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115편

이 장의 자리 · 107–150편 · 다섯째 권

침묵하는 우상과 일하시는 하나님

「그들의 하나님은 대체 어디 있느냐?」

시편 115편에 등장하는 이 질문은 단순히 하나님의 위치를 묻는 말이 아닙니다. 다른 민족들이 이스라엘을 조롱하며 던지는 질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신상이 없는 백성, 그리고 지금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백성을 향해 묻습니다. 너희가 믿는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고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시인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눈에 보이는 증거물을 내놓지 않습니다. 오히려 눈에 보이는 우상들을 하나씩 살펴보게 합니다. 우상들에게는 입이 있지만 말하지 못합니다. 눈이 있지만 보지 못하고, 귀가 있지만 듣지 못합니다. 손과 발도 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셔도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분입니다.

시편 115편은 눈에 보이는가보다 실제로 살아서 행동하는가를 묻고, 무엇을 신뢰하느냐가 결국 우리의 삶을 어떻게 만드는지 보여 줍니다.

읽는 시간 23분소단락 7115편 본문 읽기 →

우리의 영광이 아니라, 당신의 이름에 영광을

시편 115:1–3 본문 →

저희에게가 아닙니다, 여호와야훼여, 저희에게가 아닙니다. 당신의 이름에 영광을 주십시오, 당신의 인애 때문에, 당신의 신실함 때문에.시편 115:1 · 본디새김

시편은 찬양이 아니라 간청으로 시작합니다.

그것도 매우 강한 부정의 반복입니다. 시인은 먼저 영광을 받을 대상에서 자신들을 제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요청합니다.

이 말은 단순히 인간이 겸손해야 한다는 교훈이 아닙니다. 시인은 실제로 하나님이 행동하시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인간의 선언과 달리, 「영광을 주십시오」라는 문장은 하나님 자신에게 그 이름의 영광을 드러내 달라고 요청합니다.

무엇을 통해 그 영광이 드러나야 할까요? 시인은 두 가지 근거를 제시합니다. 「인애」는 관계 안에서 베풀어지는 지속적인 사랑과 신의를 나타낼 수 있는 말입니다. 「신실함」은 진실함과 믿을 만함을 뜻합니다. 이 두 단어는 출애굽기 34:6에서 여호와야훼가 자신의 성품을 드러내시는 표현과도 연결됩니다.

따라서 시인의 간청에는 분명한 근거가 있습니다. 우리가 특별히 훌륭하기 때문에 우리를 도와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당신의 인애와 신실함이 무엇인지를 드러내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단순히 압도적인 능력을 보여 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기 백성을 향한 사랑과 약속에 대한 신실함을 드러내시는 데에도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다음 절에 등장하는 민족들의 조롱과 연결됩니다.

어찌하여 민족들이 「그들의 하나님은 대체 어디 있느냐?」 하고 말해야 합니까?시편 115:2 · 본디새김

시인은 그 질문이 어떤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에서 나왔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전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인지, 나라가 위기에 처했기 때문인지, 공동체가 고난을 겪고 있기 때문인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질문의 어조를 보면, 이스라엘이 믿는 하나님이 그들을 도와주시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 배경에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조롱은 구약의 다른 곳에서도 나타납니다. 시편 42:3에서는 사람들이 고통받는 시인에게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요엘 2:17에서도 민족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 같은 질문을 하지 못하게 해 달라는 간청이 등장합니다.

이 질문이 아픈 이유는 단순히 다른 민족들이 이스라엘을 무시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의 처지를 근거로 하나님 자체를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바로 이 지점에서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주시기를 구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겪는 현실이 그분의 인애와 신실함을 부정하는 근거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조롱에 답하면서 놀라울 만큼 간결하게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있다. 그는 원하는 것을 모두 했다.시편 115:3 · 본디새김

이 대답은 다른 민족들이 기대했을 법한 방식과 다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눈에 보이는 특정한 장소에 계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하늘은 하나님이 특정한 지리적 위치에 갇혀 계시다는 뜻이 아니라, 지상의 어떤 권력에도 종속되지 않는 그분의 통치와 높으심을 나타냅니다.

「그는 원하는 것을 모두 했다」는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실제로 이루시는 분이라는 선언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시인은 그분이 행동하실 수 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보이는 장소를 제시하는 대신 행동하는 능력을 강조한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모두 하셨다는 말을, 세상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이 하나님의 기쁨이나 직접적인 승인에 따라 발생했다는 뜻으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은 무엇보다 하나님이 자기 뜻을 실행할 능력을 지니신 분임을 선언합니다.

시편 114편에서는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행동 앞에서 바다가 물러나고 바위에서 물이 솟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제 시편 115편은 그 행동하시는 하나님을, 사람이 손으로 만든 신상들과 대조합니다.

질문은 더 이상 단순히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가가 아닙니다.

참으로 신뢰할 만한 분은 누구입니까? 사람이 만들어 놓은 신입니까, 사람의 손에 매이지 않고 스스로 행동하시는 하나님입니까?

사람의 손으로 만든 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시편 115:4–8 본문 →

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며, 사람의 손이 만든 것이다.시편 115:4 · 본디새김

시인은 이제 다른 민족들의 우상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첫 문장이 의외로 담담합니다. 우상들은 은과 금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값비싼 재료입니다. 귀하고 화려하며 사람들의 눈길을 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재료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평가하지 않습니다. 곧바로 누가 만들었는지를 밝힙니다. 「사람의 손이 만든 것이다」라는 표현은 뒤에 나올 모든 비판의 출발점입니다.

우상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신성한 대상으로 대하지만, 시인은 그것이 사람의 손에서 나온 물건이라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누가 누구를 만들었는가가 핵심적인 질문이 됩니다. 사람이 우상을 만들었는데, 이제 그 사람이 자신이 만든 우상에게 의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근본적인 역전이 있습니다. 본래 도움을 받아야 할 대상이 도움을 줄 존재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이사야 44:9–20도 비슷한 문제를 지적합니다. 장인은 나무를 가져다가 일부는 불을 피우는 데 사용하고, 일부는 신상을 만듭니다. 그런 다음 자신이 만든 신상 앞에 엎드립니다.

이러한 구약의 우상 비판은 고대 사람들이 모두 조각상 자체를 신의 전부라고 생각했다는 역사적 설명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고대 근동의 신상은 신의 임재를 나타내거나 매개하는 존재로 이해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시편의 논점은 분명합니다. 인간이 제작한 물체에 궁극적인 신뢰를 두는 일이 얼마나 허망한가를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이제 시인은 우상을 자세히 관찰합니다.

그것들은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시편 115:5 · 본디새김
그것들은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한다.시편 115:6 · 본디새김
그것들의 손은 만지지 못하고, 그것들의 발은 걷지 못하며, 그것들은 목구멍으로 소리도 내지 못한다.시편 115:7 · 본디새김

모든 부분에 같은 부정이 따라붙습니다.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반복은 읽을수록 역설적인 효과를 만들어 냅니다. 겉모습은 살아 있는 사람을 닮았지만, 그 어떤 살아 있는 행동도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단순히 생명이 없다는 사실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시인이 열거한 기능들은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중요한 것들입니다. 말하고, 보고, 듣고, 움직이고, 손을 내밀어 행동하는 능력입니다.

누군가 도움을 청하면 그 소리를 들어야 하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알아보아야 하며, 실제로 무엇인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상은 그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앞의 2절과 3절이 더욱 의미 있게 연결됩니다. 다른 민족들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들이 신뢰하는 우상들이 눈앞에 있어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지적합니다.

보인다는 사실과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은 다릅니다.

눈에 보이는 신상이 가까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사람의 고통을 알아보거나 응답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반면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이 차이는 구약의 다른 이야기에서도 두드러집니다. 열왕기상 18:26–29에서 바알의 예언자들은 자신들의 신에게 계속 부르짖지만 아무런 대답도 얻지 못합니다. 그 이야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단순히 신상의 형태가 아니라,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에게 실제로 응답하는 신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긴 묘사에는 한 가지 눈에 띄는 반복이 있습니다. 5절에서 이미 우상은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7절 끝에서 다시 목구멍으로 소리도 내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시인은 침묵을 두 번이나 강조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중복이라기보다 우상의 무능력을 더욱 완전하게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아무리 정교한 입을 만들고 목구멍을 조각해도, 그 안에서는 살아 있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여기서 비판을 끝내지 않습니다. 신상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한 다음, 그 신상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립니다.

그것들을 만드는 이들은 그것들과 같아질 것이다. 그것들을 신뢰하는 이들도 모두 그러할 것이다.시편 115:8 · 본디새김

사람이 실제로 금속이나 나무로 변한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문맥상 우상의 무능력과 침묵이 그것을 신뢰하는 사람들에게도 닥치는 결과를 나타내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같아질 것이다」의 히브리어 이흐유(yihyu)는 문맥에 따라 앞으로 그렇게 될 것이라는 진술이나,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저주의 성격을 지닌 말로 읽을 여지가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결과를 선언하는 쪽으로 옮겼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이 우상 숭배자들의 미래를 설명하는지, 그들을 향해 심판을 선언하는지에는 해석의 갈림이 있습니다.

하지만 두 읽기 모두 우상과 우상 숭배자 사이에 깊은 관계가 생긴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만든 것을 신뢰합니다. 그리고 그 신뢰가 결국 자신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사람은 자신이 궁극적으로 의지하는 대상의 성격에 영향을 받습니다.

생명 없는 대상을 궁극적으로 신뢰하면, 그 신뢰는 결국 사람을 살리고 움직이게 하지 못합니다. 예레미야 2:5에서도 비슷한 관계가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헛된 것을 따라가다가 스스로 헛되어졌다고 책망받습니다. 무엇을 따르는지가 사람의 모습에 영향을 미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시편의 관심은 단순히 다른 민족의 종교를 비웃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 구절은 이스라엘에게도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이 만든 것이 너희를 지탱할 수 있다고 믿을 것입니까? 아니면 살아 계시며 실제로 행동하시는 여호와야훼를 신뢰할 것입니까?

시인은 이 질문에 바로 이어지는 세 절에서 대답합니다.

무엇을 신뢰하는가 — 세 번 울려 퍼지는 초대

시편 115:9–11 본문 →

이스라엘아, 여호와야훼를 신뢰하여라. 그는 그들의 도움이며 방패다.시편 115:9 · 본디새김
아론 집안 사람들아, 여호와야훼를 신뢰하여라. 그는 그들의 도움이며 방패다.시편 115:10 · 본디새김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이들아, 여호와야훼를 신뢰하여라. 그는 그들의 도움이며 방패다.시편 115:11 · 본디새김

앞에서는 우상을 신뢰하는 사람들의 운명을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시인은 전혀 다른 대상을 신뢰하라고 부릅니다. 그 대상은 여호와야훼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문학적 연결은 8절과 9절 사이에 있습니다. 8절에서는 「그것들을 신뢰하는 이들」이 등장합니다. 9절에서는 「여호와야훼를 신뢰하여라」라는 명령이 나옵니다. 두 표현의 「신뢰」(⁨בָּטַח⁩)에는 같은 히브리어 동사가 사용됩니다.

이 배치는 시편의 핵심적인 대조를 드러냅니다. 문제는 단순히 무엇을 숭배하느냐가 아닙니다. 무엇에 자신의 안전과 미래를 맡기는가입니다.

시인은 이제 공동체 전체를 향해 이 질문을 던집니다. 먼저 이스라엘을 부릅니다. 그다음 아론 집안을 부릅니다. 마지막으로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이들을 부릅니다.

아론 집안은 이스라엘의 제사장직을 맡은 가문입니다(출애굽기 28:1). 그들에게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여호와야훼를 신뢰하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직무를 맡았다는 사실만으로 그분에 대한 신뢰가 저절로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사장 역시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세 번째 집단인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이들」이 정확히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밖에서 여호와야훼를 섬기게 된 사람들까지 포함한다고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시인은 그들을 동일한 신뢰의 자리로 부릅니다.

세 절 모두 먼저 상대방에게 직접 말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문장에서는 「그들의 도움이며 방패다」라고 말합니다. 부름의 대상은 이인칭인데, 그들을 설명할 때는 삼인칭으로 바뀝니다.

이 인칭 변화는 예배 중 서로 다른 목소리가 주고받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한 사람이 「여호와야훼를 신뢰하여라」라고 외치면 다른 사람들이 「그는 그들의 도움이며 방패다」라고 응답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실제 예배에서 어떻게 나누어 불렀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같은 문장이 세 번 되풀이되는 형식은 공동체가 함께 고백하기에 잘 어울립니다.

「도움이며 방패」라는 두 단어는 시편의 앞부분과 선명하게 대조됩니다.

우상들에게는 손이 있어도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도움이십니다.

우상들은 스스로 움직일 수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는 방패이십니다.

「방패」는 단순한 장식이 아닙니다. 위험이 닥쳤을 때 사람을 보호하는 물건입니다. 하나님을 방패라고 부르는 것은 그분이 위험 가운데 있는 백성을 지키시는 분이라는 고백입니다.

시편 33:20도 여호와야훼를 도움과 방패라고 부릅니다. 신명기 33:29에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그들의 방패로 묘사됩니다. 시편 115편에서 이 표현이 더욱 특별하게 들리는 이유는, 이미 우상들이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길게 설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쉽게 지나칠 수 없는 긴장이 남아 있습니다.

시편은 처음에 민족들이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조롱하는 상황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조롱이 이미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여호와야훼를 신뢰하여라」는 명령은 모든 문제가 해결된 뒤에 주어지는 말이 아닙니다. 아직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고, 주변의 조롱이 들릴 수 있는 상황에서 주어지는 요청입니다.

신뢰는 이미 모든 일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생기는 태도가 아닙니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누구에게 도움을 구할 것인지 결정하는 태도입니다.

시인은 그 신뢰를 공동체 전체의 고백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절에서는 명령이 축복의 선언으로 바뀝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억하셨다

시편 115:12–15 본문 →

여호와야훼는 우리를 기억했다. 그가 복을 줄 것이다. 이스라엘 집안에 복을 줄 것이다. 아론 집안에 복을 줄 것이다.시편 115:12 · 본디새김

앞의 세 절이 명령이었다면, 이제는 확신을 담은 선언이 나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기억하신다는 표현은 단순히 과거의 일을 떠올리신다는 뜻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 사람과의 관계를 잊지 않으시고, 그 관계에 따라 행동하시는 일을 나타냅니다. 출애굽기 2:24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셨다고 말합니다. 그 기억은 이어지는 구원 행동과 연결됩니다.

시편 115편에서도 하나님의 기억은 미래의 축복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우연히 찾아오는 좋은 일이 아니라, 자기 백성과의 관계를 기억하시는 분의 행동으로 이해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인애와 신실함 때문에 그 이름에 영광을 주시기를 구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기억하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분의 신실함이 추상적인 성품으로만 남아 있지 않고, 백성을 기억하시고 축복하시는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한 9–11절에서 부름받았던 집단들이 다시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집안, 아론 집안, 그리고 다음 절의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입니다. 앞에서는 그들에게 신뢰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제는 그들에게 복이 주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신뢰하라는 부름과 축복의 선언이 서로 맞물립니다.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복을 줄 것이다, 작은 이들과 큰 이들에게.시편 115:13 · 본디새김

「작은 이들과 큰 이들에게」라는 표현은 나이가 어린 사람과 나이가 많은 사람을 가리킬 수도 있고,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과 높은 사람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모든 계층을 포괄하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핵심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특정한 지위나 규모의 사람들에게만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적 차이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자격을 독점적으로 결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상들의 무능력을 설명하던 장면과 대조를 이룹니다. 우상들은 아무도 보거나 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기억하시며, 작은 이들과 큰 이들에게 복을 주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여호와야훼가 너희를 더욱 번성하게 하기를.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더욱 번성하게 하기를.시편 115:14 · 본디새김

이제 선언이 기원으로 바뀝니다. 시인은 앞에서 하나님이 복을 주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그 복이 실제로 더욱 풍성하게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이 기원에는 공동체가 다음 세대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의 「더하다」(⁨יָסַף⁩)라는 동사는 수적으로 늘리거나 더 풍성하게 한다는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자녀들이 함께 언급되므로 공동체와 그 후손의 번성이 자연스러운 의미입니다. 이것을 모든 개인의 재산이 반드시 증가한다는 약속으로 제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인은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만을 위해 복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자녀들을 위해서도 복을 구합니다.

여기서 시편은 앞의 8절과 매우 뚜렷한 대조를 이룹니다. 우상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우상과 같아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를 신뢰하는 사람들에게는 다음 세대까지 이어지는 번성을 기원합니다. 무능한 대상에 대한 신뢰는 사람을 무력하게 만들지만, 살아 계신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미래의 생명과 번성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것을 단순히 악인은 자녀가 없고 의인은 자녀가 많다는 공식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시인이 강조하는 것은 두 신뢰가 향하는 방향의 차이입니다.

너희는 하늘과 땅을 만든 여호와야훼에게 복을 받은 이들이다.시편 115:15 · 본디새김

이 절은 앞에서부터 쌓아 온 대조를 한 문장으로 모읍니다. 처음에 우상들은 사람의 손이 만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라고 선언합니다. 두 표현에는 동일한 「만들다」의 관계가 있지만, 그 방향이 정반대입니다.

사람은 우상을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십니다.

이것이 우상과 하나님 사이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시인은 단순히 여호와야훼가 우상보다 더 강한 신이시라고만 주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근원이신 분이라는 사실을 밝힙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축복도 그분이 창조하신 세계와 무관한 특별한 힘이 아닙니다. 생명을 주시고 땅을 마련하신 창조주가 그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백성에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창조의 고백은 다음 절에서 뜻밖의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하늘과 땅을 모두 만드신 하나님이 왜 땅을 사람들에게 주셨을까요?

하늘은 하나님의 것, 땅은 사람들에게 주셨다

시편 115:16 본문 →

하늘, 하늘은 여호와야훼의 것이지만, 땅은 그가 사람들에게 주었다.시편 115:16 · 본디새김

시편은 이제 하늘과 땅의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먼저 「하늘」이라는 말을 두 번 반복합니다. 이 반복을 반드시 서로 다른 두 층의 하늘이 있다는 설명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히브리어의 강조적인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늘과 땅 모두 하나님의 창조 세계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중 땅을 사람들에게 주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늘에만 계시고 땅에는 관여하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시편 24:1은 땅과 그 안의 모든 것이 여호와야훼의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시편 115:16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과 통치를 포기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창조주가 인간에게 살아갈 자리를 주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여기에서 창세기 1:26–28과의 연결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땅 위의 생명들을 돌보고 다스리는 역할을 맡기십니다. 시편 115편도 사람이 땅을 스스로 차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았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창조주가 아닙니다.

그러나 창조 세계 안에서 아무런 역할도 없는 존재 역시 아닙니다.

이 대목은 우상에 관한 앞선 묘사를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사람은 본래 땅 위에서 살아가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자기 손으로 신상을 만들어 놓고 그 신상이 자신의 삶을 지배하도록 맡깁니다. 창조주에게서 땅을 받은 사람이 자기 제작물에 자신의 미래를 의탁하는 것입니다.

시편은 그와 반대되는 길을 제시합니다. 자기가 만든 물체를 신뢰하는 대신, 자기를 포함한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늘을 바라보게 한 뒤 다시 땅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곳은 바로 이 땅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고, 자녀들이 자라며, 공동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시편의 마지막 두 절은 바로 이 땅에서 살아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줍니다.

우상은 침묵하고, 죽은 이들도 침묵한다

시편 115:17–18 본문 →

죽은 이들은 야를 찬양하지 않는다. 침묵으로 내려가는 이들은 아무도 찬양하지 않는다.시편 115:17 · 본디새김

이 절은 처음 읽으면 갑작스럽게 느껴집니다. 왜 하늘과 땅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죽은 사람들을 언급하는 것일까요?

그러나 앞에서 우상들이 어떻게 묘사되었는지 기억하면 이 문장의 의미가 선명해집니다. 우상들은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목구멍이 있어도 소리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시인은 죽은 사람들도 찬양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침묵이라는 공통된 이미지가 있습니다. 우상은 생명이 없기 때문에 말하지 못합니다. 죽은 사람들은 더 이상 살아 있는 회중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합니다. 시인은 이 두 종류의 침묵을 통해 살아 있는 사람들의 찬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드러냅니다.

「침묵으로 내려가는 이들」의 「침묵」은 이 문맥에서 죽음의 영역을 연상시킵니다. 다만 이 단어만으로 그 영역의 구체적인 구조나 상태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구약의 여러 시편에서는 죽음이 찬양할 수 없는 상태로 묘사됩니다. 시편 6:5에서는 죽음 가운데서 하나님을 기억하거나 스올에서 감사하는 일을 질문합니다. 시편 88:10–12에서도 죽은 이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경험하고 찬양할 수 있는지 묻습니다. 이 표현들은 죽음 앞에 선 인간이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간구하거나 살아 있는 동안 찬양할 수 있는 기회를 붙드는 문맥에서 등장합니다.

따라서 시편 115:17을 모든 시대와 모든 성경 본문에 적용할 수 있는 죽음 이후의 상태에 관한 완결된 교리적 선언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구절에서 시인이 강조하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지금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는 사실과, 죽음이 그 활동을 중단시킨다는 현실입니다.

하나님은 땅을 사람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 땅에서 영원히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죽음이라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살아 있는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시인은 마지막 절에서 대답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야를 찬송할 것이다, 지금부터 영원까지. 할렐루야.시편 115:18 · 본디새김

이 절은 앞 절의 침묵을 깨뜨립니다.

죽은 사람들은 찬양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우리는 찬양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처음에 다른 민족들이 하나님의 위치를 의심하며 말했습니다.

중간에서는 우상들이 말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에서는 죽은 사람들도 침묵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살아 있는 공동체가 입을 열어 말합니다.

여기서 「야」는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줄여 부르는 형태입니다. 시인은 끝까지 자신들이 신뢰하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시인은 자신들이 살아 있는 동안만 찬양하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영원까지 찬양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조금 더 깊이

바로 앞에서 죽은 사람들은 찬양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어떻게 영원히 찬양할 수 있을까요? 이 긴장을 이해하는 한 가지 자연스러운 방법은 「우리」를 개인 한 사람의 생애에만 한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앞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아론 집안,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자녀들이 더욱 번성하기를 바랐습니다. 이렇게 공동체와 그 후손들이 언급된 뒤에 「우리는」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따라서 이 찬양은 한 세대의 삶을 넘어 다음 세대까지 이어질 공동체의 찬양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개인은 죽음을 맞이하지만, 공동체는 다음 세대로 이어집니다. 본문이 영원한 찬양을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모두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살아 있는 회중이 찬양을 계속 이어 가겠다는 결심을 밝히고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신뢰는 사람을 어떤 모습으로 만드는가

시편 115:1–18 본문 →

시편 115편에는 두 종류의 신뢰가 나란히 등장합니다. 하나는 사람이 만든 우상을 신뢰하는 일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입니다. 이 둘의 차이는 결국 생명과 관계의 차이입니다.

시편의 우상 비판은 우선 고대의 실제 신상 제작과 숭배를 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물건이나 목표가 곧 본문에서 말하는 우상이라고 단순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편이 제기하는 질문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우리 손으로 만들어 낸 것들에 자신의 안전을 전적으로 맡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문제는 만들어진 것을 창조주의 자리에 놓는 것입니다.

시편은 처음에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하나님을 눈앞에 보이는 물체로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말하지 못하는 우상들을 지나, 살아 계신 하나님이 사람들을 기억하시고 복을 주시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살아 있는 공동체가 입을 열어 찬양합니다. 처음에 영광을 자신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간구했던 사람들이 이제 자신들의 목소리로 하나님을 높입니다.

사람이 만든 신상은 입을 가지고 있지만 침묵합니다.

반면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들은 그분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시편이 끝나는 자리에는 은과 금으로 빛나는 신상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야를 찬송할 것이다, 지금부터 영원까지.」

그리고 그들의 찬양은 한마디로 모입니다.

「할렐루야.」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