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풀어 읽기 · 26장

이 장의 자리 · 25–29장 · 히스기야 때의 잠언

지혜로운 말을 알고도 어리석게 사는 사람

잠언 26장에는 독자를 당황하게 만드는 두 구절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4절은 「어리석은 이에게 그의 어리석음에 따라 대답하지 마라」 하고, 5절은 「어리석은 이에게 그의 어리석음에 따라 대답하여라」 합니다. 한 구절은 대답하지 말라고 하고, 바로 다음 구절은 대답하라고 합니다.

어느 쪽이 옳습니까?

둘 중 하나가 잘못 기록된 것일까요? 아니면 서로 다른 상황을 설명하는 조건이 생략된 것일까요?

이 두 구절은 잠언 26장이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을 보여줍니다. 지혜로운 말이 있다고 해서, 그 말을 아는 사람이 반드시 지혜롭게 행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장에는 지혜로운 격언을 입에 올리는 어리석은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옳은 말을 알고 있지만, 그 말은 술 취한 사람의 손에 들린 가시나무처럼 위험합니다. 또 다른 사람은 실제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분별 있는 일곱 사람보다 더 지혜롭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을 해쳐 놓고 장난이었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속에 미움을 품으면서 입술로는 다정하게 말합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단순히 지식이 부족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신의 말과 행동을 바르게 판단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어리석음을 지혜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잠언 26장은 독특한 방식으로 어리석음을 묘사합니다. 긴 설명보다 짧고 기묘한 비유들이 연이어 등장합니다. 여름의 눈, 돌팔매 끈에 묶인 돌, 침상에서 돌아가는 사람, 개의 귀를 붙잡은 사람, 불에 숯을 더하는 사람, 은빛으로 덮인 질그릇이 차례로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우스꽝스럽게 보입니다. 그러나 읽다 보면 웃음이 불편해집니다. 남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며 읽다가, 자신의 말과 행동에도 비슷한 모습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장은 대체로 네 흐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1–12절에서는 어리석은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13–16절에서는 게으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속이는지, 17–22절에서는 다툼이 어떻게 퍼지는지, 23–28절에서는 다정한 말 뒤에 감추어진 미움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앞 장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을 성벽 없는 성읍에 비유했다면, 이번 장은 그 내면의 무질서가 사람의 말과 관계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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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눈과 어리석은 사람의 영예

잠언 26:1–3 본문 →

여름의 눈처럼, 추수 때의 비처럼, 어리석은 이에게 영예는 어울리지 않는다.잠언 26:1 · 본디새김

이스라엘의 여름은 대체로 건조하고, 곡식을 거두는 때에는 비가 그쳐 있어야 추수하기에 좋습니다. 그런데 여름에 눈이 오거나 추수 때 비가 내린다면 자연스럽지 않을 뿐 아니라 실제적인 어려움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 두 비유의 초점은 단순히 드문 현상이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제때에 맞지 않는 일이 가져오는 부적절함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일이 인간 사회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에게 영예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영예’는 단순히 상대를 인간적으로 존중하는 태도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가치나 능력을 인정하여 높이는 일, 특별한 지위와 영향력을 부여하는 일까지 포함할 수 있습니다. 그 자리에는 그에 걸맞은 판단과 책임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중요한 결정을 내릴 권한까지 얻었지만, 정작 그 사람에게 바른 판단이 없다면 그 영향은 자신에게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마치 때에 맞지 않는 비가 추수를 방해할 수 있듯이, 어리석은 사람에게 주어진 권력과 영예는 다른 사람들의 삶에도 어려움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것은 능력이 부족한 사람을 무시하라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잠언에서 어리석음은 단순한 지능이나 교육 수준의 부족보다,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판단을 고집하는 태도와 깊게 연결됩니다. 따라서 1절은 사람의 존엄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영예와 책임을 맡길 때 필요한 분별에 관한 말씀입니다.

까닭 없는 저주는 어디로 가는가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새처럼, 날아가는 제비처럼, 까닭 없는 저주도 그에게 닥친다.잠언 26:2 · 본디새김

히브리어 자음 본문에는 로, 곧 ‘아니다’라는 부정 표현이 전해집니다. 이를 따르면 까닭 없는 저주는 날아다니는 새처럼 목적지에 내려앉지 않는다는 의미가 됩니다. 반면 전통적인 낭독 전승은 로, 곧 ‘그에게’라는 표현을 제시합니다. 본디새김은 이 읽기를 따랐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읽으면 저주가 누구에게 닥치는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저주를 받은 사람인지, 저주를 내뱉은 사람인지, 앞 구절의 어리석은 사람인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근거로 부당한 저주가 반드시 특정한 사람에게 돌아온다거나, 반대로 어떤 경우에도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한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두 전승에서 공통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까닭 없는 저주와 정처 없이 움직이는 새가 연결된다는 점입니다. 저주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나 그 말이 지닌 위협이 곧 정당한 힘을 가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잠언이 강조하는 지혜의 방향에서 보면, 누군가의 저주를 두려워하기 전에 그것이 정당한 근거를 가진 말인지 분별해야 한다는 문제를 생각하게 합니다.

채찍과 재갈, 그리고 어리석음

말에게는 채찍이, 나귀에게는 재갈이, 어리석은 이들의 등에는 매가 알맞다.잠언 26:3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오늘날 독자에게 거칠게 들릴 수 있습니다. 스승의 말을 듣고 스스로 행동을 바로잡는 사람과, 가르침을 거부하여 외부의 강한 제재가 있어야만 행동을 멈추는 사람을 대비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말과 나귀에 사용되는 도구는 그 동물의 움직임을 통제하기 위한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부드러운 가르침만으로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는 고대의 징계 관념이 여기에 나타납니다.

그러나 본문이 실제적인 매를 언급한다는 사실과, 현대 사회에서 신체적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이 구절은 처벌의 방법이나 한계를 규정하는 법률이 아니며, 누군가를 어리석다고 판단했다는 이유로 폭력을 행사할 권한을 주지도 않습니다. 문맥에서 중요한 것은 어리석음이 단지 설명을 듣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을 만큼 완고해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에게 강하게 대응해야 합니까, 아니면 대응하지 말아야 합니까?

대답하지 마라. 그러나 대답하여라

잠언 26:4–5 본문 →

어리석은 이에게 그의 어리석음에 따라 대답하지 마라. 너도 그와 같아지지 않도록 하여라.잠언 26:4 · 본디새김
어리석은 이에게 그의 어리석음에 따라 대답하여라. 그가 자신을 지혜롭다고 여기지 않도록 하여라.잠언 26:5 · 본디새김

원문에서 두 구절의 앞부분, ‘그의 어리석음에 따라’는 같은 표현입니다. 같은 표현을 사용하면서 하나는 금지하고 다른 하나는 명령합니다. 독자가 무엇이 지혜로운 대응인지 직접 판단하도록 만드는 배열입니다.

어리석음에 따라 대답하지 말아야 할 때

어떤 사람이 조롱하고 무례하게 말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말에 똑같은 조롱으로 응수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처음에는 자신의 정당함을 지키려는 행동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의 방식에 휘말려 자신도 같은 종류의 말을 하게 됩니다.

그 결과가 4절의 마지막 문장 「너도 그와 같아지지 않도록 하여라」에 나타납니다. 여기서 위험한 것은 단순히 논쟁에서 지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의 어리석음에 반응하는 동안 자기 자신의 말과 행동까지 어리석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말에는 대답하지 않는 것이 지혜로울 수 있습니다. 상대가 의도적으로 모욕하거나, 진실을 확인할 생각 없이 계속 다투려 한다면, 그가 만들어 놓은 논쟁의 방식에 들어가지 않는 편이 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답해야 할 때도 있다

5절은 반대편의 위험을 보여줍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터무니없는 주장을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아무도 그 주장에 대답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말이 옳기 때문에 모두 침묵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특히 그 말을 듣는 다른 사람들이 있다면 문제가 더 커질 수 있습니다. 잘못된 주장이 아무런 반박 없이 남아 마치 타당한 판단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에는 그 어리석음이 무엇인지 드러내는 대답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상대를 조롱하거나 굴욕을 주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주장이 왜 잘못되었는지 분명하게 보여주어, 자신을 지나치게 지혜롭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돕는 것입니다.

두 명령 사이에는 정답이 미리 적혀 있지 않다

4절은 사적인 상황에만, 5절은 공개적인 상황에만 적용된다고 원문이 직접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구분은 실제 적용을 위한 한 가지 유용한 판단일 수 있지만, 본문에 명시된 조건은 아닙니다. 본문이 명시적으로 알려주는 것은 서로 다른 두 위험입니다.

대답하면 자신도 어리석은 사람처럼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답하지 않으면 상대가 자신을 지혜롭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 둘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따라서 잠언은 여기서 모든 상황에 적용되는 단 하나의 규칙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황에 맞는 판단을 요구합니다.

지혜는 적절한 격언을 기억하는 능력만이 아니라, 어떤 순간에 그 격언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두 구절 가운데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골라 사용한다면, 그 사람은 바로 이 잠언이 경계하는 어리석음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상대에게 대답하기 싫을 때는 4절을 인용하고, 상대를 공격하고 싶을 때는 5절을 인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잠언은 자신의 편의를 정당화하라고 주어진 말이 아닙니다. 자신이 어리석은 방식으로 반응하고 있지는 않은지, 또는 필요한 때에 진실을 말할 책임을 피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하는 가르침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의 손과 입

잠언 26:6–10 본문 →

자신의 두 발을 잘라 내는 사람

어리석은 이의 손을 거쳐 말을 보내는 이는 제 두 발을 잘라 내고 폭력을 마시는 격이다.잠언 26:6 · 본디새김

고대에는 전령을 통해 명령이나 소식을 전달하는 일이 중요했습니다. 전달자가 말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거나 왜곡하면, 그를 보낸 사람에게 큰 피해가 생길 수 있었습니다.

전령에게 말을 맡기는 것은 그가 자신의 말과 뜻을 다른 장소까지 가져가 주기를 기대하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전령을 선택하면 오히려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을 망가뜨리는 셈이 됩니다. ‘폭력을 마신다’는 표현도, 자신이 선택한 사람 때문에 피해를 입고 그 결과를 스스로 감당하게 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잠언에서 어리석은 사람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에게 중요한 일을 맡기는 사람의 판단도 문제입니다. 앞 장에서는 충실한 전령이 자신을 보낸 사람의 기운을 되살리는 존재로 묘사되었습니다(잠언 25:13). 전령의 역할은 같지만 신뢰성과 판단에 따라 결과가 정반대가 됩니다.

입에 있는 격언이 왜 무용할까

다리를 저는 이의 두 다리가 축 늘어져 있듯, 어리석은 이들의 입에 있는 격언도 그렇다.잠언 26:7 · 본디새김
어리석은 이들의 입에 있는 격언은 술 취한 이의 손에 들린 가시나무와 같다.잠언 26:9 · 본디새김

두 구절 모두 ‘어리석은 이들의 입에 있는 격언’을 이야기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지혜로운 격언을 알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좋은 말을 외우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격언이 그의 입에 있다고 해서 실제로 지혜롭게 사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7절에서는 축 늘어진 다리로 비유합니다. 고대의 비유가 신체장애를 무력함의 이미지로 사용하는 방식은 오늘날 독자에게 불편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실제로 다리를 저는 사람이 도덕적으로 부족하다는 뜻을 끌어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이 비교하는 것은 사람의 존엄이 아니라, 기대한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는 모습입니다.

9절에서는 더욱 위험한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가시나무는 날카로워서 사람을 찌르거나 다치게 할 수 있습니다. 술에 취한 사람은 그것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해칠 수 있습니다.

7절의 격언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면, 9절의 격언은 오히려 위험을 일으킬 수 있는 모습입니다. 지혜로운 말을 잘못 사용하는 사람은 단지 유익을 주지 못하는 데서 끝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말로 다른 사람을 해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난 중에 있는 사람에게 그 고난이 모두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는 격언을 성급하게 적용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말이 일반적으로 어떤 상황에 적용될 수 있는 지혜를 담고 있더라도, 실제로 그 사람이 겪는 고난의 원인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적용한다면 부당한 판단이 될 수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보여주는 문제가 이와 닮아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인간의 삶에 관한 여러 전통적인 지혜를 말하지만, 욥의 실제 처지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그에게 죄를 인정하라고 압박합니다. 욥기 42:7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그들의 말이 옳지 않았다고 책망하십니다.

이것은 잠언이 틀렸다는 말이 아닙니다. 옳은 말도 잘못된 자리에서 사용하면 사람을 해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4–5절의 상반된 명령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돌팔매 끈에 돌을 묶어 두면

돌팔매 끈에 돌을 묶어 두는 것처럼, 어리석은 이에게 영예를 주는 것도 그렇다.잠언 26:8 · 본디새김

고대의 돌팔매는 끈 사이에 돌을 놓고 휘두르다가 한쪽 끈을 놓아 돌을 날리는 무기였습니다. 그런데 돌을 끈에 단단히 묶어 둔다면 돌이 제대로 날아가지 못하고, 돌팔매의 본래 기능이 방해받을 수 있습니다. 이 읽기에서는 어리석은 사람에게 영예를 주는 일이 도구를 엉뚱하게 사용하는 것처럼 부적절하다는 뜻이 됩니다.

분명한 것은 영예가 적절하지 않은 대상에게 주어질 때 생기는 부조화입니다. 이것은 1절과 연결됩니다. 어리석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영예는 여름의 눈처럼 제자리에 놓이지 않은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의 입에 있는 격언이 무용하거나 위험하다는 말씀 사이에, 그에게 영예를 주는 일이 부적절하다는 경고가 들어 있습니다. 누군가가 지혜로운 말을 잘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말을 잘 인용하는 능력과, 그 말에 따라 바르게 판단하는 능력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10절은 왜 번역이 어려운가

큰 이는 모든 것을 만들어 내고, 어리석은 이를 고용하고 지나가는 이들을 고용한다.잠언 26:10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잠언 26장에서 특별히 어려운 문장입니다. 한 가지 읽기는 위대한 사람이나 숙련된 사람이 일을 이루는 모습과, 어리석은 사람이나 지나가는 사람을 함부로 고용하는 모습을 대비하는 것입니다. 다른 읽기는 무분별하게 화살을 쏘아 사람을 다치게 하는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을 고용하는 사람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디새김의 문면을 바탕으로 ‘큰 이’가 정확히 누구이고 왜 모든 것을 만들어 내는지, 고용하는 주체가 누구인지 확정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앞뒤 문맥을 보면 어리석은 사람에게 책임을 맡기는 문제와 관련될 가능성은 있습니다. 6절에서 이미 어리석은 전령을 선택하는 위험을 경고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맥상의 가능성과 본문 자체에서 확실히 확인되는 의미는 구별해야 합니다.

모든 문장을 매끄러운 교훈 하나로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원문이 허락하지 않는 확신을 만들어 낼 필요는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8절의 원문 표현에는 해석상 불확실성이 있습니다. ‘돌을 묶다’는 말과 ‘돌팔매’를 가리키는 표현의 이해에 따라 돌무더기와 작은 돌을 비교하는 읽기도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돌이 반드시 손을 다치게 한다거나 특정한 방식으로 되돌아온다는 세부 장면을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사무엘상 17:49에서도 다윗이 돌팔매를 사용합니다. 10절 원문에는 라브, 크거나 많은 것, 메홀렐, 만들어 내거나 상처 입히는 등의 뜻으로 해석되는 형태, 그리고 두 번 반복되는 ‘고용하다’에 관한 표현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 단어들이 어떤 문장 관계를 이루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화살을 쏘는 사람으로 읽는 쪽에서는 분별 없이 사람에게 책임을 맡기는 행동이 주변에 무차별적인 피해를 일으킬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이 두 읽기는 첫 행의 어휘를 서로 다르게 이해하므로, 단순히 같은 문장의 표현 차이로 볼 수 없습니다. 칠십인역도 이 구절을 어리석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는다는 내용에 가깝게 옮겨, 히브리어 본문을 하나의 분명한 방식으로 해석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토한 것으로 돌아가는 개

잠언 26:11–12 본문 →

개가 제가 토한 것으로 돌아가듯, 어리석은 이는 제 어리석음을 되풀이한다.잠언 26:11 · 본디새김

토했다는 것은 몸이 받아들였던 것을 다시 밖으로 내보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개는 바로 그곳으로 돌아갑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반복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잘못된 판단을 한 번 내리는 사람으로만 묘사되지 않습니다. 이미 겪었던 잘못을 다시 반복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전의 행동 때문에 불편한 결과를 겪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험이 새로운 판단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본문은 그 이유를 심리적으로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어리석은 사람이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되돌아간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사람은 경험만으로 반드시 지혜로워지지 않습니다.

경험을 바르게 해석하고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그 과정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경험했던 결과와 관계없이 같은 행동으로 되돌아갑니다.

12절은 그보다 더 심각한 인물을 등장시킵니다.

너는 자신을 지혜롭다고 여기는 사람을 보았느냐? 그보다는 어리석은 이에게 희망이 더 있다.잠언 26:12 · 본디새김

지금까지 어리석은 사람은 우스꽝스럽고 위험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스승은 그보다 더 희망이 적은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을 가능성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이미 지혜롭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일 이유를 느끼지 못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말을 들어도 그것을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을 설명하는 데에도 지혜로운 격언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12절은 앞선 모든 비유를 읽는 독자 자신을 향한 질문이 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을 보며 웃고 있는 자신은 어떻습니까? 그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확신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신이 어리석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닫아 버리는 순간, 지혜를 배울 수 있는 문도 닫힐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가르치다가, 마지막에는 독자가 자신을 지혜롭다고 확신하는 태도 자체를 돌아보게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잠언 26:11의 개가 토한 것으로 돌아가는 이미지는 베드로후서 2:22에서 직접 인용됩니다. 그곳에서는 한때 잘못된 길에서 벗어났다가 다시 그 길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설명하는 데 이 격언이 사용됩니다. 이 후대의 적용은 잠언의 비유가 단순히 실수를 반복한다는 뜻을 넘어, 자신이 벗어나야 할 잘못된 삶으로 다시 돌아가는 문제를 표현하는 데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또 잠언 26장에는 여호와야훼나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잠언 전체에서 지혜의 근본은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데 있습니다(잠언 1:7; 9:10).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자신의 판단이 언제나 옳지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를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잠언 16:2에서는 사람의 모든 길이 자신의 눈에는 깨끗해 보여도 여호와야훼께서 영들을 저울질하신다고 말합니다. 잠언 21:2에서도 사람의 길은 자신의 눈에 올바르게 보이지만 여호와야훼께서 마음을 저울질하신다고 합니다.

침상에서만 부지런한 사람

잠언 26:13–16 본문 →

13절부터는 어리석은 사람의 또 다른 모습이 등장합니다.

게으른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스승이 게으름을 추상적으로 정의하지 않습니다. 거리의 사자, 침상에서 돌아가는 사람, 그릇에 손을 넣은 사람, 그리고 자신을 지혜롭다고 여기는 사람, 네 가지 장면을 차례로 보여줍니다. 네 장면은 우스꽝스럽지만, 마지막으로 갈수록 웃음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광장에 사자가 있다는 사람

게으른 이가 말했다. 「길에 사자가 있다. 광장들 사이에 사자가 있다.」잠언 26:13 · 본디새김

이스라엘 땅에 사자가 살았다는 사실은 구약의 여러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게으른 사람이 말하는 사자는 실제로 나타났다고 확인된 존재가 아닙니다. 이 잠언은 자신의 일을 피하려고 극단적인 위험을 내세우는 사람의 모습을 풍자합니다.

광장은 사람들이 다니고 생활하는 공간입니다. 그곳에 위험한 사자가 나타났다는 말은 밖으로 나가는 일 전체를 불가능한 것처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는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다고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신중하고 현실적인 판단을 내렸다는 듯이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게으름의 교묘한 모습입니다.

물론 실제로 위험한 상황에서 몸을 피하는 것은 지혜로운 행동입니다. 문제는 위험을 바르게 판단하는 일이 아니라, 위험을 핑계로 모든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입니다.

문은 돌아가지만 앞으로 가지 않는다

문은 제 경첩 위에서 돌고, 게으른 이는 제 침상 위에서 몸을 돌린다.잠언 26:14 · 본디새김

문은 열리고 닫히며 경첩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아무리 많이 움직여도 문은 제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게으른 사람도 침상 위에서 이쪽으로 돌아눕고 저쪽으로 돌아눕습니다. 그러나 그는 침상에서 일어나 해야 할 일을 시작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스승은 움직임과 실제적인 진전을 구별합니다. 바쁘게 움직이지만 중요한 일은 하나도 진전시키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문이 경첩 위에서 아무리 많이 돌아도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듯, 행동의 모양만 있다고 해서 삶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손을 입으로 가져오기도 귀찮은 사람

게으른 이는 그릇에 손을 파묻고, 그 손을 제 입으로 다시 가져오기조차 힘겨워한다.잠언 26:15 · 본디새김

이 장면은 노동을 조금 덜 하려는 사람보다 훨씬 극단적인 인물을 보여줍니다. 자신이 원하는 음식을 먹는 일마저 귀찮아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이것은 실제로 몸을 움직이기 어려운 사람의 질병이나 장애를 설명하는 말이 아닙니다. 행동하기 싫어하는 태도를 우스꽝스럽게 과장한 풍자입니다.

13절에서는 밖에 나가지 못하는 이유를 말하고, 14절에서는 침상 위에서만 몸을 움직이며, 15절에서는 자신의 손을 입으로 가져오는 일조차 힘들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삶에 필요한 행동을 점점 더 작은 일까지 회피하는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마지막 구절은 예상을 뒤집습니다.

그는 자신이 지혜롭다고 생각한다

게으른 이는 분별 있게 대답하는 일곱 사람보다 자기가 더 지혜롭다고 여긴다.잠언 26:16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앞선 세 장면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게으른 사람은 자신이 게으르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일곱 사람’은 상황에 맞게 판단하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본문은 그의 속마음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앞선 세 장면을 생각하면 자신의 행동하지 않음을 계속 정당화하는 태도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밖에 나가서 일할 때 그는 사자가 있다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일을 시작할 때 그는 침상에 머무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더 신중하고 현명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말이 너무 많아지면, 다른 사람의 바른 조언조차 받아들이지 않게 될 수 있습니다. 12절에서는 자신을 지혜롭다고 여기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보다 희망이 적다고 했습니다. 16절에서는 게으른 사람이 바로 그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일할 능력이 아니라, 자신의 상태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분별일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일곱 사람’은 실제로 일곱 명을 가리킬 수도 있지만, 많은 사람 또는 충분히 갖추어진 증언과 판단을 강조하는 수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개의 귀를 붙잡는 사람과 장난이라는 변명

잠언 26:17–19 본문 →

남의 다툼에 왜 화를 내는가

지나가다가 자기와 상관없는 다툼에 격분하는 이는 개의 두 귀를 움켜잡는 이와 같다.잠언 26:17 · 본디새김

그는 원래 다툼의 당사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남의 다툼을 보고 자신이 격분하며 끼어듭니다. 개의 귀를 갑자기 붙잡으면 개가 공격받는다고 느껴 물거나 강하게 저항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행동입니다.

그저 지나가던 사람이 어느 순간 다툼의 한가운데로 들어가 분노하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사람은 어떤 사건의 전모를 알지 못하면서도 한쪽의 말을 듣고 화를 낼 수 있습니다. 누가 먼저 잘못했는지, 왜 갈등이 시작되었는지 알지 못한 채 자신도 공격적인 행동을 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모든 종류의 제삼자 개입을 금지하는 말씀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잠언 24:11에서는 죽음으로 끌려가는 사람을 건져 내라고 명령합니다. 다른 사람이 부당한 폭력을 당하고 있는데도 자신과 관계없는 일이므로 외면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위기에 처한 사람을 돕기 위해 행동하는 것과, 사건을 충분히 알지 못하면서 자신의 분노에 휩쓸려 다툼을 키우는 것은 다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갈등에 끼어들 것인지뿐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위해 어떤 방식으로 개입하는지 살펴야 합니다.

불똥과 화살을 쏘고 장난이었다고 말하는 사람

불똥과 화살과 죽음을 쏘아 대는 미친 사람처럼, 자기 이웃을 속이고 「내가 장난하는 것 아니냐?」 하고 말하는 사람도 그렇다.잠언 26:18–19 · 본디새김

비유의 첫 장면은 무시무시합니다. 그의 행동은 주변 사람을 심각한 위험에 빠뜨립니다. 그런데 두 번째 장면에서는 무기가 갑자기 말로 바뀝니다.

상대를 속였고, 그 때문에 상대에게 실제적인 피해가 생겼다면 나중에 장난이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그 결과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속임수를 쓸 때에는 상대가 실제로 속아 넘어가기를 바랐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에 책임져야 하는 순간에는 자신의 행동을 가벼운 농담으로 축소합니다.

자기와 상관없는 다툼에 격분하는 사람은 감정을 앞세워 위험을 만듭니다. 이웃을 속이고 장난이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행동이 가져온 위험을 가볍게 여깁니다. 둘 모두 자기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제대로 헤아리지 않습니다.

스승이 불똥과 화살을 쏘아 대는 장면을 먼저 보여주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 사람의 행동이 단순한 재미가 아니라 실제적인 피해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독자가 놓치지 않도록 합니다.

조금 더 깊이

17절의 ‘지나가다가’와 ‘격분하는’에 해당하는 표현은 히브리어에서 같은 어근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의 움직임과 격분하는 행동이 소리상으로 맞물립니다. 18절의 ‘미친 사람’이라는 표현은 현대 의학의 특정한 정신질환을 진단하는 말이 아닙니다. 위험을 헤아리지 못하고 극도로 무분별하게 행동하는 인물을 묘사하는 문학적 표현입니다.

불을 끄는 방법과 험담의 달콤함

잠언 26:20–22 본문 →

장작이 없으면 불이 꺼진다

장작이 없으면 불이 꺼지고, 험담하는 이가 없으면 다툼이 잠잠해진다.잠언 26:20 · 본디새김

여기서 ‘험담하는 이’는 단순히 다른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자리에 없는 사람에 관한 말을 옮기거나 은밀하게 헐뜯어 갈등을 확대하는 사람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는 처음에 다툼을 시작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말을 옮기고, 감정을 자극하며, 새로운 의심을 만들어 냄으로써 다툼을 계속 유지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21절에서는 다툼을 키우는 또 다른 방식이 등장합니다.

숯은 숯불을, 장작은 불을 지피고, 다투는 사람은 다툼을 지핀다.잠언 26:21 · 본디새김

두 구절은 다툼이 스스로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그것을 유지하고 확대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본문은 그 사람의 구체적인 동기를 밝히지 않지만, 그의 행동이 갈등을 더 키운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스승은 더 강한 불로 상대의 불을 이기라고 하지 않습니다. 불을 계속 타게 하는 연료를 없애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툼에 관한 정보를 무분별하게 전달하지 않고, 분노를 자극하는 말에 반응하지 않으며, 갈등을 확대하는 행동을 멈추는 것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실제로 해결해야 할 불의나 피해가 있다면 단순히 말을 멈추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이 잠언은 정당한 문제 제기까지 금하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하게 갈등을 확산시키는 행동을 겨냥합니다.

왜 험담은 맛있게 느껴질까

헐뜯는 이의 말은 게걸스레 삼켜지는 음식 같고, 그 말은 뱃속 깊숙한 곳으로 내려간다.잠언 26:22 · 본디새김

앞에서는 험담을 불의 연료에 비유했습니다. 이번에는 맛있어서 삼키고 싶은 음식에 비유합니다. 험담은 밖에서는 다툼을 키우고, 안에서는 그것을 듣는 사람의 마음에 깊이 들어갑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나쁜 소식을 듣는 일이 잘못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그런 이야기가 시작되면 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누가 누구와 다투었는지, 누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 다른 사람의 비밀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할 수 있습니다. 험담은 그러한 호기심에 호소합니다.

그리고 일단 들은 이야기는 쉽게 잊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음식이 몸속으로 들어가듯, 험담도 사람의 내면으로 깊이 스며드는 모습입니다. 어떤 사람에 관한 나쁜 이야기를 들으면,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 확인하지 않았더라도 그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스승은 험담하는 사람만 경계하지 않습니다. 그 말을 즐겁게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도 돌아보게 합니다. 험담이 계속 퍼지는 것은 말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것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20절에서는 장작이 없으면 불이 꺼진다고 했습니다. 22절에서는 그 장작이 왜 계속 공급되는지 보여주는 셈입니다.

조금 더 깊이

‘뱃속 깊숙한 곳’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표현은 몸의 안쪽 깊은 부분을 가리킵니다. 신약에서는 야고보서 3:1–12가 혀의 위험을 더욱 길게 설명합니다. 작은 혀가 큰 영향을 미치고, 같은 입에서 찬양과 저주가 나오는 모순을 지적합니다. 이는 잠언 26장의 문장을 직접 인용하는 관계라기보다, 인간의 말이 마음과 행동에서 얼마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지 보여주는 주제적 연결입니다.

은빛으로 덮인 질그릇

잠언 26:23–26 본문 →

불타는 입술과 악한 마음은 질그릇 위에 입힌 찌꺼기 섞인 은과 같다.잠언 26:23 · 본디새김

질그릇은 흙으로 만들어진 그릇입니다. 그 표면에 은빛을 내는 물질을 입히면 겉모습이 달라집니다. 그러나 표면에 입힌 것이 순수한 은이 아니라 찌꺼기가 섞인 은이라면, 그것은 겉보기만큼 귀한 재료가 아닙니다.

불타는 입술은 무엇을 뜻하는가

‘불타는 입술’은 불타거나 뜨겁게 움직이는 모습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다정한 사랑의 말인지, 강렬한 아첨인지, 혹은 다른 종류의 열정적인 말인지는 이 구절 자체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본문에서 더 분명한 것은 그 입술과 함께 등장하는 ‘악한 마음’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말의 열정과 마음의 실제 상태가 서로 어긋나 있습니다.

미워하는 이는 제 입술로 본모습을 감추고, 제 속에는 속임수를 담아 둔다.잠언 26:24 · 본디새김

23절의 비유가 24절에서 현실적인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여기서 입술은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숨기는 도구가 됩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말은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바르게 표현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자신의 말을 이용하여 실제 마음과 다른 모습을 만들어 냅니다.

그의 입술은 마치 질그릇에 입힌 은빛처럼 작용합니다. 겉으로는 아름답거나 귀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표면 아래에는 전혀 다른 것이 있습니다. 문제는 말이 아름답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아름다움이 마음속의 악을 숨기는 데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상냥한 목소리를 믿지 말라는 이유

그가 상냥한 목소리를 내더라도 그를 믿지 마라. 그의 마음에는 역겨운 것이 일곱 가지 있기 때문이다.잠언 26:25 · 본디새김

이미 24절에서 미움을 감추고 속임수를 품는 사람이 등장했습니다. 25절은 바로 그 사람의 상냥한 말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마음이 겉으로 드러난 상냥함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상대가 자신에게 친절하게 말하면 그 말을 믿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전의 행동을 통해 그 사람이 거짓과 속임수를 반복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좋은 말만 듣고 그를 신뢰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다만 누구든 상냥하게 말하면 속셈이 있다고 의심하라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잠언이 묘사하는 사람은 명시적으로 미움을 감추고 속임수를 품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경계의 근거는 상대의 말투 자체가 아니라 그의 실제 행동과 신뢰성에 있어야 합니다.

감추어진 악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미움은 속임수로 가려져도, 그의 악은 모임에서 드러난다.잠언 26:26 · 본디새김

23절에서는 그릇의 표면에 무엇인가를 입혔습니다.

24절에서는 미움을 입술로 감추었습니다.

25절에서는 상냥한 목소리로 속임수를 숨겼습니다.

그런데 26절에서는 그 감춤이 끝납니다.

‘모임’은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나 회중을 가리킵니다. 그동안 개인적인 관계에서 숨겨져 있던 악이 공동체 앞에서 밝혀지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잠언은 악을 감추는 행동이 결국 공적인 자리에서 드러날 수 있다는 도덕적 방향을 제시합니다.

겉에 입힌 은빛이 그릇의 실제 재료를 바꾸지 못하듯, 상냥한 말도 악한 마음을 선한 마음으로 바꾸지는 못합니다.

조금 더 깊이

25절의 ‘일곱 가지’가 무엇인지 잠언은 하나씩 열거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를 특정한 일곱 종류의 죄로 확정하거나, 다른 성경 본문에 나오는 일곱 항목과 반드시 대응시킬 근거는 없습니다. 일곱이라는 수가 충만함이나 완전함을 나타내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마음속에 역겨운 것이 가득하다는 강조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판 구덩이와 자신이 굴린 돌

잠언 26:27–28 본문 →

구덩이를 파는 이는 그 안에 빠지고, 돌을 굴리는 이에게는 그 돌이 돌아온다.잠언 26:27 · 본디새김

두 행동 모두 예상했던 것과 반대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 비유는 악을 행하려는 사람이 자신이 만들어 놓은 위험에 오히려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다른 사람을 해치려는 계획의 역전

구덩이를 파는 사람은 그 구덩이에 빠지려고 판 것이 아닐 것입니다. 문맥상 다른 사람을 빠뜨리려는 함정을 만드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돌을 굴리는 사람 역시 자신을 향해 돌이 돌아오기를 바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미지는 시편 7:15–16에서도 나타납니다. 그곳에서는 악한 사람이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빠지며, 자신이 저지른 악이 자기 머리 위로 돌아온다고 말합니다.

특히 이 잠언은 앞선 23–26절의 속임수와 연결됩니다. 다른 사람을 속이는 사람은 자신이 상대보다 더 영리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속임수는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만 움직이지 않습니다. 거짓말이 드러나면 자신이 쌓아 온 신뢰도 무너질 수 있습니다.

다만 이 비유를 모든 가해자가 현실에서 반드시 자신이 저지른 악과 똑같은 피해를 당한다고 주장하는 공식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26절도 모든 악행은 현실에서 반드시 공개적으로 드러나고 가해자는 반드시 처벌받는다는 무조건적인 예언은 아닙니다. 구약의 다른 본문들, 특히 시편 73편과 욥기는 악한 사람이 형통해 보이고 의로운 사람이 고통받는 현실도 깊이 다룹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삶의 모든 결과를 단순하게 설명하는 법칙이라기보다, 악한 계획 안에 이미 자기 파괴의 가능성이 들어 있다는 지혜의 관찰로 이해해야 합니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왜 피해자를 미워하는가

거짓말하는 혀는 자기가 짓누른 이들을 미워하고, 매끄러운 입은 걸려 넘어질 일을 만든다.잠언 26:28 · 본디새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피해자가 가해자를 미워하는 상황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런데 잠언은 반대 방향을 묘사합니다.

그 사람은 이미 거짓말로 상대에게 피해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 때문에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는 대신 상대를 향한 미움을 계속 품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를 죄책감이나 자기 정당화 같은 특정한 심리 과정으로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잠언은 그러한 원인을 명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동기를 하나로 확정하기보다, 자신이 피해를 입힌 사람에게도 미움을 품을 수 있다는 역설에 주목하는 편이 본문에 충실합니다.

후반부의 매끄러운 말은 듣기에 좋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거짓과 아첨에 사용된다면 상대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23절의 은빛으로 덮인 질그릇과 같은 문제입니다.

어리석음의 가장 깊은 위험

잠언 26:1–28 본문 →

잠언 26장 자체에서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지혜로운 말의 소유와 지혜로운 삶이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게으른 사람은 자신이 왜 행동하지 않는지 설명할 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웃을 속인 사람은 자신의 행동이 장난이었다고 설명합니다. 미움을 품은 사람은 상냥한 말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지혜롭다고 여기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모두 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자신의 행동을 바꾸지는 않습니다.

잠언 26장은 이처럼 어리석음의 가장 깊은 위험을 드러냅니다.

자신이 어리석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 장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사람을 다시 떠올려 봅시다. 그는 다른 사람을 향해 거칠게 소리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은 매끄럽습니다. 상대가 듣기에 좋고, 믿고 싶어지는 말을 합니다.

처음에 어리석은 사람의 입에 있던 격언은 마침내 다른 사람을 넘어뜨리는 말이 되었습니다.

잠언은 마지막에 매끄러운 입을 가진 사람을 남겨 둡니다. 그의 말은 부드럽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향하는 곳에는 걸려 넘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독자는 그 말을 듣고 두 가지를 살펴야 합니다.

자신이 듣고 있는 말이 어디로 이끄는지, 그리고 자신이 하고 있는 말은 다른 사람을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