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풀어 읽기 · 23장

이 장의 자리 · 10–24장 · 솔로몬의 짧은 격언

눈을 사로잡는 것과 마음을 지키는 것

잠언 23장은 화려한 식탁에서 시작합니다.

통치자가 마련한 음식이 눈앞에 놓여 있습니다. 아마 평소에는 쉽게 맛볼 수 없는 음식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스승은 제자에게 음식을 즐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네 목에 칼을 대어라」 하고 경고합니다.

끔찍할 만큼 과장된 표현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토록 강하게 경고하는 것일까요? 음식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 음식을 먹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장을 끝까지 읽으면 또 하나의 식탁이 나타납니다. 이번에는 붉은 포도주가 잔 안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그것을 마신 사람은 다투고, 상처를 입고, 바다 한가운데 누운 사람처럼 몸을 가누지 못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그가 하는 말은 뜻밖입니다. 「다시 또 그것을 찾겠다.」 이미 상처를 입었는데도 다시 마시겠다는 것입니다.

잠언 23장은 이처럼 사람을 끌어당기는 것들로 시작하여, 그것에 붙잡혀 버린 사람의 모습으로 끝납니다.

그사이에는 재물, 음식, 다른 사람의 인정, 죄인들의 형통, 성적 유혹이 등장합니다. 모두 종류는 다르지만 한 가지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자신이 원하는 것에 지배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 장에서 스승이 반복해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눈과 마음입니다. 무엇을 바라보는가, 무엇을 부러워하는가, 무엇을 마음에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삶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그렇다고 잠언이 인간의 욕구 자체를 악한 것으로 규정하지는 않습니다. 먹는 것은 필요하고, 재물도 삶에 쓰이며, 사람과의 관계도 중요합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사람의 분별을 빼앗고 진실을 외면하게 만들 때 일어납니다.

이 장은 그러한 위험을 설명하기 위해 추상적인 교훈보다 구체적인 장면을 보여줍니다. 왕의 식탁, 인색한 사람의 초대, 고아의 밭,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 그리고 술에 취해 흔들리는 사람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읽는 시간 30분소단락 1023장 본문 읽기 →

통치자의 식탁에서

잠언 23:1–3 본문 →

음식만 보지 말고 상황을 보아라

통치자와 함께 먹으려고 앉거든, 네 앞에 있는 것을 주의 깊이 잘 살펴라.잠언 23:1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식사 예절에 관한 가르침처럼 시작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처지를 분별하라는 경고에 가깝습니다.

여기서 식탁의 주인은 통치자입니다. 평범한 사람과 달리 다른 사람의 지위와 기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인물입니다. 고대의 왕실이나 권력자의 식탁에 초대받는 일은 단순히 한 끼 식사를 대접받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초대는 호의와 인정의 표시가 될 수 있었지만, 동시에 권력자와 관계를 맺고 그에게 의존하게 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스승의 관심은 제자가 그 자리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있습니다.

‘네 앞에 있는 것’이라는 표현은 음식으로도, 마주 앉은 통치자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음식을 가리킨다면 눈앞의 진미에 함부로 손대지 말라는 경고가 됩니다. 통치자를 가리킨다면 자신이 누구와 마주하고 있는지 똑똑히 알라는 뜻이 됩니다.

두 읽기는 서로 배타적일 필요가 없습니다. 식탁에서 무엇을 먹는지 살피는 일과 누구에게 대접받고 있는지 분별하는 일은 실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스승은 제자가 음식의 맛에 사로잡혀 그 식탁을 둘러싼 인간관계를 잊어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목에 칼을 대라는 충격적인 표현

2절은 이 경고를 극단적으로 강조합니다.

네가 식욕이 왕성한 사람이라면, 네 목에 칼을 대어라.잠언 23:2 · 본디새김

이 말은 문자 그대로 자신을 해치라는 지시가 아닙니다. 음식에 대한 욕구를 강하게 억제하라는 과장된 경고입니다.

통치자 앞에서 음식을 탐하는 사람은 단지 체면을 잃는 데 그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욕구를 드러냄으로써 판단력을 잃거나, 상대가 베푸는 호의의 의미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3절은 그 이유를 압축합니다.

그의 맛난 음식들을 탐내지 마라. 그것은 속임수의 빵이다.잠언 23:3 · 본디새김

‘속임수의 빵’이라는 표현은 음식의 겉모습과 실제 의미 사이에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음식은 분명 맛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음식이 자신에게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는 순수한 호의인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통치자의 호의가 반드시 거짓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이 잠언이 경고하는 것은 그 호의에 마음을 빼앗긴 나머지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간절히 원할 때, 그것을 제공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묻지 않게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승은 음식을 보기 전에 상황을 살피라고 합니다. 식욕을 다스리는 일은 단순한 절제가 아니라 분별을 보존하는 방법입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에서 ‘식욕이 왕성한 사람’에 해당하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목숨 또는 욕구의 주인’이라는 구조를 갖습니다. 여기서는 음식을 향한 강한 식욕을 가진 사람을 가리킵니다. 본문은 통치자의 구체적인 계획을 밝히지 않습니다.

날개를 달고 사라지는 재물

잠언 23:4–5 본문 →

왕의 식탁에서 재물로 시선이 옮겨갑니다.

부유해지려고 지치도록 애쓰지 마라. 네 분별을 내려놓아라.잠언 23:4 · 본디새김

첫 문장은 분명합니다. 부유해지려는 욕망 때문에 자신을 지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둘째 문장은 해석이 갈립니다.

히브리어 미비나테카 하달은 문자적으로 ‘네 분별에서 그쳐라’에 가까운 표현입니다. 이를 자신의 분별이나 영리함에 의존하지 말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재물을 얻기 위한 자신의 계산과 능력을 지나치게 신뢰하지 말라는 경고가 됩니다.

한편 분별을 발휘하여 그만두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 읽기에서는 부를 추구하는 일에 한계를 정할 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두 해석 모두 첫 문장의 경고와 연결되지만, 원문의 생략된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차이가 있습니다.

이 구절은 노동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잠언은 다른 곳에서 부지런함과 능숙한 노동의 가치를 인정합니다(잠언 10:4; 12:11). 문제는 노동을 삶의 전부로 만들 만큼 부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네 눈길을 재물에 날려 보내겠느냐? 그것은 이미 없다. 그것은 반드시 제게 날개를 만들어, 독수리처럼 하늘로 날아가기 때문이다.잠언 23:5 · 본디새김

이 구절에는 서로 맞물리는 두 움직임이 있습니다. 먼저 사람의 눈길이 재물을 향해 날아갑니다. 그런데 정작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만들어 날아가 버립니다.

특히 ‘그것은 이미 없다’는 표현이 인상적입니다. 사람이 재물을 얻고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잠언은 그것이 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독수리처럼 하늘로 날아가 버리면 인간의 눈은 더 이상 그것을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재물이 있으면 자신의 미래를 완전히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재물은 본질적으로 불안정합니다. 환경이 달라지고, 상황이 바뀌며,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면 사라질 수 있습니다.

잠언이 겨누는 것은 재물의 존재가 아니라, 재물을 확실한 삶의 기초로 삼으려는 태도입니다.

사라질 수 있는 것에 자신의 삶 전체를 걸면, 그것이 날아가는 순간 자신도 함께 무너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고는 17–18절에서 다시 나타나는 ‘앞날’과 ‘희망’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신명기 8:11–18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이 풍족하게 먹고 좋은 집에 살며 재산이 늘어났을 때 여호와야훼를 잊어버릴 위험을 경고합니다. 잠언 23장의 화려한 음식과 재물에 관한 경고도 이러한 문제를 일상적인 지혜의 언어로 다룹니다. 신약에서는 누가복음 12:15–21에 등장하는 부자의 비유가 재물의 불안정함과 그것을 의지하는 마음의 위험을 주제적으로 이어 갑니다. 직접 인용은 아니지만, 재물이 인간의 삶을 궁극적으로 보장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같은 질문을 제기합니다.

입으로는 먹으라 하고 마음으로는 계산하는 사람

잠언 23:6–9 본문 →

이번에는 통치자가 아니라 인색한 사람이 식탁을 차립니다.

인색한 눈을 가진 이의 빵을 먹지 마라. 그의 맛난 음식들을 탐내지 마라.잠언 23:6 · 본디새김

히브리어로는 문자적으로 ‘나쁜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 여기서 눈은 사물을 보는 신체 기관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 특히 재물을 나누는 데 인색한 마음을 드러냅니다.

왜 인색한 사람이 음식을 대접합니까? 본문은 그가 어떤 목적 때문에 손님을 초대했는지 명시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겉으로 보이는 친절과는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그는 속으로 셈하는 그대로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네게 「먹고 마시시오.」라고 말하지만, 그의 마음은 너와 함께 있지 않다.잠언 23:7 · 본디새김

본디새김의 읽기를 따르면, 그 사람은 음식을 권하면서도 마음속으로 다른 계산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계산하는지는 명시되지 않습니다. 음식값이 아까운 것일 수도 있고, 손님에게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러한 구체적 동기는 본문에서 확정할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의 말과 마음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의 없는 사람을 조심하라는 교훈이 아닙니다. 고대의 식사 초대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중요한 행위였습니다. 함께 먹는 일은 신뢰와 친밀함을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음식은 나누면서 마음은 함께하지 않는다면, 식탁이 보여주는 관계와 실제 관계 사이에 틈이 생깁니다.

너는 먹었던 빵 조각을 토해 내고, 네가 건넨 다정한 말들을 헛되게 할 것이다.잠언 23:8 · 본디새김

‘토해 낸다’는 표현은 실제 소화불량에 대한 설명이라기보다, 이미 받아들인 음식조차 거부하고 싶을 만큼 관계가 불편해지는 상황을 강하게 나타냅니다. 그리고 더 아픈 것은 ‘다정한 말들’이 헛되게 된다는 점입니다. 손님은 진심으로 감사하고 호의를 표현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가 진심으로 함께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자신이 건넨 말마저 공허해집니다.

1–3절에서는 통치자의 호의에 자신의 식욕을 맡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6–8절에서는 인색한 사람의 겉으로 드러난 친절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고 합니다. 두 식탁의 문제는 서로 다르지만 공통된 경고가 있습니다.

눈앞에 차려진 것이 무엇인지보다, 그 뒤에 어떤 마음이 있는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9절은 식탁을 떠나 말의 문제로 넘어갑니다.

어리석은 이의 귀에 말하지 마라. 그가 네 말의 분별을 업신여길 것이기 때문이다.잠언 23:9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가르치지 말라는 뜻으로 일반화할 수 없습니다. 잠언 자체가 미숙한 사람을 지혜로 이끌기 위해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가르침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그 가치를 적극적으로 멸시하는 태도입니다.

음식을 대접받는 자리에서도 상대의 진심을 살펴야 하듯, 말을 전하는 자리에서도 상대가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헤아려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속으로 셈하는’이라는 히브리어 표현은 드물고 해석이 쉽지 않습니다. 마음속으로 무언가를 계산하거나 평가하는 사람으로 읽는 길이 있으며, 칠십인역은 이 구절을 음식에 섞인 털처럼 불쾌한 경험을 떠올리게 하는 방향으로 읽습니다.

고아의 밭에는 누가 서 있는가

잠언 23:10–11 본문 →

오래된 경계표를 옮기지 마라. 고아들의 밭에 들어가지 마라.잠언 23:10 · 본디새김

앞 장의 마지막 부분에 등장했던 경계표에 관한 명령이 다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피해자가 고아들로 더욱 구체적으로 밝혀집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토지는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는 기반이자 대대로 이어지는 기업이었습니다. 특히 부모를 잃은 아이들에게 물려받은 밭은 미래의 생활과 깊게 연결된 재산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보호해 줄 사람이 부족하다면 어떻게 될까요? 힘 있는 사람이 경계표를 조금 옮기거나 밭에 들어가 자기 땅처럼 사용할 수 있습니다. 고아들에게 이를 저지하거나 법적으로 대응할 힘이 약하다는 점을 악용할 수 있습니다.

잠언은 바로 그 상황을 겨냥합니다.

‘고아들의 밭에 들어가지 마라’는 말은 단순히 밭에 발을 들이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경계표를 옮기는 행위와 연결하여 그들의 토지에 대한 권리를 침범하지 말라는 경고로 읽힙니다.

그들의 권리를 되찾아 주는 이는 강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송사를 맡아 너와 다툴 것이다.잠언 23:11 · 본디새김

고아들에게는 자신을 지켜 줄 힘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잠언은 그들에게 강한 보호자가 있다고 선언합니다.

‘권리를 되찾아 주는 이’는 누구인가

‘권리를 되찾아 주는 이’는 가족이나 친족의 권리와 재산을 되찾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인물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습니다.

인간 친족으로서의 권리 회복자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여호와야훼를 가리킨다고 읽을 만한 근거도 있습니다. 바로 앞 장인 잠언 22:23에서는 여호와야훼가 가난한 이들의 송사를 맡아 다투신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또한 예레미야 50:34에서는 이스라엘의 권리를 되찾아 주는 이가 강하시며, 그분이 만군의 여호와야훼라고 명시됩니다.

따라서 잠언 23:11에서도 여호와야훼가 고아들의 권리를 되찾으시는 분으로 암시된다고 이해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그 이름이 이 구절에 직접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는 점은 구별해야 합니다.

가해자는 고아에게 힘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의 땅을 침범합니다. 그러나 스승은 그가 보지 못한 상대를 가리킵니다. 고아의 권리를 위해 다투실 강한 이가 계시다는 것입니다.

고아의 밭은 빈 땅이 아닙니다. 그곳에는 보호받아야 할 권리가 있고, 그 권리를 위해 다투시는 이가 계십니다.

조금 더 깊이

‘권리를 되찾아 주는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고알람이고, 기본이 되는 낱말은 고엘입니다. 레위기 25:25에서는 가난 때문에 가족의 땅을 팔았을 때 가까운 친족이 그 땅을 되찾는 규정이 등장합니다. 룻기 4:1–10에서는 보아스가 토지와 가족의 권리를 회복하는 문제에 관여합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보면 11절은 고아들에게 강한 권리 회복자가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이의 마음과 스승의 기쁨

잠언 23:12–16 본문 →

12절에서 화자는 다시 제자를 향합니다.

훈계에 네 마음을 기울이고, 지식의 말들에 네 귀를 기울여라.잠언 23:12 · 본디새김

가르침을 듣는 일과 그 가르침을 마음에 받아들이는 일은 같지 않습니다. 귀로는 들으면서도 마음으로는 거부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마음을 열고 들으면, 말이 자신의 판단과 행동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이어지는 13–14절은 그러한 훈계를 아이에게 적용합니다.

아이에게 훈계를 아끼지 마라. 네가 막대기로 그를 때려도 그는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막대기로 그를 때리고, 그의 목숨을 스올에서 건져 낼 것이다.잠언 23:13–14 · 본디새김

이 구절은 현대 독자에게 불편한 질문을 일으킵니다. 신체적인 징계를 권하는 말씀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원문의 ‘막대기’를 단지 부드러운 말이나 상징적인 가르침으로만 해석할 근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고대의 신체적 징계 관습을 반영하는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그 표현이 등장하는 목적과, 오늘날 그것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는 구별해야 합니다.

막대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막으려는가이다

14절은 징계의 목적을 ‘그의 목숨을 스올에서 건져 내는 것’으로 제시합니다. 스올은 구약에서 죽은 자들이 내려가는 영역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문맥에서는 아이가 어리석음의 길을 따라가다가 죽음에 이르는 것을 막는다는 의미가 중요합니다. 죽음 이후의 형벌에서 구원받는다는 구체적인 교리를 여기서 끌어내는 것은 본문의 초점을 벗어납니다.

잠언에서 어리석음은 단순히 공부를 못하거나 지식이 부족한 상태가 아닙니다. 자신의 욕구를 다스리지 못하고, 위험을 경고받아도 듣지 않으며, 잘못된 길을 고집하는 태도입니다. 그 길을 계속 걸으면 삶 자체가 파괴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훈계는 아이를 방치하지 않고 위험한 길에서 돌이키게 하려는 행동입니다.

‘때려도 그는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표현 역시 모든 신체적 처벌이 안전하다는 객관적인 보증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이는 징계가 아이를 파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것이라는 고대 지혜 교육의 강한 표현입니다. 실제로 신체적 폭력은 아이에게 심각한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을 근거로 어떤 강도의 체벌도 정당화하거나, 폭력을 행사해도 해를 입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다음 구절들이 보여주는 교육 관계의 모습입니다.

내 아들아, 네 마음이 지혜로워지면, 내 마음도, 나 자신도 기뻐할 것이다.잠언 23:15 · 본디새김

스승이 바라는 결말은 아이가 두려움에 눌려 복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의 마음이 지혜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는 스승 자신의 마음도 기뻐합니다.

네 입술이 바른 말들을 할 때, 내 콩팥이 기뻐 뛸 것이다.잠언 23:16 · 본디새김

오늘날에는 콩팥을 감정의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지만, 고대 히브리어의 신체 표현에서 콩팥은 사람의 깊은 내면과 감정을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제자의 입에서 바른 말이 나올 때 스승은 깊은 곳에서부터 기뻐합니다.

처음에 제자는 스승의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자신의 입으로 바른 말을 합니다. 더 이상 단순히 가르침을 따라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 지혜롭게 판단하고 표현하는 사람으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스승이 기뻐하는 까닭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아이를 움직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이의 마음이 지혜로워졌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마라

잠언 23:17–18 본문 →

이제 스승은 제자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또 다른 위험을 다룹니다.

네 마음이 죄인들을 부러워하지 않게 하여라. 오히려 하루 내내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데 열심을 내어라.잠언 23:17 · 본디새김

왜 죄인들을 부러워합니까? 그들이 나쁜 일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나쁜 일을 하면서도 잘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손해를 보고, 속임수로 재산을 얻은 사람은 편안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억압하는 사람이 오히려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마음에 질문이 생깁니다. 정직하게 사는 것이 과연 지혜롭습니까?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삶에 실제로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잠언은 이러한 질문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죄인들을 미워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부러워하지 마라’고 합니다.

부러움은 다른 사람의 행동을 바라보는 자신의 평가가 달라지기 시작하는 지점입니다. 악한 방법으로 얻은 성과를 부러워하면, 그 방법 자체도 점점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17절은 마음의 방향을 바꾸라고 권합니다. 죄인들의 삶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데 열심을 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앞날이 있고, 네 희망은 끊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잠언 23:18 · 본디새김

여기서 ‘앞날’은 뒤에 오는 때, 마지막에 이르는 결과, 미래의 전망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지혜로운 사람이 반드시 원하는 재산과 성공을 얻는다는 보증이라기보다, 현재 눈에 보이는 형통만으로 삶의 결말을 판단하지 말라는 권고로 읽는 것이 문맥에 맞습니다.

5절에서 재물은 이미 날개를 만들어 날아가 버렸습니다. 반면 여기서는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삶에 앞날과 희망이 있다고 말합니다. 두 장면의 차이는 소유의 많고 적음이 아닙니다. 무엇을 믿고 자신의 미래를 바라보는가에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주제는 시편 37:1–11, 73:2–17에서도 깊게 다루어집니다. 악인의 형통을 보고 흔들리는 마음은 구약 지혜와 예배의 전통에서 반복되는 문제입니다. 시편 73편은 잠언 23:17–18의 권고를 더 깊은 내적 갈등으로 펼쳐 보입니다. 악인의 형통을 보고 흔들리던 시인은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마지막을 새롭게 바라보게 됩니다. 잠언은 그 어려움을 긴 논증으로 풀지 않습니다. 대신 제자에게 현재 보이는 것만으로 삶의 가치를 결정하지 말라고 권합니다.

누구와 함께 먹고, 누구의 말을 들을 것인가

잠언 23:19–25 본문 →

자신의 마음을 길 위에 세우다

내 아들아, 너는 듣고 지혜로워져라. 그 길을 따라 네 마음을 곧게 이끌어라.잠언 23:19 · 본디새김

이 구절에서 스승은 단지 바른 행동을 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마음 자체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라고 합니다. 사람은 마음이 원하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무엇을 듣고 무엇을 생각하며 어떤 사람들과 함께할 것인지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형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에 술과 음식의 문제가 다시 등장합니다.

포도주를 퍼마시는 이들 가운데, 자기 배를 위해 고기를 탐식하는 이들 가운데 끼지 마라.잠언 23:20 · 본디새김

처음에는 통치자와 함께 먹는 식탁이었습니다. 이제는 포도주를 퍼마시고 고기를 탐식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음식의 종류나 고기 자체가 아닙니다. 술을 마시고 음식을 먹는 행위가 절제를 잃은 모습으로 묘사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술을 퍼마시는 이와 탐식하는 이는 가난해지고, 졸음은 누더기를 입히기 때문이다.잠언 23:21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음주와 탐식의 결과를 재산의 상실과 연결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술값과 음식값이 많이 나가서 가난해진다는 설명에 머물지 않습니다. ‘졸음’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삶의 리듬이 흐트러지고, 자신의 일을 돌보지 못하며, 해야 할 일을 방치하는 모습까지 암시합니다.

이것은 잠언이 자주 다루는 게으름의 문제와 맞닿아 있지만, 여기서는 특별히 지나친 소비와 향락이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사람은 즐거움을 얻기 위해 무언가를 반복하다가, 그 즐거움 때문에 삶을 유지하는 능력을 잃을 수 있습니다.

스승이 누구와 함께 어울리는지 조심하라고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반복해서 참여하는 모임의 행동 방식을 자연스럽게 배우기 때문입니다.

늙은 어머니를 업신여기지 마라

22절에서는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너를 낳은 네 아버지의 말을 들어라. 네 어머니가 늙었다고 업신여기지 마라.잠언 23:22 · 본디새김

바로 앞에서는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지 말아야 하는지를 말했다면, 이제는 누구의 말을 소중히 들어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가 자신보다 더 많은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자녀가 성장하고 부모가 늙으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자녀는 부모보다 더 빠르게 일하고, 새로운 기술을 익히며, 사회적으로 더 큰 영향력을 갖게 될 수 있습니다. 그때 부모의 말이 낡고 쓸모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잠언은 그 순간에도 부모를 업신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물론 이 명령이 부모의 모든 판단이 언제나 옳다는 뜻은 아닙니다. 부모의 말을 존중하여 듣는 것과 모든 판단에 무조건 동의하는 것은 다릅니다. 그러나 부모가 늙어 힘과 능력이 줄어들었다는 이유로 그 사람의 존엄과 삶의 경험을 하찮게 여기는 태도는 지혜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앞에서 고아의 권리를 보호하라고 했던 잠언은 여기서 노년의 부모를 존중하라고 합니다. 사람이 힘을 잃거나 의존적인 처지가 되었을 때 그를 어떻게 대하는가가 중요한 문제로 계속 등장합니다.

진리를 사들이고 팔지 마라

23절은 재물에 관한 표현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용합니다.

진리를 사들이고 팔지 마라. 지혜와 훈계와 분별도 그렇게 하여라.잠언 23:23 · 본디새김

시장에서는 물건을 싸게 사서 비싸게 팔면 이익을 얻습니다. 그런데 잠언은 진리를 사들이되 팔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에 의도적인 역설이 있습니다.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값을 치를 수 있어야 하지만, 어떤 이익을 얻더라도 그것을 쉽게 내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들이라’는 말은 ‘사라’, ‘얻어라’라는 명령입니다. 실제로 돈을 내고 진리를 구매하라는 뜻으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귀한 것을 들여서라도 진리를 얻으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팔지 말라는 것은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진리를 버리거나 바꾸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스승은 재물을 얻으려고 자신을 지치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정반대로,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나서라고 합니다. 재물은 날개를 달고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붙잡고 지켜야 합니다.

부모가 기뻐하는 이유

24–25절에서는 부모의 기쁨이 반복됩니다.

의로운 이의 아버지는 크게 기뻐하고, 지혜로운 이를 낳은 이는 그로 말미암아 기뻐한다.잠언 23:24 · 본디새김
네 아버지와 어머니가 기뻐하기를, 너를 낳은 여자가 기뻐 뛰기를 바란다.잠언 23:25 · 본디새김

15–16절에서는 스승이 제자의 지혜와 바른 말을 보고 기뻐했습니다. 이제는 부모의 기쁨으로 시야가 넓어집니다. 자녀가 부자가 되거나 높은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 아닙니다. 의롭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25절은 관찰을 넘어 바람의 형식으로 이어집니다. 부모가 기뻐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녀에게 부모의 감정을 무조건 책임지라고 강요하는 명령과는 다릅니다. 지혜로운 삶이 자신만을 위한 유익에 머물지 않고, 자신을 낳고 길러 온 사람들에게도 기쁨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조금 더 깊이

신명기 21:18–21에서는 부모의 훈계를 듣지 않는 완고한 아들의 문제가 심각하게 다루어집니다. 그 본문에도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으면서 방탕하게 먹고 마시는 행동이 함께 등장합니다. 두 본문은 같은 교육 체계를 자세히 설명하는 관계는 아니지만, 욕구를 다스리지 못하고 가르침을 거부하는 삶이 공동체에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을 공유합니다.

마음을 달라는 스승, 눈을 사로잡는 유혹

잠언 23:26–28 본문 →

26절은 매우 직접적인 호소로 시작합니다.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어라. 네 눈이 내 길들을 지켜보게 하여라.잠언 23:26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자칫 여호와야훼가 사람에게 마음을 달라고 요청하시는 말씀처럼 읽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맥에서 직접 말하는 사람은 제자를 가르치는 스승, 곧 아버지의 목소리입니다. 그것은 제자를 소유하고 지배하려는 요구가 아니라, 자신이 가르치는 지혜의 길에 마음을 기울이라는 권고로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눈이 내 길들을 지켜보게 하여라’는 표현에도 본문상의 읽기 차이가 있습니다. 기록된 자음 본문에 가까운 읽기는 스승의 길들을 기뻐한다는 뜻이 되고, 낭독 전승을 따른 읽기는 그 길들을 지켜보거나 살핀다는 뜻이 됩니다. 본디새김은 후자를 택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제자는 스승의 말을 듣는 것뿐 아니라, 그가 걸어가는 길을 눈으로 살펴야 합니다. 삶의 방식 자체가 가르침이 될 수 있습니다.

깊은 구덩이와 좁은 우물

매춘하는 여자는 깊은 구덩이이고, 낯선 여자는 좁은 우물이기 때문이다.잠언 23:27 · 본디새김

깊은 구덩이와 좁은 우물은 모두 한 번 빠지면 빠져나오기 어려운 공간입니다. 특히 좁은 우물이라는 표현은 몸을 움직일 여유조차 없는 위험한 장소를 떠올리게 합니다. 잠언 1–9장에서 이미 성적 유혹은 사람을 죽음의 길로 이끄는 위험으로 묘사되었습니다(잠언 5:3–5; 7:21–27).

다만 본문이 남성 제자를 대상으로 여성의 유혹을 경고한다는 사실과, 모든 여성을 본질적으로 위험한 존재라고 규정한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여성은 특정한 유혹과 관계의 파괴를 보여주는 인물상입니다. 여기서 ‘낯선 여자’라는 표현 역시 단순히 외국인 여성을 가리킨다고 확정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그 여자는 먹잇감을 노리듯 숨어 기다리고, 사람들 사이에 배신하는 이들을 늘린다.잠언 23:28 · 본디새김

유혹이 드러내 놓고 위험을 알리는 방식으로만 다가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단순히 한 개인의 감정적인 상처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배신하는 이들을 늘린다’는 표현은 신뢰와 관계가 깨지는 문제를 드러냅니다. 성적 욕망이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과 약속을 무너뜨리면, 그것은 자신만의 사적인 문제가 아니게 됩니다.

26절에서 스승이 눈과 마음을 함께 부르는 이유가 여기서 선명해집니다. 눈은 어떤 사람이나 대상을 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그 대상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이후의 선택이 달라집니다. 잠언은 무언가를 보았다는 사실만으로 사람이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눈으로 본 것에 마음을 내주고, 그 욕구를 따라 행동하는 길을 경고합니다.

이제 마지막 단락에서 그러한 과정이 가장 생생한 모습으로 펼쳐집니다.

조금 더 깊이

‘먹잇감을 노리듯’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드물어 정확한 비교의 대상에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강도처럼 숨어 기다리는 모습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붉은 포도주와 뱀의 이빨

잠언 23:29–35 본문 →

잠언 23장의 마지막은 앞선 교훈들과 문학적으로 다른 분위기를 띱니다. 앞부분에서는 스승이 직접 명령하고 경고했습니다. 이제는 질문을 연달아 던집니다.

누구에게 탄식이 있는가? 누구에게 신음이 있는가? 누구에게 다툼이 있는가? 누구에게 불평이 있는가? 누구에게 까닭 없는 상처들이 있는가? 누구에게 흐릿한 눈이 있는가?잠언 23:29 · 본디새김

탄식과 신음은 고통을, 다툼과 불평은 인간관계의 혼란을, 까닭 없는 상처와 흐릿한 눈은 몸에 일어난 피해를 떠올리게 합니다. 처음에는 서로 다른 불행을 겪는 여러 사람을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30절은 이 모든 질문에 하나의 대답을 제시합니다.

포도주 곁에 오래 머무는 이들에게, 섞은 술을 찾아 맛보러 오는 이들에게 있다.잠언 23:30 · 본디새김

술을 우연히 한 번 마신 사람이 아닙니다. 술 곁에 머무르고, 또 다른 술을 찾아 나서는 사람입니다. 술을 마시는 행위가 반복적인 추구가 된 모습입니다.

뱀으로 변하는 포도주

포도주가 붉은빛을 띠고, 잔 안에서 빛을 내며 매끄럽게 흘러갈 때, 그것을 바라보지 마라.잠언 23:31 · 본디새김

이 구절에서 포도주는 위험한 물건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스승은 먼저 포도주의 매력을 충분히 드러냅니다. 그래야 다음 구절의 반전이 더욱 선명해지기 때문입니다.

그 끝에는 뱀처럼 물고, 독사처럼 찌른다.잠언 23:32 · 본디새김

방금 전까지 아름다운 빛으로 사람을 끌어당기던 포도주가 이제 뱀처럼 묘사됩니다. 입으로 마시는 음료가 사람을 무는 존재로 바뀌었습니다.

특히 ‘그 끝에는’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잠언은 처음과 끝을 함께 보게 합니다. 욕망은 대개 자신이 가져올 즉각적인 즐거움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까지 이어질지는 보여주지 않습니다.

취한 사람은 무엇을 보게 되는가

네 눈은 낯선 것들을 보고, 네 마음은 뒤틀린 말들을 할 것이다.잠언 23:33 · 본디새김

여기서 눈과 마음이 다시 나란히 놓입니다. 이 장의 첫 부분에서 스승은 눈앞의 음식을 주의 깊게 살피라고 했습니다. 재물에 눈길을 빼앗기지 말라고 했으며, 자신의 길을 지켜보라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술에 취한 사람의 눈은 낯선 것들을 봅니다.

이 표현은 낯선 여자들을 보는 것으로도, 본디새김처럼 취한 사람이 경험하는 낯선 지각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후자의 읽기에서는 눈이 현실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고, 마음에서는 뒤틀린 말들이 나옵니다. 술에 취한 사람이 단지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과 생각하고 말하는 능력까지 흐트러지는 상태입니다.

앞에서 스승은 제자의 입술이 바른 말을 할 때 깊이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그와 정반대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자신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는지조차 온전히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바다 한가운데 누운 사람

너는 바다 한가운데 누운 사람처럼, 돛대 꼭대기에 누운 사람처럼 될 것이다.잠언 23:34 · 본디새김

바다 한가운데 누워 있다면 몸을 안정적으로 지탱할 곳이 없습니다. 물결이 움직이는 대로 흔들립니다. 돛대 꼭대기 역시 몸을 안전하게 누일 만한 장소가 아닙니다. 작은 움직임에도 균형을 잃기 쉬운 위험한 자리입니다.

흔들리는 바다 위에 누워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몸을 누였다고 해서 편안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몸을 가누기 어렵고 자신을 보호할 힘도 줄어듭니다. 처음에는 즐거움을 얻으려고 마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의 몸조차 제대로 다스리지 못합니다.

마지막 말이 가장 무섭다

35절에서는 마침내 술에 취한 사람이 직접 말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때렸지만 아프지 않았다. 나를 후려쳤지만 알아차리지 못했다. 언제 깨어날까? 다시 또 그것을 찾겠다.」잠언 23:35 · 본디새김

이것은 강인함의 표시가 아닙니다. 자신의 몸에 일어나는 위험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만큼 감각이 흐려진 상태입니다.

‘언제 깨어날까?’는 당연히 술에서 깨어나고 싶다는 뜻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이 예상 밖입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겪었는지 말합니다. 그러나 그 경험이 다음 행동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사람은 어떤 일이 자신을 해쳤다는 사실을 경험하고도, 그것을 다시 원할 수 있습니다.

잠언은 이러한 상태를 단지 지식 부족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술 때문에 다치고 고통받았습니다. 그러나 다시 그것을 찾겠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욕망과 반복적인 행동이 자신의 판단을 압도하는 상황을 드러냅니다.

이 장면은 오늘날 중독의 문제를 떠올리게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본문이 현대적인 의학적 진단을 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묘사하는 것은 심각하게 해로운 행동을 반복하면서도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을 단순히 의지가 약하다고 비난하는 것으로 이 말씀을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그가 얼마나 깊은 위험 속에 있는지 보여줍니다.

조금 더 깊이

‘섞은 술’은 고대에 여러 재료를 배합하여 마련한 술을 가리킬 수 있지만, 이 표현만으로 어떤 재료가 섞였는지나 알코올의 강도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독사처럼 찌른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의 정확한 의미에는 불확실성이 남아 있습니다. 찌르거나 쏘는 동작으로 볼 수도 있고, 독을 내뿜는 움직임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앞행의 ‘문다’와 대응하며 치명적인 피해를 강조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34절 둘째 행에서 가리키는 정확한 선박 구조물은 불확실하지만, 두 이미지 모두 안정적으로 몸을 지탱할 수 없는 상황을 표현합니다.

마음은 무엇을 따라 움직이는가

잠언 23:1–35 본문 →

잠언 23장은 여러 개의 짧은 가르침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독자가 장 전체를 따라 읽으면 하나의 흐름이 드러납니다. 처음에는 통치자의 맛난 음식, 날아가 버릴 재물, 인색한 사람이 차린 식탁이 사람의 눈앞에 놓입니다. 중간에 이르면 스승은 점점 사람의 내면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눈과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사람이 자신의 몸과 행동까지 통제하기 어려워지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잠언은 사람이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귀하게 여기며, 무엇을 반복해서 선택하는가에 따라 어떤 사람이 되어 가는지를 보여줍니다. 이것이 스승이 제자에게 마음을 달라고 요청하는 이유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마음은 생각과 판단, 욕구와 의지가 함께 작용하는 사람의 내면을 가리킵니다.

잠언 23장은 마지막에 술 취한 사람을 그대로 남겨 둡니다.

그는 바다 위에 누운 것처럼 흔들리고 있습니다. 몸에는 상처가 있고, 자신이 얼마나 심하게 맞았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술의 위험을 깨닫고 돌아섰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다시 그것을 찾겠다고 합니다.

그 장면을 끝까지 보여주는 까닭은 독자가 그를 내려다보며 비웃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끊임없이 바라보고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내 삶에 무엇을 가져오고 있는가? 그리고 그 끝을 보면서도 다시 찾고 있는 것은 없는가?

처음에 아름답게 빛나던 포도주는 이제 더 이상 잔 안에 있지 않습니다. 그 흔적은 사람의 흐릿한 눈과 상처 입은 몸, 그리고 「다시 또 그것을 찾겠다」는 마지막 말에 남아 있습니다.

잠언은 그 말 뒤에 아무 설명도 덧붙이지 않습니다. 독자가 그 사람의 말을 듣고, 자신이 지금 따라가고 있는 길의 끝을 바라보도록 남겨 둡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