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서 풀어 읽기 · 17장
이 장의 자리 · 16–19장 · 갈라진 두 백성의 길
빛이 사라지자 드러난 것들
사람을 감옥에 가두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두꺼운 벽과 단단한 문, 쇠사슬과 무장한 감시자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혜서 17장에는 쇠사슬도 감옥의 철창도 없이 갇힌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자기 집 안에 있고, 농부는 들판에 있으며, 목자는 양을 돌보던 곳에 있습니다. 아무도 그들을 결박하지 않았지만 누구도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들을 붙잡은 것은 어둠입니다.
그들에게 닥친 고통은 빛이 사라졌다는 사실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어둠 속에서 그들은 보이지 않는 형상에 놀라고, 평범한 소리에 질겁하며, 심지어 아무것도 자신을 위협하지 않을 때에도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왜 자기 자신을 견디지 못하게 되었을까요? 무엇이 그들의 마음을 그토록 무겁게 만들었을까요?
지혜서 17장은 출애굽기 10:21–23에 기록된 이집트의 어둠 재앙을 다시 읽으면서 이 질문을 탐구합니다. 출애굽기는 어둠이 사흘 동안 이집트를 덮었고, 사람들이 서로를 볼 수 없었으며, 아무도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이지 못했다고 기록합니다. 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곳에는 빛이 있었습니다.
지혜서의 저자는 이 사건을 길게 확장하여 어둠 속에 갇힌 사람들의 경험을 상상력 풍부한 언어로 묘사합니다. 이것은 출애굽기에 없던 모든 장면을 새로운 역사적 사실로 보고하려는 기록이 아닙니다. 저자는 출애굽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권력의 내면을 드러내고, 그 권력이 얼마나 허약한 토대 위에 서 있었는지를 보여 주려 합니다.
이스라엘을 가두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정작 자기 자신을 가두고 있던 두려움의 포로로 드러납니다.
억압하던 사람들이 포로가 되다
참으로 당신의 판결들은 크고 말로 다 풀어낼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배우지 못한 영혼들이 길을 잃었습니다.지혜서 17:1 · 본디새김
하나님의 판결은 사람들이 예상하던 방식과 다르게 나타납니다.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지배하고, 권력을 가진 사람이 자유를 누리는 것이 당연해 보이는 세상에서 하나님은 그 관계를 뒤집으십니다.
「배우지 못한 영혼들」은 단순히 글을 읽거나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뜻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올바른 가르침과 훈련을 받지 못하여 분별력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지혜서가 문제 삼는 것은 지식의 양보다 지혜의 부재입니다.
이집트의 통치자들은 나라를 다스리고 다른 민족을 통제할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자신들의 권력이 어디까지 허용되는지를 판단할 지혜는 없었습니다.
거룩한 민족을 억누르고 있다고 생각했던 무법자들이 어둠의 포로가 되고 긴 밤의 사슬에 묶여, 지붕 아래 갇힌 채 영원한 섭리에서 달아난 도망자로 누워 있었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7:2 · 본디새김
이 문장의 핵심은 「억누르고 있다고 생각했던」과 「어둠의 포로가 되고」 사이의 반전입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억압하고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1:11–14에 따르면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켰고, 혹독한 노역으로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뒤집힙니다.
다른 사람을 억누르던 사람들이 스스로 갇힙니다. 다른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던 사람들이 자기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합니다.
저자는 이 반전을 한층 선명하게 만들기 위해 「어둠의 포로」와 「긴 밤의 사슬」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실제로 쇠사슬이 채워진 것은 아닙니다. 어둠이 사슬의 역할을 합니다.
집은 일반적으로 사람을 보호하는 공간입니다. 바깥의 위험을 막고, 가족이 쉬며, 안심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집트 사람들에게는 그 집이 감옥이 됩니다.
아무도 그들을 집 안에 가두기 위해 문을 잠글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 집 안에서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저자는 마지막에 그들을 「영원한 섭리에서 달아난 도망자」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섭리에서 실제로 달아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의 돌보심과 질서 밖으로 도망친 사람들처럼 누워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은 결과, 그 통치 안에서 누릴 수 있었던 안전함마저 잃어버린 것입니다.
권력은 다른 사람을 가둘 수 있었지만,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만들 수는 없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출애굽기 5:2에서 파라오는 여호와야훼가 누구이기에 그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 질문에는 자신의 권력 위에 다른 권위가 있을 수 없다는 확신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출애굽의 재앙들은 그가 자연과 생명, 그리고 이스라엘의 운명을 최종적으로 다스리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지혜서 17장은 바로 그 드러남을 인간의 내면에서 다시 설명합니다.
감추었다고 생각한 죄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나다
그들은 은밀한 죄를 짓고도 들키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빛 없는 망각의 장막 아래 흩어져, 몹시 놀라고 환영들에 뒤흔들렸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7:3 · 본디새김
이 절에는 어둠을 둘러싼 두 가지 상반된 생각이 있습니다.
사람은 어둠을 숨을 수 있는 장소로 여길 수 있습니다. 빛이 없으면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습니다. 자기 행동을 감출 수 있고, 아무도 보지 못했으니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가 묘사하는 어둠은 그들을 숨겨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숨기고 싶었던 것들과 마주하게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가 보이지 않게 되고, 결국 잊히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둠이 내려오자 그들의 마음은 평온해지지 않았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흩어지고, 보이지 않는 형상들에 놀랍니다.
저자는 그들이 정확히 어떤 은밀한 죄를 지었는지 이 절에서 낱낱이 밝히지 않습니다. 다만 앞서 언급한 이스라엘에 대한 억압을 생각하면, 그들이 저지른 불의와 폭력이 이러한 비판의 배경에 놓여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죄를 감춘다고 해서 그 죄에 대한 인식까지 반드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하더라도 자기 마음의 판단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을 가둔 깊숙한 구석조차 그들을 두려움에서 지켜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뒤흔드는 소리들이 둘레에서 울려 댔고, 음울한 허깨비들이 웃음기 없는 얼굴로 나타났습니다.지혜서 17:4 · 본디새김
사람이 대상을 분명히 볼 수 없을 때, 마음은 불완전한 정보를 가지고 그 대상이 무엇인지 판단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두려움이 판단을 지배하면 아직 확인하지 못한 대상이 위험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상황을 환영과 소리의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또 어떠한 불의 힘도 빛을 비추지 못했고, 별들의 찬란한 불꽃도 그 음산한 밤을 비추는 일을 견뎌 내지 못했습니다.지혜서 17:5 · 본디새김
일반적으로 밤에는 별빛이 있고, 사람이 불을 켜면 어두운 곳을 밝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밤에는 평소에 의지하던 빛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묘사를 통해 하나님의 판결 앞에서 인간이 평소 의지하던 능력이 무력해지는 상황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6절에서는 예상하지 못한 빛이 등장합니다.
다만 저절로 타오르는, 두려움으로 가득한 불만 그들에게 비쳐 보였습니다. 그들은 겁에 질려, 눈에 보이는 것들이 그 보이지 않는 광경보다 더 나쁘다고 여겼습니다.지혜서 17:6 · 본디새김
여기서는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보다 낫다는 일반적인 기대가 뒤집힙니다. 조금이라도 보이면 안심해야 할 것 같은데, 이들은 드러난 광경을 더욱 두려워합니다.
빛이 나타났지만 안전함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단순히 빛이 부족하다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빛이 일부 나타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여전히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장면을 실제 유령이 출현했다는 역사적 보고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자는 어둠 속에서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느끼는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6절의 불이 구체적으로 어떤 자연현상이었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저자는 그 불이 어디에서 발생했는지 설명하기보다, 그 불이 사람들에게 어떤 경험을 가져왔는지 강조합니다.
두려움을 쫓아내던 사람들이 두려움에 병들다
마술의 재주는 웃음거리로 주저앉았고, 슬기를 내세운 허풍은 치욕스럽게 폭로되었습니다.지혜서 17:7 · 본디새김
이집트의 마술사들은 출애굽 이야기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출애굽기 7:11–12에서는 이집트의 마술사들이 모세와 아론 앞에서 자기들의 기술을 보여 줍니다. 7:22와 8:7에서도 그들은 재앙과 관련된 일들을 흉내 냅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8:18–19에서는 모기를 만들어 내려고 해도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는 말을 합니다.
지혜서 17장은 이러한 마술사들의 무능력을 어둠의 재앙이라는 상황에서 다시 드러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들의 마술이 실패했다는 사실보다, 그들이 내세우던 지혜와 자신감이 무너졌다는 사실에 초점이 있습니다.
병든 마음에서 공포와 혼란을 몰아내겠다고 약속하던 바로 그들이 우스꽝스러운 두려움에 병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7:8 · 본디새김
특히 저자는 같은 표현을 서로 반대되는 방향으로 사용합니다. 다른 사람의 「병든 마음」을 고치겠다고 나섰던 사람들이 자신도 「두려움에 병들어」 있습니다. 그들이 주장한 능력이 그들 자신의 경험을 통해 부정되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지혜가 없는데도 억압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했습니다. 이제는 자신에게 없는 능력을 다른 사람에게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두 경우 모두 인간의 능력에 대한 잘못된 확신이 무너집니다.
그들을 겁주는 소란스러운 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지나가는 짐승들과 기어 다니는 것들의 쉿 소리에 놀라 쫓겨, 떨며 죽어 갔고, 어디로도 피할 수 없는 공기마저 바라보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7:9–10 · 본디새김
저자는 실제로 어떤 위협적인 사건이 일어났는지보다 그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강조합니다. 공기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사람은 공기 없이 살 수 없고, 공기가 있는 곳을 완전히 피해 달아날 수도 없습니다. 두려움이 얼마나 커졌는지를 보여 주는 과장된 표현입니다.
이 대목에서 저자는 독자가 그들의 두려움을 우스꽝스럽게 여기도록 의도합니다. 7–8절에서 이미 「웃음거리」와 「우스꽝스러운 두려움」이라는 표현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자의 조롱은 단순히 겁이 많은 사람을 비웃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비판하는 대상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까지 다스릴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마음조차 다스리지 못하는 권력과 거짓된 지혜입니다.
다른 사람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과 자신이 실제로 안전하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두려움은 왜 실제보다 더 큰 고통을 만들어 내는가
11–13절에서는 장면 묘사가 잠시 멈춥니다.
저자는 어둠 속 사람들의 행동을 계속 이야기하는 대신, 그 행동의 원인이 되는 마음의 작용을 살펴봅니다.
악은 유죄 판결을 받으며 제 겁 많음을 뚜렷이 증언하고, 양심에 짓눌려 언제나 괴로운 일들을 덧붙여 생각하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7:11 · 본디새김
앞에서 사람들은 특별히 위협적인 것이 없어도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이제 저자는 그 이유를 그들의 양심에서 찾습니다. 「악은 유죄 판결을 받으며 제 겁 많음을 뚜렷이 증언하고」라는 표현은 악을 저지르는 사람이 자신의 행동이 옳지 않음을 알면서도 그것을 감추려 할 때 나타나는 불안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괴로운 일들을 덧붙여 생각하기」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번역 노트에 나온 그리스어 동사 프로스람바노(προσλαμβάνω)는 무엇인가를 추가로 받아들이거나 더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는 악한 사람이 자신의 죄 때문에 실제로 더 많은 고통을 떠안는다는 뜻입니다. 죄와 그 결과가 겹쳐져 괴로움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죄책감에 짓눌린 사람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괴로운 상황까지 상상하여 자기 마음에 더한다는 뜻입니다.
본문의 앞뒤에서는 사람들의 환영과 과도한 두려움이 강조되므로, 본디새김처럼 「괴로운 일들을 덧붙여 생각하기」라고 읽으면 이 문맥이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다만 원어 자체가 실제 고통의 증가라는 해석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습니다.
저자는 이집트의 억압자들이 겪은 두려움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든 불안이나 공포가 숨겨진 죄 때문에 발생한다는 일반적인 심리 법칙을 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위험한 상황에서 느끼는 두려움이나 고통스러운 경험 이후의 불안까지 도덕적 잘못의 증거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두려움은 따져 생각하여 얻는 도움을 저버리는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7:12 · 본디새김
사람은 위험을 만났을 때 주변 상황을 살피고, 무엇이 실제로 위험한지 판단하며,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지 생각합니다. 이러한 판단은 위험한 상황에서 자신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히면 상황을 차분하게 살피기 어렵습니다. 무엇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지 확인하기보다 최악의 가능성부터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작은 소리도 거대한 위협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이 구절을 이성만 있으면 모든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뜻으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자는 공포에 압도된 상태에서 판단력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마음속에서 약해진 기대는 고통을 주는 원인보다 그 원인을 모른다는 것을 더 크게 여깁니다.지혜서 17:13 · 본디새김
이집트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소리를 들었습니다. 무엇이 그 소리를 냈는지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리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그 소리를 낸 존재가 실제보다 더 무서운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모르는 것이 반드시 실제로 더 위험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두려움에 사로잡힌 마음에서는 알지 못한다는 사실 자체가 위험을 더욱 크게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그들을 괴롭힌 것은 눈앞에 있는 것만이 아니라, 눈앞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지혜는 단순히 위험을 없애는 기술이 아닙니다. 무엇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지 분별하고, 자신이 모르는 것과 알고 있는 것을 구별하며, 올바르게 판단하도록 돕는 능력입니다.
쇠가 하나도 없는 감옥
그런데 그들은 참으로 힘없는 그 밤, 힘없는 하데스의 깊은 곳에서 닥쳐온 그 밤에 모두 같은 잠을 자면서,지혜서 17:14 · 본디새김
하데스의 깊은 곳에서 밤이 닥쳐왔다는 이미지는 어둠이 단순한 야간 현상을 넘어 죽음의 세계를 떠올리게 할 만큼 무겁고 두려운 것으로 경험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사람에게 잠은 휴식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잠은 평안을 가져오지 않습니다.
한편으로는 유령들의 괴이한 모습에 쫓겼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 마음에 저버림을 당해 맥이 풀렸습니다. 갑작스럽고도 뜻밖인 두려움이 그들에게 닥쳤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7:15 · 본디새김
하나는 외부에서 다가오는 것처럼 경험되는 공포입니다. 다른 하나는 내부에서 자신을 지탱할 힘을 잃는 상태입니다.
사람은 보통 자기 마음을 가장 가까운 동반자로 여깁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떠나더라도 자신의 생각과 의지는 자신에게 남아 있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이집트 사람들은 자기 마음조차 자신을 지탱해 주지 못하는 상태에 이릅니다.
밖에서는 알 수 없는 것이 자신을 위협하는 듯하고, 안에서는 그 위협을 견딜 힘이 사라집니다. 그 결과가 16절에 나타납니다.
그리하여 거기서 쓰러지는 이는 누구든 쇠 없는 감옥에 갇힌 채 감시를 받았습니다.지혜서 17:16 · 본디새김
철창이 없어도 나갈 수 없습니다. 쇠사슬이 없어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들의 두려움이 스스로를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던 사람들은 강제력과 물리적인 수단에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리신 어둠 앞에서 그들의 권력은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농부든 목자든, 외딴곳에서 힘든 일을 하는 일꾼이든, 누구나 불시에 붙잡혀 벗어나기 어려운 속박을 견뎠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7:17 · 본디새김
이들은 모두 자신의 일터에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어둠이 닥치자 익숙한 장소가 안전함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특히 저자는 도시의 통치자나 마술사뿐 아니라 평범한 노동자들까지 함께 언급합니다. 사회적 지위나 직업의 차이가 어둠의 힘을 막아 주지 못했습니다. 이는 출애굽기 10:23에서 아무도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이지 못했다고 한 내용을 더욱 넓게 풀어낸 장면입니다.
조금 더 깊이
그리스어 아뒤나토스는 힘이 없거나 무엇을 할 수 없다는 뜻을 지니지만, 문맥에 따라 감당하기 어렵거나 견딜 수 없다는 의미로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이 말이 연달아 사용됩니다. 따라서 「힘없는 밤」이라는 번역은 같은 단어의 반복을 살린 선택입니다. 반면 「견딜 수 없는 밤」으로 읽으면 이집트 사람들이 경험한 밤의 압도적인 고통이 더욱 강조됩니다. 여기서 「힘없는 하데스」는 죽은 자들의 세계를 가리키는 그리스어 표현과 연결됩니다. 다만 이 표현을 근거로 이집트 사람들이 실제로 하데스를 방문했다거나 죽음 이후의 구체적인 상태를 경험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저자는 밤의 압도적인 성격을 죽음의 세계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모든 소리가 무서워지다
그들은 모두 어둠의 사슬 하나에 묶였기 때문입니다. 휘파람 부는 바람이든, 무성한 가지들 둘레에서 들리는 새들의 고운 울음소리든, 세차게 흘러가는 물의 가락이든, 굴러떨어지는 바위들의 거친 굉음이든, 뛰노는 짐승들의 보이지 않는 달음박질이든, 더없이 사나운 들짐승들의 울부짖는 소리든, 산의 움푹한 곳에서 되울리는 메아리든, 모두 그들에게 겁을 주어 맥이 풀리게 했습니다.지혜서 17:18–19 · 본디새김
사람들은 서로 다른 장소에 있었습니다. 집 안에 있는 사람도 있고, 들판에 있는 사람도 있으며, 외딴곳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의 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이 가운데에는 실제로 위험을 알릴 수 있는 소리도 있습니다. 바위가 굴러떨어지는 소리나 사나운 짐승의 울음소리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모든 소리가 위험한 것은 아닙니다.
특히 저자는 새들의 울음소리를 「고운 울음소리」라고 부르고, 흐르는 물소리를 「가락」이라고 표현합니다. 본래 아름답게 들릴 수 있는 소리마저 그들에게는 두려움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새의 울음은 여전히 고운 소리입니다. 물은 여전히 가락을 이루며 흐릅니다.
그러나 그 소리를 듣는 사람들의 상태가 달라졌습니다.
앞에서 저자는 사람들이 고통의 원인을 알지 못할 때 그 불확실성을 실제 위험보다 더 크게 여길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17:13). 새의 울음소리를 들어도 무엇이 소리를 내는지 볼 수 없습니다. 짐승이 움직이는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바위가 굴러가는 소리를 들어도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는지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평소에는 눈과 귀를 함께 사용하여 주변 상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는 소리만 남고, 그 소리를 해석하는 데 필요한 다른 정보는 부족해집니다. 그때 두려움이 판단을 지배하면 익숙한 자연의 소리도 위험의 신호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우박과 불의 재앙에서는 피조물이 직접 농작물을 파괴했습니다. 뱀과 벌레의 재앙에서는 생물이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평범한 자연의 소리까지 두려움의 원인이 됩니다.
하나님의 판결은 단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재산이나 권력을 빼앗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안전하다고 믿었던 세계를 더 이상 안전하게 경험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세상 전체가 어둠과 두려움에 잠겨 있었을까요?
세상은 여전히 밝았습니다
실로 온 세상은 찬란한 빛에 환히 비치고, 아무 막힘 없이 일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지혜서 17:20 · 본디새김
그런데 저자는 갑자기 시야를 넓혀 세상 전체를 바라보게 합니다.
출애굽기 10:23에서 이집트 사람들이 서로를 볼 수 없었던 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곳에는 빛이 있었다는 기록이 중요한 배경입니다. 지혜서는 이 차이를 더욱 확대하여 「온 세상」은 빛 아래서 움직이고 있었다고 표현합니다.
「아무 막힘 없이 일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라는 말은 앞서 등장한 농부와 목자와 일꾼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들은 모두 어둠 때문에 일상적인 활동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삶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완전히 멈추어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이집트의 억압자들이 그 세계의 정상적인 질서와 활동에서 분리된 것처럼 묘사됩니다.
그러나 그들 위에만 무거운 밤이 드리워져 있었는데, 그것은 장차 그들을 받아들일 어둠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자기 자신이 어둠보다 더 무거운 짐이었습니다.지혜서 17:21 · 본디새김
「그들 위에만」이라는 표현은 앞 절과 정확히 대조됩니다. 저자는 이 밤이 장차 그들을 받아들일 어둠의 「모습」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자기 행동을 감추려 했고, 자기 능력을 과신했으며, 자기 마음의 판단을 잃었습니다. 어둠은 그들에게 바깥에서 닥친 재앙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둠을 견딜 수 없게 만든 것은 그들의 내면에 쌓여 있던 죄책감과 두려움, 그리고 무너진 확신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둠을 짊어지고 있었지만, 그 어둠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그 안에서 드러난 자기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20절을 그 순간 지구상의 모든 지역이 실제로 낮이었다는 지리적·천문학적 진술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은 어둠에 갇힌 이집트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세계를 대조하는 시적인 언어를 사용합니다. 21절에서는 지금 경험하는 어둠이 앞으로 그들에게 닥칠 심판의 어둠을 미리 보여 주는 모습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이를 통해 현재의 재앙이 단순한 일시적 불편을 넘어, 그들의 삶과 행위가 향하는 결과를 경고하는 사건임을 보여 줍니다. 다만 여기서 저자가 죽음 이후의 세계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상상했는지까지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장의 관심은 실제로 닥친 어둠 속에서 그들의 상태가 어떻게 드러났는지에 있습니다.
빛을 잃은 것이 아니라 자유를 잃은 사람들
이집트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스라엘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의 안전과 자유조차 완전히 보장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스스로 의지하던 것들이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드러내십니다.
어둠이 내린 이집트의 어느 집을 생각해 봅니다.
그곳에는 쇠사슬이 없습니다. 문이 잠겨 있다는 말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밖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멀리서 새가 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고,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들었을 소리입니다.
하지만 그날 밤 그 사람에게는 모든 소리가 두렵습니다.
집 안에서 몸을 웅크린 그는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자신을 가둔 사람이 누구인지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혜서의 저자는 그 집을 떠나 바깥세상을 보여 줍니다.
세상에는 여전히 빛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일을 하고 있습니다. 바람은 불고, 새는 울고, 물은 흐릅니다.
세상이 모두 감옥이 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을 견디지 못하여, 쇠사슬도 없는 곳에서 갇힌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지혜서 17장이 보여 주는 어둠의 가장 무거운 모습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