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레몬서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장 · 방문 준비와 끝인사
사랑하는 형제로 맞이한다는 것
빌레몬서에는 이상한 긴장이 흐릅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명령할 권한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명령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의 자유로운 선택을 존중한다고 말하면서도, 편지 마지막에는 빌레몬이 순종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노예였던 오네시모를 돌려보내면서, 이제 그를 노예가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로 받아들이라고 요청합니다.
이 편지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오네시모가 어떻게 바울을 만나게 되었는지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된 사람을, 이전과 같은 관계 속으로 돌아온 사람으로 대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빌레몬 앞에 놓인 문제입니다.
바울은 그 질문에 추상적인 원칙으로 대답하지 않습니다.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돌아간다는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복음이 이미 존재하던 인간관계를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 보여 줍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요청을 전달하는 방식에서도 같은 문제와 씨름합니다. 강제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선을 요구할 것입니까? 권위를 가진 사람이 그 권위를 어떻게 사용해야 합니까? 사랑은 상대의 자유로운 결단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습니까?
이 질문들이 편지 전체를 이끌어 갑니다.
누구에게 보내는 편지인가
편지는 뜻밖의 자기소개로 시작됩니다.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갇힌 사람 바울과 형제 디모데가 우리가 사랑하는 이이며 우리의 동역자인 빌레몬과빌레몬서 1:1 · 본디새김
바울은 다른 편지에서 종종 자신을 사도라고 소개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도라는 칭호 대신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갇힌 사람」이라고 씁니다. 그는 자신의 권위를 숨기지 않지만, 처음부터 그것을 앞세우지도 않습니다. 8–9절에서 명령할 권한을 지니고도 사랑 때문에 간청한다고 밝히는 것과 이 자기소개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뒤에 등장할 오네시모의 처지와 묘한 대조를 이룹니다. 바울은 갇힌 사람이고, 오네시모는 노예이며, 빌레몬은 그 노예를 받아들일 권한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편지가 진행될수록 이들의 관계를 결정하는 기준은 법적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맺은 관계로 옮겨 갑니다.
바울은 빌레몬을 「사랑하는 이」이자 「동역자」라고 부릅니다. 그를 단지 명령을 받을 사람이 아니라, 복음의 일을 함께 감당하는 사람으로 대합니다. 9절에서 간청의 근거로 내세울 사랑이 첫 인사부터 등장합니다.
그런데 수신인은 빌레몬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자매 압비아와 우리의 전우 아킵보와 그대 빌레몬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빌레몬서 1:2 · 본디새김
압비아와 아킵보가 빌레몬과 어떤 가족관계에 있었는지는 본문에 명시되지 않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은 개인의 집에서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빌레몬의 집은 누군가가 재산과 권한을 행사하는 생활공간인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이 한 공동체로 모이는 장소였습니다.
바로 그 집에서 오네시모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이 점을 놓치면 편지를 단순히 두 사람 사이의 개인적인 화해 요청으로 읽기 쉽습니다. 빌레몬이 내릴 결정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실제 생활에서도 서로를 그렇게 대하는지가 드러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첫 인사의 복수형 「여러분」은 마지막 축복에서도 다시 나타납니다.
빌레몬은 혼자 결정을 내려야 하지만, 그가 믿고 고백하는 복음은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이미 알고 있는 사랑을 다시 요구하다
바울은 곧바로 오네시모 이야기를 꺼내지 않습니다. 먼저 빌레몬에 대한 감사와 기도를 길게 전합니다.
그대가 지닌 주 예수에 대한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전해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빌레몬서 1:5 · 본디새김
바울은 믿음과 사랑을 서로 떨어진 덕목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성도들을 향한 사랑으로 드러나야 하고, 바울은 빌레몬에게서 이미 그러한 모습을 전해 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뒤에 나올 요청은 새로운 윤리를 배우라는 요구가 아니라, 그가 이미 실천해 온 사랑을 아직 그 사랑이 충분히 미치지 못한 한 사람에게까지 확장하라는 요청입니다.
이 흐름에서 6절의 기도가 중요해집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모든 선한 것을 깨달음으로써 그대의 믿음에서 우러나 함께 나누는 일이 그리스도를 위해 효력을 발휘하기를 기도합니다.빌레몬서 1:6 · 본디새김
「믿음에서 우러나 함께 나누는 일」은 해석이 어려운 표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믿음이 낳는 실제적인 나눔으로 읽을 수도 있고, 다른 이들이 빌레몬의 믿음에 참여하는 것으로, 또는 믿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활동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 해설은 첫 번째 읽기를 따르지만, 어느 읽기를 택하든 바울은 빌레몬의 종교적 열심이 커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의 믿음이 실제로 효력을 발휘하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선한 것을 더 깊이 깨닫는 일과 믿음의 나눔이 효과를 내는 일을 연결합니다. 그런데 그 깨달음은 어디에서 검증될 것입니까? 곧 오네시모를 받아들이는 자리에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어떤 관계를 가능하게 하셨는지를 깨닫는 일이 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형제여, 나는 그대의 사랑에서 큰 기쁨과 격려를 지녔기에 이렇게 감사합니다. 성도들의 속이 그대를 통해 시원해졌으니 말입니다.빌레몬서 1:7 · 본디새김
「속」은 단순히 기분이 좋아졌다는 의미보다, 마음 깊은 곳에서 위로와 안식을 얻었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빌레몬은 다른 성도들에게 그러한 안식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기뻐하면서, 바로 그 사랑이 다시 한번 드러나기를 바랄 토대를 놓습니다.
이전에는 빌레몬의 사랑이 다른 성도들에게 유익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 빌레몬 자신에게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랑의 진실성이 새로운 상황에서 시험대에 오르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5절의 원문에서는 사랑과 믿음, 주 예수님과 모든 성도가 엇갈린 순서로 놓여 있어, 이 본문은 그 관계를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주 예수에 대한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으로 옮겼습니다. 6절의 표현은 헤 코이노니아 테스 피스테오스 수입니다. 코이노니아는 함께 나눔이나 참여를 뜻할 수 있기에 여러 읽기가 생깁니다. 이 해설이 실제적인 나눔으로 읽는 것은 편지 전체가 믿음에서 비롯되는 구체적인 선행을 요청하기 때문이지만, 문법만으로 다른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습니다. 7절의 「속」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스플랑크나는 본래 몸의 내장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사람의 깊은 감정과 애정을 나타내는 데 사용됩니다.
명령할 수 있지만 간청한다
8절의 「그러므로」는 앞의 감사와 뒤의 요청을 하나로 연결합니다. 바울은 빌레몬의 사랑을 알기 때문에 이제 그 사랑에 호소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그대에게 거리낌 없이 명령할 자유를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든지 지니고 있지만, 사랑 때문에 오히려 간청합니다. 나 바울은 이런 사람입니다. 늙은 몸이고,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갇힌 사람이기도 합니다.빌레몬서 1:8–9 · 본디새김
바울은 무엇이 마땅한 일인지에 관해 분명한 판단을 가지고 있고, 그 일을 명령할 권한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권한을 행사하지 않기로 합니다.
바울에게는 빌레몬이 어떤 행동을 하느냐뿐 아니라 그 행동이 어떤 마음에서 나오는가도 중요합니다. 명령을 받아 마지못해 행하는 선과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선은 겉으로 같아 보일 수 있지만, 바울은 둘을 구별하고 싶어 합니다. 그는 늙고 갇힌 자기 모습을 내보이며, 명령권자보다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자리에서 말합니다.
물론 이 간청을 아무런 압력이 없는 요청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자신이 가진 권위를 명시하고, 권위를 행사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그 권위를 상기시키기도 합니다. 이 긴장은 21절에서 더욱 선명해집니다.
그리고 10절에서 마침내 요청의 대상을 밝힙니다.
내 아이의 일로 그대에게 간청합니다. 내가 사슬에 매여 있는 동안 낳은 아이, 오네시모입니다.빌레몬서 1:10 · 본디새김
바울은 처음부터 오네시모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먼저 「내 아이」라고 부르고, 사슬에 매여 있는 동안 낳은 아이라고 설명한 뒤에야 이름을 말합니다. 빌레몬에게 오네시모가 노예였다면, 바울에게 그는 자신이 전한 복음을 통해 새로운 믿음의 삶을 시작한 아이입니다.
이제 오네시모를 이전의 신분만으로 규정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는 전에는 그대에게 쓸모없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그대에게도 나에게도 쓸모 있는 사람입니다.빌레몬서 1:11 · 본디새김
오네시모라는 이름은 그리스어에서 유익함이나 쓸모 있음과 관련된 이름입니다. 전에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던 사람이 이제 이름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놀이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오네시모의 가치를 노동 능력으로만 평가하고 있다고 읽으면, 편지는 다시 노예 소유자의 관점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바울은 곧 오네시모를 자기 마음과 같은 존재라고 부르고, 사랑하는 형제로 받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유익함은 실제적인 도움을 포함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관계의 변화를 떠나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변화는 12절의 짧은 문장에 응축됩니다.
그를 그대에게 돌려보냅니다. 그는 곧 내 속마음입니다.빌레몬서 1:12 · 본디새김
7절에서 빌레몬이 시원하게 해 준 성도들의 「속」과 여기의 「속마음」(σπλάγχνον)은 같은 그리스어 단어입니다. 그를 돌려보내는 것은 바울에게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내는 일입니다. 그래서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어떻게 대하느냐는 바울 자신의 기쁨과 아픔에 직결됩니다.
조금 더 깊이
「간청합니다」로 옮긴 파라칼레오는 문맥에 따라 권면하다, 위로하다, 간청하다 등으로 옮길 수 있는 말인데, 여기서는 앞의 「명령하다」와 대조되므로 「간청합니다」가 그가 선택한 말하기 방식을 잘 드러냅니다. 10절의 그리스어 문장에서도 오네시모라는 이름은 바울이 그를 자기 아이라고 두 차례에 걸쳐 소개한 뒤에 등장합니다. 고린도전서 4:15에서도 바울은 복음을 통해 신자들을 낳았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11절은 「쓸모없는」을 뜻하는 아크레스토스와 「쓸모 있는」을 뜻하는 유크레스토스를 대조합니다.
억지가 아니라 자의로
바울은 이제 오네시모를 돌려보내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나는 그를 내 곁에 두고 싶었습니다. 내가 복음 때문에 사슬에 매여 있는 동안 그가 그대를 대신해 나를 섬기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대의 동의 없이는 아무것도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대의 선행이 억지로 한 것처럼 되지 않고 스스로 우러난 것이 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빌레몬서 1:13–14 · 본디새김
14절이 편지의 설득 방식을 가장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선행을 요구하지만, 그 선행이 강제의 결과가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바울에게 그것은 이미 「그대의 선행」, 곧 빌레몬이 자기 믿음과 사랑에 따라 마땅히 실천해야 할 일입니다. 믿음에서 우러난 사랑이라면, 그 사랑의 실천 역시 자신의 결단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불편한 현실도 남아 있습니다. 오네시모가 어디에서 누구를 섬길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에서 빌레몬의 동의가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로마 세계의 노예는 인간인 동시에 소유의 대상으로 취급될 수 있었고, 오네시모에게는 자신의 처지를 결정할 권한이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에서는 두 가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강제 대신 자발적인 사랑을 선택하도록 호소합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호소해야 하는 현실 자체에는 주인과 노예 사이의 불평등한 권력관계가 놓여 있습니다.
15절에서 바울은 잠시 관점을 바꿉니다.
그러고 보면, 그가 잠시 떼어져 있었던 것은 그대가 그를 영원히 되찾게 하려는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빌레몬서 1:15 · 본디새김
바울은 오네시모가 왜 빌레몬에게서 떨어져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가 노예였다는 점과 바울이 그를 돌려보낸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가 어떻게 바울에게 이르렀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명시적으로 선언하지 않고,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라는 조심스러운 말로 가능성을 열어 둡니다. 지나간 사건의 모든 사정을 안다고 주장하지 않으면서, 이미 일어난 일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해석할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한때의 분리가 이전보다 깊고 오래가는 관계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관계가 무엇인지 16절에서 밝혀집니다.
이제는 노예로서가 아니라 노예 이상으로, 곧 사랑하는 형제로 말입니다. 나에게 특히 그렇고, 그대에게는 사람의 관계로 보나 주 안에서 보나 얼마나 더하겠습니까.빌레몬서 1:16 · 본디새김
이것이 편지의 결정적인 전환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법적인 해방을 요구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한쪽에서는 그를 노예 이상인 형제로 받아들이라는 요구를 진지하게 실천한다면 기존의 소유 관계를 그대로 유지하기 어렵다고 보아, 해방을 암시한다고 읽습니다. 다른 쪽에서는 이 절에 해방하라는 명시적인 명령이 없다는 점에서, 바울이 법적 신분의 변경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새로운 관계를 요구한다고 봅니다. 두 읽기는 모두 본문에서 근거를 찾지만, 바울이 어느 정도의 신분 변화를 기대했는지는 논쟁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고 형제라는 말을 단순히 영적인 호칭으로 제한하는 것도 본문에 맞지 않습니다. 바울은 「사람의 관계로 보나 주 안에서 보나」라고 말합니다. 변화의 범위가 법적으로 어디까지 미치는지는 열려 있지만, 그 변화가 빌레몬과 오네시모가 실제로 마주하고 함께 살아가는 관계에까지 미쳐야 한다는 방향은 분명합니다.
더구나 「사랑하는 형제」라는 호칭은 첫머리에서 바울이 빌레몬에게 사용한 말과 연결됩니다. 두 사람은 사회적으로 같은 위치에 있지 않지만, 바울이 그들을 바라보는 그리스도 안의 관계에는 공통된 언어가 사용됩니다. 빌레몬은 이제 자신의 노예였던 사람을, 바울이 자기를 대하는 것과 같은 형제의 관계 안에서 받아들이라는 요청을 듣게 됩니다.
조금 더 깊이
13절의 「섬기다」는 디아코네오입니다. 마가복음 10:45에서 사람의 아들이 섬기러 오셨다고 하실 때도 같은 동사가 쓰이지만, 이 일치만으로 바울이 그 말씀을 의도적으로 인용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15절에 관해서는 전통적으로 주인에게서 도망친 노예가 바울을 만난 뒤 돌아가는 상황으로 이해되어 왔으나, 오네시모가 어떤 이유로 바울에게 보내졌다고 보는 등 다른 재구성도 제시되었습니다. 「떼어져 있었던」(에코리스테)은 수동태로, 바울은 오네시모가 스스로 떠났다고도, 누군가가 그를 떼어 놓았다고도 단정하지 않습니다. 16절은 갈라디아서 3:28과 주제적으로 이어집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 노예와 자유인이라는 구별을 넘어 하나라는 선언이, 빌레몬서에서는 현실의 한 관계 속에서 어떤 질문을 일으키는지 드러납니다.
그를 나처럼 받아들이십시오
앞에서 바울은 오네시모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설명했습니다. 이제 빌레몬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밝힙니다.
그러므로 그대가 나를 동반자로 지니고 있다면, 나를 맞이하듯 그를 맞아 주십시오.빌레몬서 1:17 · 본디새김
바울은 용서해 달라거나 다시 받아들여 달라는 정도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빌레몬과 자신 사이의 관계를 오네시모에게까지 확장합니다. 바울이 찾아온다면 그를 어떻게 맞아들일지 생각해 보고, 그 환대를 오네시모에게 베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빌레몬이 사람을 평가하고 받아들이는 기준을 바꾸라는 요구입니다. 오네시모의 과거와 신분 대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가 누구와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이제 오네시모를 받아들이는 일과 바울을 받아들이는 일은 분리할 수 없습니다.
17절의 「동반자」(κοινωνός)는 6절의 「함께 나누는 일」과 같은 어근의 말입니다. 믿음을 함께 나눈다는 말의 의미가 이제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함께 나누는 일은 추상적인 소속감이 아니라, 자신이 인정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다른 사람도 받아들일 수 있는 관계를 뜻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요청을 하면서 현실적인 문제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대에게 잘못한 것이 있거나 빚이 있으면, 그것은 내 앞으로 달아 두십시오.빌레몬서 1:18 · 본디새김
바울은 조건문으로 말할 뿐, 오네시모가 구체적으로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얼마의 빚을 졌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근거로 오네시모가 돈을 훔쳤다거나 특정한 손해를 입혔다고 확정할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오네시모를 받아들이는 데 걸림돌이 될 만한 채무가 있다면 바울 자신이 그 책임을 감당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랑은 말뿐인 호의가 아니라 비용을 감수하는 행동이 됩니다.
오네시모에게 속한 부담을 바울이 떠안고, 바울에게 주어질 환대를 오네시모가 받도록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속죄에 관한 직접적인 설명이나 의도적인 비유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더 넓은 문맥에서 읽으면,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 주고 그가 받아들여지도록 길을 여는 행동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나 바울이 내 손으로 씁니다. 내가 갚겠습니다. 그대 자신마저 나에게 더 빚지고 있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겠습니다.빌레몬서 1:19 · 본디새김
자기 손으로 갚겠다고 확인한 바로 다음에, 바울은 역설적인 말을 덧붙입니다. 말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빌레몬이 자기에게 더 큰 빚을 지고 있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대 자신마저」라는 표현은 빌레몬의 생명과 존재에 관련된 깊은 은혜를 가리킵니다. 빌레몬이 바울을 통해 복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생긴 빚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회심의 구체적인 경위는 본문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문장의 효과는 양면적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의 채무를 책임지겠다며 관대함을 요청하는 동시에, 빌레몬이 이미 입은 은혜를 상기시켜 요청의 무게를 더합니다. 그의 간청은 상대의 책임을 가볍게 만드는 요청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관계와 권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설득입니다.
그렇습니다, 형제여. 주 안에서 내가 그대에게서 덕을 보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 속을 시원하게 해 주십시오.빌레몬서 1:20 · 본디새김
「덕을 보기를」은 오네시모라는 이름과 어원을 공유하는 말입니다. 11절에서 오네시모가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한 바울은, 이제 빌레몬에게서 자기도 덕을 보고 싶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유익을 자기 마음의 안식과 연결합니다.
7절에서 빌레몬은 성도들의 속을 시원하게 해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12절에서 오네시모는 바울의 속마음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이제 바울은 자신의 속을 시원하게 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바울의 속이 시원해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말투도 바뀝니다. 「덕을 보기를 바랍니다」는 희망을, 「시원하게 해 주십시오」는 명령형입니다. 사랑 때문에 간청한다던 편지의 방식이 유지되지만, 바울은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원하는지 조금도 모호하게 남겨 두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17절의 「동반자」는 그리스어 코이노노스이고, 6절의 「함께 나누는 일」에는 같은 어근의 코이노니아가 쓰였습니다. 로마서 15:7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을 받아들이신 일을 근거로 서로 받아들일 것을 권하는데, 빌레몬서에서는 그 원리가 한 사람의 구체적인 요청을 통해 표현됩니다. 이는 복음과 인간의 화해를 단순히 동일시하는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은혜가 사람 사이의 관계를 형성하는 근거가 된다는 뜻입니다. 20절의 「덕을 보기를 바랍니다」에 해당하는 동사는 오나이멘으로, 이익이나 도움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내가 말하는 것 이상으로
이제 바울은 편지를 마무리합니다.
나는 그대의 순종을 믿고 이 편지를 씁니다. 내가 말하는 것 이상으로 해 주리라는 것을 압니다.빌레몬서 1:21 · 본디새김
이 구절의 「순종」은 9절의 「간청」과 긴장을 이룹니다. 「순종」을 단순히 호의적인 협력이나 동의로 바꾸면, 바울이 사용하는 말의 힘이 사라집니다. 그는 자신의 요청이 마땅히 받아들여져야 하고, 빌레몬에게 그 요청을 따를 도덕적 책임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이 편지는 권위가 완전히 사라진 관계를 보여 주지 않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의 결정을 대신하지 않지만, 그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에 관해 중립적이지도 않습니다. 빌레몬 스스로 선을 행하기를 원하면서, 그 선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판단을 내립니다.
바울이 말하는 「이상」이 무엇인지는 명시되지 않습니다. 오네시모를 노예 신분에서 해방하는 일까지 기대했다는 견해가 있고, 13절에서 그를 곁에 두고 싶어 했다는 말을 근거로 오네시모를 다시 바울에게 보내 복음의 일을 돕게 하는 일을 생각했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도 확정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그 요청을 넘어서는 실천의 가능성을 빌레몬에게 남겨 둡니다.
22절에서 바울은 뜻밖에도 자신이 묵을 곳을 마련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아울러 내가 묵을 곳도 마련해 주십시오. 여러분의 기도를 통해 내가 여러분에게 선물로 주어지리라고 기대하기 때문입니다.빌레몬서 1:22 · 본디새김
바울은 자신의 석방을 당연한 일처럼 말하지 않고, 그들의 기도를 통해 자신이 그들에게 주어지기를 바랍니다. 오네시모를 바울처럼 맞이하라는 17절의 요청 뒤에, 실제로 바울을 맞이할 가능성이 놓인 것입니다. 이것이 빌레몬의 결정에 무게를 더했을 수는 있지만, 바울이 그것을 의도적인 압박 수단으로 썼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묵을 곳을 부탁하지만, 석방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은 「여러분」입니다. 편지는 다시 공동체 전체를 향합니다. 뒤이어 에바브라,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을 전하며,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사정을 둘러싼 복음의 관계망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편지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은혜로 끝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의 영과 함께하기를 빕니다.빌레몬서 1:25 · 본디새김
편지 한가운데에서는 빌레몬이 오네시모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요청했지만, 그 모든 요청을 처음과 끝에서 둘러싸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은혜입니다. 빌레몬이 사랑을 실천하도록 요청받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그 자신이 먼저 은혜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골로새서 4:9에서도 오네시모는 믿을 만하고 사랑받는 형제로 소개되며, 4:12와 4:17에는 에바브라와 아킵보가 등장합니다. 이러한 인물들의 연결은 빌레몬서를 골로새 교회와 관련된 상황에서 읽게 하는 중요한 근거입니다. 다만 편지에 투옥 장소가 명시되지 않으므로 바울이 로마, 가이사랴, 에베소 중 어디에 갇혀 있었는지는 이 자료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편지가 끝나는 자리
빌레몬서에는 빌레몬의 답장이 없습니다.
오네시모의 법적 지위가 실제로 바뀌었는지, 빌레몬이 그를 어떻게 대했는지, 바울의 기대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침묵은 신중하게 존중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이 편지를 노예제가 이미 극복된 아름다운 이야기로만 읽을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당시의 노예제라는 현실 속에서 말하고 있으며, 그의 편지에는 그 현실의 한계와 긴장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네시모의 과거에 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으면서, 그가 지금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풍성하게 말합니다. 그는 바울의 아이이고, 속마음과 같은 사람이며, 무엇보다 사랑하는 형제입니다. 처음의 물음, 곧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된 사람을 이전과 같은 관계로만 대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 편지는 분명히 답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라고 부르는 사람을 실제 생활에서는 여전히 자기에게 종속된 사람으로만 대한다면, 믿음의 고백과 삶의 관계 사이에 해결되지 않은 모순이 남습니다. 바울은 그 모순을 명령이 아닌 간청으로, 그러나 자신도 오네시모를 떠나보내고 그의 빚을 떠안는 대가를 치르며 빌레몬 앞에 놓습니다.
그렇게 복음은 한 사람의 마음속 신념에 머물지 않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주고받는 관계의 형태를 바꾸기 시작합니다.
이제 남은 것은 빌레몬이 실제로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입니다. 그가 오네시모를 바라볼 때 이전의 노예만 볼 것인지, 아니면 바울이 사랑하는 형제이자 자신과 함께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을 볼 것인지. 빌레몬서는 그 대답을 대신 써 주지 않습니다.
다만 바울은 자신의 손으로 쓴 약속을 남겼습니다. 오네시모에게 빚이 있다면 자신이 갚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 앞에, 빌레몬이 해야 할 일을 「그대가 나를 동반자로 지니고 있다면, 나를 맞이하듯 그를 맞아 주십시오」라는 한 문장으로 남겼습니다.
편지는 그렇게 한 사람을 다시 맞이해야 하는 집을 향해 보내졌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