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풀어 읽기 · 26장

이 장의 자리 · 25–29장 · 히스기야 때의 잠언

지혜로운 말을 알고도 어리석게 사는 사람

잠언 26장에는 독자를 당황하게 만드는 두 구절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한 구절은 「어리석은 사람에게 그의 어리석음에 따라 대답하지 마라」고 하고, 바로 다음 구절은 「어리석은 사람에게 그의 어리석음에 따라 대답해라」고 합니다.

어느 쪽이 옳습니까?

둘 중 하나가 잘못 기록된 것일까요? 아니면 서로 다른 상황을 설명하는 조건이 생략된 것일까요?

이 두 구절은 잠언 26장이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을 보여줍니다. 지혜로운 말이 있다고 해서, 그 말을 아는 사람이 반드시 지혜롭게 행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장에는 지혜로운 잠언을 입에 담는 어리석은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옳은 말을 알고 있지만, 그 말은 술 취한 사람의 손에 들린 가시나무처럼 위험합니다. 또 다른 사람은 실제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분별 있는 일곱 사람보다 더 지혜롭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을 해쳐 놓고 장난이었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속에 미움을 품으면서 말로는 다정하게 대합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단순히 지식이 부족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신의 말과 행동을 바르게 판단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어리석음을 지혜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잠언 26장은 독특한 방식으로 어리석음을 묘사합니다. 긴 설명보다 짧고 기묘한 비유들이 연이어 등장합니다. 여름의 눈, 돌팔매 끈에 묶인 돌, 침대에서 뒤척이는 사람, 개의 귀를 붙잡은 사람, 불에 숯을 더하는 사람, 은을 입힌 질그릇이 차례로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우스꽝스럽게 보입니다. 그러나 읽다 보면 웃음이 불편해집니다. 남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며 읽다가, 자신의 말과 행동에도 비슷한 모습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장은 대체로 네 흐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1–12절에서는 어리석은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13–16절에서는 게으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속이는지, 17–22절에서는 다툼이 어떻게 퍼지는지, 23–28절에서는 다정한 말 뒤에 감추어진 미움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앞 장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을 성벽 없는 도시에 비유했다면, 이번 장은 그 마음속의 무질서가 사람의 말과 관계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읽는 시간 36분소단락 1026장 본문 읽기 →

여름의 눈과 어리석은 사람의 영예

잠언 26:1–3 본문 →

여름의 눈과 곡식을 거둘 때의 비가 어울리지 않듯, 어리석은 사람에게 영예는 어울리지 않는다.잠언 26:1 · 두루새김

첫 구절은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날씨를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의 여름은 대체로 건조하고, 곡식을 거두는 때에는 비가 그쳐 있어야 곡식을 거두기에 좋습니다. 그런데 여름에 눈이 오거나 곡식을 거둘 때 비가 내린다면 자연스럽지 않을 뿐 아니라 실제로 어려움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 두 비유의 초점은 단순히 드문 현상이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제때에 맞지 않는 일이 가져오는 어울리지 않음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일이 인간 사회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에게 영예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영예」는 단순히 상대를 인간적으로 존중하는 태도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가치나 능력을 인정하여 높이는 일, 특별한 지위와 영향력을 주는 일까지 포함할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에게 높은 자리가 주어지면 왜 문제가 될까요? 그 자리에는 그에 걸맞은 판단과 책임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중요한 결정을 내릴 권한까지 얻었지만, 정작 그 사람에게 바른 판단이 없다면 그 영향은 자신에게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마치 때에 맞지 않는 비가 곡식을 거두는 일을 방해할 수 있듯이, 어리석은 사람에게 주어진 권력과 영예는 다른 사람들의 삶에도 어려움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것은 능력이 부족한 사람을 무시하라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잠언에서 어리석음은 단순히 지능이나 교육 수준이 낮은 것보다,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판단을 고집하는 태도와 깊게 연결됩니다. 따라서 1절은 사람의 존엄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영예와 책임을 맡길 때 필요한 분별에 관한 말씀입니다.

까닭 없는 저주는 어디로 가는가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새처럼, 날아가는 제비처럼, 까닭 없는 저주가 그에게 닥친다.잠언 26:2 · 두루새김

히브리어 자음 본문에는 로, 곧 「아니다」라는 부정 표현이 전해집니다. 이를 따르면 까닭 없는 저주는 날아다니는 새처럼 목적지에 내려앉지 않는다는 의미가 됩니다. 반면 전통적으로 소리 내어 읽어 온 전승은 로, 곧 「그에게」라는 표현을 제시합니다. 두루새김은 이 읽기를 따라 「까닭 없는 저주가 그에게 닥친다」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읽으면 저주가 누구에게 닥치는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저주를 받은 사람인지, 저주를 내뱉은 사람인지, 앞 구절의 어리석은 사람인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근거로 부당한 저주가 반드시 특정한 사람에게 돌아온다거나, 반대로 어떤 경우에도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한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두 전승에서 공통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까닭 없는 저주와 정처 없이 움직이는 새가 연결된다는 점입니다. 저주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나 그 말이 지닌 위협이 곧 정당한 힘을 가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잠언이 강조하는 지혜의 방향에서 보면, 누군가의 저주를 두려워하기 전에 그것이 정당한 근거를 가진 말인지 분별해야 한다는 문제를 생각하게 합니다.

채찍과 재갈, 그리고 어리석음

3절은 다시 어리석은 사람에게 돌아갑니다.

말에게는 채찍이, 나귀에게는 입에 물리는 재갈이, 어리석은 사람들의 등에는 매가 알맞다.잠언 26:3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오늘날 독자에게 거칠게 들릴 수 있습니다. 말과 나귀를 움직이는 도구를 언급한 뒤, 어리석은 사람의 등에 매를 연결하기 때문입니다.

스승의 말을 듣고 스스로 행동을 바로잡는 사람과, 가르침을 거부하여 밖에서 강하게 제지해야만 행동을 멈추는 사람을 대비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말과 나귀에 사용되는 도구는 그 동물의 움직임을 통제하기 위한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부드러운 가르침만으로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는 고대의 징계에 대한 생각이 여기에 나타납니다.

그러나 본문이 실제로 매를 언급한다는 사실과, 현대 사회에서 신체적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이 구절은 처벌의 방법이나 한계를 규정하는 법률이 아니며, 누군가를 어리석다고 판단했다는 이유로 폭력을 행사할 권한을 주지도 않습니다. 문맥에서 중요한 것은 어리석음이 단지 설명을 듣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을 만큼 완고해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에게 강하게 대응해야 합니까, 아니면 대응하지 말아야 합니까?

대답하지 마라. 그러나 대답해라

잠언 26:4–5 본문 →

이 두 구절은 잠언이라는 문학이 가진 특징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어리석은 사람에게 그의 어리석음에 따라 대답하지 마라. 너까지 그와 같아지지 않도록 해라.잠언 26:4 · 두루새김
어리석은 사람에게 그의 어리석음에 따라 대답해라. 그가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지 않도록 해라.잠언 26:5 · 두루새김

원문에서 두 구절의 앞부분은 같은 표현입니다. 「그의 어리석음에 따라」라는 같은 표현을 사용하면서 하나는 금지하고 다른 하나는 명령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문장 차이가 아닙니다. 독자가 무엇이 지혜로운 대응인지 직접 판단하도록 만드는 배열입니다.

어리석음에 따라 대답하지 말아야 할 때

4절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은 방식으로 반응하지 말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조롱하고 무례하게 말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말에 똑같은 조롱으로 맞받아친다면 어떻게 될까요?

처음에는 자신의 정당함을 지키려는 행동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의 방식에 휘말려 자신도 같은 종류의 말을 하게 됩니다. 그 결과는 4절의 마지막 문장 「너까지 그와 같아지지 않도록 해라」에 나타납니다.

여기서 위험한 것은 단순히 논쟁에서 지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의 어리석음에 반응하는 동안 자기 자신의 말과 행동까지 어리석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말에는 대답하지 않는 것이 지혜로울 수 있습니다. 상대가 일부러 모욕하거나, 진실을 확인할 생각 없이 계속 다투려 한다면, 그가 만들어 놓은 논쟁의 방식에 들어가지 않는 편이 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답해야 할 때도 있다

5절은 반대편의 위험을 보여줍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터무니없는 주장을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아무도 그 주장에 대답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말이 옳기 때문에 모두 침묵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특히 그 말을 듣는 다른 사람들이 있다면 문제가 더 커질 수 있습니다. 잘못된 주장이 아무런 반박 없이 남아 마치 타당한 판단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에는 그 어리석음이 무엇인지 드러내는 대답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상대를 조롱하거나 굴욕을 주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주장이 왜 잘못되었는지 분명하게 보여주어, 자신을 지나치게 지혜롭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돕는 것입니다.

두 명령 사이에는 정답이 미리 적혀 있지 않다

4절은 사적인 상황에만, 5절은 공개적인 상황에만 적용된다고 원문이 직접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구분은 실제 적용을 위한 한 가지 유용한 판단일 수 있지만, 본문에 명시된 조건은 아닙니다. 본문이 분명하게 알려주는 것은 서로 다른 두 위험입니다.

대답하면 자신도 어리석은 사람처럼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답하지 않으면 상대가 자신을 지혜롭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 둘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따라서 잠언은 여기서 모든 상황에 적용되는 단 하나의 규칙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황에 맞는 판단을 요구합니다.

지혜는 알맞은 격언을 기억하는 능력만이 아니라, 어떤 순간에 그 격언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두 구절 가운데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골라 사용한다면, 그 사람은 바로 이 잠언이 경계하는 어리석음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상대에게 대답하기 싫을 때는 4절을 인용하고, 상대를 공격하고 싶을 때는 5절을 인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잠언은 자신의 편의를 정당화하라고 주어진 말이 아닙니다. 자신이 어리석은 방식으로 반응하고 있지는 않은지, 또는 필요한 때에 진실을 말할 책임을 피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하는 가르침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의 손과 입

잠언 26:6–10 본문 →

자신의 두 발을 잘라 내는 사람

어리석은 사람에게 말을 전하게 하는 것은 자기 발을 잘라 내고 폭력을 들이마시는 셈이다.잠언 26:6 · 두루새김

고대에는 소식을 전하는 사람을 통해 명령이나 소식을 전달하는 일이 중요했습니다. 전달자가 말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거나 왜곡하면, 그를 보낸 사람에게 큰 피해가 생길 수 있었습니다.

소식을 전하는 사람에게 말을 맡기는 것은 그가 자신의 말과 뜻을 다른 장소까지 가져가 주기를 기대하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전달자를 선택하면 오히려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을 망가뜨리는 셈이 됩니다.

「폭력을 들이마시는」이라는 표현 역시 강렬합니다. 마시는 것은 보통 몸 안으로 받아들이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마시는 것이 물이나 포도주가 아니라 폭력입니다. 자신이 선택한 사람 때문에 피해를 입고, 그 결과를 스스로 감당하게 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잠언에서 어리석은 사람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에게 중요한 일을 맡기는 사람의 판단도 문제입니다. 앞 장에서는 소식을 충실하게 전하는 사람이 자신을 보낸 사람의 기운을 되살리는 존재로 묘사되었습니다(잠언 25:13). 말을 전하는 역할은 같지만 믿을 만한지, 바르게 판단하는지에 따라 결과가 정반대가 됩니다.

입에 있는 잠언이 왜 쓸모없을까

7절과 9절은 같은 문장 구조를 사용합니다.

다리를 저는 사람의 두 다리가 축 늘어진 것처럼, 어리석은 사람들이 입에 담은 잠언도 그렇다.잠언 26:7 · 두루새김
어리석은 사람들이 입에 담은 잠언은 술 취한 사람의 손에 들린 가시나무와 같다.잠언 26:9 · 두루새김

두 구절 모두 「어리석은 사람들이 입에 담은 잠언」을 이야기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지혜로운 잠언을 알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좋은 말을 외우고 있을 수 있습니다. 알맞은 때에 유명한 교훈을 인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잠언이 그의 입에 있다고 해서 실제로 지혜롭게 사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7절에서는 축 늘어진 다리에 비유합니다. 고대의 비유가 신체장애를 힘을 쓰지 못하는 모습으로 사용하는 방식은 오늘날 독자에게 불편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실제로 다리를 저는 사람이 도덕적으로 부족하다는 뜻을 끌어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이 비교하는 것은 사람의 존엄이 아니라, 기대한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는 모습입니다.

9절에서는 더욱 위험한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술 취한 사람의 손에 들린 가시나무입니다. 가시나무는 날카로워서 사람을 찌르거나 다치게 할 수 있습니다. 술에 취한 사람은 그것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해칠 수 있습니다.

7절의 잠언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면, 9절의 잠언은 오히려 위험을 일으킬 수 있는 모습입니다. 지혜로운 말을 잘못 사용하는 사람은 단지 유익을 주지 못하는 데서 끝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말로 다른 사람을 해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난 중에 있는 사람에게 그 고난이 모두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는 격언을 성급하게 적용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말이 일반적으로 어떤 상황에 적용될 수 있는 지혜를 담고 있더라도, 실제로 그 사람이 겪는 고난의 원인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적용한다면 부당한 판단이 될 수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보여주는 문제가 이와 닮아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인간의 삶에 관한 여러 전통적인 지혜를 말하지만, 욥의 실제 처지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그에게 죄를 인정하라고 압박합니다. 욥기 42:7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말이 옳지 않았다고 책망하십니다.

이것은 잠언이 틀렸다는 말이 아닙니다. 옳은 말도 잘못된 자리에서 사용하면 사람을 해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4–5절의 상반된 명령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문제는 좋은 말을 알고 있는가만이 아니라, 그 말을 어떤 상황에서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는가입니다.

돌팔매 끈에 돌을 묶어 두면

8절은 이 두 잠언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에게 영예를 주는 것은 돌팔매 끈에 돌을 묶어 놓는 것과 같다.잠언 26:8 · 두루새김

고대의 돌팔매는 끈 사이에 돌을 놓고 휘두르다가 한쪽 끈을 놓아 돌을 날리는 무기였습니다. 사무엘상 17:49에서도 다윗이 돌팔매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돌을 끈에 단단히 묶어 둔다면 어떻게 될까요? 돌이 제대로 날아가지 못하고, 돌팔매의 본래 기능이 방해받을 수 있습니다.

이 읽기에서는 어리석은 사람에게 영예를 주는 일이 도구를 엉뚱하게 사용하는 것처럼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이 됩니다. 다만 원문의 표현에는 해석상 불확실성이 있습니다. 원문에서 「돌을 묶다」(⁨צָרַר⁩)는 말과 「돌팔매」(⁨מַרְגֵּמָה⁩)를 가리키는 표현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돌무더기와 작은 돌을 비교하는 읽기도 가능합니다.

분명한 것은 영예가 어울리지 않는 대상에게 주어질 때 생기는 부조화입니다. 이것은 1절과 연결됩니다. 어리석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영예는 여름의 눈처럼 제자리에 놓이지 않은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입에 담은 잠언이 쓸모없거나 위험하다는 말씀 사이에, 그에게 영예를 주는 일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경고가 들어 있습니다. 이 배열은 한 가지 가능성을 생각하게 합니다. 누군가가 지혜로운 말을 잘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말을 잘 인용하는 능력과, 그 말에 따라 바르게 판단하는 능력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10절은 왜 번역이 어려운가

어리석은 사람이나 지나가는 사람들을 고용하는 사람은 아무나 맞히는 활잡이와 같다.잠언 26:10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잠언 26장에서 특별히 어려운 문장입니다. 원문에는 크거나 많은 것, 만들어 내거나 상처 입히는 등의 뜻으로 해석되는 형태, 그리고 두 번 반복되는 「고용하다」(⁨שָׂכַר⁩)에 관한 표현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 단어들이 문장 안에서 어떤 관계를 이루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한 가지 읽기는 위대한 사람이나 숙련된 사람이 일을 이루는 모습과, 어리석은 사람이나 지나가는 사람을 함부로 고용하는 모습을 대비하는 것입니다. 다른 읽기는 무분별하게 화살을 쏘아 사람을 다치게 하는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을 고용하는 사람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두루새김은 두 번째 읽기를 따라, 사람을 고용하는 사람을 「아무나 맞히는 활잡이」에 비유했습니다. 이 읽기에서는 분별 없이 사람에게 책임을 맡기는 행동이 주변에 무차별적인 피해를 일으킬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이 두 읽기는 첫 행의 낱말을 서로 다르게 이해하므로, 단순히 같은 문장의 표현 차이로 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두루새김의 문면은 고용하는 사람과 활잡이를 비교하지만, 원문이 반드시 이 뜻이라고 확정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앞뒤 문맥을 보면 어리석은 사람에게 책임을 맡기는 문제와 관련될 가능성은 있습니다. 6절에서 이미 어리석은 사람에게 말을 전하게 하는 위험을 경고했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그렇게 불확실성을 남겨 두는 편이 좋습니다.

토한 것으로 돌아가는 개

잠언 26:11–12 본문 →

개가 자기가 토한 것으로 돌아가듯,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어리석음을 되풀이한다.잠언 26:11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잠언 26장의 가장 불쾌하고 강렬한 이미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토했다는 것은 몸이 받아들였던 것을 다시 밖으로 내보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개는 바로 그곳으로 돌아갑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잘못된 판단을 한 번 내리는 사람으로만 묘사되지 않습니다. 이미 겪었던 잘못을 다시 되풀이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전의 행동 때문에 불편한 결과를 겪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험이 새로운 판단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본문은 그 이유를 심리적으로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어리석은 사람이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되돌아간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사람은 경험만으로 반드시 지혜로워지지 않습니다.

잘못된 선택을 경험하고, 그 결과로 어려움을 겪는다고 해서 자동으로 삶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경험을 바르게 해석하고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그 과정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경험했던 결과와 관계없이 같은 행동으로 되돌아갑니다.

12절은 그보다 더 심각한 인물을 등장시킵니다.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사람을 보았느냐? 그 사람보다는 어리석은 사람에게 더 희망이 있다.잠언 26:12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앞의 여러 어리석은 사람에 대한 묘사를 단번에 뒤집습니다. 지금까지 어리석은 사람은 우스꽝스럽고 위험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스승은 그보다 더 희망이 적은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을 가능성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이미 지혜롭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일 이유를 느끼지 못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말을 들어도 그것을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을 설명하는 데에도 지혜로운 격언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12절은 앞선 모든 비유를 읽는 독자 자신을 향한 질문이 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을 보며 웃고 있는 자신은 어떻습니까?

잠언은 지혜로운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을 쉽게 가려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경계합니다. 자신이 어리석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닫아 버리는 순간, 지혜를 배울 수 있는 문도 닫힐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가르치다가, 마지막에는 독자가 자신을 지혜롭다고 확신하는 태도 자체를 돌아보게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잠언 26:11의 개가 자기가 토한 것으로 돌아가는 이미지는 베드로후서 2:22에서 직접 인용됩니다. 그곳에서는 한때 잘못된 길에서 벗어났다가 다시 그 길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설명하는 데 이 격언이 사용됩니다. 또 잠언 26장에는 여호와야훼나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잠언 전체에서 지혜의 근본은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데 있습니다(잠언 1:7; 9:10).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자신의 판단이 언제나 옳지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를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잠언 16:2에서는 사람의 모든 길이 자신의 눈에는 깨끗해 보여도 여호와야훼께서 영들을 저울질하신다고 말하고, 잠언 21:2에서도 사람의 길은 자신의 눈에 올바르게 보이지만 여호와야훼께서 마음을 저울질하신다고 합니다.

침대에서만 부지런한 사람

잠언 26:13–16 본문 →

13절부터는 어리석은 사람의 또 다른 모습이 등장합니다.

게으른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스승이 게으름을 추상적으로 정의하지 않습니다. 네 가지 장면을 차례로 보여줍니다. 길의 사자, 침대에서 뒤척이는 사람, 그릇에 손을 넣은 사람, 그리고 자신을 지혜롭다고 여기는 사람입니다.

네 장면은 우스꽝스럽지만, 마지막으로 갈수록 웃음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광장에 사자가 있다는 사람

게으른 사람이 말한다. 「길에 사자가 있어! 광장에 사자가 있어!」잠언 26:13 · 두루새김

이스라엘 땅에 사자가 살았다는 사실은 구약의 여러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게으른 사람이 말하는 사자는 실제로 나타났다고 확인된 존재가 아닙니다. 이 잠언은 자신의 일을 피하려고 극단적인 위험을 내세우는 사람의 모습을 풍자합니다.

광장은 사람들이 다니고 생활하는 공간입니다. 그곳에 위험한 사자가 나타났다는 말은 밖으로 나가는 일 전체를 불가능한 것처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는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다고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신중하고 현실적인 판단을 내렸다는 듯이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게으름의 교묘한 모습입니다.

행동하지 않는 이유를 그럴듯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실제로 위험한 상황에서 몸을 피하는 것은 지혜로운 행동입니다. 문제는 위험을 바르게 판단하는 일이 아니라, 위험을 핑계로 모든 책임을 피하는 태도입니다.

문은 돌아가지만 앞으로 가지 않는다

문이 경첩에 달려 돌듯, 게으른 사람은 침대에서 몸을 뒤척인다.잠언 26:14 · 두루새김

문은 계속 움직입니다. 열리고 닫히며 경첩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아무리 많이 움직여도 문은 제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게으른 사람도 몸을 움직입니다. 침대 위에서 이쪽으로 돌아눕고 저쪽으로 돌아눕습니다. 그러나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해야 할 일을 시작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스승은 움직임과 실제로 앞으로 나아가는 일을 구별합니다. 사람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어떤 일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바쁘게 움직이지만 중요한 일은 하나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비유가 침대에서 쉬는 행위 자체를 비난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은 해야 할 일을 계속 피하면서 침대 위에서만 움직이는 사람을 풍자합니다. 문이 경첩에 달려 아무리 많이 돌아도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듯, 행동의 모양만 있다고 해서 삶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손을 입으로 가져오기도 귀찮은 사람

15절은 한층 더 과장된 장면을 그립니다.

게으른 사람은 그릇에 손을 넣고도, 그 손을 입으로 가져오는 일조차 힘겨워한다.잠언 26:15 · 두루새김

이 장면은 일을 조금 덜 하려는 사람보다 훨씬 극단적인 인물을 보여줍니다. 자신이 원하는 음식을 먹는 일마저 귀찮아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이것은 실제로 몸을 움직이기 어려운 사람의 질병이나 장애를 설명하는 말이 아닙니다. 행동하기 싫어하는 태도를 우스꽝스럽게 과장한 풍자입니다.

13절에서는 밖에 나가지 못하는 이유를 말합니다.

14절에서는 침대 위에서만 몸을 움직입니다.

15절에서는 자신의 손을 입으로 가져오는 일조차 힘겹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삶에 필요한 행동을 점점 더 작은 일까지 피하는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마지막 구절은 예상을 뒤집습니다.

그는 자신이 지혜롭다고 생각한다

게으른 사람은 분별 있게 대답하는 일곱 사람보다 자기가 더 지혜롭다고 여긴다.잠언 26:16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앞선 세 장면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게으른 사람은 자신이 게으르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일곱 사람」은 실제로 일곱 명을 가리킬 수도 있지만, 많은 사람 또는 충분히 갖추어진 증언과 판단을 강조하는 수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분별 있게 대답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본문은 그의 속마음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앞선 세 장면을 생각하면 자신이 행동하지 않는 것을 계속 정당화하는 태도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밖에 나가서 일할 때 그는 사자가 있다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일을 시작할 때 그는 침대에 머무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더 신중하고 현명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말이 너무 많아지면, 다른 사람의 바른 조언조차 받아들이지 않게 될 수 있습니다. 12절에서는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보다 희망이 적다고 했습니다. 16절에서는 게으른 사람이 바로 그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일할 능력이 아니라, 자신의 상태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분별일 수 있습니다.

개의 귀를 붙잡는 사람과 장난이라는 변명

잠언 26:17–19 본문 →

남의 다툼에 왜 화를 내는가

지나가다가 자기와 상관없는 다툼에 끼어들어 화를 내는 사람은 개의 두 귀를 움켜잡는 사람과 같다.잠언 26:17 · 두루새김

그는 원래 다툼의 당사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남의 다툼을 보고 자신이 화를 내며 끼어듭니다.

개의 귀를 갑자기 붙잡으면 개가 공격받는다고 느껴 물거나 강하게 저항할 수 있습니다. 그 행동은 위험합니다. 게다가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행동입니다. 이 비유가 경고하는 것은 자신과 상관없는 다툼에 감정적으로 끼어들어 스스로 위험을 만들어 내는 태도입니다.

그저 지나가던 사람이 어느 순간 다툼의 한가운데로 들어가 화를 내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사람은 어떤 사건의 전체 모습을 알지 못하면서도 한쪽의 말을 듣고 화를 낼 수 있습니다. 누가 먼저 잘못했는지, 왜 갈등이 시작되었는지 알지 못한 채 자신도 공격적인 행동을 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모든 종류의 제삼자 개입을 금지하는 말씀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잠언 24:11에서는 죽음으로 끌려가는 사람을 건져 내라고 명령합니다. 다른 사람이 부당한 폭력을 당하고 있는데도 자신과 관계없는 일이므로 외면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두 구절의 차이는 개입의 목적과 방식에 있습니다. 위기에 처한 사람을 돕기 위해 행동하는 것과, 사건을 충분히 알지 못하면서 자신의 분노에 휩쓸려 다툼을 키우는 것은 다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갈등에 끼어들 것인지뿐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위해 어떤 방식으로 개입하는지 살펴야 합니다.

불똥과 화살을 쏘고 장난이었다고 말하는 사람

18–19절에서는 더 위험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미쳐 날뛰며 불똥과 화살과 죽음을 쏘아 대는 사람처럼, 이웃을 속이고는 「그냥 장난한 것 아니냐?」라고 말하는 사람도 그렇다.잠언 26:18–19 · 두루새김

비유의 첫 장면은 무시무시합니다. 그의 행동은 주변 사람을 심각한 위험에 빠뜨립니다. 여기서 「미쳐 날뛰며」라는 표현은 현대 의학의 특정한 정신질환을 진단하는 말이 아닙니다. 위험을 헤아리지 못하고 극도로 분별없이 행동하는 인물을 묘사하는 문학적 표현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장면에서는 무기가 갑자기 말로 바뀝니다.

이 구절의 핵심은 장난이라는 말이 해를 끼친 행동을 정당화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상대를 속였고, 그 때문에 상대에게 실제적인 피해가 생겼다면 나중에 장난이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그 결과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한 행동의 의미를 뒤늦게 바꾸려 합니다. 속임수를 쓸 때에는 상대가 실제로 속아 넘어가기를 바랐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에 책임져야 하는 순간에는 자신의 행동을 가벼운 농담으로 축소합니다.

여기에 17절과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기와 상관없는 다툼에 끼어들어 화를 내는 사람은 감정을 앞세워 위험을 만듭니다. 이웃을 속이고 장난이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행동이 가져온 위험을 가볍게 여깁니다.

둘 모두 자기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제대로 헤아리지 않습니다.

스승이 불똥과 화살을 쏘아 대는 장면을 먼저 보여주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 사람의 행동이 단순한 재미가 아니라 실제적인 피해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독자가 놓치지 않도록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에서는 17절의 「지나가다가」와 「화를 내는」에 해당하는 표현이 같은 어근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의 움직임과 화를 내는 행동이 소리상으로 맞물립니다.

불을 끄는 방법과 험담의 달콤함

잠언 26:20–22 본문 →

장작이 없으면 불이 꺼진다

장작이 없으면 불이 꺼지고, 남을 헐뜯는 사람이 없으면 다툼이 잠잠해진다.잠언 26:20 · 두루새김

불은 장작이 있어야 계속 탈 수 있습니다. 연료가 공급되지 않으면 불은 점차 약해지고 꺼집니다. 이 간단한 자연현상이 인간관계의 다툼을 설명하는 비유가 됩니다.

여기서 「남을 헐뜯는 사람」은 단순히 다른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자리에 없는 사람에 관한 말을 옮기거나 남몰래 헐뜯어 갈등을 키우는 사람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는 처음에 다툼을 시작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말을 옮기고, 감정을 자극하며, 새로운 의심을 만들어 냄으로써 다툼을 계속 이어 갈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불에 장작을 더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런데 21절에서는 다툼을 키우는 또 다른 방식이 등장합니다.

숯은 숯불을, 장작은 불을 지피고, 다투기 좋아하는 사람은 다툼을 지핀다.잠언 26:21 · 두루새김

20절에서는 남을 헐뜯는 사람이 없으면 불이 꺼진다고 했습니다. 21절에서는 다투기 좋아하는 사람이 다시 불을 지핍니다. 두 구절은 다툼이 스스로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그것을 이어 가고 키울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어떤 사람은 갈등을 해결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갈등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는 듯 행동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그 사람의 구체적인 동기를 밝히지 않지만, 그의 행동이 갈등을 더 키운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스승은 더 강한 불로 상대의 불을 이기라고 하지 않습니다. 불을 계속 타게 하는 연료를 없애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툼에 관한 정보를 함부로 전달하지 않고, 분노를 자극하는 말에 반응하지 않으며, 갈등을 키우는 행동을 멈추는 것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실제로 해결해야 할 불의나 피해가 있다면 단순히 말을 멈추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이 잠언은 정당한 문제 제기까지 금하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하게 갈등을 퍼뜨리는 행동을 겨냥합니다.

왜 험담은 맛있게 느껴질까

22절은 뜻밖의 음식 비유를 사용합니다.

남을 헐뜯는 말은 사람들이 맛있게 삼키는 음식 같다. 그 말은 뱃속 깊은 곳까지 내려간다.잠언 26:22 · 두루새김

앞에서는 남을 헐뜯는 말을 불의 연료에 비유했습니다. 이번에는 맛있어서 삼키고 싶은 음식에 비유합니다. 험담은 밖에서는 다툼을 키우고, 안에서는 그것을 듣는 사람의 마음에 깊이 들어갑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나쁜 소식을 듣는 일이 잘못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그런 이야기가 시작되면 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누가 누구와 다투었는지, 누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 다른 사람의 비밀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할 수 있습니다. 험담은 그러한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그리고 일단 들은 이야기는 쉽게 잊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뱃속 깊은 곳까지」 내려간다는 이미지입니다. 히브리어의 표현은 몸의 안쪽 깊은 부분을 가리킵니다. 음식이 몸속으로 들어가듯, 험담도 사람의 마음속으로 깊이 스며드는 모습입니다.

어떤 사람에 관한 나쁜 이야기를 들으면,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 확인하지 않았더라도 그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험담은 듣는 순간에는 단지 흥미로운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다른 사람에 대한 판단과 감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스승은 남을 헐뜯는 사람만 경계하지 않습니다. 그 말을 즐겁게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도 돌아보게 합니다. 험담이 계속 퍼지는 것은 말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것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20절에서는 장작이 없으면 불이 꺼진다고 했습니다. 22절에서는 그 장작이 왜 계속 공급되는지 보여주는 셈입니다. 사람들은 험담이 해롭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이야기를 듣는 즐거움 때문에 불을 계속 지필 수 있습니다.

이제 잠언은 험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마음속의 미움을 감추기 위해 말을 사용하는 사람을 보여줍니다.

은빛으로 덮인 질그릇

잠언 26:23–26 본문 →

뜨겁게 말하는 입술과 악한 마음은 찌꺼기 섞인 은을 입힌 질그릇과 같다.잠언 26:23 · 두루새김

이 구절에는 겉과 속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질그릇은 흙으로 만들어진 그릇입니다. 그 표면에 은빛을 내는 물질을 입히면 겉모습이 달라집니다. 그러나 표면에 입힌 것이 순수한 은이 아니라 찌꺼기가 섞인 은이라면, 그것은 겉보기만큼 귀한 재료가 아닙니다.

뜨겁게 말하는 입술은 무엇을 뜻하는가

「뜨겁게 말하는 입술」에 해당하는 원어(⁨דָּלַק⁩)는 불타거나 뜨겁게 움직이는 모습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입술이 격렬한 감정이나 열정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다정한 사랑의 말인지, 강렬한 아첨인지, 혹은 다른 종류의 열정적인 말인지는 이 구절 자체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본문에서 더 분명한 것은 그 입술과 함께 등장하는 마음, 곧 「악한 마음」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말의 열정과 마음의 실제 상태가 서로 어긋나 있습니다. 다음 구절들이 그 의미를 구체적으로 풀어 줍니다.

미워하는 사람은 말로 속마음을 감추고, 마음속에는 속임수를 품는다.잠언 26:24 · 두루새김

23절의 비유가 24절에서 현실적인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여기서 말은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숨기는 도구가 됩니다.

이것은 잠언이 말하는 정직함과 깊이 대조됩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말은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바르게 표현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자신의 말을 이용하여 실제 마음과 다른 모습을 만들어 냅니다.

그의 말은 마치 질그릇에 입힌 은빛처럼 작용합니다. 겉으로는 아름답거나 귀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표면 아래에는 전혀 다른 것이 있습니다. 문제는 말이 아름답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아름다움이 마음속의 악을 숨기는 데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상냥한 목소리를 믿지 말라는 이유

25절은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가르칩니다.

그가 상냥한 목소리로 말해도 믿지 마라. 그의 마음에는 역겨운 것이 일곱 가지나 있기 때문이다.잠언 26:25 · 두루새김

이미 24절에서 미움을 감추고 속임수를 품는 사람이 등장했습니다. 25절은 바로 그 사람의 상냥한 말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잠언은 그 일곱 가지가 무엇인지 하나씩 열거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를 특정한 일곱 종류의 죄로 확정하거나, 다른 성경 본문에 나오는 일곱 항목과 반드시 연결할 근거는 없습니다. 일곱이라는 수가 가득함이나 완전함을 나타내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마음속에 역겨운 것이 가득하다는 강조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상대가 자신에게 친절하게 말하면 그 말을 믿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전의 행동을 통해 그 사람이 거짓과 속임수를 반복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좋은 말만 듣고 그를 신뢰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다만 누구든 상냥하게 말하면 속셈이 있다고 의심하라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잠언이 묘사하는 사람은 분명히 미움을 감추고 속임수를 품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경계의 근거는 상대의 말투 자체가 아니라 그의 실제 행동과 믿을 만한 정도에 있어야 합니다.

감추어진 악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미움을 속임수로 감추어도, 그의 악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드러난다.잠언 26:26 · 두루새김

23절에서는 그릇의 표면에 무엇인가를 입혔습니다.

24절에서는 미움을 말로 감추었습니다.

25절에서는 상냥한 목소리로 속임수를 숨겼습니다.

그런데 26절에서는 그 감춤이 끝납니다.

「사람들이 모인 자리」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나 회중을 가리킵니다. 그동안 개인적인 관계에서 숨겨져 있던 악이 공동체 앞에서 밝혀지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잠언은 악을 감추는 행동이 결국 공적인 자리에서 드러날 수 있다는 도덕적 방향을 제시합니다.

겉에 입힌 은빛이 그릇의 실제 재료를 바꾸지 못하듯, 상냥한 말도 악한 마음을 선한 마음으로 바꾸지는 못합니다.

자신이 판 구덩이와 자신이 굴린 돌

잠언 26:27–28 본문 →

27절은 마지막 두 구절을 위한 새로운 이미지를 제시합니다.

구덩이를 파는 사람은 그 안에 빠지고, 돌을 굴리는 사람에게는 그 돌이 되돌아온다.잠언 26:27 · 두루새김

두 행동 모두 예상했던 것과 반대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 비유는 악을 행하려는 사람이 자신이 만들어 놓은 위험에 오히려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다른 사람을 해치려는 계획의 역전

구덩이를 파는 사람은 그 구덩이에 빠지려고 판 것이 아닐 것입니다. 문맥상 다른 사람을 빠뜨리려는 함정을 만드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돌을 굴리는 사람 역시 자신을 향해 돌이 되돌아오기를 바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미지는 시편 7:15–16에서도 나타납니다. 그곳에서는 악한 사람이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빠지며, 자신이 저지른 악이 자기 머리 위로 돌아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에 관한 설명이 아닙니다. 악한 행동이 자신에게도 파괴적인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도덕적 역전을 표현합니다.

이 잠언은 앞선 23–26절의 속임수와 연결됩니다. 다른 사람을 속이는 사람은 자신이 상대보다 더 영리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상대가 무엇을 믿고 어떤 행동을 할지 계산하면서, 자신은 그 결과를 통제할 수 있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속임수는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만 움직이지 않습니다. 거짓말이 드러나면 자신이 쌓아 온 신뢰도 무너질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해치기 위해 시작한 행동이 자신의 삶을 위태롭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 비유를 모든 가해자가 현실에서 반드시 자신이 저지른 악과 똑같은 피해를 당한다고 주장하는 공식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26절이 악이 드러난다고 말할 때에도, 모든 악행이 반드시 공개되고 가해자가 반드시 처벌받는다는 무조건적인 예언은 아닙니다. 구약의 다른 본문들, 특히 시편 73편과 욥기는 악한 사람이 잘되는 듯 보이고 의로운 사람이 고통받는 현실도 깊이 다룹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삶의 모든 결과를 단순하게 설명하는 법칙이라기보다, 악한 계획 안에 이미 자신을 무너뜨릴 가능성이 들어 있다는 지혜의 관찰로 이해해야 합니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왜 피해자를 미워하는가

마지막 구절은 구덩이와 돌의 비유를 다시 사람의 입술로 연결합니다.

거짓말하는 혀는 자기가 짓누른 사람들을 미워하고, 듣기 좋게 꾸민 말을 하는 입은 사람을 넘어뜨린다.잠언 26:28 · 두루새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피해자가 가해자를 미워하는 상황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런데 잠언은 반대 방향을 묘사합니다.

그 사람은 이미 거짓말로 상대에게 피해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 때문에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는 대신 상대를 향한 미움을 계속 품을 수 있습니다. 자신이 잘못한 사람에게 오히려 적대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죄책감이나 자기 정당화 같은 특정한 심리 과정으로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잠언은 그러한 원인을 밝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동기를 하나로 확정하기보다, 자신이 피해를 입힌 사람에게도 미움을 품을 수 있다는 역설에 주목하는 편이 본문에 충실합니다.

후반부는 또 다른 경고를 덧붙입니다. 듣기 좋게 꾸민 말은 상대의 귀에 좋게 들릴 수 있습니다. 거칠지 않고, 부드럽게 들리며,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내용을 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거짓과 아첨에 사용된다면 상대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23절의 은빛으로 덮인 질그릇과 같은 문제입니다. 겉으로는 아름답거나 부드러워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해로운 목적을 감추고 있을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신약에서는 야고보서 3:1–12가 혀의 위험을 더욱 길게 설명합니다. 작은 혀가 큰 영향을 미치고, 같은 입에서 찬양과 저주가 나오는 모순을 지적합니다. 이는 잠언 26장의 문장을 직접 인용하는 관계라기보다, 인간의 말이 마음과 행동에서 얼마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지 보여주는 주제적 연결입니다.

듣기 좋게 꾸민 말을 하는 입이 만드는 함정

잠언 26:1–28 본문 →

잠언 26장은 이렇게 끝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입에 담은 잠언에서 시작한 문제는, 마지막에 거짓말하는 혀와 듣기 좋게 꾸민 말을 하는 입으로 돌아옵니다. 잠언 26장 자체에서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지혜로운 말을 가지고 있는 것과 지혜롭게 사는 것이 같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게으른 사람은 자신이 왜 행동하지 않는지 설명할 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웃을 속인 사람은 자신의 행동이 장난이었다고 설명합니다.

모두 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자신의 행동을 바꾸지는 않습니다.

잠언 26장은 이처럼 어리석음의 가장 깊은 위험을 드러냅니다.

자신이 어리석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 장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사람을 다시 떠올려 봅시다. 그는 다른 사람을 향해 거칠게 소리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은 듣기 좋게 꾸며져 있습니다. 상대가 듣기에 좋고, 믿고 싶어지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잠언은 그 입이 사람을 넘어뜨린다고 말합니다.

처음에 어리석은 사람들이 입에 담았던 잠언은 마침내 다른 사람을 넘어뜨리는 말이 되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말의 아름다움과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의 지혜는 같지 않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지혜는 자신의 옳음을 과시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진실을 사랑하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며,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말을 바르게 사용하는 데 있습니다.

잠언은 마지막에 듣기 좋게 꾸민 말을 하는 사람을 남겨 둡니다. 그의 말은 부드럽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향하는 곳에는 넘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독자는 그 말을 듣고 두 가지를 살펴야 합니다.

자신이 듣고 있는 말이 어디로 이끄는지, 그리고 자신이 하고 있는 말은 다른 사람을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