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풀어 읽기 · 6장
이 장의 자리 · 4–9장 · 갈릴리에서의 활동
자비로운 아버지를 닮은 사람들
안식일에 한 사람이 예수님 앞에 서 있습니다. 그의 오른손은 말라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시고, 그 손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런데 이 일을 지켜본 사람들은 「광기로 가득 찼고, 예수를 어떻게 할지 서로 이야기했」습니다(6:11). 한 사람의 손이 회복되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분노로 가득 찼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믿음이 그토록 중요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것을 지키는 동안, 눈앞의 사람이 회복되는 기쁨을 놓쳐 버렸기 때문일까요?
누가는 곧이어 예수님께서 산에서 밤새 기도하신 뒤 열두 사도를 세우시는 장면을 들려줍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난한 사람의 복과 부유한 사람의 화를 선언하시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안식일 논쟁, 열두 사도의 선택, 가난과 부유함, 원수 사랑, 남을 판단하는 문제,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 집의 기초까지, 이 말씀들은 처음에는 서로 다른 주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는 하나의 질문이 흐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은 실제로 어떤 모습입니까?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일일까요? 율법을 정확하게 알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서 자신이 받아야 할 대우를 포기하면서까지 그를 사랑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이 질문에 단순한 도덕적 기준으로 답하지 않으십니다.
「너희 아버지가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6:36).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면서, 먼저 그들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 말씀을 듣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집을 지으려면 땅을 깊이 파고 바위 위에 기초를 놓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6장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어떻게 사람을 대하는 태도로 나타나며,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 어떻게 삶의 기초를 놓는 일로 이어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누구인가
문제는 이삭을 먹은 것이 아니었다
안식일에 그가 곡식밭 사이로 지나가는데, 그의 제자들이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고 있었다.누가복음 6:1 · 본디새김
그때 바리새파 사람 몇이 묻습니다.
바리새파 사람 몇이 말했다. 「어찌하여 너희는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느냐?」누가복음 6:2 · 본디새김
배가 고파서 이삭을 조금 뜯어 먹는 것이 왜 문제가 될까요? 율법은 다른 사람의 곡식밭에서 이삭을 손으로 따 먹는 행위 자체를 금지하지 않았습니다. 신명기 23:25에는 이웃의 곡식밭에서 이삭을 손으로 따는 것은 허용하지만, 낫을 대어 거두는 것은 금지하는 규정이 있습니다.
따라서 논쟁은 제자들이 남의 곡식을 훔쳤느냐는 문제가 아닙니다. 안식일에 그 행위를 해도 되느냐는 문제입니다. 제자들이 먹을 것을 얻는 행위와 안식일의 노동 금지 규정이 충돌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실까요? 안식일에 이삭을 따는 것은 노동이 아니라고 설명하실까요? 아니면 제자들이 배가 고팠으니 이번만 예외를 인정해 달라고 부탁하실까요?
예수님은 둘 다 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다윗의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다윗이 먹은 빵은 왜 중요할까?
예수님은 「다윗이 그의 일행과 함께 굶주렸을 때 한 일」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고 물으시며 사무엘상 21:1–6의 사건을 언급하십니다(6:3). 다윗은 사울을 피해 다니던 때에 제사장 아히멜렉을 찾아가 먹을 것을 구했습니다. 그곳에는 일반적인 빵이 없고, 하나님 앞에 차려 놓았던 거룩한 빵이 있었습니다. 레위기 24:5–9에 규정된, 제사장들에게 먹도록 허락된 빵이었습니다. 그런데 아히멜렉은 다윗에게 그 빵을 내어 줍니다.
「그가 어떻게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 하나님 앞에 차려 놓은 빵을 가져다 먹고 그의 일행에게도 주었는지 말이다. 그 빵은 제사장들 말고는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누가복음 6:4 · 본디새김
예수님은 그 빵이 누구에게나 허용된 음식이었다고 주장하지 않으십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다윗의 이야기가 논증의 힘을 갖습니다. 먹을 것을 필요로 하던 다윗과 그의 일행이 일반적으로는 허용되지 않은 거룩한 빵을 먹었고, 그 사건은 성경 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인용을 곧바로 ‘배고프면 모든 율법을 어겨도 된다’는 원칙으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사무엘상에서 다윗이 빵을 얻은 상황은 특별했고, 제사장도 정결에 관한 조건을 확인했습니다. 또한 그것은 안식일에 관한 사건이 아니라 제사장에게 허용된 거룩한 빵에 관한 사건입니다.
그보다 예수님은 성경 자체를 통해 질문을 제기하고 계십니다. 율법을 이해할 때, 하나님께서 그 율법을 주신 목적과 사람의 실제 필요를 어떻게 고려해야 합니까? 다윗의 이야기는 규정을 문자적으로 적용하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지 생각하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십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누가복음 6:5 · 본디새김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에서 예수님이 누구신가의 문제로
예수님은 자신이 안식일 규정을 더 잘 해석할 수 있는 율법 교사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앞 장에서 사람의 아들에게 땅에서 죄를 용서할 권위가 있다고 선언하신 예수님은(5:24), 이제 안식일에 대해서도 자신의 권위를 밝히십니다.
논쟁은 더 이상 제자들이 이삭을 뜯은 행위를 어떻게 분류해야 하는가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 행위를 판단할 권위가 누구에게 있는가 하는 문제로 옮겨갑니다.
출애굽기 20:8–11에서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와 쉼에 연결됩니다. 신명기 5:12–15에서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종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자신들뿐 아니라 자녀와 종들과 나그네까지 쉬게 해야 했습니다.
안식일은 단순히 일을 하지 않는 날이 아닙니다.
사람이 끝없이 노동해야 하는 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쉼을 허락하신 존재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날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안식일을 인간의 고통과 필요에 무관한 규정으로 다루지 않으십니다. 그날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쉼과 생명의 의미를 드러내는 날이라는 사실을, 다음 사건에서 직접 보여 주십니다.
조금 더 깊이
마가복음 2:23에는 이삭을 뜯는 행동이 나오고, 마태복음 12:1에는 뜯어 먹었다는 사실이 나옵니다. 누가는 여기에 손으로 비비는 동작까지 기록합니다. 이삭을 손으로 비비면 낟알을 껍질과 분리할 수 있으므로, 이 행동을 작은 규모의 탈곡으로 보아 바리새파 사람들의 문제 제기를 이해하는 해석이 있습니다. 곡식을 거두거나 탈곡하는 일은 안식일에 금지되는 노동의 범주에 해당한다고 판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누가는 그들이 정확히 어느 동작을 어떤 규정에 따라 문제 삼았는지 설명하지 않으므로, 손으로 비비는 행위가 곧 고발 근거였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손을 고치는 것이 왜 목숨을 구하는 일인가
회당 가운데 한 사람을 세우시다
다른 안식일입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곳에는 오른손이 마른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는 그 손이 어떻게, 얼마나 오래 말랐는지는 알려 주지 않지만, 굳이 ‘오른손’이라고 기록하여 그 사람의 고통을 막연한 질병이 아니라 실제 신체의 문제로 바라보게 합니다. 손이 온전히 기능하지 못하는 일은 일상생활에 상당한 제약을 가져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회당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그를 다른 시선으로 보고 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가 안식일에 고치는지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를 고발할 거리를 찾으려는 것이었다.누가복음 6:7 · 본디새김
같은 회당 안에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다릅니다. 손이 마른 사람에게는 회복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감시하는 사람들에게는 고발할 근거가 필요합니다.
그는 그들이 속으로 따지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손이 마른 사람에게 말했다.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그 사람이 일어나 섰다.누가복음 6:8 · 본디새김
이 명령은 단순히 치료하기 편한 위치로 이동하라는 뜻만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회당 한가운데 세우십니다. 안식일에 무엇이 허용되는지를 논쟁하려면 먼저 이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이제 누구도 그 사람을 논쟁에서 지워 버릴 수 없습니다.
선을 행하는 일과 악을 행하는 일 사이에 중립이 있는가?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너희에게 묻는다. 안식일에 해도 되는 것은 선을 행하는 일이냐, 악을 행하는 일이냐? 목숨을 구하는 일이냐, 빼앗는 일이냐?」누가복음 6:9 · 본디새김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을 고쳐도 되느냐’고 묻지 않으십니다. 선을 행하는 일과 악을 행하는 일, 목숨을 구하는 일과 빼앗는 일을 대비하시며 질문의 범위를 넓히십니다.
본문에는 그 사람이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는 설명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의 손을 회복시키는 일을 ‘목숨을 구하는 일’과 나란히 놓으십니다. 사람의 삶을 회복시키고 그가 겪는 고통을 덜어 주는 일도 생명을 향한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규정을 지키는 문제에는 민감하지만, 눈앞의 사람이 회복되는 일에 대해서는 적어도 이 장면에서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그들에게 묻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려는 여러분의 태도는 지금 이 사람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옵니까? 이것은 아무 행동도 하지 않으면 언제나 악을 행한 것이라는 일반적인 명제가 아니라, 예수님을 고발하려는 사람들이 눈앞의 회복을 어떻게 대하는지 묻는 구체적인 장면입니다.
그 자리에서는 선을 행하지 않는 선택조차 도덕적으로 중립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가 그들을 모두 둘러보고 그 사람에게 말했다. 「네 손을 내밀어라.」 그 사람이 그렇게 했고 그의 손이 회복되었다.누가복음 6:10 · 본디새김
예수님은 어떤 치료 도구도 사용하지 않으시고, 손을 얹으셨다고도 기록되지 않습니다. 말씀하시고, 그 사람이 그 말씀에 따라 행동하자 손이 회복됩니다.
그들은 광기로 가득 찼고, 예수를 어떻게 할지 서로 이야기했다.누가복음 6:11 · 본디새김
예수님은 조금 전에 목숨을 구하는 일과 빼앗는 일을 대비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람을 회복시키시자, 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할지 의논하기 시작합니다. 누가는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해를 끼치기로 결정했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이 배치는 예수님의 질문을 더욱 날카롭게 만듭니다.
누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습니까? 율법을 지키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일까요, 아니면 안식일에 고통받는 사람을 회복시키신 예수님일까요?
이 장면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확신이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의 행동과 충돌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누가는 그 갈등을 뒤로한 채 예수님께서 산으로 올라가시는 장면으로 이야기를 옮깁니다.
밤새 기도하신 뒤 열둘을 세우시다
왜 이 시점에 열두 사도를 세우셨을까?
그 무렵에 그가 기도하러 산으로 나갔다. 그리고 하나님에게 기도하며 밤을 새웠다.누가복음 6:12 · 본디새김
누가는 그 기도의 내용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도 다음에 어떤 일이 이어지는지는 분명히 기록합니다.
날이 밝자 그가 제자들을 불러 그 가운데 열둘을 골랐다. 그들에게 사도라는 이름도 붙였다.누가복음 6:13 · 본디새김
제자들은 이미 있었습니다. 앞 장에서 시몬과 동료들, 레위가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 가운데 특별히 열둘을 선택하십니다.
왜 열둘일까요? 이스라엘 열두 지파와의 연결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회복하고 새롭게 모으는 자신의 사역을 열둘이라는 숫자를 통해 드러내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연결은 제자들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는 일을 말씀하시는 누가복음 22:30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사도’라는 이름이 뜻하는 것
‘사도’는 보내진 사람, 파견된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누가는 아직 그들이 어디로 보내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실제로 여러 마을에 파견되는 장면은 누가복음 9:1–6에 나옵니다. 이 이름은 앞으로 그들이 감당할 사명을 미리 보여 줍니다.
하지만 그들이 보내질 사람이 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실제로 열둘을 선택하신 예수님은 그들을 즉시 보내시지 않고, 산에서 내려와 무리 가운데 서신 뒤 제자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십니다.
선택된 열둘 가운데 배신자가 있다
열두 사람의 명단은 시몬 베드로로 시작하여 유다 이스가리옷으로 끝납니다.
야고보의 유다와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가리옷, 이 열둘이다.누가복음 6:16 · 본디새김
밤새 기도하신 뒤 선택하신 열둘 가운데 훗날 배신자가 되는 사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왜 유다를 선택하셨는지 설명하지 않고, 유다가 처음부터 배신할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정해져 있었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이 사실은 열두 사도의 선택을 지나치게 이상화하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님께 선택되었다는 사실과 예수님의 말씀대로 끝까지 살아가는 일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이 장의 마지막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열둘의 명단에 배신자가 등장한다는 사실은 그 마지막 경고를 더욱 무겁게 들리게 합니다.
산에서 내려와 평평한 곳에 서시다
그가 그들과 함께 내려와 평평한 곳에 섰다. 그의 제자들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고, 온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또 두로와 시돈의 바닷가에서 온 수많은 백성도 모여 있었다.누가복음 6:17 · 본디새김
두로와 시돈은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중심 지역 바깥에 있는 페니키아의 도시들입니다. 그곳에서 온 모든 사람이 이방인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의 출신지가 넓게 펼쳐져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병을 고침받으려고 왔고, 「그에게서 능력이 나와 모두를 낫게」 했습니다(6:19). 누가는 말씀을 듣는 일과 치유받는 일을 함께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치러 온 사람들을 말씀과 무관하게 대하지 않으시고, 말씀을 들으러 온 사람들의 육체적인 고통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이 장면의 한복판에서 예수님은 눈을 들어 제자들을 바라보십니다. 무리는 넓게 모여 있지만, 이제 시작되는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누가는 이 설교를 열두 사도의 선택과 큰 무리의 치유 바로 뒤에 배치했습니다.
사람들을 회복시키시는 예수님이, 이제 회복된 하나님의 백성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설교는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설교와 많은 내용이 겹치지만, 누가는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와 평평한 곳에 서셨다고 기록하므로 흔히 ‘평지설교’라고 부릅니다. 두 복음서가 같은 설교를 서로 다르게 전한 것인지, 서로 다른 자리에서 하신 유사한 설교를 기록한 것인지는 해석이 갈리는 문제이며, 본문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누가 복이 있고, 누가 화가 있는가
가난한 사람이 왜 복이 있는가?
예수님은 뜻밖의 선언으로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그가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며 말했다. 「가난한 너희는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기 때문이다.」누가복음 6:20 · 본디새김
마태복음 5:3에는 ‘영이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러나 누가는 그냥 「가난한 너희」라고 기록합니다. 마태복음의 표현을 가져와 ‘마음이 겸손한 사람은 복이 있다’는 뜻으로만 설명하면, 누가가 실제로 말한 가난의 의미가 흐려집니다.
「지금 주린 너희는 복이 있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는 너희는 복이 있다. 너희가 웃을 것이기 때문이다.」누가복음 6:21 · 본디새김
여기에는 실제 배고픔과 슬픔의 현실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난이 훌륭하기 때문이라고도, 배고픔이나 눈물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든다고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처지를 바꾸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권세 있는 사람들을 낮추시고 비천한 사람들을 높이시며, 굶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유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보내시는 하나님을 노래했습니다(1:52–53). 이제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나라가 가난한 제자들의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물론 이것이 모든 가난한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와 무관하게 자동으로 구원받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바라보며 말씀하시고, 이어서 자신을 따르는 삶과 그로 인한 고난도 언급하십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가난을 단순히 마음의 태도로 바꾸어서도 안 됩니다. 누가는 물질적인 결핍과 실제적인 배고픔을 하나님의 나라가 가져올 회복의 중요한 대상으로 보여 줍니다.
지금과 앞으로가 뒤집힌다
이 선언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열쇠는 「지금」이라는 말입니다. 지금 주린 사람과 지금 우는 사람에게 앞으로 배부르게 되고 웃게 될 날이 약속됩니다. 이어지는 화의 선언에서도 현재와 미래가 대조됩니다.
「지금 배부른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가 주릴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웃는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가 슬퍼하고 울 것이기 때문이다.」누가복음 6:25 · 본디새김
예수님은 세상일은 돌고 돈다는 일반적인 지혜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인간의 현재 상태에 대한 판단을 뒤집을 수 있다는 사실을 선언하십니다. 현재 가난하다고 해서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이 아니고, 지금 배부르다고 해서 하나님의 복을 독점한 사람도 아닙니다.
이것이 부유하다는 사실만으로 악하다고 단정할 근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누가복음 자체에도 재산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을 돕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부유함은 사람이 자신의 현재 상태를 충분하다고 여기게 만들 수 있고, 지금 누리는 위로와 만족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위험을 드러내십니다.
‘이미 다 받았다’는 말의 무게
「그러나 부유한 너희에게는 화가 있다. 너희 위로를 이미 다 받았기 때문이다.」누가복음 6:24 · 본디새김
예수님은 부유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이미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누리는 풍족함과 위로는 실제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삶의 전부가 될 때입니다.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의 차이는 통장에 있는 돈의 액수만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경제적인 의미를 지워서도 안 됩니다. 누가가 보여 주는 하나님의 나라는 실제로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의 처지를 문제 삼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사회의 불평등과 결핍에 무관심하지 않으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역전은 재산의 문제를 넘어 사람들의 평가에까지 이어집니다.
사람들에게 미움받는 것이 왜 복일까?
「사람의 아들 때문에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할 때에, 너희를 따돌리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고 하여 내쫓을 때에 너희는 복이 있다.」누가복음 6:22 · 본디새김
여기에는 중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무례함이나 잘못 때문에 배척당하는 일을 복이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사람의 아들 때문에 미움받는 경우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때 기뻐하고 뛰놀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아라, 하늘에 있는 너희 삯이 크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의 조상들이 예언자들을 똑같이 대했으니 말이다.」누가복음 6:23 · 본디새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왕과 백성에게 거부당하고 박해받기도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런 경험을 여러 차례 겪었습니다(예레미야 20:1–2; 38:6).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다가 배척당하는 사람들이 예언자들의 길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의 부정적인 평가가 언제나 하나님의 평가와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사람들의 긍정적인 평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할 때에 화가 있다. 그 사람들의 조상들이 거짓 예언자들을 똑같이 대했으니 말이다.」누가복음 6:26 · 본디새김
참된 예언자는 배척당할 수 있고, 거짓 예언자는 칭찬받을 수 있습니다. 칭찬받는 모든 사람이 거짓 예언자라는 뜻은 아니지만, 인기와 평판은 하나님의 뜻에 충실한지를 판단하는 충분한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더욱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제자들이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원수에게 원수처럼 대하지 말라는 것 이상이다
「그러나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이들에게 잘해 주어라.」누가복음 6:27 · 본디새김
첫머리의 「그러나」는 바로 앞의 말씀과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제자들을 미워하고 배척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똑같이 미움으로 갚고, 욕하는 사람을 욕하고 배척하는 사람을 배척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길을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저주하는 이들을 축복하여라. 너희를 모질게 대하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누가복음 6:28 · 본디새김
예수님은 마음속의 감정만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상대방을 향한 행동과 말, 기도의 방향을 바꾸라고 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말은 원수를 좋아하는 감정이 저절로 생겨야 한다는 뜻으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적대적으로 행동한다는 사실이, 내가 그를 대하는 방식까지 결정하게 두지 않는 것입니다.
뺨을 맞으면 다른 뺨도 내밀어야 하는가?
「네 뺨을 치는 사람에게 다른 뺨도 대 주어라. 네 겉옷을 가져가는 사람이 속옷마저 가져가는 것도 막지 마라.」누가복음 6:29 · 본디새김
누군가 나를 때리면 계속 맞아야 한다는 뜻일까요? 내 물건을 빼앗는 사람에게 가진 것을 전부 내주어야 한다는 뜻일까요?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라고 명령하신 뒤에 이 사례들을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이 행동들은 보복과 적대의 악순환을 끊는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으로 제시됩니다. 뺨을 맞으면 되받아치고, 옷을 빼앗기면 그만큼 해를 입히는 보복의 논리를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말씀이 폭력 피해자에게 위험한 상황을 벗어나지 말라고 요구하거나, 학대를 당하면서도 도움을 요청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이 구절만으로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안전을 지키는 행동을 금지한다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만 미워하지 않으면 된다’는 정도로 약화해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손해를 감수하고, 보복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그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 사랑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요구는 분명히 급진적입니다.
받고 싶은 대로 해 주라는 말씀
「사람들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그들에게 해 주어라.」누가복음 6:31 · 본디새김
흔히 황금률이라고 불리는 말씀입니다. 이 말을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를 바라니 나도 해를 끼치지 않겠다’는 정도로 읽으면 중요한 특징을 놓칩니다. 예수님은 「해 주어라」라고 하십니다.
내가 어려울 때 도움을 받고 싶다면 다른 사람이 어려울 때 도우라는 것입니다. 내가 실수했을 때 용서받고 싶다면 다른 사람의 실수에도 용서를 베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행동해도 상대방이 똑같이 돌려주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바로 그 문제로 들어가십니다.
돌려받을 수 있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너희를 사랑하는 이들을 사랑한다면 너희에게 무슨 고마움이 돌아오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누가복음 6:32 · 본디새김
예수님은 비슷한 질문을 세 번 반복하십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자신에게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 되받을 것을 기대하며 돈을 꾸어 주는 것입니다. 이 행동들 자체가 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문제는 사랑과 선행이 자신에게 돌아올 이익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경우입니다.
그것은 특별히 새로운 삶의 방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인들도 그렇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 원수를 사랑하여라. 선을 행하여라. 아무것도 되받기를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 삯이 클 것이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분은 고마움을 모르는 이들과 악한 이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누가복음 6:35 · 본디새김
세 번이나 「무슨 고마움이 돌아오겠느냐?」고 물으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는 고마움을 모르는 사람에게도 인자하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감사하는 사람에게만 선을 베푸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요?
원수 사랑은 하나님의 성품에서 나온다
이 명령은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 도덕적 성취를 이룰 수 있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이유를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에서 찾으십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예수님께서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고 불리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1:32, 35).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도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제자들이 동일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을 나타내는 삶을 강조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아버지를 닮습니다.
그 아버지는 자신에게 고마워하지 않는 사람과 악한 사람에게도 인자하신 분입니다. 사람들이 선한 사람에게만 선을 베풀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만 호의를 베푸는 동안, 하나님은 자신에게 감사를 돌리지 않는 사람에게도 선을 베푸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로 그런 하나님을 닮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말씀을 한 문장에 모으십니다.
「너희 아버지가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누가복음 6:36 · 본디새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순서입니다. 아버지가 이미 자비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그 자녀들도 아버지를 닮아 자비롭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사랑의 기준은 사람들이 나에게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어떻게 행동하시느냐에 있습니다.
이것이 원수 사랑의 중심입니다.
그 사랑은 인간의 성격이 유난히 온순하거나 관대한 데서 비롯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그분을 닮아 가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러한 자비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태도에도 나타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무슨 고마움이 돌아오겠느냐?」에 사용된 원어는 카리스(χάρις)로, 은혜, 호의, 감사 등을 뜻하며 문맥에 따라 인정받을 만한 가치나 고마움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35절에서 ‘고마움을 모르는’이라는 뜻의 아카리스토스(ἀχάριστος)는 이 카리스와 같은 어근을 지니므로, 세 번의 질문과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낱말로도 이어집니다. 또한 원수에게 선을 베풀라는 말씀은 구약과 완전히 단절된 새로운 규정이 아닙니다. 레위기 19:18은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같은 장 33–34절은 거류하는 외국인을 사랑하라고 명령하며, 잠언 25:21–22도 원수가 굶주리면 먹이고 목마르면 물을 주라고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기존 성경의 가르침을 제자들에게 직접적이고 포괄적인 명령으로 제시하십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전에 보아야 할 것
판단하지 말라는 것은 아무것도 분별하지 말라는 뜻일까?
「그리고 판단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결코 판단받지 않을 것이다.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결코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놓아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놓여날 것이다.」누가복음 6:37 · 본디새김
이 말씀을 모든 종류의 판단이나 비판을 금지하는 말씀으로 읽으면, 좋은 나무와 썩은 나무가 열매로 구별된다는 뒤의 말씀(6:43–44)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37절에서는 ‘판단하다’와 ‘단죄하다’가 나란히 사용됩니다. 예수님은 어떤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 살펴보는 지적 활동만을 문제 삼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향해 최종적인 부정의 판정을 내리는 태도를 경계하십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악한 사람으로 단정하고, 그에게 자비를 베풀 필요가 없다고 결정해 버리는 태도입니다.
‘놓아주어라’는 풀어 주다, 보내 주다, 석방하다 등의 뜻을 지닌 말입니다. 이 문맥에서 용서와 관계되지만, 마음속의 좋지 않은 감정을 없애는 일보다 넓은 이미지를 담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붙잡고 정죄하는 태도를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잘못한 사람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악한 행동을 선한 행동이라고 부르거나, 피해자가 부당한 일을 계속 감수해야 한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다른 사람을 단죄하는 권리를 자신의 손에 쥐고 놓지 않으려는 태도이며, 그런 태도는 자비로운 아버지를 닮은 모습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눌러 담고 흔들어 넘치게 주시는 하나님
「주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 눌러 담기고 흔들리고 넘쳐흐르는 좋은 되를 너희 품에 안겨 줄 것이다. 너희가 재는 그 되로 너희에게 재어질 것이기 때문이다.」누가복음 6:38 · 본디새김
되에 곡식을 담을 때 위에서 누르고 흔들어 사이사이의 공간을 줄이면, 넘칠 만큼 가득 담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담은 곡식을 옷자락을 접어 만든 공간에 안겨 주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넉넉하게, 아끼지 않고 주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앞에서 아무것도 되받기를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앞의 말씀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보상을 계산하지 말라는 명령이고, 뒤의 말씀은 그런 자비와 관대함이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서 헛되지 않다는 약속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남에게 베풀면 반드시 더 많은 돈으로 돌려받는다는 보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자비와 용서와 나눔이라는 앞선 문맥 안에서, 단죄하는 대신 놓아주고 움켜쥐는 대신 베푸는 삶에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풍성함을 보여 줍니다.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이끌 수 있는가?
그가 그들에게 비유도 들어 말했다.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이끌 수 있겠느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누가복음 6:39 · 본디새김
주제가 갑자기 바뀐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이 비유는 다른 사람을 올바르게 이끌거나 고쳐 주려는 사람이 먼저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문제로 이어집니다.
「제자는 선생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온전히 훈련된 제자는 저마다 자기 선생과 같아질 것이다.」누가복음 6:40 · 본디새김
열둘은 선택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이미 완성된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선생에게 배워야 하고, 그 목표는 선생의 말을 기억하는 것을 넘어 선생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조금 전 자비로운 아버지를 닮으라는 말씀과 함께 읽으면,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배우고 그 자비가 자신의 삶에서 나타나도록 자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사람이 자신은 제대로 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형제의 눈에 있는 티와 자기 눈의 들보
「그런데 너는 왜 네 형제의 눈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에 있는 들보는 알아채지 못하느냐?」누가복음 6:41 · 본디새김
자기 눈에 거대한 들보가 있다면 제대로 앞을 볼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작은 티를 찾아내고 빼 주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과장된 장면으로, 다른 사람의 잘못에는 민감하지만 자기 자신의 문제에는 눈먼 사람을 드러내십니다.
「정작 너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네 형제에게 『형제여, 네 눈에 있는 티를 빼내게 해 다오』 하겠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만큼 똑똑히 볼 것이다.」누가복음 6:42 · 본디새김
예수님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빼지 말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문제는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을 고치려 드는 태도이며, 「먼저」 자기 자신을 살피는 일이 앞서야 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37절의 판단하지 말라는 명령과 42절의 티를 빼라는 명령은 충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단죄하지 말라고 하시지만, 아무런 분별도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무엇이 사람을 그런 모습으로 만듭니까? 왜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살리는 말을 하고,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을 단죄하는 말을 합니까? 문제는 사람의 마음에 무엇이 쌓여 있는가와 관련됩니다.
나무는 열매로 알려진다
좋은 열매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그도 그럴 것이, 좋은 나무가 썩은 열매를 내지 않고, 또 썩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내지 않는다.」누가복음 6:43 · 본디새김
「나무는 저마다 자기 열매로 어떤 나무인지 알려지기 때문이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거두지 않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따지 않는다.」누가복음 6:44 · 본디새김
사람을 그의 행동으로 평가하라는 교훈도 포함될 수 있지만, 비유는 그보다 깊은 문제를 다룹니다. 좋은 열매 모양의 물건을 매달아 놓는다고 해서 그 나무가 좋은 나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열매는 나무의 상태에서 나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선을 행하고, 판단하지 말고, 베풀라는 말씀은 규칙을 외우고 억지로 실천하는 것만으로 충분할까요? 예수님은 그 행동들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말씀하십니다.
입은 마음에 넘치는 것을 말한다
「선한 사람은 자기 마음의 선한 보물에서 선한 것을 꺼내 놓고, 악한 사람은 자기 마음의 악한 보물에서 악한 것을 꺼내 놓는다. 그의 입이 마음에 넘치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누가복음 6:45 · 본디새김
여기서 마음은 감정이 일어나는 장소만이 아니라 생각과 의지, 판단과 욕망이 자리하는 내면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그 마음을 보물을 간직한 곳처럼 묘사하십니다. 사람은 자기 안에 쌓여 있는 것을 말과 행동으로 꺼내 놓습니다.
안식일에 손이 마른 사람이 회복되었을 때, 서기관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실제로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입에서는 그 일을 기뻐하는 말보다 예수님을 상대로 무엇을 할지에 관한 논의가 나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반응의 배후에 어떤 마음이 있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만 바꾸라고 요구하지 않으시고, 그 행동이 나오는 마음의 상태를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알고 그분을 닮아 가는 사람에게서는 그 자비가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다만 이 비유도 다른 사람의 열매를 검사하기보다, 자기 눈의 들보부터 보라는 말씀처럼 먼저 자신이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지 돌아보도록 이끕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이 모든 말씀의 마지막에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왜 나를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내 말을 행하지 않는가
‘주님’이라는 고백과 순종 사이
「어찌하여 너희는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을 하지 않느냐?」누가복음 6:46 · 본디새김
장 처음에 예수님은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대해 어떤 권위를 가지셨는지가 문제였다면, 마지막에는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실제로 그 말씀에 순종하는지가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문제는 주님이라고 부르는 말과 실제 행동이 서로 어긋나는 것입니다. 이 장에서 이미 그 말씀의 내용을 들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주어졌다는 선언을 받아들이는 것,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 고마움을 모르는 사람에게도 인자하신 하나님을 닮는 것, 다른 사람을 단죄하기 전에 자신의 눈에서 들보를 빼는 것, 마음의 보물에서 선한 것을 꺼내 놓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긴 설명 대신 집을 짓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땅을 깊이 파고 바위 위에 기초를 놓은 사람
「나에게 와서 내 말을 듣고 그 말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이 어떤 사람과 같은지 너희에게 보여 주겠다.」누가복음 6:47 · 본디새김
「그는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그 사람은 땅을 파고 깊이 파 내려가 바위 위에 기초를 놓았다. 큰물이 나서 강물이 그 집에 들이쳤으나 그 집을 흔들지 못했다. 잘 지어졌기 때문이다.」누가복음 6:48 · 본디새김
누가가 강조하는 것은 기초를 놓기까지의 과정입니다. 땅을 파고, 깊이 파 내려가고, 마침내 바위 위에 기초를 놓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벽을 세우기 전에 보이지 않는 땅속에서 해야 할 수고가 있습니다.
「그러나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기초 없이 땅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 강물이 들이치자 그 집은 곧 주저앉아 크게 무너졌다.」누가복음 6:49 · 본디새김
그 사람도 집을 짓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집을 지탱할 토대가 없습니다. 집을 짓고 있을 때에는 그 차이가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큰물이 나서 강물이 들이치는 순간 두 집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두 집 모두 큰물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에게 아무런 어려움도 찾아오지 않는다는 약속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무너지지 않을 기초가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말씀을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의 차이
두 사람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첫 번째 사람은 듣고 행하고, 두 번째 사람은 듣지만 행하지 않습니다. 차이는 누가 더 많은 말씀을 들었는가가 아니라, 누가 그 말씀대로 행동했는가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은 실수 한 번 없이 완벽하게 살아야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장 앞부분에서 예수님은 고마움을 모르는 사람과 악한 사람에게도 인자하신 하나님을 보여 주셨습니다. 마지막 비유를 하나님의 자비와 분리하여, 모든 명령을 완벽하게 지켜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제자도는 자신이 이미 완전하다고 확신하는 사람의 삶이 아닙니다. 자기 눈의 들보를 먼저 빼라는 말씀처럼,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그 말씀에 따라 계속 방향을 바꾸어 가는 삶입니다. 그것이 집의 기초를 깊이 파 내려가는 일과 닮아 있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이 가르치시는 새로운 삶
누가복음 6장을 처음부터 다시 바라보면, 한 가지 뜻밖의 대조가 나타납니다. 장 앞부분에서 사람들은 안식일에 무엇을 해도 되는지를 놓고 논쟁하며 예수님을 고발할 거리를 찾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에 손이 마른 사람을 회복시키신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에게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에게도 선을 행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행하시는 선을 제자들에게도 가르치시고, 그 선의 근원을 「너희 아버지가 자비로우신」 하나님에게서 찾으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은 규정을 엄격하게 지키는 일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서 결정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일이 결국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상대방이 사랑받을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격을 따져서만 인자함을 베푸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단죄하지 않는 것은 모든 행동이 옳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해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은 반드시 더 많이 돌려받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버지의 넉넉함을 닮아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두 집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두 사람 모두 집을 지었고, 두 사람 모두 강물이 들이치는 날을 맞았습니다. 차이는 눈에 보이는 집의 모양에 있지 않았습니다.
집을 짓는 사람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랜 수고를 합니다. 깊이 파고 내려가 단단한 바위를 찾고 그 위에 기초를 놓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직 아무것도 세워지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큰물이 납니다.
강물이 집을 향해 밀려옵니다. 눈에 보이던 모든 것이 흔들리는 순간, 사람들은 비로소 그 집이 무엇 위에 세워져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 집이 흔들리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깊이 파 내려가 바위 위에 기초를 놓았기 때문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