치는 것은 마땅히 보장되어야 할 정당한 판단을 빼앗는 일입니다. 송사에서 억울하게 한다는 것은 정의를 구하러 나온 사람에게조차 정의가 주어지지 않는 상황입니다.

재판이 그릇되게 이루어지는 곳도 하나님의 시선 밖에 있지 않습니다. 인간의 재판은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지는 일로 이해됩니다.

36절 마지막의 히브리어는 문자적으로 「주가 보지 않았다」는 형태입니다. 이를 수사적 질문으로 읽으면 본디새김처럼 「주가 보지 않았겠는가?」가 됩니다. 반면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좋게 여기거나 승인하지 않으신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두 읽기의 강조점은 다릅니다. 전자는 인간의 불의가 하나님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을, 후자는 하나님이 그런 불의를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점을 드러냅니다. 본문은 이 구절을 어느 한쪽으로 완전히 확정하도록 충분한 단서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에 더 어려운 질문이 나옵니다.

주가 명령하지 않았는데, 누가 말한 것이 이루어지겠는가?예레미야애가 3:37 · 본디새김
재앙들과 좋은 것이 가장 높은 이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예레미야애가 3:38 · 본디새김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모든 일을 다스리신다고 말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불의와 부당한 재판을 문제 삼습니다.

먼저 본문이 말하는 것은 예루살렘의 재앙이 하나님의 통치에서 벗어난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지 않으신 일이 그분의 뜻을 넘어 독립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하나님이 일어나도록 허용하시거나 심판의 과정에서 사용하신 모든 인간의 행동을 도덕적으로 승인하신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앞에서 짓밟힘과 재판의 왜곡이 언급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서에서도 이 두 측면은 함께 나타납니다. 여호와야훼는 바벨론을 통해 유다를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시면서도, 때가 이르면 바벨론의 죄악을 벌하시겠다고 하십니다(예레미야 25:8–14).

하나님이 역사를 다스리신다는 고백은 힘을 가진 사람이 저지르는 불의를 정당화하는 말이 아닙니다.

고난을 감당하며 하나님을 기다리는 일과, 다른 사람을 억압하고 재판을 그르치는 일은 같지 않습니다. 전자는 고난을 겪는 사람에게 제시된 태도이고, 후자는 하나님 앞에서 판단받아야 할 행동입니다.

39절에서는 다시 개인과 공동체의 책임으로 돌아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왜 불평하는가, 남자가 자기 죄들의 벌을 두고?예레미야애가 3:39 · 본디새김

이 구절만 따로 읽으면, 고통받는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생각하고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장 전체를 보면 화자는 이미 길고 격렬하게 자신의 고통을 호소했습니다. 이 구절 뒤에서도 계속 울고, 하나님께 질문하고, 자신이 당한 부당함에 대한 판결을 요청합니다.

그러므로 39절을 모든 탄식을 금지하는 선언으로 읽으면 시 자체와 충돌합니다.

여기서는 언약을 어긴 공동체가 자신에게 닥친 심판을 마주할 때, 자기 책임을 외면한 채 재앙에 대해서만 불평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문맥에 어울립니다. 이는 오늘날 어떤 사람이 불행을 겪으면 그 사람의 죄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라고 판단할 근거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39절은 예루살렘의 반역과 심판이라는 구체적인 맥락 안에 놓여 있습니다.

막힌 길을 한탄하던 사람이 자기 길을 살피다

예레미야애가 3:40–47 본문 →

40절에서 시의 목소리는 다시 크게 바뀝니다.

우리의 길들을 살피고 따져 보자. 여호와야훼에게 돌아가자.예레미야애가 3:40 · 본디새김

9절에서 화자는 하나님이 자신의 길들을 막고 뒤틀어 놓으셨다고 탄식했습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이 막으신 길을 이야기했다면, 이제는 자신들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자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행위와 선택을 실제로 검토하자는 요청입니다. 「살피고 따져 보자」라는 두 동사는 대충 뒤돌아보는 태도보다 적극적이고 신중한 성찰을 나타냅니다.

구약의 예언 전통에서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것은 단순한 감정적 위안이나 종교적 의식의 회복이 아닙니다. 자신의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다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일을 의미합니다(호세아 6:1; 14:1–2).

그런데 41절에서는 회개의 행동을 독특하게 표현합니다.

우리 마음을 두 손바닥과 함께 들어 올리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을 향해.예레미야애가 3:41 · 본디새김

손은 하나님을 향해 올라가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머물러 있는 기도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까지 하나님 앞에 내놓는 기도입니다. 이는 2장에서 도성에게 어린아이들의 목숨을 위해 두 손을 들라고 했던 권고와도 연결됩니다(2:19). 그러나 3장은 그 손에 무엇이 함께 올라가야 하는지를 더욱 분명하게 말합니다.

42절부터는 공동체의 기도가 시작됩니다.

「저희는 반역하고 거역했습니다. 당신은 용서하지 않으셨습니다.」예레미야애가 3:42 · 본디새김

회개의 기도를 시작했으니 이제 하나님이 용서하셨다는 이야기가 나올 법하지만, 본문은 그렇게 진행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서도 아직 용서를 경험하지 못한 현실을 말합니다.

43절에서는 하나님이 분노로 자신들을 뒤쫓으셨고 불쌍히 여기지 않으셨다고 호소합니다.

44절은 더욱 날카롭습니다.

「당신은 구름으로 자신을 덮으셔서 기도가 통과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예레미야애가 3:44 · 본디새김

이 구절에서 구름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으로 등장합니다. 앞서 8절에서 한 사람이 자신의 기도가 막혔다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공동체가 함께 같은 현실을 호소합니다.

이것은 회개하는 사람이 언제나 즉시 용서와 평안을 경험한다고 말하지 않는 시의 정직함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려는 마음과 하나님의 침묵처럼 느껴지는 현실이 함께 존재합니다.

45–47절에서는 공동체가 민족들 가운데서 겪는 멸시와 공포가 언급됩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단순히 국토를 잃는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이웃 민족들 가운데서 모욕과 조롱을 받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47절의 「공포와 구덩이」는 히브리어에서 소리가 비슷한 두 낱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어지는 「파괴와 무너짐」도 소리의 연결을 이루며 재앙이 연속하여 몰려오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공동체의 기도는 아직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가자고 권고하고 자신의 죄를 고백했지만, 재앙은 여전히 눈앞에 있습니다.

그래서 시는 다시 눈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까지 눈물을 멈추지 않겠다

예레미야애가 3:48–54 본문 →

48절에서 화자는 말합니다.

내 백성의 딸이 무너진 탓에 내 눈에서 물줄기가 흘러내린다.예레미야애가 3:48 · 본디새김

여기서 「내 백성의 딸」은 예루살렘과 그 백성을 가리킵니다. 그는 앞서 자신의 몸이 부서지고 희망을 잃었다고 말했지만, 이제는 공동체의 파괴 때문에 웁니다.

그의 고통은 자신의 생존 문제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내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그치지 않는다, 쉬는 틈도 없이, 여호와야훼가 하늘에서 굽어보고 살필 때까지.예레미야애가 3:49–50 · 본디새김

25–26절에서는 여호와야훼의 구원을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이 보실 때까지 눈물을 멈추지 않겠다고 합니다.

잠잠히 기다린다는 말은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를 바라는 태도였고, 쉬지 않고 운다는 말은 자신의 고통과 백성의 고통을 하나님 앞에서 숨기지 않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눈물을 멈추는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보아 주실 때까지 눈물을 가지고 그분 앞에 머무는 일일 수 있습니다.

44절에서 구름은 기도를 통과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화자는 바로 그 하늘에서 하나님이 굽어보시기를 기다립니다. 기도가 막힌 것처럼 느껴지지만, 하나님이 여전히 보실 수 있다는 기대를 완전히 버리지 않습니다.

51절에서는 눈이 마음을 괴롭힌다고 말합니다. 보통 마음이 슬프기 때문에 눈물이 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눈이 마음을 괴롭힙니다. 그가 보고 있는 현실이 그의 내면을 상하게 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52절부터는 다시 개인적인 박해의 경험이 등장합니다.

까닭 없이 나를 적대한 자들이 새를 사냥하듯 나를 집요하게 사냥했다.예레미야애가 3:52 · 본디새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잘못과 심판을 인정하는 것과, 특정한 사람들이 자신에게 부당한 행동을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화자는 공동체의 반역을 숨기지 않았지만, 자신을 공격한 자들의 행동까지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지는 않습니다.

53–54절에서는 그 박해가 구덩이의 이미지로 표현됩니다.

그들은 구덩이에서 내 목숨을 끝장냈고, 내게 돌을 던졌다. 물이 내 머리 위로 넘쳤다. 나는 말했다. 「나는 끊겨 나갔다.」예레미야애가 3:53–54 · 본디새김

그는 이제 자신이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끊겨 나갔다」는 말은 앞서 「우리가 끝장나지 않았다」고 했던 고백과 긴장 관계를 이룹니다. 그는 여호와야훼의 자애 때문에 공동체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고 믿으면서도, 자신의 경험 속에서는 생명이 끊어졌다고 느낄 만큼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시인은 이 두 목소리를 억지로 하나로 맞추지 않습니다.

희망을 가진 사람이 다시 절망을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남겨 둡니다.

그런데 바로 그 구덩이에서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조금 더 깊이

51절의 「내 도성의 모든 딸들 때문에」라는 표현은 도성의 여자들을 가리킬 수도 있고, 도성에 속한 마을들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화자의 고통이 자신이 목격하는 공동체의 현실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변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 38:6–13에서 예레미야가 구덩이에 갇혔다가 구조된 사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의 구덩이를 그 사건과 반드시 동일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구덩이는 죽음에 가까운 절망과 위험을 표현하는 이미지로도 사용됩니다(시편 40:2; 88:3–6). 특히 물이 머리 위로 넘쳤다는 표현은 익사 직전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기도를 막으셨던 하나님이 이제 가까이 오신다

예레미야애가 3:55–58 본문 →

55절에서 화자는 말합니다.

「여호와야훼, 제가 깊디깊은 구덩이에서 당신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56–57절에서 이전과 다른 일이 일어납니다.

「당신은 제 목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제가 숨 돌릴 수 있도록, 제 부르짖음에 귀를 막지 마십시오.」예레미야애가 3:56 · 본디새김
「제가 당신을 부르던 날에 당신이 가까이 오셨고,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예레미야애가 3:57 · 본디새김

처음에는 기도가 막혀 있었지만, 이제는 들으셨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자신을 가두시고 공격하시는 분처럼 보였지만, 이제는 가까이 오십니다.

화자는 이 일을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처럼 묘사하기보다, 하나님이 이전에 자신에게 가까이 오셨던 일을 기억하는 형태로 말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응답을 경험한 정확한 시점이나 상황은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읽으면 그는 그 경험을 현재의 기도 속에서 다시 떠올립니다.

58절에서는 그 경험을 법정의 언어로 표현합니다.

「주, 당신은 제 목숨을 위해 송사들을 다투셨고, 제 생명을 되찾아 주셨습니다.」예레미야애가 3:58 · 본디새김

여기서 「송사를 다투다」는 것은 누군가의 편에서 그 사람의 사건을 맡아 변호하거나 정당한 권리를 위해 다투는 행동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의 생명과 관련된 송사를 맡아 주시고, 그를 죽음의 위협에서 되찾아 주신 분으로 고백됩니다.

그렇다고 이 기억이 모든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닙니다.

다음 절에서 그는 다시 하나님께 판결을 구합니다.

조금 더 깊이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말은 이사야 41:10과 43:1 등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위로와 보호의 말씀으로도 등장합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에서는 죽음의 구덩이에서 부르짖던 사람이 하나님께 들었다고 고백하는 말씀입니다. 시편 130편은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용서와 구속을 기다립니다. 미가 7:7–9에서는 자신의 죄 때문에 여호와야훼의 분노를 감당하면서도, 결국 그분이 자신의 송사를 다투시고 빛으로 인도하시기를 기다립니다.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인정하는 일이 하나님의 정의를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구원을 경험한 사람이 다시 재판을 요청하다

예레미야애가 3:59–66 본문 →

59절에서 화자는 하나님께 말합니다.

「여호와야훼, 당신은 제가 당한 부당함을 보셨습니다. 제 송사를 판결해 주십시오.」예레미야애가 3:59 · 본디새김

앞절에서 하나님이 그의 송사를 다투시고 생명을 되찾아 주셨다고 말했습니다. 오히려 그 경험을 근거로 지금도 하나님이 자신의 억울함을 판단해 주시기를 구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과거에 생명을 구원받았다는 것과 현재 모든 부당함이 해결되었다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60–62절에서는 자신을 향한 원수들의 계획과 모욕을 하나씩 하나님 앞에 제시합니다.

「당신은 그들의 모든 보복을 보셨습니다, 저를 겨냥한 그들의 모든 계획을.」예레미야애가 3:60 · 본디새김
「여호와야훼, 당신은 그들의 모욕을 들으셨습니다, 저를 겨냥한 그들의 모든 계획을,」 「저를 거슬러 일어난 자들의 입술에서 나온 말과 온종일 저를 두고 하는 그들의 중얼거림을.」예레미야애가 3:61–62 · 본디새김

화자는 하나님이 이미 알고 계시는 것들을 다시 하나님께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미 보시고 들으신 사실을 근거로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63절에서는 처음의 조롱이 다시 등장합니다.

「그들이 앉고 일어서는 것을 보십시오. 저는 그들의 조롱 노랫거리입니다.」예레미야애가 3:63 · 본디새김

14절에서 그는 자기 백성의 노랫거리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에서도 자신이 조롱 노랫거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절에서 점점 강한 표현으로 원수들의 심판을 요청합니다.

「여호와야훼, 그들의 손이 한 일에 따라 그들에게 보응을 돌려주십시오.」예레미야애가 3:64 · 본디새김
「그들의 마음에 덮개를 씌우십시오. 당신의 저주가 그들에게 내리게 하십시오.」예레미야애가 3:65 · 본디새김
「분노로 그들을 뒤쫓아 여호와야훼의 하늘 아래에서 없애 버리십시오.」예레미야애가 3:66 · 본디새김

특히 원수들을 없애 달라는 마지막 요청은 단순히 자신의 마음에 평안을 달라고 구하는 기도와는 다릅니다. 상대방에게 실제적인 심판이 닥치기를 원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단순히 악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평화로운 소망으로 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직접 원수들에게 보복하겠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행동에 합당한 판단을 하나님께 요청합니다. 그들이 실제로 저지른 행동에 따라 보응해 달라는 요구입니다.

이는 앞서 34–36절에서 갇힌 이를 짓밟고 재판을 왜곡하는 일을 문제 삼았던 흐름과 연결됩니다. 화자가 경험한 구원은 개인적인 위안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억울함을 보시고 송사를 맡아 주셨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제 그는 원수들이 저지른 일도 같은 하나님의 판단 아래 놓이기를 구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기도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든 적대적 감정이나 저주가 정당하다는 승인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은 이 기도를 하나님이 그대로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화자의 절박한 탄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보응을 구하는 기도와 하나님이 실제로 어떤 판결을 내리실지는 구별해야 합니다.

그는 자기 생명을 위협하고 끊임없이 모욕하는 자들에게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 분노까지 하나님 앞에 가져갑니다.

그리고 시는 그 기도가 어떻게 응답되었는지를 알려 주지 않은 채 끝납니다.

조금 더 깊이

65절의 「그들의 마음에 덮개를 씌우십시오」는 뜻을 확정하기 어려운 표현입니다. 원문의 메긴나트 레브는 이 자리에서만 나타나므로, 마음을 가려 분별하거나 깨닫지 못하게 하는 상태를 가리키는지, 뒤의 저주와 밀접하게 연결된 표현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기도는 시편 35편이나 109편 등에서 발견되는 탄원과도 연결됩니다. 고통받는 사람이 자신의 억울함을 하나님께 호소하며 원수들에 대한 심판을 구하는 전통입니다.

희망을 고백한 뒤에도 눈물이 흐르는 이유

예레미야애가 3:1–66 본문 →

화자의 희망은 감정의 완전한 변화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다시 기억하면서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현실을 마주하는 태도입니다.

마지막에 이르러서도 원수들은 그를 조롱하고 있습니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께 자신의 송사를 판결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시의 마지막 말은 승리의 찬양이 아니라 원수들에 대한 심판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처음과 달라진 것이 하나 있습니다.

처음에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길과 기도를 막으셨다고 말했지만, 이제는 바로 그 하나님께 자신의 억울함을 끝까지 아뢰고 있습니다.

그는 아직 구원의 완성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목소리를 들으셨던 하나님께 다시 말하고 있습니다.

깊은 구덩이에서 들었다고 고백한 한마디, 「두려워하지 마라.」

그 말의 기억을 간직한 채, 그는 아직 끝나지 않은 자신의 송사를 여호와야훼 앞에 올려놓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