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레몬서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장 · 방문 준비와 끝인사
사랑하는 형제로 맞이한다는 것
빌레몬서에는 이상한 긴장이 흐릅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명령할 권한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명령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의 자유로운 선택을 존중한다고 말하면서도, 편지 마지막에는 빌레몬이 자기 말을 따라 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노예였던 오네시모를 돌려보내면서, 이제 그를 노예가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로 받아들이라고 요청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된 사람을, 이전과 같은 관계 속으로 돌아온 사람으로 대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빌레몬 앞에 놓인 문제입니다. 바울은 그 질문에 추상적인 원칙으로 대답하지 않고,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돌아간다는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복음이 이미 존재하던 인간관계를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 보여 줍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요청을 전달하는 방식에서도 같은 문제와 씨름합니다. 강제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선을 요구할 것입니까? 권위를 가진 사람이 그 권위를 어떻게 사용해야 합니까? 사랑은 상대의 자유로운 결단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습니까?
이 질문들이 편지 전체를 이끌어 갑니다.
누구에게 보내는 편지인가
편지는 뜻밖의 자기소개로 시작됩니다.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갇힌 나 바울과 형제 디모데가, 우리가 사랑하며 함께 일하는 빌레몬과빌레몬서 1:1 · 두루새김
바울은 다른 편지에서 종종 자신을 사도라고 소개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도라는 칭호 대신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갇힌 나 바울」이라고 씁니다. 권위를 숨기지는 않지만 처음부터 앞세우지도 않고, 오히려 자신이 자유롭지 못한 처지에 있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바울은 갇힌 사람이고, 오네시모는 노예이며, 빌레몬은 그 노예를 받아들일 권한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편지가 진행될수록 이들의 관계를 결정하는 기준은 법적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맺은 관계로 옮겨 갑니다. 바울은 빌레몬을 「우리가 사랑하며 함께 일하는 빌레몬」이라고 부르며, 단지 명령을 받을 사람이 아니라 복음의 일을 함께 감당하는 사람으로 대합니다.
그런데 수신인은 빌레몬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자매 압비아와 우리의 전우 아킵보, 그리고 빌레몬 형제님의 집에 모이는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빌레몬서 1:2 · 두루새김
압비아와 아킵보가 빌레몬과 어떤 가족관계에 있었는지는 본문에 명시되지 않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은 개인의 집에서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빌레몬의 집은 그가 재산과 권한을 행사하는 생활공간인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이 한 공동체로 모이는 장소였습니다.
바로 그 집에서 오네시모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그러니 이 편지는 두 사람 사이의 개인적인 화해 요청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실제 생활에서도 서로를 그렇게 대하는지가 드러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수신인에 넣은 것을 빌레몬을 공개적으로 압박하려는 장치로만 볼 수는 없지만, 개인적인 요청이 공동체 전체를 향한 말씀 속에 놓여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첫 인사의 「여러분」은 마지막 축복에서도 다시 나타납니다.
빌레몬은 혼자 결정을 내려야 하지만, 그가 믿고 고백하는 복음은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이미 알고 있는 사랑을 다시 요구하다
바울은 곧바로 오네시모 이야기를 꺼내지 않습니다. 먼저 빌레몬에 대한 감사와 기도를 길게 전합니다.
형제님이 주 예수를 믿으며 모든 성도를 사랑한다는 소식을 듣기 때문입니다.빌레몬서 1:5 · 두루새김
바울은 믿음과 사랑을 서로 떨어진 덕목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성도들을 향한 사랑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뒤에 나올 요청은 새로운 윤리를 배우라는 요구가 아니라, 빌레몬이 이미 실천해 온 사랑을 아직 그 사랑이 충분히 미치지 못한 한 사람에게까지 넓히라는 요청입니다.
나는 형제님이 우리 가운데 있는 모든 좋은 것을 깨달아, 믿음으로 함께 나누는 일이 그리스도를 위해 힘을 발휘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빌레몬서 1:6 · 두루새김
「믿음으로 함께 나누는 일」은 해석이 어려운 표현입니다. 「함께 나눔」으로 옮긴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는 나눔이나 참여를 뜻할 수 있어서, 믿음이 낳는 실제적인 나눔, 다른 이들이 빌레몬의 믿음에 참여하는 것, 믿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활동으로 읽기가 갈립니다. 이 해설은 첫 번째 읽기를 따르지만, 어느 쪽이든 바울은 빌레몬의 종교적 열심이 커지기만을 바라지 않고 그의 믿음이 실제로 힘을 발휘하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또 「우리 가운데 있는 모든 좋은 것을 깨달아」 가는 일과 믿음의 나눔이 힘을 발휘하는 일을 연결합니다. 그런데 그 깨달음은 어디에서 확인될 것입니까?
곧 오네시모를 받아들이는 자리에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어떤 관계를 가능하게 하셨는지를 깨닫는 일이 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형제님, 나는 형제님의 사랑으로 큰 기쁨과 위로를 얻어 감사합니다. 형제님 덕분에 성도들의 마음이 편안해졌기 때문입니다.빌레몬서 1:7 · 두루새김
여기의 「마음」은 본래 몸의 내장을 가리키는 말로, 사람의 깊은 감정과 애정을 나타냅니다. 빌레몬은 다른 성도들에게 마음 깊은 곳의 위로와 편안함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기뻐하면서, 바로 그 사랑이 다시 한번 드러나기를 바랄 바탕을 놓습니다.
이전에는 빌레몬의 사랑이 다른 성도들에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 빌레몬 자신에게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랑이 얼마나 참된지가 새로운 상황에서 시험대에 오르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6절의 세 읽기는 모두 「함께 나눔」이라는 낱말의 폭에서 나옵니다. 이 해설이 첫 번째 읽기를 따르는 것은 편지 전체가 믿음에서 비롯되는 구체적인 좋은 일을 요청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법만으로 다른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습니다.
명령할 수 있지만 간청한다
8절의 「그러므로」는 앞의 감사와 뒤의 요청을 하나로 연결합니다. 바울은 빌레몬의 사랑을 알기 때문에 이제 그 사랑에 호소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님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얼마든지 거리낌 없이 명령할 수 있지만, 사랑 때문에 오히려 간청합니다. 나 바울은 늙었고, 지금은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갇혀 있기까지 합니다.빌레몬서 1:8–9 · 두루새김
바울은 무엇이 마땅한 일인지 분명히 알고, 그것을 명령할 권한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권한을 행사하지 않기로 합니다.
명령을 받아 마지못해 행하는 좋은 일과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좋은 일은 겉으로 같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둘을 구별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상대방 위에 선 명령권자가 아니라, 늙고 갇혀 있는 사람의 자리에서 말합니다.
물론 이 간청을 아무런 압력이 없는 요청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권위를 행사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그 권위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 긴장은 21절에서 더욱 선명해집니다.
그리고 10절에서 마침내 요청의 대상을 밝힙니다.
내가 갇혀 있는 동안 얻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해 형제님께 간청합니다.빌레몬서 1:10 · 두루새김
원문에서 바울은 오네시모(Ὀνήσιμος)를 먼저 자기 아이라고 부르고, 사슬에 매여 있는 동안 낳은 아이라고 설명한 뒤에야 이름을 말합니다. 빌레몬에게 오네시모가 노예였다면, 바울에게 그는 복음 안에서 얻은 아들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통해 오네시모에게 새로운 믿음의 삶이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는 전에는 형제님에게 쓸모없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형제님에게도 나에게도 쓸모 있는 사람입니다.빌레몬서 1:11 · 두루새김
오네시모라는 이름은 그리스어에서 유익함이나 쓸모 있음과 관련된 이름입니다. 바울은 「쓸모없는」(ἄχρηστος)과 「쓸모 있는」(εὔχρηστος)을 뜻하는 두 낱말을 대조하며, 전에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던 사람이 이제 이름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바울이 오네시모의 가치를 일하는 능력으로만 평가한다고 읽으면, 편지는 다시 노예 소유자의 관점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여기서 말하는 쓸모 있음은 바울을 돕는 실제적인 일을 포함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관계의 변화를 떠나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변화는 12절의 짧은 문장에 담겨 있습니다.
내 마음과도 같은 그를 형제님께 돌려보냅니다.빌레몬서 1:12 · 두루새김
7절에서 빌레몬이 편안하게 해 준 성도들의 「마음」과 같은 낱말입니다. 오네시모를 돌려보내는 것은 바울에게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내는 일입니다. 그래서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어떻게 대하느냐는 곧바로 바울 자신의 기쁨과 아픔에 이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8–9절의 「간청합니다」로 옮긴 말은 문맥에 따라 권하다, 위로하다로도 옮길 수 있지만, 여기서는 「명령할 수 있지만」과 대조됩니다. 10절의 「얻은 아들」처럼 복음을 통해 신자들을 낳았다는 표현은 고린도전서 4:15에도 나옵니다.
억지가 아니라 자의로
바울은 이제 오네시모를 돌려보내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나는 그를 내 곁에 두고 싶었습니다. 내가 기쁜 소식 때문에 갇혀 있는 동안 형제님을 대신해 나를 돕게 하려던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님의 동의 없이는 아무것도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형제님이 좋은 일을 억지로가 아니라 기꺼이 하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빌레몬서 1:13–14 · 두루새김
바울은 오네시모가 자기를 계속 도울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빌레몬의 동의 없이 그를 곁에 두려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14절이 편지의 설득 방식을 가장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바울은 좋은 일의 내용을 새로 만들어 내지 않고, 그것을 이미 「형제님이」 하는 좋은 일, 곧 빌레몬이 자기 믿음과 사랑에 따라 마땅히 실천해야 할 일로 부릅니다. 문제는 그 일을 빌레몬 스스로 행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믿음에서 우러난 사랑이라면, 그 실천 역시 자신의 결단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불편한 현실도 남아 있습니다. 로마 세계의 노예는 인간인 동시에 소유의 대상으로 취급될 수 있었고, 오네시모가 어디에서 누구를 도울지 결정하는 데 빌레몬의 동의가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도 그 권력관계를 반영합니다. 오네시모에게는 자신의 처지를 결정할 권한이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두 가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강제 대신 기꺼이 사랑을 실천하도록 호소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호소해야 하는 현실 자체에는 주인과 노예 사이의 불평등한 권력관계가 놓여 있습니다.
15절에서 바울은 잠시 관점을 바꿉니다.
오네시모가 잠시 떨어져 있었던 것은 형제님이 그를 영원히 되찾도록 하기 위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빌레몬서 1:15 · 두루새김
바울은 오네시모가 왜 떨어져 있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전통적으로는 주인에게서 도망친 노예가 바울을 만난 뒤 돌아가는 상황으로 읽어 왔지만, 그가 어떤 이유로 바울에게 보내졌다고 보는 설명도 있습니다. 오네시모가 노예였고 바울이 그를 돌려보낸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가 어떻게 바울에게 이르렀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떨어져 있었던」은 수동태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스스로 떠났다고도, 누군가가 그를 떼어 놓았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끄신 일이었다고 선언하는 대신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라는 조심스러운 말로 가능성을 열어 둡니다. 지나간 사건의 모든 사정을 안다고 주장하지 않으면서, 이미 일어난 일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해석할 길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한때의 헤어짐이 이전보다 깊고 오래가는 관계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관계가 무엇인지 16절에서 밝혀집니다.
이제는 노예로서가 아니라 노예 이상의 사람, 곧 사랑하는 형제로 말입니다. 그는 나에게 특별히 사랑하는 형제입니다. 그러니 형제님에게는 일상의 관계에서나 주님 안에서나 더욱 그렇지 않겠습니까?빌레몬서 1:16 · 두루새김
이것이 편지의 결정적인 전환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법적인 해방을 요구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한쪽에서는 그를 노예 이상의 형제로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기존의 소유 관계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해방을 암시한다고 읽습니다. 다른 쪽에서는 이 절에 해방하라는 분명한 명령이 없다는 점에서 법적 신분보다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관계를 요구한다고 봅니다. 바울이 어느 정도의 신분 변화를 기대했는지는 논쟁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고 형제라는 말을 영적인 호칭으로만 제한하는 것도 「일상의 관계에서나 주님 안에서나」라는 표현에 맞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의 형제 관계는 예배 속에서만 유효한 관계가 아니라, 빌레몬과 오네시모가 실제로 함께 살아가는 관계에도 미쳐야 합니다. 변화가 법적으로 어디까지 미치는지는 열려 있지만, 실제 생활에까지 미쳐야 한다는 방향은 분명합니다.
「사랑하는」이라는 말은 첫머리에서 바울이 빌레몬에게 쓴 말과도 이어집니다. 두 사람은 사회적으로 같은 위치에 있지 않지만, 바울은 둘을 같은 언어로 부릅니다.
빌레몬은 이제 자신의 노예였던 사람을, 바울이 자기를 대하는 것과 같은 형제의 관계 안에서 받아들이라는 요청을 듣게 됩니다.
조금 더 깊이
13절의 「돕게」로 옮긴 동사는 마가복음 10:45에서 사람의 아들이 섬기러 오셨다고 할 때의 「섬기다」와 같은 동사입니다. 이 일치만으로 바울이 그 말씀을 일부러 인용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신약에서 섬김이 얼마나 중심적인 가치인지 보여 줍니다. 16절은 갈라디아서 3:28과도 이어집니다. 거기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노예와 자유인이 하나라고 말하는데, 빌레몬서는 그 선언이 현실의 한 관계 속에서 어떤 질문을 일으키는지 보여 줍니다.
그를 나처럼 받아들이십시오
앞에서 바울은 오네시모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설명했습니다. 이제 빌레몬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밝힙니다.
그러므로 형제님이 나를 동료로 여긴다면, 나를 맞듯 오네시모를 맞아 주십시오.빌레몬서 1:17 · 두루새김
바울은 용서해 달라거나 벌하지 말라는 정도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바울이 찾아온다면 그를 어떻게 맞아들일지 생각해 보고, 그 환대를 오네시모에게 베풀라고 합니다. 빌레몬이 오네시모의 과거와 신분을 근거로 그를 대하려 한다면,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가 누구와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라고 합니다. 이제 오네시모를 받아들이는 일과 바울을 받아들이는 일을 분리할 수 없습니다.
17절의 「동료」는 코이노노스(κοινωνός)로, 6절의 「함께 나누는 일」과 같은 어근입니다. 앞에서는 믿음의 나눔이 힘을 발휘하기를 기도했고, 여기서는 빌레몬이 바울의 동료라면 오네시모를 받아들이라고 요청합니다. 함께 나누는 일은 추상적인 소속감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다른 사람도 받아들이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요청을 하면서 현실적인 문제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그가 형제님에게 잘못한 일이 있거나 진 빚이 있다면, 그것은 내 빚으로 적어 두십시오.빌레몬서 1:18 · 두루새김
바울은 조건문으로 말할 뿐, 오네시모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 얼마의 빚을 졌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근거로 오네시모가 돈을 훔쳤다거나 특정한 손해를 입혔다고 확정할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오네시모를 받아들이는 데 걸림돌이 될 빚이 있다면 바울이 그 책임을 감당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랑은 말뿐인 호의가 아니라 비용을 감수하는 행동이 됩니다.
오네시모에게 속한 부담을 바울이 떠안고, 바울에게 주어질 환대를 오네시모가 받도록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께서 죄를 대신 감당하신 일에 관한 직접적인 설명이나 의도적인 비유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더 넓은 문맥에서 읽으면,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 주고 그가 받아들여지도록 길을 여는 행동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나 바울이 직접 손으로 씁니다. 내가 갚겠습니다. 형제님이 자기 자신까지도 나에게 빚지고 있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겠습니다.빌레몬서 1:19 · 두루새김
직접 손으로 써서 약속을 확인한 바울은, 바로 다음에 빌레몬 자신도 자기에게 빚지고 있다는 역설적인 말을 덧붙입니다. 말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그 내용을 전달하는 방식입니다. 「자기 자신까지도」는 빌레몬의 생명과 존재에 관련된 깊은 은혜를 가리키며, 빌레몬이 바울을 통해 복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생긴 빚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어떻게 믿게 되었는지는 본문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문장의 효과는 양면적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의 빚을 책임지겠다며 너그러움을 요청하는 동시에, 빌레몬이 이미 큰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하여 요청의 무게를 더합니다. 사랑 때문에 간청한다고 했지만, 그의 간청은 자신이 가진 관계와 권위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설득입니다.
그렇습니다, 형제님. 주님 안에서 나도 형제님의 도움을 얻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십시오.빌레몬서 1:20 · 두루새김
「도움을 얻기 바랍니다」(ὀνίνημι)로 옮긴 동사는 오네시모라는 이름과 어원을 공유하는 또 하나의 말놀이입니다. 11절에서 오네시모가 이제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한 바울은, 여기서 오네시모를 받아들이는 일로 자기도 도움을 얻고 싶다고 합니다.
7절에서 빌레몬은 성도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사람이었고, 12절에서 오네시모는 바울의 마음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이제 바울은 자신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바울의 마음이 편안해질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말투도 바뀝니다. 「도움을 얻기 바랍니다」는 희망을 나타내고, 「편안하게 해 주십시오」는 명령형입니다. 명령할 수 있지만 간청한다던 방식은 유지되지만, 바울은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원하는지 조금도 모호하게 남겨 두지 않습니다.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바울에게 가장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로마서 15:7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을 받아들이신 일을 근거로 서로 받아들일 것을 권합니다. 빌레몬서에서는 그 원리가 한 사람의 구체적인 요청으로 표현됩니다. 복음과 인간의 화해를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은혜가 사람 사이의 관계를 이루는 근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것 이상으로
이제 바울은 편지를 마무리합니다.
나는 형제님이 내 말을 따라 주실 것이라고 믿고 이 편지를 씁니다. 내가 말한 것보다 더 많이 해 주실 줄 압니다.빌레몬서 1:21 · 두루새김
원문에서 「내 말을 따라 주실 것」(ὑπακοή)에는 순종을 뜻하는 말이 쓰였고, 이는 앞의 「간청합니다」와 긴장을 이룹니다. 이것을 호의적인 협력으로만 이해하면 바울이 쓰는 말의 힘이 사라집니다. 이 편지는 권위가 사라진 관계가 아니라, 권위를 가진 사람이 명령 대신 사랑에 호소하면서도 그 사랑이 마땅히 요구하는 행동을 강하게 기대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스스로 선택하도록 요청하는 것과 그 선택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같은 문제가 아닙니다. 바울은 빌레몬의 결정을 대신하지 않지만, 그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그다음 말은 또 하나의 여지를 남깁니다.
「내가 말한 것보다 더 많이」가 무엇인지는 명시되지 않습니다. 오네시모를 노예 신분에서 해방하는 일까지 기대했다는 견해가 있고, 13절에서 바울이 오네시모를 곁에 두고 싶어 했다는 점을 근거로 그를 다시 바울에게 보내 복음의 일을 돕게 하는 일로 읽기도 합니다. 어느 쪽도 확정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요청을 넘어서는 실천의 가능성을 빌레몬에게 남겨 두며, 그의 사랑이 명령받은 만큼에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갈 길을 발견하기를 기대합니다.
22절에서 바울은 뜻밖에도 자신이 묵을 곳을 마련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형제님, 아울러 내가 묵을 곳도 마련해 주십시오. 여러분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나를 여러분에게 선물로 보내 주시리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빌레몬서 1:22 · 두루새김
오네시모를 바울처럼 맞이하라는 17절의 요청 뒤에, 실제로 바울을 맞이할 가능성이 놓인 것입니다. 이것이 빌레몬의 결정에 심리적인 무게를 더했을 수는 있지만, 바울이 그것을 일부러 감시나 압박의 수단으로 썼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풀려나도록 기도하는 사람들은 「여러분」입니다. 편지는 다시 공동체 전체를 향합니다.
뒤이어 에바브라,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인사를 전합니다. 디모데와 함께 시작한 편지는 함께 일하는 여러 사람의 이름으로 끝나며,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사정을 둘러싼 복음의 관계망을 보여 줍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의 영과 함께하기를 빕니다.빌레몬서 1:25 · 두루새김
처음의 인사에서 바울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혜와 평화를 빌었고, 마지막에 다시 은혜를 빕니다. 편지 한가운데의 모든 구체적인 요청을 둘러싸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은혜입니다. 빌레몬이 사랑을 실천하도록 요청받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그 자신이 먼저 은혜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골로새서 4:9에서도 오네시모는 믿을 만하고 사랑받는 형제로 소개되며, 4:12와 4:17에는 에바브라와 아킵보가 등장합니다. 이 연결은 빌레몬서를 골로새 교회와 관련된 상황에서 읽게 하는 근거입니다. 다만 편지에 갇힌 장소가 명시되지 않으므로, 바울이 로마, 가이사랴, 에베소 중 어디에 갇혀 있었는지는 이 자료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복음이 바꾸는 것은 사람 사이의 관계다
바울은 오네시모의 과거에 관해 거의 말하지 않지만, 그가 지금 누구인지는 풍성하게 말합니다. 자신의 아들이고, 자기 마음과 같은 사람이며, 무엇보다 사랑하는 형제입니다. 잘못이나 빚이 있다면 그 문제를 다루겠다고 하면서도, 과거의 행위와 신분이 그 사람을 영원히 규정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형제라고 부르는 사람을 실제 생활에서 여전히 자기에게 매인 사람으로만 대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그 모순을 빌레몬 앞에 놓고, 자신도 오네시모를 돌려보내고 빚을 떠안는 몫을 감당하면서 빌레몬에게 그의 몫을 요청합니다.
그렇다고 이 편지를 노예제가 이미 극복된 아름다운 이야기로만 읽을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당시의 노예제라는 현실 속에서 말하고 있으며, 편지에는 그 현실의 한계와 긴장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오네시모의 법적 지위가 바뀌었는지, 바울의 기대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빌레몬서에는 빌레몬의 답장이 없습니다.
그래서 독자의 시선은 편지의 마지막에서 다시 「나를 맞듯 오네시모를 맞아 주십시오」라는 17절로 돌아갑니다.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바라볼 때 이전의 노예만 볼 것인지, 아니면 바울이 사랑하는 형제이자 자신과 함께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을 볼 것인지. 빌레몬서는 그 대답을 대신 써 주지 않습니다.
다만 바울은 자신의 손으로 쓴 약속을 남겼습니다. 오네시모에게 빚이 있다면 자신이 갚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 앞에, 빌레몬이 해야 할 일을 한 문장으로 남겼습니다.
편지는 그렇게 한 사람을 다시 맞이해야 하는 집을 향해 보내졌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