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풀어 읽기 · 25장
이 장의 자리 · 25–29장 · 히스기야 때의 잠언
아름다운 말의 때와 자리
잠언 25장에는 놀라운 두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상황에 맞게 한 말은 은 장식 속의 금 사과와 같다」(11절), 그리고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하는 사람은 철퇴와 칼과 날카로운 화살과 같다」(18절)입니다.
둘 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관한 비유입니다. 그러나 하나는 아름다운 장신구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을 해치는 무기입니다.
그 차이는 단순히 말을 부드럽게 하느냐 거칠게 하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이 장에서는 부드러운 혀가 단단한 뼈를 부러뜨리고, 좋은 뜻으로 부르는 노래가 상한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할 수도 있습니다. 원수를 먹이는 행동은 그에게 숯불을 퍼 놓는 것으로 묘사되며, 달콤한 꿀조차 너무 많이 먹으면 토하게 됩니다.
좋은 것이라고 해서 언제나 좋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닙니다. 말은 내용뿐 아니라 때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고, 호의는 상대의 처지에 맞아야 하며, 즐거움에도 적절한 한계가 필요합니다.
잠언 25장은 무엇이 옳은지를 아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옳은 것을 언제, 어떻게, 어느 만큼 행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그런데 이 장은 개인의 말과 행동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 왕을 등장시킵니다.
이렇게 시작한 잠언은 점차 일상의 인간관계로 내려옵니다. 이웃과의 다툼, 적절한 충고, 신뢰할 수 있는 전령, 지나친 방문, 거짓 증언, 원수에게 베푸는 호의가 차례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성벽이 무너진 성읍이 나타납니다.
왕의 나라를 다스리는 문제에서 시작하여 한 사람이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문제로 끝나는 것입니다.
이 장의 여러 비유를 하나로 묶어 주는 것은 바로 그 ‘다스림’의 문제입니다. 다만 그것은 다른 사람을 뜻대로 움직이는 지배력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과 말을 바르게 사용하고, 넘지 말아야 할 경계를 알아보는 지혜입니다.
솔로몬의 말이 히스기야 시대에 다시 옮겨지다
이것들도 솔로몬의 격언들이다. 유다 왕 히스기야의 사람들이 옮겨 적었다.잠언 25:1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잠언의 내용보다 먼저 그 말들이 어떻게 전해졌는지를 알려줍니다.
앞 장까지 이어졌던 ‘지혜로운 이들의 말’이 끝나고, 25장부터 새로운 솔로몬 격언 모음이 시작됩니다. 이 모음은 29장까지 이어집니다.
표제에는 두 왕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 왕국의 지혜 전통과 깊이 연결된 왕입니다. 열왕기상 4:32에는 그가 삼천 가지 격언을 말했다는 기록도 나옵니다. 히스기야는 훨씬 뒤에 유다를 다스린 왕으로, 열왕기하 18–20장과 역대기하 29–32장에 그의 통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표제는 잠언의 형성과 전승에 시간적인 간격이 있었음을 알려줍니다. ‘옮겨 적었다(עָתַק)’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는 기본적으로 옮기거나 이동시키는 뜻을 지니며, 여기서는 기존의 말들을 옮겨 기록하고 전승하는 활동을 나타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문서에서 옮겼는지, 어떤 기준으로 선별하고 배열했는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히스기야의 사람들이 현재와 같은 25–29장의 모든 배열을 처음부터 완성했다고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이 지혜의 말들은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뒤 사라진 것이 아니라, 후대에 다시 읽고 보존할 가치가 있는 가르침으로 전해졌다는 것입니다.
왕들의 이름이 적힌 표제 바로 뒤에서 잠언은 왕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감추시는 하나님과 살피는 왕
하나님의 영예는 일을 감추는 데 있고, 왕들의 영예는 일을 살피는 데 있다.잠언 25:2 · 본디새김
이 구절은 하나님과 왕을 비교하지만, 둘을 단순히 같은 종류의 통치자로 놓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서로 다른 행동을 통해 각각의 영예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감추시고, 왕은 살핍니다.
하나님이 감추시는 것은 왜 영예인가
왜 하나님께서 일을 감추시는 것이 영예가 될까요? 하나님이 모든 것을 드러내어 알려 주신다면 더 영광스럽지 않을까요?
여기서 ‘일(דָּבָ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낱말은 말이나 사건, 사안 등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무엇이 감추어져 있는지 한 종류로 좁힐 필요는 없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이 진실을 숨겨 사람을 속이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고 아시는 모든 것이 인간에게 완전히 드러나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식과 행하심은 인간이 모두 파악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제한되지 않습니다.
신명기 29:29는 감추어진 일은 여호와야훼께 속하고 드러난 일은 이스라엘이 지켜야 할 것으로 구분합니다. 욥기 38–41장에서도 하나님은 욥이 이해할 수 없는 창조세계의 광대함을 보여주십니다. 이러한 본문들과 함께 읽으면, 감추시는 하나님의 영예는 인간의 무지를 이용하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크심과 자유를 드러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편에 있는 왕의 영예는 다릅니다.
왕은 무엇을 살펴야 하는가
왕은 일을 살피는 것으로 영예를 얻습니다. 히브리어 동사는 자세히 살피거나 조사하고 탐구하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왕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문제를 충분히 조사하고 사실을 밝혀내는 능력입니다. 특히 왕이 재판과 통치의 책임을 맡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말씀은 실질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백성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을 때 겉으로 드러난 말만 듣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일이 실제로 일어났는지 살펴야 합니다. 사람의 지위와 영향력에 휘둘리지 않고 사실을 확인해야 합니다.
열왕기상 3:16–28에서 솔로몬이 두 여인의 다툼을 판단하는 장면은 왕의 지혜가 어떤 문제를 다루어야 하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그 이야기는 단순히 왕이 영리하다는 칭찬이 아니라, 진실을 가려내어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왕의 책임을 드러냅니다.
왕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모든 것을 안다고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알아내기 위해 살펴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구절이 이 설명을 더욱 복잡하게 만듭니다.
하늘의 높이도 땅의 깊이도, 왕들의 마음도 헤아릴 수 없다.잠언 25:3 · 본디새김
하늘의 높이와 땅의 깊이는 인간이 쉽게 헤아릴 수 없는 광대함을 나타냅니다. 앞에서는 왕이 일을 살피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이번에는 왕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쉽게 파악되지 않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왕은 다른 사람의 일을 조사하지만, 그의 마음속 판단과 계획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왕이 자신의 마음을 무조건 숨겨도 된다는 허가가 아닙니다. 왕이 가진 권력과 판단의 복잡함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왕의 결정은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왕에게는 더욱 신중한 판단이 필요하며, 그를 대하는 사람에게도 자신의 한계를 아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지만 인간에게 모든 것을 드러내지는 않으십니다. 왕은 모든 것을 알지 못하므로 조사해야 하지만, 정작 그의 마음도 다른 사람들에게 완전히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지혜는 이 차이를 지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인간에게 맡겨진 책임을 소홀히 하지 않는 데서 시작합니다.
은을 제련하고 왕좌를 세우다
은에서 찌꺼기를 걷어 내어라. 그러면 제련공을 위한 그릇이 나온다.잠언 25:4 · 본디새김
잠언은 갑자기 왕궁에서 제련 작업장으로 장소를 옮깁니다.
은으로 좋은 그릇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그릇을 만드는 데 방해가 되는 찌꺼기를 걷어 내야 합니다. 이 비유에서는 무언가를 더하는 일이 아니라 제거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5절은 그 비유의 뜻을 곧바로 밝혀 줍니다.
왕 앞에서 악한 이를 걷어 내어라. 그러면 그의 왕좌가 정의로 굳게 선다.잠언 25:5 · 본디새김
4절의 은과 찌꺼기가 5절의 왕좌와 악한 사람에 대응합니다.
왕좌는 은그릇처럼 귀하고 아름답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겉모습이 아무리 화려하더라도, 그 주변에 악한 사람들이 남아 있다면 통치는 제대로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왕의 권력을 이용하여 사익을 추구하거나, 사실을 왜곡하여 왕이 불의한 판단을 내리게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군사력이나 부유함, 왕의 개인적 매력으로 왕좌가 세워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정의’로 굳게 선다고 합니다. 왕권의 정당성은 단지 권력을 오래 유지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권력이 정의롭게 행사되는가에 있습니다. 이것은 왕좌가 의로움으로 굳게 선다고 말하는 잠언 16:12와도 연결됩니다.
그렇다면 악한 사람들을 제거한다는 말은 왕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마음대로 숙청해도 된다는 뜻일까요?
그렇게 읽어서는 안 됩니다.
5절의 기준이 ‘정의’라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됩니다. 왕이 자신의 권력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사람을 제거하는 것은 오히려 불의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제거되어야 할 것은 왕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의로운 통치를 훼손하는 악입니다.
제련공이 귀한 은을 버리려는 것이 아니라 좋은 그릇을 만들기 위해 불순물을 걷어 내듯, 왕도 정의를 세우기 위해 악한 영향력을 분별하고 바로잡아야 합니다.
좋은 통치는 왕이 얼마나 강한지를 과시하는 데서 세워지지 않습니다. 그 권력이 얼마나 바르게 행사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왕에게는 정의가 요구되고, 왕 앞에 서는 사람에게는 또 다른 지혜가 요구됩니다.
높은 자리에 서두르지 말라
스스로 올라가는 사람과 초대받아 올라가는 사람
왕 앞에서 스스로를 높이지 마라. 높은 사람들의 자리에 서지 마라.잠언 25:6 · 본디새김
왕의 주변에서 악한 사람을 제거하라는 말 다음에, 이번에는 왕 앞에 서는 개인의 행동을 다룹니다.
왕궁은 지위와 서열이 눈에 보이는 공간입니다. 누가 왕의 가까이에 앉고, 누가 높은 사람들과 함께하는가는 그 사람이 어느 정도 인정받고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사람은 자신을 실제보다 더 높은 사람으로 보이게 하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네 눈으로 본 귀인 앞에서 낮춰지기보다, 「이리로 올라와라.」라는 말을 듣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잠언 25:7 · 본디새김
한 사람은 스스로 높은 자리에 올라갔다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내려오라는 말을 듣습니다. 다른 사람은 처음에 낮은 자리에 있었지만, 더 높은 자리로 올라오라는 초대를 받습니다.
겉으로 보면 둘 다 높은 자리와 관계된 일입니다. 그러나 자리에 오르는 과정은 정반대입니다. 첫 번째 사람은 자신의 지위를 스스로 결정하려 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인정과 판단을 받아들였습니다.
잠언은 자신의 가치를 과장하여 인정받으려는 행동보다, 실제로 인정받을 때까지 기다리는 태도를 더 지혜롭게 여깁니다.
여기서 ‘네 눈으로 본 귀인’이라는 표현은 앞에 있는 높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른 읽기에서는 그 표현을 8절의 다툼에 관한 경고와 연결하기도 합니다. 본디새김처럼 7절에 연결하면 공개적인 자리에서 당하는 수치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자기 능력을 숨기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침묵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문제는 실력이나 권리의 정당한 인정이 아니라, 스스로의 지위를 부풀려 남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잠언은 왕궁의 자리 문제에서 곧바로 이웃과의 다툼으로 넘어갑니다.
다툼에도 서두름이 위험하다
서둘러 다투러 나서지 마라. 그랬다가 네 이웃이 너를 창피하게 하면, 그 끝에 너는 어떻게 하려느냐?잠언 25:8 · 본디새김
앞에서는 높은 자리를 서둘러 차지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다툼을 서둘러 시작하지 말라고 합니다.
사람은 자기 판단을 지나치게 확신할 때 서두르기 쉽습니다.
높은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여 먼저 올라갑니다. 이웃이 잘못했다고 확신하여 충분히 살펴보기도 전에 다투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자기 판단이 틀렸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이것은 단순히 체면을 잃지 않는 요령이 아닙니다. 충분히 확인하지 않은 주장으로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줍니다. 앞의 2절에서 왕은 일을 살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원칙은 왕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웃과 다투려는 사람도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이 충분한지 살펴야 합니다.
다툼의 범위를 지키는 일
네 다툼을 놓고 네 이웃과 다투어라. 다른 사람의 비밀은 드러내지 마라.잠언 25:9 · 본디새김
처음 문장은 다투어야 할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를 당사자와 다루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문제로 이웃과 갈등이 생겼다고 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다른 사람의 비밀까지 드러낼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다툼에서 이기고 싶을 때 상대의 약점을 끌어들이기 쉽습니다. 현재의 문제와 관련이 없는 과거의 잘못이나 사적인 이야기를 공개하여 상대를 불리하게 만들려 할 수 있습니다. 잠언은 그 행동을 경계합니다.
듣는 이가 너를 욕되게 하고, 너에 대한 나쁜 소문이 사라지지 않을까 염려된다.잠언 25:10 · 본디새김
다른 사람의 비밀을 공개하면 당장은 자신이 유리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들은 사람들이 오히려 비밀을 폭로한 사람을 신뢰하지 않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은 갈등을 해결하기보다 자신의 평판을 해치게 됩니다.
정당한 다툼에도 지켜야 할 경계가 있습니다. 옳은 주장을 한다는 이유로 모든 수단이 정당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잠언은 다툼에서 사용하는 말 자체를 더 자세히 살피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4:7–11에서 잔치의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사람들을 보시고 매우 비슷한 가르침을 하십니다. 잠언 25:6–7의 직접적인 문장을 그대로 인용한 것은 아니지만, 낮은 자리에 앉았다가 초대받아 올라가는 같은 장면을 사용하십니다.
금 사과와 부드러운 혀
말은 내용만 옳으면 충분한가
상황에 맞게 한 말은 은 장식 속의 금 사과와 같다.잠언 25:11 · 본디새김
이 구절에는 아름답게 가공된 귀금속의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두 재료가 어울리는 방식에 있습니다. 금은 귀하고 아름답습니다. 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는 금으로 만든 장식과 그것을 받쳐 주는 은 장식이 함께 아름다움을 이룹니다.
스승은 그것을 상황에 맞게 하는 말에 비유합니다. 여기서 단순히 좋은 말을 많이 하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말이 어느 때에 적절한지를 분별하라는 가르침이 나옵니다.
똑같은 말이라도 상황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상대가 충분히 들을 준비가 되어 있을 때 하는 충고와, 깊은 슬픔에 잠겨 있는 순간 갑자기 던지는 충고는 같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진실한 내용이라도 그것을 전하는 방식 때문에 본래의 뜻이 전달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말에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말 자체가 바르고 진실해야 하며, 그 말이 놓일 상황도 적절해야 합니다.
금 사과의 아름다움이 은 장식과 어울릴 때 더욱 드러나듯, 좋은 말도 상황에 알맞게 놓일 때 그 가치를 온전히 드러냅니다.
귀고리가 되는 책망
12절은 비슷한 귀금속의 이미지를 이어 가지만, 이번에는 말하는 사람보다 듣는 사람에게 주목합니다.
듣는 귀에는 잘못을 지적하는 지혜로운 이가 금 귀고리와 금 장신구와 같다.잠언 25:12 · 본디새김
지혜로운 사람이 아무리 바르게 책망해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유익이 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자신이 잘못한 점을 인정하고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책망이 귀한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앞절에서는 상황에 맞는 말이 아름다운 금 사과였습니다. 이번에는 지혜로운 책망이 귀를 꾸미는 금 장신구가 됩니다. 사람은 칭찬을 장식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잠언은 오히려 잘못을 지적하는 말을 아름다운 장신구에 비유합니다. 지혜로운 책망은 듣는 사람의 삶을 바로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비난이 귀한 것은 아닙니다. 본문은 ‘잘못을 지적하는 지혜로운 이’를 말합니다. 진실에 근거하지 않은 비난이나 상대를 모욕하려는 말까지 칭찬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듣는 귀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가르치는 사람이 자신의 말은 언제나 옳다고 주장해서도 안 됩니다.
말하는 사람에게는 지혜가 필요하고, 듣는 사람에게는 받아들일 준비가 필요합니다.
바른 책망은 사람을 작아지게 만들기 위한 말이 아니라, 그 사람이 더 바르게 살아가도록 돕는 말입니다.
추수하는 날의 눈과 비 없는 구름
13절과 14절에서는 말의 신뢰성이 서로 반대되는 날씨의 이미지로 나타납니다.
충실한 전령은 그를 보낸 이들에게 추수하는 날 눈의 서늘함과 같다. 그는 자기 주인들의 기운을 되살린다.잠언 25:13 · 본디새김
고대 사회에서 전령은 중요한 소식과 명령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오늘날처럼 즉각적인 통신 수단이 없던 상황에서, 전령이 맡은 말을 정확하게 전하고 돌아오는 일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전령이 자신의 생각대로 내용을 바꾸거나 필요한 소식을 전달하지 않는다면 그를 보낸 사람에게 큰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곡식을 거두는 시기의 더위 속에서 시원한 눈의 기운을 느끼는 모습은 상쾌한 회복을 떠올리게 합니다.
반대로 14절에는 비 없는 구름이 등장합니다.
주지도 않는 선물을 자랑하는 사람은 비 없는 구름과 바람과 같다.잠언 25:14 · 본디새김
구름이 몰려오면 사람은 비가 내리기를 기대합니다. 특히 농사에 물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비를 예고하는 듯한 구름은 반가울 것입니다. 그러나 구름과 바람만 있고 비는 내리지 않는다면 기대는 실망으로 바뀝니다.
주지도 않을 선물을 자랑하는 사람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는 무언가를 베풀 것처럼 말합니다. 다른 사람은 그 말을 듣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실제 행동은 없습니다.
13절의 전령은 맡은 일을 실제로 수행하여 사람을 회복시키고, 14절의 사람은 말만 앞세워 헛된 기대를 만듭니다. 두 사람의 차이는 말을 얼마나 그럴듯하게 하느냐가 아닙니다.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는가입니다.
아름다운 말이라고 해서 모두 지혜로운 말은 아닙니다. 실제로 지켜지지 않는 약속은 아무리 아름답게 표현해도 비 없는 구름이 될 수 있습니다.
부드러운 혀가 뼈를 부러뜨린다
15절에서는 다시 통치자가 등장합니다.
오래 참음으로 통치자가 설득되고, 부드러운 혀가 뼈를 부러뜨린다.잠언 25:15 · 본디새김
일반적으로 통치자는 권력을 가지고 있고, 뼈는 단단합니다. 오래 참음과 부드러운 혀는 그보다 약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잠언은 결과를 반대로 보여줍니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드러운 혀’는 상대에게 아첨하거나 자신의 주장을 포기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말하는 방식이 온화하고 절제되어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에 맞습니다.
중요한 문제를 다룰 때에는 때로 즉각적인 공격보다 인내하며 설명하는 태도가 더 큰 설득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특히 상대가 높은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감정적인 압박이나 공개적인 모욕이 오히려 방어적인 반응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반면 차분하고 지속적인 설명은 생각을 바꿀 기회를 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구절을 어떤 폭력적인 권력자도 온화하게 말하기만 하면 반드시 설득된다는 보장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잠언은 설득의 일반적인 지혜를 보여줄 뿐, 모든 권력 관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단 하나의 방법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강한 말이 반드시 강한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상대의 마음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이제 잠언은 말을 다스리는 일에서 욕구와 인간관계의 거리를 다스리는 일로 옮겨갑니다.
조금 더 깊이
11절의 금 사과가 정확히 어떤 모양의 장식품을 가리키는지, ‘사과’가 현대의 사과와 같은 과일을 나타내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금으로 만든 과실 모양의 장식과 은으로 된 장식틀이 어우러지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13절의 비유를 실제로 추수 때 눈을 가져와 사용했다는 역사적 기록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꿀도 너무 많이 먹으면 토한다
꿀을 찾았거든 네게 필요한 만큼만 먹어라. 너무 배불리 먹어 그것을 토하지 않도록 하여라.잠언 25:16 · 본디새김
잠언에서 꿀은 좋은 음식으로 등장합니다. 달콤하고 즐거움을 줍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꿀 자체보다 먹는 양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스승은 좋은 것을 악한 것으로 바꾸지 않습니다. 다만 좋은 것에도 적절한 한계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사람은 맛있는 것을 발견하면 더 많이 먹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만족을 주었던 것이 지나침 때문에 고통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17절은 같은 원칙을 인간관계에 적용합니다.
네 이웃집에 발걸음을 뜸하게 하여라. 그가 네게 질려 너를 미워하지 않도록 하여라.잠언 25:17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조금 우스꽝스럽습니다. 친한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어서 자주 찾아갔는데, 오히려 그가 자신을 싫어하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친밀함은 중요하지만 상대에게도 자신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고 해서 언제나 함께 있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상대의 경계를 존중하는 일이 중요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스승은 이웃집에 방문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감당할 수 있는 거리와 빈도를 헤아리라고 합니다.
좋은 것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은 그것을 최대한 많이 차지하려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이 좋은 것으로 남을 수 있도록 적절한 한계를 지키는 일입니다.
이것은 앞의 6–7절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사람에게도, 15절에서 통치자를 설득하려는 사람에게도 필요한 지혜입니다. 자신의 욕구를 앞세워 공간과 시간을 독점하지 않는 태도는 관계를 오래 유지하는 중요한 조건이 됩니다.
사람을 해치는 말과 사람을 살피지 못하는 말
거짓 증언은 왜 무기인가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하는 사람은 철퇴와 칼과 날카로운 화살과 같다.잠언 25:18 · 본디새김
앞에서는 말이 금 사과나 금 귀고리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혀 다른 물건들이 등장합니다. 세 가지 모두 사람을 해치는 무기입니다. 철퇴는 강한 타격을 가하고, 칼은 베거나 찌르며, 화살은 떨어진 거리에서도 사람을 공격할 수 있습니다.
거짓 증언은 말로 이루어집니다. 직접 상대의 몸에 손을 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말 때문에 무고한 사람이 처벌받을 수도 있고, 재산이나 명예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증언은 다른 사람의 판단에 영향을 미칩니다. 따라서 거짓 증언은 사람을 해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20:16의 거짓 증언 금지가 왜 중요한지 보여줍니다. 진실을 왜곡하는 행위는 단순히 도덕적으로 불완전한 행동에 그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실제적인 피해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11절에서 상황에 맞게 한 말은 아름다운 금 사과였습니다. 18절에서 거짓 증언은 사람을 해치는 무기입니다.
같은 입에서 나오는 말이지만 결과는 정반대입니다.
곤경의 날에 믿을 수 없는 사람
19절은 말의 진실성에서 신뢰의 문제로 옮겨갑니다.
곤경의 날에 배신자를 믿는 것은 깨진 이와 비틀거리는 발과 같다.잠언 25:19 · 본디새김
여기에는 두 가지 신체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이는 음식을 씹는 데 필요합니다. 발은 몸을 지탱하고 움직이는 데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를 사용하려는 순간 깨져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발로 몸을 지탱하려는 순간 발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필요한 순간에 의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어려움이 찾아왔을 때 그 사람이 약속을 지키지 않거나 책임을 회피한다면, 믿고 의지했던 사람은 더 큰 어려움에 처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신뢰성은 좋은 시절보다 어려운 상황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습니다.
13절의 충실한 전령과 비교하면 대조가 선명합니다. 충실한 전령은 맡은 일을 수행하여 사람의 기운을 되살립니다. 그러나 배신자는 그를 믿었던 사람에게 깨진 이와 비틀거리는 발 같은 고통을 줍니다.
잠언은 인간관계에서 신뢰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누군가를 신뢰한다는 것은 중요한 순간에 그의 행동에 자신의 일부를 맡기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신뢰는 말보다 행동을 통해 확인되어야 합니다.
왜 좋은 노래가 상처가 되는가
20절은 앞의 두 구절보다 더욱 미묘한 문제를 다룹니다.
상한 마음에 노래를 불러 주는 이는 추운 날 옷을 벗기는 이와 같고, 천연 소다 위의 식초와 같다.잠언 25:20 · 본디새김
노래는 본래 좋은 것일 수 있습니다. 기쁨을 표현하고 위로를 전하며, 고통스러운 사람의 마음을 달래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잠언은 상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노래를 불러 주는 일을 부정적으로 묘사합니다.
여기서 문제는 노래라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상대의 상태를 헤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추운 날 옷을 벗기면 사람은 더욱 추워집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따뜻함인데, 정반대의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비유가 상한 마음에 필요한 것을 빼앗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두 번째 비유는 어울리지 않는 것을 가져다 놓는 상황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렇다면 슬퍼하는 사람에게 노래를 불러 주면 언제나 잘못일까요?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에는 고통 중에 노래하며 하나님을 찾는 장면도 있고, 노래가 위로의 역할을 하는 장면도 있습니다. 잠언이 경계하는 것은 상대가 슬퍼하고 있는데 그 슬픔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은 채 자신의 즐거운 분위기를 강요하는 태도입니다.
사람은 상대를 위로하고 싶다는 이유로 서둘러 기쁜 말을 건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상대의 고통을 인정하지 않고 지나가 버린다면, 위로를 받는 사람은 오히려 자신의 슬픔이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을 읽으면 11절의 ‘상황에 맞게 한 말’이 더욱 깊어 보입니다. 좋은 말에는 옳은 내용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상대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살피는 눈도 필요합니다.
위로는 주고 싶은 것을 주는 일이 아니라, 상대에게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헤아리는 데서 시작합니다.
말하는 사람에게 선한 의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의도만으로 좋은 결과가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상대의 마음을 살피는 일이 빠지면, 기쁨의 노래조차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18절의 첫 번째 무기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메피츠는 드물게 쓰이는 표현으로, 정확히 어떤 무기인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부수거나 흩뜨리는 동작과 관련된 말이므로, 본디새김처럼 철퇴로 옮기거나 곤봉 또는 망치에 가까운 무기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20절의 ‘천연 소다’는 세척 등에 쓰이던 알칼리성 물질을 가리킵니다. 식초처럼 산성을 띤 물질과 만나면 반응이 일어나 본래의 성질이나 용도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두 물질의 정확한 화학적 반응을 상세히 설명하는 것이 중심은 아닙니다. 서로 맞지 않는 것을 함께 놓았을 때 생기는 부적절한 결과를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원수의 머리 위에 숯불을 퍼 놓는다는 말
21절에서는 잠언의 가르침이 놀라운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너를 미워하는 이가 배고프면 그에게 빵을 먹여라. 그가 목마르면 물을 마시게 하여라.잠언 25:21 · 본디새김
여기서 스승은 단순히 원수를 미워하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구체적인 도움을 베풀라고 명령합니다. 이것은 감정적인 화해의 선언보다 실제적인 행동에 가깝습니다.
그 사람은 여전히 나를 미워할 수 있습니다. 아직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배고프고 목마르다면, 그 필요에 반응하라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은 원수가 변해야만 선을 행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상대의 태도와 별개로 자신이 해야 할 바른 행동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22절은 매우 낯선 표현으로 이어집니다.
네가 그의 머리 위에 숯불을 퍼 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와야훼가 네게 갚아 줄 것이다.잠언 25:22 · 본디새김
숯불은 복수인가, 부끄러움인가
불붙은 숯불은 고통과 위험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렇다면 스승은 원수에게 친절하게 행동하여 결국 더 큰 고통을 받게 하라는 뜻일까요?
이 표현에는 몇 가지 해석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원수가 예상하지 못한 호의를 받고 부끄러움을 느끼거나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상황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경우 숯불은 양심의 고통이나 회개의 계기를 나타내는 강한 이미지가 됩니다.
다른 하나는 숯불이 심판이나 고통을 상징한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원수에게 선을 베풀면 그 사람이 저지른 악이 더욱 분명히 드러나고, 판단은 하나님께 맡겨진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또한 숯불을 통해 회복이나 화해의 가능성을 나타낸다고 설명하는 길도 있지만, 이 구절 자체에는 그러한 의미를 확정할 만한 설명이 없습니다.
따라서 숯불의 의미를 어느 하나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21절이 명령하는 행동은 원수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이 아니라, 그를 먹이고 마시게 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해석의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22절을 원수에게 더 큰 고통을 주기 위해 친절을 이용하라는 교묘한 복수의 기술로 읽는 것은 앞의 명령과 긴장을 일으킵니다. 진심으로 먹이고 마시게 하는 행동을 단순한 보복의 수단으로 바꾸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야훼가 갚아 주신다는 것
마지막 문장 「여호와야훼가 네게 갚아 줄 것이다」는 인간의 행동과 하나님의 판단을 구별합니다. 본문은 원수에게 선을 행한 사람이 받게 될 보상의 구체적인 형태를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의미 없는 일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사람이 원수에게 선을 행하는 일은 때로 아무런 인정도 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원수는 고마워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잠언은 그 행동의 가치를 원수의 반응에만 맡기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가 그 일을 아시고 갚아 주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원수의 감정을 조종하는 태도와 다릅니다. 상대가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어도, 자신이 해야 할 바른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가 행한 악을 선하다고 선언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가 악을 행했다는 이유로 악한 행동을 선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가 배고프다면 빵을 주고, 목마르다면 물을 주는 것.
잠언은 추상적인 감정의 변화보다 이러한 구체적인 행동을 먼저 보여줍니다.
조금 더 깊이
이 말씀은 출애굽기 23:4–5의 원수에게 속한 짐승이 곤경에 처했을 때 도와야 한다는 명령과 연결됩니다. 원수라는 관계가 그 사람의 필요를 무시할 정당한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두 본문은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신약의 로마서 12:20은 잠언 25:21–22를 직접 인용합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원수에게 보복하지 말고 악을 선으로 이기라는 권고 속에 배치합니다(로마서 12:17–21). 이 후대의 인용은 숯불의 모든 상징적 의미를 확정해 주지는 않지만, 본문을 상대에게 실제적인 선을 행하라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바람과 다툼, 먼 곳에서 온 좋은 소식
뒤에서 하는 말이 얼굴을 바꾼다
북풍은 비를 낳고, 뒤에서 헐뜯는 혀는 성난 얼굴을 낳는다.잠언 25:23 · 본디새김
이 구절에는 자연현상과 인간관계가 나란히 놓입니다. 비유의 목적은 어떤 행동이 결과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뒤에서 하는 말은 당사자가 없는 곳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결국 사람의 얼굴에 나타납니다.
비밀스럽게 행한 말이 공개적인 분노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말은 일단 입에서 나오면 자신이 예상하지 못한 경로를 따라 다른 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이 가져오는 감정과 갈등은 자신이 통제하기 어렵습니다.
지붕 모퉁이가 더 낫다는 과장
24절은 매우 구체적이고 다소 익살스러운 장면을 보여줍니다.
지붕 모퉁이에 사는 것이 다투기 좋아하는 아내와 한집에 사는 것보다 낫다.잠언 25:24 · 본디새김
고대 이스라엘의 집에는 평평한 지붕이 있었고, 지붕은 생활공간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붕의 좁은 모퉁이가 편안한 주거 공간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스승은 그 불편한 장소가 다툼으로 가득한 집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이는 가정에서 계속되는 갈등이 얼마나 사람을 지치게 하는지 보여주는 과장된 비교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읽을 때는 표현이 가진 성별적 관점도 살펴야 합니다. 잠언의 많은 가르침은 남성 제자를 대상으로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다투기 좋아하는 아내를 남편의 관점에서 묘사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여성이 다투기 좋아한다거나, 가정의 불화가 언제나 아내에게서 비롯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의 교훈을 성별 일반화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핵심은 가정이라는 공간의 가치가 단지 건물의 크기와 편안함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좋은 집에 살아도 그 안에서 끝없는 다툼이 이어진다면, 그곳은 더 이상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가정의 갈등을 일방적으로 참고 견디라고 강요하거나, 관계를 함부로 버리라는 명령도 아닙니다. 좁은 지붕 모퉁이라는 극단적인 비교를 통해 평화를 잃은 생활공간의 고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친 사람에게 닿는 찬물
25절에서는 분위기가 다시 달라집니다.
먼 땅에서 온 좋은 소식은 지친 이에게 닿는 찬물과 같다.잠언 25:25 · 본디새김
오랫동안 더위와 갈증에 시달린 사람이 찬물을 마시는 장면을 떠올려 봅니다. 그 물은 단지 입을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지친 몸에 활력을 줍니다.
여기서 ‘먼 땅’이라는 표현은 기다림과 불확실성을 암시합니다.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 일은 비교적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이나 사건에 관한 소식은 오래 기다려야 할 수 있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걱정이 커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좋은 소식이 도착하면 마음이 새롭게 살아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13절에서는 충실한 전령이 추수하는 날 눈의 서늘함과 같았습니다. 이번에는 먼 곳에서 온 좋은 소식이 지친 사람에게 닿는 찬물과 같습니다. 두 구절 모두 멀리 떨어진 사람들 사이에서 소식이 전달되는 일과 회복을 연결합니다.
좋은 소식은 단지 정보가 아닙니다. 그 소식을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위로와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소식이 제 역할을 하려면 충실한 전달자가 필요합니다. 소식의 내용이 중요하지만, 그 말을 정확하고 책임 있게 전달하는 사람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말은 반드시 화려한 말일 필요가 없습니다. 때로는 오래 기다리던 진실한 소식 한마디가 지친 사람에게 찬물처럼 다가옵니다.
조금 더 깊이
23절의 히브리어 동사는 무엇인가를 일으키거나 낳는 움직임을 표현합니다. 북풍이 비를 몰아내는 것으로 읽는 번역도 있지만, 본디새김은 두 행이 각각 결과를 만들어 내는 병행 구조를 이루는 것으로 읽었습니다. 여기서 북풍이 언제나 비를 가져온다는 보편적인 기상 법칙을 주장한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흐려진 샘과 어려운 영예의 문제
의로운 사람이 왜 샘에 비유되는가
악한 이 앞에서 흔들리는 의로운 이는 흙탕물이 된 샘과 더럽혀진 물의 근원과 같다.잠언 25:26 · 본디새김
샘은 사람에게 물을 제공합니다. 특히 물이 귀한 지역에서 깨끗한 샘은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이 아닙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생명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자원이 됩니다.
그런데 그 샘이 흙탕물로 변하거나 오염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사람들은 물이 있는 곳을 알고 그곳에 찾아갔지만, 정작 필요한 물을 얻기 어려워집니다.
잠언은 악한 사람 앞에서 흔들리는 의로운 사람을 이와 같은 샘에 비유합니다.
밀려난 것인가, 굽힌 것인가
여기서 ‘흔들리는(מוֹ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는 미끄러지거나 휘청이고, 안정된 자리에서 움직이는 모습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의로운 사람이 어떻게 흔들렸는가입니다.
한 가지 읽기는 악한 사람에게 억압받아 자신의 자리를 잃거나 밀려나는 상황입니다. 이 경우에는 악한 사람의 힘 때문에 의로운 사람이 사회적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모습이 됩니다.
다른 읽기는 의로운 사람이 악한 사람 앞에서 지켜야 할 원칙을 포기하거나 굽히는 상황입니다. 이 경우에는 압력이나 유혹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지키지 못하는 모습이 됩니다.
히브리어 표현은 이 두 가능성을 명확하게 구별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본문이 반드시 의로운 사람의 도덕적 타락만을 가리킨다고 단정하거나, 반대로 그가 순전히 외부의 폭력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고 확정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비유가 전달하는 결과는 분명합니다. 깨끗한 물을 기대했던 사람들이 더 이상 그 물을 신뢰하기 어려운 상황이 된다는 것입니다.
의로운 사람은 단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의 바른 판단과 행동은 공동체에도 유익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악한 사람의 영향으로 그 역할이 흔들리면 주변 사람들까지 영향을 받습니다.
이것은 의로운 사람이 피해를 입었을 때 그에게 책임을 돌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특히 악한 사람에게 억압당한 사람을 오염된 샘이라고 낙인찍는 것은 이 비유를 부당하게 적용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의로움의 공적인 가치가 훼손되는 상황을 물의 이미지로 보여줍니다.
11절에서는 바른 말이 아름다운 금 장식이었습니다. 25절에서는 좋은 소식이 찬물이었습니다. 26절에서는 의로움이 깨끗한 샘과 연결됩니다. 이 비유들을 함께 보면 지혜로운 사람의 말과 행동은 자신에게만 유익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필요한 자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꿀을 많이 먹는 일과 영예를 살피는 일
27절은 이 장에서 해석이 가장 어려운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꿀을 많이 먹는 것은 좋지 않다. 그들의 영예를 살피는 것은 영예다.잠언 25:27 · 본디새김
첫 문장은 분명합니다. 16절에서 이미 나왔던 과도한 꿀 섭취에 관한 경고입니다. 그러나 둘째 문장의 뜻은 쉽지 않습니다. 히브리어에는 ‘살피다’, ‘그들의 영예’, ‘영예’라는 표현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으며, 앞뒤 문장의 논리적 관계도 압축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는 몇 가지 길이 있습니다. 첫째, 지나치게 자신의 영예를 추구하는 것을 경계하는 말로 읽을 수 있습니다. 둘째, 어려운 문제나 영예로운 것을 탐구하는 일 자체가 영예라는 긍정적인 뜻으로 읽는 길이 있습니다. 셋째, 원문이 의도적으로 압축되어 있거나 현재 전해진 본문에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이 남아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 구절을 한 가지 뜻으로 완전히 해결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25장 2절에서는 하나님의 영예와 왕의 영예가 등장했고, 왕은 일을 살피는 사람으로 묘사되었습니다. 27절에서도 다시 영예와 살피는 일이 연결되어 나타납니다. 이 반복이 처음과 끝을 의도적으로 연결하기 위한 것인지는 확정할 수 없지만, 이 장에서 영예와 탐구가 중요한 주제라는 점은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앞의 여러 잠언을 생각하면 영예라는 말의 무게가 달라집니다. 왕의 영예는 일을 성실하게 살피는 데 있고, 왕좌는 정의로 세워져야 합니다. 사람은 스스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여 명예를 얻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27절의 정확한 뜻이 불확실하더라도, 이 장 전체가 영예를 단순히 다른 사람에게 높임받는 상태로 이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영예는 바른 판단과 책임, 적절한 행동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만 27절 자체가 이 모든 내용을 명시적으로 요약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아야 합니다.
본문이 남겨 둔 불확실성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이 장의 첫 가르침, 곧 인간이 모든 것을 다 헤아릴 수는 없다는 사실과도 어울립니다.
조금 더 깊이
26절의 ‘흔들리는’은 히브리어 마트입니다. 27절의 첫째 읽기는 앞행에서 꿀을 지나치게 많이 먹는 것을 좋지 않다고 했으므로, 뒷행에서도 지나치게 명예를 추구하는 태도를 경고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는 문맥에 맞추어 뒷행에도 부정적인 의미를 보충해야 합니다. 그러나 본디새김의 번역 노트가 밝히듯, 히브리어 둘째 행에는 명시적인 부정어가 없습니다. 둘째 읽기의 경우에는 꿀을 과도하게 먹는 일과 지혜로운 탐구를 대조하는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해석 역시 ‘그들의 영예’라는 표현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충분히 설명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남습니다. 2절과 27절에는 ‘영예’와 ‘살피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어휘가 반복됩니다.
성벽이 없는 성읍
자기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 무너져 성벽이 없는 성읍과 같다.잠언 25:28 · 본디새김
잠언 25장의 마지막은 또 하나의 강렬한 이미지로 끝납니다.
성벽이 지켜 주는 것
고대의 성읍에서 성벽은 중요한 방어시설이었습니다. 성벽은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주민과 재산을 보호하고, 성읍 안의 생활이 지속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성벽이 무너졌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외부의 위협에 훨씬 쉽게 노출됩니다.
이 구절은 마음속에 욕구나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문제 삼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을 다스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은 감정이나 충동을 적절하게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성벽은 감정을 전혀 느끼지 않는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정과 욕구가 삶 전체를 무너뜨리지 않도록 지켜 주는 내적인 분별과 절제를 떠올리게 합니다.
왜 마지막에 성읍이 등장하는가
이 장은 왕들의 영예와 왕좌에 관한 말씀으로 시작했습니다. 왕은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일을 살펴야 하고, 정의를 세워야 하며, 악한 영향력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왕이 아닌 평범한 개인이 등장합니다.
그는 자기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왕이 나라를 다스릴 때에는 정의와 분별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때에도 분별과 절제가 필요합니다.
왕의 권력이 아무리 커도 정의를 잃으면 왕좌가 흔들릴 수 있습니다. 개인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자신의 충동과 행동을 다스리지 못하면 삶의 중요한 부분이 위태로워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25장을 관통하는 여러 가르침과 연결됩니다. 스스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면 공개적인 수치를 당할 수 있습니다. 이웃과 다투려는 충동을 다스리지 못하면 관계가 파괴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먹는 양을 조절하지 못하면 고통이 됩니다. 다른 사람과의 거리도 헤아릴 줄 알아야 하고, 원수에 대한 감정도 자신의 행동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구절은 단순한 절제의 교훈보다 넓은 의미를 가집니다. 자신을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은 감정이 없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의 감정과 욕구가 삶의 모든 결정을 대신하지 않도록 지혜의 경계를 세우는 일입니다.
조금 더 깊이
‘마음’으로 옮긴 히브리어 루아흐는 바람과 숨, 영, 사람의 내적인 기질이나 정신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사람의 내면적 충동과 감정을 포함하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앞 장의 마지막 장면과도 실제로 연결됩니다. 잠언 24장에서는 게으른 사람의 포도밭 돌담이 무너져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자기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의 성벽이 무너져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돌보지 않은 밭이 외부의 위험에 노출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다스리지 못한 내면이 위험에 노출됩니다.
이 장이 보여주는 하나님과 지혜의 관계
잠언 25장은 하나님의 이름을 자주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 중요한 자리에 등장하십니다. 처음에는 일을 감추시는 분으로, 나중에는 원수에게 선을 행한 사람에게 갚아 주시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처음에 잠언은 인간이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판단이 언제나 옳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상대가 잘못했다고 확신하면 즉시 다투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잠언은 그럴 때마다 자신이 모든 것을 아는 사람처럼 행동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조사해야 할 것은 조사하고, 기다려야 할 때에는 기다리며, 상대의 마음을 살펴야 할 때에는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행동의 책임을 다하되, 모든 결과와 보응을 자신의 손에 쥐려 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신다는 사실이 인간의 책임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권한과 인간의 책임을 구별할 때, 사람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더욱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잠언 25장은 아름다운 금 사과도, 시원한 찬물도 아닌, 성벽이 무너진 성읍으로 끝납니다.
성읍 안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살고 있을 것입니다. 집도 있고, 물건도 있고, 생활도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벽은 없습니다.
바깥에서 위험이 다가오면 그 성읍은 자신을 지키기 어렵습니다. 잠언은 그곳에 어떤 적군이 쳐들어오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누가 성벽을 무너뜨렸는지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의 모습을 그 성읍에 비유합니다.
처음에 왕은 나라를 살피고 정의를 세워야 했습니다. 마지막에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살피고 다스려야 합니다.
성벽이 무너진 성읍에는 아무리 귀한 것을 쌓아 놓아도 위험이 남아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