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서 풀어 읽기 · 18장

이 장의 자리 · 16–19장 · 갈라진 두 백성의 길

죽음이 지나가는 밤, 그 사이에 선 사람

한밤중에 두 가지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함께 찬양을 부릅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자녀를 잃은 부모들의 통곡이 들립니다. 그들은 같은 밤을 지나고 있지만, 그 밤이 가져다주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지혜서 18장은 이집트의 마지막 재앙과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렇게 대조합니다. 그런데 저자는 그 밤의 이야기를 마친 뒤 뜻밖에도 다른 사건으로 넘어갑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죽음의 재앙이 닥치고, 한 사람이 향로를 들고 죽은 사람들과 살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 서는 장면입니다.

왜 출애굽의 마지막 밤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광야의 제사장을 등장시킬까요?

하나님의 심판은 그분의 백성이라고 해서 무조건 피해 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은 단지 누가 살아남았느냐의 문제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읽는 시간 26분소단락 818장 본문 읽기 →

보이지 않는 이웃의 목소리와 불타는 기둥

지혜서 18:1–4 본문 →

그러나 당신의 거룩한 이들에게는 더없이 큰 빛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모습은 보지 못한 이들은, 그들 또한 고난을 겪었기에 그들을 복되다고 여겼습니다.지혜서 18:1 · 본디새김

17장에서 이집트 사람들은 깊은 어둠에 갇혀 서로를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18장은 이집트에 어둠이 드리워져 있는 동안 이스라엘에게는 빛이 있었다는 사실로 시작합니다.

이 대조의 배경은 출애굽기 10:23입니다. 그곳에서도 이집트 사람들은 서로를 볼 수 없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곳에는 빛이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목소리는 존재의 증거입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없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들을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겪는 어둠이 모든 사람을 똑같이 집어삼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또 먼저 부당한 일을 당하고도 자기들을 해치지 않는 이들에게 감사하며, 적대했던 일을 용서해 달라고 빌었습니다.지혜서 18:2 · 본디새김

이 절에서 감사하고 용서를 구하는 사람들은 이집트 사람들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부당한 일을 당했지만 보복하지 않는 이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이 대목은 출애굽기 12:31–33에서 이집트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 떠나 달라고 재촉하는 장면을 더욱 화해의 언어로 확장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에는 파라오가 용서를 구하지만, 이집트 백성의 용서 요청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절의 용서 요청은 출애굽 사건을 다시 풀어내는 지혜서 특유의 서술입니다.

그 대신 당신은 불타는 기둥을 주셨습니다. 낯선 여정에서는 길잡이가 되고, 영예로운 나그넷길에서는 해를 끼치지 않는 해가 되게 하셨습니다.지혜서 18:3 · 본디새김

불타는 기둥은 출애굽기 13:21–22에 등장하는 불기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지혜서는 이 불기둥을 두 가지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길잡이」이고, 다른 하나는 「해를 끼치지 않는 해」입니다.

첫 번째 표현은 불기둥의 기능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알지 못했습니다. 광야는 익숙한 고향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길을 인도할 존재가 필요했습니다.

두 번째 표현은 그 빛의 성격을 말합니다. 불은 뜨겁고 때로는 위험하지만, 이 불기둥은 백성을 해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두운 길을 밝혀 주면서도 백성을 안전하게 인도하는 빛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집을 떠나 낯선 길을 걷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낯선 곳을 떠도는 생활은 불안과 위험을 동반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그 여정을 영예롭다고 부릅니다.

그 길이 단순한 추방이나 방랑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이끌어 내시는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여정을 영예롭게 만드는 것은 목적지의 화려함이 아니라 그들을 인도하시는 분의 존재입니다.

그들은 빛을 빼앗기고 어둠에 갇혀 마땅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당신의 아들들을 가두어 두었는데, 그 아들들을 통해 율법의 썩지 않는 빛이 세상에 주어질 터였습니다.지혜서 18:4 · 본디새김

불기둥은 이스라엘이 걸어갈 길을 밝혔습니다. 율법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밝혀 줍니다.

그들이 해방되는 일은 단지 한 민족이 압제에서 벗어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가르침이 세상에 전해질 수 있는 길이 열리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율법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그 빛이 이스라엘 내부에만 머무를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율법의 빛이 세상에 주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이사야 2:2–4에서 민족들이 시온으로 와서 하나님의 길을 배우고, 하나님의 가르침이 시온에서 나온다는 예언과 연결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이집트가 저지른 죄는 더욱 무거워집니다. 그들은 단지 한 민족의 자유를 빼앗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세상에 전할 백성의 길을 가로막았습니다.

저자는 이제 빛과 어둠의 대조에서 부모와 자녀의 문제로 시선을 옮깁니다.

조금 더 깊이

다만 1절의 뒷부분은 번역상 어려움이 있습니다. 본디새김이 따르는 그리스어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이 「고난을 겪었기에」라는 독법이 가능하지만, 다른 본문에는 부정어 우, 아니다가 들어 있어 「그들도 같은 고난을 겪지 않았기에」라는 뜻으로 읽힙니다. 부정어가 있는 독법에서는 이집트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 재앙이 닥치지 않은 것을 알고 그들을 복되다고 여긴다는 의미가 분명합니다. 부정어가 없는 본문에서는 그들이 겪었던 고난까지 고려하여 그들을 복되다고 여긴다는 식으로 이해할 여지가 있지만, 정확한 문장 관계는 덜 분명합니다. 어느 독법이 원래의 것인지 이 본문만으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한 아이를 죽이려 했던 나라가 자녀를 잃다

지혜서 18:5–8 본문 →

그들이 거룩한 이들의 어린아이들을 죽이려고 꾀하고, 한 아이가 내버려졌다가 구출되었을 때, 당신은 그들을 꾸짖으려고 그들의 수많은 자녀를 빼앗으셨고, 그들을 한꺼번에 거센 물속에서 멸하셨습니다.지혜서 18:5 · 본디새김

이 절에는 출애굽 이야기의 서로 다른 세 장면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먼저 이집트의 파라오는 히브리 사람들에게 태어난 남자아이들을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출애굽기 1:15–22). 그다음에는 한 아이가 나일강에 놓인 갈대 상자에 담겨 버려졌지만, 파라오의 딸에게 발견되어 살아났습니다(출애굽기 2:1–10). 그리고 훗날 이집트에서는 맏이들이 죽는 재앙이 일어났고(출애굽기 12:29–30), 이스라엘을 뒤쫓던 이집트 군대는 바다에서 멸망했습니다(출애굽기 14:26–28).

당시 이집트의 권력자들에게 그 아이는 수많은 히브리 아이 가운데 하나였을 것입니다. 국가의 명령으로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작은 생명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아이가 훗날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는 사람이 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없애려 했던 생명이, 그 권력의 한계를 드러내는 사람으로 자라난 것입니다.

파라오는 히브리 남자아이들을 죽여 이스라엘의 미래를 차단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집안에 속한 딸이 모세를 구해 주면서, 파라오의 계획은 그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무너집니다. 모세를 구출한 행위 자체는 파라오의 딸이 했지만, 지혜서는 그 사건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가시는 일의 일부로 바라봅니다.

그런데 5절은 이 구원과 이집트의 심판을 강하게 연결합니다.

이집트가 이스라엘의 어린아이들을 죽이려 했으므로, 이집트의 자녀들이 죽는 재앙이 닥쳤다는 것입니다. 이는 출애굽기 4:22–23에 기록된 하나님의 선언과 직접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자신의 맏아들이라고 부르시고, 그 아들을 보내지 않으면 파라오의 맏아들에게 죽음이 닥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여기서 맏아들은 단순히 한 가정의 첫째 아이만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께 특별히 속한 백성이라는 관계를 표현합니다.

이 대목은 불편하고 무거운 질문을 남깁니다. 왜 부모의 억압과 폭력에 대한 심판이 자녀들의 죽음으로 나타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본문은 모든 이집트의 맏아들이 개인적으로 어떤 죄를 지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죽음을 각각의 개인적 잘못에 대한 형벌로 해석하지도 않습니다. 지혜서는 이집트라는 억압 체제 전체에 내려진 심판을 집단적인 언어로 설명합니다. 이러한 설명이 자녀들의 죽음에서 느껴지는 비극성을 없애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을 단순히 가해자들이 마땅히 당할 일을 당했다는 통쾌한 복수담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저자 자신도 뒤에서 이집트 사람들의 통곡과 수많은 주검을 길게 묘사합니다.

또한 5절 마지막의 「거센 물속에서 멸하셨습니다」는 맏이들의 죽음과 구별되는 홍해 사건을 가리킵니다. 이집트의 자녀들이 모두 바다에 빠져 죽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 시선은 다시 출애굽의 마지막 밤으로 돌아옵니다.

그 밤은 저희 조상들에게 미리 알려졌습니다. 그들이 믿었던 맹세들을 확실히 알고 기뻐하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지혜서 18:6 · 본디새김

출애굽기 12:1–13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유월절을 준비하도록 명하십니다. 이스라엘의 가정들은 어린양을 준비하고,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며, 떠날 채비를 갖추어야 했습니다.

다만 「조상들에게 미리 알려졌습니다」라는 말은 그 밤의 준비 명령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맹세들」이라는 표현이 더욱 오래된 약속으로 시선을 이끕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들이 다른 나라에서 나그네가 되어 종살이하겠지만, 그들을 억압한 나라를 심판하시고 마침내 그들이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세기 15:13–14).

이집트 탈출은 그때 갑자기 시작된 하나님의 새로운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래전에 하신 약속이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뻐하도록 하려는 것」이라는 말도 단순히 원수들이 멸망한다는 사실을 즐거워한다는 뜻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믿고 기다려 온 하나님의 약속이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기쁨입니다.

당신의 백성은 의인들의 구원과 원수들의 멸망을 기다렸습니다. 당신은 맞서는 이들을 벌하신 바로 그 일로, 저희를 곁으로 부르시어 영광스럽게 하셨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8:7–8 · 본디새김

출애굽은 단순히 이집트 밖으로 나가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자신에게로 부르시는 사건입니다.

출애굽기 19:4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 자신에게 데려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억압자의 소유물처럼 취급받던 자리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속한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부름받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명령에 억눌려 살던 백성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그분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되었다는 데 그 영광이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찬양이, 다른 한쪽에서는 통곡이

지혜서 18:9–13 본문 →

선한 이들의 거룩한 자녀들은 몰래 제사를 드리며, 거룩한 이들이 좋은 일도 위험도 똑같이 함께 나누기로 한마음으로 신성한 법을 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아버지들은 이미 앞장서 찬양을 부르고 있었습니다.지혜서 18:9 · 본디새김

이 절은 유월절 밤의 이스라엘을 묘사합니다.

출애굽기 12:21–27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월절 어린양을 잡고,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며,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유월절을 지키도록 지시받습니다. 지혜서는 이 준비를 「몰래 제사를 드리며」라는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이집트의 억압 아래 있었으므로 그들의 예배는 자유로운 공적 행사라기보다 각 가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은밀한 행위로 그려집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만 같은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움이 닥칠 때에도 서로를 떠나지 않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서로에게도 책임을 지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출애굽기의 유월절 규정과도 어울립니다. 출애굽기 12:4에서는 한 가정의 식구 수가 어린양 한 마리를 먹기에 적으면 이웃과 함께 준비하도록 명합니다. 유월절은 개인이 혼자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의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한 백성을 구원하셨음을 기억하는 공동체의 예식입니다.

구원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이집트에 있습니다. 앞으로 무슨 위험이 닥칠지 모두 알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은 찬양합니다.

눈앞의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에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실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찬양합니다.

한편 원수들의 어긋난 외침이 맞울렸고, 아이들을 두고 곡하는 애처로운 소리가 퍼져 나갔습니다.지혜서 18:10 · 본디새김

저자는 이 두 소리를 같은 밤에 배치합니다. 한쪽의 구원이 다른 쪽의 심판과 동시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독자가 피할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노예는 주인과 함께 같은 벌을 받았고, 평민은 왕과 똑같은 고통을 겪었습니다.지혜서 18:11 · 본디새김

출애굽기 12:29도 파라오의 맏아들부터 감옥에 갇힌 사람의 맏아들에 이르기까지 죽음이 닥쳤다고 기록합니다. 지혜서는 이 사건을 통해 이집트의 사회적 위계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아무런 특권도 보장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고 이 구절이 노예와 왕이 동일한 방식으로 이스라엘 억압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재앙의 보편적인 범위입니다.

모두가 한꺼번에 죽음이라는 한 이름 아래 셀 수 없이 많은 주검을 갖게 되었습니다. 살아 있는 이들만으로는 그들을 묻는 일조차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더 귀한 자손들이 한순간에 멸망했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8:12 · 본디새김

이 절의 「한꺼번에」와 「한순간에」는 재앙의 갑작스러운 성격을 강조합니다. 이 묘사는 출애굽기 12:30의 큰 부르짖음과 연결되지만, 장례를 치를 사람이 부족했다는 세부 내용은 지혜서가 더한 표현입니다.

특히 「더 귀한 자손들」이라는 말은 맏이가 가문 안에서 차지하던 특별한 지위를 반영합니다. 고대 이스라엘과 주변 사회에서 맏아들은 가문의 계승과 상속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이 절의 비극은 단순한 상속인의 상실이 아닙니다.

부모에게 가장 소중한 자녀를 잃은 고통입니다.

그러나 그 밤에는 또 하나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마술 때문에 모든 것을 믿지 않던 그들은, 맏이들이 죽자 그 백성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8:13 · 본디새김

이 표현은 출애굽기 4:22–23에서 하나님께서 파라오에게 선언하신 말씀을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자신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파라오는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권력을 내려놓고 이스라엘을 보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지혜서는 출애굽기 12:31–32에 기록된 파라오의 항복과 이스라엘을 떠나보내라는 명령을,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인정이라는 신학적 언어로 해석합니다. 출애굽기의 파라오가 실제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문장을 말했다고 기록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정이 곧 그들의 온전한 회개나 지속적인 신앙으로 이어졌다고 본문이 말하지는 않습니다. 출애굽기 14장에서는 이집트 군대가 다시 이스라엘을 추격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인정은 하나님의 권한을 더 이상 부정하기 어려워진 상황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이 적절합니다.

이제 그 밤에 실제로 행동하신 분을 묘사하기 시작합니다.

그분의 「말씀」이 전사로 나타납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신성한 법」은 아직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기 전이라는 이야기의 시간적 배경을 고려해야 합니다. 이 표현을 후대에 주어진 모세 율법의 전체 조항을 유월절 밤에 제정했다는 역사적 설명으로 읽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저자는 유월절에 참여한 이스라엘의 공동체적 결속을 신성한 약속의 언어로 묘사합니다. 그런데 18:9 마지막에는 「아버지들은 이미 앞장서 찬양을 부르고 있었습니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것이 정확히 어떤 노래를 뜻하는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습니다. 후대 유월절 예식에서 사용된 특정 시편을 그 첫 유월절 밤에 그대로 불렀다고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고요한 밤에 하늘에서 뛰어내린 말씀

지혜서 18:14–16 본문 →

고요한 침묵이 모든 것을 에워싸고, 밤이 제 속도로 나아가 모든 것의 한가운데에 이르렀을 때,지혜서 18:14 · 본디새김

앞에서는 두 종류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스라엘의 찬양과 이집트의 통곡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모든 소리가 사라집니다.

밤은 「제 속도로」 흘러갑니다. 세상이 아직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시간은 조용히 지나갑니다.

밤이 깊어 가고, 온 세상이 잠잠해지는 가운데 하늘에서 어떤 일이 시작됩니다.

당신의 전능한 말씀이 하늘에서, 왕의 옥좌에서 가차 없는 전사로서 멸망할 땅 한가운데로 뛰어내렸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8:15 · 본디새김

이집트의 파라오는 자신의 권력으로 사람들을 죽이거나 노예로 삼으라고 명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명령을 실행하려면 군인과 관리들이 필요했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능력으로 묘사됩니다.

그 말씀은 당신의 거짓 없는 명령을 날카로운 칼로 들고, 거기에 서서 모든 것을 죽음으로 채웠습니다. 하늘에 닿아 있으면서 땅을 딛고 서 있었습니다.지혜서 18:16 · 본디새김

하나님의 명령은 이집트 왕궁의 권력보다 높으며, 그 왕궁이 있는 땅에도 그대로 도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같은 구원 사건 속에서 자신의 백성을 인도하시고, 그 백성을 억압하는 권력을 심판하십니다.

「모든 것을 죽음으로 채웠습니다」라는 표현에는 그 밤의 파괴적인 성격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의 관심은 죽음의 장면을 극적으로 묘사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그 재앙을 겪는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모든 것의 한가운데」라는 표현은 한밤중을 가리킵니다. 출애굽기 12:29에서는 하나님께서 한밤중에 이집트의 맏이들을 치셨다고 기록합니다. 본문에는 말씀을 전사처럼 묘사하는 강한 인격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만으로 저자가 하나님과 구별되는 별도의 신적 인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우선 이 장의 문맥에서 말씀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명령과 그 명령을 이루는 능력을 나타냅니다. 이는 지혜서 9:1에서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만물을 만드셨다는 고백과 연결됩니다. 창조의 말씀은 생명을 존재하게 하며, 여기서는 생명에 대한 심판을 이루는 말씀으로 나타납니다. 「당신의 거짓 없는 명령」이 날카로운 칼로 표현된 것입니다. 이 이미지는 이사야 55:10–11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분의 뜻을 이루고 헛되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선언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또한 이사야 11:4에서는 의로운 통치자가 입의 말로 악인을 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두 본문 모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말이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실제로 효력을 발휘하는 능력임을 보여 줍니다.

죽어 가는 사람들이 자기 고통의 까닭을 말하다

지혜서 18:17–19 본문 →

그때 곧바로 꿈속의 환영들이 그들을 몹시 뒤흔들었고, 뜻밖의 두려움이 덮쳐 왔습니다.지혜서 18:17 · 본디새김

17장에서도 그들은 어둠 속에서 무서운 형상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꿈들이 특별한 기능을 가집니다. 단순히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이 겪는 고통의 원인을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저마다 다른 곳에 내던져져 반쯤 죽은 채, 자기가 무슨 까닭에 죽어 가는지 밝혔습니다.지혜서 18:18 · 본디새김

이 모습은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감추고도 들키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이집트 사람들의 태도와 대조됩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이 겪는 고통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우연한 불행으로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 고통이 하나님의 판결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들을 혼란에 빠뜨린 꿈들이 그 까닭을 미리 알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왜 고통을 겪는지도 모른 채 멸망하지 않도록 한 것이었습니다.지혜서 18:19 · 본디새김

저자는 하나님의 심판이 전혀 설명할 수 없는 무작위적인 파괴가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집트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잘못된 확신을 무너뜨릴 뿐 아니라, 자신들이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알아보게 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20절에서 갑자기 광야의 이스라엘에게 죽음이 닥칩니다.

조금 더 깊이

출애굽기 12장은 맏이들의 죽음을 기록하지만, 죽어 가는 사람들이 꿈으로 재앙의 원인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 장면은 지혜서가 출애굽 사건에 부여한 신학적 해석입니다. 저자는 심판을 받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겪는 일이 하나님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도 죽음의 재앙이 닥쳤습니다

지혜서 18:20–23 본문 →

그러나 죽음의 시련은 의인들에게도 닿았고, 광야에서 무리에게 재앙이 닥쳤습니다. 하지만 그 분노는 오래 머물지 않았습니다.지혜서 18:20 · 본디새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징계가 면제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저자가 떠올리는 사건은 민수기 16:41–50에 기록된 광야의 재앙입니다. 민수기 16장에서 고라와 그의 무리는 모세와 아론의 권위를 문제 삼으며 반역했습니다. 그 뒤 많은 사람이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이스라엘 회중은 오히려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백성을 죽였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때 다시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났고, 백성 가운데 재앙이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서 「의인들에게도」라는 표현은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이집트의 억압자들과 대비하여 부르는 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재앙을 당한 사람들이 모두 개인적으로 흠 없는 의인이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실제로 민수기에서는 회중의 원망과 반역이 재앙의 배경으로 제시됩니다.

이집트에서는 수많은 맏이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광야에서는 재앙이 진행되는 도중에 멈춥니다.

흠잡을 데 없는 한 사람이 서둘러 앞장서 싸웠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직무의 무기인 기도와 향으로 하는 속죄를 가지고 와, 격분에 맞서 재앙을 끝내고, 자기가 당신을 섬기는 이임을 드러냈습니다.지혜서 18:21 · 본디새김

「흠잡을 데 없는 한 사람」은 아론입니다. 앞서 모세를 「한 아이」라고 부른 것처럼, 아론도 그의 행동을 중심으로 소개합니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날카로운 칼을 든 전사로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아론은 향로와 기도를 들고 싸웁니다.

민수기 16:46–48에 따르면 모세는 아론에게 향로를 가지고 백성 가운데로 급히 가서 속죄하라고 명했습니다. 아론은 명령대로 향을 피워 들고 회중 가운데로 달려갔습니다.

그는 재앙이 끝나기를 멀리서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재앙이 번지는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몸의 힘으로도 무기의 위력으로도 무리를 이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조상들의 맹세와 언약을 일깨워, 벌하는 이를 말로 굴복시켰습니다.지혜서 18:22 · 본디새김

6절에서는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하나님의 맹세를 믿었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22절에서는 아론이 바로 그 맹세와 언약을 일깨워 재앙을 막습니다.

출애굽의 시작과 광야의 구원을 연결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백성을 구원하시는 근거는 아론의 육체적 힘이나 뛰어난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맺으신 언약에 있습니다.

제사장은 그 언약을 의지하여 백성을 위해 간구하는 사람입니다.

주검들이 이미 서로 포개져 무더기로 쓰러져 있을 때, 그가 그 사이에 서서 분노를 막아섰고, 산 이들에게로 향하는 길을 끊었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8:23 · 본디새김

재앙이 길을 따라 이동하는 적처럼 묘사되고, 아론은 그 길을 가로막는 사람이 됩니다. 아론의 제사장 직무는 죽음에 대해 설명하는 일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죽음이 더 퍼지지 않도록 그 사이에 서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여기서 아론이 단순히 용기 있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재앙이 멈춘 것이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의 옷을 자세히 살펴보게 합니다.

조금 더 깊이

그런데 여기서 아론이 하나님과 적대적인 전쟁을 벌였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속죄의 직무를 수행했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아론을 「흠잡을 데 없는 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 역시 아론의 일생 전체에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출애굽기 32장에서 아론은 금송아지 사건에 관여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장면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직무에 충실한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본디새김의 「무리」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독법은 오클론입니다. 반면 콜론, 곧 「분노」는 추정 교정입니다. 사본에는 오클론이 전해지며, 일부 비평본은 글자 순서를 바꾼 콜론을 채택합니다. 「무리」로 읽으면 아론이 힘이나 무기로 사람들을 제압한 것이 아니라 말로써 상황을 극복했다는 점이 강조됩니다. 「분노」로 읽으면 아론이 육체적 힘이나 무기를 통해 하나님의 진노를 이긴 것이 아니라, 언약을 일깨우는 말로 진노를 막았다는 의미가 더 직접적으로 드러납니다. 앞의 21절과 뒤의 23절에서는 분노를 막았다는 표현이 반복되므로 「분노」가 문맥상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본디새김이 따르는 「무리」라는 독법도 실제로 전해지므로 그 차이를 지워서는 안 됩니다. 다만 민수기 16:46–48 자체에는 아론이 실제로 어떤 말을 하였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지혜서 18:22는 그의 중보 행위를 언약을 일깨우는 기도라는 신학적 언어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32:11–14에서 모세가 금송아지 사건 이후 하나님께 간구할 때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에게 하신 맹세를 언급한 모습과도 연결됩니다. 여기서 신약과의 연결을 생각한다면, 히브리서 4:14–16과 7:23–28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이해하는 관점이 떠오릅니다. 이는 지혜서 18장이 예수의 사건을 직접 예언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중보하는 제사장의 직무라는 구약의 주제가 신약에서 새롭게 전개되는 연결입니다.

한 사람의 옷에 온 세상이 담겨 있었습니다

지혜서 18:24–25 본문 →

발까지 내려오는 그의 옷에는 온 세상이 있었고, 네 줄로 늘어선 돌의 새김에는 조상들의 영광이 있었으며, 그의 머리에 두른 관에는 당신의 위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8:24 · 본디새김

출애굽기 28장에는 대제사장의 옷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자세한 규정이 나옵니다. 특히 출애굽기 28:17–21에서는 가슴받이에 보석을 네 줄로 배치하도록 명합니다. 각 줄에 세 개씩, 모두 열두 개의 보석이 놓이며, 그 보석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집니다.

따라서 지혜서의 「네 줄로 늘어선 돌의 새김」은 대제사장의 가슴받이를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 보석들을 「조상들의 영광」이라고 부릅니다. 각 보석에는 이스라엘 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섭니다.

출애굽기 28:29에서는 아론이 성소에 들어갈 때 이스라엘 자손의 이름을 가슴에 지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고 명합니다. 그 이름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기억하신다는 사실과 연결됩니다.

여기서 지혜서는 제사장의 옷을 창조 세계 전체와 연결하는 상징적 이해를 보여 줍니다. 출애굽기 28장 자체가 제사장의 옷에 온 우주가 실제로 새겨져 있었다고 명시하지는 않습니다. 지혜서의 저자는 제사장의 옷에 더 넓은 신학적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는 제사장의 옷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뿐 아니라 창조 세계 전체의 질서까지 떠올리게 합니다.

아론은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온 세상의 창조주 앞에 섭니다.

출애굽기 28:36–38에는 대제사장의 머리에 금패를 달고 그 위에 여호와야훼께 거룩하게 구별되었다는 글을 새기도록 명합니다. 이 금패는 제사장이 하나님께 특별히 구별된 직무를 수행한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지혜서는 그것을 「당신의 위엄」이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아론의 옷이 신비한 마력을 지니고 있어서 재앙을 자동으로 물리쳤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지혜서가 앞에서 강조한 것은 아론의 기도와 속죄,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이었습니다. 제사장의 옷은 바로 그러한 직무와 관계를 드러내는 표징입니다.

멸하는 이는 이것들 앞에서 물러섰고, 그들은 이것들을 두려워했습니다. 분노를 겪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8:25 · 본디새김

「이것들 앞에서 물러섰고」라는 말은 바로 앞에 나온 제사장의 옷과 그 옷에 담긴 상징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실제로 나타났습니다.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 진노가 끝없이 계속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재앙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멸하는 이」는 재앙을 집행하는 존재를 가리킵니다. 출애굽기 12:23에도 맏이들을 치는 재앙과 관련하여 멸하는 자가 등장합니다. 지혜서는 이러한 전승의 언어를 광야의 재앙 장면에도 사용합니다. 그러나 18:25의 멸하는 이를 특정한 이름을 가진 천사라고 단정할 근거는 본문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그들은 이것들을 두려워했습니다」에는 원문상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본디새김이 따르는 그리스어 본문에서는 앞의 「멸하는 이」가 단수인데, 뒤의 「두려워했습니다」는 복수입니다. 따라서 두려워한 주체를 앞의 멸하는 이와 곧바로 동일시하기 어렵습니다. 다른 그리스어 본문에는 이 동사가 단수로 나타나는 독법도 있어 멸하는 이가 두려워했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디새김이 따른 복수 독법에서는 두려워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정해지지 않습니다.

심판을 이야기하다가 중보로 끝나는 이유

지혜서 18:1–25 본문 →

지혜서 18장은 출애굽의 심판으로 시작하여 광야의 중보로 끝납니다.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의 자비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백성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집트의 심판과 이스라엘의 구원을 단순히 두 민족의 본질적인 우열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중보는 잘못을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는 일이 아닙니다.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그 사람이 멸망하는 것을 마지막 결말로 받아들이지 않는 일입니다.

그는 구원받은 백성의 대표였지만, 그들이 잘못했을 때 그들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향로를 들고 재앙 한가운데로 달려갔습니다.

지혜서 18장은 두려운 밤의 심판을 이야기하면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끝맺는 마지막 장면은 더 이상 죽음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광야의 한 지점입니다.

그곳에는 이미 죽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한 사람이 서 있습니다.

그는 칼을 들고 있지 않습니다. 자기 백성의 이름을 가슴에 지니고, 향과 기도를 가지고 서 있을 뿐입니다.

그의 앞에서 멸하는 이가 물러섭니다.

지혜서는 바로 그 자리에서 18장의 이야기를 멈춥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