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풀어 읽기 · 5장
이 장의 자리 · 4–9장 · 갈릴리에서의 활동
죄인의 곁에 머무시는 분
고기잡이에 성공한 어부라면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하다가 두 배가 가라앉을 만큼 물고기를 잡았다면 더욱 그렇겠지요.
그런데 누가복음 5장에서 시몬 베드로가 보인 반응은 뜻밖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감사하거나 더 많은 기적을 부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간청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떠나지 않으십니다. 그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고, 이제부터 사람을 산 채로 낚는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은 사람은 예수님께 떠나 달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바로 그런 사람을 자기 곁으로 부르십니다.
이후에도 비슷한 일이 이어집니다. 온몸에 나병이 퍼진 사람에게는 손을 뻗으시고, 몸이 마비된 사람에게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선언하시며, 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과는 한 식탁에 앉으십니다. 누가복음 5장은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가까이하시는지, 그들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시는지,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차례로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이 모든 일은 마지막에 하나의 논쟁으로 이어집니다.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른 경건한 사람들처럼 금식하지 않고 먹고 마십니까? 예수님은 자신을 신랑에 비유하시고, 새 옷과 새 포도주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지막에 「묵은 포도주를 마신 사람은 아무도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묵은 것이 좋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라고 덧붙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새로운 삶을 설명하던 이야기가 어째서 묵은 포도주를 좋아하는 사람의 말로 끝날까요?
이 마지막 말의 의미는 호숫가에서 시작되는 여러 만남을 따라가다 보면 조금씩 드러납니다.
가득 찬 배를 뒤로하고 떠나는 사람들
예수님께서 시몬의 배에 오르십니다
예수님은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십니다. 게네사렛 호수는 갈릴리 호수를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사람들이 몰려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고, 호숫가에는 배 두 척이 있었습니다. 어부들은 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누가는 시몬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부터 알려 줍니다. 그는 예수님의 설교를 들으러 온 사람이 아니라 밤새 고기잡이를 하고 돌아온 어부였습니다. 게다가 뒤에 밝혀지듯 그날의 고기잡이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의 배에 올라 물가에서 조금 떨어지도록 배를 저어 달라고 부탁하시고, 그 배에 앉아 무리를 가르치십니다. 시몬에게 예수님은 완전히 낯선 사람이 아닙니다. 앞 장에서 예수님은 이미 시몬의 집에 들어가 그의 장모를 고쳐 주셨습니다(4:38–39). 그럼에도 누가는 시몬이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는지를 이 장에서 새롭게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침을 마치셨을 때, 이야기는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예수님은 시몬에게 「깊은 곳으로 배를 저어 가라. 그리고 너희는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조금 전까지 예수님께 배를 내어 주었던 시몬은 이제 자신의 생업에 관한 명령을 듣습니다.
시몬이 대답했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말씀하시니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누가복음 5:5 · 두루새김
시몬은 자신의 경험을 감추지 않습니다. 그는 밤새 일했고, 고기잡이에 필요한 수고를 이미 다 했습니다. 그런데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대답이 끝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말씀하시니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이 짧은 대답이 사건의 전환점입니다. 시몬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이유로 다시 그물을 내립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상황이 달라져서가 아닙니다. 잡히지 않던 물고기가 갑자기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도 아닙니다.
그의 행동을 바꾼 것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장면에서 예수님은 아직 시몬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을 따르라고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시몬이 가장 잘 아는 일의 한복판에서 시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물을 내리는 행동은 시몬이 그 말씀에 어떻게 응답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물고기가 너무 많이 잡혔는데, 왜 두려워합니까?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내리자 물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 그물이 찢어지기 시작합니다. 시몬 일행은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도와 달라고 합니다. 두 배에 물고기를 가득 채웠더니 배들이 가라앉을 지경이 됩니다.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상황과 정반대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이 놀라운 성공을 기뻐하는 사람들에게 머무르지 않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이것을 보고 예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했습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누가복음 5:8 · 두루새김
누가는 시몬뿐 아니라 그와 함께 있던 사람들, 야고보와 요한도 자기들이 잡은 물고기를 보고 크게 놀랐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시몬에게 그 놀라움은 자기 자신을 새롭게 인식하는 경험이 됩니다. 그는 물고기가 많다는 사실만 본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배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보통 사람과는 다른 분이라는 사실을 마주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왜 시몬은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라고 했을까요? 자신처럼 죄 있는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있어도 되는지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본문은 시몬이 구체적으로 어떤 죄를 떠올렸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은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시몬과 함께 고기잡이를 하던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그랬습니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산 채로 낚을 것이다.」누가복음 5:10 · 두루새김
시몬이 스스로 고백한 죄인이라는 사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막지 못합니다.
이 장에서 처음으로 드러나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을 두려움 속에 남겨 두지 않으십니다.
사람을 「산 채로」 낚는다는 말
예수님께서 「사람을 산 채로 낚을 것이다」라고 하실 때 사용하신 동사는 조그레오(ζωγρέω)입니다. 단순히 붙잡는다는 뜻만이 아니라, 죽이지 않고 산 채로 사로잡는다는 뜻을 지닙니다.
어부가 물고기를 잡는 것은 대개 그것을 먹거나 팔기 위해서입니다. 그물에 잡힌 물고기는 물 밖으로 나오면서 생명을 잃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시몬에게 사람을 산 채로 낚는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시몬은 여전히 사람들을 모으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이어 가던 사람은 이제 예수님을 따라 사람들에게 생명의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이 장면의 끝에는 또 하나의 뜻밖의 행동이 있습니다.
그들은 배를 물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랐습니다.누가복음 5:11 · 두루새김
밤새 빈손으로 돌아왔던 어부들에게 그 엄청난 양의 물고기는 상당한 경제적 가치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는 그들이 그 물고기를 어떻게 팔았는지,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는지 알려 주지 않습니다.
이것은 가난했기 때문에 잃을 것이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적어도 이야기의 이 순간, 그들에게는 가득 찬 배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아무것도 얻지 못했을 때 부르심을 시작하셨지만, 그들이 모든 것을 얻은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 새로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들이 따라간 것은 물고기를 많이 잡게 하는 능력이 아니라, 자기들을 부르신 예수님이었습니다.
호숫가에는 물고기로 가득 찬 배들이 남았습니다. 어부들은 그 배를 뒤로하고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조금 더 깊이
시몬의 모습은 이사야 6:1–8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자신이 부정한 입술을 지닌 사람이라고 고백합니다. 시몬의 경험이 이사야의 환상과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거룩함과 능력을 마주한 사람이 자신의 부족함과 죄를 깊이 느낀다는 점에서 두 이야기는 깊이 연결됩니다. 또 조그레오라는 낱말 자체가 언제나 구원이나 생명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을 산 채로 사로잡는다는 부정적인 의미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는 사람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사명과 연결되면서 생명을 살리는 방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손을 내밀어 나병 환자를 만지십니다
이 사람은 능력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어느 마을에 온몸에 나병이 퍼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나병」은 오늘날 의학에서 말하는 한센병과 반드시 같은 병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관련 표현은 여러 피부 질환과 상태를 포함하며, 레위기 13–14장은 이를 단순한 질병 치료의 문제만이 아니라 공동체와 예배 생활에 관계되는 정결의 문제로 다룹니다. 레위기 13:45–46에 따르면 부정하다고 판정된 사람은 자신의 상태를 알리고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지내야 했습니다.
예수께서 어느 마을에 계실 때, 온몸에 나병이 퍼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를 보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간청했습니다. 「주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누가복음 5:12 · 두루새김
그는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까?」라고 묻지 않습니다.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에게는 예수님의 능력보다 예수님의 뜻이 문제입니다. 예수님께 자신을 깨끗하게 하실 능력이 있다는 사실은 믿고 있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자신을 그렇게 해 주시기를 원하실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로만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예수께서는 손을 뻗어 그 사람을 만지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그렇게 하겠다. 깨끗해져라.」 그러자 곧 나병이 사라졌습니다.누가복음 5:13 · 두루새김
예수님은 먼저 손을 뻗어 그를 만지시고, 그다음에 깨끗해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은 여전히 나병이 퍼진 상태에서 예수님의 손길을 받습니다.
그가 깨끗해진 뒤에 예수님께서 만져 주신 것이 아닙니다.
깨끗해진 뒤에 만지시는 것이 아니라, 만지심으로 깨끗하게 하십니다
레위기에서 부정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일과 공동체의 생활을 제한하는 상태였습니다. 그것이 언제나 개인의 도덕적인 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이 본문에도 그의 병을 어떤 특정한 죄의 결과로 해석할 근거는 없습니다. 그런데 정결을 회복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이 제한될 수 있었던 사람에게 예수님은 직접 손을 뻗으십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정결 규정을 무시하셨다고만 설명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곧이어 그 사람에게 모세가 명령한 절차를 따르라고 지시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무엇을 폐지하셨는가보다, 예수님께 어떤 능력이 있으신가를 먼저 보여 줍니다.
시몬에게는 죄인이라는 고백이 예수님과의 동행을 막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부정한 상태가 예수님의 손길을 막지 못합니다. 두 사람의 처지는 다르지만,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나타나는 방향은 같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상태 때문에 예수님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느끼는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그 사람을 가까이하십니다.
왜 제사장에게 가라고 하셨을까요?
예수께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에게 단단히 이르셨습니다. 「다만 제사장에게 가서 네 몸을 보여라. 그리고 모세가 명령한 대로, 깨끗해진 사람이 바쳐야 할 제물을 바쳐라. 그들에게 증거가 되도록 하여라.」누가복음 5:14 · 두루새김
레위기 14장에는 피부 질환에서 깨끗해진 사람이 제사장에게 확인을 받고 정결 의식을 행하는 절차가 나옵니다. 이미 예수님의 말씀으로 깨끗해졌는데 왜 제사장에게까지 가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하신 일과 제사장의 역할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제사장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그의 상태를 확인하고 정결 의식을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명령은 그 사람이 율법이 정한 절차를 거쳐 다시 공동체의 생활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일과도 연결됩니다.
「그들에게 증거가 되도록 하여라」에서 「그들」은 제사장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고, 더 넓게 그 회복을 확인하게 될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실제로 확인될 수 있는 방식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여드는데 예수님은 물러가십니다
예수님에 관한 소문은 더욱 퍼집니다. 많은 사람이 말씀을 듣고 병을 고침받으려고 모여듭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 기도하곤 하셨습니다.누가복음 5:16 · 두루새김
사람들이 더 많이 모여들수록 예수님의 활동도 더욱 분주해졌을 것입니다. 원문의 동사 표현은 한적한 곳의 기도가 한 번의 행동이 아니라 반복되는 습관이었음을 보여 주며, 두루새김의 「기도하곤 하셨습니다」에도 그 뜻이 드러납니다.
누가는 기도의 구체적인 내용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사람들의 요구에 계속 응답하는 활동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고통받는 사람들을 가까이하시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시는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께는 병든 사람을 고치실 능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죄를 용서하실 권한도 있으실까요?
죄가 용서되었다는 말을 누가 할 수 있습니까?
사람들은 병을 고치러 왔는데, 예수님은 죄를 용서하십니다
이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은 더 넓은 관심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 가운데는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예수께서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갈릴리와 유대의 모든 마을에서, 또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을 가르치는 교사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병을 고치시도록 주님의 능력이 함께했습니다.누가복음 5:17 · 두루새김
누가가 미리 알려 준 마지막 문장 때문에 독자는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실 것이라고 기대하게 됩니다.
그때 남자들이 몸이 마비된 사람을 침상에 눕혀 데려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아 들어갈 수 없자, 그들은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지붕의 틈으로 그 사람을 작은 침상째 달아 내립니다. 마침내 그는 사람들 한가운데, 예수님 바로 앞으로 내려옵니다.
누가는 그들이 어떻게 지붕에 올라갔는지, 어떤 도구를 사용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이들이 무엇을 위해 그토록 애썼는지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 몸이 마비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첫 말씀은 예상과 다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고 그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누가복음 5:20 · 두루새김
사람들은 병을 고치기 위해 왔습니다. 누가도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도록 주님의 능력이 함께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병부터 고치지 않으십니다.
이 사람이 마비된 이유가 죄 때문이었을까요? 본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의 병이 어떤 특정한 죄의 결과라는 설명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셨다는 이유만으로 이 사람의 질병과 죄를 원인과 결과로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죄의 용서를 선언하신 까닭은 이어지는 논쟁에서 밝혀집니다. 이 사건의 중심은 예수님께 죄를 용서하실 권한이 있으신가 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신 것은 「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누가는 「그 사람의 믿음」이라고 하지 않고 「그들의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침상을 들고 온 사람들은 길이 막히자 다른 길을 찾았고, 마침내 그를 예수님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행동에서 믿음을 보셨습니다.
여기서 믿음은 단지 마음속에 어떤 확신을 품고 있는 상태로만 묘사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가기 위해 실제로 움직이는 행동 속에 나타납니다. 「그들」이 침상을 옮긴 사람들만 가리키는지, 환자까지 포함한 전체를 가리키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어느 쪽이든 누가는 한 사람의 회복을 여러 사람의 믿음과 연결해서 보여 줍니다.
그들은 자기 힘으로 그를 고칠 수 없었지만, 그를 예수님 앞에 데려갈 수는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행한 일을 보시고, 그 사람이 구체적으로 부탁하지 않은 것까지 말씀하십니다. 죄의 용서입니다.
시몬에게는 물고기보다 더 큰 부르심을 주셨습니다. 나병 환자에게는 치유와 함께 정결을 회복하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제 마비된 사람에게는 죄의 용서를 선언하십니다.
율법학자들의 질문은 왜 중요합니까?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속으로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이 사람은 누구지? 하나님 한 분 말고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겠어?」누가복음 5:21 · 두루새김
이들의 질문을 무조건 악의적인 비난으로만 취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신다는 믿음은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시편 103:3은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질병을 고치시는 분이라고 노래합니다. 이사야 43:25에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죄를 없애시는 분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단순히 「하나님께서 너를 용서해 주시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셨다면 논쟁의 성격은 달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사람이 이미 죄를 용서받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래서 율법학자들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일 가능성을 떠올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마음속으로 따지는 것을 아시고 질문하십니다.
「어느 말을 하기가 더 쉽겠느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는 말이냐, 아니면 『일어나 걸어라』라는 말이냐?」누가복음 5:23 · 두루새김
사람의 능력으로는 둘 다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질문에는 「어느 말을 하기가 더 쉽겠느냐」라는 차원이 있습니다. 죄를 용서받았다는 말은 그 자리에서 눈으로 확인하기 어렵지만, 일어나 걸으라는 말은 곧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일어나면 예수님의 말씀이 능력 있는 말씀임이 드러날 것입니다.
예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죄의 용서에 관한 자신의 권한을, 눈에 보이는 치유를 통해 드러내려 하십니다.
「하지만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할 권한이 있다는 것을 너희가 알도록 하겠다.」 이어서 예수께서는 몸이 마비된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작은 침상을 들고 네 집으로 가라.」누가복음 5:24 · 두루새김
여기서 논쟁은 말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 사람이 일어나는가 하는 사실에 모든 사람의 시선이 집중됩니다.
「인자」는 누구입니까?
5:24는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시는 첫 자리입니다. 「인자」는 문자 그대로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이 표현은 인간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말과 연결되지만,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사용하실 때에는 점차 독특한 의미를 드러냅니다.
5:24에서 그 권한이 행사되는 장소는 「땅」입니다. 죄의 용서를 하나님과 관련된 보이지 않는 세계의 문제로만 생각하기 쉽지만, 예수님은 지금 자신 앞에 누워 있는 한 사람에게 그 용서를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추상적인 약속으로만 머무르지 않고, 예수님을 통해 한 사람의 현실 속에 선포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율법학자들에게는 심각한 도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만 속한다고 여겨지는 죄 용서의 권한을 자신에게 연결하고 계십니다. 누가는 그 선언의 의미를 독자가 무시할 수 없도록 바로 다음 장면에 치유를 배치합니다.
침상에 들려 온 사람이 침상을 들고 나갑니다
그 사람은 곧 사람들 앞에서 일어나 자기가 누워 있던 침상을 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집으로 갔습니다.누가복음 5:25 · 두루새김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침상을 들고 와야만 예수님 앞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신이 침상을 들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을 옮기는 데 필요했던 물건을, 이제는 자신의 손으로 옮깁니다.
모두 크게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들은 두려움에 가득 차서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어요!」누가복음 5:26 · 두루새김
그들이 본 것은 단순히 몸이 마비되었던 사람이 걷는 모습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죄의 용서를 선언하셨고, 그 권한을 드러내는 치유가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과 하나님께 돌려지는 영광은 서로 대립하지 않습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 능력이 드러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죄인을 용서하고 부르시는 분이라면, 그들과 한 식탁에 앉으시는 것도 가능할까요?
조금 더 깊이
「인자」와 관련해 구약에서는 다니엘 7:13–14가 중요한 연결점입니다. 다니엘은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과 함께 와서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는 환상을 봅니다. 누가복음 5:24는 다니엘 7장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인자가 지닌 권한을 말한다는 점에서 관련성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22:69에서 예수님께서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오른편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연관성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세금을 걷는 곳에서 잔칫집으로
시몬처럼 레위도 모든 것을 버립니다
예수님은 세금을 걷는 곳에 앉아 있는 레위를 보시고 짧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와라.」 레위의 반응도 짧습니다.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일어나 예수를 따라갔습니다.누가복음 5:28 · 두루새김
어부들은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레위도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그러나 레위에게는 특별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는 세리였습니다.
당시 세리는 세금과 통행료 등을 걷는 일을 맡았으며, 그 직업은 사회적으로 좋지 않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세금을 걷는 과정에서 부당한 이익을 얻는 일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다만 누가는 레위가 어떤 방식으로 일했는지 설명하지 않으므로, 그가 실제로 부당하게 세금을 걷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뒤에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세리들을 「죄인들」과 함께 묶어 부른다는 사실에서, 세리라는 직업이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예수님께서 먼저 보시고 부르십니다. 레위는 자신이 제자가 될 만한 사람인지 먼저 인정받으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본문도 예수님께서 그의 자격을 심사하시는 장면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시고, 레위가 따릅니다.
모든 것을 버렸다면서 어떻게 큰 잔치를 벌입니까?
레위는 자기 집에서 예수를 위해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 많은 세리와 다른 사람들이 예수 일행과 함께 음식을 먹고 있었습니다.누가복음 5:29 · 두루새김
바로 앞 절에서 레위가 모든 것을 버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레위에게는 여전히 잔치를 열 수 있는 집이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버려 두고」라는 표현은 단순히 소유물을 모두 없애 버렸다는 의미로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 앞에서 이전의 삶을 뒤로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결단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시몬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가득 찬 그물을 경험한 뒤 자신의 배를 떠났습니다. 레위는 세금을 걷는 곳을 떠난 뒤 자기 집을 예수님과 다른 사람들이 함께 먹고 마시는 장소로 사용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두 사람에게 똑같은 생활 방식을 일률적으로 요구하는 것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이전의 삶을 결정하던 중심에서 떠나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합니다.
레위의 잔치에 모인 많은 세리와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 일행과 함께 음식을 먹고 있었습니다. 원문에서는 이들이 식사 자리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이는 당시 잔치 자리에서 볼 수 있는 방식이었습니다. 레위가 마련한 자리에서 다른 세리들도 예수님과 식사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을 부르신 일이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십니까?
바리새파 사람들과 그들 편의 율법학자들이 예수의 제자들에게 불평했습니다. 「여러분은 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셔요?」누가복음 5:30 · 두루새김
그들은 식사 예절이 아니라 예수님과 제자들이 누구와 어울리는지를 문제 삼고 있습니다.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단순히 같은 음식을 먹는 행위에 그치지 않고, 사람을 가까이하고 관계를 나누는 행동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이 있는 자리에서 식사하신다는 사실은, 그들을 자신의 관계 밖에 두지 않으신다는 뜻을 드러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의사가 필요한 사람은 건강한 사람이 아니라 아픈 사람이다.」누가복음 5:31 · 두루새김
의사는 왜 아픈 사람을 가까이할까요? 그 사람이 건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아프기 때문입니다. 환자가 아프다는 사실은 의사가 그에게 가지 말아야 할 이유가 아니라, 오히려 그를 찾아가야 할 이유가 됩니다.
「나는 올바른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하게 하려고 왔다.」누가복음 5:32 · 두루새김
여기서 「회개하게 하려고」라는 말을 빼놓으면 예수님의 대답을 절반만 이해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일이 그들의 모든 행동을 옳다고 인정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죄인들이 완전히 변화한 뒤에야 그들을 가까이하시는 것일까요? 레위의 이야기는 그렇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세금을 걷는 곳에 앉아 있는 레위를 부르셨습니다. 레위가 먼저 자신의 모든 문제를 해결한 뒤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변화시키기 위해 가까이하시는 분입니다. 죄인이라는 이유로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 비유에서 「건강한 사람」과 「올바른 사람」은 실제로 죄가 전혀 없는 어떤 집단을 뜻할 수도 있고, 자신은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에서 확실한 것은 자신이 하시는 일을 죄인들을 부르시는 일로 설명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앞에서 죄를 용서하실 권한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며 그들을 불러 회개하게 하십니다.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는 권한의 선언이 사람들과 맺는 실제 관계 속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식탁에서 다음 논쟁이 시작됩니다.
신랑이 함께 있는데 왜 금식해야 합니까?
금식하는 사람들과 잔치하는 사람들
예수님과 제자들이 세리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모습은 사람들에게 또 다른 의문을 일으킵니다.
그들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파의 제자들도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십니다.」누가복음 5:33 · 두루새김
이스라엘의 신앙에서 금식은 슬픔과 깊은 괴로움, 회개와 간절한 기도를 표현하는 중요한 실천이었습니다. 레위기 16:29–31은 속죄일에 자신을 낮추는 일을 명령하며, 유대 전통에서는 이 날 금식했습니다. 다니엘 9:3에서는 다니엘이 금식하며 기도하고 죄를 고백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금식하며 기도했다는 사실도 그 자체로 잘못된 행동이 아닙니다. 오히려 질문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을 진지하게 섬기는 사람들이 금식하고 기도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고 있으니 이상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더구나 방금 전의 식사 자리는 세리들과 죄인들이 함께하는 잔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금식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지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신랑이 함께 있는데, 너희가 결혼 잔치에 온 손님들을 금식하게 할 수 있겠느냐?」누가복음 5:34 · 두루새김
예수님은 언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꺼내십니다.
신랑이 있는 자리에서는 무엇이 어울립니까?
결혼 잔치는 기쁨의 자리입니다. 신랑이 함께하고 사람들이 결혼을 축하하고 있는데, 그 손님들에게 억지로 금식하게 한다면 잔치의 성격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금식이 언제나 옳은 것도 아니고, 언제나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금식하게 할 수 있겠느냐」에는 다른 사람에게 금식하도록 시키는 의미가 담겨 있어, 예수님은 금식을 제자들에게 요구하려는 바로 그 태도를 문제 삼으십니다.
그렇다면 그 결혼 잔치의 신랑은 누구일까요? 이야기의 흐름에서 신랑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오심을 잔치에 신랑이 함께하는 일로 설명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이제 그 구원을 가져오시는 분과 함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먹고 마시는 까닭은 단지 그들이 금식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레위의 잔치는 사람들의 눈에 하나님을 진지하게 섬기지 않는 모습으로 보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자신이 가져오신 기쁨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고 계셨습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신 분이 그들과 함께 계십니다. 그것이 잔치할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금식은 이제 필요 없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금식할 것이다.」누가복음 5:35 · 두루새김
예수님은 오히려 제자들도 금식하게 될 때가 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달라집니다. 신랑이 함께 있을 때에는 잔치가 어울리고, 신랑을 빼앗기면 그때에는 금식이 어울릴 것입니다.
「신랑을 빼앗길」이라는 표현은 신랑이 잠시 자리를 비운다는 말보다 강하게, 신랑이 자기 뜻과 상관없이 그들에게서 떼어지는 상황을 암시합니다. 누가복음 전체를 읽는 독자는 이 말에서 훗날 예수님께서 겪으실 고난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예수님은 누가, 언제, 어떻게 자신을 빼앗아 갈지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일어나는 변화가 단순히 어떤 종교적 규칙을 버리고 다른 규칙을 선택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금식과 잔치 모두 예수님과의 관계 속에서 제자리를 찾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문제를 두 가지 일상적인 비유로 더 설명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구약에서 하나님과 자기 백성의 관계는 때때로 결혼 관계로 표현됩니다. 호세아 2:19–20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다시 관계를 맺으실 것을 약속하시며 결혼을 나타내는 말을 사용하시고, 이사야 62:4–5도 시온의 회복을 신랑과 신부의 기쁨에 비유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 구약 본문들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회복하시는 일을 결혼의 기쁨으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이 주제와 연결됩니다.
새 포도주는 왜 새 가죽 주머니에 담아야 합니까?
새 옷을 찢어서 낡은 옷에 덧대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또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도 새 옷에서 천 조각을 찢어 내어 낡은 옷에 덧대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어 놓는 데다, 새 옷에서 떼어 낸 조각도 낡은 옷과 어울리지 않는다.」누가복음 5:36 · 두루새김
이 비유는 마태복음 9:16과 마가복음 2:21에도 나오지만, 누가는 특별히 새 옷에서 천 조각을 찢어 낸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낡은 옷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멀쩡한 새 옷을 찢는다면 새 옷까지 망가뜨리는 셈이 되고, 떼어 낸 조각은 낡은 옷과 어울리지도 않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행동이 오히려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 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자리는 금식 논쟁의 한가운데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시는 일이 기존의 틀에 조금 덧붙이면 되는 정도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십니다.
그렇다고 이 비유를 곧바로 구약은 낡아서 쓸모없고 신약은 새로워서 가치 있다는 식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그런 구분을 직접 제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앞서 나병 환자에게 모세가 명령한 대로 깨끗해진 사람이 바쳐야 할 제물을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문제는 오래된 것이라는 이유로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써 새롭게 시작된 일을, 그 일이 가진 고유한 의미를 해치면서까지 기존의 방식에 억지로 맞추려 해서는 안 된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잔치의 의미를 인정하지 않은 채 제자들에게 익숙한 금식의 방식만 요구한다면, 예수님께서 오신 사건 자체가 가져온 새로움을 놓치게 됩니다.
새 포도주와 낡은 가죽 주머니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주머니에 담는 사람도 없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주머니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주머니도 못 쓰게 된다.」누가복음 5:37 · 두루새김
포도주를 만드는 과정에서 발효가 계속되면 기체가 생기고 주머니 안의 압력이 높아질 수 있습니다. 이미 오래 사용하여 탄력을 잃은 가죽 주머니라면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터질 수 있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 주머니에 담아야 한다.」누가복음 5:38 · 두루새김
어떤 새로운 일이 시작될 때 그 일을 받아들이고 감당할 수 있는 방식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장에서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새로운 것은 무엇일까요? 지금까지 펼쳐진 이야기가 이미 그 내용을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두려워하는 시몬을 부르셨습니다. 나병 환자에게 손을 내미셨습니다. 몸이 마비된 사람에게 죄의 용서를 선언하셨고, 세리 레위와 그가 초대한 사람들과 함께 잔치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사실은 누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지, 누구와 함께 식사할 수 있는지, 어떤 때에 금식하고 어떤 때에 기뻐해야 하는지를 새롭게 생각하도록 만듭니다. 이러한 변화를 기존의 관습 속에 아무 문제 없이 덧붙일 수만은 없다는 것이 두 비유의 핵심으로 보입니다.
여기에는 해석의 갈림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새 포도주는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새로운 구원의 현실을, 새 가죽 주머니는 그것을 받아들일 새로운 삶의 방식을 가리킨다고 이해합니다. 반면 이 비유가 특별히 예수님의 새 제자들과 그들에게 어울리는 가르침의 방식을 가리킨다는 해석도 있는데, 앞뒤 이야기가 제자들을 부르는 이야기와 금식에 관한 논쟁이라는 점이 그 근거입니다. 예수님은 포도주와 가죽 주머니가 구체적으로 누구를 뜻하는지 설명하지 않으시므로, 모든 것에 고정된 신학적 의미를 붙이기보다 비유가 말하는 어울림과 어울리지 않음의 문제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는 없는 말씀이 한 절 더 나옵니다.
그런데 왜 「묵은 것이 좋다」고 하실까요?
「묵은 포도주를 마신 사람은 아무도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묵은 것이 좋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누가복음 5:39 · 두루새김
앞선 말씀만 놓고 보면 새것이 좋고 낡은 것은 버려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기 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를 덧붙이십니다.
그 사람은 묵은 것이 「더 좋다」가 아니라 「좋다」고 말합니다. 더 좋다고 한다면 새것과 비교한 평가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좋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이미 만족하고 있어서 굳이 새것을 경험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두 가지로 읽힙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해석은 익숙한 종교적 관습에 만족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새로움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먹고 마시는 모습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익숙한 금식의 기준으로 그들을 평가했다는 앞선 논쟁이 그 근거입니다.
다른 해석은 예수님께서 그들이 왜 새것을 원하지 않는지 이해할 만한 이유를 제시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지금까지 마셔 온 포도주는 실제로 좋은 포도주일 수 있습니다. 금식도 잘못된 행위가 아니었고, 예수님은 앞으로 제자들이 금식할 때가 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익숙한 것의 가치를 인정하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어느 해석을 얼마나 강하게 뜻하셨는지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점은 이 마지막 구절이 새것과 옛것을 단순히 선과 악으로 구분하는 해석을 어렵게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낡은 가죽 주머니가 새 포도주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의 문제를 다루고, 묵은 포도주가 좋다는 말은 이미 익숙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의 반응을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그리스어 본문에서 「좋다」에 해당하는 낱말은 크레스토스(χρηστός)로, 좋다, 만족스럽다는 의미입니다. 일부 사본에는 비교급이 나타나 묵은 것이 「더 좋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주요 비평 본문은 비교급이 아닌 「좋다」를 채택하며, 두루새김이 「묵은 것이 좋다」로 옮긴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자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누가복음 5장에는 처지도 다르고 예수님을 만난 이유도 다른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시몬은 예수님께서 떠나시기를 바랐지만, 예수님은 그를 부르셨습니다. 나병 환자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시기를 원하시는지 알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먼저 손을 내미셨습니다. 다른 이들에게 들려 온 사람은 자신의 침상을 들고 돌아갔고, 레위의 집은 여러 사람이 함께하는 잔칫집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사실이 기쁜 소식일까요? 단지 놀라운 일을 하실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이유로 예수님을 떠나보내려는 사람까지 부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가는 이런 변화가 모든 사람에게 곧바로 받아들여지는 것처럼 그리지 않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질문 가운데는 예수님의 권한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반응도 있고, 기존의 신앙생활 관습과 새로운 상황이 어울리지 않는 데서 오는 의문도 있습니다. 누가복음 5장은 새로운 현실이 시작되었다는 선언과, 그 현실을 받아들이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함께 보여 줍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 이야기는 「묵은 것이 좋다」라는 말로 끝납니다.
그 말이 들리는 동안에도 레위의 집에는 예수님을 위해 마련된 잔치가 있습니다.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 일행과 함께 음식을 먹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자리에 계십니다.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부르던 이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신랑으로, 죄인을 불러 회개하게 하려고 오신 분으로 말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