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풀어 읽기 · 13장

이 장의 자리 · 10–24장 · 솔로몬의 짧은 격언

먹을 것이 있는데도 굶주리는 이유

잠언 13장에는 이상한 밭이 하나 등장합니다.

「가난한 이들의 일굴 땅에는 먹을 것이 많지만, 정의가 없어 쓸려 사라지는 것이 있다」(23절). 먹을 것이 없어서 가난한 것이 아닙니다. 밭에는 먹을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먹을 것이 사라집니다. 그 이유로 잠언은 게으름이나 무능함이 아니라 정의의 부재를 지목합니다.

이 말씀은 앞에서 반복되는 가르침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잠언 13장은 부지런한 사람은 풍족해지고, 헛되이 얻은 재물은 줄어들며, 조금씩 모으는 사람은 재산을 늘린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선택과 성실함이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23절에 이르면 또 다른 현실이 나타납니다. 누군가 성실하게 땅을 일구어도 그 결실을 누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불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잠언은 사람이 자신의 삶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가르치면서도, 모든 사람의 형편을 그 사람의 책임만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13장을 읽을 때 놓쳐서는 안 되는 긴장입니다.

이 장에는 사람의 입과 욕망, 재물과 소망, 친구와 부모, 가난과 정의가 등장합니다. 서로 독립된 격언들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반복되는 질문이 있습니다. 사람은 무엇을 원하며, 그것을 어떻게 얻으려 하는가? 그 과정에서 누구의 말을 듣고, 누구와 함께 걸으며,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남기는가?

특히 이 장은 인간의 욕망을 매우 세밀하게 관찰합니다. 게으른 사람도 갈망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도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희망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마음이 병들고, 바라던 것이 이루어지면 생명의 나무처럼 기쁨이 됩니다.

문제는 인간에게 욕망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닙니다. 무엇을 바라는지, 그 바람을 이루기 위해 어떤 길을 선택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잠언 13장은 사람이 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뿐 아니라, 그가 원하는 것이 과연 생명을 가져다주는 것인지 묻습니다.

읽는 시간 34분소단락 813장 본문 읽기 →

지혜로운 아들은 왜 먼저 들어야 하는가

잠언 13:1–3 본문 →

지혜로운 아들은 아버지의 훈계를 듣지만, 비웃는 이는 꾸지람을 듣지 않는다.잠언 13:1 · 본디새김

13장은 지혜로운 아들과 비웃는 사람을 대조하며 시작합니다.

이 구절의 특징은 두 사람의 지식이나 능력을 비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한 사람은 듣고, 다른 사람은 듣지 않습니다. 비웃는 사람이 꾸지람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책망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문제입니다.

왜 잠언은 거듭 배움의 태도를 강조할까요? 인간은 처음부터 모든 상황을 올바르게 판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경험이 부족할 수도 있고,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잘못 적용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욕망 때문에 현실을 왜곡해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자신의 판단을 교정받을 수 있는 통로가 있어야 합니다. 그 통로를 스스로 막아 버린다면, 아무리 많은 능력을 갖추고 있어도 성장하기 어렵습니다.

이제 2절에서는 듣는 문제에서 말하는 문제로 옮겨갑니다.

사람은 제 입의 열매로 좋은 것을 먹지만, 배신하는 이들의 욕구는 폭력을 향한다.잠언 13:2 · 본디새김

사람은 입으로 음식을 먹습니다. 그런데 잠언은 입에서 나온 말이 열매가 되어 다시 그 사람의 양식이 된다고 말합니다. 말은 입에서 나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말이 어떤 결과를 낳고, 그 결과가 다시 말한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정직한 말은 신뢰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적절한 조언은 사람을 위험에서 벗어나게 하고, 진실한 증언은 억울한 사람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말의 열매는 말한 사람에게도 유익이 될 수 있습니다.

반면 뒷행에서는 배신하는 사람들의 「욕구」가 등장합니다. 배신하는 사람들은 폭력을 원합니다. 그들의 바람 자체가 다른 사람을 해치는 방향으로 향해 있습니다.

다만 이 구절의 뒷행은 폭력을 욕망한다는 뜻 외에도 폭력을 그 결과로 되돌려받는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두 읽기는 욕망의 방향과 그 결과 가운데 무엇을 강조하는가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의 입은 자신에게 좋은 열매를 가져올 수도 있지만, 마음이 폭력을 향하고 있다면 그 입도 해로운 방향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3절은 이 문제를 더욱 직접적으로 다룹니다.

제 입을 지키는 이는 제 생명을 지키지만, 제 입술을 크게 벌리는 이에게는 파멸이 있다.잠언 13:3 · 본디새김

여기서 입을 지킨다는 것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무엇을 말해야 하고 무엇을 말하지 않아야 하는지 분별하는 태도입니다. 반면 입술을 크게 벌린다는 표현은 말에 대한 절제가 없는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 냅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충분한지 살피지 않고 단정하거나, 다른 사람의 비밀을 함부로 말하거나, 순간적인 분노에 따라 말을 내뱉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말은 다른 사람을 해칠 뿐 아니라 자신을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첫 구절과 셋째 구절이 연결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의 훈계를 들을 줄 알고, 자신의 입술도 지킬 줄 압니다.

듣는 일과 말하는 일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바르게 듣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말을 바로잡기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잠언은 사람의 입술에서 곧바로 그의 손과 삶의 형편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본문에서 1절 첫 행은 「지혜로운 아들, 아버지의 훈계」처럼 동사가 생략된 간결한 형태입니다. 본디새김은 뒷행의 「듣지 않는다」와 대응하도록 「듣지만」을 보충했습니다. 2절의 「욕구」로 옮긴 히브리어 네페시는 여기서 영혼이라는 독립적인 실체보다 욕구나 갈망을 나타내는 말로 읽힙니다.

갈망하는 것과 그것을 얻는 것은 다르다

잠언 13:4–6 본문 →

게으른 이는 갈망해도 아무것도 얻지 못하지만, 부지런한 이들은 풍족해진다.잠언 13:4 · 본디새김

이 구절은 단순히 열심히 일하라는 가르침으로 읽기 쉽습니다.

게으른 사람도 갈망합니다.

그에게 욕망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인가를 얻고 싶어 하고, 더 나은 형편을 바라며,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원합니다. 그런데 그는 얻지 못합니다.

이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잠언은 두 사람의 욕망의 크기를 비교하지 않습니다. 게으른 사람은 적게 원하고 부지런한 사람은 많이 원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차이는 욕망을 실제 행동으로 연결하는 데 있습니다.

사람은 원하는 것만으로 그것을 얻지 못합니다. 곡식을 얻으려면 땅을 일구어야 하고, 수확을 얻으려면 때를 맞추어 일해야 합니다. 배우고 싶은 것이 있다면 실제로 배움의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5절에서는 정직함과 수치가 등장합니다.

의로운 이는 거짓말을 미워하지만, 악한 이는 악취를 풍기고 수치를 드러낸다.잠언 13:5 · 본디새김

여기서 잠언은 거짓말을 단순히 피해야 할 행동으로만 제시하지 않습니다. 의로운 사람은 거짓말을 미워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거짓말이 불리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해서 거짓말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들킬까 봐 두렵거나, 자신의 평판을 잃고 싶지 않아서 거짓을 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잠언이 묘사하는 의로운 사람은 거짓 자체를 미워합니다. 진실을 사랑하는 태도가 그의 행동을 이끄는 것입니다.

뒷행에서는 악한 사람이 악취를 풍기고 수치를 드러낸다고 표현합니다. 히브리어 동사들은 악취나 혐오를 일으키고 수치를 가져오는 의미를 나타내지만, 그것이 악한 사람 자신에게 돌아오는지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본디새김은 악한 사람 자신에게서 악취와 수치가 드러나는 것으로 읽습니다.

여기서 악취라는 이미지는 도덕적인 부패가 다른 사람에게도 불쾌함과 해로움을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합니다.

6절은 그 결과를 삶의 길로 표현합니다.

의로움은 걷는 길이 온전한 이를 지키지만, 악함은 죄인을 무너뜨린다.잠언 13:6 · 본디새김

여기서 의로움과 악함은 각각 행동의 주체처럼 등장합니다. 이는 의로움을 단순히 사람이 지켜야 할 외적인 규칙으로 보지 않게 합니다. 정직하고 신실하게 살아가는 태도 자체가 사람을 보호하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악한 행동은 그 행동을 선택한 사람의 삶을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의로운 사람이 재난을 피한다는 보장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행동을 반복하느냐가 어떤 삶을 형성하는가에 영향을 준다는 지혜의 통찰입니다.

이제 잠언은 한 가지를 더 묻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재산을 얻었다면, 그 재산은 과연 무엇을 보장할 수 있을까요?

부자인 체하는 사람과 실제로 부유한 사람

잠언 13:7–11 본문 →

부자인 체하면서 아무것도 없는 이가 있고, 가난한 체하면서 재물이 많은 이가 있다.잠언 13:7 · 본디새김

이 구절에는 두 사람의 겉모습과 실제 형편이 뒤바뀌어 있습니다.

히브리어에는 부유해지다와 가난해지다에 해당하는 동사형이 사용됩니다. 이것을 실제로 재산을 늘리거나 줄이는 행위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본디새김은 겉으로 그렇게 보이게 행동하는 모습으로 읽습니다. 이 읽기에서는 사람의 외적인 모습과 실제 상태 사이의 차이가 강조됩니다.

왜 사람은 실제보다 부유해 보이려고 할까요? 재산이 단순히 생활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사회적인 평가와 연결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으려는 욕망이 작용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본문은 두 사람의 정확한 동기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으로 실제 형편을 판단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8절은 재산의 의미를 더욱 복잡하게 만듭니다.

사람의 재산은 제 목숨의 몸값이지만, 가난한 이는 위협하는 말을 듣지 않는다.잠언 13:8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재산을 단순히 좋은 것으로도, 나쁜 것으로도 평가하지 않습니다. 「몸값」은 위험에 처한 사람이 대가를 지불하여 자기 생명을 보전하는 상황을 떠올리게 합니다. 재산이 있다면 어떤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것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뒷행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위협하는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표현은 여러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재산이 없는 사람은 돈을 빼앗으려는 위협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또는 가난한 사람에게는 몸값을 지불할 수단이 없어 위협이나 책망에 대응할 여지가 없다는 쪽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위협하는 말」과 몸값 사이의 관계는 원문에서 명시적으로 설명되지 않으므로 어느 해석이 유일하게 옳다고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이 가진 중요한 역설은 남습니다. 재산은 사람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그 재산 때문에 위험에 노출될 수도 있습니다. 가난 역시 단순히 유리하거나 불리한 상태 하나로만 묘사되지 않습니다.

잠언은 우리가 재물을 바라볼 때 흔히 기대하는 단순한 결론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돈은 실제적인 힘을 가지고 있지만, 그 힘이 언제나 한 방향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어서 9절에서는 재물과 관계없는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의로운 이들의 빛은 기뻐하지만, 악한 이들의 등불은 꺼진다.잠언 13:9 · 본디새김

빛은 사람처럼 감정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잠언은 의로운 사람의 빛이 기뻐한다고 묘사합니다. 이는 의로운 삶에 속한 밝음과 활력을 시적으로 나타냅니다.

반면 악한 사람에게는 등불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등불은 꺼집니다. 고대 가정에서 등불은 밤의 어둠을 밝히는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등불이 꺼진다는 것은 빛과 활동의 중단을 떠올리게 하고, 잠언은 이것을 두 삶의 지속성을 보여 주는 이미지로 사용합니다.

여기서 빛이 재산을 뜻한다고 좁혀 읽을 근거는 없습니다. 7–8절에서 재산의 모순적인 모습을 보여 준 뒤, 9절에서는 삶의 더 근본적인 지속성과 활력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자기 삶을 견고하게 세우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10절이 한 가지 중요한 답을 제시합니다.

다툼은 거만함에서만 생기지만, 함께 의논하는 이들에게는 지혜가 있다.잠언 13:10 · 본디새김

여기서 「~에서만」은 배타적인 의미를 가진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 격언을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다툼의 유일한 원인이 거만함이라는 완전한 인과 법칙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거만함과 다툼의 관계를 가장 강하게 드러내는 지혜의 표현으로 읽는 것이 적절합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다양한 이유로 다툴 수 있습니다. 정당한 문제 제기나 불의에 대한 저항도 갈등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거만한 사람은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확신하기 쉽습니다. 상대방에게 배울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다른 의견을 내면 그것을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함께 의논하는 이들에게 지혜가 있다는 표현은 의논의 결과만큼 그 과정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사람들이 서로 의견을 나누고 자신의 판단을 검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관계에서는 자신의 생각을 고치는 일이 패배가 아니라 더 나은 판단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됩니다.

여기에는 1절의 가르침이 다시 적용됩니다. 훈계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의논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11절에서는 재산을 모으는 방식이 등장합니다.

헛되이 얻은 재물은 줄어들지만, 조금씩 모으는 이는 재물을 늘린다.잠언 13:11 · 본디새김

여기서 「헛되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벨(⁨הֶבֶל⁩)은 숨결이나 입김처럼 덧없고 실체가 없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낱말은 전도서에서도 반복적으로 사용됩니다.

하지만 잠언 13:11에서 헤벨이 정확히 어떤 재물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속임수로 얻은 재물일 수도 있고, 수고 없이 손쉽게 얻은 재물일 수도 있으며, 실속 없이 모인 재물의 덧없음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뒷행의 「조금씩 모으는」 모습과 대조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한쪽은 쉽게 얻었거나 실속 없이 생긴 재산이고, 다른 쪽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조금씩 쌓아 가는 재산입니다. 여기서 잠언은 재물을 얻는 과정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재산의 액수만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형성되었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시간은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로 나타납니다. 조금씩 모은다는 것은 기다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구절은 기다림이 인간의 마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야기합니다.

희망이 오래 미뤄질 때 마음에 일어나는 일

잠언 13:12–14 본문 →

미뤄지는 희망은 마음을 병들게 하지만, 이루어진 바람은 생명의 나무다.잠언 13:12 · 본디새김

사람은 무엇인가를 바라며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필요한 것을 얻기를 기다립니다. 다른 사람은 관계가 회복되기를 바라고, 또 다른 사람은 오랫동안 준비한 일이 결실을 맺기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희망이 계속 미뤄지면 어떻게 될까요? 잠언은 마음이 병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희망을 품는 일이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바라는 것이 계속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입니다.

사람은 오랫동안 기다리는 동안 점점 지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기대를 가지고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기대 자체가 고통스러워질 수 있습니다. 잠언은 이러한 인간의 마음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오래 미뤄진 희망이 사람을 아프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뒷행에서 정반대의 장면을 보여 줍니다. 단순히 기쁘다고 하지 않고 생명의 나무라고 표현합니다.

생명의 나무는 잠언 3:18에서 지혜를 설명할 때 등장했습니다. 잠언 11:30에서는 의로운 사람의 열매가 생명의 나무라고 했습니다. 이제 13장에서는 오랫동안 바라던 것이 이루어진 경험을 생명의 나무에 비유합니다. 바람이 이루어지는 일은 단순히 원하는 물건을 하나 얻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지쳐 있던 마음을 회복시키고, 다시 살아갈 힘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기만 하면 언제나 좋은 것일까요?

본문은 아직 그 질문에 직접 답하지 않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19절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전에 잠언은 어떤 가르침을 들어야 죽음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설명합니다.

말을 업신여기는 이는 그 때문에 망하지만, 명령을 두려워하는 이는 보상을 받는다.잠언 13:13 · 본디새김

여기서 「말」과 「명령」은 누구의 것일까요? 본문은 직접 그 대상을 밝히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의 말씀과 명령을 포함하여 이해할 수 있지만, 이어지는 14절의 지혜로운 사람의 가르침과 연결하면 올바른 훈계와 권고를 폭넓게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듣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여기서 두려워한다는 것은 명령 앞에서 무조건 공포에 사로잡힌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권위를 인정하고 가볍게 여기지 않는 태도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들은 가르침에 진지하게 응답합니다. 반대로 말을 업신여기는 사람은 그 가르침이 자신에게 어떤 유익을 줄 수 있는지 충분히 살피지 않습니다.

14절은 왜 지혜로운 가르침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하는지 설명합니다.

지혜로운 이의 가르침은 죽음의 덫들에서 벗어나게 하는 생명의 샘이다.잠언 13:14 · 본디새김

앞에서는 이루어진 바람이 생명의 나무였습니다. 이제는 지혜로운 가르침이 생명의 샘입니다. 나무는 생명을 유지하는 열매를 맺고, 샘은 생명을 유지하는 물을 공급합니다.

그러나 14절에는 새로운 요소가 덧붙습니다. 죽음의 덫입니다.

덫은 그것이 놓여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에게 특히 위험합니다. 위험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가까이 갔다가 붙잡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가르침의 목적은 단순히 지식을 더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선택하려는 길에 어떤 위험이 있는지 알아차리게 하는 것입니다.

때로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어떤 길을 선택하려 합니다. 그런데 그 길이 실제로는 자신을 해치는 길일 수 있습니다. 그때 지혜로운 가르침은 그가 바라던 것을 무조건 이루도록 도와주는 대신, 그 길에서 돌아서게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12절과 14절 사이에 의미 있는 긴장이 드러납니다. 바람이 이루어지면 생명의 나무처럼 기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바람을 이루려는 길에 죽음의 덫이 있다면, 먼저 그 위험을 알아보아야 합니다.

지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도록 돕는 데서 그치지 않고, 우리가 원하는 것이 정말 좋은 것인지 판단하도록 돕습니다.

희망을 포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희망이 생명으로 이어지도록 그 방향을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12절의 「희망」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토헬레트는 기다림과 기대를 포함하는 희망을 가리킵니다. 12절의 「미뤄지는 희망」은 성경의 다른 기다림의 장면들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시편 13:1–2에서 시인은 여호와야훼께 언제까지 자신을 잊으시겠느냐고 묻습니다. 기다림이 길어지면서 마음에 근심을 품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박국 2:3에서는 정해진 때를 향해 나아가는 묵시를 기다리라고 합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곧바로 헛된 희망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 본문들은 기다림의 고통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기다리는 시간이 반드시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함께 걷는 사람은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가

잠언 13:15–20 본문 →

좋은 통찰은 호의를 얻게 하지만, 배신하는 이들의 길은 험하다.잠언 13:15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사람의 판단력이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 줍니다. 좋은 통찰을 가진 사람은 상황을 이해하고 적절하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의 판단은 다른 사람에게 신뢰를 줄 수 있고, 그 결과 호의를 얻게 될 수 있습니다.

반면 배신하는 사람의 길은 험하다고 합니다. 여기서 「험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탄(⁨אֵיתָן⁩)은 본래 견고하거나 굳세고 변하지 않는 성격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따라서 배신하는 사람의 길이 고집스럽게 굳어 있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돌처럼 단단하여 걷기 어려운 길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뒤의 의미를 택했습니다. 이 읽기를 따르면 배신은 다른 사람의 신뢰를 파괴할 뿐 아니라, 배신한 사람 자신의 길도 어렵게 만듭니다. 그러나 원문의 표현이 갖는 의미의 폭을 고려하면 그 길이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험한지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16절에서는 통찰이 실제 행동과 연결됩니다.

슬기로운 이는 누구나 지식에 따라 행동하지만, 어리석은 이는 어리석음을 펼쳐 보인다.잠언 13:16 · 본디새김

여기서 슬기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의 차이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에만 있지 않습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지식에 따라 행동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됩니다. 충분히 알지 못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더 알아볼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그대로 밖에 내놓습니다. 앞에서 자신의 입을 지키는 사람이 생명을 지킨다고 했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잠언이 말하는 슬기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는 능력인 동시에, 아직 충분히 알지 못할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아는 능력이기도 합니다.

신실한 전령은 왜 치유를 가져오는가

17절에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합니다.

악한 전령은 재난에 빠지지만, 신실한 사절은 치유를 가져온다.잠언 13:17 · 본디새김

전령과 사절은 다른 사람의 뜻이나 소식을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오늘날처럼 멀리 떨어진 사람에게 즉시 연락할 수 없었습니다. 왕이나 통치자, 공동체 사이의 중요한 소식은 사람을 통해 전달되어야 했습니다.

전령은 단순히 말을 옮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정보를 정확하게 전달하고 맡겨진 임무를 신실하게 수행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메시지를 왜곡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내용을 바꾼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서로 다른 사람이나 집단 사이에 오해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잘못된 판단이 내려지고, 불필요한 갈등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신실한 사절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정확하게 수행합니다. 「치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מַרְפֵּא⁩)는 치료나 회복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잠언 12:18에서도 지혜로운 사람의 혀가 치유를 가져온다고 했습니다.

이 구절에서는 그 치유가 신실한 전령의 행동과 연결됩니다. 전령의 신실함은 무너질 수 있는 관계와 질서를 지키거나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신실함은 특별한 능력보다 먼저 요구되는 자질일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도 맡겨진 메시지를 왜곡한다면 좋은 전령이 될 수 없습니다.

이제 18절에서는 다시 훈계에 관한 말씀이 등장합니다.

훈계를 저버리는 이에게는 가난과 치욕이 따르지만, 책망을 새겨듣는 이는 존중받는다.잠언 13:18 · 본디새김

첫 구절에서는 지혜로운 아들이 아버지의 훈계를 듣는다고 했습니다. 이제 훈계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보여 줍니다.

잠언은 지혜로운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가 생활의 실패와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반대로 자신의 잘못을 고칠 줄 아는 사람은 성장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신뢰와 존중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존중은 단순히 높은 지위에 오르는 일을 뜻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행동을 고치는 사람은 신뢰할 만한 사람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바람이 이루어졌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가

이루어진 바람은 마음에 달지만, 어리석은 이들은 악에서 벗어나기를 혐오한다.잠언 13:19 · 본디새김

이 구절은 12절과 직접 연결됩니다. 12절에서는 미뤄지는 희망이 마음을 병들게 하지만, 이루어진 바람은 생명의 나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뒷행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어집니다.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 기뻐합니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것이 언제나 선한 것은 아닙니다. 어리석은 사람도 어떤 것을 바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는 악에서 벗어나는 것을 혐오합니다.

그렇다면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본문은 구체적인 욕망을 열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이 자신의 악한 길을 버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얻기 위해 잘못된 행동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12절과 19절은 인간의 희망을 서로 다른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12절은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는 고통을 인정합니다. 19절은 바람이 이루어지는 기쁨을 인정하면서도, 어리석은 사람이 악에서 돌아서기를 거부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잠언은 인간의 욕망을 무조건 억누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욕망을 정당화하지도 않습니다. 바람이 이루어졌을 때 느끼는 기쁨과 그 바람이 이루어져도 좋은 것이었는지는 구별해야 합니다.

이 차이를 분별하도록 돕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20절이 그 질문에 답합니다.

지혜로운 이들과 함께 걷는 이는 지혜로워지지만, 어리석은 이들과 어울리는 이는 해를 입는다.잠언 13:20 · 본디새김

여기서 단순히 가까이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함께 걷는다」는 표현은 같은 길을 걸으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자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판단 방식에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관계에서는 진실하게 말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일이 자연스러워집니다. 서로 조언을 구하고, 생각이 다를 때에도 함께 의논합니다.

반면 어떤 관계에서는 거짓이나 기만이 가벼운 일로 취급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이 재미있는 이야기나 영리한 처세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관계 속에 오래 머물면 자신의 판단 역시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잠언은 단순히 지혜로운 친구를 선택하라는 교훈을 넘어섭니다. 지혜는 혼자서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함께 배우고 실천하는 것임을 보여 줍니다.

물론 지혜로운 사람과 어울린다고 해서 자동으로 지혜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말과 행동을 배우려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과 함께 걸어가는가는 자신이 어떤 삶을 배우게 될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조건이 됩니다.

이렇게 15–20절을 읽으면 신실한 전령, 책망을 새겨듣는 사람, 지혜로운 이들과 함께 걷는 사람이 서로 연결됩니다. 모두 자기 혼자만의 생각에 갇혀 있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서 배우고, 다른 사람에게 진실을 전달하며, 함께 올바른 길을 찾아갑니다.

조금 더 깊이

19절의 「달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달콤하거나 즐겁다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이는 12절에서 희망이 이루어지는 기쁨을 생명의 나무에 비유했던 말씀과 잘 어울립니다.

좋은 사람은 무엇을 다음 세대에 남기는가

잠언 13:21–23 본문 →

재앙은 죄인들을 뒤쫓지만, 좋은 것은 의로운 이들에게 보답한다.잠언 13:21 · 본디새김

이 구절에서는 재앙과 좋은 것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존재처럼 나타납니다. 두 표현은 인간의 선택이 서로 다른 결과를 향한다는 잠언의 중요한 주제를 강조합니다.

여기서 「좋은 것은 의로운 이들에게 보답한다」는 말은 좋은 것이 보답하는 주체처럼 표현되어 있습니다. 누가 그 보답을 주는지는 명시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특정한 보상 방식이나 시점을 설명하는 말씀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22절에서는 결과를 바라보는 시간의 범위가 크게 넓어집니다.

좋은 이는 손자들에게 유산을 물려주고, 죄인의 재산은 의로운 이를 위해 쌓여 있다.잠언 13:22 · 본디새김

앞에서는 한 사람이 자신의 행동으로 어떤 결과를 얻는지 이야기했습니다. 이제는 손자들이 등장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가족의 토지와 재산은 다음 세대의 생계와 깊이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유산을 물려준다는 것은 단순히 돈을 남기는 일이 아니라, 후손이 살아갈 기반을 마련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잠언은 선한 사람의 삶이 자기 자신의 현재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가 성실하게 일하고 재산을 지키며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일은 다음 세대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말씀을 좋은 사람이면 반드시 손자들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주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하는 기준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유산을 남길 수 있는 형편은 개인의 성품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뒷행은 더 어려운 말씀입니다.

뒷행은 죄인이 모은 재산이 결국 의로운 사람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역전의 전망을 보여 줍니다. 부유한 사람에게서 재산을 빼앗으면 그것이 자동으로 의로운 일이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잠언은 죄인이 자기 재산을 영원히 통제할 수 없으며, 그 재산의 최종적인 귀속이 그의 의도와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재산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간을 발견합니다. 한 사람은 지금 자신이 얼마나 많이 소유하고 있는지 생각합니다. 그러나 잠언은 그 재산이 다음 세대에 어떤 영향을 남길지, 궁극적으로 누구에게 유익이 될지를 함께 묻습니다. 재산의 가치는 현재 소유한 액수만으로 완전히 평가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구절에서 이 장의 가장 뜻밖인 현실이 나타납니다.

먹을 것이 있는 밭에서 왜 가난이 계속되는가

가난한 이들의 일굴 땅에는 먹을 것이 많지만, 정의가 없어 쓸려 사라지는 것이 있다.잠언 13:23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앞에서 읽은 부지런함과 재산, 유산에 관한 가르침을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가난한 사람에게도 땅이 있습니다. 실제로 경작하여 생산할 수 있는 풍성함이나 그 땅에서 나올 수 있는 먹거리가 이야기됩니다.

그런데 무언가가 사라집니다.

왜 그럴까요? 본문은 정의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원문은 사라지는 것이 앞 행의 먹을 것인지, 피해를 입는 가난한 사람 자신인지 완전히 명확하게 정해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의의 부재와 상실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앞선 격언들이 인간의 성실함을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4절에서는 게으른 사람이 갈망해도 얻지 못하지만 부지런한 사람은 풍족해진다고 했습니다. 11절에서는 조금씩 모으는 사람이 재산을 늘린다고 했습니다. 22절에서는 좋은 사람이 손자들에게 유산을 남긴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23절은 이러한 가르침을 개인의 노력에 관한 단순한 공식으로 만들지 못하도록 합니다.

아무리 성실하게 일하더라도 자신이 얻어야 할 몫을 부당하게 잃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열심히 경작할 능력과 기회가 있어도 그 결실을 보전할 수 없다면, 성실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잠언은 그 문제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성실하게 일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그가 일하여 얻은 결실을 정당하게 누릴 수 있는 정의로운 질서입니다.

이 구절은 가난한 사람을 바라보는 태도에도 중요한 변화를 요구합니다. 어떤 사람이 가난하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게으르다거나 판단력이 부족했다고 결론지을 수 없습니다. 그가 살아가는 사회가 공정한지,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을 수 있는지, 다른 사람의 불의 때문에 자신의 몫을 잃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 합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에서 성실함과 정의는 서로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에도 그 사람의 정당한 몫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22절의 유산에 관한 말씀을 더욱 깊게 만듭니다. 다음 세대에 남겨 줄 유산이 재산이라면, 그 재산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정의로운 질서 역시 중요합니다. 재산을 많이 남기는 것과 그 재산이 부당하게 빼앗기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이지만, 둘 다 다음 세대의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좋은 사람이 후손에게 무엇을 남겨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자연스럽게 다음 구절로 이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23절의 「정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슈파트는 공정한 판단과 재판, 올바른 질서와 관련된 중요한 낱말입니다. 이 말은 단지 사람들이 서로 친절하게 대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누가 무엇을 가질 권리가 있는지, 누구의 몫이 보호되어야 하는지와 같은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다만 이 구절에서 정의가 어떤 구체적인 방식으로 무너졌는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부당하게 곡식을 빼앗긴 상황일 수도 있고, 재산권이 제대로 보호되지 않거나 공정한 판단이 이루어지지 않아 생산의 결실을 잃는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체적인 가해자나 제도를 상상하여 본문의 확정된 배경으로 제시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관점은 구약의 다른 본문들과도 연결됩니다. 레위기 19:9–10에서는 땅의 소유자가 수확할 때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해 일부를 남겨 두라고 명령합니다. 신명기 24:14–15에서는 가난하고 궁핍한 품꾼을 억압하지 말고 품삯을 제때 지급하라고 합니다. 아모스 5:11–12에서는 가난한 사람을 짓밟고 부당한 이익을 취하며, 성문에서 궁핍한 사람의 권리를 외면하는 행위를 책망합니다. 신명기 16:18–20은 이스라엘에게 공정하게 재판하고 정의를 따라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이 본문들은 정의가 단지 마음속의 선한 의도가 아니라, 사람들이 실제로 먹고살 수 있는 조건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또한 전도서 4:1에서 전도자는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억압을 보며, 억압받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지만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다고 말합니다. 잠언의 성실함에 관한 격언들과 전도서의 불의에 관한 관찰은 서로를 단순히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는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다른 하나는 그 삶이 이루어지는 세계에서 무엇이 잘못될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사랑하는 부모는 왜 훈계를 포기하지 않는가

잠언 13:24–25 본문 →

제 매를 아끼는 이는 제 아들을 미워하지만, 아들을 사랑하는 이는 그를 부지런히 훈계한다.잠언 13:24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오늘날 독자에게 가장 신중한 해석이 필요한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먼저 본문이 실제로 말하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셰베트(⁨שֵׁבֶט⁩)는 막대기나 지팡이, 권위의 상징을 가리킬 수 있는 말입니다. 이 문맥에서는 자녀를 훈육하는 데 사용되는 매를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의 고대적 표현에서 신체적인 징계의 이미지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원문의 의미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중심 대조는 단순히 매를 사용하느냐 사용하지 않느냐에만 있지 않습니다. 「미워한다」와 「사랑한다」가 대조됩니다.

왜 자녀를 훈계하지 않는 행동을 미움에 비유할까요? 잠언은 부모에게 자녀를 가르칠 책임이 있다고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잘못된 길로 들어갈 때 부모가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내버려 둔다면, 그것은 자녀의 장래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태도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는 자녀가 올바른 길을 배우도록 책임 있게 가르칩니다.

「부지런히 훈계한다」의 히브리어 동사 샤하르(⁨שָׁחַר⁩)는 일찍 찾거나 부지런히 찾는다는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 표현을 어린 나이부터 훈계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고, 계속해서 주의를 기울여 훈계한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뒤의 의미를 택했습니다.

본문은 몇 살부터 어떤 도구로 얼마만큼의 강도로 징계해야 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 특정한 체벌 방식이나 횟수에 관한 규칙을 끌어낼 수는 없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고대의 훈육 방식을 설명하는 일과 오늘날 자녀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일을 정당화하는 것은 구별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이 실제로 매를 언급한다는 점을 숨길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고대의 체벌 이미지를 오늘날 모든 상황에서 자녀를 때려도 된다는 허가로 그대로 옮기는 것 역시 적절하지 않습니다.

잠언의 더 넓은 문맥을 살펴보면 훈계의 목적이 무엇인지 분명해집니다. 잠언 3:11–12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을 책망하신다고 말합니다. 잠언 4:1–9에서는 아버지가 자녀에게 지혜를 얻고 분별을 붙들라고 가르칩니다. 잠언 13장 자체도 훈계를 듣는 지혜로운 아들의 모습으로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자녀에 대한 훈계의 목적은 부모가 자신의 분노를 해소하거나 권력을 확인하는 일이 아닙니다. 자녀가 지혜를 배우고 자신의 행동을 분별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있습니다.

자녀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녀가 원하는 것을 언제나 허락하는 일과 같지 않습니다. 때로는 잘못을 분명히 알려 주고, 행동의 결과를 이해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위험한 길에서 돌아서도록 가르쳐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에서 자녀의 안전과 존엄이 존중되어야 합니다. 자녀를 가르치는 책임을 포기하지 않는 것과 자녀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이 장의 처음과 끝을 함께 읽으면, 첫 구절에서는 지혜로운 아들이 아버지의 훈계를 듣습니다. 24절에서는 아들을 사랑하는 부모가 그를 부지런히 훈계합니다. 한쪽에는 배우려는 자녀의 태도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가르치려는 부모의 책임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교육은 이 두 방향이 만나는 자리에서 이루어집니다. 부모는 자녀가 배우도록 돕고, 자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가르침을 듣고 판단하며 성장해 갑니다.

이제 잠언 13장의 마지막 구절이 등장합니다.

의로운 이는 흡족할 만큼 먹지만, 악한 이들의 배는 주린다.잠언 13:25 · 본디새김

13장은 먹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이 장은 이미 여러 차례 먹을 것과 풍족함을 언급했습니다. 2절에서는 사람이 자기 입의 열매로 좋은 것을 먹습니다. 4절에서는 게으른 사람이 갈망해도 얻지 못하지만 부지런한 사람은 풍족해집니다. 23절에서는 가난한 사람의 땅에 먹을 것이 많아도 정의가 없어서 사라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잠언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추상적인 도덕 원칙으로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실제로 먹고 살아가는 문제와 연결합니다.

「흡족할 만큼」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먹을 것이 조금 있다는 뜻을 넘어 필요가 채워지는 만족을 나타냅니다. 이 구절은 의로운 삶이 생명과 풍족함을 향하고, 악한 삶이 결핍과 파멸을 향한다는 잠언의 일반적인 질서를 선명하게 표현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현실의 모든 가난과 굶주림에 대한 판단 기준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읽으면 불과 두 구절 앞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23절에서 가난한 사람은 먹을 것을 얻을 가능성이 있는 땅을 가지고 있어도 정의가 없어서 그것을 잃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이 두 구절을 함께 읽으면 잠언의 가르침이 더욱 깊어집니다. 의로운 삶은 생명을 지향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생명을 실제로 누리려면 개인의 성실함뿐 아니라 정의도 필요합니다.

이것이 잠언 13장이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는 중요한 긴장입니다.

밭에 곡식이 남아 있으려면

잠언 13:1–25 본문 →

잠언 13장을 읽고 나면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사람은 무엇을 바라고, 그것을 얻기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이 장은 사람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성실하게 일하라고 가르칩니다. 자기 입을 지키고, 진실하게 행동하며, 다른 사람의 조언을 듣고, 지혜로운 사람들과 함께 걸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은 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뿐 아니라,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도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가르침이 향하는 곳은 단순히 자신이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삶이 아닙니다. 정직하게 얻고, 성실하게 일하고, 자신의 책임을 다하면서 다른 사람의 몫도 귀하게 여기는 삶입니다.

이제 다시 23절의 밭을 바라봅니다.

가난한 사람이 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곳에는 먹을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정의가 없어 그 결실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성실하게 일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중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미 성실하게 일하고 있는데도 자신의 결실을 빼앗기고 있다면, 필요한 것은 게으름에 대한 훈계가 아닙니다.

정의입니다.

사람이 열매를 맺도록 가르치는 지혜와, 그 사람이 맺은 열매를 지켜 주는 정의는 함께 있어야 합니다.

잠언 13장의 끝에는 의로운 사람이 흡족하게 먹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장면에 이르기 직전, 본문은 먹을 것이 있는데도 그것을 잃을 수 있는 가난한 사람의 밭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람은 성실하게 씨를 뿌리고 땅을 일구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밭에서 난 곡식이 주인에게 돌아가도록, 정의 또한 그곳에 있어야 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