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66편

이 장의 자리 · 42–72편 · 둘째 권

불과 물을 지나온 사람의 이야기

시편 66편은 온 땅을 향한 거대한 외침으로 시작합니다.

「온 땅아, 하나님께 함성을 올려라.」(1절) 그런데 시편의 마지막에 이르면 수많은 사람의 함성 대신 한 사람의 목소리가 남습니다. 「그는 나의 기도를 물리치지 않았고, 그의 인애를 내게서 거두지 않았다.」(20절)

온 땅의 찬양으로 시작한 시가 한 사람의 기도가 들렸다는 고백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어째서 이렇게 넓게 시작한 찬양이 마지막에는 한 개인의 경험으로 좁혀질까요?

그리고 이 찬양의 중심에는 고난이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바다를 마른 땅으로 바꾸셨다고 노래합니다. 그런데 곧이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그물 안으로 끌어들이시고, 허리에 짓누르는 짐을 얹으셨으며,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머리 위로 지나가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한편에서는 하나님이 길을 여시는 분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하나님이 어려운 길로 그들을 이끄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시인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합니까? 어려움을 겪지 않게 해 주셨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어려움을 겪는 동안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기 때문일까요?

시편 66편의 찬양은 고난이 없었던 사람들의 노래가 아닙니다. 불과 물을 통과한 뒤에도 자신의 목숨이 보존되었고, 자신의 기도가 들렸다는 사실을 발견한 사람들의 노래입니다.

이 시에는 독특한 흐름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온 땅을 초청하여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보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이스라엘 공동체가 겪은 고난을 회상합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겪은 일을 「들으라」고 합니다.

보라는 초청에서 들으라는 초청으로, 「우리」의 이야기에서 「나」의 이야기로 움직입니다.

읽는 시간 25분소단락 966편 본문 읽기 →

원수들도 복종하는 체하는 하나님 앞에서

시편 66:1–4 본문 →

지휘자를 위하여. 노래. 시편. 온 땅아, 하나님께 함성을 올려라. 그의 이름의 영광을 노래하라. 그를 향한 찬양을 영광스럽게 하라.시편 66:1–2 · 본디새김
하나님께 말하라. 「당신이 하신 일들이 얼마나 두려운지요. 당신의 큰 힘 때문에 당신의 원수들이 당신께 복종하는 체할 것입니다.」시편 66:3 · 본디새김
「온 땅이 당신께 엎드리고 당신께 노래할 것입니다. 당신의 이름을 노래할 것입니다.」 셀라.시편 66:4 · 본디새김

시편은 하나님께 직접 말하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온 땅을 향해 말합니다. 여기서 「함성을 올려라」는 단순히 소리를 크게 지르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이 말은 기쁨이나 승리의 환호를 나타낼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왕을 맞이하거나 중요한 승리를 기뻐할 때 터져 나오는 외침을 떠올리게 합니다.

시인은 온 땅을 하나님 앞에 모인 거대한 회중처럼 부릅니다. 앞선 시편 65편에서는 풍요로워진 골짜기와 풀밭이 노래했습니다. 이번에는 자연의 풍경을 노래하는 데서 나아가 온 땅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무턱대고 찬양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어떤 분으로 자신을 드러내셨는지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노래한다는 것은 그분의 성품과 행하신 일을 인정하고 높인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시인은 찬양의 구체적인 내용을 제시합니다. 여기서 「두려운」은 무섭고 끔찍하다는 뜻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행동이 인간을 압도할 만큼 놀랍고 경외심을 일으킨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뒤따르는 내용은 예상보다 복잡합니다.

「복종하는 체하다」(⁨כָּחַשׁ⁩)로 옮긴 히브리어 동사는 부인하다, 거짓을 말하다, 복종하는 체하다 등의 의미와 관련됩니다. 이 문맥에서는 하나님의 큰 능력 앞에서 원수들이 진심으로 충성하지 않으면서도 굴복하는 모습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력이 너무 크기 때문에 원수들조차 굴복하지만, 그들의 내면까지 반드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렇게 읽으면 3절과 4절 사이에 차이가 생깁니다. 3절에서는 원수들이 힘에 눌려 복종하는 체합니다. 4절에서는 온 땅이 하나님께 엎드리고 그분의 이름을 노래합니다.

겉으로 엎드리는 행동이 같더라도 그 안에 담긴 태도는 다를 수 있습니다.

시인은 이 차이를 길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원수들의 복종을 나타낼 때 굳이 거짓이나 마지못한 굴복을 암시하는 동사를 사용했습니다. 이 때문에 4절의 온 땅이 하나님을 찬양하리라는 전망을 모든 사람이 이미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의 보고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온 땅의 찬양을 받으실 분임을 선포하면서, 아직 그분께 적대적인 사람들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함께 인정합니다.

그렇다면 온 땅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시인은 이제 그분이 실제로 하신 일을 보라고 초청합니다.

바다를 건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우리의 노래가 되다

시편 66:5–7 본문 →

와서 하나님의 일들을 보라. 사람들에게 행하는 그의 일은 두렵다.시편 66:5 · 본디새김
그가 바다를 마른 땅으로 바꾸었다. 그들은 강을 걸어서 건넜다. 거기서 하나님을 기뻐하자.시편 66:6 · 본디새김
그는 자신의 위력으로 영원히 다스리며, 그의 눈은 민족들을 지켜본다. 반역하는 자들은 스스로 높아져서는 안 된다. 셀라.시편 66:7 · 본디새김

시인은 추상적인 하나님의 위대함을 설명하는 대신, 구체적인 사건을 바라보게 합니다.

먼저 등장하는 것은 바다입니다. 이 표현은 출애굽기 14:21–22의 홍해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바다 앞에서 길이 막혔을 때, 하나님이 물을 갈라 마른 땅을 지나가게 하셨던 일입니다.

그런데 곧바로 다른 물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강을 걸어서 건넜다」는 표현은 여호수아 3–4장의 요단강 도하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요단강의 물이 멈추고 백성이 마른 땅으로 건넜던 일입니다.

그렇게 읽으면 시인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두 장면으로 압축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집트의 속박에서 빠져나오는 장면입니다. 다른 하나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장면입니다. 두 사건 사이에는 광야에서의 오랜 시간이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긴 역사를 물을 건너는 두 장면으로 묶습니다.

두 사건 모두 사람이 스스로 길을 만들 수 없었던 자리에서 하나님이 길을 마련하신 사건입니다. 바다는 이집트를 떠난 백성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요단강 역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물을 통과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사람들이 길을 찾아내어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이야기이기 전에, 하나님이 길을 열어 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6절에서 앞에서는 「그가」 바다를 마른 땅으로 바꾸었다고 했고, 「그들은」 강을 건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기뻐하자」라는 일인칭 복수의 말이 등장합니다.

옛날에 살았던 그들의 이야기가 지금 노래하는 우리의 기쁨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실제로 홍해를 건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과거에 자기 백성을 위해 행하신 일을 현재의 회중이 함께 기뻐하도록 초청합니다. 이것은 출애굽 사건을 반복해서 기억하도록 하는 이스라엘의 예배 전통과도 연결됩니다.

신명기 26:5–9에서 이스라엘 사람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며 조상들의 이집트 생활과 출애굽, 그리고 땅을 주신 일을 고백합니다. 과거의 구원을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역사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시편 66편도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을 현재의 찬양 안으로 가져옵니다.

그런데 시인은 하나님의 과거 행동을 말한 뒤 곧바로 현재의 통치를 언급합니다. 홍해와 요단강을 통과하게 하신 하나님은 과거에만 활동하신 분이 아닙니다. 지금도 민족들을 지켜보시며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여기서 「그의 눈」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지속적인 감찰을 나타냅니다. 민족들의 행동이 그분의 통치 밖에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에는 반역하는 자들에게 경고합니다. 하나님의 통치 앞에서 반역자들이 자신을 절대적인 권력자로 내세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앞의 바다와 강의 이야기와 연결하면 그 뜻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집트의 권력은 이스라엘을 붙잡아 두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그 백성을 구해 내셨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인간의 압제보다 오래 지속됩니다.

그런데 다음 단락에서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백성을 위해 길을 열어 주시는 분이었습니다. 이제 시인은 바로 그 하나님이 백성을 시험하고 고난 속으로 이끄셨다고 말합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원문에는 6절에서 강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다를 마른 땅으로 바꾸신 일에 이어 강을 걸어서 건넌 일을 나란히 노래한다는 점에서, 홍해와 요단강을 함께 떠올리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또 7절의 히브리어는 본문에 적힌 형태와 난외에 제시된 읽기가 다릅니다. 본디새김은 반역자들이 자신을 높여서는 안 된다는 명령으로 읽었습니다. 다른 읽기도 스스로 높아지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강조점에 차이는 있지만, 하나님의 통치 앞에서 반역자들이 자신을 절대적인 권력자로 내세울 수 없다는 의미는 공유합니다.

우리 발을 지키신 하나님이 왜 우리를 시험하셨을까

시편 66:8–10 본문 →

백성들아, 우리 하나님을 찬송하라. 그를 찬양하는 소리가 들리게 하라.시편 66:8 · 본디새김
그는 우리 목숨을 살려 두는 이이며, 우리 발이 흔들리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시편 66:9 · 본디새김
하나님, 당신께서 저희를 시험하셨기 때문입니다. 은을 제련하듯 저희를 제련하셨습니다.시편 66:10 · 본디새김

이 단락에는 시편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역설이 담겨 있습니다.

9절에서는 하나님이 백성의 목숨을 살려 두시고 그들의 발이 흔들리지 않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10절에서는 바로 그 하나님이 백성을 시험하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백성이 넘어지지 않도록 지켜 주신 분입니까, 아니면 그들을 위태로운 상황에 놓으신 분입니까?

시인은 둘 중 하나만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는 두 가지를 모두 하나님이 행하신 일로 고백합니다.

먼저 9절에서 하나님은 「우리 목숨을 살려 두는 이」라고 소개되십니다. 히브리어의 표현은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을 살아 있는 상태에 두셨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죽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생명이 위협받는 동안에도 하나님이 그것을 보존하셨다는 고백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우리 발이 흔들리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편에서 발이 흔들리거나 미끄러지는 이미지는 위태로운 처지와 무너짐을 나타낼 때 사용됩니다. 시편 121:3에서도 하나님이 발이 흔들리지 않게 지키신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백성이 처음부터 아무런 위험도 겪지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위험한 길을 걸었지만 완전히 넘어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읽어야 바로 다음의 제련 이미지와 연결됩니다.

10절에서는 「시험하다」와 「제련하다」가 나란히 사용됩니다. 첫째 동사는 살피고 검사하여 그 진실성을 알아보는 의미를 지닙니다. 둘째 동사는 금속을 불에 넣어 불순물을 제거하고 정련하는 작업을 나타냅니다.

시인은 이 두 표현을 결합하여 공동체가 겪은 고난을 묘사합니다. 은을 제련하려면 높은 열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은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쓸모 있는 금속을 얻는 것입니다. 이 비유를 사용함으로써 시인은 고난이 단순히 백성을 파괴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신중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본문은 그 고난이 정확히 어떤 성격의 사건이었는지, 어떤 잘못 때문에 일어났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반드시 벌을 받았다고 확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시인 역시 이 단락에서 죄에 대한 처벌을 직접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들이 겪은 고난을 하나님이 시험하시고 제련하신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고난이 반드시 하나님의 직접적인 시험이라는 보편적인 공식을 제시하는 것과 다릅니다. 시인은 자신들이 지나온 특정한 경험을 뒤돌아보며 그 안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셨는지를 고백합니다.

성경 전체에는 고난의 다양한 원인이 등장합니다. 사람의 악한 행동 때문에 고난을 겪기도 하고, 이유를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욥기는 고난을 특정한 죄의 결과로 단정하는 설명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백성이 완전히 사라지게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고난을 통과하게 하시면서도 그들의 생명을 지키셨습니다. 시인이 찬양하는 하나님의 신실함은 고난을 전혀 겪지 않게 하시는 데서가 아니라, 고난이 그들을 완전히 삼켜 버리지 못하도록 생명을 붙들어 주신 데서 드러납니다.

이것은 듣기 좋은 위로를 만들기 위한 해석이 아닙니다.

시인은 바로 다음 두 구절에서 자신들이 겪은 고난이 얼마나 가혹했는지를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머리 위로 사람들이 지나가고, 불과 물을 통과하다

시편 66:11–12 본문 →

당신께서 저희를 그물 안으로 끌어들이셨고, 저희 허리에 짓누르는 짐을 얹으셨습니다.시편 66:11 · 본디새김
당신께서 사람들이 저희 머리 위로 타고 지나가게 하셨습니다. 저희는 불과 물을 지나갔습니다. 당신께서 저희를 풍족함으로 이끌어 내셨습니다.시편 66:12 · 본디새김

이 두 구절은 시편 전체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장면입니다.

시인은 먼저 그물과 짐을 이야기합니다. 그물에 갇힌 사람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습니다. 허리에 무거운 짐이 얹힌 사람은 똑바로 서 있기 어렵습니다.

「짓누르는 짐」은 허리의 압박을 나타냅니다. 허리는 몸의 힘을 지탱하는 부분입니다. 그곳을 무거운 짐이 누른다는 것은 움직이기도, 일어서기도 힘든 상태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다음 구절에서는 더욱 강렬한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사람의 머리는 몸에서 가장 높은 곳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그 위로 지나갑니다. 백성은 다른 사람들의 발아래 놓인 것처럼 묘사됩니다. 이는 단순히 힘든 일을 겪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들의 삶을 통제할 능력을 잃고 남의 지배 아래 짓눌린 상태를 표현합니다.

11–12절의 세 문장이 모두 하나님을 주어로 삼습니다.

시인은 고난이 하나님과 무관하게 일어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겪은 고통까지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 이해합니다. 이것은 현대 독자에게 어려운 표현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어째서 백성이 그물에 갇히고, 무거운 짐에 짓눌리며, 다른 사람들에게 굴욕을 당하게 하셨을까요?

시편은 이 질문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어떤 특정한 잘못 때문에 이런 고난이 필요했는지, 그 과정이 왜 그렇게 가혹해야 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시인은 고난의 결과를 알고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께 「당신께서 저희를 풍족함으로 이끌어 내셨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마지막 문장이 앞의 모든 장면을 새롭게 보게 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백성을 그물에 넣으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물 안에 버려두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 내셨습니다.

불은 태우고, 물은 휩쓸어 갑니다.

두 이미지는 사람이 견디기 어려운 극단적인 위험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 물을 통과한 뒤 풍족함에 도달했다고 말합니다. 물은 앞에서는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의 일부였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의 풍족함은 충분히 적셔지고 채워진 상태를 떠올리게 합니다.

같은 물의 이미지가 위협과 풍요를 서로 다른 방향에서 비추는 것입니다.

그들은 불과 물을 지나온 자기들의 인내심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풍족함으로 이끌어 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시편의 초점은 우리가 얼마나 강했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짓눌려 있을 때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완전히 버리지 않으셨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고난 자체가 좋은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시인은 짓누르는 짐과 굴욕을 아름다운 경험처럼 꾸미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분명히 고통스러운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 현실이 공동체의 마지막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시편은 이렇게 백성의 고난과 구원을 이야기한 뒤, 갑자기 한 사람의 목소리로 바뀝니다. 그 사람은 이제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가겠다고 말합니다.

조금 더 깊이

「그물」로 옮긴 히브리어 메추다는 문맥에 따라 그물이나 덫, 요새 또는 갇힌 장소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자유를 잃고 꼼짝하기 어려운 상황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머리 위로 타고 지나가게」 하셨다는 표현이 실제로 말이나 전차를 탄 적들이 백성을 짓밟는 상황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지배와 압제를 극단적으로 묘사하는 것인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굴욕적인 상황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시인이 어떤 역사적 사건을 가리키는지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외국 민족의 침략이나 포로 생활을 떠올릴 수 있지만, 본문에는 나라나 왕, 전쟁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풍족함」으로 옮긴 히브리어 레바야는 충분히 적셔지거나 넉넉히 채워진 상태를 나타내는 말과 관련됩니다. 그래서 풍족함, 넘치는 만족, 충분한 상태 등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본문과 연결하여 「넓은 곳」이나 「쉼의 장소」로 이해하는 번역도 있지만, 본디새김은 히브리어 본문의 풍족함이라는 의미를 살렸습니다. 이사야 43:2에서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물 가운데로 지나갈 때 함께하시고, 불 가운데로 걸을 때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두 본문은 물과 불을 통과한다는 이미지를 공유합니다. 다만 시편 66편은 그 약속을 직접 인용한다고 명시하지 않습니다.

곤경에 빠졌을 때 열린 입술이 이제 서원을 이행하다

시편 66:13–15 본문 →

제가 번제물들을 가지고 당신의 집에 들어가겠습니다. 당신께 제 서원들을 이행하겠습니다.시편 66:13 · 본디새김
제가 곤경에 빠졌을 때 제 입술이 열려 내놓고 제 입이 말한 서원들입니다.시편 66:14 · 본디새김
살진 짐승들의 번제물을 숫양을 태우는 연기와 함께 당신께 올리겠습니다. 소들을 숫염소들과 함께 제물로 바치겠습니다. 셀라.시편 66:15 · 본디새김

지금까지 시인은 주로 「우리」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목숨을 살려 두셨고, 우리를 시험하셨으며, 우리를 풍족함으로 이끌어 내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가」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공동체의 이야기가 한 사람의 서원으로 이어집니다. 이 변화 때문에 시편 66편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 노래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앞부분은 공동체의 찬양이고, 뒷부분은 개인의 감사입니다. 실제로 13절부터 인칭이 달라지고, 내용도 제사와 개인의 기도로 바뀝니다.

그러나 반드시 서로 다른 두 노래가 나중에 결합되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공동체의 구원에 참여한 한 사람이 자신의 감사 예배를 드리는 흐름으로도 자연스럽게 읽힙니다. 반대로 한 사람이 공동체를 대표하여 말하는 예전적인 상황도 가능합니다. 본문은 이 일인칭 화자의 정확한 신원을 알려 주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갑니다.

앞에서는 바다와 강을 건넜고, 불과 물을 통과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갑니다. 그의 여정은 위험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서원을 이행합니다. 서원은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며 어떤 일을 하겠다고 약속하는 행위입니다. 민수기 30:2에서는 사람이 하나님께 서원했으면 자기 입에서 나온 말을 어기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시편 66편에서도 시인은 그 약속을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14절을 보면 서원이 만들어진 상황이 나옵니다. 곤경에 빠졌을 때 시인은 입을 열어 하나님께 서원했습니다. 그 말은 평온한 자리에서 생각해 낸 형식적인 문장이 아니었습니다.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며 한 약속이었습니다.

이제 그 어려움에서 벗어난 시인은 자신이 한 말을 기억합니다. 그가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단순히 당시의 감격을 다시 느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한 약속을 실제 행동으로 이행하기 위해서입니다.

15절에는 여러 종류의 제물이 등장합니다. 살진 짐승, 숫양, 소, 숫염소입니다. 번제는 제물을 제단에서 불태워 하나님께 바치는 제사입니다. 레위기 1장은 소나 양과 염소를 번제로 드리는 규정을 제시합니다.

따라서 시인이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겠다고 말하는 것은 당시의 예배 관습 안에서 이해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제물의 종류가 다양하다는 것은 감사의 표현이 풍성하게 제시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곤경에 빠졌을 때 입으로 약속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구원하신 뒤 그 약속을 이행합니다. 고난의 시간에 한 말과 구원의 시간에 행하는 일이 서로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서원 이행은 단순히 하나님께 대가를 지불하는 행동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자신이 그분 앞에서 한 약속을 기억하는 행동입니다.

여기서 시편 전체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주제가 드러납니다.

사람의 입입니다.

처음에는 온 땅이 하나님께 함성을 올리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한 사람의 입술이 곤경 속에서 서원을 내놓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입술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시인은 다음 단락에서 자신이 경험한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사람들에게 전하는 증언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와서 보라」에서 「와서 들어라」로

시편 66:16–17 본문 →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모든 이들아, 와서 들어라. 그가 내 목숨을 위해 한 일을 이야기하겠다.시편 66:16 · 본디새김
나는 내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었고, 내 혀 아래에는 찬양이 있었다.시편 66:17 · 본디새김

이 두 구절은 시편의 흐름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5절에서 시인은 「와서 하나님의 일들을 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16절에서는 「와서 들어라」라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행하신 일을 보라고 초청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행하신 일을 들으라고 초청합니다.

5절에서는 하나님이 바다를 마른 땅으로 바꾸시고 백성이 강을 건너게 하신 사건을 이야기했습니다. 16절에서는 하나님이 「내 목숨을 위해」 하신 일을 이야기하겠다고 합니다. 과거 공동체의 구원이 현재 한 사람의 경험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시인은 청중을 조금 다르게 부릅니다. 처음에는 온 땅을 불렀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모든 이들」을 부릅니다.

여기서 두려움은 단순히 무서워하는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를 뜻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 복종하는 체하는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행동을 듣고 이해하며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시인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합니다.

여기서 「목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נֶפֶשׁ⁩)는 단순히 육체와 분리된 영혼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생명을 가진 자기 자신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시인은 자신이 내면적으로 위로받았다는 사실만 전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생명과 삶을 위해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증언하려 합니다.

그 경험을 이야기하는 첫 문장이 17절입니다. 여기에는 서로 다른 두 행동이 함께 있습니다. 부르짖음과 찬양입니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사람은 어려움 속에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은 그분의 선하심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이 두 행동을 하나의 문장에 담습니다.

「내 혀 아래에는 찬양이 있었다」라는 표현은 다소 특이합니다. 높임이나 찬양이 혀 아래에 있다는 표현입니다. 이것을 찬양이 입에서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는 부르짖는 동시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시인은 자신의 입이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는 입이면서 동시에 그분을 높이는 입이었다고 말합니다.

시인은 단순히 어떤 말을 했는지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 말을 하는 동안 자신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지도 살핍니다.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와 마음에 품은 악

시편 66:18–19 본문 →

내가 마음에 악을 품고 있었다면, 주는 듣지 않았을 것이다.시편 66:18 · 본디새김
그러나 참으로 하나님은 들었다. 내 기도 소리에 주의를 기울였다.시편 66:19 · 본디새김

시편의 마지막 부분에서 시인은 뜻밖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으셨다고 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마음에 악을 품고 있었는지 생각합니다. 시편의 앞부분에서는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직접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이 온 땅을 다스리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 사건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시인은 자신의 기도가 실제로 들렸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그리고 그 기도가 어떤 마음에서 나왔는지를 돌아봅니다.

여기서 「품고 있었다면」(⁨רָאָה⁩)은 히브리어로 「보았다」라는 뜻의 동사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문맥에서는 마음속의 악을 눈여겨보고,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소중히 여기는 태도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단순히 마음에 악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는 뜻으로 좁힐 필요는 없습니다. 시인은 악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그것을 인정하는 상태를 가정합니다.

시인이 자신에게는 아무런 죄도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정법으로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에게 진실한 태도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이것을 모든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이유는 반드시 기도하는 사람의 숨겨진 죄 때문이라는 공식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는 의로운 사람이 오랫동안 응답을 기다리거나,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 부르짖는 장면도 등장합니다. 시편 22편과 욥기의 여러 대화가 그런 예입니다. 따라서 시편 66:18은 다른 사람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그 사람의 마음속에 악이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할 근거가 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시인이 이야기하는 것은 자신의 경험과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함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면서도 마음속에서는 악을 붙들고 있는 태도를 경계합니다.

19절의 첫말 「참으로」는 「실로」라는 뜻으로, 앞의 가정적인 말에서 실제 일어난 일로 시선을 돌리게 합니다. 앞에서는 「그랬다면 듣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은 들으셨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논리적 결론이 아닙니다. 시인의 실제 경험에 대한 증언입니다.

시편 66편의 하나님은 온 땅을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바다를 마른 땅으로 바꾸시고, 강을 건너게 하시며, 민족들을 지켜보십니다.

그런데 바로 그 하나님이 한 사람의 기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그러나 아직 마지막 한 문장이 남아 있습니다. 그 문장은 시편의 모든 경험을 하나님의 인애라는 말로 묶습니다.

거두지 않으신 두 가지

시편 66:20 본문 →

하나님은 찬송받아 마땅하다. 그는 나의 기도를 물리치지 않았고, 그의 인애를 내게서 거두지 않았다.시편 66:20 · 본디새김

시편은 하나님을 찬송하며 끝납니다.

시인은 두 가지를 말합니다. 하나는 자신의 기도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인애입니다.

여기서 「물리치지 않았다」(⁨סוּר⁩)와 「거두지 않았다」는 히브리어에서 같은 동사에 연결됩니다. 기본적으로 치우다, 제거하다, 떠나게 하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두 가지를 자기에게서 치우지 않으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성격이 다릅니다. 기도는 사람이 하나님께 올리는 것입니다. 인애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푸시는 것입니다. 하나는 아래에서 위로 향하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에게서 사람에게로 향합니다.

시인은 이 두 방향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찬양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기 기도를 들으신다는 사실을 통해 그분의 인애를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인애는 단순한 친절이나 일시적인 호의를 넘어, 관계 안에서 나타나는 변함없는 사랑과 신의를 뜻합니다.

시인은 자신이 어려움에서 벗어났다는 결과만을 찬양하지 않습니다. 그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이 자신을 외면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찬양합니다.

이것은 시편 앞부분의 제련과도 연결됩니다. 하나님이 백성을 시험하셨습니다. 그들은 짓누르는 짐을 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굴욕을 당하고, 불과 물을 통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생명을 보존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한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으셨다고 고백합니다. 공동체의 생존과 개인의 기도 응답이 서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 중심에는 하나님이 자신의 인애를 거두지 않으셨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온 땅의 함성에서 한 사람의 기도까지

시편 66:1–20 본문 →

시편 66편은 소리로 가득한 시입니다.

처음에는 온 땅의 함성이 들립니다. 그런데 시가 진행되면서 그 소리는 점점 구체적인 이야기가 됩니다. 바다를 건너던 백성의 기쁨이 들리고, 불과 물을 통과한 공동체의 감사가 들립니다. 그 뒤에는 곤경 속에서 하나님께 서원했던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등장하고, 마지막으로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으셨다고 말합니다.

바다를 마른 땅으로 바꾸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민족들을 지켜보시고 다스리시는 권위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한 사람의 기도에도 주의를 기울이시는 분입니다. 시인은 거대한 하나님의 능력을 먼저 말하고, 마지막에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인애를 고백합니다.

이 순서는 우연이 아닙니다.

온 땅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 갈수록, 시인은 그분이 자신의 삶에 얼마나 깊이 관여하고 계신지도 발견합니다.

그래서 시편은 처음의 함성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마지막에는 조용하지만 분명한 한 사람의 고백을 남깁니다. 「그는 나의 기도를 물리치지 않았고, 그의 인애를 내게서 거두지 않았다.」

그의 입은 한때 곤경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 입술은 어려움 가운데 서원을 말했습니다. 이제 그는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 약속을 이행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겪은 일을 들려줍니다.

불과 물을 지나온 사람에게 남은 것은 고난의 기억만이 아닙니다. 자신의 목소리가 하나님께 들렸다는 기억도 있습니다.

시편 66편은 그 사람이 다시 입을 열어 하나님을 찬양하는 장면에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