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풀어 읽기 · 24장

이 장의 자리 · 10–24장 · 솔로몬의 짧은 격언

무너짐을 바라보고 다시 세우는 사람

잠언 24장의 마지막에는 버려진 포도밭 하나가 등장합니다.

가시풀이 온통 자라났고, 잡초가 땅을 덮었으며, 밭을 둘러싼 돌담은 무너져 있습니다. 주인은 보이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 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곳을 지나가던 사람이 멈춰 섭니다.

「나는 살펴보고 마음을 기울였다. 나는 보고 훈계를 얻었다.」(32절) 그는 버려진 밭을 보고 주인을 비웃지 않습니다. 자신은 저 사람처럼 살지 않을 것이라고 자랑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자세히 살펴보고, 그것이 자신에게 무엇을 가르치는지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서 지혜를 얻습니다.

이 장의 앞부분에도 다른 사람의 삶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악한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사람, 원수가 넘어지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사람, 죽음으로 끌려가는 사람을 보고도 모른 척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두 무언가를 바라봅니다. 그러나 보는 것에 대한 반응은 서로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악인의 형통을 보고 그를 따라가고 싶어 합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고 자신의 기쁨으로 삼습니다. 어떤 사람은 위기에 처한 이웃을 보고도 책임을 피하려 합니다.

반면 지혜로운 사람은 무너진 돌담에서도 배움을 얻습니다.

잠언 24장은 무엇을 보느냐만큼이나, 그것을 보고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가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 장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미지가 반복됩니다. 바로 집입니다.

3절에서는 지혜로 집이 세워집니다. 15절에서는 악한 사람이 의로운 이의 거처를 노립니다. 27절에서는 자신의 일을 준비한 뒤에 집을 지으라고 합니다. 마지막에는 밭을 지키던 돌담이 무너져 있습니다. 집을 세우는 일과 무너뜨리는 일이 장 전체에 흩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잠언이 관심을 두는 것은 건물 자체만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세우고, 다른 사람의 삶을 어떻게 대하며, 자신에게 맡겨진 것을 어떻게 지키는가입니다.

이러한 관심은 장의 구성에서도 드러납니다. 1–22절은 앞에서 시작된 ‘지혜로운 이들의 말’을 이어 가다가, 23절에서 「이것들도 지혜로운 이들의 말이다」라는 새로운 표제를 만납니다. 그 뒤에는 재판의 정의, 정직한 말, 일의 순서, 게으른 사람의 밭이 등장합니다.

잠언 24장은 지혜로운 삶의 여러 모습을 보여주면서 마지막에는 독자를 한 포도밭 앞에 세웁니다. 그곳에서 독자는 다른 사람의 실패를 구경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배우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읽는 시간 36분소단락 1324장 본문 읽기 →

악한 사람을 부러워하는 마음

잠언 24:1–2 본문 →

악한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마라. 그들과 함께 있기를 바라지 마라.잠언 24:1 · 본디새김

잠언 24장은 앞 장에서 다루었던 부러움의 문제를 다시 꺼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부러움과 교제를 연결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군가가 가진 것을 부러워하다가, 점차 그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을 매력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가 얻은 재물이나 영향력이 부러웠을 뿐인데, 나중에는 그러한 결과를 얻기 위해 그가 사용한 방법까지 받아들이게 될 수 있습니다.

악한 사람과 함께 있기를 바란다는 것은 단지 같은 장소에 있고 싶다는 뜻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들의 무리에 속하여 그들이 누리는 유익과 힘을 함께 얻고 싶은 마음까지 포함할 수 있습니다.

2절은 그들과 함께하는 것이 왜 위험한지 설명합니다.

그들의 마음은 폭력을 꾀하고, 그들의 입술은 해칠 일을 말하기 때문이다.잠언 24:2 · 본디새김

악은 단지 우발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속에서 계획되고, 말로 구체화되며, 다른 사람들과 공유될 수 있습니다.

‘폭력’을 꾀한다는 표현은 이 사람들이 단순히 교양이 부족하거나 무례한 정도의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다른 사람에게 실제적인 피해를 끼치려는 사람들입니다.

잠언은 악인의 성공을 바라보는 사람이 놓치기 쉬운 것을 드러냅니다. 그가 무엇을 얻었는지만 보지 말고, 그 과정에서 무엇을 계획하고 어떤 말을 했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구절에서는 전혀 다른 종류의 계획과 행동이 등장합니다. 폭력을 꾀하는 마음 다음에, 집을 세우는 지혜가 나옵니다.

집을 세우는 세 가지 힘

잠언 24:3–6 본문 →

지혜로 집이 세워지고, 분별로 든든해진다. 지식으로 방들이 온갖 귀하고 아름다운 재물로 가득 찬다.잠언 24:3–4 · 본디새김

두 구절에는 아름다운 순서가 있습니다. 집을 세우고, 집을 든든하게 만들고, 그 안의 방들을 채웁니다.

먼저 집이 있어야 합니다. 그 집은 무너지지 않도록 튼튼해야 합니다. 그다음에야 그 안에 귀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채워지는 일이 온전한 의미를 갖습니다. 잠언은 이 세 단계에 지혜, 분별, 지식을 각각 연결합니다.

집과 재물은 무엇이 다른가

잠언은 방들이 귀하고 아름다운 재물로 가득 차는 것을 좋은 모습으로 묘사합니다. 이것은 잠언이 재산 자체를 부정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앞 장에서는 부유해지려고 자신을 지치게 하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여기서는 지혜와 분별로 세워진 집이 풍성해지는 장면을 그립니다.

두 가르침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재물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재물이 삶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입니다. 3–4절에서는 지혜가 먼저 나오고 재물은 마지막에 등장합니다. 따라서 재물은 삶을 세우는 토대를 대신하지 못합니다. 이미 세워진 삶을 풍성하게 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여기서 ‘집’은 실제 주거 공간을 가리키는 동시에 가정과 살림, 지속적인 삶의 기반까지 연상시킬 수 있습니다. ‘집(⁨בַּיִת⁩)’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건물뿐 아니라 가정과 집안을 가리키는 데에도 쓰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본문이 이 모든 의미를 각각 명시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혜로 집이 세워진다는 말은 단순히 건축 기술만을 가르치는 것으로 읽기 어렵습니다. 집을 지속시키고 그 안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데 필요한 판단과 질서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먼저 무엇을 채울 것인가보다, 그것을 담을 삶이 제대로 세워져 있는가를 살핍니다.

지혜가 힘보다 강하다는 말

5절은 집에서 사람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힘이 있고, 지식 있는 사람은 힘을 굳세게 한다.잠언 24:5 · 본디새김

여기서 지혜는 단지 온화하고 조용한 성품이 아닙니다. 실제로 어려운 일을 감당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하는 능력입니다.

6절에서는 그 점을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설명합니다.

이는 네가 계책으로 네 전쟁을 치르고, 승리가 조언하는 이가 많은 데서 오기 때문이다.잠언 24:6 · 본디새김

전쟁에서는 힘이 중요합니다. 병력과 무기, 용기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잠언은 힘을 가진 사람이 반드시 승리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는 계책과 조언이 필요합니다.

이 말씀은 실제 전쟁을 배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전쟁의 지혜를 설명하면서 어떤 전쟁이든 정당하다고 승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조언하는 이가 많은 데서’라는 표현은 자신의 판단을 절대화하지 않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지식을 받아들이고, 여러 판단을 살피며, 자신의 계획을 점검합니다.

이것은 1–2절의 악한 사람과 대조됩니다. 악한 사람도 계획을 세웁니다. 그들 역시 마음속에서 무언가를 꾀합니다. 그러나 그 계획은 폭력을 향합니다.

반면 지혜로운 사람은 집을 세우고, 삶을 안정시키며, 필요한 때에 조언을 구합니다.

잠언은 계획을 잘 세우는 능력 자체를 지혜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무엇을 위해 계획하고, 그 결과 무엇을 세우는가를 묻습니다.

성문에서 말하지 못하는 사람

잠언 24:7–9 본문 →

어리석은 이에게 지혜는 너무 높다. 그는 성문에서 입을 열지 않는다.잠언 24:7 · 본디새김

고대 이스라엘의 성문은 단순한 출입구가 아니었습니다. 장로들이 모이고, 재판과 거래가 이루어지며, 공동체의 중요한 문제가 논의되는 공적인 장소였습니다(룻기 4:1–11).

따라서 성문에서 입을 열지 않는다는 말은 단순히 말수가 적다는 뜻이 아닙니다. 공동체가 중요한 판단을 내려야 하는 자리에서, 자신이 해야 할 말을 할 수 없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왜 어리석은 사람은 말하지 못합니까? 앞부분에 답이 있습니다. 그에게 지혜가 너무 높기 때문입니다. ‘너무 높다(⁨רוּם⁩)’로 읽은 낱말은 귀한 산호나 보석으로 읽는 길도 있지만, 어느 쪽이든 문맥에서 지혜가 어리석은 사람에게 닿기 어려운 것으로 묘사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여기서 어리석음은 단순히 지능이 낮거나 배움의 기회가 부족한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잠언에서 어리석은 사람은 가르침을 거부하고, 자신의 판단을 고집하며, 옳고 그름을 분별하려 하지 않는 태도로 자주 묘사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자리에 앉았다고 해서 지혜로운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공동체의 문제를 판단할 책임은 있지만, 정작 자신이 바른 판단을 배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 자리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8–9절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악을 행하려고 꾀하는 이를 사람들은 음모를 꾸미는 자라 부른다. 어리석음의 꾀는 죄이고, 비웃는 자는 사람들에게 혐오의 대상이다.잠언 24:8–9 · 본디새김

어리석음이 단순히 판단의 부족에 머무르지 않고, 악을 계획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6절과 8절을 나란히 읽으면 계획의 양면성이 드러납니다. 6절에서는 계책이 전쟁을 지혜롭게 수행하도록 돕습니다. 8절에서는 계획을 세우는 능력이 악을 행하는 데 사용됩니다. 같은 계획 능력이라도 목적에 따라 전혀 다른 평가를 받습니다.

9절의 ‘비웃는 자’ 역시 단순히 농담하는 사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진지한 교훈을 멸시하고 사람을 조롱하는 태도를 지닌 인물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공동체 안에서 혐오의 대상이 됩니다.

지혜를 거부하는 문제는 결국 개인의 내면에만 남지 않습니다. 말과 행동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공동체의 신뢰를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보고 무엇을 할 것인가

잠언 24:10–12 본문 →

10절은 갑자기 독자 자신을 향해 질문을 돌립니다.

곤경의 날에 네가 기운을 놓는다면, 네 힘은 보잘것없다.잠언 24:10 · 본디새김

히브리어에서는 ‘곤경(⁨צָרָה⁩)’에 해당하는 차라와 ‘좁다(⁨צַר⁩)’ 또는 ‘작다’는 뜻을 지닌 차르가 소리로 연결됩니다. 곤경의 날에 힘을 잃으면, 네 힘이 좁고 작다는 것입니다. 이 말놀이는 역경이 사람의 힘을 시험하는 상황임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고난 속에서 낙심하는 모든 사람이 믿음이나 인격이 부족하다는 판정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잠언은 인간이 실제로 경험하는 절망의 모든 상황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곤경에 대비할 만큼 지혜와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경각심을 일으키는 격언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에 훨씬 더 어려운 요청이 등장합니다.

죽음으로 끌려가는 이들을 건져 내어라. 도살당하러 비틀거리며 가는 이들을 부디 붙들어 주어라.잠언 24:11 · 본디새김

스승은 단지 자신이 위험에 빠지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죽음으로 끌려가고 있다면 그를 건져 내라고 말합니다.

누구를 건져 내라는 것인가

본문은 죽음으로 끌려가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자세히 밝히지 않습니다. 부당하게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을 떠올릴 수 있고, 폭력이나 억압 때문에 죽음의 위기에 놓인 사람들을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구체적인 사건에 연루되어 있는지, 누가 그들을 끌고 가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들이 스스로를 지키기 어려운 위험에 놓여 있다는 점입니다. ‘도살당하러 비틀거리며 가는 이들’이라는 표현은 거의 저항할 힘이 없는 존재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선택이 있습니다. 그냥 지나갈 수도 있고, 그들을 붙들어 세우려고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어 11절의 둘째 행은 명령을 이어 가는 것으로도, 구출을 주저하는 사람에게 질문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첫째 행과 병렬되는 적극적인 촉구로 읽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구절은 단순히 용감하게 행동하라고 권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몰랐습니다’라는 변명

네가 「보시오, 우리는 이것을 몰랐소.」라고 말한다 해도, 마음들을 저울질하는 이가 알아차리지 않겠느냐? 네 목숨을 지키는 이가 알지 않겠느냐? 사람에게 그 행위대로 되갚지 않겠느냐?잠언 24:12 · 본디새김

그 말은 사실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잠언은 그 변명 자체보다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분에게 시선을 돌립니다.

여기서 ‘마음들을 저울질하는 이’는 여호와야훼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잠언 21:2에서도 여호와야훼는 사람의 마음을 저울질하시는 분으로 등장하십니다. 인간은 겉으로 드러난 말을 듣지만, 여호와야훼는 그 말 뒤에 있는 마음까지 아십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몰랐던 사람과 알고 있으면서 외면한 사람을 똑같이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인간에게 모든 위기를 다 알아내고 모든 사람을 구출할 수 있는 무한한 책임을 부과하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이 알고 있었고 도울 수 있었던 상황에서 책임을 피하려고 무지를 주장하는 태도를 겨냥합니다.

12절 후반부에서는 「네 목숨을 지키는 이」와 「그 행위대로 되갚」는 이가 서로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생명을 지키시는 분이면서, 그 사람의 행동을 살피시는 분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지키시는 분 앞에서 다른 사람의 목숨을 하찮게 여길 수 없다는 뜻이 드러납니다.

지혜는 위험을 알아보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는데도 외면하지 않는 책임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앞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전쟁을 위해 조언을 구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지혜와 힘을 자신의 승리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명을 지키는 데 사용하도록 요구합니다.

조금 더 깊이

잠언 24:11–12의 생명을 구하라는 명령은 출애굽기 23:5의 곤경에 처한 짐승을 돕는 명령이나, 레위기 19:16의 이웃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지 말라는 명령과 연결됩니다. 구약의 율법은 악을 직접 행하지 않는 것을 넘어,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서 이웃을 외면하지 않는 책임까지 가르칩니다.

꿀보다 더 귀한 것을 맛보라

잠언 24:13–14 본문 →

위기에 처한 사람을 건져 내라는 엄중한 명령 뒤에 분위기가 바뀝니다.

내 아들아, 꿀을 먹어라. 그것은 좋다. 벌집에서 흐르는 꿀은 네 입천장에 달다.잠언 24:13 · 본디새김

이것은 앞서 등장했던 음식에 관한 경고들과는 다른 장면입니다. 잠언은 즐거움을 무조건 경계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꿀의 달콤함을 긍정합니다.

그런데 스승이 꿀을 이야기하는 까닭은 그 맛 자체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네 생명에도 지혜가 이 꿀과 같음을 알아라. 네가 그것을 찾으면 앞날이 있고, 네 희망은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잠언 24:14 · 본디새김

입에 꿀이 달듯이, 지혜도 사람의 생명에 유익하고 좋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본문은 지혜를 단지 고통스러운 훈련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물론 지혜를 배우는 일에는 책망을 듣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어려움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단순히 위험을 피하는 소극적인 상태가 아닙니다. 삶에 좋은 것을 발견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앞날’이라는 말의 깊이

14절의 ‘앞날(⁨אַחֲרִית⁩)’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뒤에 오는 때나 마지막 결과, 미래의 전망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는 ‘희망’과 짝을 이루어 지혜를 찾는 사람에게 열려 있는 미래를 나타냅니다.

꿀은 입에서 잠시 맛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지혜는 자신의 생명에 영향을 미치는 더 깊고 오래가는 유익을 가져옵니다.

이 ‘앞날’이라는 말은 20절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그곳에서는 악한 사람에게 앞날이 없다고 말합니다. 지혜를 찾은 사람에게는 앞날과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의 앞날은 끊어집니다.

잠언은 지금 무엇을 많이 가지고 있는가보다, 그 사람이 어떤 미래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가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일곱 번 넘어지는 의로운 사람

잠언 24:15–16 본문 →

악한 자야, 의로운 이의 거처를 노리고 숨어 기다리지 마라. 그가 쉬는 곳을 짓밟지 마라.잠언 24:15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이 장에서 드물게 악한 사람을 직접 부릅니다. 스승은 의로운 사람을 향해 조심하라고 말하는 대신, 그를 해치려는 악한 사람에게 경고합니다.

장면을 떠올려 보면 의로운 사람은 자기 거처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는 쉬고 있습니다. 적어도 이 구절에서는 누군가를 공격하거나 싸움을 일으키는 모습이 아닙니다. 그런데 악한 사람은 그의 거처를 노리고 숨어 기다립니다.

본문에서 ‘거처’와 ‘쉬는 곳’은 사람이 안전과 안식을 누려야 할 공간을 가리킵니다. 그 공간을 노린다는 것은 단순히 물건을 빼앗으려는 행동을 넘어, 한 사람이 평안히 살아가는 기반 자체를 파괴하려는 행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3–4절에서 지혜로 집을 세우고 방들을 채웠다면, 여기서는 다른 사람의 집과 거처를 무너뜨리려는 악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16절은 그가 예상하지 못한 사실을 알려줍니다.

의로운 이는 일곱 번 넘어져도 일어나지만, 악한 이들은 재앙 속에서 걸려 넘어지기 때문이다.잠언 24:16 · 본디새김

일곱 번 넘어짐은 일곱 번 죄를 짓는 것인가

이 구절은 자주 잘못을 반복해도 회개하면 된다는 격려로 사용됩니다. 물론 성경 전체에서 죄를 지은 사람이 돌이키고 회복되는 주제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잠언 24:16의 직접적인 문맥은 그와 다릅니다.

15절에서는 악한 사람이 의로운 사람을 공격하려 합니다. 16절에서는 의로운 사람과 악한 사람이 역경 속에서 맞이하는 결과를 대조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넘어짐’은 반복해서 죄를 짓는 일보다 재앙과 어려움을 겪는 상황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히브리어에서 ‘일곱(⁨שֶׁבַע⁩)’은 실제 일곱 차례를 가리킬 수도 있지만, 이와 같은 격언에서는 반복되거나 충분히 많은 횟수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곧 의로운 사람은 여러 차례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로운 사람에게 고난이 찾아오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보다 훨씬 현실적인 가르침입니다. 의롭게 산다고 해서 모든 위험과 불행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악한 사람의 공격을 받을 수 있고, 삶의 터전이 위협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잠언은 그러한 역경이 의로운 사람의 마지막 모습이 되지는 않는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악한 사람은 재앙 속에서 걸려 넘어집니다.

차이는 넘어졌는가가 아니라, 그 뒤에 어떻게 되는가입니다.

의로움은 한 번도 넘어지지 않는 삶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넘어짐이 삶의 마지막이 되지 않는다는 희망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모든 의로운 사람이 현실에서 반드시 잃어버린 건강이나 재산과 지위를 되찾는다는 약속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잠언은 지혜로운 삶의 일반적인 방향과 결과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개별적인 고난의 결과를 모두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의인이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는 이미지는 시편 37:23–24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사람의 걸음을 붙드시므로 그가 넘어져도 완전히 엎드러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는 직접 인용이라기보다 의로운 사람의 길이 역경 속에서도 끝나지 않는다는 주제적 연결입니다.

원수가 넘어지는 것을 보고 기뻐하지 마라

잠언 24:17–18 본문 →

16절에서 악한 사람이 재앙 속에 넘어진다는 말을 들은 독자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자신을 괴롭히던 사람이 실패하거나 벌을 받는다면 기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잠언은 바로 그 반응을 경계합니다.

네 원수가 넘어질 때 기뻐하지 마라. 그가 걸려 넘어질 때 네 마음이 즐거워하지 않게 하여라.잠언 24:17 · 본디새김

악한 사람의 넘어짐을 인정하는 것과 그 불행을 자신의 즐거움으로 삼는 것은 다르다는 뜻입니다.

잠언은 악한 사람의 잘못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정의로운 판단을 포기하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가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올바른 판단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마음속에서 즐거움을 키우는 일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18절은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여호와야훼가 보고 못마땅하게 여겨, 그에게서 자기 분노를 거둘지도 모른다.잠언 24:18 · 본디새김

겉으로 보면 원수의 불행을 즐거워하면 하나님이 그에 대한 심판을 멈추실 수 있으니, 원수가 더 큰 벌을 받게 하려면 기뻐하지 말라는 뜻처럼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읽으면 본문은 원수에 대한 더 큰 보복을 얻기 위한 계산법이 되어 버립니다.

이 구절의 직접적인 강조점은 원수의 몰락 앞에서 드러나는 자신의 마음 역시 여호와야훼의 판단 아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여호와야훼는 악한 사람의 행동만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악한 사람의 불행을 즐거워하는 사람의 마음도 보십니다.

‘그에게서 자기 분노를 거둘지도 모른다’는 표현은 여호와야훼의 심판이 인간의 적개심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심판의 변화를 의미하는지까지 본문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악을 미워하는 것과 악한 사람의 고통을 즐기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악한 사람이 행한 불의에 책임을 묻는 것은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판단을 자신의 감정적 만족을 얻는 수단으로 삼는 순간, 정의에 대한 관심은 보복의 욕망과 뒤섞일 수 있습니다.

이 가르침은 출애굽기 23:4–5와도 통합니다. 그곳에서는 원수의 소나 나귀가 길을 잃었으면 돌려주고,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의 나귀가 짐 아래 쓰러져 있으면 그를 도우라고 명령합니다. 원수라는 관계가 그 사람에게 해야 할 올바른 행동까지 없애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잠언 24장은 그 원칙을 마음의 영역에까지 적용합니다.

조금 더 깊이

원수의 불행을 기뻐하지 말라는 권고는 오바댜 1:12와도 통합니다. 오바댜에서는 형제 민족이 재난을 겪을 때 그것을 기뻐하거나 조롱하는 태도를 책망합니다. 상대가 잘못했더라도 그의 재난을 자신의 기쁨으로 삼는 일은 하나님의 뜻과 같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꺼지는 등불과 왕의 권위

잠언 24:19–22 본문 →

악을 행하는 이들 때문에 분을 내지 마라. 악한 이들을 부러워하지 마라.잠언 24:19 · 본디새김

장의 첫 구절과 비슷한 말이 다시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제 독자는 앞선 가르침들을 들었습니다.

악한 사람은 폭력을 계획하고, 의로운 사람의 거처를 노리며, 다른 사람을 해치려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행동에 분노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스승은 악한 사람 때문에 분을 내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불의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갖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실제로 11절에서는 죽음으로 끌려가는 사람을 건져 내라고 했고, 뒤이어 나올 24–25절에서는 악한 사람의 잘못을 정당하게 밝히라고 합니다.

따라서 19절이 금하는 것은 악을 판단하거나 불의를 바로잡는 행동 자체가 아닙니다. 악한 사람의 형통과 행동에 마음을 사로잡혀 자신의 삶의 방향을 잃는 태도로 이해해야 합니다.

20절이 그 이유를 말합니다.

악한 이에게는 앞날이 없고, 악한 이들의 등불은 꺼질 것이기 때문이다.잠언 24:20 · 본디새김

앞서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앞날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악한 사람에게는 앞날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등불’이라는 새로운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고대의 집에서 등불은 어둠을 밝히는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등불이 켜져 있다는 것은 그곳에 빛이 있고 활동이 이어질 수 있음을 나타냅니다. 구약의 지혜 문학에서 등불은 삶의 지속이나 번영을 가리키는 이미지로 사용되기도 합니다(잠언 13:9; 욥기 18:5–6).

악한 사람의 등불이 꺼진다는 말은 지금 밝게 빛나는 것처럼 보이는 그의 삶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는다는 경고입니다. 지금은 그가 힘을 가지고 있고,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으며, 다른 사람의 부러움을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잠언은 등불이 꺼진 뒤의 어둠까지 생각하라고 합니다.

여호와야훼와 왕을 두려워하라는 말

21절은 시선을 권위의 문제로 돌립니다.

내 아들아, 여호와야훼와 왕을 두려워하여라. 변절하는 이들과 어울리지 마라.잠언 24:21 · 본디새김

여기서 ‘두려워하다’는 단순히 공포를 느낀다는 뜻으로만 제한되지 않습니다. 권위를 인정하고 그 권위에 따르는 책임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태도를 포함합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와 왕이 나란히 등장한다는 사실은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왕은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고 정의를 시행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왕에게는 실제적인 권력이 있었고, 그의 판단은 백성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에서 왕이 여호와야훼와 동등한 권위를 가진 존재로 제시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명기 17:18–20에서는 왕 자신도 율법을 배우고 지켜야 하며, 형제들 위에 마음을 높이지 말아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따라서 잠언 24:21을 왕의 모든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확대할 수는 없습니다.

이어지는 ‘변절하는 이들’이라는 표현에도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히브리어는 바뀌거나 달라지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권위를 거역하는 반역자들로 이해하기도 하고, 충성을 쉽게 바꾸는 사람들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본문은 이들이 어떤 구체적인 정치적 행동을 했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모든 제도적 변화나 정당한 비판을 금지하는 표현으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22절에서는 갑작스러운 재난이 경고됩니다.

그들의 재난이 갑자기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와야훼와 왕이 내릴 재앙을 누가 알겠느냐?잠언 24:22 · 본디새김

히브리어의 ‘그 둘(⁨שְׁנַיִם⁩)’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재난을 내리는 주체와 어떻게 연결되는지에는 해석의 여지가 남아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여호와야훼와 왕을 연결하여 읽지만, 구문의 간결함 때문에 그 관계를 지나치게 확정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경고는 분명합니다. 하나님과 공적인 권위 앞에서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결과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을 의롭다고 말하는 사회

잠언 24:23–26 본문 →

23절에는 새로운 표제가 등장합니다.

이것들도 지혜로운 이들의 말이다. 재판에서 사람을 가려 편드는 것은 좋지 않다.잠언 24:23 · 본디새김

잠언 22:17에서 시작된 ‘지혜로운 이들의 말’에 이어 또 다른 짧은 모음이 시작됨을 알리는 표제입니다. 새로운 모음의 첫 주제는 재판입니다.

얼굴을 보고 판단하지 마라

‘사람을 가려 편들다(⁨נָכַר⁩)’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문자적으로 ‘얼굴을 알아보다’라는 관용적인 표현과 관련됩니다. 여기서 얼굴을 알아본다는 것은 단순히 누군가를 알아보는 행동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신분과 지위, 관계를 고려하여 판단을 달리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재판에서는 사실과 정의가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재판관이 눈앞의 사람이 부유한 사람인지, 권력자인지, 자신의 친구인지에 따라 다른 기준을 적용한다면 정의는 무너집니다.

이러한 경고는 레위기 19:15와 신명기 16:18–20에 나타나는 재판의 원칙과 연결됩니다. 특히 레위기 19:15에서는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부당하게 편들어서도 안 되고, 힘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우대해서도 안 된다고 명령합니다.

정의는 특정한 사람을 무조건 선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지위와 관계없이 바르게 판단하는 것입니다.

24절은 그 원칙이 무너지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악한 이에게 「너는 의롭다.」라고 말하는 이를 백성들이 저주하고 민족들이 규탄한다.잠언 24:24 · 본디새김

여기에는 단순한 거짓말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공적인 자리에서 악한 사람을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개인적으로 거짓말하는 것도 문제지만, 재판이나 공적 판단의 자리에서 거짓을 진실로 선언하면 그 영향이 훨씬 커집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책임을 피하게 되고, 피해자는 자신의 억울함을 풀지 못합니다. 더 나아가 공동체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는 기준 자체를 잃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회적 신뢰가 무너지는 문제입니다.

잘못을 밝히는 사람의 용기

25절은 정반대의 모습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그의 잘못을 밝히는 이들에게는 즐거움이 있고, 좋은 복이 그들 위에 내린다.잠언 24:25 · 본디새김

여기서 ‘잘못을 밝히는’ 행동은 문맥상 악한 사람의 죄를 정당하게 드러내고 바로잡는 일을 가리킵니다. 모든 비난이나 폭로가 정당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절과 이어지는 재판의 맥락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과 정의에 근거하여 판단하는 것입니다.

권력이나 이익 때문에 악을 의롭다고 선언하지 않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판단이 공동체를 지키는 데 기여하기 때문에, 잠언은 그 사람에게 좋은 복이 따른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구절에는 뜻밖의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바른 말로 대답하는 이는 입술에 입을 맞춘다.잠언 24:26 · 본디새김

입술에 입을 맞춘다는 표현은 앞선 재판의 엄중한 분위기와 잘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른 대답은 입맞춤과 같다

히브리어 문장은 간결합니다. ‘입술에 입을 맞춘다’는 동사와 ‘바른 말로 대답하는 이’라는 표현이 연결됩니다. 본디새김처럼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 입맞춤의 주체라고 읽을 수 있고, 바른 대답이 입맞춤을 받는 것과 같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경우든 바른 말과 입맞춤의 긍정적인 이미지가 연결됩니다.

입맞춤은 친밀함과 호의, 환영을 표현할 수 있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바른 대답이 상대를 존중하고 좋은 관계를 만드는 행동과 같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진실한 말이 관계를 해칠까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잘못을 밝히면 상대에게 미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잠언은 바른 말이 반드시 관계를 파괴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진실한 말이 관계에 필요한 신뢰를 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단순히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는 일이 아니라, 서로를 속이지 않는 관계를 세우는 일이기도 합니다.

재판에서 사람을 가려 편들지 않는 일과 일상에서 바른 말로 대답하는 일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둘 다 진실을 자신의 이익에 맞추어 왜곡하지 않는 태도에서 나옵니다.

집을 짓기 전에 밭을 준비하라

잠언 24:27 본문 →

바깥에서 네 일을 준비하고, 들에서 너를 위해 그 일을 마련하여라. 그 뒤에 네 집을 지어라.잠언 24:27 · 본디새김

고대의 농경사회에서 밭은 생계를 유지하는 중요한 기반이었습니다. 농사를 지어야 먹을 양식과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자원이 생깁니다.

그러한 기반을 마련하지 않은 채 집을 짓는 데 먼저 모든 힘을 쏟는다면, 집을 완성하더라도 그 안에서 지속적으로 살아갈 기반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집 자체보다 일을 더 귀하게 여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일의 순서를 바르게 정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특정한 건축법이나 경제 계획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또한 결혼이나 가정을 반드시 일정한 경제적 수준에 도달한 뒤에만 시작하라는 명령으로 직접 연결할 근거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원하는 결과를 먼저 얻으려 하지 말고, 그것을 지속시킬 기반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3–4절에서는 지혜로 집을 세우고 방들을 채운다고 했습니다. 27절에서는 그 집을 짓기 위해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가르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완성된 집의 모습만 상상하지 않습니다. 그 집이 서 있을 수 있도록 필요한 일을 먼저 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다음에 등장하는 게으른 사람의 밭을 읽는 준비가 됩니다. 그러나 그전에 스승은 사람의 말과 보복의 문제를 다시 다룹니다.

진실을 왜곡하지 말고, 보복을 선언하지 마라

잠언 24:28–29 본문 →

까닭 없이 네 이웃에게 불리한 증인이 되지 마라. 네 입술로 속이겠느냐?잠언 24:28 · 본디새김

23–26절에서는 재판에서 바른 판단을 내리는 사람이 등장했습니다. 이번에는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재판관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증인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함으로써 그 판단에 영향을 미칩니다. 따라서 거짓 증언은 단순한 개인적 거짓말보다 심각한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는 ‘네 이웃’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상대는 멀리 떨어져 있는 낯선 사람이 아니라, 자신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이웃입니다. 이웃에 관한 거짓 증언은 공동체 내부의 신뢰를 무너뜨립니다.

본디새김은 둘째 행을 질문으로 옮겼습니다. 히브리어에서는 앞의 금지 명령을 이어 가는 것으로도, 상대에게 되묻는 표현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질문으로 읽으면 스승은 제자에게 자신의 입술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을 속이려는 행동이 얼마나 부당한지 생각하게 합니다.

29절은 거짓 증언의 배후에 있을 수 있는 마음의 문제를 더욱 직접적으로 다룹니다.

「그가 내게 한 대로 나도 그에게 하겠다. 그 사람에게 그 행위대로 되갚겠다.」라고 말하지 마라.잠언 24:29 · 본디새김

겉으로 보면 공평한 원칙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잠언은 개인적인 보복을 정당한 정의와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되갚으시는 것과 사람이 되갚는 것은 같은가

12절은 사람의 마음을 저울질하시는 분이 사람에게 그 행위대로 되갚으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29절에서는 사람이 직접 같은 말을 하려는 것을 금합니다.

왜 하나님께는 허용되는 일이 사람에게는 금지됩니까?

그 이유를 이 장의 흐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2절의 하나님은 마음을 저울질하시고,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알고 무엇을 행했는지 아시는 분이십니다.

반면 사람은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통해 상대를 판단합니다. 자신이 받은 피해 때문에 상대를 지나치게 가혹하게 평가할 수도 있고, 상대의 사정이나 자신의 잘못을 충분히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분노를 기준으로 상대에게 똑같이 되갚는 일은 하나님의 정의로운 판단과 같지 않습니다.

이것은 불법적인 행동에 대한 책임을 묻거나 정당한 절차에 따라 피해를 회복하는 일까지 금하는 것은 아닙니다. 잠언이 경계하는 것은 자신이 입은 피해를 이유로 스스로 보복의 권한을 행사하려는 태도입니다.

이러한 구별은 레위기 19:18에서도 나타납니다. 그곳에서는 원수를 갚거나 원한을 품지 말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잠언 24장은 그 명령을 매우 실제적인 상황에 적용합니다.

여기에는 17–18절과의 깊은 연결이 있습니다. 17절에서는 원수가 넘어질 때 기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29절에서는 원수가 자신에게 한 일을 그대로 돌려주겠다고 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는 마음속의 기쁨을 다스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실제적인 보복을 삼가는 일입니다.

잠언은 불의에 침묵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의를 세우는 일과 자신의 상처를 갚는 일을 구별하라고 가르칩니다.

조금 더 깊이

신약에서는 로마서 12:17–21이 개인적인 보복을 삼가고 악을 선으로 이기라는 가르침을 제시합니다. 이는 잠언 24:29의 원칙과 주제적으로 연결되며, 로마서 12:20은 잠언 25:21–22를 직접 인용하여 원수에게 선을 행하라는 가르침을 이어 갑니다.

무너진 돌담이 가르쳐 준 것

잠언 24:30–34 본문 →

잠언 24장은 마지막에 긴 설명 대신 하나의 경험을 들려줍니다.

나는 게으른 사람의 밭 곁을, 분별없는 사람의 포도밭 곁을 지나갔다.잠언 24:30 · 본디새김

앞의 여러 잠언은 대체로 명령이나 격언의 형태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스승이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마치 길을 걷다가 우연히 어떤 장소를 발견한 것처럼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장소는 평범한 밭이 아닙니다.

아무도 돌보지 않은 밭

보니, 온통 가시풀이 자라났고, 잡초가 그 표면을 덮었으며, 돌담은 무너져 있었다.잠언 24:31 · 본디새김

먼저 밭 안의 상태가 보입니다. 사람이 가꾸어야 할 땅에 원하지 않는 풀이 무성하게 자라났습니다. 작물을 기르는 데 필요한 공간과 자원을 잡초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밭 바깥의 경계가 보입니다. 돌담이 무너져 있습니다. 고대의 밭이나 포도밭에서 돌담은 경계를 표시하고 외부의 침입이나 동물에 의한 피해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 돌담이 무너졌다면 밭은 보호받기 어려운 상태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단순히 풀이 조금 많이 자랐다는 묘사가 아닙니다. 밭을 생산적인 상태로 유지하는 일도 이루어지지 않고, 그 밭을 보호하는 구조까지 무너진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이 밭은 하루아침에 이렇게 되었을까요? 본문은 언제부터 방치되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시풀과 잡초가 무성해지고 돌담이 무너진 모습은 오랜 시간 동안 필요한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곳에는 큰 재난이 일어났다는 설명이 없습니다. 전쟁이 벌어졌다는 말도 없고, 폭풍이나 홍수가 밭을 파괴했다는 말도 없습니다. 본문이 알려주는 것은 그 밭이 게으른 사람의 것이며, 분별없는 사람이 관리하던 포도밭이라는 사실입니다.

무언가를 무너뜨리는 데 반드시 거대한 악행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계속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삶의 중요한 부분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스승은 무엇을 했는가

나는 살펴보고 마음을 기울였다. 나는 보고 훈계를 얻었다.잠언 24:32 · 본디새김

히브리어 문장에서는 보는 행동과 마음을 두는 행동이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스승은 눈앞의 장면을 무심코 지나치지 않습니다. 보고, 생각하고, 다시 살펴봅니다. 그리고 그 장면에서 훈계를 얻습니다.

스승은 제자에게 단지 정답을 전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세상을 어떻게 관찰하고, 관찰한 것을 어떻게 교훈으로 바꾸는지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앞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훈계에 마음을 기울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스승 자신이 실제로 그렇게 행동합니다. 다른 사람의 밭을 보면서도 그 모습을 자신의 삶에 대한 가르침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배웠을까요?

‘조금’이라는 말의 위험

조금 자고, 조금 졸고, 조금 손을 모으고 누워 있으면,잠언 24:33 · 본디새김

여기서 스승은 게으른 사람이 하루 종일 잠을 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표현이 인상적인 이유는 작은 행동들이 대수롭지 않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잠깐 더 자는 것이 무슨 문제입니까? 조금 더 쉬는 것이 무엇이 잘못입니까?

쉼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안식의 가치를 인정하며, 사람이 끝없이 일하도록 창조되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잠언을 모든 휴식을 죄악시하는 말씀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해야 할 일이 계속 미루어지는 상황입니다. 필요한 때에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조금만 더’라는 말로 계속 뒤로 미루면 그 작은 선택들이 쌓입니다.

잡초는 한순간에 밭 전체를 덮지 않습니다. 돌담도 작은 균열이나 무너진 부분을 제때 보수하지 않으면 점점 더 손상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어느 순간 밭 전체가 버려진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한 번의 거대한 실수가 아니라, 작고 반복적인 미룸이 가져오는 결과입니다.

걸어오는 가난, 무장한 사람처럼 닥치는 궁핍

네 가난이 걸어오고, 네 궁핍이 방패 든 사람처럼 닥친다.잠언 24:34 · 본디새김

먼저 가난은 걸어옵니다. 히브리어에서 ‘걸어오다(⁨הָלַךְ⁩)’에 해당하는 표현은 걸어 다니거나 다가오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이 표현을 강도처럼 다가오는 것으로 이해하는 번역도 있지만, 본디새김은 걸어오는 이미지를 살렸습니다.

반면 궁핍은 방패 든 사람처럼 닥칩니다. 방패를 들고 다가오는 사람은 쉽게 물리치기 어려운 상대를 떠올리게 합니다.

가난은 조금씩 걸어오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눈앞에 닥치면 무장한 사람처럼 강력한 현실이 됩니다. 오랫동안 미루어 온 일의 결과는 당장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것을 바로잡으려 해도 이미 많은 것을 잃은 뒤일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이 가난한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있는가

이 잠언은 게으름이 궁핍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모든 가난이 게으름 때문에 발생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잠언 자체가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는 부유한 사람을 비판하고, 약자의 권리를 보호하라고 명령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잠언 24:10–12에서는 위기에 처한 사람을 건져 내라고 했고, 23–25절에서는 재판에서 부당한 편들기를 금했습니다. 가난은 개인의 게으름뿐 아니라 불의한 제도, 폭력, 질병, 재난 등 여러 이유로 발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30–34절의 포도밭을 보고 모든 가난한 사람이 자기 밭을 방치한 사람과 같다고 판단하는 것은 본문을 잘못 사용하는 일입니다.

이 장면의 목적은 다른 사람의 가난을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승 자신이 무너진 밭을 보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데 있습니다. 그는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살았을까’라는 판단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나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나아갑니다.

돌담 앞에 선 사람

잠언 24:1–34 본문 →

이 장의 마지막 모습을 다시 떠올려 봅시다.

길을 걷던 사람이 포도밭 앞에 멈춰 서 있습니다. 가시풀과 잡초가 무성합니다. 돌담은 무너져 있습니다.

그는 밭의 주인을 만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왜 게을러졌는지 묻지도 않습니다. 그 사람의 인생 전체를 설명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눈앞의 광경을 보고 마음을 기울입니다.

이것은 이 장의 첫머리에 등장한 사람들과 뚜렷하게 다릅니다. 악한 사람을 부러워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삶에서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을 봅니다. 원수의 실패를 기뻐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불행에서 자신의 만족을 찾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의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의 무너진 밭에서 자신이 배워야 할 것을 발견합니다.

그에게는 비웃음 대신 성찰이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3절의 집과 마지막의 포도밭을 함께 생각하면 더욱 선명해집니다. 지혜로 집이 세워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집을 세우는 것만으로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집을 유지하려면 꾸준히 돌보아야 합니다. 밭을 일구고, 잡초를 정리하고, 무너진 부분을 보수해야 합니다.

지혜는 삶을 세우고, 다른 사람을 살피고,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며, 맡겨진 것을 지속적으로 돌보는 일에서 나타납니다.

그리고 독자도 그곳에 함께 서게 됩니다.

눈앞에는 무너진 돌담이 있습니다. 다시 돌을 쌓아야 할 자리가 보이고, 걷어 내야 할 잡초가 보입니다.

잠언은 그 돌담이 저절로 다시 세워질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할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입니다.

「나는 살펴보고 마음을 기울였다. 나는 보고 훈계를 얻었다.」

무너진 것을 보고도 배울 수 있는 사람. 잠언 24장은 바로 그 사람의 눈앞에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