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훔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장 · 하나님의 분노와 힘

무너뜨리시고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

나훔서는 니느웨의 멸망을 선포하는 책입니다. 그런데 첫 장을 펼치면 뜻밖에도 니느웨에 관한 이야기가 좀처럼 나오지 않습니다. 성벽도, 군대도, 왕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폭풍이 일고, 바다가 마르고, 산들이 흔들립니다. 그 모든 광경의 중심에 여호와야훼가 계십니다.

왜 한 제국의 멸망을 예고하면서 온 세상을 뒤흔드는 하나님의 모습을 먼저 보여 주는 것일까요?

당시 니느웨는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였습니다. 아시리아는 오랫동안 서아시아 여러 나라를 정복하고 지배했으며, 유다 역시 그 압박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열왕기하 18–19장은 아시리아가 예루살렘을 위협하던 상황을 전합니다.

그러나 나훔은 그 권력이 얼마나 막강한지부터 설명하지 않습니다. 제국의 운명을 판단하려면 먼저 제국보다 크신 분이 누구인지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산을 흔들고 바위를 부수시는 바로 그분이 누군가에게는 피난처가 되십니다. 한 분의 동일한 하나님이 대적에게는 심판자가 되시고, 그분께 피하는 이들에게는 피난처가 되십니다.

억압하는 권력이 무너지는 일과 억압받는 이들이 해방되는 일이 하나의 사건 안에서 만난다는 것이 나훔 1장의 중요한 통찰입니다.

읽는 시간 17분소단락 61장 본문 읽기 →

더디게 화내시는 하나님이 끝내 심판하시는 이유

나훔 1:1–2 본문 →

첫 절은 이 책을 「니느웨에 관한 신탁」이라고 소개합니다. 예언자 나훔은 엘고스 사람이라고만 알려져 있습니다. 엘고스의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으며, 본문도 그곳을 특정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2절에서는 여호와야훼가 복수하신다는 말이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여호와야훼는 질투하며 복수하는 하나님이다. 여호와야훼는 복수하며 분노에 차 있다. 여호와야훼는 자기 대적들에게 복수하고, 자기 원수들을 향한 분노를 간직한다.나훔 1:2 · 본디새김

성경에서 하나님의 질투는 다른 존재가 자신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느끼는 시기심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20:5와 34:14에서 하나님의 질투는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 관계 안에서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충성과 그 관계를 훼손하는 것에 대한 단호함을 표현합니다.

나훔서에서는 이러한 언어가 제국의 폭력과 연결됩니다. 여호와야훼는 자기 백성을 괴롭히는 세력을 향해 무관심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행사하는 권력이 강력하다는 이유로 그들의 행위를 정당하다고 인정하지도 않으십니다.

여기서 「복수」는 피해자가 품은 원한을 무조건 정당화하는 말이 아닙니다. 나훔은 유다 사람들에게 니느웨를 향해 개인적인 보복을 실행하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복수의 주체는 줄곧 여호와야훼이십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예상 밖의 표현이 등장합니다.

여호와야훼는 화내는 데 더디고 힘이 크며, 결코 벌을 면해 주지 않는다. 여호와야훼의 길은 폭풍과 회오리바람 속에 있고, 구름은 그의 발에서 이는 먼지다.나훔 1:3 · 본디새김

이 문장은 출애굽기 34:6–7을 떠올리게 합니다. 금송아지 사건 이후 모세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과 성품이 선포될 때, 여호와야훼는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죄악을 용서하시지만, 죄에 대한 책임을 결코 가볍게 넘기지 않으시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나훔은 그 선언 가운데 「화내는 데 더디고」와 「결코 벌을 면해 주지 않는다」는 두 요소를 함께 가져옵니다.

우리는 종종 오래 참는 것을 힘이 부족한 상태로 이해합니다. 상대를 제지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견디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훔은 「화내는 데 더디고」 바로 뒤에 「힘이 크며」를 놓습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심판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큰 능력은 언제든 즉각적인 분노로 표출되어야 하는 힘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금 심판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 하나님이 악을 인정하신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요나서 3장에서는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 돌이켰으며, 하나님은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하신 재앙을 거두셨습니다. 반면 나훔서는 니느웨의 악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을 선언합니다.

두 책이 동일한 역사적 사건의 앞뒤를 정확히 어떻게 반영하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정경 안에서 두 책을 함께 읽으면 분명한 긴장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돌이키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동시에 악을 끝없이 묵인하지 않으십니다.

나훔은 이제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자연 전체가 반응하는 장면으로 펼쳐 보입니다.

구름은 그의 발에서 이는 먼지다

나훔 1:3–6 본문 →

3절 후반부부터 시야가 갑자기 넓어집니다.

사람에게 폭풍은 두려운 자연현상입니다. 짙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으면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실감합니다. 그런데 나훔은 바로 그 구름을 여호와야훼의 발에서 일어나는 먼지라고 묘사합니다.

여기서 여호와야훼는 폭풍에 휩쓸리는 분이 아니십니다. 폭풍 속에 길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사람이 통제할 수 없는 혼돈 같은 자연현상도 그분의 움직임을 가로막지 못합니다.

이어지는 4절에서는 물이 사라집니다.

그는 바다를 꾸짖어 말렸고, 모든 강을 말라붙게 했다. 바산과 갈멜이 시들었고, 레바논의 싹도 시들었다.나훔 1:4 · 본디새김

바다를 「꾸짖는다」는 표현은 자연이 하나님의 명령에 응답하는 듯한 모습을 만듭니다. 출애굽기 14:21–22에서는 바다가 갈라져 이스라엘의 탈출길이 열렸고, 여호수아 3:14–17에서는 요단강의 물이 멈추어 백성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나훔은 특정한 한 사건을 직접 다시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바다와 강이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물러난다는 모습은 그 구원의 기억을 자연스럽게 불러옵니다.

바산과 갈멜과 레바논의 선택도 의미가 있습니다. 이 지역들은 풍성한 목초지와 숲, 식생을 떠올리게 하는 곳들입니다. 물이 넘쳐야 할 곳에서 물이 사라지고, 푸르러야 할 곳에서 생명이 마릅니다.

5절은 한층 더 깊은 곳을 흔듭니다.

그 때문에 산들이 흔들렸고, 언덕들이 녹아내렸다. 그 앞에서 땅이 들썩였고, 세상과 그 안에 사는 모든 이들도 들썩였다.나훔 1:5 · 본디새김

산과 언덕은 인간이 경험하는 세상에서 가장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대상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 앞에서는 그마저 안정된 자리를 지키지 못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위엄 가운데 나타나실 때 자연 전체가 반응하는 현현의 언어입니다. 시편 18:7–15, 97:3–5, 미가 1:3–4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나훔은 자연 전체를 움직이시는 하나님 앞에서 제국의 힘이 얼마나 제한적인지 보여 줍니다.

그의 격분 앞에 누가 설 수 있겠느냐? 그의 타오르는 노여움 속에서 누가 버틸 수 있겠느냐? 그의 분노가 불처럼 쏟아졌고, 그 때문에 바위들이 부서졌다.나훔 1:6 · 본디새김

질문의 답은 사실상 정해져 있습니다. 아무도 버틸 수 없습니다. 앞선 구절에서 산들이 흔들리고 언덕들이 녹아내렸다면, 사람의 손으로 세운 권력은 어떻겠습니까? 가장 오래 버틸 것 같은 자연의 기초조차 흔들리는 마당에, 강대한 군사력과 성벽이 영원한 안전을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나훔은 아직 니느웨의 이름을 다시 부르지 않았지만, 독자는 이미 니느웨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온 세상을 뒤흔드는 이 광경의 끝에서, 나훔은 전혀 다른 말을 꺼냅니다.

조금 더 깊이

이 단락의 히브리어 시에는 알파벳 순서를 따르는 시가의 흔적도 나타납니다. 2–8절에 히브리어 알파벳의 앞부분을 따라가는 낱말들이 보이지만, 순서가 온전하게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본래 완전한 알파벳 시였는지, 의도적으로 불완전하게 구성되었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흔들릴 때 피난처가 되시는 분

나훔 1:7–8 본문 →

6절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바위들마저 부서졌습니다. 그러므로 7절이 시작될 때 독자는 묻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디에 설 수 있습니까?

여호와야훼는 선하다. 고난의 날에 피난처가 되며, 자기에게 피하는 이들을 안다.나훔 1:7 · 본디새김

하나님의 능력만 안다면 사람은 그분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선하시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을 위해 그 능력을 사용하시는지 묻게 합니다.

바위조차 부서지는 장면 뒤에서 안전을 제공하는 것은 또 다른 바위나 더 높은 산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 자신이십니다.

여기서 피난처는 반드시 고난을 경험하지 않게 되는 장소를 뜻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분명히 「고난의 날」을 말합니다. 고난이 실제로 닥친 가운데 누구를 의지할 수 있는지가 문제입니다.

시편 1:6에서 여호와야훼가 의인의 길을 아신다는 표현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단순히 의인의 행동을 관찰하고 계신다는 뜻에 그치지 않습니다.

나훔 1:7에서도 같은 관계적 의미가 자연스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피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아십니다. 세상의 거대한 권력 앞에서 그들이 얼마나 작아 보이든, 하나님 앞에서 그들은 잊힌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8절에서 다시 뒤집힙니다.

그는 휩쓸고 지나가는 홍수로 니느웨의 터에 완전한 파멸을 가져올 것이며, 어둠이 그의 원수들을 뒤쫓을 것이다.나훔 1:8 · 본디새김

홍수는 막아 내기 어려운 힘을 표현합니다. 4절에서는 여호와야훼의 명령 앞에서 물이 말라 버렸지만, 여기서는 거꾸로 물이 넘쳐 모든 것을 휩씁니다. 물이 물러나든 밀려오든, 자연을 움직이시는 권세는 여호와야훼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의 어둠은 홍수와 조금 다릅니다. 홍수가 한순간 덮치는 힘을 보여 준다면, 어둠은 뒤쫓는 존재처럼 나타납니다. 원문에서 어둠을 뒤쫓는 주체로 읽으면, 이 장면에는 강렬한 역전이 생깁니다. 지금까지 다른 민족을 추격하고 정복했던 제국이 이제는 어둠에게 쫓깁니다.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한 자에게도 안전한 곳이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8절에는 한 가지 본문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에는 「그 여자의 자리」에 해당하는 표현이 있어 1절의 니느웨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면 칠십인역은 하나님께 맞서 일어나는 자들을 완전히 끝내신다는 뜻으로 읽습니다. 어느 쪽이든 여호와야훼를 대적하는 세력의 파멸이라는 중심 의미는 같습니다.

하나님을 거슬러 꾸민 계획의 끝

나훔 1:9–11 본문 →

9절부터는 우주적인 장면이 구체적인 대결로 바뀝니다.

너희는 여호와야훼를 거슬러 무엇을 꾸미느냐? 그는 완전한 파멸을 가져온다. 고난이 두 번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나훔 1:9 · 본디새김

니느웨의 통치자들에게 그들의 행동은 주변 국가를 정복하고 지배하기 위한 정치적·군사적 계획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훔은 그것을 단순히 국가 사이의 세력 다툼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들의 계획은 여호와야훼를 거스르는 행위로 드러납니다.

여기서 모든 국가적 갈등을 곧바로 하나님을 향한 반역이라고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나훔서가 문제 삼는 것은 이 특정한 제국이 행사한 폭력과 그 권력의 오만입니다. 3장에 이르면 그 폭력의 모습이 더욱 직접적으로 폭로됩니다.

9절의 「완전한 파멸」은 8절에도 나온 표현입니다. 이 반복은 심판의 결정성을 강조합니다. 여호와야훼가 끝내시는 일을 니느웨의 권력이 다시 원래대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시덤불처럼 뒤엉켜 있고 제 술에 취해 있는 동안, 바싹 마른 지푸라기처럼 삼켜질 것이기 때문이다.나훔 1:10 · 본디새김

뒤엉킨 가시덤불은 복잡하게 얽힌 모습을, 술에 취한 상태는 판단과 행동이 흐려진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고 바싹 마른 지푸라기는 너무나 쉽게 소멸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11절에서는 복수로 묘사되던 대적들 가운데 한 인물처럼 보이는 존재가 등장합니다.

너에게서 여호와야훼를 거슬러 악을 꾸미는 자, 몹쓸 계책을 내는 자가 나왔다.나훔 1:11 · 본디새김

「너에게서」는 문맥상 니느웨를 향한 말로 이해됩니다. 그곳에서 다른 나라를 공격하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계획이 나옵니다. 한 제국의 수도가 악한 계책의 출발점으로 묘사되는 것입니다.

이 인물을 역사 속 특정 아시리아 왕과 연결하려는 읽기도 가능합니다. 특히 열왕기하 18:17–35와 19:20–28에 묘사된 산헤립 시대의 위협은 뚜렷한 유사성을 보입니다. 그러나 나훔 1:11은 왕의 이름을 밝히지 않으므로 반드시 산헤립 한 사람만을 지칭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아시리아의 통치자들은 다른 민족을 어떻게 굴복시킬지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나훔은 이제 그 계획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줍니다.

인간의 계획과 하나님의 선언이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9절의 「고난이 두 번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는 해석이 갈리는 문장입니다. 하나는 여호와야훼의 심판이 너무나 철저하여 니느웨를 다시 심판할 필요조차 없다는 뜻으로 읽는 것입니다. 앞뒤에 완전한 파멸이 반복되므로 자연스러운 해석입니다. 다른 하나는 유다가 겪어 온 고난이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으로 읽는 것입니다. 곧이어 12–13절에서 유다의 압제가 끝날 것을 선언하므로 이 해석에도 문맥상의 근거가 있습니다. 두 읽기 모두 가능한 문맥을 가지고 있습니다.

멍에를 부수시는 하나님과 이름을 끊으시는 하나님

나훔 1:12–14 본문 →

12절은 읽을 때 특히 주의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말씀이 향하는 대상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온전하고 그처럼 많더라도, 그렇게 잘려 나갈 것이고 그는 사라질 것이다. 내가 너를 괴롭혔으나, 다시는 너를 괴롭히지 않겠다.」나훔 1:12 · 본디새김

처음의 「그들이」는 문맥상 아시리아의 세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들은 부족함 없이 갖추어져 있고 수적으로도 많습니다. 다시 말해, 외부에서 보기에는 무너지기 어려운 강대한 세력입니다.

여기서 「너」는 앞의 아시리아와 달리 유다를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13절에서 멍에가 부서질 대상이 바로 이 「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단지 아시리아가 유다를 괴롭혔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너를 괴롭혔으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유다가 당한 고난이 하나님의 통치 밖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사야 10:5–12에서는 아시리아가 하나님의 심판을 위한 도구로 묘사되지만, 자기 힘을 자랑하며 오만하게 행동한 아시리아 역시 심판받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역사의 심판을 위해 어떤 제국을 사용하셨다는 사실은 그 제국의 폭력에 무제한의 정당성을 부여하지 않습니다.

또한 이 구절에서 모든 시대의 고난받는 사람들에게 그 고난이 각자의 죄에 대한 직접적인 형벌이라고 적용해서도 안 됩니다. 나훔은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유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직접 압제의 종결을 선언하십니다.

「이제 내가 네 위에 놓인 그의 멍에 막대를 부수고, 너를 묶은 줄들을 끊겠다.」나훔 1:13 · 본디새김

멍에는 원래 짐승에게 씌워 일을 시키는 도구입니다. 사람이나 민족에게 적용될 때는 지배와 강제 노역, 자유를 빼앗긴 상태를 나타냅니다. 아시리아의 지배 아래에서 유다는 조공과 군사적 압박을 경험했습니다. 열왕기하 18:13–16에서는 히스기야가 아시리아 왕에게 은과 금을 바친 이야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멍에를 가볍게 하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멍에 막대를 「부수고」 줄들을 「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압제가 유지되는 구조 자체를 깨뜨리겠다는 선언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유다에게 스스로 멍에를 벗어 내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부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앞서 7절에서 여호와야훼가 피난처가 되신다고 선언한 말씀이 역사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보호는 단지 고난받는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나훔서의 문맥에서는 그들을 짓누르는 권력을 무너뜨리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출애굽기에서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의 고통을 아십니다(출애굽기 3:7–8). 그리고 이집트의 지배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십니다. 나훔에서는 니느웨를 향한 심판이 아시리아의 멍에를 끝내는 약속과 함께 선포됩니다.

이사야 10:24–27에서도 아시리아를 두려워하는 시온의 백성에게 압제의 멍에가 벗겨질 것이라는 말씀이 주어집니다. 나훔 1:13과 특히 가까운 구약 내부의 연결입니다.

14절에서 말씀의 방향은 다시 바뀝니다.

여호와야훼가 너에 관해 명령했다. 「네 이름을 이을 씨가 더는 뿌려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네 신들의 집에서 새긴 우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끊어 없애겠다. 네 무덤을 만들겠다. 네가 하찮기 때문이다.」나훔 1:14 · 본디새김

여기서 「너」는 유다가 아니라 아시리아의 왕 또는 그 통치 권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씨를 뿌리는 이미지는 이름과 계승이 계속 이어지는 모습을 표현합니다. 왕조에게 후계자가 있고 이름이 이어진다는 것은 자기 권력이 앞으로도 지속된다는 믿음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지속성을 끊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아시리아 민족 전체에 후손이 남지 않을 것이라는 뜻으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문맥에서는 왕과 권력이 이어 가려는 이름과 지배의 종말이 중심입니다.

고대 제국에서 종교는 왕권과 무관한 사적인 영역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왕의 통치와 전쟁의 승리는 신들의 후원과 연결되어 설명되곤 했습니다. 따라서 우상들을 없애겠다는 선언은 단순히 종교적인 물건을 파괴한다는 뜻을 넘어, 제국이 의지하던 신적 보증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앞에서는 이름을 이어 갈 미래가 차단되고, 여기서는 무덤이라는 마지막 자리가 주어집니다. 한때 다른 민족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던 권력에게 이제 자신의 끝을 결정할 권한조차 없다는 뜻입니다.

아시리아의 왕은 자신을 위대한 통치자로 내세웠을 것입니다. 강대한 군대와 넓은 영토, 부와 권력은 그 위대함을 뒷받침하는 증거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평가는 정반대입니다.

「네가 하찮기 때문이다.」 이 말은 단순히 제국이 군사적으로 약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토록 무겁게 다른 민족을 짓누르던 권력이 하나님의 저울에서는 하찮게 평가된다는 역설을 드러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무거운 멍에가 되었던 권력이 하나님 앞에서는 가벼운 것으로 판정됩니다.

조금 더 깊이

흥미롭게도 복수인 「그들이」에서 단수인 「그는」으로 표현이 바뀝니다. 아시리아의 세력 전체에서 그 대표자나 통치 권력으로 초점이 옮겨졌을 가능성이 있지만, 정확한 대상은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히브리어에서도 12–13절의 여성형 2인칭 표현이 14절에서는 남성형으로 바뀝니다. 이는 말씀의 수신자가 전환된다는 해석을 뒷받침합니다.

맺음말 — 멍에의 무게와 이름의 가벼움

나훔 1:1–14 본문 →

여기에는 두 종류의 무게가 대비됩니다. 사람에게는 너무 무거웠던 멍에와, 하나님 앞에서는 하찮게 된 권력의 이름입니다. 나훔은 강대한 제국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만 말하지 않습니다. 누가 그 제국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었는지, 그리고 누가 그 멍에를 끊을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 대조는 단순히 니느웨는 나쁘고 유다는 선하다는 민족적 구분으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실제로 12절에서는 유다 역시 하나님의 괴롭히심을 경험했다고 말씀합니다. 나훔은 유다가 아무런 잘못도 없는 완전한 민족이기 때문에 구원받는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본문의 초점은 민족의 우월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그분의 선하심에 있습니다.

다만 이 메시지를 읽는 사람이 자기 반대자를 곧바로 니느웨라고 규정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 선언할 권한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나훔의 말씀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관한 선포이지, 인간의 적개심을 신성화하는 허가장이 아닙니다.

세상 전체를 흔드시는 하나님의 권세가 마침내 향하는 곳은 억압받는 사람의 어깨입니다.

하나님은 그 어깨에서 멍에 막대를 부수시고 줄을 끊으십니다. 반면 자신의 이름을 영원히 남기려던 제국의 통치자에게는 다른 말씀이 주어집니다. 그 이름은 더 이상 뿌려지지 않을 것이며, 그의 무덤이 마련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1장은 니느웨의 성벽이 무너지는 광경보다 앞선 한 장면에서 끝납니다.

억압하던 자의 이름은 더 이상 뿌려지지 않고, 억압받던 자의 어깨에서는 멍에가 부서집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