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풀어 읽기 · 7장
이 장의 자리 · 4–9장 · 갈릴리에서의 활동
이 여자가 보이느냐?
예수님께서는 바리새파 사람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도시에 죄인으로 알려진 한 여자가 들어와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고, 향유를 바릅니다.
집주인 시몬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속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정말 예언자이시라면 저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아셨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이 여자가 보이느냐?」(7:44) 하고 물으십니다.
참 이상한 질문입니다. 시몬은 이미 그 여자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그 여자의 행동을 보고 예수님을 의심하기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시몬은 그 여자가 죄인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시몬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계십니다. 그 여자가 예수님께 보인 사랑입니다.
누가복음 7장에는 이처럼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예수님을 알아보는 방식이 달라지는 장면들이 이어집니다.
한 백부장은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도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믿음을 보고 놀라십니다. 나인에서는 죽은 아들을 실어 나르는 행렬을 만나시지만, 특별히 그 어머니를 보시고 가엾이 여기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기다리던 분이신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누구이신지 직접 선언하시는 대신, 사람들이 보고 들은 일을 요한에게 전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식탁에서는 죄인인 여자와 의로운 종교인으로 인정받는 사람이 예수님 앞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이 장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을 평가합니다. 예수님께서 예언자이신지,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신지, 죄인과 가까이하셔도 되는 분이신지 판단합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따라갈수록 더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고 있을까요?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미처 보지 못한 무엇을 보고 계실까요?
백부장 — 예수님을 만나지 않고도 예수님의 권위를 알아본 사람
이 사람은 도움받을 자격이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앞 장의 설교를 마치신 뒤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십니다.
그곳에 어느 백부장이 있었습니다. 백부장은 군인들을 지휘하는 장교입니다. 누가는 그의 이름도, 어떤 전투에 참여했는지, 어떤 경력을 가졌는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에게 노예 한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어느 백부장의 노예가 몹시 앓아 죽어 가고 있었다. 백부장이 아끼는 사람이었다.누가복음 7:2 · 본디새김
노예는 주인의 소유 아래 놓여 있었고 법적·사회적 지위가 자유인과 달랐습니다. 그러나 이 백부장은 병들어 죽어 가는 노예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듣고 유대 사람들의 장로들을 보내 도움을 청합니다.
장로들은 예수님을 만나자 매우 적극적으로 부탁합니다.
그들이 예수에게 와서 간절히 간청하며 말했다. 「그는 당신이 이 일을 해 주실 만한 사람입니다.」누가복음 7:4 · 본디새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우리에게 회당을 지어 준 사람이 바로 그이기 때문입니다.」누가복음 7:5 · 본디새김
백부장은 유대 공동체에 호의를 베풀어 온 사람이었고, 회당을 지어 주기까지 했습니다. 장로들은 그가 공동체를 위해 한 일을 근거로, 그가 도움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집 가까이 이르셨을 때, 백부장이 보낸 친구들은 정반대의 말을 전합니다.
예수가 그들과 함께 갔다. 예수가 이미 백부장의 집에서 멀지 않았을 때 백부장이 친구들을 보내 그에게 전하게 했다. 「주님, 수고하지 마십시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누가복음 7:6 · 본디새김
「그래서 저 자신도 주님께 나아갈 자격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다만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누가복음 7:7 · 본디새김
같은 사람에 대해 전혀 다른 평가가 나왔습니다. 장로들은 이 사람이 자격이 있다고 말합니다. 백부장 자신은 자격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 대조가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그리스어 원문에서도 이 관계가 드러납니다. 장로들이 「해 주실 만한 사람」(ἄξιος)이라고 말할 때 쓴 낱말은 가치 있거나 합당하다는 뜻이고, 백부장은 7절에서 자신이 예수님께 나아갈 자격조차 없다고 말하면서 같은 어근의 동사를 사용합니다. 장로들은 그가 지금까지 한 일을 근거로 자격을 주장하고, 백부장은 그 모든 일을 했음에도 자신을 예수님 앞에 나아갈 만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는 실제로 그 공동체를 사랑했고 회당을 지어 주었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도움을 받을 근거를 자신의 업적에서 찾지 않을 뿐입니다. 그에게는 자격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다만 말씀만 하십시오’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직접 집에 들어오실 필요도, 노예에게 손을 얹으실 필요도, 병자의 상태를 눈으로 확인하실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말씀하시면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는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그는 자신의 군대 생활을 예로 듭니다.
「저도 권위 아래 놓인 사람이고 제 밑에 군사들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다른 사람에게 『오너라』 하면 오고, 제 노예에게 『이것을 해라』 하면 합니다.」누가복음 7:8 · 본디새김
백부장은 자신을 단순히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먼저 「권위 아래 놓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자신 위에 있는 지휘 체계에 속해 있으면서 동시에 아래 사람들에게 명령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가 명령하면 군사들은 움직입니다. 그들이 명령을 따르는 것은 매번 명령자의 능력을 눈으로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명령이 정당한 권위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백부장은 바로 이 경험을 통해,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은 병든 노예에게도 효력을 나타낼 수 있다고 이해합니다.
물론 군대의 명령과 질병의 치유는 같은 일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아는 권위의 원리를 바탕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합니다. 그에게 예수님의 권위는 예수님께서 물리적으로 어디에 계시는가에 제한되지 않습니다.
앞서 예수님의 치유를 경험한 사람들은 예수님께 찾아오거나 예수님의 손길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예수님의 말씀만으로 충분하다고 믿습니다. 그는 여전히 노예가 낫기를 바라지만, 치유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결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권위를 신뢰합니다.
예수님께서 놀라신 이유
예수가 이 말을 듣고 그를 두고 놀랐다. 그리고 돌아서서 자기를 따르는 무리에게 말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스라엘에서조차 이만한 믿음을 찾지 못했다.」누가복음 7:9 · 본디새김
이번에는 놀라시는 사람이 예수님입니다.
누가복음에서 사람들은 여러 차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 놀랐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한 사람의 믿음에 놀라십니다.
백부장은 이스라엘의 장로들에게 존경받는 군인이지만, 이야기의 대조를 보면 이스라엘 공동체 바깥에 있는 사람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누가는 그의 정확한 민족적 출신을 직접 밝히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여호와야훼의 약속을 이어받은 이스라엘에서조차 찾기 어려운 믿음이, 이방인으로 보이는 군인에게서 나타났습니다.
그 믿음은 대단한 종교적 지식을 과시하는 모습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보는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백부장은 이 이야기에서 예수님과 직접 마주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노예를 직접 만나셨다고 기록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니 노예가 나아 있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어떤 특별한 말씀을 하셨는지조차 기록하지 않고, 그 대신 백부장이 어떤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왔는지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 주목하신 것은 회당을 지어 준 업적도, 그가 지닌 사회적 지위도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자격을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이었습니다.
백부장의 이야기에서는 간절한 요청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음에 등장하는 과부는 예수님께 아무것도 청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먼저 그 여자를 보십니다.
나인 — 아무것도 요청하지 못한 여자를 보시다
두 무리가 성문에서 만나다
예수님께서는 나인이라는 도시로 가십니다. 제자들과 큰 무리가 함께합니다. 그런데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반대편에서 한 행렬이 나옵니다.
그가 도시의 성문에 다가갔을 때였다. 보아라, 죽은 사람이 실려 나오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의 하나뿐인 아들이었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그 도시의 적잖은 사람들이 그 어머니와 함께 있었다.누가복음 7:12 · 본디새김
한쪽에는 예수님과 함께 도시로 들어가려는 큰 무리가 있고, 다른 쪽에는 아들을 잃은 어머니와 함께 죽은 사람을 도시 밖으로 실어 나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두 행렬이 성문 앞에서 만납니다.
누가는 죽은 젊은이의 이름도, 어머니의 이름도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관계에 관해서는 두 가지 사실을 분명히 알려 줍니다. 젊은이는 어머니의 하나뿐인 아들이었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습니다.
그 여자는 이미 남편을 잃었고, 이제 하나뿐인 아들까지 잃었습니다. 당시 과부는 사회적·경제적으로 취약한 처지에 놓이기 쉬웠고, 아들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었다면 그의 죽음은 어머니의 미래에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누가는 그녀의 경제적 형편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지만, 남편에 이어 하나뿐인 아들까지 잃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여자의 상실이 얼마나 깊은지를 충분히 보여 줍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는 아무도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하지 않습니다. 앞선 백부장은 장로들을 보내 간청했지만, 이 어머니는 예수님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예수님을 알고 있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저 아들의 장례 행렬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아들보다 먼저 어머니를 보십니다
주님이 그 어머니를 보고 속이 뒤틀리도록 가엾이 여겨 그 여자에게 말했다. 「울지 마라.」누가복음 7:13 · 본디새김
죽은 사람을 실어 나르는 행렬을 만나셨는데, 누가는 예수님께서 특별히 그 어머니를 보셨다고 기록합니다. 「속이 뒤틀리도록 가엾이 여겨」라는 표현은 단순히 안타깝게 여긴다는 뜻을 넘어, 깊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강한 연민을 잘 살립니다.
이 여자는 어떤 믿음의 고백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치유가 언제나 상대방의 믿음이나 요청에 대한 응답으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받는 사람을 보셨고, 그 고통에 반응하셨습니다.
「울지 마라」를 그저 슬퍼하지 말라는 요구로 읽으면 부자연스럽습니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에게 하는 이 말은, 뒤따르는 행동이 없다면 공허하게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말씀 뒤 곧바로 아들에게 다가가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슬픔을 억누르라는 꾸지람이 아니라, 그 슬픔의 원인 자체를 바꾸시려는 행동과 함께 주어집니다.
장례 행렬이 멈추다
그가 다가가 상여에 손을 댔다.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춰 섰다. 그가 말했다. 「젊은이야,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누가복음 7:14 · 본디새김
장례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죽은 사람을 떠나보내는 과정입니다. 이미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움직이던 그 행렬이, 예수님께서 상여에 손을 대시자 멈춥니다.
그런데 죽은 사람이 일어나 앉아 말하기 시작합니다.
누가는 젊은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자신의 죽음을 기억했는지, 무엇을 느꼈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말하기 시작했다는 사실만 기록합니다. 그는 더 이상 장례 행렬에 실려 가는 시신이 아닙니다.
그런데 누가는 여기서 이야기를 끝내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이 일어나 앉아 말하기 시작했다. 예수가 그를 어머니에게 돌려주었다.누가복음 7:15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는 놀라운 권능의 행사였습니다. 그러나 그 권능이 향한 곳은 어머니에게 아들을 돌려주는 일이었습니다.
그 여자가 잃어버린 관계를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엘리야가 과부의 아들을 돌려준 이야기
이 장면은 열왕기상 17:17–24의 이야기를 깊이 떠올리게 합니다. 엘리야가 머물던 사렙다 과부의 집에서 아들이 죽었고, 그 여자는 엘리야에게 항의했습니다. 엘리야는 아이를 데리고 올라가 여호와야훼께 간절히 부르짖었고, 여호와야훼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셔서 아이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열왕기상 17:23은 엘리야가 아이를 어머니에게 돌려주었다고 기록합니다.
두 이야기는 단순히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공통점만이 아니라, 과부가 등장하고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나며 마지막에 아들을 어머니에게 돌려주는 짜임까지 연결됩니다.
그러나 두 이야기에는 중요한 차이도 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아이를 살려 주시기를 여호와야훼께 간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젊은이에게 직접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누가가 이 차이를 명시적으로 해설하지는 않지만, 독자는 두 사건을 비교하면서 예수님께 나타난 권위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보게 됩니다.
사람들의 반응도 그 연결을 뒷받침합니다.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며 말했다. 「큰 예언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났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찾아오셨다.」라고도 했다.누가복음 7:16 · 본디새김
하나님이 ‘찾아오셨다’는 말
이 말은 누가복음의 앞부분과 연결됩니다. 누가복음 1:68에서 사가랴는 예수님의 공적 사역이 시작되기 전에 여호와야훼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오셔서 속량하셨다고 찬양했습니다. 이제 나인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 같은 고백을 합니다. 앞서 선포되었던 하나님의 방문이 실제 사건 속에서 인식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방문은 어디에서 드러났습니까? 왕궁의 새로운 정치적 선언에서도, 종교 지도자들의 대규모 의식에서도 아닙니다. 한 과부의 죽은 아들이 살아나 어머니에게 돌아온 사건에서였습니다.
하나님의 방문은 고통받는 사람의 삶이 회복되는 사건 가운데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소식은 널리 퍼져 마침내 세례자 요한에게까지 전해집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 소식을 듣고 뜻밖의 질문을 보냅니다. 예수님께서 정말 기다리던 분이 맞으시냐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가엾이 여기다」(σπλαγχνίζομαι)로 옮긴 그리스어 동사는 누가복음에서 뒤에도 중요한 자리에 등장합니다. 10:33에서는 강도 만난 사람을 본 사마리아 사람이, 15:20에서는 돌아오는 아들을 본 아버지가 이렇게 가엾이 여깁니다. 세 이야기 모두 누군가 고통받는 사람을 보고, 깊은 연민을 느끼고, 그 사람을 위해 행동하는 움직임을 지니며, 나인에서는 그 일을 예수님 자신이 행하십니다. 또 그리스어 열왕기상 17:23과 누가복음 7:15에는 아이를 어머니에게 주었다는 표현이 같은 형태로 나타납니다.
세례자 요한 — 기다리던 그분이 맞습니까?
요한은 왜 다시 묻는가?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요한에게 알립니다. 앞서 누가복음 3:16–17에서 요한은 자기보다 능력 있는 분이 오실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분께서는 거룩한 영과 불로 세례를 베푸시고, 타작마당을 깨끗하게 하여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병든 사람을 고치시고 죽은 사람을 살리셨다는 소식을 듣자, 요한은 두 제자를 보내 질문합니다.
주님에게 보내 말하게 했다. 「당신이 바로 오시는 그분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누가복음 7:19 · 본디새김
요한이 예수님을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자신의 제자들이 직접 예수님을 확인하도록 보내는 질문일까요? 두 해석 모두 제시되어 왔습니다.
요한 자신이 예수님의 사역을 이해하기 어려워했다는 해석은 앞서 그가 선포한 심판의 메시지와 연결됩니다. 요한은 오실 분께서 쭉정이를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라고 말했는데, 지금 들려오는 소식은 죽어 가는 노예가 살아나고, 과부의 아들이 다시 일어나며,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전해진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누가복음 3:19–20에 따르면 요한은 헤롯을 책망한 일로 감옥에 갇혔습니다. 악한 권력은 여전히 남아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치유와 은혜를 베푸시는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워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본문이 직접 설명한 요한의 심리가 아니라, 앞선 선포와 현재의 상황을 연결한 해석입니다.
반대로 요한이 자신의 제자들을 위해 이 질문을 했다고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다만 누가는 요한이 제자들을 시험하거나 교육하기 위해 질문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한쪽을 확정하기보다, 요한이 실제로 제기한 질문에 집중하는 편이 좋습니다. 요한은 단순히 예수님의 능력을 묻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정체를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누구이신지 직접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그 사람들이 그에게 와서 말했다. 「세례자 요한이 우리를 당신께 보내어 이렇게 여쭈라고 했습니다. 『당신이 바로 오시는 그분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누가복음 7:20 · 본디새김
누가는 이 질문을 두 번 기록합니다. 요한이 제자들을 보낼 때 한 번, 제자들이 예수님께 도착했을 때 다시 한 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즉시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먼저 누가는 그 시각에 일어난 일을 기록합니다.
그 시각에 그는 병과 매질 같은 고통과 악한 영에 시달리는 많은 이를 고쳤고, 눈먼 많은 이가 볼 수 있게 해 주었다.누가복음 7:21 · 본디새김
그가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했다.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눈먼 이들이 다시 보고 다리를 저는 이들이 걷는다. 나병을 앓는 이들이 깨끗해지고 귀가 들리지 않는 이들이 듣는다.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전해진다.」누가복음 7:22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내가 누구인지 너희가 믿느냐’고 먼저 요구하지 않으시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보라고 하십니다. 그 대답은 단순한 기적 목록이 아니라, 구약에서 약속되었던 회복의 말씀들을 떠올리게 하는 선언입니다.
이사야가 약속한 회복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사야 35:5–6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회복하실 때 눈먼 사람의 눈이 열리고, 귀먹은 사람의 귀가 열리며, 다리를 저는 사람이 사슴처럼 뛰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사야 61:1에는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명이 등장합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말씀은 이사야 26:19의 생명 회복에 관한 약속과도 연결해서 읽을 수 있지만, 26:19의 본래 문맥은 하나님의 백성이 죽음과 패배를 넘어 회복될 것이라는 종말론적 소망이므로 나인의 사건과 완전히 동일한 상황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특히 마지막의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전해진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자신의 사명을 밝히실 때 읽으셨던 이사야의 말씀과 연결됩니다. 「주의 영이 내 위에 있다. 그분이 나에게 기름을 부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기 때문이다.」(4:18)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의 말씀이 오늘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셨고, 이제 요한의 제자들에게 그 성취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정체를 증명하기 위해 전혀 새로운 기준을 만들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약속하신 말씀을 기준으로 자신이 하시는 일을 보도록 이끄십니다. 요한이 기다리던 분이 누구이신지를 알아보려면, 이사야가 약속한 회복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에 한 가지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그리고 나 때문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누가복음 7:23 · 본디새김
‘걸려 넘어지다’는 걸림돌에 걸리듯 넘어지거나, 어떤 일로 인해 실족하고 믿음에서 벗어나는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기대에 맞지 않게 행동하신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요한이 기다리던 분의 모습과 예수님의 실제 사역 사이에 차이가 있었다면, 바로 그 차이가 걸림돌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질문을 책망하는 데 집중하지 않으시고, 보고 들은 그대로 전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정체를 이해하는 기준은 사람들이 미리 만들어 놓은 메시아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일이 예수님을 통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요한의 심부름꾼들이 떠나간 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요한이 어떤 사람인지 말씀하기 시작하십니다.
요한과 예수님 — 어떤 모습으로 와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예수님은 질문한 요한을 어떻게 평가하시는가?
요한의 심부름꾼들이 떠나간 뒤에 그가 무리에게 요한을 두고 말하기 시작했다. 「너희가 무엇을 보러 광야로 나갔느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누가복음 7:24 · 본디새김
광야에 나갔던 사람들은 요한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무엇을 보았는지 다시 물으십니다.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사람이었습니까? 부드러운 옷을 입고 호화롭게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왕궁에 있습니다.
요한은 왕궁에서 편안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인기를 얻기 위해 메시지를 바꾸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회개를 선포했고, 권력자의 잘못을 책망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무엇을 보러 나갔느냐? 예언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는 예언자보다 더한 이다.」누가복음 7:26 · 본디새김
요한은 예수님께 자신이 기다리던 분이 맞느냐고 질문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질문 때문에 요한을 신실하지 못한 사람으로 몰아가지 않으시고, 오히려 요한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밝히십니다.
그는 예언자입니다. 그런데 예언자보다 더한 사람입니다.
길을 준비하는 사자
「바로 이 사람을 두고 이렇게 적혀 있다. 『보아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닦을 것이다.』」누가복음 7:27 · 본디새김
이 말씀은 말라기 3:1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출애굽기 23:20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앞에 사자를 보내 길을 준비하게 하신다는 표현과도 연결됩니다. 말라기 3장에서 여호와야훼는 자기 백성에게 찾아오실 것을 말씀하시며, 그에 앞서 길을 준비할 사자를 보내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 방문은 단순한 위로만이 아니어서, 말라기 3:2–5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오셔서 사람들을 깨끗하게 하시고 불의를 심판하실 것이라는 말씀도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요한에게 적용하십니다. 다른 예언자들이 장차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을 선포했다면, 요한은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때를 바로 앞에서 준비한 사람입니다. 요한의 중요성은 그의 개인적인 탁월함보다 그가 누구의 길을 준비했는가에서 드러납니다.
그가 준비한 길의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가장 큰 사람보다 더 큰 가장 작은 사람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큰 이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이가 그보다 크다.」누가복음 7:28 · 본디새김
어떻게 두 말이 동시에 참일 수 있을까요? 이것을 인격이나 도덕적 수준의 비교로 이해하면 어려움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있는 어떤 사람이라도 요한보다 더 훌륭한 인격을 가졌다고 볼 이유는 없습니다.
이 말씀은 구원의 역사에서 요한이 차지하는 위치와 예수님을 통해 시작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비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약속하신 분이 오실 것을 준비하고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는 그가 선포하던 하나님의 나라가 실제로 드러나기 시작하고, 그 나라에 참여하는 사람은 요한이 가리켰던 새로운 현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니 가장 작은 이가 요한보다 크다는 말씀은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누리게 된 새로운 위치를 강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본문은 그 차이가 어떤 측면에서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또한 이 말씀을 요한이 하나님의 나라 밖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을 가장 위대한 예언자로 높이 평가하시면서, 그의 사역이 준비한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을 ‘의롭다’고 한 사람들
(그의 말을 들은 온 백성과 세리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나님을 의롭다 했다.누가복음 7:29 · 본디새김
그러나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사들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지 않음으로써 자기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물리쳤다.)누가복음 7:30 · 본디새김
보통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롭다고 하시는 일이 익숙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의롭다 했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의롭게 만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옳으신 분이며 그분의 판단과 뜻이 정당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음으로써 요한을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요구를 받아들였습니다.
죄인으로 취급받던 세리들이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인 사람들 가운데 등장하고, 율법을 알고 가르치는 종교 지도자들은 그 뜻을 거부한 사람들로 묘사됩니다. 누가는 이 대비를 통해 사회적 지위나 종교적 명성이 곧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올바른 반응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 두 절은 다음 비유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의 거부는 요한 개인에 대한 거부로 끝나지 않고, 예수님께도 똑같이 나타납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해도 울지 않는다
「장터에 앉아 서로에게 외치는 아이들과 같다. 그 아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너희에게 피리를 불었는데 너희는 춤추지 않았다. 우리가 애곡했는데 너희는 울지 않았다.』」누가복음 7:32 · 본디새김
한쪽에서는 피리를 불며 춤추기를 기대하고, 다른 쪽에서는 애곡하며 함께 울기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상대편은 기쁜 놀이에도, 슬픈 놀이에도 참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습을 그 세대 사람들에게 비유하십니다.
「그 까닭은 이렇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으니 너희가 『귀신을 지니고 있다』라고 말한다.」누가복음 7:33 · 본디새김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니 너희가 『보아라, 이 사람은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다』라고 말한다.」누가복음 7:34 · 본디새김
요한은 금욕적인 생활과 회개의 메시지로, 예수님은 사람들과 함께 드시고 마시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두 사람 모두를 비난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문제는 어떤 방식이 옳으냐가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사역을 모두 거부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와야 그들이 받아들이겠습니까?
거부할 이유를 먼저 정해 놓으면, 어떤 모습으로 다가와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혜는 자기 자녀들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다
「그리고 지혜는 자기 자녀들 모두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다.」누가복음 7:35 · 본디새김
구약의 잠언 1–9장에는 지혜가 마치 사람처럼 등장합니다. 지혜는 거리에서 사람들을 부르고, 자신의 말을 듣도록 권하며, 어리석음 대신 생명의 길을 선택하라고 가르칩니다. 예수님도 지혜를 사람처럼 묘사하시며, 그 지혜에게 자녀들이 있다고 하십니다.
지혜의 자녀들은 문맥상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 뜻에 응답하는 사람들, 곧 요한의 세례를 받아들인 사람들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사람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반응과 삶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가 옳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29절의 「하나님을 의롭다 했다」(δικαιόω)와 35절의 「의롭게 되었다」에는 같은 그리스어 동사가 쓰입니다. 29절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하나님이 옳으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35절에서는 지혜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지혜가 옳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참되다는 사실은 사람들의 인기나 평가가 아니라, 그 지혜에 응답한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가에서 드러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장면이 이 말씀을 뜻밖의 방식으로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한 바리새파 사람의 집에서 식사하시게 되고, 그곳에서 죄인인 한 여자가 놀라운 행동을 합니다.
누가 하나님의 지혜에 올바르게 응답하는 사람인지, 그 식탁에서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29–30절이 예수님의 말씀인지, 누가가 중간에 덧붙인 설명인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갈립니다. 고대 그리스어 본문에는 현대적인 인용부호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서는 두 절을 괄호로 처리하여 서술자의 설명으로 읽습니다. 앞뒤의 예수님 말씀 사이에 3인칭으로 사람들을 분류하고 평가하는 문장이 들어 있다는 점이 그 근거입니다. 반대로 28절에서 이어지는 예수님의 설명으로 읽는 것도 문법적으로 가능합니다. 어느 쪽이든 두 절이 다음 비유의 배경이 된다는 점은 같습니다.
시몬의 집 — 죄인을 알아본 사람과 사랑을 알아본 사람
바리새파 사람 시몬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한 바리새파 사람이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합니다. 그의 이름은 시몬입니다. 앞서 예수님을 따랐던 시몬 베드로와는 다른 사람입니다.
조금 전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의 집에도 들어가십니다. 예수님은 죄인들과만 식사하시고 종교 지도자들은 무조건 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집에서 식사 자리에 비스듬히 누워 계셨습니다. 당시 연회에서는 몸을 기대어 음식을 먹었고, 그런 자세에서는 발이 식탁 바깥쪽으로 향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한 여자가 들어옵니다.
보아라, 그 도시에 죄인인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그가 바리새파 사람의 집에서 식사 자리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것을 알고 향유가 든 설화석고 병을 가져왔다.누가복음 7:37 · 본디새김
누가는 그 여자의 이름도, 구체적으로 어떤 죄를 지었는지도 밝히지 않습니다. 죄인으로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야기의 갈등은 충분히 이해됩니다.
그리고 뒤에서 그의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발을 적시기 시작했다.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고 그의 발에 거듭 입을 맞추고 향유를 계속 발랐다.누가복음 7:38 · 본디새김
누가는 여자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아무런 부탁도 하지 않고, 죄를 용서해 달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눈물과 행동으로 자신의 마음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시몬은 그 행동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바라봅니다.
그를 청한 바리새파 사람이 그것을 보고 속으로 말했다. 「이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이고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누가복음 7:39 · 본디새김
시몬의 생각은 나름대로 논리적입니다. 예언자라면 사람의 숨겨진 상태를 알아볼 수 있어야 하는데, 예수님은 죄인인 여자가 자신을 만지도록 허락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이 판단에는 예수님께서 정말 그녀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신다면 당연히 그녀를 가까이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전제가 숨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는 뜻밖의 반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자의 죄를 모르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몬의 마음속 생각까지 알고 계십니다. 시몬이 예언자라면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통찰이 예수님께 나타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시몬이 기대한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으십니다. 여자를 쫓아내지 않으시고, 시몬에게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십니다.
두 빚진 사람 — 무엇이 먼저인가?
「돈을 빌려 준 어떤 사람에게 빚진 사람이 둘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졌고 다른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누가복음 7:41 · 본디새김
한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열 배나 많은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곧이어 두 사람에게 공통된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갚을 돈을 가지고 있지 않아 돈을 빌려 준 사람이 둘의 빚을 모두 없애 주었다. 그러면 둘 가운데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누가복음 7:42 · 본디새김
빚의 규모는 다르지만, 스스로 빚을 갚을 수 없다는 처지는 같습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의 문제는 누가 더 많이 빚졌는가만이 아니라, 누가 이 빚을 없애 줄 수 있는가입니다. 「없애 주었다」(χαρίζομαι)로 옮긴 동사는 은혜나 호의를 뜻하는 말과 같은 어근을 지녀, 이 문맥에서는 갚을 수 없는 빚을 거저 없애 준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시몬이 대답하여 말했다. 「그가 더 많은 빚을 없애 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그에게 말했다. 「옳게 판단했다.」누가복음 7:43 · 본디새김
시몬은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시몬 자신이 옳다고 인정한 원리, 곧 많은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 많이 사랑한다는 원리를 시몬이 놓치고 있는 여자에게 적용하십니다. 많이 사랑하는 사람의 행동은 그 사람이 얼마나 큰 용서를 경험했는지를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이 여자가 보이느냐?’
예수님은 여자 쪽으로 돌아서십니다. 그런데 말씀은 시몬에게 하십니다.
그가 그 여자 쪽으로 돌아서서 시몬에게 말했다. 「이 여자가 보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왔는데 너는 내 발 씻을 물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았다.」누가복음 7:44 · 본디새김
「너는 나에게 입맞춤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여자는 내가 들어온 뒤로 내 발에 입을 맞추기를 그치지 않았다.」누가복음 7:45 · 본디새김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바르지 않았다. 그런데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발랐다.」누가복음 7:46 · 본디새김
세 가지 대비가 이어집니다.
물과 눈물.
입맞춤의 부재와 끊이지 않는 입맞춤.
머리에 바르지 않은 기름과 발에 바른 향유.
발 씻을 물을 제공하거나, 입맞춤으로 손님을 맞이하거나, 기름을 바르는 일은 존중과 환대를 표현할 수 있는 행동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이 법적 의무를 어겼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환대가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 주십니다. 시몬도 예수님을 초대했지만, 죄인인 여자는 시몬이 하지 않은 행동들을 훨씬 더 깊고 적극적인 방식으로 행했습니다.
시몬은 여자를 죄인이라는 기준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가 나타내는 사랑을 보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죄가 없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곧이어 그 여자의 죄가 많다는 사실을 직접 언급하십니다. 시몬이 놓친 것은 그 여자가 죄인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그 사실만으로는 그 사람 전체를 이해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녀에게는 예수님을 향한 깊은 사랑이 있고, 그 사랑은 그녀가 어떤 은혜를 받아들였는지를 보여 줍니다.
‘많이 사랑했기 때문이다’ — 사랑이 용서를 얻었는가?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의 많은 죄가 용서되었다. 많이 사랑했기 때문이다. 적게 용서받는 이는 적게 사랑한다.」누가복음 7:47 · 본디새김
여기에는 신학적으로 중요한 해석의 갈림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여자가 많이 사랑했기 때문에 죄를 용서받았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어 원문에서 ‘때문에’에 해당하는 호티(ὅτι)는 원인이나 이유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므로, 문장 자체만 놓고 보면 이런 해석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 여자가 많이 사랑한 행동은 이미 죄가 용서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증거라는 해석입니다. 곧 ‘이 여자의 많은 죄가 용서되었다는 것은, 그녀가 보인 큰 사랑을 통해 알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앞의 비유가 그 근거입니다. 두 빚진 사람은 먼저 빚을 탕감받았고, 그다음에 누가 더 사랑하겠느냐는 질문이 나왔습니다. 사랑을 많이 했기 때문에 빚을 없애 준 것이 아닙니다. 47절 끝의 「적게 용서받는 이는 적게 사랑한다」도 용서받는 일을 사랑의 크기와 연결하고, 50절은 여자의 믿음이 그녀를 구원했다고 선언합니다. 이런 이유로 호티를 용서받았음을 드러내는 근거로 읽는 해석이 문맥상 강한 설명력을 가집니다.
다만 「많이 사랑했기 때문이다」라는 번역은 이 문법적 가능성을 한쪽으로 확정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구절은 한 문장만 떼어 읽기보다, 예수님께서 직접 들려주신 비유와 마지막 선언까지 함께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여자의 사랑의 크기는 그녀가 얼마나 훌륭한 감정을 가진 사람인가가 아니라, 용서의 은혜를 얼마나 깊이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용서받은 사람이 용서의 크기를 알 때 사랑이 흘러나옵니다.
시몬은 적게 용서받은 사람인가?
그렇다면 시몬은 죄가 적은 사람이라는 뜻일까요? 예수님은 시몬의 죄가 얼마나 많은지, 그가 이미 얼마나 용서받았는지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시몬이 오십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과 정확히 같은 처지라고 명시하지도 않습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이 모두 갚을 돈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시몬은 자신이 다른 사람의 죄를 알아보고 구별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여자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하나님의 용서를 얼마나 필요로 하는 사람인지도 알고 있을까요?
예수님은 시몬을 공개적으로 죄인이라고 선언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가 여자를 바라보는 방식이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보여 주십니다.
시몬은 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을 보지 못합니다.
여기서 첫 번째 이야기의 백부장이 다시 떠오릅니다. 유대 장로들은 백부장이 도움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백부장은 자기에게 자격이 없다고 고백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했습니다. 시몬은 그 여자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예수님은 그 여자의 믿음과 사랑을 보십니다. 두 이야기 모두 사람이 정하는 자격과 평가를 넘어 예수님께서 무엇을 중요하게 보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죄까지 용서하는 이 사람은 누구냐?’
그 여자에게 말했다. 「네 죄가 용서되었다.」누가복음 7:48 · 본디새김
누가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몸이 마비된 사람에게 「사람아, 네 죄가 용서되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5:20). 그때 서기관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하나님 한 분 말고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느냐고 따졌고,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할 권위를 지니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같은 질문이 다시 등장합니다.
함께 식사 자리에 비스듬히 누워 있던 이들이 저희끼리 말하기 시작했다. 「죄까지 용서하는 이 사람은 누구냐?」누가복음 7:49 · 본디새김
이번에는 죄인인 여자의 사랑이 중심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의 행동을 통해 그녀가 받아들인 용서의 의미를 드러내셨지만,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신다고 선언하실 수 있는지 문제 삼습니다. 누가는 그들에게 다시 긴 설명을 들려주지 않습니다.
그가 그 여자에게 말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평화로 가라.」누가복음 7:50 · 본디새김
예수님은 사랑이 너를 구원했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말씀하십니다.
백부장은 예수님 앞에 직접 나타나지 않고 말씀만 하시면 된다고 했습니다. 여자는 예수님께 직접 다가와 발을 적시고 입 맞추며 향유를 발랐습니다. 한 사람의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말로, 다른 사람의 믿음은 예수님께 보인 사랑의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아보았습니다.
성경에서 평화는 단순히 마음이 편안해지는 감정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바른 관계, 삶의 온전함과 회복을 포함합니다. 그러니 「평화로 가라」는 여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이자 새로운 삶을 향한 선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가는 그 여자가 이후에 어디로 갔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려 주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전통적으로 이 여자를 성적으로 부도덕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라고 설명하거나, 막달라 마리아와 동일한 인물이라고 여겨 온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누가복음 7장은 그런 사실을 말하지 않으며, 그녀의 죄를 성적인 죄라고 특정할 근거도, 막달라 마리아라고 확인할 근거도 없습니다. 이 사건을 마가복음 14:3–9과 마태복음 26:6–13에 나오는 베다니의 향유 사건과 곧바로 동일시할 수도 없습니다. 그 이야기들은 수난을 앞둔 때에 일어나며, 향유를 붓는 위치와 사건을 해석하는 초점도 다릅니다. 누가가 이 여자를 ‘죄인’이라고 소개한 사실은 중요하지만, 그 말에 본문이 설명하지 않은 전력을 덧붙여서는 안 됩니다. 한편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의 품삯을 나타내는 데도 사용된 은화로, 마태복음 20:2에는 하루 일당으로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는 사례가 나옵니다. 실제 품삯은 시대와 직종에 따라 달랐으므로, 중요한 것은 두 빚의 규모가 상당히 달랐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셨을 때, 사람들은 무엇을 보았는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찾아오셨을 때,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것을 보았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을 직접 보지 않고도 그 말씀의 권위를 알아보았고, 나인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방문을 고백했습니다. 요한은 기다리던 분이신지 물었고, 어떤 사람들은 요한과 예수님의 서로 다른 사역 방식을 모두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식탁에서 시몬은 예수님께서 죄인인 여자를 알아보지 못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제대로 보신 분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정체는 사람들이 예상하는 방식으로만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이미 세워 놓은 자격과 평가의 경계를 넘어 일하시며, 예수님은 단지 능력 있는 치유자나 뛰어난 예언자로만 머무르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회복을 실제로 이루시는 분으로 드러나십니다.
그렇다고 사람의 죄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시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를 용서하신다고 말씀하셨지, 죄가 없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죄를 정확하게 아는 것과 용서의 은혜를 알아보는 것은 서로 다른 일입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다는 뜻일까요?
시몬의 집에는 여전히 여러 사람이 식사 자리에 비스듬히 누워 있습니다. 그들은 죄까지 용서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서로 묻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논쟁에 다시 답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았던 여자를 향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평화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여자를 죄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마지막으로 들리는 말은 그들의 평가가 아닙니다. 그녀를 보시고, 그녀의 사랑을 알아보시며, 그녀에게 용서를 선언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