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서 풀어 읽기 · 15장
이 장의 자리 · 13–15장 · 우상을 섬기는 어리석음
사람이 하나님을 빚으려 할 때
사람은 흙으로 그릇을 만들 수 있습니다. 정교한 형상을 빚고, 아름다운 색을 입히고, 사람들이 그 앞에서 경탄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장인이라도 자신이 만든 형상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을 수는 없습니다.
지혜서 15장은 이 당연해 보이는 사실에서 놀라운 역설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 생명을 받은 사람이, 자기 손으로 만든 물건을 생명의 주인으로 섬긴다는 것입니다.
이 장은 하나님에 대한 고백으로 시작하여 우상을 만드는 장인의 손을 자세히 들여다본 다음, 이스라엘을 억압했던 사람들의 신앙으로 시선을 넓힙니다. 그 모든 장면을 관통하는 것은 하나의 물음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하나님으로 여기느냐는, 결국 사람이 자기 자신을 어떤 존재로 이해하느냐와 어떻게 연결됩니까?
죄를 짓더라도 저희는 당신의 것입니다
15장은 뜻밖에도 우상숭배자들을 비판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저희 하나님이신 당신은 선하고 참되시며, 오래 참으시고 자비로 만물을 다스리십니다.지혜서 15:1 · 본디새김
앞 장에서는 사람들이 어떻게 형상을 신으로 높이고, 그릇된 숭배가 어떻게 인간관계와 사회의 질서까지 무너뜨리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저자는 그 긴 이야기에서 시선을 돌려 하나님께 직접 말합니다.
사람들이 숭배하는 대상은 거짓되지만 하나님은 참되십니다. 사람들이 만든 형상은 아무것도 다스리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만물을 다스리십니다. 그런데 저자는 하나님의 통치에서 힘이나 위엄보다 먼저 자비를 강조합니다.
이것은 앞서 지혜서 11–12장에서 전개한 하나님의 통치 이해와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잘못을 즉각 멸망으로 되갚으시는 대신 사람들이 돌이킬 기회를 얻도록 오래 참으십니다(11:23–12:2). 하나님의 능력은 그분의 자비와 대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능력이 크시기 때문에 오래 참으실 수 있습니다(12:16–18).
저희가 죄를 짓더라도 저희는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의 힘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죄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 저희가 당신의 것으로 헤아려졌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5:2 · 본디새김
첫 문장은 죄를 지었을 때에도 사라지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서 곧바로 하나님께 돌아갈 길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문장은 바로 그 관계를 알고 살아가는 사람이 취해야 할 태도를 말합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분을 거스르는 삶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따라서 「저희는 죄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말은 공동체가 앞으로 단 한 번도 죄를 범하지 않으리라는 객관적 예언이라기보다,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 드리는 신앙의 다짐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사람이 죄를 짓지 않아야 비로소 하나님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기 때문에 죄에서 멀어지려는 것입니다.
당신을 아는 것이 온전한 의이고, 당신의 힘을 아는 것이 죽지 않음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5:3 · 본디새김
앞의 두 절을 함께 읽으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자신이 그분께 속해 있음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그 지식은 하나님의 자비를 신뢰하고 그분의 뜻에 맞추어 살아가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온전한 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올바른 삶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지혜서는 앞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썩지 않도록 창조하셨다고 말하고(2:23), 의로운 이들의 소망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3:1–9). 여기서 저자는 그 소망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밝힙니다.
죽지 않음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내는 성취가 아닙니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관계에 뿌리를 둡니다.
숨 없는 형상을 갈망하는 사람들
사람들의 간교한 발상도, 화가들의 열매 없는 수고, 곧 여러 빛깔의 물감으로 얼룩진 형상도 저희를 속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5:4 · 본디새김
이 절에서 저자가 비판하는 대상은 단순히 조잡하고 볼품없는 우상이 아닙니다.
사람의 생각과 기술이 결합하여 만들어 낸 정교한 형상입니다. 그림을 그리고, 여러 색으로 장식하여 보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작품입니다.
앞 장의 14:18–20에서도 장인의 뛰어난 솜씨가 사람들의 숭배를 더욱 부추기는 과정이 묘사되었습니다. 아름다운 형상이 사람을 감동시키고, 그 감동이 형상에 대한 경외로 변하며, 마침내 형상을 신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아름다운 형상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아니라, 그 형상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신적 능력을 부여하는 인간의 판단입니다.
「열매 없는 수고」라는 표현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장인이 아무런 기술적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작품은 정교하고 매력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생명의 근원으로 믿을 때, 그 수고는 기대한 열매를 낳지 못합니다.
그것들을 보는 일은 어리석은 자들에게 치욕이 되고, 어리석은 자는 죽은 형상의 숨 없는 모습을 갈망합니다.지혜서 15:5 · 본디새김
사람들은 형상을 생생하게 보이도록 만듭니다. 얼굴을 그려 넣고, 눈을 만들고, 살아 있는 사람이나 동물을 닮도록 장식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실제처럼 보여도 그 형상은 숨을 쉬지 않습니다.
15장에서는 이 「숨」이 뒤에 다시 등장합니다. 우상을 만든 사람에게는 하나님께 받은 생명의 숨이 있지만, 그가 만든 우상에는 그 숨이 없습니다.
그것들을 만드는 자도 갈망하는 자도 숭배하는 자도 악을 사랑하는 자들이며 그런 소망에 걸맞은 자들입니다.지혜서 15:6 · 본디새김
세 부류가 모두 등장하는 것은 우상숭배가 개인의 잘못된 생각만으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형상을 제작하고, 누군가는 그 형상에 매력을 느끼고, 누군가는 그것을 신으로 섬깁니다. 이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하나의 거짓된 신앙을 형성합니다.
마지막의 「그런 소망에 걸맞은 자들」이라는 말은 앞의 「죽지 않음의 뿌리」와 대조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께 소망을 둡니다. 반대로 숨 없는 형상을 신으로 여기는 사람은 그 형상이 실제로 줄 수 없는 것을 기대합니다.
무엇을 소망하느냐는 그 소망의 대상이 실제로 무엇을 줄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5절에는 본문을 읽는 데 영향을 주는 원문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본문에 제시된 「치욕」은 그리스어 오네이도스에 해당합니다. 반면 다른 그리스어 본문에는 오렉신(욕망)이라는 독법이 전해집니다. 「치욕」으로 읽으면 우상을 바라보는 어리석은 사람의 행위가 얼마나 수치스러운지를 강조합니다. 「욕망」으로 읽으면 우상을 보는 순간 마음속에 욕망이 일어나는 과정이 전면에 나옵니다. 두 독법은 강조점이 다르므로 동일하게 취급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어지는 「갈망합니다」와 6절의 「갈망하는 자」는 어느 독법을 택하더라도 우상숭배가 인간의 욕망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릇을 만드는 손이 신을 만들기 시작할 때
7절에서는 토기장이가 등장합니다.
사실 토기장이도 부드러운 흙을 주무르며 저희가 쓸 물건 하나하나를 힘들여 빚습니다. 그런데 그는 같은 진흙으로 깨끗한 일에 쓰이는 그릇도 그 반대의 일에 쓰이는 그릇도 모두 똑같이 빚었습니다. 이 두 종류의 그릇을 각각 어디에 쓸지 판단하는 이는 옹기장이입니다.지혜서 15:7 · 본디새김
흙은 스스로 목적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장인이 모양을 정하고 쓰임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그 장인이 같은 흙으로 신의 형상을 만들기 시작하면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또 그는 악한 일에 힘을 쏟으며 같은 진흙으로 헛된 하나님을 빚습니다. 그는 얼마 전에 흙에서 생겨났으며, 목숨이라는 빚을 갚으라는 요구를 받고 머지않아 자기가 취해진 흙으로 돌아갑니다.지혜서 15:8 · 본디새김
그릇을 만드는 일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흙은 사람에게 유익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흙으로 신을 빚고 그것을 섬길 때, 사람은 도구와 신의 자리를 뒤바꿉니다. 자기 손으로 용도를 결정한 물건을 자기 운명을 결정하는 존재로 높여 놓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선이 갑자기 바뀝니다.
지금까지는 장인이 흙을 주무르는 손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그 장인 자신도 흙에서 왔다고 말합니다.
창세기 2:7과 3:19가 겹쳐지는 대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의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고, 범죄한 인간에게 다시 흙으로 돌아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지혜서는 그 창조와 죽음의 언어를 사용하여 한 장면에 두 종류의 제작을 겹쳐 놓습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인간을 빚으셨습니다. 인간은 다시 흙으로 신을 빚습니다.
그러나 두 행위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드신 인간에게 생명을 주셨지만, 인간은 자신이 만든 신에게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장인은 정작 이 사실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죽게 되리라는 데에도, 자기 삶이 짧다는 데에도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금세공인들과 은세공인들에게 맞서 겨루고, 구리 장인들을 본뜨며, 가짜들을 빚는 일을 영광으로 여깁니다.지혜서 15:9 · 본디새김
금세공인, 은세공인, 구리 장인이 등장하는 것은 제작 기술과 재료의 차이를 보여 줍니다. 진흙을 다루는 장인이 값비싼 재료를 다루는 장인들과 겨루며, 자신도 그럴듯한 신상을 만들 수 있음을 과시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무엇을 만들었느냐보다 얼마나 그럴듯하게 만들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럴듯하게 보이는 가짜를 만드는 일조차 영광이 됩니다.
문제는 사람이 무엇을 만들 수 있는지에 몰두하다가, 자기 자신은 누구에게서 생명을 받았는지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 대목은 예레미야 18:1–6의 토기장이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예레미야에서는 토기장이가 진흙을 다루는 모습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주권을 보여 줍니다. 지혜서 15장에서는 그 비유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진흙을 다룰 수 있는 인간이 바로 그 진흙으로 하나님을 만들려는 모순을 드러냅니다. 같은 토기장이의 작업이지만 질문은 다릅니다. 예레미야가 누가 인간을 다스리는지를 묻는다면, 지혜서는 인간이 왜 자기가 만든 물건에게 다스림을 기대하는지를 묻습니다.
그의 마음은 재입니다
이제 저자는 장인의 손에서 그의 마음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그의 마음은 재이고, 그의 소망은 흙보다 하찮으며, 그의 삶은 진흙보다 천합니다.지혜서 15:10 · 본디새김
진흙은 그릇을 만들 수 있는 재료입니다. 모양을 바꾸고 새로운 용도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재는 이미 무엇인가 타고 남은 잔해입니다.
「그의 마음은 재」라는 표현은 칠십인역 이사야 44:20의 우상 비판과도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도 우상에 미혹된 사람의 마음이 재라는 이미지로 묘사됩니다.
이사야 44:9–20에서는 한 사람이 나무를 가져다가 일부는 불을 피우는 데 쓰고, 나머지로 신상을 만들어 섬깁니다. 그는 같은 나무가 땔감이 되기도 하고 우상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생각하지 못합니다. 지혜서는 나무 대신 흙을 사용하여 비슷한 모순을 드러냅니다.
그는 자기를 빚으시고, 자기에게 활동하는 영혼을 불어넣으시고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신 이를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5:11 · 본디새김
「활동하는 영혼」과 「생명의 숨」은 서로 완전히 분리된 두 물질을 설명한다기보다, 인간이 실제로 살아 움직이는 존재가 된 사실을 풍성하게 표현하는 말로 읽을 수 있습니다. 특히 여기에는 창세기 2:7의 언어가 분명하게 반영되어 있습니다. 칠십인역 창세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빚으시고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셨으며, 사람이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기술과 하나님의 창조를 구별하는 것은 형상의 정교함이 아니라 생명의 선물입니다.
이것이 10절에서 그의 마음이 재가 되었다고 말한 이유입니다. 저자는 그 인간이 본질적으로 진흙보다 가치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생명을 받은 존귀한 존재가 자신의 기원을 잊고 스스로를 헛된 일에 내맡기는 비극을 강조합니다.
이제 12절에서는 그러한 망각이 삶의 태도를 어떻게 바꾸는지가 드러납니다.
오히려 그는 저희의 생명을 놀이로, 삶을 이문 남는 장터로 여겼습니다. 어떤 수단으로든, 악한 짓을 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5:12 · 본디새김
「삶을 이문 남는 장터로 여겼습니다」라는 표현은 인간의 삶 전체를 이익을 얻는 기회로 바라보는 태도를 드러냅니다. 장터는 본래 물건을 사고파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그 장터의 논리가 삶 전체를 지배하면 무엇이든 이익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대상이 됩니다.
종교도 예외가 아닙니다.
사람이 신을 숭배하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숭배할 신을 만들어 팔고 그것으로 돈을 법니다. 저자는 정상적인 노동과 거래 자체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이 장인의 문제는 이익을 위해 옳고 그름의 경계까지 무너뜨린다는 데 있습니다.
자신이 만든 것이 참된 신이 아니라는 사실보다, 그것을 팔아 이익을 얻는 일이 더 중요해진 것입니다.
흙으로 된 재료로 깨지기 쉬운 그릇과 새긴 형상들을 만드는 이 사람은, 자기가 죄를 짓고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5:13 · 본디새김
11절에서는 그가 자신을 빚으신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13절에서는 그가 자신이 죄를 짓고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말합니다.
그는 모르는 것이 있고, 아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 생명의 근원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이 대조는 그의 행위를 단순한 무지로만 설명할 수 없게 합니다. 본문은 장인이 자신의 작업을 속이거나 부당하게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의식하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다만 모든 우상 제작자가 실제로 이러한 자각을 가졌다는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려는 구절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은 저자가 탐욕과 거짓된 숭배의 관계를 드러내기 위해 제시하는 도덕적 평가입니다.
여기서 지혜서의 우상 비판은 형상 자체를 넘어섭니다. 무엇을 신으로 섬기는가의 문제는 곧 인간의 노동과 돈, 그리고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의 문제로 확장됩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 한 번도 살아 본 적 없는 것을 섬기다
14절에서 저자는 토기장이 한 사람에게 머물던 시선을 더 넓은 집단으로 옮깁니다.
그러나 당신의 백성의 원수들, 그 백성을 억눌렀던 자들은 모두 더없이 어리석고, 어린아이보다도 가련합니다.지혜서 15:14 · 본디새김
「당신의 백성의 원수들」은 지혜서의 큰 문맥에서 이스라엘을 억압했던 이집트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지혜서 10:15–11:14에서는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구해 내신 하나님의 일을 회상했고, 11:15와 12:23–27에서는 이집트 사람들의 그릇된 숭배와 그들이 받은 징계를 언급했습니다.
13–15장의 우상 비판은 그 역사적 회상 가운데 길게 삽입된 부분입니다. 15장 마지막에서는 다시 이집트의 숭배 관행으로 초점이 모아지고, 16장부터는 이집트의 재앙과 이스라엘의 구원을 본격적으로 대조합니다.
어린아이는 세상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저자가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회를 조직하고 다른 백성을 억압할 수 있을 정도의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서는 오히려 분별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권력과 지혜가 반드시 함께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민족들의 모든 우상도 신들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눈을 써서 보지도 못하고, 코로 공기를 들이쉬지도 못하며, 귀로 듣지도 못하고, 손가락으로 만지지도 못합니다. 그 발도 걸음을 내딛는 데 쓸모가 없습니다.지혜서 15:15 · 본디새김
이것은 시편 115:4–8과 135:15–18에서 이미 나타난 우상 비판의 전통과 연결됩니다. 우상은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졌으며, 입과 눈과 귀를 가지고도 그 기능을 수행하지 못합니다.
앞의 4–5절에서는 형상의 외적인 모습이 사람들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이제 저자는 그 외형 안에 실제로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게 합니다.
형상은 눈에 보입니다. 하지만 형상 자신은 보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형상에게 말을 걸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형상은 듣지 못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우상이 움직이지 못한다는 조롱을 넘어, 우상이 참된 관계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것은 숭배자의 기도를 듣거나 필요를 살피거나 응답할 능력이 없습니다.
15장의 첫머리에서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고 자비로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으로 소개되었습니다. 반면 우상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조차 알아보지 못합니다.
사람이 그것들을 만들었고, 숨을 빌려 받은 자가 그것들을 빚었기 때문입니다. 실로 어떤 사람도 자기와 같은 하나님을 빚어 낼 수 없습니다.지혜서 15:16 · 본디새김
앞의 8절에서 생명은 언젠가 갚아야 할 「빚」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여기서는 그 생명이 애초에 빌려 받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상을 만드는 사람은 자기 생명을 스스로 만들어 내지 못했습니다. 그는 생명의 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받은 그 생명을 자신이 만든 물건에 줄 수도 없습니다.
이 때문에 「어떤 사람도 자기와 같은 하나님을 빚어 낼 수 없습니다」라는 말은 사람과 똑같은 모양의 신상을 만들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은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한 형상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와 같이 살아 있는 존재조차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생명의 주인인 하나님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더욱 불가능합니다.
그는 죽을 몸이면서 불법을 행하는 손으로 죽은 것을 만들어 냅니다. 실로 그는 자기가 숭배하는 것들보다 낫습니다. 그 자신은 살아 본 적이 있지만, 그것들은 한 번도 살아 본 적이 없습니다.지혜서 15:17 · 본디새김
저자는 우상을 만드는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만 말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자신이 숭배하는 우상보다 본래 더 나은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우상숭배의 비극은 인간이 아무 가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생명을 받은 인간이 자기보다 못한 것을 높이고, 그 앞에 자신을 낮추는 데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러한 이해는 구약의 창조 신앙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창세기 1:26–27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형상 가운데 갇히실 수 없는 이유와, 인간이 피조물임에도 존귀한 이유가 서로 연결됩니다. 이것은 지혜서 15장이 창세기의 모든 신학을 직접 설명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두 본문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정반대 방향에서 조명합니다.
생명의 주인이 아니라 피조물을 숭배하다
마지막 두 절은 다시 동물 숭배로 돌아갑니다.
또 그들은 가장 혐오스러운 짐승들까지 숭배합니다. 그 짐승들은 생각 없기로 견주어 보면 다른 짐승들보다 더 못하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5:18 · 본디새김
이집트에는 동물의 형상을 신과 연결하거나 특정 동물을 신성한 존재로 대우하는 종교적 관행이 있었습니다. 저자는 그 가운데 일부를 「가장 혐오스러운 짐승들」이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은 동물의 객관적 가치를 분류한 과학적 판단이라기보다, 이스라엘의 신앙과 정결 관념을 배경으로 한 저자의 비판적 평가로 이해해야 합니다.
저자는 인간보다 분별력이 부족한 동물이 인간의 숭배 대상이 되는 역전을 강조합니다.
이제 사람은 살아 있는 동물까지 숭배합니다. 그런데 동물에게 생명이 있다는 사실이 그 동물을 하나님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흙으로 만든 형상이든 살아 있는 동물이든, 모두 창조주와 구별되는 존재입니다.
그것들은 짐승들의 생김새로 보아도 갈망할 만큼 아름답지도 않으며, 하나님의 칭찬과 그의 복에서도 벗어나 있습니다.지혜서 15:19 · 본디새김
「갈망할 만큼 아름답지도 않으며」라는 말은 앞의 5절에서 숨 없는 형상을 갈망하는 사람들과 연결됩니다. 저자는 앞에서 사람들이 아름답게 꾸민 형상에 마음을 빼앗기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름다움조차 숭배의 이유가 되기 어려운 동물들을 신으로 섬기는 모습을 제시합니다. 그만큼 그들의 숭배가 합리적인 판단과 거리가 멀어졌다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저자의 핵심 관심은 피조물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숭배받을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지혜서 16장에서는 이집트 사람들이 동물과 곤충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겪는 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먹을거리를 받는 장면이 펼쳐집니다. 15장에서 숭배의 대상으로 등장한 피조물은 16장에서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놓인 존재로 다시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피조물을 의지한 사람들은, 바로 그 피조물을 통해 자신들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조금 더 깊이
마지막의 「하나님의 칭찬과 그의 복에서도 벗어나 있습니다」라는 표현은 조금 더 신중하게 읽어야 합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체들을 좋게 보시고, 물속 생명체와 새들에게 복을 주십니다(1:20–25). 반면 창세기 3:14에서는 뱀이 저주를 받습니다. 지혜서의 표현은 이러한 창조와 저주의 언어를 배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구절을 모든 특정 동물 종류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서 실제로 배제되었다는 문자적인 생물학적 주장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특정한 동물 숭배를 비판하는 논쟁적 문맥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과 인간을 아는 일
여기서 우리는 지혜서가 말하는 「하나님을 아는 것」의 깊이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자기 존재의 근원이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아는 것이며, 자신과 세상에 대한 판단을 그 사실에 비추어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하나님을 아는 일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바르게 이해하는 일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토기장이의 작업장으로 돌아가 봅니다.
장인의 손에는 아직 부드러운 진흙이 있습니다. 그는 그 흙으로 그릇을 만들 수도 있고, 신의 형상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기술에 따라 얼마든지 모양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손에서 어떤 형상이 완성되더라도, 그것은 스스로 숨 쉬기 시작하지 않습니다.
반면 그 형상을 빚는 장인은 지금 숨을 쉬고 있습니다. 그는 흙에서 나왔지만 살아 움직이며 생각하고, 선택하고,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가 가진 가장 놀라운 것은 자신이 만든 형상이 아닙니다.
그 형상을 만들고 있는 자기 자신이 이미 하나님께 생명을 받은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지혜서 15장은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의 손과, 그 사람에게 생명의 숨을 주신 하나님의 일을 나란히 보여 줍니다. 그리고 독자로 하여금 장인의 손에 들린 진흙이 아니라, 그 진흙을 빚고 있는 사람이 어디에서 생명을 받았는지를 바라보게 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