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서 풀어 읽기 · 16장
이 장의 자리 · 16–19장 · 갈라진 두 백성의 길
불에도 녹지 않던 빵이 햇살에 녹은 이유
불 속에서도 녹지 않던 음식이 아침 햇살을 받자 녹아 버립니다.
지혜서 16장의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이 기묘한 장면은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질서를 뒤집습니다. 저자는 이것을 단순히 놀라운 기적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일을 통해 이스라엘이 배워야 할 것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음식이 사람을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니라니, 무슨 뜻일까요? 사람은 실제로 음식을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지혜서의 저자도 이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이 장에서 하나님은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거리를 주시고, 독에 물린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시기 때문입니다.
지혜서 16장은 출애굽의 여러 사건을 이러한 관점에서 다시 읽습니다. 이집트에 닥친 재앙과 광야의 이스라엘이 경험한 구원을 나란히 놓으면서, 같은 피조물이 어떤 이에게는 고통의 수단이 되고 어떤 이에게는 생명의 선물이 되는 이유를 묻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자는 더욱 중요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백성 역시 고통에서 완전히 제외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굶주렸고, 뱀에게 물렸으며, 죽음의 위협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 경험의 결말은 달랐습니다.
먹을 것을 갈망하지만 먹지 못하는 사람들
그러므로 그들은 그와 비슷한 것들로 마땅한 벌을 받았고, 짐승들의 큰 떼로 괴로움을 겪었습니다.지혜서 16:1 · 본디새김
첫머리의 「그러므로」는 앞 장 마지막에 등장한 동물 숭배를 이어받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이 피조물을 신처럼 섬겼으므로,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피조물을 통해 그들이 의지하던 대상의 실상을 드러내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지혜서 11:15–16에서 이미 제시된 원리와 같습니다.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는 데 사용한 바로 그것이 그 사람을 징계하는 수단이 됩니다.
이제 저자는 그 재앙을 이스라엘의 경험과 대조합니다.
당신은 그런 벌 대신 당신의 백성에게 은덕을 베푸시어, 먹고 싶은 욕구를 채우도록 낯선 맛을 지닌 먹을거리인 메추라기를 마련하셨습니다.지혜서 16:2 · 본디새김
메추라기는 출애굽기 16:13과 민수기 11:31–34에 등장합니다. 두 본문은 같은 먹을거리를 서로 다른 상황에서 보여 줍니다.
출애굽기 16장에서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녁에 메추라기를 보내시고 아침에는 만나를 주십니다. 메추라기는 백성의 필요에 대한 하나님의 공급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민수기 11장에서는 상황이 다릅니다. 이미 만나를 먹고 있던 백성이 고기를 요구하며 불평하고, 하나님께서 메추라기를 보내신 뒤 그들의 탐욕에 대한 재앙이 뒤따릅니다.
지혜서 16장은 이 가운데 공급의 측면을 전면에 내세웁니다. 이것은 민수기 11장의 부정적인 장면을 부정한다기보다, 출애굽 전승에서 하나님의 자비로운 공급이라는 요소를 선택하여 이집트의 재앙과 대조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먹을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필요를 해결하시는 데 그치지 않고, 평소에 경험하지 못했던 먹을거리까지 마련하십니다. 이것은 뒤에 등장할 만나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20–21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빵이 모든 입맛에 맞는다고 묘사됩니다.
저들은 먹을거리를 갈망하면서도 그들에게 보내진 것들의 드러난 모습 때문에 꼭 필요한 먹을 욕구마저 저버리게 하고, 당신의 백성은 잠시 궁핍을 겪은 뒤 낯선 맛까지 맛보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지혜서 16:3 · 본디새김
3절의 그리스어 본문에는 「드러난 모습」에 해당하는 독법과 「흉측함」(εἰδέχθεια)에 해당하는 독법이 있습니다. 후자를 따르면 이집트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보내진 생물들의 흉측한 모습 때문에 음식에 대한 욕구마저 잃었다는 뜻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어느 독법을 택하든 이야기의 중심적인 대조는 유지됩니다. 한쪽에서는 먹고 싶은 마음이 괴로움으로 바뀌고, 다른 쪽에서는 부족함이 만족으로 바뀝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음식의 유무보다 그 음식을 받아들이는 상황입니다.
이집트 사람들이 경험한 피조물은 두려움과 혐오를 일으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받은 피조물은 하나님의 은덕을 경험하게 합니다.
폭군처럼 억누르던 저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궁핍이 닥쳐야 했지만, 이들에게는 자기 원수들이 어떻게 괴로움을 겪는지 보여 주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6:4 · 본디새김
이는 단순한 민족 간의 차이가 아니라, 억압하는 자들과 억압받던 자들 사이의 차이를 강조합니다. 이집트의 고통은 이스라엘을 억압했던 역사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바로 다음 장면에서 저자는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두 집단의 차이는 징계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징계가 어떤 목적을 향해 진행되고,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길을 열어 주셨느냐에 있습니다.
죽음을 가져온 뱀이 구원을 기억하게 하다
짐승들의 무서운 격분이 그들에게 닥치고, 구불구불한 뱀들에게 물려 죽어 갈 때에도, 당신의 노여움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습니다.지혜서 16:5 · 본디새김
여기서 「그들에게」는 앞에서 재앙을 당하던 이집트 사람들이 아니라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킵니다.
민수기 21:4–9의 불뱀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생활에 지쳐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들은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없다고 불평했고, 자신들에게 주어진 음식마저 싫어했습니다.
그러자 뱀들이 나타나 백성을 물었고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먹을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이미 받은 음식에 불평하며 하나님을 거스르는 백성에게 징계도 내리십니다.
그런데 5절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뱀이 아니라 하나님의 노여움이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타이름을 받도록 잠시 뒤흔들렸지만, 당신의 율법의 계명을 되새기게 하는 구원의 표징을 지니고 있었습니다.지혜서 16:6 · 본디새김
민수기 21장에서는 실제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따라서 지혜서가 그 사건의 고통을 없었던 일처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지혜서는 백성에게 닥친 징계의 목적이 그들의 완전한 파멸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도록 명하셨습니다. 뱀에게 물린 사람이 그것을 바라보면 살 수 있었습니다(민수기 21:8–9). 저자는 그 표징이 하나님의 계명을 기억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고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구출하셨고, 광야에서 먹이셨으며,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광야의 어려움 속에서 그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구리 뱀은 자신들의 불평과 그 결과를 돌아보게 하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여전히 그들을 살리실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했습니다.
그 표징은 죽음의 위험을 없애는 물건이기 전에, 하나님을 잊어버린 백성의 시선을 다시 하나님께 향하게 하는 수단이었습니다.
그쪽으로 돌아선 이는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모든 이의 구원자이신 당신 때문에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6:7 · 본디새김
구리 뱀은 눈에 보이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주시는 분은 보이는 형상 너머에 계셨습니다.
열왕기하 18:4에 따르면, 훗날 사람들이 모세가 만든 구리 뱀에 분향하게 되자 히스기야가 그것을 부수었습니다. 원래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게 하던 물건이 시간이 지나 숭배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물건을 통해 일하실 수 있지만, 그 물건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8절에서 저자는 이 사건의 의미를 이스라엘을 넘어 원수들에게까지 확대합니다. 저자는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구원이 원수들에게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드러내는 증거가 된다고 이해합니다.
독보다 강한 것은 약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저들은 메뚜기와 파리에게 물려 죽었고, 그들의 목숨을 구할 치료법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런 것들에게 벌을 받아 마땅했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6:9 · 본디새김
지혜서는 다시 이집트의 재앙과 이스라엘의 경험을 대조합니다.
메뚜기와 파리는 출애굽기 8장과 10장에 등장하는 재앙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출애굽기의 서술 자체는 메뚜기와 파리에게 물려 사람들이 죽었다고 명시하지 않습니다. 지혜서의 9절은 그 재앙의 치명성을 더욱 강하게 표현하는 신학적 재서술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독을 뿜는 큰 뱀들의 이빨조차 당신의 아들들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당신의 자비가 그들을 도우러 와서 고쳤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6:10 · 본디새김
두 집단 모두 생물을 통해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이집트 사람들에게는 치료법을 찾을 수 없었고,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자비가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당신의 말씀들을 기억하도록 찔림을 당했고, 곧 구원받았습니다. 깊은 망각에 빠져 당신의 은덕을 외면하는 이들이 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지혜서 16:11 · 본디새김
「찔림」이라는 표현은 몸의 고통과 기억을 일깨우는 작용을 함께 보여 줍니다. 뱀에게 물린 경험은 실제로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그 경험이 백성을 하나님께서 하신 일로 다시 돌아가게 했다고 설명합니다.
징계의 목적은 단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백성이 하나님의 은덕을 잊은 채 살아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이것을 모든 인간의 질병이나 사고가 특정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라는 일반 법칙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민수기 21장에서 명시적으로 불평과 징계가 연결된 특정 사건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주님, 그들을 고친 것은 약초도 고약도 아니라, 모든 것을 고치는 당신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6:12 · 본디새김
하나님의 명령과 자비가 그들의 생명을 지켰습니다.
「모든 것을 고치는 당신의 말씀」이라는 표현은 앞서 지혜서 9:1에서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만물을 만드셨다는 고백과 연결됩니다. 만물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 피조물의 생명도 지키실 수 있습니다.
당신은 생명과 죽음에 대한 권한을 지니고 계시며, 하데스의 문들로 끌어 내리기도 하시고 이끌어 올리기도 하시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6:13 · 본디새김
저자는 뱀에 물린 사람의 치료에서 생명과 죽음 전체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권한으로 시선을 넓힙니다.
이 고백은 사무엘상 2:6에 나오는 한나의 노래와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곳에서도 하나님께서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려가게도 하시고 올라오게도 하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하데스의 문들」은 그리스어로 표현된 죽은 자들의 세계의 문이라는 이미지입니다. 이는 죽음의 영역을 하나의 닫힌 장소처럼 표현합니다. 사람은 그 문을 스스로 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음의 영역에도 권한을 가지십니다.
이 구절을 특정한 부활 사건의 직접적인 서술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은 우선 생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찬양합니다. 죽음의 세력조차 하나님을 제한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 악의로 죽이기는 해도, 떠나간 영을 돌아오게 하지 못하고, 거두어진 영혼을 풀어 주지도 못합니다.지혜서 16:14 · 본디새김
이 대조는 특히 이스라엘을 억압했던 이집트의 권력과 관련하여 의미가 있습니다. 이집트의 통치자는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고 죽일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권력이 생명을 창조하거나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죽일 수 있는 힘과 생명을 다스리는 권한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자는 이 차이를 자연 세계 전체로 확대합니다. 하나님의 권한은 인간의 생명만이 아니라 물과 불, 바람과 우박에도 미칩니다.
조금 더 깊이
약초와 고약은 고대 세계에서 실제로 사용되던 치료 수단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 사건에서 백성을 고친 것이 그러한 치료법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이 구절을 일반적인 의술의 가치를 부정하는 말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집회서 38:1–8에서는 의사를 존중하고 약을 사용하는 일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지혜와 연결됩니다.
물속에서 불이 더욱 거세게 타오르다
그러나 당신의 손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지혜서 16:15 · 본디새김
앞에서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어도 죽음에서 되돌릴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손을 피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당신을 안다는 것을 부인하던 경건하지 않은 자들은 당신 팔의 힘에 채찍질을 당했고, 기이한 비와 우박과 가차 없는 폭우에 쫓기며 불에 삼켜졌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6:16 · 본디새김
이 장면은 출애굽기 9:22–26에 기록된 우박 재앙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집트 땅에 우박을 내리셨고, 우박 가운데 번쩍이는 불이 함께 나타났습니다. 밭의 식물과 나무들이 큰 피해를 입었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거주하던 고센 땅에는 우박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출애굽기의 불은 폭풍 속의 번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서는 이 장면을 더욱 대담하게 묘사합니다.
가장 놀라운 것은, 모든 것을 끄는 물속에서 불이 더욱 힘을 냈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의로운 이들을 지켜 싸우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6:17 · 본디새김
물은 불을 끕니다. 불은 물을 뜨겁게 만들거나 증발시킵니다. 서로의 작용을 제한하는 것이 우리가 경험하는 자연의 질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집트를 심판하실 때에는 물속에서 불이 오히려 더욱 강하게 타오릅니다.
세상이 단지 인간이 살아가는 무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참여하는 피조세계로 묘사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지혜서 5:17–23에서도 나타납니다. 그곳에서는 하나님께서 창조 세계의 여러 요소를 사용하여 악에 맞서 싸우시는 모습이 묘사됩니다.
그렇다면 자연의 힘은 언제나 의로운 사람에게만 유익하고 악한 사람에게만 해를 끼친다는 뜻일까요? 본문은 그렇게 단순한 자연 법칙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자는 특별한 구원 사건에서 하나님께서 피조세계를 어떻게 사용하셨는지를 신학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불꽃이 누그러졌습니다. 불경한 자들에게 보내진 짐승들을 태워 버리지 않고, 그 불경한 자들이 직접 보고서 자기들이 하나님의 판결로 쫓기고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지혜서 16:18 · 본디새김
이것은 불과 생물들이 서로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우연한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하나의 목적 아래 놓여 있음을 보여 주는 문학적 표현입니다. 다음 절에서는 그 반대의 상황이 등장합니다.
또 때로는 물속에서도 불 본래의 힘을 넘어 타올랐습니다. 불의한 땅의 소출을 망가뜨리려는 것이었습니다.지혜서 16:19 · 본디새김
저자는 자연현상의 작동 원리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반대되는 모습을 나란히 배치하여 자연의 힘이 창조주의 뜻에 종속된다는 사실을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땅에서 음식을 얻을 수 없던 광야의 이스라엘은 무엇으로 살아갈 수 있었을까요? 바로 다음 절에서 저자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을 소개합니다.
모든 입맛에 맞는 빵과 하나님의 달콤함
그 대신 당신은 당신의 백성에게 천사들의 먹을거리를 먹이셨고, 그들이 수고하지 않아도 마련된 빵을 하늘에서 보내셨습니다. 그 빵은 온갖 즐거움을 줄 수 있었고, 모든 입맛에 맞았습니다.지혜서 16:20 · 본디새김
이것은 만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출애굽기 16장에서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백성은 아침마다 그것을 거두어 먹었습니다.
「천사들의 먹을거리」라는 표현은 시편 78:24–25에 나오는 하늘의 양식에 대한 찬양과 연결됩니다. 시편의 히브리어 표현은 문자적으로 「강한 자들의 빵」 또는 「능력 있는 자들의 빵」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칠십인역은 이를 천사들의 빵으로 표현하며, 지혜서는 바로 이러한 그리스어 성경의 표현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이 말은 천사들이 실제로 어떤 식사를 하는지 설명하려는 표현이라기보다, 만나의 기원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있음을 드러내는 찬양의 언어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광야에서 곡식을 심고 자라기를 기다린 뒤 거두어 빵을 만들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노동이 만들어 내지 못하는 곳에서 먹을거리를 마련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에게 아무런 행동도 요구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출애굽기 16:16–21에 따르면 백성은 아침마다 만나를 거두어야 했고, 필요한 만큼만 모아야 했습니다.
만나는 노동을 완전히 없앤 음식이 아니라, 인간의 노동에 앞서 하나님의 공급이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음식이었습니다.
당신의 양식은 자녀들을 향한 당신의 달콤함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그 빵은 먹는 이의 욕구에 응하여 누구든 바라는 대로 바뀌었습니다.지혜서 16:21 · 본디새김
「당신의 달콤함」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만나가 달콤했다는 뜻에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어떻게 대하시는지를 음식의 맛으로 표현합니다.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메추라기를 통해 「낯선 맛」을 주셨습니다. 이제 만나에서는 그보다 더 풍성한 맛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의 생명을 겨우 유지할 만큼만 공급하시는 분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그들이 먹는 일에서 즐거움을 경험하도록 배려하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출애굽기 16:31은 만나의 맛을 꿀을 넣은 과자에 비유하고, 민수기 11:8은 기름을 넣어 만든 과자와 비슷한 맛이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두 본문 모두 만나가 먹는 사람마다 원하는 맛으로 바뀌었다고 직접 말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지혜서 16:21은 출애굽기의 기록을 그대로 옮긴 설명이 아니라, 만나에 담긴 하나님의 풍성한 공급을 강조하는 시적·신학적 확장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16장 전체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당신의 아들들」 또는 「자녀들」로 불립니다(16:10, 21, 26). 따라서 하나님이 마련하시는 음식은 단순한 국가적 구호품이 아니라 자녀를 돌보시는 분의 선물로 묘사됩니다.
하나님의 공급은 생명을 유지하는 능력일 뿐 아니라, 그 생명을 돌보시는 분의 마음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저자는 만나의 풍성한 맛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그 음식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었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불을 견디는 눈과 얼음
눈과 얼음은 불을 견디고도 녹지 않았습니다. 우박 속에서 타오르고 빗속에서 번쩍이는 불이 원수들의 열매를 망가뜨렸음을 그들이 알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지혜서 16:22 · 본디새김
여기서 「눈과 얼음」은 만나를 가리키는 이미지입니다.
출애굽기 16:14에서는 광야의 땅에 서리처럼 잘고 둥근 것이 나타났다고 묘사합니다. 지혜서는 그 이미지를 받아 만나를 눈과 얼음에 비유합니다.
이집트에서는 물과 함께 온 불이 농작물을 파괴했습니다. 반면 이스라엘에게는 서리처럼 내려온 음식이 불의 열기 속에서도 먹을거리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불은 다시, 의로운 이들이 먹을 수 있도록 제 본래의 힘마저 잊었습니다.지혜서 16:23 · 본디새김
불은 태우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불이 그 성질을 잊은 것처럼 묘사합니다. 앞에서는 불이 물속에서 더욱 강하게 타올랐습니다. 이번에는 불이 스스로의 힘을 내려놓습니다.
피조물의 성질은 하나님의 권한을 제한하지 못합니다.
지어진 것들은 그것들을 만드신 당신을 섬기며, 불의한 자들을 벌하려고 힘을 더하고,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은덕을 베풀려고 힘을 늦추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6:24 · 본디새김
저자는 창조 세계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합니다. 이는 자연이 하나님과 독립적으로 선악을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연이 인격적 존재처럼 하나님의 뜻에 응답하는 모습으로 묘사된 것입니다.
창세기에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 빛이 나타나고, 물이 나뉘고, 땅이 생물을 내며, 하늘의 빛들이 시간을 구별하게 됩니다. 창조 세계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질서를 얻습니다. 지혜서 16장에서는 그 질서 있는 창조 세계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에도 사용됩니다.
창조의 하나님과 출애굽의 하나님이 다른 분이 아니시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때에도 지어진 것들은 온갖 것으로 바뀌며, 필요로 하는 이들의 바람에 맞추어 모두를 먹이는 당신의 선물을 섬겼습니다.지혜서 16:25 · 본디새김
여기서 중심은 자연의 변화 자체가 아닙니다. 그 변화가 누구를 위한 것이며, 무엇을 이루기 위한 것인지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하시기 위해 피조세계를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 모든 경험에 또 하나의 목적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주님, 이는 당신이 사랑하신 당신의 아들들이 열매가 생겨나는 일이 사람을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말씀이 당신을 믿는 이들을 지켜 준다는 것을 배우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지혜서 16:26 · 본디새김
이것은 신명기 8:3과 분명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신명기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굶주림을 경험한 뒤 만나를 받은 이유를 설명합니다.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배우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지혜서는 이 가르침을 다시 가져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만나를 통해 배우는 교훈이 창조 세계 전체에 대한 이해로 확대됩니다.
땅에서 열매가 자라나는 일은 사람에게 꼭 필요합니다. 저자는 농작물이나 음식을 하찮게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러한 열매가 자라고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질서를 마련하셨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따라서 「열매가 생겨나는 일이 사람을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니라」라는 말은 음식에 영양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음식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가 음식 자체에 있지 않고, 그것을 마련하시고 생명을 보존하시는 하나님께 있다는 뜻입니다.
선물을 통해 그것을 주시는 분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것은 만나가 불에서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물질이었다는 과학적 설명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16:23에서는 만나를 굽거나 삶아 먹을 수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지혜서의 저자는 음식을 조리할 수 있었던 사실과 햇빛이 강해지면 만나가 녹아 없어졌던 사실을 바탕으로, 서로 다른 열의 작용을 극적으로 대비합니다.
해가 뜨기 전에 감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
이제 저자는 독자를 다시 아침의 광야로 데려갑니다.
불에도 망가지지 않던 것이 그저 약한 햇살에 데워지기만 해도 녹았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6:27 · 본디새김
저자는 이것을 만나가 얼마나 특이한 음식이었는지를 보여 주는 데서 끝내지 않습니다. 그 사실이 이스라엘의 일상에 어떤 가르침을 주었는지 설명합니다.
이는 해가 뜨기 전에 당신께 감사드려야 하고, 빛이 떠오를 때 당신께 간구해야 함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지혜서 16:28 · 본디새김
왜 해가 뜨기 전에 감사해야 할까요? 출애굽기 16:21에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침마다 만나를 거두었고, 해가 뜨거워지면 만나가 녹았다고 말합니다.
만나는 아무 때나 원하는 만큼 가져갈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백성은 아침에 일어나야 했습니다. 자기에게 필요한 만큼 거두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먹을 것을 마련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했습니다.
하루를 시작할 때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자신에게 필요한 음식이 얼마나 있는가만이 아닙니다. 그 음식을 주시는 분이 누구인가 하는 사실입니다.
특히 「해가 뜨기 전에」라는 표현은 만나가 녹아 없어지는 시간과 맞물립니다. 해가 떠오르면 만나를 거둘 기회가 사라집니다. 이것은 단순히 늦잠을 자지 말라는 생활 교훈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기 편의에 따라 하나님의 공급을 마음대로 소유하거나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출애굽기 16:19–20에서 모세는 다음 날 아침까지 만나를 남겨 두지 말라고 명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그것을 보관했고, 남겨 둔 만나에는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났습니다. 하나님의 공급을 믿는 것과 내일의 공급까지 자기 손에 확보해 두려는 것은 서로 다른 태도였습니다.
물론 출애굽기 16장에는 여섯째 날에 안식일을 위해 이틀 치를 거두도록 하신 예외도 나옵니다. 그러므로 핵심은 음식을 저장하는 행위 자체가 언제나 잘못이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필요한 것을 받고, 그분의 공급을 신뢰하는 일입니다.
아침에 만나를 거두는 일은 단순한 식량 확보가 아닙니다. 매일 자신이 무엇으로 살아가는지 배우는 시간이 됩니다.
그런데 29절에서는 예상하지 못한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고마워할 줄 모르는 이의 소망은 겨울 서리처럼 녹고, 쓸모없는 물처럼 흘러가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6:29 · 본디새김
만나는 녹아 없어지더라도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날 백성을 먹이고, 다음 날 다시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의 소망은 녹아 없어지면 아무것도 남기지 못합니다.
여기서 「소망」은 단순히 장래에 대한 긍정적인 기대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의지하고 살아가는가와 연결됩니다. 자기 손에 붙잡아 둔 것만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것이 사라질 때 자신의 소망도 함께 무너지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공급을 기억하는 사람은 눈앞의 선물이 사라졌다고 해서 그 선물을 주신 분까지 사라지셨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감사는 단순히 이미 받은 것에 만족하는 감정이 아닙니다. 지금 받은 것이 누구에게서 왔는지를 알고, 아직 받지 않은 내일의 삶까지 그분께 맡기는 태도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먹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고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지키셨습니다.
감사는 그 일을 알아본 사람이 드리는 응답입니다.
지혜서 16장이 보여 주는 하나님의 통치
이집트의 재앙에는 억압에 대한 심판이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고통에는 잘못을 깨닫게 하는 징계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구원에는 그들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는 자비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일은 단순히 상황을 바꾸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광야의 밤이 지나고 날이 밝아 옵니다.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 땅에 내려앉은 만나를 거둡니다. 누구는 많이 거두고 누구는 적게 거두지만, 각자에게 필요한 양식이 마련됩니다.
조금 뒤 해가 높이 떠오르면 남아 있던 만나는 녹아 없어집니다.
어제 땅에 있었던 음식이 오늘까지 남아 있지 않고, 오늘의 음식 역시 끝없이 보존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날의 양식을 주신 하나님은 사라지지 않으십니다.
불에도 녹지 않던 빵이 약한 햇살에 녹습니다. 백성은 그 빵을 거두어 하루를 살아갑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되면 다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으러 나갑니다.
그들에게 매일 필요한 것은 만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매일 배우고 있었던 것은, 만나를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이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