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훔 풀어 읽기 · 2장
이 장의 자리 · 2장 · 무너지는 니느웨
평화의 소식과 니느웨의 무너짐
나훔 2장은 전쟁 이야기인데, 전쟁의 시작이 아니라 평화의 소식으로 문을 엽니다.
그런데 이 평화의 소식을 전한 직후, 본문은 갑자기 니느웨를 공격하는 군대를 보여 줍니다. 방패가 붉게 빛나고 병거들이 질주하며, 성문이 열리고 궁전이 무너집니다. 사람들이 달아나고 도시의 재물이 약탈당합니다.
이상한 순서입니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왜 먼저 평화를 선포합니까?
나훔은 니느웨의 함락을 시간순으로 기록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독자에게 먼저 이 전쟁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려 줍니다. 니느웨의 관점에서는 도시의 파멸이지만, 오랫동안 아시리아의 지배를 받았던 유다의 관점에서는 압제의 끝을 알리는 소식입니다.
처음에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의 발이 나타나고, 마지막에는 제국의 전령들이 침묵합니다.
누구의 소식이 들리고 누구의 목소리가 사라지는가. 이 대조를 따라가면 나훔 2장이 단순한 전쟁 묘사를 넘어 무엇을 말하는지 발견하게 됩니다.
평화가 돌아오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산 위에서 들려오는 소식
나훔은 먼저 산 위에 나타난 사람의 발을 보여 줍니다.
보라, 산들 위에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이의 발이 있다. 평화를 알리는 이의 발이다. 유다야, 네 절기들을 지키고, 네 서원들을 이행하여라. 몹쓸 자가 다시는 너를 지나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완전히 끊겨 없어졌다.나훔 2:1 · 본디새김
여기에는 아직 소식을 전하는 사람의 얼굴도, 이름도 나오지 않습니다. 오직 발만 보입니다. 멀리서 누군가 산을 넘어 다가오는 모습입니다. 아직 그가 전하는 말이 들리지 않아도, 그가 무슨 소식을 가지고 오는지가 먼저 알려집니다.
고대의 전쟁에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전쟁터와 왕궁, 도시와 도시 사이에서 승리와 패배, 명령과 항복의 소식을 전달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처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사건을 즉시 알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소식을 가지고 도착하는 사람의 모습 자체가 특별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평화는 추상적인 관념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누군가 실제로 달려와 전하는 소식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소식을 들은 유다에게 내려지는 명령은 예상과 조금 다릅니다.
절기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정해진 때에 하나님 앞에 모여 그분의 구원과 은혜를 기억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서원은 사람이 하나님께 약속한 것을 이행하는 행위입니다. 둘 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공동체의 삶 속에서 드러내는 행동입니다.
아시리아의 압박 아래에서는 이러한 삶이 온전히 이루어지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구체적으로 어떤 절기가 중단되었고 어떤 서원이 지켜지지 못했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나훔에게 평화란 단순히 전투가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다시 하나님 앞에서 자기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상태입니다.
「지나가지 않을 것」이라는 표현은 특별히 의미가 있습니다. 강력한 제국은 다른 나라의 영토를 마음대로 통과할 수 있는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군대가 지나간다는 것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었습니다. 침략과 약탈, 강제적인 복종을 뜻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유다는 그 위협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약속을 듣습니다.
이사야 52:7에서도 산 위에서 좋은 소식을 전하고 평화를 알리는 발이 등장합니다. 두 본문은 매우 가까운 예언적 표현을 공유합니다. 이사야에서는 시온을 향해 하나님의 통치와 구원을 선포하는 장면으로 발전합니다. 나훔에서는 먼저 아시리아의 지배가 끝나는 역사적 상황에 초점이 맞추어집니다.
두 본문이 반드시 서로를 직접 인용했다고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둘 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구원이 소식으로 전해지고, 그 소식이 억압받던 공동체의 삶을 바꾼다는 점에서 연결됩니다.
니느웨를 향한 뜻밖의 명령
바로 다음 절에서 말씀의 대상이 갑자기 바뀝니다.
흩어 버리는 자가 네 앞으로 올라왔다. 보루를 지켜라. 길을 살펴라. 허리에 힘을 주어라. 힘을 한껏 북돋워라.나훔 2:2 · 본디새김
문맥상 이 명령의 대상은 니느웨입니다. 같은 명령형이 사용되지만 분위기는 완전히 다릅니다. 유다에게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이 주어지고, 니느웨에게는 적을 막을 준비를 하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니느웨를 향한 이 명령에는 묘한 반어가 담겨 있습니다.
마치 실제로 방어에 성공할 수 있을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독자는 이미 1장에서 니느웨에 완전한 파멸이 선언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명령들은 승리할 방법을 알려 주는 군사적 조언이라기보다, 제국이 가진 모든 방어 능력을 동원해 보라는 도전으로 들립니다.
지금까지 다른 민족을 흩어 버리고 그들의 질서를 무너뜨리던 것은 아시리아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니느웨 앞으로 흩어 버리는 자가 올라왔습니다.
다른 나라들을 흩어 놓던 제국이 스스로 흩어질 위험에 직면한 것입니다.
본문은 공격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나훔은 공격군의 신원보다 니느웨가 처한 역전된 상황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왜 여기서 야곱의 회복을 말하는가
전투 준비가 시작되려는 순간, 나훔은 또다시 시선을 돌립니다.
여호와야훼가 야곱의 위엄을 이스라엘의 위엄처럼 되돌려 놓았기 때문이다. 비워 버리는 자들이 그들을 비워 버렸고, 그들의 가지들을 망가뜨렸기 때문이다.나훔 2:3 · 본디새김
이 절은 앞뒤의 군사 장면 사이에 들어가 있습니다. 전쟁의 속도를 잠시 늦추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 전쟁이 일어나는 이유를 밝혀 줍니다.
「야곱」과 「이스라엘」은 본래 동일한 조상의 두 이름입니다. 이 구절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는 시적 병행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유다와 북이스라엘을 구별하여 말하는 것으로 읽을 여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관계를 구체적으로 풀어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저 한 차례의 패배를 당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지고 있던 것을 빼앗기고, 삶의 기반이 황폐해진 상태를 말합니다.
이어지는 「가지들」은 포도나무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포도나무에서 가지는 열매를 맺는 부분입니다. 가지가 망가지면 당장의 열매만 잃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열매를 맺을 가능성도 훼손됩니다.
따라서 아시리아의 침략은 단순한 재산상의 손실을 넘어 한 공동체의 지속적인 삶을 파괴한 사건으로 묘사됩니다.
나훔은 11절에서 니느웨 자신이 완전히 텅 비었다고 선언합니다.
남을 비워 버렸던 자들이 이제 스스로 비워지는 것입니다.
붉은 방패와 번개 같은 병거들
4절부터는 전쟁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묘사됩니다.
그의 용사들의 방패가 붉게 물들었고, 군사들은 진홍색 옷을 입었다. 그가 준비하는 날, 병거는 쇠붙이의 불길 속에 있었다.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흔들렸다.나훔 2:4 · 본디새김
나훔은 군대의 규모나 배치보다 군대가 눈앞에 나타났을 때의 시각적인 인상을 보여 줍니다. 공격이 시작되기 직전의 긴장이 시각적으로 펼쳐집니다.
다음 절에서는 그 긴장이 폭발합니다.
병거들이 거리에서 미친 듯이 내달리고, 광장들에서 이리저리 질주한다. 그 모습은 횃불들 같고, 병거들은 번개처럼 쏜살같이 달린다.나훔 2:5 · 본디새김
거리와 광장은 원래 도시 생활의 공간입니다. 사람들이 오가고, 물건을 거래하고, 서로 만나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그 공간을 병거들이 차지합니다.
질서 있게 통제된 움직임보다 빠르고 불안정하며 위협적인 움직임이 강조됩니다. 4절에서 붉은색과 불길로 시작한 묘사는 5절에서 횃불과 번개로 더욱 빨라집니다.
아시리아는 병거와 군대를 통해 다른 나라를 위협했던 제국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같은 전쟁의 기계들이 니느웨의 거리를 위협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다른 나라에서 일으켰던 공포를 이제 자기 도시 안에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특히 방패가 붉게 물들었다는 표현을 전투에서 흘린 피가 묻은 것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아직 전투 준비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방패에 입힌 색이나 재료가 붉게 보이는 상황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병거의 묘사는 원문이 쉽지 않습니다. 「쇠붙이의 불길」에 해당하는 표현은 병거의 금속 부품이 번쩍이는 모습을 가리킬 수도 있고, 실제 불과 관련된 장면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흔들렸다」는 말 역시 사이프러스 나무 자체를 가리키는지, 그 나무로 만든 무기, 특히 창자루 같은 것을 가리키는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이 장면이 실제 공성전에서 병거들이 정확히 어떤 경로로 움직였는지를 기록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전쟁의 현장을 시적으로 압축한 환상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성벽이 아니라 마음이 먼저 무너지는가
비틀거리는 용사들
그가 자기의 위세 있는 자들을 떠올린다. 그들은 걸어가다 비틀거리고, 그녀의 성벽으로 서둘러 간다. 방호 덮개가 준비되었다.나훔 2:6 · 본디새김
이 절은 앞선 병거 묘사와는 다른 종류의 움직임을 보여 줍니다.
누가 명령을 내렸는지, 어느 군대가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방호 장비가 어떻게 설치되었는지 상세한 설명이 없습니다. 그 대신 기억하고, 비틀거리고, 서두르고, 준비하는 행동들이 빠르게 이어집니다.
독자는 전체 전황을 차분하게 파악하기보다, 혼란스러운 현장 한가운데 있는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강들의 문들이 열리다
강들의 문들이 열렸고, 궁전이 녹아내렸다.나훔 2:7 · 본디새김
도시를 지키는 문이 열린다는 것은 방어가 무너지는 결정적인 순간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궁전은 제국의 권력이 집중된 장소입니다. 명령이 내려지고, 신하들이 모이며, 나라의 질서가 결정되는 중심입니다.
특히 「녹아내렸다」는 표현은 뒤의 11절과 연결됩니다. 11절에서는 사람들의 「마음이 녹아내렸다」고 합니다.
궁전이 녹아내리고, 사람들의 마음도 녹아내립니다.
니느웨가 잃는 것은 단순히 군사적인 방어선이 아닙니다. 자신들을 지탱하던 확신과 질서까지 무너지고 있습니다.
도시가 끌려가는 모습
정해졌다. 그녀는 벗겨졌고 끌려갔다. 그녀의 여종들은 비둘기 울음소리처럼 신음하며, 자기 가슴을 두드렸다.나훔 2:8 · 본디새김
이 절에서는 전투 장면이 갑자기 애곡 장면으로 바뀝니다.
「벗겨졌고」라는 표현은 수치와 영광의 상실을 떠올리게 하며, 「끌려갔다」는 말은 자유를 잃은 상태를 보여 줍니다. 비둘기 소리는 크고 위협적인 함성보다 낮고 애처로운 울음에 가깝습니다. 성벽을 공격하던 전투의 소음이 이제 사람들의 애곡으로 바뀝니다.
여기서 나훔의 묘사는 니느웨의 멸망을 단순히 영웅적인 승전 장면으로 꾸미지 않습니다. 도시의 함락에는 울음과 상실, 끌려가는 사람들의 고통이 함께 존재합니다.
그 사실을 지우고 모든 고통을 즐거운 구경거리처럼 읽어서는 안 됩니다. 나훔이 선언하는 것은 폭력을 행사해 온 제국의 종말이지, 전쟁에 휘말린 개개인의 고통이 사소하다는 주장이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6절에서 「그가」 자기의 위세 있는 자들을 떠올린다고 했을 때, 그는 니느웨의 왕일 수도 있고 공격군의 지휘관일 수도 있습니다. 니느웨의 왕이라면, 그는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 유력한 장수들을 불러 모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장수들은 성벽으로 서둘러 가다가 비틀거립니다. 이는 급박한 상황에서 나타나는 혼란을 보여 줍니다. 반대로 공격군의 지휘관이라면, 이들은 성벽을 향해 진격하는 군사들이고 「방호 덮개」는 공성 공격을 지원하는 장비일 수 있습니다. 어느 해석에도 문맥상의 근거가 있습니다. 7절의 「강들의 문들」과 관련하여, 니느웨는 티그리스강 인근에 있었고, 호스르강과 수로 체계가 도시의 지형과 방어 시설에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물길 주변의 성문이나 수문과 관계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문을 구체적으로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강물이 불어나 성벽을 무너뜨렸다는 설명은 가능한 해석 가운데 하나지만, 이 한 구절이 그 사건을 명확히 증언하는 것은 아닙니다. 「궁전이 녹아내렸다」는 말을 궁전 건물 자체가 열에 의해 녹았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은 권력의 중심이 유지되던 힘을 잃고 무너지는 모습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8절의 「그녀」에 대해, 한쪽에서는 니느웨라는 도시 자체를 여성으로 의인화한 표현이라고 읽습니다. 구약의 예언서에서는 도시를 여인으로 묘사하는 일이 흔합니다. 다른 쪽에서는 왕비나 궁전의 중요한 여성 인물을 가리킨다고 이해합니다. 뒤에 여종들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해석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원문은 그 여인의 정체를 확정해 주지 않습니다. 첫머리의 「정해졌다」라는 선언 역시 어렵습니다. 히브리어 베후차브(נָצַב)는 세우거나 굳히는 뜻과 관련된 수동형이지만, 정확히 무엇이 정해졌는지 명시되지 않습니다. 이를 고유명사처럼 이해하는 번역 전통도 있으나, 문맥상 결정이 내려졌다는 선언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물웅덩이 같던 도시가 텅 비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다
니느웨는 예부터 물웅덩이 같았다. 그런데 그들은 달아나고 있다. 「멈춰라, 멈춰라.」 그러나 돌아보는 자가 없다.나훔 2:9 · 본디새김
이것이 누구의 목소리인지 나훔은 밝히지 않습니다. 군사 지휘관이 도망치는 병사들을 향해 외치는 소리일 수도 있고, 주민들의 피난을 막으려는 누군가의 외침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아시리아 제국은 명령을 내리고 다른 사람들을 복종시키는 체제였습니다. 군대는 명령에 따라 움직였고, 피정복 민족들은 왕의 요구를 따라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니느웨 안에서는 「멈춰라」라는 가장 단순한 명령조차 실행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던 권력의 목소리가 더는 사람들을 멈춰 세우지 못합니다.
약탈당하는 보물 창고
은을 약탈하라. 금을 약탈하라. 쌓아 둔 재물은 끝이 없고, 온갖 탐나는 물건이 풍성하다.나훔 2:10 · 본디새김
앞의 명령은 실패했습니다. 뒤의 명령은 정복된 도시의 재물이 이제 약탈의 대상이 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끝이 없고」, 「풍성하다」라는 말이 이어집니다. 이것은 단순히 니느웨가 부유한 도시였다는 설명을 넘어섭니다. 나훔서의 문맥에서 아시리아의 부는 정복과 약탈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토록 많은 재물을 모았지만 그것들이 니느웨를 지켜 주지는 못합니다.
나훔은 여기서 약탈이라는 행위를 일반적으로 옳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제국이 다른 민족의 재산을 빼앗아 쌓아 올렸던 부가 이제 자기 도시를 구원하지 못하고 도리어 약탈의 대상이 되는 역전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나훔 3:1에서 니느웨를 피와 약탈로 가득한 도시라고 고발하는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또한 하박국 2:6–8에서는 다른 민족의 재물을 빼앗아 부를 쌓은 자가 결국 약탈당하는 역전이 선포됩니다.
텅 비고, 텅 비고, 황폐해졌다
텅 비고, 텅 비고, 황폐해졌다. 마음이 녹아내렸고, 무릎이 후들거렸으며, 모든 허리에 고통이 일었고, 모두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나훔 2:11 · 본디새김
앞 절에서는 니느웨의 풍성함이 강조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의 첫마디는 「텅 비고」입니다.
나훔은 니느웨의 파괴를 설명하는 데 긴 문장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짧고 반복적인 소리만으로 도시 전체가 텅 비어 버린 인상을 만듭니다.
그런데 도시만 비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훔은 이제 사람의 몸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이러한 신체적인 묘사는 전쟁의 공포가 단순한 생각이나 감정에 그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사람은 극도의 두려움 앞에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2절에서 니느웨는 「허리에 힘을 주어라. 힘을 한껏 북돋워라」라는 명령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11절에서는 모든 허리에 고통이 일어납니다.
모든 힘을 모아 방어하라는 명령이 얼마나 무력했는지를 사람들의 몸이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9절의 물웅덩이는 니느웨의 풍부한 물과 수로 체계를 떠올리게 하는 표현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그들은 달아나고 있다」는 말 때문에, 한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물이 빠져나가듯 흩어지는 장면으로도 이해됩니다. 본문이 이 비유의 모든 요소를 설명하지 않으므로 어느 하나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풍부하게 모여 있던 무엇인가가 이제 사라지고 있다는 대조는 뚜렷합니다.
사자들의 거처는 어디로 갔는가
사라진 사자들의 집
11절에서 니느웨가 텅 비었다고 선언한 뒤, 나훔은 갑자기 사자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사자들의 거처, 젊은 사자들의 먹이터는 어디에 있느냐? 그곳에서는 사자와 암사자와 사자 새끼가 거닐었고, 겁주는 자가 없었다.나훔 2:12 · 본디새김
사자는 고대 근동에서 강력한 힘과 왕권을 떠올리게 하는 동물이었습니다. 실제로 아시리아 왕궁의 미술에서도 사자는 중요한 소재였습니다.
니느웨에 있던 아슈르바니팔의 궁전 벽면에는 왕이 사자를 사냥하는 장면들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왕이 사자를 제압하는 모습은 그의 힘과 통치 능력을 드러내는 왕실 이미지와 연결됩니다. 나훔이 아시리아를 사자에 비유하는 것은 이러한 문화적 배경 안에서 특별한 울림을 갖습니다.
강한 자들이 자기 영역 안에서 아무런 위협을 느끼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니느웨는 바로 그러한 곳이었습니다. 다른 나라에는 두려움을 가져다주면서도, 자기 자신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던 제국이었습니다.
「사자들의 거처, 젊은 사자들의 먹이터는 어디에 있느냐?」라는 질문은 단순히 위치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뜻을 담은 질문입니다.
나훔은 제국의 자랑을 직접 공격하기보다 그 제국이 얼마나 영원할 것처럼 보였는지를 먼저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 다음 그것이 어디로 갔느냐고 묻습니다.
사자가 가족을 먹이는 방식
사자는 제 새끼들에게 넉넉히 줄 먹잇감을 찢어 잡았고, 제 암사자들을 위해 먹잇감의 목을 졸랐다. 자기 굴들을 먹잇감으로, 자기 거처들을 찢긴 먹잇감으로 채웠다.나훔 2:13 · 본디새김
이 절은 12절의 평화로워 보이는 사자 가족의 모습을 완전히 다르게 보게 만듭니다.
사자의 입장에서 보면 가족을 먹이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먹잇감의 입장에서 보면 잔혹한 포식입니다.
아시리아의 통치자들은 자신들이 거둔 부와 정복의 성과를 왕실과 제국의 번영이라고 설명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부가 어디에서 왔는지 살펴보면 다른 나라에서 빼앗은 재물과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나훔은 그 번영을 포식의 언어로 다시 묘사합니다.
그러므로 먹잇감으로 가득한 굴은 사자의 풍요를 보여 주는 동시에 희생당한 존재들의 흔적을 보여 줍니다. 니느웨에는 은과 금과 온갖 탐나는 물건이 풍성했습니다. 그런데 사자 비유에서는 그 풍성함이 무엇으로 채워졌는지를 폭로합니다.
한쪽이 풍요라고 부르는 것이 다른 쪽에게는 약탈과 상실일 수 있습니다.
사자의 먹잇감을 끊으시는 하나님
마지막 절에서는 지금까지 서술되던 장면 속으로 여호와야훼의 말씀이 직접 들어옵니다.
「보라, 내가 너를 대적한다.」 만군의 여호와야훼의 선언이다. 「내가 니느웨의 병거를 연기 속에서 불태우겠다. 칼이 네 젊은 사자들을 삼킬 것이다. 내가 네 먹잇감을 땅에서 끊어 버리겠다. 네 전령들의 목소리는 더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나훔 2:14 · 본디새김
니느웨는 많은 나라를 대적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민족은 아시리아의 군사력 앞에서 굴복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니느웨가 마주한 상대는 또 다른 제국만이 아닙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께서 친히 그들을 대적하십니다.
4–5절에서 병거는 공격의 가장 위협적인 이미지였습니다. 횃불처럼 빛나고 번개처럼 달렸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르자 병거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습니다. 불타는 대상이 됩니다.
제국이 의지하던 군사적 힘이 무력해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자들은 다른 생명을 찢어 먹던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삼켜지는 대상이 됩니다.
「내가 네 먹잇감을 땅에서 끊어 버리겠다」는 말씀은 더 이상 약탈할 대상을 얻지 못하게 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제국이 축적한 재물을 잃게 하실 뿐 아니라 그 재물을 계속해서 얻어 오던 포식의 방식을 끝내십니다.
약탈을 통해 번영하는 질서가 지속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전령은 제국의 권력을 전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왕의 명령이 멀리 있는 지역에 도착하고, 항복을 요구하는 말이 적의 성벽 앞에서 선포되며, 조공과 복종에 관한 요구가 전달되려면 전령이 필요했습니다.
열왕기하 18:17–35에서는 아시리아 왕의 신하 랍사게가 예루살렘 성벽 앞에서 큰 소리로 항복을 요구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단순히 소식을 전달하지 않습니다. 아시리아의 힘을 내세우며 백성의 마음을 흔들고, 여호와야훼를 의지하지 말라고 압박합니다.
아시리아의 목소리는 다른 민족에게 두려움을 가져오는 목소리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됩니다.
니느웨의 군사력이 사라지고, 약탈의 대상이 끊어지며, 마지막에는 제국의 명령을 전달하던 소리마저 멈춥니다. 아시리아가 다른 민족에게 자기 뜻을 강요할 수 있는 권력 자체를 잃는다는 선언입니다.
이사야 10:5–15에서는 아시리아가 하나님의 심판을 이루는 도구로 등장하지만,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며 교만해진 아시리아 역시 심판받습니다. 어떤 권력이 오랫동안 성공하고 번영했다고 해서 그 권력이 정당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번영이 다른 사람의 삶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면, 그것 역시 하나님의 판단 아래 있습니다.
맺음말 — 멈추라는 외침은 사라지고, 평화의 소식은 도착한다
한 제국의 위협적인 목소리가 멈추었기 때문에, 억압받던 사람들에게 평화의 소식이 들리게 됩니다. 처음부터 나훔의 관심은 니느웨가 어떻게 무너지는가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그 도시의 지배가 끝난 뒤 어떤 소식이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게 되는가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모든 전쟁이나 정복의 폭력을 하나님이 승인하신다는 보편적인 원칙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나훔은 특정한 역사 속에서 폭력을 통해 권력을 유지한 제국에 내려진 심판을 선포합니다. 그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와 억압받는 백성의 회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오늘의 독자가 자기와 갈등하는 사람들을 니느웨라고 규정하고 그들의 몰락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나훔의 환상은 특정한 역사적 제국에 관한 말씀이며, 어떤 현재의 사건에 동일한 심판이 내려졌다고 주장하려면 본문 이상의 근거가 필요합니다.
한쪽에서는 끝없이 명령하고 위협하던 목소리가 사라지고, 다른 한쪽에서는 다시 절기를 지키고 서원을 이행하라는 부름이 들립니다. 니느웨의 거리에서는 「멈춰라」라는 외침에 아무도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다를 향해서는 여전히 누군가 산을 넘어오고 있습니다.
그의 발은 평화를 알리는 좋은 소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