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서 풀어 읽기 · 14장

이 장의 자리 · 13–15장 · 우상을 섬기는 어리석음

사람이 만든 신이 삶을 지배하기까지

거친 바다를 건너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배에 맡깁니다. 배는 인간이 나무를 다듬고 조립하여 만든 물건입니다. 폭풍 앞에서 완전한 안전을 보장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사람을 물 위에 떠 있게 하고 바다를 건너게 할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항해를 앞두고 다른 나무에 기도합니다.

자기를 실어 나르는 배보다 더 썩은 나무로 만든 신상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여기서 곧장 우상을 비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배를 만드는 인간의 지혜를 인정하고, 바다에 길을 내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찬양합니다. 이어 노아의 방주를 떠올리며 한 조각 나무가 온 세상의 생명을 보존하는 도구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의가 이루어지는 데 쓰이는 나무는 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다음 구절에서는 정반대의 선언이 나옵니다. 「그러나 손으로 만든 그 물건은, 그것도 그것을 만든 자도 저주받았습니다.」

어째서 같은 나무가 한쪽에서는 복을 받고 다른 쪽에서는 저주를 받을까요?

지혜서 14장이 경고하는 것은 단순히 사람이 우상을 만든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자신이 만든 것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한 결과, 오히려 그것의 지배를 받게 되는 인간의 역설입니다.

읽는 시간 20분소단락 914장 본문 읽기 →

배는 사람이 만들지만, 바다의 길은 하나님께서 여신다

지혜서 14:1–5 본문 →

또 어떤 이는 항해를 준비하고 거친 물결을 건너려 하면서, 자기를 실어 나르는 배보다 더 썩은 나무에 부르짖습니다.지혜서 14:1 · 본디새김

고대의 항해는 많은 위험을 동반했습니다. 배가 부서지거나 방향을 잃을 수도 있었고, 폭풍과 거친 물결은 인간이 통제하기 어려운 힘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항해하는 사람이 안전을 염려하고 신에게 도움을 구하려는 마음 자체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배는 적어도 사람을 물에 뜨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기도하는 신상은 그런 능력조차 없습니다.

인간의 기술을 인정하는 저자 (2절)

그 배는 돈벌이에 대한 욕망이 생각해 냈고, 장인인 지혜가 만들어 냈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4:2 · 본디새김

이 표현은 인간의 경제적 욕망과 기술적 능력을 나란히 놓습니다. 여기서 「돈벌이에 대한 욕망」은 이익을 얻고자 하는 열망을 가리킵니다. 저자가 그 욕망을 무조건 선하다고 승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배가 실제로 인간의 필요와 경제활동 속에서 고안되었다는 사실은 인정합니다.

그리고 배를 제작하는 데에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문맥상 인간의 숙련된 제작 기술을 강조하면서, 그러한 기술이 지혜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람은 나무를 다루고, 배의 구조를 계산하고, 그것을 조종하는 기술을 발전시킵니다.

문제는 기술 자체가 아닙니다.

배를 이끄는 것은 누구인가? (3절)

그러나 아버지, 그 배를 이끄는 것은 당신의 섭리입니다. 당신은 바다에도 길을 내시고, 물결 속에도 안전한 통로를 내셨습니다.지혜서 14:3 · 본디새김

또한 「이끄는」(διακυβερνάω)이라는 동사는 배를 조종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바다를 멀리서 바라보시기만 하는 분이 아니라, 위험한 항해 가운데서도 인간의 길을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묘사합니다.

여기서 「바다에도 길을 내시고」라는 표현은 출애굽기 14장의 홍해 사건과 연결됩니다. 이사야 43:16에서도 하나님은 바다 가운데 길을 내시는 분으로 묘사되십니다. 하지만 지혜서 14장은 그 구원의 이미지를 일반적인 항해의 장면으로 확장합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은 성경에 기록된 특별한 구원 사건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평범하게 사용하는 기술과 이동의 과정에서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배가 하나님의 보호 아래 반드시 안전하게 항해한다고 약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은 항해의 안전을 보장하는 공식이 아니라, 인간의 기술과 하나님의 돌보심 사이의 관계를 신앙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작은 나무에도 목숨을 맡기는 사람 (4–5절)

당신은 당신 지혜의 작품들이 쓰이지 않은 채 있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주 작은 나무에도 목숨을 맡기고, 큰 물결을 건너 뗏목으로 무사히 살아났습니다.지혜서 14:5 · 본디새김

여기서 저자는 하나님의 지혜가 만든 것들이 실제로 사용되는 일을 긍정합니다. 지혜는 인간에게 유용한 것들을 만들게 합니다.

5절의 「아주 작은 나무에도 목숨을 맡기고」라는 표현은 항해의 연약함을 강조합니다. 바다는 넓고 위험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작은 나무로 만든 배나 뗏목에 생명을 맡기고 그 바다를 건넙니다.

인간은 제한된 수단을 사용하지만, 그 수단을 통해 생명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그 가능성 속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돌보심을 발견합니다.

세상의 희망이 나무 위에 실려 있었다

지혜서 14:6–7 본문 →

처음에 오만한 거인들이 멸망할 때에도, 세상의 희망은 뗏목으로 피하여 당신 손의 인도를 받아 후세에 생명의 씨를 남겼습니다.지혜서 14:6 · 본디새김

저자는 갑자기 아주 오래된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노아의 홍수입니다. 그런데 노아라는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습니다. 방주를 「뗏목」이라고 부르고, 방주에 탄 노아와 그의 가족을 「세상의 희망」이라고 부릅니다.

홍수는 세상을 뒤덮었고, 많은 생명이 멸망했습니다. 그러나 방주 안에는 생명의 미래가 보존되었습니다.

왜 거대한 방주를 뗏목이라고 부르는가?

창세기 6:14–16의 방주는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치수에 따라 건조된 커다란 구조물입니다. 저자는 항해에 쓰이는 나무라는 앞부분의 이미지와 홍수의 방주를 연결하고 있습니다. 거대한 홍수에 비하면 방주도 작은 나무 구조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세상의 미래가 실려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뗏목」이라는 표현은 인간의 연약한 수단과 하나님께서 이루신 거대한 구원의 대조를 강조합니다. 여기서 「세상의 희망」과 「생명의 씨」라는 표현도 연결됩니다. 방주 안에 있던 사람들은 단순히 자신들만 살아남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통해 이후 세대가 이어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의가 이루어지는 데 쓰이는 나무 (7절)

의가 이루어지는 데 쓰이는 나무는 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4:7 · 본디새김

이 구절에서 「나무」는 단순히 목재라는 재료가 아니라 그 재료로 만들어진 구조물까지 가리킵니다. 여기서 핵심은 재료가 아니라 그 재료가 쓰이는 목적입니다.

노아의 방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생명을 보존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그 나무는 하나님의 의로운 일에 참여하는 도구로 묘사됩니다.

이 구절은 뒤에 나오는 신상에 대한 저주와 직접 대비됩니다. 똑같이 인간이 나무로 만든 물건입니다. 그러나 하나는 사람의 생명을 보존하는 일에 쓰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이 하나님 대신 숭배하는 대상이 됩니다.

조금 더 깊이

6절의 「오만한 거인들」은 창세기 6:4의 거인들, 곧 네피림을 떠올리게 합니다. 창세기 6장에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에 관한 이야기, 고대의 용사들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온 땅에 악과 폭력이 가득해지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지혜서는 이 전승들을 결합하여 홍수 이전 세상을 오만한 거인들이 존재하던 시대로 묘사합니다. 다만 창세기 6장이 홍수의 원인을 거인들만의 오만함으로 한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창세기는 인간의 악이 땅에 가득하고 모든 육체가 자기 길을 부패시켰다고 말합니다(창세기 6:5, 11–13). 후대의 그리스도교에서는 의를 이루는 나무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결하여 읽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혜서 14:7의 직접적인 문맥은 노아의 방주입니다. 십자가와의 연결은 본문의 일차적 의미라기보다 후대의 유형론적 읽기로 구별해야 합니다.

나무 자체가 아니라 나무를 신으로 만든 행위가 문제다

지혜서 14:8–11 본문 →

그러나 손으로 만든 그 물건은, 그것도 그것을 만든 자도 저주받았습니다. 그는 그것을 만들어 냈고, 그것은 썩을 것이면서 하나님이라 불렸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4:8 · 본디새김

여기서 「그러나」는 두 물건의 차이를 강조합니다. 문제는 피조물이 가진 한계를 부정하고, 그것에 하나님께 속한 지위를 부여하는 행위입니다.

만든 사람과 만든 물건이 함께 심판받는다

불경한 짓을 하는 자와 그 불경함은 하나님께 똑같이 미움을 받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4:9 · 본디새김
만들어진 것도 그것을 만든 자와 함께 벌을 받을 것입니다.지혜서 14:10 · 본디새김

이것은 우상이 실제로 도덕적 책임을 지는 인격체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상들은 인간에게 걸림돌과 올무가 되었으므로 징벌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상이 심판받는다는 말은 그 우상이 신적인 지위를 잃고 제거되며, 그것을 중심으로 형성된 잘못된 숭배 질서가 무너지는 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묘사는 이사야 46:1–2에서 바벨론의 신상들이 짐승에게 실려 옮겨지고, 결국 포로처럼 끌려가는 장면과 연결됩니다. 신이라고 불리던 것이 스스로를 지키지 못합니다. 오히려 인간에게 옮겨지거나 파괴됩니다.

하나님의 창조물 가운데 역겨운 것이 되었다는 말 (11절)

그러므로 민족들의 우상들에게도 징벌이 닥칠 것입니다. 그것들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들 가운데서 역겨운 것이 되었고, 사람들의 영혼에는 걸림돌이, 어리석은 자들의 발에는 올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4:11 · 본디새김

나무와 돌 자체가 본질적으로 악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창조에 속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것들을 하나님 대신 숭배하는 대상으로 만들 때, 그 물건은 다른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매개가 됩니다.

걸림돌은 걷는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올무는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는 것입니다. 두 이미지 모두 인간이 바른 길을 걷지 못하게 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저자는 우상 숭배가 인간의 생각 안에서만 일어나는 오류가 아니라, 실제 삶의 방향을 바꾸는 힘을 갖게 된다고 봅니다.

이제 질문은 달라집니다.

사람들은 왜 그런 우상을 만들기 시작했을까요?

우상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다

지혜서 14:12–14 본문 →

우상을 생각해 낸 것이 음행의 시작이고, 그것들을 고안해 낸 것이 생명의 파멸이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4:12 · 본디새김

「음행」은 성적인 부도덕을 가리키지만, 구약의 예언서 전통에서는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들을 섬기는 불충실함을 음행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호세아 1–3장과 예레미야 3장은 이러한 비유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지혜서 14:12에서도 우상 숭배가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관계를 깨뜨리는 행위라는 의미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뒤에 실제 혼인과 성적 관계의 무질서에 관한 비판이 이어지기 때문에, 이 구절의 음행을 종교적 배신에 관한 은유로만 한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저자는 잘못된 숭배와 인간관계의 타락이 서로 연결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시작도 없었고 영원하지도 않을 것들 (13절)

그것들은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고, 영원히 있지도 않을 것입니다.지혜서 14:13 · 본디새김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어 낸 분이 아니십니다. 반면 우상은 인간의 생각과 행동으로 생겨났습니다. 따라서 우상은 자신을 만든 인간 사회와 역사에 의존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오히려 자신이 만든 우상이 영원한 권위를 가진 것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

헛된 명예심이 어떻게 우상을 낳았는가? (14절)

사람들의 헛된 명예심으로 그것들이 세상에 들어왔고, 그 때문에 그것들이 곧 끝나도록 정해졌습니다.지혜서 14:14 · 본디새김

저자는 우상 숭배의 기원을 인간이 스스로 영광을 만들어 내고 높이려는 마음과 연결합니다. 그런데 곧이어 등장하는 첫 사례는 예상과 조금 다릅니다. 명예욕에 사로잡힌 왕이 아니라, 자녀를 잃고 슬퍼하는 아버지입니다.

왜 저자는 우상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슬픔의 이야기를 들려줄까요?

한 아버지의 슬픔이 어떻게 종교 의식이 되었는가?

지혜서 14:15–16 본문 →

때 이른 상실의 슬픔에 시달리던 아버지가 너무 빨리 빼앗긴 자녀의 형상을 만들고, 그때는 죽은 사람이었던 이를 이제는 하나님처럼 공경했으며, 자기 수하의 사람들에게 비밀 의식과 제의를 전했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4:15 · 본디새김

이 장면에서 아버지의 슬픔 자체를 죄라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그를 기억하려는 마음은 인간에게 자연스럽습니다. 죽은 사람의 초상이나 기념물을 만드는 행동 자체가 곧 우상 숭배라는 뜻도 아닙니다.

죽은 사람을 사랑하고 기억하는 것과, 그 사람에게 신적인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다릅니다. 본문은 바로 그 두 행동 사이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개인의 슬픔이 어떻게 공동체의 의무가 되는가?

그의 개인적인 상실과 애도가 다른 사람들의 종교적 행동을 결정하기 시작합니다.

첫째, 기억이 숭배로 바뀝니다.

둘째, 개인의 숭배가 공동체의 관습으로 바뀝니다.

그 뒤 시간이 흐르며 굳어진 그 불경한 관습은 법처럼 지켜졌고, 폭군들의 명령으로 새긴 형상들이 숭배를 받았습니다.지혜서 14:16 · 본디새김

개인의 감정에서 시작된 일이 권위와 시간이 결합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구속력을 가진 질서가 되었습니다. 인간적인 감정과 필요가 어떻게 신적인 권위의 근거로 바뀔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이제 슬픔 대신 권력과 명예욕이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다만 이 이야기를 실제 모든 우상 숭배가 반드시 자녀를 잃은 아버지 한 사람에게서 시작되었다는 역사 기록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저자는 우상 숭배가 어떻게 생겨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기원 이야기의 형식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의 관심은 종교의 역사를 완전하게 재구성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권력자의 초상은 어떻게 신상이 되었는가?

지혜서 14:17–21 본문 →

사람들은 멀리 살아 그들을 직접 공경할 수 없었기에, 멀리 있는 그 모습을 본떠 공경받는 왕의 형상을 눈에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곁에 없는 이에게 곁에 있는 것처럼 열성을 다해 아첨하려는 것이었습니다.지혜서 14:17 · 본디새김

고대 세계에서는 통치자의 초상과 조각상이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도 왕의 존재와 권위를 나타내는 역할을 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단순히 왕의 형상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 형상을 통해 권력자에게 아첨하고, 자신의 충성을 과시하려는 행동입니다.

없는 사람을 있는 것처럼 만드는 형상

형상은 멀리 있는 권력을 눈앞에 나타나게 하는 수단이 됩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점점 그 형상 자체에 특별한 권위를 부여하게 됩니다.

이것은 앞의 자녀를 잃은 아버지의 이야기와 닮아 있습니다. 그 이야기에서는 죽은 자녀를 기억하기 위해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여기서는 멀리 있는 왕을 공경하기 위해 형상을 만듭니다. 두 경우 모두 원래 존재했던 사람을 대신하는 형상에서 시작합니다.

장인의 공명심은 무엇을 바꾸었는가? (18–19절)

장인의 공명심은 알지 못하던 이들까지도 부추겨 숭배를 더욱 드높이게 했습니다.지혜서 14:18 · 본디새김

19절에 따르면 그는 권력자의 환심을 사려고 그 형상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 냅니다. 그의 기술은 뛰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술의 목적은 권력자의 환심을 얻는 데 있습니다.

배를 만드는 기술은 생명을 보호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형상을 만드는 기술은 사람을 과장되게 높이고, 그에게 신적인 권위를 부여하는 과정에 사용됩니다.

같은 기술적 능력이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아름다움에 끌려 신으로 여기다 (20절)

무리는 작품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조금 전까지 공경하던 사람을 이제는 숭배의 대상으로 여겼습니다.지혜서 14:20 · 본디새김

이 구절은 13장의 자연 숭배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자연의 아름다움에 설득되어 그것을 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는 장인이 만든 작품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왕을 신적인 존재로 높입니다.

그러나 아름다움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아름다움이 지닌 힘을 잘못 사용하거나, 아름다운 형상이 나타내는 대상을 그 형상 이상으로 높이는 데 있습니다.

다른 것과 나눌 수 없는 이름 (21절)

이것은 삶에 덫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재앙이나 폭정의 노예가 되어, 다른 것과 나눌 수 없는 이름을 돌과 나무에 붙였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4:21 · 본디새김

재앙의 노예가 된 사람들.

폭정의 노예가 된 사람들.

첫 번째는 자녀를 잃은 아버지의 슬픔을, 두 번째는 권력자를 숭배하는 사람들의 처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본문의 핵심은 인간이 만든 형상에게 하나님께 속한 특별한 지위를 부여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형상을 만들었지만, 그 형상에 부여한 권위가 다시 사람을 사로잡는 질서가 된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21절의 「다른 것과 나눌 수 없는 이름」을 앞의 8절과 연결하면, 피조물에 붙여서는 안 되는 신적인 이름을 돌과 나무에 부여했다는 뜻이 분명해집니다. 다만 이 표현이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인 「여호와야훼」만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하나님이라는 신적인 칭호와 지위를 넓게 가리키는지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무지의 전쟁을 평화라고 부르는 사람들

지혜서 14:22–27 본문 →

22절에 이르면 저자는 우상 숭배의 결과가 개인의 신앙이나 종교 의식에만 머무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고도 하나님을 아는 일에서 길을 잘못 든 것으로는 부족했습니다. 그들은 무지의 큰 전쟁 속에서 살아가면서, 그토록 많은 악을 평화라고 부릅니다.지혜서 14:22 · 본디새김

전쟁을 평화라고 부른다는 역설

「무지의 큰 전쟁」은 실제 전쟁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저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가 인간 사회의 갈등과 무질서로 나타났다고 설명합니다.

무엇이 평화인지 판단하는 기준 자체가 뒤집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서로를 해치고, 약자를 죽이고, 혼인을 파괴하고, 거짓말과 배신을 일삼는데도 그것을 정상적인 질서로 받아들인다는 비판입니다.

여기서 「평화」라는 이름은 실제 상태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상태의 문제를 가리는 이름이 됩니다.

이것은 예레미야 6:14의 말씀과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예언자는 사람들이 평화가 없는데도 평화롭다고 말한다고 비판합니다. 두 본문은 문맥이 다르지만, 실제로는 무너진 상태를 평화라고 부르는 거짓된 안심을 문제 삼는다는 점에서 연결됩니다.

우상 숭배에서 인간관계의 파괴로 (23–26절)

23절부터는 악행들이 길게 나열됩니다. 자녀를 죽이는 의식, 은밀한 제의, 광란의 잔치, 살인, 간음, 도둑질, 속임, 거짓 맹세, 은혜를 잊는 일 등이 이어집니다. 의도적으로 악행들을 쌓아 올리는 듯한 문장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 목록을 당시 우상을 숭배하던 모든 사람이 실제로 이런 죄를 저질렀다는 객관적인 인구 통계나 역사 기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지혜서 저자가 우상 숭배의 결과를 강하게 비판하는 종교적·윤리적 논증입니다.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중요한 관계들이 차례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생명이 존중받지 못합니다.

혼인이 신뢰를 잃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속이고 해칩니다.

공적인 약속과 맹세도 믿을 수 없게 됩니다.

「모든 악의 시작이자 원인이며 끝」 (27절)

이름 없는 우상들을 숭배하는 일이 모든 악의 시작이자 원인이며 끝이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4:27 · 본디새김

저자는 우상 숭배가 악의 발생과 지속, 그리고 결과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역사적 사건의 순서를 설명하는 문장이 아니라, 우상 숭배가 인간의 삶을 근본적으로 왜곡한다고 보는 강한 신학적 평가로 이해해야 합니다.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그것을 매우 구체적인 행동으로 보여줍니다.

거짓 맹세입니다.

조금 더 깊이

25–26절의 긴 목록에는 번역상 주의할 표현도 있습니다. 하나는 「선한 이들을 뒤흔드는 소란」입니다. 그리스어 토뤼보스 아가톤에서 아가톤은 좋은 사람들이라는 뜻으로도, 좋은 것들이라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선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혼란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좋은 것들을 둘러싼 소란이나 무질서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문맥만으로 어느 쪽인지 완전히 결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또 다른 표현은 「혈통을 뒤섞음」입니다. 그리스어 게네세오스 에날라게는 출생이나 혈통의 변화, 또는 성적인 질서의 변동과 관련된 표현으로 읽혀 왔습니다. 본문은 혼인과 간음에 관한 여러 표현 사이에 이 말을 배치합니다. 그러나 정확히 어떤 특정 행위를 가리키는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현대의 특정 성적 정체성이나 사회 집단에 대한 직접적인 판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원문의 의미를 넘어서는 일입니다. 본문에서 확실히 드러나는 것은 저자가 자신이 이해한 삶과 혼인의 질서가 무너지는 상황을 비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신상을 믿는 사람은 왜 거짓 맹세를 두려워하지 않는가?

지혜서 14:28–31 본문 →

맹세는 인간이 자신이 하는 말에 책임을 지겠다고 선언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신의 이름을 걸고 하는 맹세는 그 신이 진실을 알고 있으며 거짓을 심판할 수 있다는 생각을 전제로 합니다.

생명 없는 우상은 거짓말을 심판할 수 없다 (29절)

생명 없는 우상들을 믿기에, 거짓으로 맹세하고도 해를 입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지혜서 14:29 · 본디새김

여기서 저자는 우상 숭배의 모순이 윤리적 문제로 이어진다고 설명합니다. 신적 권위가 실제로 없는 대상에게 맹세하면, 맹세의 책임까지 가볍게 여기게 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두 가지 잘못에 대한 심판 (30절)

그러나 두 가지 일에 대한 마땅한 벌이 그들을 뒤쫓을 것입니다. 그들이 우상들에게 마음을 두어 하나님에 관해 그릇되게 생각했고, 거룩함을 업신여겨 속임수로 불의하게 맹세했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4:30 · 본디새김

여기서 믿음의 오류와 윤리적 행동이 나란히 놓입니다. 지혜서의 저자는 하나님에 관한 생각과 인간의 행동을 서로 분리하지 않습니다. 신에 관한 잘못된 판단은 인간이 책임을 이해하는 방식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마지막 구절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우상의 능력이 아니라 죄에 대한 심판이 뒤따른다 (31절)

맹세의 대상으로 삼은 것들의 능력이 아니라, 죄지은 자들에게 돌아가는 벌이 언제나 불의한 자들의 범죄를 뒤쫓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4:31 · 본디새김

맹세의 대상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도 중요하지만, 맹세한 사람이 실제로 진실을 말했는가 하는 문제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신상이 무능하다는 사실이 거짓말을 정당화하지는 못합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생명 없는 형상에 신적인 권위를 부여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형상이 아무 능력도 없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 합니다.

사람이 만들어 낸 신에게 책임을 떠넘길 수는 있어도, 자신이 행한 불의를 없었던 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맺음말 — 바다를 건너게 하는 나무와 거짓 맹세를 받는 나무

지혜서 14:1–31 본문 →

처음에 나무는 사람을 바다 건너편으로 옮겼습니다. 마지막에 나무는 사람이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데 이용하는 물건이 되었습니다. 같은 나무라도 하나님의 의로운 일에 쓰이면 생명을 보존하는 도구가 되고, 인간이 그것을 하나님으로 높이면 오히려 삶을 속박하는 덫이 됩니다.

바다는 여전히 거칠고, 배는 여전히 나무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배에 생명을 맡기고 바다를 건넙니다. 그러나 그들을 안전하게 이끄시는 분은 나무로 만든 신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버지, 그 배를 이끄는 것은 당신의 섭리입니다.」

지혜서 14장이 우리를 다시 바라보게 하는 것은 바로 그 바다 위의 길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