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47편

이 장의 자리 · 42–72편 · 둘째 권

온 땅의 왕 앞에 모이는 민족들

시편 47편은 모든 민족에게 손뼉을 치라고 요청합니다.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땅 위의 모든 백성이 하나님께 기쁨의 소리로 환호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에 뜻밖의 말이 나옵니다.

「그는 백성들을 우리 아래에 굴복시킬 것이다. 민족들을 우리 발아래에 굴복시킬 것이다.」 모든 민족에게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하면서, 그 민족들이 이스라엘의 발아래 놓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두 선언은 어떻게 연결될까요? 민족들이 이스라엘에 굴복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하나님께서 온 땅의 왕이시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다른 민족들 모두가 그분 앞에 서야 한다는 뜻일까요?

시편은 이 긴장을 쉽게 풀어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민족들의 굴복을 노래한 다음, 하나님께서 환호 속에 올라가시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이어 하나님께서 거룩한 왕좌에 앉으시고, 마지막에는 여러 백성의 귀인들이 모여듭니다.

처음에는 민족들이 발아래 놓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그들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왕권 앞에 모입니다.

이 변화가 시편의 중심을 드러냅니다.

시편 47편은 이스라엘이 얼마나 강한 민족인지를 자랑하는 노래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이 온 땅의 왕이심을 선포하는 노래입니다.

시편 46편에서는 하나님께서 민족들의 전쟁을 그치게 하시고 모든 땅에서 높아지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47편은 그 주제를 이어받아 민족들이 하나님의 왕권 앞에 어떻게 서게 되는지를 찬양합니다. 그러나 앞 시편의 상황을 그대로 반복하기보다는 왕을 맞이하는 환호와 즉위의 이미지에서 새롭게 출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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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백성이 손뼉을 쳐야 하는 이유

시편 47:1–3 본문 →

누구를 향한 초대인가

모든 백성들아, 손뼉을 쳐라. 하나님께 기쁨의 소리로 환호하여라.시편 47:2 · 본디새김

시편은 처음부터 놀랄 만큼 넓은 청중을 향합니다.

여기서 「백성들」은 복수형입니다. 한 민족의 구성원들만이 아니라 여러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이 시는 고라 자손의 시편입니다. 이스라엘의 예배 전통 안에 자리하지만, 처음부터 이스라엘만을 향해 노래하지 않습니다. 모든 백성을 불러 하나님께 환호하라고 요청합니다.

「손뼉을 쳐라(⁨תָּקַע⁩)」로 옮긴 표현은 손바닥을 치라는 뜻입니다. 이는 왕을 환영하거나 승리를 축하하는 자리에서 어울리는 행동입니다. 뒤이어 나오는 「환호하여라」는 더욱 큰 소리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 말은 환성을 올리거나 소리 높여 외치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이 시편이 요구하는 찬양은 조용히 마음속으로만 하나님을 인정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실제로 손뼉을 치고 환호하는 장면입니다.

왜 이렇게 해야 할까요? 다음 절이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 여호와야훼는 두려운 이요, 온 땅 위의 위대한 왕이기 때문이다.시편 47:3 · 본디새김

시인은 여호와야훼를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이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온 땅 위의 위대한 왕」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모든 민족이 찬양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자기 종교를 받아들이라고 요구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시인의 신앙 고백에 따르면 여호와야훼는 처음부터 그 모든 민족 위에 계시는 왕이십니다.

이것이 시편의 출발점입니다.

기뻐하라고 하면서 왜 두려워하라고 하는가

2절에서는 기쁨으로 환호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3절에서는 여호와야훼가 「두려운 이」라고 선언합니다.

이 말은 두려움과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를 나타냅니다. 이는 반드시 공포 때문에 도망쳐야 하는 존재라는 뜻만은 아닙니다. 그분의 위엄과 권능이 인간의 통상적인 이해와 능력을 뛰어넘기 때문에 느끼는 경외심을 포함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기뻐하며 찬양하는 것과 경외하는 것을 반대되는 태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단순히 친근한 보호자만은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온 땅을 다스리시는 위대한 왕이십니다.

인간의 왕 앞에서도 사람들은 그 지위와 권위에 따라 특별한 예를 갖추었습니다. 시인은 그보다 훨씬 높은 권위를 가지신 하나님을 모든 민족이 기쁨과 경외로 맞이해야 한다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찬양은 단순한 감정 표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환호한다는 것은 그분이 왕이시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행동입니다. 사람들이 왕의 즉위를 축하하며 환호하는 것은 그 왕의 지위가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편은 모든 민족이 여호와야훼 앞에서 그분의 왕권을 인정하는 광경을 그립니다.

그런데 다음 구절에서 그 왕권이 이스라엘의 역사와 연결됩니다.

온 땅의 왕이 야곱을 사랑하셨다

시편 47:4–5 본문 →

민족들이 발아래 놓인다는 말

그는 백성들을 우리 아래에 굴복시킬 것이다. 민족들을 우리 발아래에 굴복시킬 것이다.시편 47:4 · 본디새김

앞에서는 모든 민족이 하나님께 환호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민족들이 이스라엘 아래에 굴복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발아래」라는 표현은 정치적 지배와 군사적 승리의 이미지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패배한 적을 발아래에 두는 장면은 승리한 군주가 상대를 제압했음을 나타내는 강한 표현이었습니다.

여기서 이 말을 인간의 악한 욕망이나 내면의 죄가 굴복한다는 순수한 영적 비유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시인은 실제 민족들과 백성들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굴복시킬 것이다(⁨דָבַר⁩)」로 옮긴 동사는 굴복시키거나 복종하게 하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이 동사는 미완료형이므로 미래의 행동으로 읽을 수 있지만, 반복되거나 지속되는 하나님의 행동을 나타내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미래의 승리로 옮겼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시인은 하나님께서 장차 민족들을 이스라엘 아래에 두실 것이라고 기대하는 셈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지속적인 통치나 과거부터 경험해 온 승리의 확신으로 읽으면, 그분이 자기 백성에게 승리를 주시는 분이라는 선언이 됩니다.

어느 읽기를 택하든 시인은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보다 본래 강하기 때문에 그들을 굴복시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자신의 승리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의 전쟁과 민족 간의 관계는 그들의 신앙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는 오늘날 독자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긴장이 남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다른 민족들을 지배할 영구적인 권리를 가졌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와 왕권에 관한 신앙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또한 4절의 굴복이라는 표현을 지워 버리고, 모든 민족이 처음부터 아무런 갈등 없이 평등하게 모여 찬양했다는 이야기로 바꾸어서도 안 됩니다. 시편은 실제로 이스라엘의 승리를 노래합니다. 다만 그 승리의 주체를 이스라엘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께 돌립니다.

그리고 시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그 민족들의 지도자들까지 하나님의 왕권 앞에 모이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 변화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마지막 절에서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고르신 상속 몫

5절에서 시인은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 우리의 상속 몫, 곧 그가 사랑한 야곱의 자랑을 고를 것이다. 셀라.시편 47:5 · 본디새김

여기에는 세 가지 중요한 말이 등장합니다. 상속 몫, 야곱의 자랑, 사랑입니다.

「상속 몫(⁨נַחֲלָה⁩)」에 해당하는 말은 상속받은 재산이나 소유, 특별히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가리키는 데 자주 사용됩니다. 민수기 26:52~56에서는 이스라엘 지파들 사이에 땅을 상속 몫으로 나누는 일이 등장합니다. 따라서 시편 47편의 상속 몫도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받은 땅을 중심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땅 자체를 다른 표현으로 부릅니다. 「야곱의 자랑(⁨גָּאוֹן⁩)」으로 옮긴 말은 야곱의 자랑이나 영광을 뜻합니다.

이 말이 반드시 특정한 지리적 장소 하나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유산이나 특별한 지위를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앞에 상속 몫이 나오기 때문에 약속의 땅, 그리고 그 땅에 담긴 하나님의 선물과 복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어떤 특정한 지역이나 성소만을 가리킨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더 중요한 표현은 마지막의 「그가 사랑한」입니다. 원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대상이 야곱인지, 앞의 야곱의 자랑 전체인지 문법적으로 약간의 여지가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야곱을 사랑의 대상으로 읽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상속 몫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신 사실과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이 특별한 자랑을 얻은 이유는 스스로 다른 민족보다 훌륭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시고 그를 위해 상속 몫을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28:13~15의 야곱에 대한 약속과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땅과 후손을 약속하시고, 그가 어디로 가든 함께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야곱은 스스로 그 약속을 만들어 낸 사람이 아닙니다. 그에게 주어진 미래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했습니다.

시편 47편에서도 상속 몫은 하나님께서 고르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것을 받습니다.

온 땅의 왕이 한 민족을 사랑한다는 것

여기서 시편의 두 번째 중요한 긴장이 나타납니다. 3절에서는 여호와야훼를 온 땅의 위대한 왕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야곱을 특별히 사랑하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온 세상에 미치지만, 그분은 역사 속에서 야곱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중요한 신학적 구조입니다. 하나님은 창조 세계 전체의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자신을 알리신 분이십니다. 그 특별한 관계를 통해 이스라엘의 역사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한 민족을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사실과 온 땅의 왕이시라는 사실은 어떻게 연결될까요? 시편 47편은 그 질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품고 있습니다.

이 시는 이스라엘의 특별한 지위를 지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시고 상속 몫을 주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나 그 사실 때문에 하나님의 왕권이 이스라엘 안에만 제한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경험한 하나님을 온 땅의 왕으로 선포합니다.

특별한 사랑과 온 땅의 왕권 사이의 이 구분은 시편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의 이름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은 한 민족의 조상이면서 동시에 여러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과 연결되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디로 올라가시는가

시편 47:6 본문 →

하나님이 환호 속에 올라갔다. 여호와야훼가 뿔나팔 소리 속에 올라갔다.시편 47:6 · 본디새김

이 구절에 이르면 시편에 움직임이 생깁니다.

앞에서는 모든 민족에게 손뼉을 치고 환호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제 실제로 환호 소리가 들리고, 뿔나팔 소리까지 더해집니다. 마치 왕이 백성의 환영을 받으며 높은 왕좌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올라가셨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뜻할까요?

왕의 즉위인가,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행렬인가

「올라갔다(⁨עָלָה⁩)」로 옮긴 말은 올라가거나 위로 이동하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이 표현을 단순히 하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문자적인 이동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편 전체가 하나님의 왕권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뒤에서는 하나님께서 거룩한 왕좌에 앉으셨다고 선언합니다. 따라서 6절의 올라감은 왕이 왕좌로 올라가는 즉위의 이미지와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그런데 이 장면은 이스라엘의 예배 역사에 등장하는 다른 사건도 떠올리게 합니다. 사무엘하 6:15에서는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이 환호와 뿔나팔 소리 가운데 여호와야훼의 궤를 메어 올라갑니다. 시편 47:6과 사무엘하 6:15에는 올라감, 환호, 뿔나팔이라는 세 요소가 공통으로 등장합니다. 이러한 유사성 때문에 시편의 장면을 하나님의 궤가 성소로 올라가는 행렬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 47편 자체에는 궤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이 반드시 다윗의 궤 운반 사건을 직접 묘사한다거나, 특정한 절기에 실제로 행해진 왕권 의식의 노래였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왕의 즉위 장면을 시적으로 묘사한 것일 수도 있고, 실제 예배 행렬을 배경으로 하나님께서 왕이심을 선포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두 가능성이 서로 완전히 배제되는 것도 아닙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예배에서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행렬이 그분의 왕권을 선포하는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환호와 뿔나팔 소리 가운데 높임받으시는 왕으로 등장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때 처음 왕이 되셨는가

하나님께서 왕좌로 올라가셨다면, 그전에는 왕이 아니셨던 것일까요? 그렇게 읽으면 시편의 처음과 맞지 않습니다. 3절에서 시인은 이미 여호와야훼가 온 땅 위의 위대한 왕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따라서 6절은 하나님께서 이전에는 왕이 아니셨다가 어느 순간 왕의 지위를 얻으셨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본래 왕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왕권을 드러내시고, 백성은 그 왕권을 환호로 인정하는 장면입니다.

인간 왕의 즉위식에서는 왕위 계승이라는 실제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왕권을 찬양하는 시에서는 이러한 즉위의 언어를 통해 이미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가 공개적으로 선포되고 인정되는 모습을 그릴 수 있습니다.

이 구별은 다음에 나올 「하나님이 민족들 위에서 왕이 되었다」는 표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조금 더 깊이

하나님의 궤는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왕권을 나타내는 중요한 상징이었습니다. 사무엘상 4:4에서는 만군의 여호와야훼께서 그룹들 위에 좌정하신다는 표현과 함께 궤가 언급됩니다. 따라서 궤가 성소로 옮겨지는 행렬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 가운데 왕으로 임재하신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드러낼 수 있습니다.

왜 네 번이나 "노래하여라"라고 하는가

시편 47:7–8 본문 →

하나님께 노래하여라, 노래하여라. 우리 왕께 노래하여라, 노래하여라.시편 47:7 · 본디새김

시편 47편에서 가장 강렬한 반복입니다.

짧은 한 절에 「노래하여라」라는 명령이 네 번 등장합니다. 이 동사는 악기 연주와 관련된 찬양을 나타낼 수 있는 동사입니다. 문맥에서는 하나님을 노래로 찬양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이 명령을 한 번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반복합니다.

하나님께 노래하십시오.

노래하십시오.

우리 왕께 노래하십시오.

노래하십시오.

이 반복을 단순히 찬양을 열심히 하라는 강조로만 읽으면 시의 움직임을 충분히 보지 못합니다. 바로 앞에서 하나님께서 환호 속에 올라가셨습니다. 그것을 본 사람들에게 이제 노래가 요구됩니다.

처음에 시인은 모든 민족에게 손뼉을 치고 환호하라고 요청했습니다. 이제는 왕으로 높임받으신 하나님을 향한 노래가 이어집니다.

찬양은 하나님의 왕권을 알리는 소리가 됩니다.

「우리 왕」은 어떻게 「온 땅의 왕」인가

7절에서는 하나님을 「우리 왕」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8절에서는 즉시 그 의미를 넓힙니다.

하나님이 온 땅의 왕이기 때문이다. 마스길을 노래하여라.시편 47:8 · 본디새김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우리 왕」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분을 자신들만의 왕으로 독점하지는 못합니다. 그분은 온 땅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그 백성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하시고 상속 몫을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 경험은 하나님의 통치를 이스라엘의 경계 안에 가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온 땅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리는 증언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시라는 고백은 그분이 다른 민족의 왕이 아니시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분께 특별한 사랑을 받은 백성이 온 세계에 그 왕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마스길을 노래하여라」는 무슨 뜻인가

8절의 마지막 표현은 번역하기 쉽지 않습니다. 마스킬(⁨שָׂכַל⁩)은 지혜롭게 이해하고 분별한다는 뜻의 어근과 관련된 표현입니다. 시편의 여러 표제에서는 마스길이 시의 종류나 음악적·교훈적 성격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시편 47편에서는 표제가 아니라 본문 안에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몇 가지 방식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마스길을 노래하여라」라고 읽으면 어떤 종류의 노래를 부르라는 지시가 됩니다. 「분별 있게 노래하여라」라고 읽으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이해하며 찬양하라는 의미가 됩니다. 또한 솜씨 있게 부르는 찬양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칠십인역은 이해나 분별을 동반한 찬양의 방향으로 이 표현을 옮깁니다. 그렇지만 정확히 어떤 노래 형식이나 연주법을 뜻하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본디새김은 이 불확실성을 남겨 두고 마스길이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본문의 흐름에서 확실한 것은 찬양의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온 땅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시인은 그분의 권위를 설명했습니다. 이제 그 권위를 들은 사람들은 노래로 응답해야 합니다.

왕이 왕좌에 앉으니 민족들이 모인다

시편 47:9 본문 →

하나님이 민족들 위에서 왕이 되었다. 하나님이 자기의 거룩한 왕좌에 앉았다.시편 47:9 · 본디새김

여기서 시편의 왕권 이미지가 완성됩니다.

6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올라가셨습니다. 9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왕좌에 앉으셨습니다. 왕이 높은 자리로 올라가 왕좌에 앉으시는 일련의 움직임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 왕좌를 단순히 아름답거나 영광스러운 왕좌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거룩한 왕좌」라고 부릅니다. 거룩함은 하나님께 속한 특별한 성격을 나타냅니다. 그분은 세상의 왕들과 같은 방식으로 권위를 얻거나 유지하시는 존재가 아니십니다. 그분의 왕권은 인간의 권력과 구별됩니다.

「왕이 되었다」와 「다스리신다」

「왕이 되었다(⁨מָלַךְ⁩)」로 옮긴 동사는 왕이 되거나 왕으로 다스린다는 뜻을 가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완료형으로 사용되었으며, 본디새김은 앞의 「올라갔다」는 표현과 연결하여 즉위의 장면으로 옮겼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환호 속에 올라가신 하나님께서 이제 민족들 위의 왕으로 좌정하셨다는 장면이 됩니다.

반면 이를 「하나님이 민족들 위에서 다스리신다」라고 읽으면 하나님의 현재적이고 지속적인 통치를 강조하는 말이 됩니다. 두 읽기는 강조점이 다르지만, 서로 다른 하나님을 묘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첫 번째 읽기는 왕권이 드러나는 장면에, 두 번째 읽기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통치에 무게를 둡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통치가 어떤 역사적 순간에 처음 시작되었는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왕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권위가 민족들 위에 미친다고 선포합니다.

왕좌에 앉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다스리시는 대상은 여러 민족입니다. 이 사실은 앞에서 등장한 이스라엘의 승리를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합니다. 이스라엘은 민족들이 자기 발아래 굴복하게 되리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제시되는 최고의 왕좌에는 이스라엘의 인간 왕이 앉아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앉아 계십니다.

이것은 시편이 이스라엘의 특별한 지위를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의 왕권을 그 위에 두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승리조차 궁극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나는 일이 더 큰 주제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에서는 그 통치를 인정해야 할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께 모이는 귀인들

시편 47:10 본문 →

백성들의 귀인들,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 모였다. 땅의 방패들은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지극히 높아졌다.시편 47:10 · 본디새김

처음에 시인은 모든 백성을 향해 손뼉을 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4절에서는 그 민족들이 이스라엘의 발아래 굴복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절에서는 그 백성들의 귀인들이 모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모이는 장면에 뜻밖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입니다. 왜 마지막에 이스라엘이나 야곱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등장할까요?

귀인들은 누구인가

「귀인들(⁨נָדִיב⁩)」에 해당하는 말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 지도자들이나 귀족들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백성들의 귀인들」은 여러 민족의 지도층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앞의 4절에서 굴복의 대상으로 등장했던 민족들과 무관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제 그 민족들의 지도자들이 한곳에 모입니다. 무엇을 위해 모였을까요?

여기서 히브리어 문장이 조금 어렵습니다. 원문은 「백성들의 귀인들이 모였다」는 말 뒤에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현을 이어 놓습니다. 두 표현 사이의 정확한 관계를 나타내는 전치사는 없습니다.

따라서 크게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본디새김처럼 귀인들을 아브라함의 하나님께 속한 백성과 연결하여, 그들이 하나의 백성으로 모였다고 읽는 것입니다. 이 경우 여러 민족의 지도자들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중심으로 새로운 관계 안에 들어오는 모습이 강조됩니다.

다른 하나는 여러 민족의 귀인들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모였다고 읽는 것입니다. 이 경우 이스라엘과 여러 민족의 지도자들이 함께 하나님의 왕권을 인정하는 장면이 됩니다.

두 읽기의 차이는 작지 않습니다. 원문의 간결한 문장만으로 어느 한쪽을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두 읽기 모두에서 드러나는 사실이 있습니다. 시편의 마지막에서 여러 민족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왕권과 무관한 바깥사람으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들도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모임에 등장합니다.

왜 아브라함의 하나님인가

앞에서는 「야곱의 자랑」이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조상이지만,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은 이스라엘 한 민족에만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12:3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7:4~5에서는 아브라함이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는 약속이 등장합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는 호칭은 이스라엘의 특별한 역사와 모든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함께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시편 47:10이 창세기 12:3의 약속이 어떻게, 언제 성취되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구절만으로 모든 민족이 이미 이스라엘과 구별 없이 하나의 공동체가 되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시편 전체의 흐름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왕권은 이스라엘을 넘어 모든 민족에게 미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중심으로 여러 민족이 모이는 미래를 바라보게 합니다.

땅의 방패들도 하나님께 속해 있다

10절의 후반부 「땅의 방패들은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이다」는 그 이유를 밝힙니다.

방패는 적의 공격을 막는 무기입니다. 「땅의 방패들」을 실제 방패들로 읽을 수도 있지만, 앞의 여러 백성의 귀인들과 연결하면 백성을 보호하는 지도자나 통치자들을 가리키는 비유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왕은 자기 백성을 지키는 방패와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바로 그런 보호자들조차 하나님께 속해 있다고 말합니다.

민족들의 지도자들은 저마다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군대와 영토가 있고, 백성을 보호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권위는 하나님의 통치에서 독립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떤 민족의 왕도 자기 권위의 궁극적인 주인이 아닙니다. 온 땅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모든 통치자 위에 계십니다.

마지막에 높아지시는 분

시편은 「하나님은 지극히 높아졌다」로 끝납니다. 처음에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신 이 여호와야훼」라고 불리셨습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아지셨다고 선언합니다.

처음부터 가장 높으셨던 하나님이 마지막에 다시 높임받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위가 실제로 변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시편에서 하나님의 높으심이 점점 더 넓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주제는 시편 67:3~7과도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시인은 여러 민족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서 민족들을 공정하게 다스리시기를 바랍니다. 시편 47편은 같은 보편적인 왕권을 더욱 장엄한 즉위의 이미지로 노래합니다. 이사야 2:2~4에서도 여러 민족이 여호와야훼의 산으로 모이고,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서 판단하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일은 민족들 사이의 전쟁이 그치는 미래와 연결됩니다. 시편 47편의 마지막에 귀인들이 모이는 장면을 이런 구약의 주제와 나란히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편 자체는 민족들이 어떻게 그 모임에 이르게 되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신약에서도 하나님의 통치가 모든 민족에게 드러나고 인정된다는 주제가 이어집니다. 빌립보서 2:9~11에서는 하나님께서 예수를 지극히 높이셨으며 모든 무릎이 그분 앞에 꿇고 모든 혀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시편 47편을 직접 인용한 구절은 아닙니다.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구약의 왕권 주제가 그리스도에 관한 고백으로 이어지는 경우입니다. 시편 47편 자체에서는 예수의 생애나 죽음, 부활에 관한 구체적인 예언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다만 온 땅의 왕이신 하나님이 모든 민족 가운데 높임받으신다는 고백은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왕권을 이해하는 중요한 신학적 배경 가운데 하나가 됩니다.

굴복한 민족들이 함께 찬양할 수 있는가

시편 47:1–10 본문 →

이제 처음에 제기했던 질문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왜 시인은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하면서, 그 민족들이 이스라엘 아래에 굴복할 것이라고 말했을까요?

이 긴장을 지워 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편 47편에는 두 가지 주제가 함께 존재합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의 승리와 특별한 지위입니다. 다른 하나는 모든 민족 위에 계시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왕권입니다. 이 둘은 시인의 신앙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특별한 사랑을 받았고 상속 몫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온 땅의 왕이시라는 사실은 이스라엘이 곧 온 세상의 최종적인 주권자라는 뜻이 아닙니다. 시편의 최고 왕좌에 앉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민족의 지도자들이 궁극적으로 속한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이 구별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을 무조건 지배할 권리로 바꾸는 순간, 하나님의 왕권과 인간의 권력을 혼동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시편에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받은 특별한 은혜를 노래합니다. 그러나 그 은혜의 근거는 이스라엘의 탁월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받은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이해한다면, 그 선물을 자신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근거로 삼는 일은 신중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우리 왕」이라고 부르면서도 그분이 온 땅의 왕이심을 인정한다면, 자신들의 집단적인 이해관계가 하나님의 뜻과 언제나 동일하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시의 마지막에 민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함께 모이는지, 아니면 이스라엘과 구별된 채 그분의 왕권을 인정하며 모이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그러나 어느 읽기를 택하든 중요한 변화가 있습니다. 처음에 민족들은 이스라엘의 발아래 놓이는 대상으로 등장했습니다. 마지막에는 그 민족들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왕권을 인정하는 모임에 등장합니다.

시편의 관심이 이스라엘의 승리에서 하나님의 보편적인 통치로 넓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노래의 움직임입니다.

시편 47편의 마지막 장면을 다시 바라봅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손뼉을 쳤습니다. 기쁨의 환호가 들렸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올라가셨고, 뿔나팔 소리가 울렸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노래하고 또 노래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거룩한 왕좌에 앉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왕좌 앞에 모인 사람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여러 백성의 귀인들입니다. 저마다 자신의 민족을 대표하고, 권위를 행사하며, 백성을 지키는 책임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왕좌 앞에서는 그들 역시 최종적인 주권자가 아닙니다.

「땅의 방패들은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이다」라는 표현은 시편의 처음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처음에는 모든 백성이 하나님께 손뼉을 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마지막에는 땅의 방패들, 곧 백성을 보호하는 권세들마저 하나님께 속해 있다고 선언됩니다. 백성도, 그들을 다스리는 귀인들도 모두 하나님의 왕권 아래 있습니다.

시인은 그들에게 각자의 왕좌를 빼앗아 새로운 인간 왕에게 바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땅의 왕이심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높아졌다.」

더 이상 높일 왕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왕권 위에 다른 왕권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편의 처음에 모든 백성을 향해 울렸던 환호는, 마지막에 모든 권세가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선언으로 완성됩니다.

그분은 야곱을 사랑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야곱이나 아브라함에게만 속한 왕이 아니십니다.

온 땅의 왕이십니다.

시편은 그 왕좌 앞에 모여든 귀인들과 여러 백성을 보여 주며 끝납니다. 그들이 가져온 지위와 권세는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그들의 위에는 오직 한 분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거룩한 왕좌에 앉아 계십니다.

그리고 온 땅의 왕을 향한 노래가 울려 퍼집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