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풀어 읽기 · 6장
이 장의 자리 · 4–9장 · 갈릴리에서의 활동
자비로운 아버지를 닮은 사람들
안식일에 한 사람이 예수님 앞에 서 있습니다. 그의 오른손은 말라 제대로 쓰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손을 뻗으라고 말씀하시고, 그 손을 낫게 해 주십니다.
그런데 이 일을 지켜본 사람들은 「분별을 잃을 만큼 화가 나서, 예수를 어떻게 할지 서로 의논했습니다」(6:11).
왜 그랬을까요?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믿음이 그토록 중요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것을 지키는 동안, 눈앞의 사람이 회복되는 기쁨을 놓쳐 버렸기 때문일까요?
누가는 곧이어 예수님께서 산에서 밤새 기도하신 뒤 열두 사도를 세우시는 장면을 들려줍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가난과 부유함, 원수 사랑, 남을 판단하는 문제, 좋은 나무와 썩은 나무, 집의 기초까지 처음에는 서로 다른 주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는 하나의 질문이 흐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은 실제로 어떤 모습입니까?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일일까요? 율법을 정확하게 알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서 자신이 받아야 할 대우를 포기하면서까지 그를 사랑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이 질문에 단순한 도덕적 기준으로 답하지 않으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6:36).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면서, 먼저 그들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 말씀을 듣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집을 지으려면 땅을 깊이 파고 바위 위에 기초를 놓아야 합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누구인가
문제는 이삭을 먹은 것이 아니었다
바리새파 사람 몇이 말했습니다. 「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누가복음 6:2 · 두루새김
오늘의 독자에게는 질문 자체가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배가 고파서 이삭을 조금 뜯어 먹는 것이 왜 문제가 될까요?
율법은 다른 사람의 곡식밭에서 이삭을 손으로 따 먹는 행동 자체를 금지하지 않았습니다. 신명기 23:25에는 이웃의 곡식밭에서 이삭을 손으로 따는 것은 허용하지만, 낫을 대어 거두는 것은 금지하는 규정이 있습니다. 따라서 논쟁은 제자들이 남의 곡식을 훔쳤느냐는 문제가 아닙니다. 안식일에 그 행동을 해도 되느냐는 문제입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께서 곡식밭 사이를 지나가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고 있었습니다.누가복음 6:1 · 두루새김
누가는 다른 복음서보다 구체적으로, 손으로 비비는 동작까지 기록합니다. 제자들이 먹을 것을 얻는 행동과 안식일의 노동 금지 규정이 충돌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실까요? 안식일에 이삭을 따는 것은 노동이 아니라고 설명하실까요? 아니면 제자들이 배가 고팠으니 이번만 예외를 인정해 달라고 부탁하실까요?
예수님은 둘 다 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다윗의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다윗이 먹은 빵은 왜 중요할까?
예수님은 사무엘상 21:1–6의 사건을 언급하십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다니던 때에 제사장 아히멜렉을 찾아가 먹을 것을 구했습니다. 그곳에는 일반적인 빵이 없고, 하나님 앞에 차려 놓았던 거룩한 빵이 있었습니다. 레위기 24:5–9에 규정된, 제사장들에게 먹도록 허락된 빵이었습니다. 그런데 아히멜렉은 다윗에게 그 빵을 내어 줍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 하나님 앞에 차려 놓은 빵을 가져다 먹고,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도 주었다. 그 빵은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것이었다.」누가복음 6:4 · 두루새김
예수님은 그 빵이 누구에게나 허용된 음식이었다고 주장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빵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정하십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다윗의 이야기가 주장을 뒷받침하는 힘을 갖습니다.
먹을 것을 필요로 하던 다윗과 그의 일행이 일반적으로는 허용되지 않은 거룩한 빵을 먹었고, 그 사건은 성경 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인용을 곧바로 「배고프면 모든 율법을 어겨도 된다」는 원칙으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사무엘상에서 다윗이 빵을 얻은 상황은 특별했고, 제사장도 정결에 관한 조건을 확인했습니다. 또한 그 이야기는 안식일이 아니라 거룩한 빵에 관한 사건입니다.
그보다 예수님은 성경 자체를 통해 질문을 던지고 계십니다. 율법을 이해할 때, 하나님께서 그 율법을 주신 목적과 사람의 실제 필요를 어떻게 고려해야 합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십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또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누가복음 6:5 · 두루새김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에서 예수님이 누구신가의 문제로
예수님은 자신이 안식일 규정을 더 잘 해석할 수 있는 율법 교사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앞 장에서 예수님은 인자에게 땅에서 죄를 용서할 권위가 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5:24). 이제 안식일에 대해서도 자신의 권위를 밝히십니다.
논쟁은 더 이상 제자들이 이삭을 뜯은 행동을 어떻게 분류해야 하는가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 행동을 판단할 권위가 누구에게 있는가 하는 문제로 옮겨갑니다.
출애굽기 20:8–11에서는 안식일이 하나님의 창조와 쉼에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쉬셨으므로, 이스라엘도 그날을 거룩하게 구별하도록 명령받았습니다. 신명기 5:12–15에서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종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종살이에서 이끌어 내셨으므로, 자신들뿐 아니라 자녀와 종들과 나그네까지 쉬게 해야 했습니다.
안식일은 단순히 일을 하지 않는 날이 아닙니다.
사람이 끝없이 일해야 하는 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쉼을 허락하신 존재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날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그날이 쉼과 생명의 의미를 드러내는 날이라는 사실을, 다음 사건에서 직접 보여 주십니다.
손을 고치는 것이 왜 목숨을 구하는 일인가
회당 가운데 한 사람을 세우시다
다른 안식일입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곳에는 오른손이 말라 제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는 그의 손이 왜, 얼마나 오래 그런 상태였는지 알려 주지 않지만, 「오른손」이라는 구체적인 표현은 독자가 그 사람의 고통을 막연한 질병이 아니라 실제 몸의 문제로 바라보게 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누가복음 6:7 · 두루새김
같은 회당 안에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다릅니다. 손이 마른 사람에게는 회복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감시하는 사람들에게는 고발할 근거가 필요합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속생각을 알고, 손이 마른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 서라.」 그 사람은 일어나 가운데 섰습니다.누가복음 6:8 · 두루새김
예수님은 그 사람을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회당 한가운데 세우십니다. 안식일에 무엇이 허용되는지를 논쟁하려면 먼저 이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이제 누구도 그 사람을 논쟁에서 지워 버릴 수 없습니다.
선을 행하는 일과 악을 행하는 일 사이에 중립이 있는가?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해도 되는 일은 어느 쪽이냐? 선한 일을 하는 것이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냐? 생명을 구하는 것이냐, 죽이는 것이냐?」누가복음 6:9 · 두루새김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을 고쳐도 되느냐」고 묻지 않으십니다. 선한 일을 하는 것과 악한 일을 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을 대비하십니다. 질문의 범위가 훨씬 넓어집니다.
본문에는 그 사람이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는 설명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의 손을 회복시키는 일을 「생명을 구하는 것이냐」라는 질문과 나란히 놓으십니다. 사람의 삶을 회복시키고 그가 겪는 고통을 덜어 주는 일도 생명을 향한 행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강하게 대비하셨을까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규정을 지키는 문제에는 민감하지만, 눈앞의 사람이 회복되는 일에 대해서는 적어도 이 장면에서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아무 행동도 하지 않으면 언제나 악한 일을 한 것이라는 일반적인 주장과는 다릅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는 선한 일을 하지 않는 선택조차 도덕적으로 중립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들을 모두 둘러보신 뒤 그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손을 뻗어라.」 그가 손을 뻗자 손이 나았습니다.누가복음 6:10 · 두루새김
예수님은 어떤 치료 도구도 사용하지 않으시고, 손을 얹으셨다고도 기록되지 않습니다. 말씀하시고, 그 사람이 그 말씀에 따라 행동하자 손이 낫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입니다.
그들은 분별을 잃을 만큼 화가 나서, 예수를 어떻게 할지 서로 의논했습니다.누가복음 6:11 · 두루새김
예수님은 조금 전에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을 대비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람을 회복시키시자, 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할지 의논하기 시작합니다. 누가는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해를 끼치기로 결정했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이야기의 순서는 예수님의 질문을 더욱 날카롭게 만듭니다.
누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습니까?
이 장면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확신이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의 행동과 충돌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누가는 그 갈등을 뒤로한 채 예수님께서 산으로 올라가시는 장면으로 이야기를 옮깁니다.
밤새 기도하신 뒤 열둘을 세우시다
왜 이 시점에 열두 사도를 세우셨을까?
그 무렵 예수께서는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 기도하며 밤을 새우셨습니다.누가복음 6:12 · 두루새김
누가는 그 기도의 내용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도 다음에 어떤 일이 이어지는지는 분명히 기록합니다.
날이 밝자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그 가운데 열두 사람을 뽑으셨습니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습니다.누가복음 6:13 · 두루새김
제자들은 이미 있었습니다. 앞 장에서 시몬과 동료들, 레위가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 제자들 가운데 특별히 열두 사람을 뽑으십니다.
왜 열둘일까요? 이스라엘 열두 지파와의 연결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회복하고 새롭게 모으는 자신의 일을 열둘이라는 숫자를 통해 드러내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연결은 제자들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는 일을 말씀하시는 누가복음 22:30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사도」라는 이름이 뜻하는 것
「사도」는 보내진 사람, 파견된 사람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누가는 아직 그들이 어디로 보내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실제로 여러 마을에 보내지는 장면은 누가복음 9:1–6에 나옵니다. 이 이름은 앞으로 그들이 감당할 사명을 미리 보여 줍니다.
하지만 그들이 보내질 사람이 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실제로 열둘을 뽑으신 예수님은 그들을 즉시 보내시지 않고, 산에서 내려와 무리 가운데 서신 뒤 제자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십니다.
선택된 열둘 가운데 배신자가 있다
열두 사람의 명단은 시몬 베드로로 시작하여 유다 이스가리옷으로 끝납니다.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유다 이스가리옷이었습니다. 유다 이스가리옷은 나중에 배신자가 되었습니다.누가복음 6:16 · 두루새김
예수님은 밤새 기도하신 뒤 열둘을 뽑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훗날 배신자가 되는 사람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왜 유다를 뽑으셨는지 설명하지 않고, 유다가 처음부터 배신할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정해져 있었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이 사실은 열두 사도의 선택을 지나치게 이상적인 모습으로만 보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님께 선택되었다는 사실과 예수님의 말씀대로 끝까지 살아가는 일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주님,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이 장의 마지막 경고가 그래서 더욱 무겁게 들립니다.
산에서 내려와 평평한 곳에 서시다
예수께서는 그들과 함께 내려와 평평한 곳에 서셨습니다. 그곳에는 많은 제자가 모여 있었고, 온 유대와 예루살렘, 두로와 시돈의 바닷가에서 온 사람들도 아주 많았습니다.누가복음 6:17 · 두루새김
두로와 시돈은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중심 지역 바깥에 있는 페니키아의 도시들입니다. 누가는 각 사람이 어느 민족에 속했는지 밝히지 않지만,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이 여러 지역에서 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병을 고침받기 위해 찾아왔고, 예수께로부터 능력이 나와 모두를 낫게 했습니다(6:18–19). 예수님은 병을 고침받으러 온 사람들을 말씀과 무관하게 대하지 않으시고, 말씀을 들으러 온 사람들의 몸의 고통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이 장면의 한복판에서 예수님은 눈을 들어 제자들을 바라보십니다. 무리는 넓게 모여 있지만, 이제 시작되는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와 평평한 곳에 서셨다고 기록하기 때문에, 흔히 이 말씀을 「평지설교」라고 부릅니다.
사람들을 회복시키시는 예수님이, 이제 회복된 하나님의 백성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평지설교는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설교와 많은 내용이 겹칩니다. 두 복음서가 같은 설교를 서로 다르게 전한 것이라는 읽기와, 서로 다른 자리에서 하신 비슷한 설교를 기록한 것이라는 읽기로 해석이 갈리며, 본문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분명한 것은 누가가 이 설교를 열두 사도의 선택과 큰 무리의 병을 고치신 일 바로 뒤에 배치했다는 사실입니다.
누가 복이 있고, 누가 화가 있는가
가난한 사람이 왜 복이 있는가?
예수님은 뜻밖의 선언으로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바라보며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너희는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기 때문이다.」누가복음 6:20 · 두루새김
누가는 그냥 「가난한 너희」라고 기록합니다. 이 말을 「마음이 겸손한 사람은 복이 있다」는 뜻으로만 설명하면, 누가가 실제로 말한 가난의 의미가 흐려집니다.
「지금 배고픈 너희는 복이 있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는 너희는 복이 있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누가복음 6:21 · 두루새김
여기에는 실제 배고픔과 슬픔의 현실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이 훌륭하다거나, 배고픔이나 눈물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든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복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처지를 바꾸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누가복음의 앞부분에서 이미 들려온 약속과 연결됩니다. 마리아는 권세 있는 사람들을 낮추시고 낮은 처지의 사람들을 높이시며, 굶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유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보내시는 하나님을 노래했습니다(1:52–53). 이제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나라가 가난한 제자들의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물론 이것이 모든 가난한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와 무관하게 자동으로 구원받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바라보며 말씀하시고, 자신을 따르는 삶과 그로 인한 고난도 언급하십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가난을 단순히 마음의 태도로 바꾸어서도 안 됩니다. 누가는 물질적인 부족함과 실제 배고픔을 하나님의 나라가 가져올 회복의 중요한 대상으로 보여 줍니다.
지금과 앞으로가 뒤집힌다
이 선언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열쇠는 「지금」이라는 말입니다. 지금 배고픈 사람과 지금 우는 사람에게는 앞으로 배부르게 되고 웃게 될 날이 약속됩니다. 화의 선언에서도 현재와 미래가 대조됩니다.
「지금 배부른 너희에게는 화가 있다. 너희가 배고프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웃는 너희에게는 화가 있다. 너희가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누가복음 6:25 · 두루새김
예수님은 세상일은 돌고 돈다는 일반적인 지혜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의 현재 상태에 대한 판단을 뒤집을 수 있다는 사실을 선언하십니다. 현재 가난하다고 해서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 배부르다고 해서 하나님의 복을 독점한 사람도 아닙니다.
이것이 부유하다는 사실만으로 악하다고 단정할 근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누가복음 자체에도 자신의 재산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을 돕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부유함은 사람이 지금 누리는 위로와 만족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위험을 드러내십니다.
「이미 위로를 다 받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의 무게
「그러나 부유한 너희에게는 화가 있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다 받았기 때문이다.」누가복음 6:24 · 두루새김
예수님은 부유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이미 위로를 다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누리는 풍족함과 위로는 실제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삶의 전부가 될 때입니다.
여기서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의 차이는 통장에 있는 돈의 액수만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런 이유로 경제적인 의미를 지워서도 안 됩니다. 누가가 보여 주는 하나님의 나라는 실제로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의 처지를 문제 삼으며, 하나님께서 인간 사회의 불평등과 부족함에 무관심하지 않으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사람들에게 미움받는 것이 왜 복일까?
「인자 때문에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고 따돌리며 모욕하고, 너희를 악한 사람으로 몰아 내칠 때 너희는 복이 있다.」누가복음 6:22 · 두루새김
여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무례하게 행동해서 따돌림받거나 자신의 잘못 때문에 비난받는 일을 복이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인자 때문에 미움받는 경우를 말씀하십니다.
「그날에는 기뻐하며 뛰어올라라. 보아라, 하늘에서 너희가 받을 상이 크다. 그 사람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똑같이 대했기 때문이다.」누가복음 6:23 · 두루새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왕과 백성에게 거부당하고 박해받기도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런 경험을 여러 차례 겪었습니다(예레미야 20:1–2; 38:6).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다가 내쳐지는 사람들이 예언자들의 길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할 때 너희에게는 화가 있다. 그 사람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똑같이 대했기 때문이다.」누가복음 6:26 · 두루새김
참된 예언자는 사람들에게 내쳐질 수 있고, 거짓 예언자는 사람들에게 칭찬받을 수 있습니다. 칭찬받는 모든 사람이 거짓 예언자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평가 자체가 하나님의 뜻에 충실한지를 판단하는 최종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더욱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제자들이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이 말씀은 마태복음 5:3의 첫 번째 복과 비슷하지만, 마태복음의 원문에는 「영이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누가복음의 원문에는 「영」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을 읽을 때 마태복음의 표현을 가져와 설명하면 누가가 말한 가난의 의미가 흐려집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원수에게 원수처럼 대하지 말라는 것 이상이다
「그러나 내 말을 듣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어라.」누가복음 6:27 · 두루새김
첫머리의 「그러나」는 바로 앞의 말씀과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제자들을 미워하고 따돌릴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사람을 욕하고 따돌림으로 갚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질 수 있지만, 예수님은 다른 길을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나쁜 일이 생기기를 비는 사람들에게 복을 빌어 주어라. 너희를 모질게 대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여라.」누가복음 6:28 · 두루새김
예수님은 마음속의 감정만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상대방을 향한 행동과 말, 기도의 방향을 바꾸라고 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나에게 적대적으로 행동한다는 사실이, 내가 그를 대하는 방식까지 결정하게 두지 않는 것입니다.
뺨을 맞으면 다른 뺨도 내밀어야 하는가?
「네 뺨을 치는 사람에게 다른 뺨도 내주어라. 네 겉옷을 가져가는 사람이 속에 받쳐 입는 옷까지 가져가려 해도 막지 마라.」누가복음 6:29 · 두루새김
누군가 나를 때리면 계속 맞아야 한다는 뜻일까요?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뒤에 이 사례들을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이 행동들은 보복과 적대가 되풀이되는 고리를 끊는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으로 제시됩니다.
그렇다고 이 말씀이 폭력 피해자에게 위험한 상황을 벗어나지 말라고 요구하거나, 학대를 당하면서도 도움을 요청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이 구절만으로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안전을 지키는 행동을 금지한다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만 미워하지 않으면 된다」는 정도로 약화해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손해를 감수하고, 보복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그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 사랑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받고 싶은 대로 해 주라는 말씀
「사람들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너희도 그들에게 해 주어라.」누가복음 6:31 · 두루새김
흔히 황금률이라고 불리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지 말라는 방식으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해 주어라」라고 하십니다. 내가 어려울 때 도움을 받고 싶다면 다른 사람이 어려울 때 돕고, 내가 실수했을 때 용서받고 싶다면 다른 사람의 실수에도 용서를 베풀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행동해도 상대방이 똑같이 돌려주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바로 그 문제로 들어가십니다.
돌려받을 수 있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무슨 칭찬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누가복음 6:32 · 두루새김
예수님은 비슷한 질문을 세 번 반복하십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 잘해 주는 것, 돌려받을 것을 기대하며 빌려 주는 것입니다. 이 행동들 자체가 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문제는 사랑과 선한 행동이 자신에게 돌아올 이익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경우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도 그렇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한 일을 하며, 아무것도 돌려받기를 바라지 말고 빌려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은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과 악한 사람에게도 친절하시기 때문이다.」누가복음 6:35 · 두루새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슨 칭찬을 받겠느냐고 물으신 뒤, 하나님께서는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도 친절하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선하심을 알아주지 않는 사람에게도 친절하십니다.
원수 사랑은 하나님의 성품에서 나온다
이 명령은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 도덕적 성취를 이룰 수 있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이유를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에서 찾으십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예수님께서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고 불리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1:32, 35).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도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제자들이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을 나타내는 삶을 강조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아버지를 닮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어떤 분이십니까?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과 악한 사람에게도 친절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로 그런 하나님을 닮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말씀을 한 문장에 모으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누가복음 6:36 · 두루새김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순서입니다. 제자들이 먼저 자비롭게 행동해서 하나님을 자비로운 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이미 자비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그 자녀들도 아버지를 닮아 자비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사랑의 기준은 사람들이 나에게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어떻게 행동하시느냐에 있습니다. 그 사랑은 인간의 성격이 유난히 온순하거나 너그러운 데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그분을 닮아 가는 데서 시작됩니다.
조금 더 깊이
「무슨 칭찬을 받겠느냐?」에 쓰인 원어 카리스는 은혜, 호의, 감사 등을 뜻하며, 문맥에 따라 인정받을 만한 가치나 고마움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이 낱말을 세 번 반복하십니다. 그리고 35절에서 「감사할 줄 모르는」으로 옮긴 원어 아카리스토스는 같은 어근을 지녀, 원문에서는 칭찬이나 고마움을 뜻하는 말과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서로 이어집니다. 또한 원수에게 선을 베풀라는 말씀은 구약과 끊어진 새 규정이 아닙니다. 레위기 19:18은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같은 장 33–34절은 이스라엘 가운데 머물러 사는 외국인을 사랑하라고 명령하며, 잠언 25:21–22도 원수가 굶주리면 먹이고 목마르면 물을 주라고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이 가르침을 제자들에게 직접적이고 폭넓은 명령으로 제시하십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전에 보아야 할 것
판단하지 말라는 것은 아무것도 분별하지 말라는 뜻일까?
「남을 판단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다. 남에게 죄가 있다고 판결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죄가 있다는 판결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해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누가복음 6:37 · 두루새김
이 말씀을 모든 판단이나 비판을 금지하는 말씀으로 읽으면, 좋은 나무와 썩은 나무가 열매로 구별된다는 뒤의 말씀(6:43–44)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37절에는 「남을 판단하지 마라」와 「남에게 죄가 있다고 판결하지 마라」가 나란히 나옵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에 대해 최종적으로 나쁜 판정을 내리는 태도를 경계하십니다.
이것은 원수 사랑의 명령과 이어집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악한 사람으로 단정하고, 그에게 자비를 베풀 필요가 없다고 결정해 버리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과 악한 사람에게도 친절하십니다.
「용서해 주어라」로 옮긴 원어(ἀπολύω)는 풀어 주다, 보내 주다, 석방하다 등의 뜻을 지닙니다. 마음속으로 좋지 않은 감정을 없애는 일보다 넓은 그림, 곧 다른 사람을 붙잡고 죄가 있다고 판결하는 태도를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잘못한 사람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악한 행동을 선한 행동이라고 부르거나, 피해자가 부당한 일을 계속 감수해야 한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다른 사람에게 죄가 있다고 판결하는 권리를 자신의 손에 쥐고 놓지 않으려는 태도입니다.
눌러 담고 흔들어 넘치게 주시는 하나님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꾹꾹 눌러 담고 흔들어 채워서, 넘치도록 넉넉한 양을 너희 품에 안겨 줄 것이다. 너희가 재어 주는 그 그릇으로 너희에게도 재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누가복음 6:38 · 두루새김
이 말씀은 조금 더 주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넉넉하게, 아끼지 않고 주는 모습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앞에서 아무것도 돌려받기를 바라지 말고 빌려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순일까요? 앞의 말씀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보상을 계산하지 말라는 명령이고, 뒤의 말씀은 그런 자비와 너그러움이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서 헛되지 않다는 약속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돈을 많이 헌금하거나 남에게 베풀면 반드시 더 많은 돈으로 돌려받는다는 보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경제적인 투자 수익을 계산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용서해 주고, 움켜쥐는 대신 베푸는 삶을 부르시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넉넉히 베푸시는지 보여 주십니다.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이끌 수 있는가?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런 비유도 드셨습니다.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이끌 수 있겠느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누가복음 6:39 · 두루새김
처음에는 주제가 갑자기 바뀐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사람을 이끌거나 고쳐 주려는 사람이 먼저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문제로 이어집니다.
「제자는 선생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충분히 배우고 훈련받으면 자기 선생과 같아질 것이다.」누가복음 6:40 · 두루새김
열두 사람은 뽑혔다는 이유만으로 이미 완성된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선생에게 배워야 하고, 제자의 목표는 선생의 말을 기억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선생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조금 전 예수님은 자비로운 아버지를 닮으라고 말씀하셨고, 지금은 제자가 선생과 같아진다고 하십니다. 두 말씀을 함께 읽으면,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배우고 그 자비가 자신의 삶에서 나타나도록 자라가야 합니다.
형제의 눈에 있는 티와 자기 눈의 들보
「너는 왜 네 형제의 눈에 있는 작은 티는 보면서, 네 눈에 있는 들보는 알아채지 못하느냐?」누가복음 6:41 · 두루새김
자기 눈에 거대한 들보가 있다면 제대로 앞을 볼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작은 티를 빼 주겠다고 나섭니다. 예수님은 이 과장된 비유로, 다른 사람의 잘못에는 민감하지만 자기 자신의 문제에는 눈먼 사람을 드러내십니다.
「네 눈에 있는 들보도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형제야, 내가 네 눈에 있는 티를 빼내게 해 줘』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겉으로만 바른 척하는 사람아,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똑똑히 보면서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누가복음 6:42 · 두루새김
예수님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빼지 말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문제는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을 고치려 드는 태도이고, 그래서 「먼저」라는 말이 붙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37절의 판단하지 말라는 명령과 42절의 티를 빼라는 명령이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죄가 있다고 판결하지 말라고 하시지만, 아무런 분별도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먼저 돌아보고, 다른 사람을 실제로 도울 수 있을 만큼 올바르게 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무엇이 사람을 그런 모습으로 만듭니까? 예수님은 그 질문을 사람의 마음에 무엇이 쌓여 있는가로 가져가십니다.
조금 더 깊이
38절의 표현은 당시 곡식 등을 되로 재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되에 곡식을 담을 때 위에서 누르고 흔들면 사이사이의 공간이 줄어 넘칠 만큼 담을 수 있습니다. 「품에 안겨 줄 것이다」는 옷자락을 접어 만든 공간에 곡식을 담아 주는 모습으로 상상할 수 있습니다.
나무는 열매로 알려진다
좋은 열매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좋은 나무는 썩은 열매를 맺지 않고, 썩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기 때문이다.」누가복음 6:43 · 두루새김
「나무는 저마다 그 열매를 보면 어떤 나무인지 알 수 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거두거나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따지는 않는다.」누가복음 6:44 · 두루새김
이 비유는 사람을 그의 행동으로 평가하라는 교훈을 포함할 수 있지만, 그보다 깊은 문제를 다룹니다. 열매가 어떤 나무인지를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나무에 좋은 열매 모양의 물건을 매달아 놓는다고 해서 그 나무가 좋은 나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열매는 나무의 상태에서 나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판단하지 않고, 베푸는 행동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규칙을 외우고 억지로 실천하는 것만으로 충분할까요? 예수님은 그 행동들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말씀하십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이 입으로 나온다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아 둔 선한 것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사람은 마음에 쌓아 둔 악한 것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 가득한 것이 입으로 나오기 때문이다.」누가복음 6:45 · 두루새김
여기서 마음은 감정이 일어나는 장소만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과 의지, 판단과 욕망이 자리하는 내면을 가리킵니다. 사람은 자기 안에 쌓여 있는 것을 말과 행동으로 밖에 꺼내 놓습니다.
이 말씀은 앞선 논쟁을 새롭게 이해하게 합니다. 안식일에 손이 마른 사람이 나았을 때,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입에서는 그 일을 기뻐하는 말보다 예수님을 상대로 무엇을 할지에 관한 의논이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만 바꾸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 행동이 나오는 마음의 상태를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알고 그분을 닮아 가는 사람에게서는 그 자비가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듣고 곧바로 다른 사람의 열매를 검사하는 데에만 관심을 쏟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이미 자기 눈의 들보부터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나무의 비유도 먼저 자신이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지 돌아보도록 이끕니다.
왜 나를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내가 하는 말은 실천하지 않는가
「주님」이라는 고백과 순종 사이
「너희는 왜 나를 『주님,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내가 하는 말은 실천하지 않느냐?」누가복음 6:46 · 두루새김
장 처음에 예수님은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제 장 마지막에서는 자신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질문하십니다. 처음에는 예수님께서 어떤 권위를 가지셨는지가 문제였고, 마지막에는 그 권위를 인정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실제로 순종하는지가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문제는 주님이라고 부르는 말과 실제 행동이 서로 어긋나는 것입니다.
실천할 말씀의 내용은 이 장에서 이미 들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사람에게 잘해 주는 것,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도 친절하신 하나님을 닮는 것, 다른 사람에게 죄가 있다고 판결하기 전에 자신의 눈에서 들보를 빼는 것, 마음에 쌓아 둔 선한 것에서 선한 것을 내놓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질문에 긴 설명 대신 집을 짓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땅을 깊이 파고 바위 위에 기초를 놓은 사람
「그는 집을 지으면서 땅을 깊이 파고 바위 위에 기초를 놓은 사람과 같다. 홍수가 나서 강물이 그 집에 들이쳤지만, 집을 흔들어 놓지 못했다. 집이 튼튼하게 지어졌기 때문이다.」누가복음 6:48 · 두루새김
누가가 강조하는 것은 기초를 놓기까지의 과정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벽을 세우기 전에, 보이지 않는 땅속에서 해야 할 수고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 말을 듣고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기초 없이 땅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 강물이 그 집에 들이치자 집은 곧 무너져 크게 부서지고 말았다.」누가복음 6:49 · 두루새김
그 사람도 집을 짓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기초를 놓지 않았습니다.
집을 짓고 있을 때에는 두 집의 차이가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홍수가 나서 강물이 들이치는 순간, 그 차이가 드러납니다. 두 집 모두 밀려오는 강물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에게 아무런 어려움도 찾아오지 않는다고 약속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무너지지 않을 기초가 있는가를 물으십니다.
안식일의 주인이 가르치시는 새로운 삶
두 사람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입니다. 차이는 누가 더 많은 말씀을 들었는가에 있지 않고, 누가 그 말씀대로 행동했는가에 있습니다. 안식일에 관한 율법을 안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아니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 비유를 하나님의 자비와 분리하여, 모든 명령을 완벽하게 지켜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제자의 삶은 자신이 이미 완전하다고 확신하는 사람의 삶이 아니라, 자기 눈의 들보를 먼저 빼듯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계속 방향을 바꾸어 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은 규정을 엄격하게 지키는 일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의 행동에서 시작하지 않고,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이라는 하나님의 성품에서 시작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상대방이 사랑받을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과 악한 사람에게도 친절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일이 결국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두 사람 모두 집을 지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강물이 들이치는 날을 맞았습니다.
한 사람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랜 수고를 했습니다. 깊이 파고 내려가 단단한 바위를 찾고 그 위에 기초를 놓았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직 아무것도 세워지지 않은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홍수가 납니다.
강물이 집을 향해 밀려옵니다. 눈에 보이던 모든 것이 흔들리는 순간, 사람들은 비로소 그 집이 무엇 위에 세워져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 집이 흔들리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땅을 깊이 파고 바위 위에 기초를 놓아, 집이 튼튼하게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