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풀어 읽기 · 2장
이 장의 자리 · 1–6장 · 밤에 본 환상들
성벽 없는 도시, 그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
예루살렘을 재건하려면 무엇부터 해야 할까요? 무너진 성벽을 살피고, 도시의 크기를 재고, 어디까지 보호할 것인지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스가랴의 환상에도 측량줄을 든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너비와 길이를 재러 갑니다.
그런데 측량이 시작되기도 전에 천사가 급히 달려가 전할 말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회복하시겠다면서, 사람들이 도시의 안전을 위해 가장 먼저 생각할 성벽이 없어도 되는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거하시는 도시에서는 무엇이 사람들을 위협하지 못하게 되고, 누가 그 안에 들어와 살게 됩니까?
네 개의 뿔과 네 명의 장인 — 머리를 들지 못하게 한 권세가 무너지다
뿔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스가랴는 눈을 들어 뿔 네 개를 봅니다.
나는 나와 말하던 천사에게 말했다. 「이것들은 무엇입니까?」 그가 내게 말했다. 「이것들은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흩어 놓은 뿔들이다.」스가랴 2:2 · 본디새김
고대 이스라엘에서 뿔은 힘과 권세를 나타내는 익숙한 상징이었습니다. 황소나 숫양의 뿔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상대를 공격하는 수단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이나 나라의 권세를 뿔에 비유하곤 합니다.
신명기 33:17에서는 요셉의 힘을 들소의 뿔에 비유하고, 시편 75:10에서는 악인들의 뿔을 꺾고 의인들의 뿔을 높이는 모습으로 권세의 몰락과 회복을 표현합니다. 스가랴의 환상에서도 뿔은 단순히 강한 나라를 나타내지 않습니다. 다른 민족을 흩어 버린 공격적인 권세를 상징합니다.
앗시리아와 바벨론을 비롯해 유다를 괴롭혔던 구체적인 제국들을 각각 하나의 뿔에 대응시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네 뿔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어느 제국이 첫째이고 어느 제국이 넷째라고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네 방향에서 몰려오는 위협처럼, 유다를 압도했던 적대 세력을 포괄적으로 나타낸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도 환상의 상징에 대한 해석이지, 본문이 직접 설명한 내용은 아닙니다.
“아무도 머리를 들지 못하게”
내가 말했다. 「이들은 무엇을 하러 왔습니까?」 그가 말했다. 「이것들은 유다를 흩어 놓아 아무도 머리를 들지 못하게 한 뿔들이다. 이 장인들은 그 뿔들을 떨게 하러, 유다 땅을 흩어 놓으려고 그 땅을 향해 뿔을 치켜든 민족들의 뿔들을 내던지러 왔다.」스가랴 2:4 · 본디새김
머리를 든다는 것은 자신을 지탱하고 주위를 바라보며 앞날을 기대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머리를 들지 못한다는 말은 압제 앞에서 힘과 존엄을 잃은 상태를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유다는 군사적으로 패배했습니다. 예루살렘은 파괴되었고 주민들은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파괴는 건물과 영토에만 일어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패배한 백성은 다시 일어날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스가랴의 환상은 바로 그 상처를 보고 있습니다.
뿔을 내던지는 장인들
하나님은 이번에는 장인 네 명을 보여 주십니다.
앞에서는 뿔들이 유다를 흩어 놓았습니다. 이제는 그 뿔들이 누군가에게 위협받고 내던져집니다.
다른 사람들의 머리를 들지 못하게 하던 세력이 자신들의 권세를 지킬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예레미야 25:12–14에서 바벨론을 심판하시겠다는 선언과 통하는 주제입니다. 하나님이 한 나라를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셨다고 해서, 그 나라의 폭력과 교만까지 정당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유다를 무너뜨린 세력도 하나님의 통치 밖에 있지 않습니다.
이 첫 장면은 다음 환상을 위한 길을 엽니다. 예루살렘을 다시 세우려면 먼저 그 도시를 짓밟던 권세가 최종적인 힘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런데 다음 환상에서 하나님은 단순히 새로운 방어 체계를 마련하는 것 이상의 일을 약속하십니다.
측량줄을 든 사람 — 예루살렘은 얼마나 커질 것인가
측량하러 갔지만 측량 결과는 나오지 않는다
스가랴는 다시 눈을 들어 한 남자를 봅니다. 그의 손에는 측량줄이 있습니다.
내가 말했다. 「어디로 가십니까?」 그가 내게 말했다. 「예루살렘을 재러 간다. 그 너비가 얼마이고 그 길이가 얼마인지 보려는 것이다.」스가랴 2:6 · 본디새김
앞 장에서 이미 하나님은 예루살렘 위에 측량줄이 펴질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1:16). 이제 그 약속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 나타난 것입니다.
측량은 건축과 도시 계획을 위한 자연스러운 준비입니다. 예루살렘이 파괴되었던 만큼, 재건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공간을 확보하고 어디에 무엇을 세울 것인지 결정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측정한 숫자는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천사들 사이에서 급박한 움직임이 일어납니다.
그가 그에게 말했다. 「달려가서 저 젊은이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예루살렘에는 성벽 없는 마을들처럼 사람이 살게 될 것이다. 그 안에 사람과 가축이 많기 때문이다.』」스가랴 2:8 · 본디새김
측량이라는 행동이 만들어 낸 기대를 하나님의 말씀이 바꾸어 놓습니다.
성벽 없는 마을은 안전한가
고대 도시에서 성벽은 생존과 직결되는 시설이었습니다.
외적이 쳐들어왔을 때 성벽이 있는 도시는 버틸 수 있지만, 성벽이 없는 마을은 훨씬 취약했습니다. 에스겔 38:11에서도 적은 성벽도 문빗장도 없이 사는 백성을 공격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스가랴의 환상에서는 성벽이 없는 모습이 위태로움이 아니라 번영의 표지로 등장합니다.
사람이 많아집니다. 가축도 많아집니다. 이 두 요소는 회복이 추상적인 영광이나 종교적 감정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포로와 전쟁을 겪은 도시는 주민을 잃습니다. 농사와 목축을 할 기반도 무너집니다. 건물만 다시 세운다고 도시가 살아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예루살렘에는 다시 사람들이 거주하고, 가축들이 자라고, 일상이 이어집니다.
생명이 도시를 채우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벽이 없다는 표현은 주민이 지나치게 많아지므로 반드시 모든 성벽을 철거해야 한다는 명령으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풍요와 안전을 드러내는 환상의 언어입니다.
바깥에는 불, 안에는 영광
「『그리고 나는 그 둘레를 두르는 불 성벽이 되겠다. 여호와야훼의 선언이다. 나는 그 안에서 영광이 되겠다.』」스가랴 2:9 · 본디새김
불 성벽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한다는 약속입니다. 영광은 하나님이 그 도시 가운데 임재하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둘러싸시고, 동시에 그들 가운데 거하십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모셔 두기 위한 건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신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장소입니다. 그리고 이 환상에서 하나님의 임재는 건물 하나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도시 전체를 감싸고, 도시 한가운데를 채웁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저 젊은이”가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측량줄을 든 남자라고 볼 수도 있고, 환상을 보고 있는 스가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는 출애굽의 기억이 겹쳐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날 때 하나님은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출애굽기 13:21–22). 애굽 군대가 추격해 왔을 때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애굽 군대 사이에 서셔서 자기 백성을 보호하셨습니다(출애굽기 14:19–20). 또한 성막이 완성되었을 때 여호와야훼의 영광이 그곳을 가득 채웠습니다(출애굽기 40:34–35). 이사야 4:5도 시온의 거처 위에 구름과 불의 빛을 두시며, 영광 위에 보호하는 덮개가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딸 바벨론에 사는 시온아, 빠져나와라” — 돌아올 곳이 생겼다면 떠나야 한다
환상은 이제 예루살렘 밖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아, 아, 북쪽 땅에서 달아나라. 여호와야훼의 선언이다. 내가 너희를 하늘의 네 바람처럼 흩어 놓았기 때문이다. 여호와야훼의 선언이다.」스가랴 2:10 · 본디새김
앞에서는 뿔들이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흩어 놓았습니다(2:2).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자신이 백성을 흩어 놓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민족들은 침략하고 약탈했습니다. 하지만 유다의 포로 생활은 하나님이 전혀 알지 못하신 채 벌어진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민족들의 책임이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앞의 뿔에 대한 심판이 그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역사 주권과 침략자들의 책임을 모두 붙들고 있습니다.
바벨론에 사는 시온
「아, 딸 바벨론에 사는 시온아, 빠져나와라.」스가랴 2:11 · 본디새김
시온은 본래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바벨론에 살고 있는 이들을 시온이라고 부릅니다.
사람들은 시온을 떠났지만, 그들이 시온의 백성이라는 정체성까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시편 137편에서도 바벨론 강가에 앉아 있는 포로들은 시온을 기억합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예루살렘을 잊지 않겠다고 노래합니다(시편 137:1–6).
스가랴에서는 그 기억이 하나님의 부름과 만납니다.
이제 하나님이 예루살렘에 다시 거하시겠다고 선언하셨으므로, 흩어진 사람들은 그 회복에 응답하도록 초대받습니다. 여기서 “빠져나와라”는 말은 단순한 여행 권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시는 회복에 참여하라는 부름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멀리서 듣는 위로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때로는 그 약속을 믿고 삶의 방향을 바꾸도록 부릅니다.
조금 더 깊이
“북쪽 땅”은 바로 다음 절의 바벨론과 연결됩니다. 바벨론은 예루살렘의 동쪽에 있지만, 메소포타미아에서 시리아를 거쳐 팔레스타인으로 접근하는 주요 경로와 예언서의 표현에서는 북쪽의 위협으로 나타납니다. 예레미야 1:14에서도 북쪽으로부터 재앙이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너희를 건드리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건드린다” — 약탈당한 백성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시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약탈한 민족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영광 뒤에 그가 너희를 약탈하는 민족들에게 나를 보냈다. 너희를 건드리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건드리기 때문이다.」스가랴 2:12 · 본디새김
눈동자를 건드린다는 것
눈은 사람의 몸에서 특별히 민감하고 보호해야 할 부분입니다. 따라서 눈동자를 건드린다는 비유는 단순히 소중한 물건을 건드린다는 말보다 훨씬 강렬합니다. 신명기 32:10에서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는 모습을 자신의 눈동자를 지키는 것에 비유합니다.
예루살렘은 한때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성전은 파괴되었고, 주민들은 사로잡혀 갔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변 민족들에게 유다는 이미 버림받은 민족처럼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을 건드리는 일은 눈동자를 건드리는 것과 같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고통을 무관심하게 바라보시는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은 단순한 동정에 머물지 않습니다.
「참으로 보라, 내가 그들을 향해 내 손을 휘두를 것이다. 그들은 자기 종들에게 약탈거리가 될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나를 보냈다는 것을 알 것이다.」스가랴 2:13 · 본디새김
하나님이 손을 휘두르신다는 표현은 그 행동이 얼마나 결정적인지를 보여 줍니다. 인간의 눈에는 강대한 제국을 무너뜨리는 일이 불가능해 보일지 모르지만, 환상은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그 권세가 최종적이지 않다고 말합니다.
다만 이 약속을 오늘날 특정 민족이나 국가에 대한 보복을 정당화하는 말로 곧바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포로와 약탈을 겪은 유다 공동체를 향해 주어진 심판과 회복의 신탁입니다.
그 핵심은 어떤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힘 있는 자가 약한 자를 무너뜨렸다는 이유만으로 그 결과를 정당한 질서로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빼앗긴 자를 기억하시며, 폭력을 행사한 권세도 심판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특히 “영광 뒤에”라는 표현은 히브리어 아하르 카보드를 옮긴 것입니다. 영광이 나타난 뒤라는 시간적 의미로 읽을 수도 있고, 영광을 얻거나 드러내기 위한 파견을 나타낸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원문만으로 어느 하나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누가 “나를 보냈다”고 말하는지도 분명하게 정리하기 어렵습니다.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전하는 사자가 자신의 파견을 말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지만, 신탁 안에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과 보냄을 받은 이의 말이 맞물리는 방식도 고려해야 합니다. 13절과 15절에도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나를 보냈다”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그러므로 이 문장들을 무리하게 하나의 화자로 정리하기보다는, 보냄을 받은 이의 말이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선포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많은 민족이 내 백성이 될 것이다” — 예루살렘의 경계가 열리는 순간
지금까지 환상은 유다를 공격한 민족들의 권세가 무너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기치 않은 전환이 일어납니다.
「딸 시온아, 기쁨의 소리를 내고 즐거워하여라. 보라, 내가 와서 네 가운데 살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와야훼의 선언이다.」스가랴 2:14 · 본디새김
그런데 다음 절을 읽으면 그 기쁨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예상보다 훨씬 많습니다.
「그날에 많은 민족이 여호와야훼에게 합류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나는 네 가운데 살 것이다. 그러면 너는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나를 네게 보냈다는 것을 알 것이다.」스가랴 2:15 · 본디새김
민족들은 모두 심판의 대상인가
앞에서는 민족들의 뿔이 유다를 흩어 놓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뿔을 내던지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독자는 다른 민족들이 예루살렘에서 완전히 배제되는 결말을 예상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내 백성”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출애굽기 6:7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스가랴의 환상에서는 이 표현이 많은 민족에게까지 확대됩니다.
2장 앞부분에서 심판받는 것은 민족이라는 존재 자체가 아니라 유다를 약탈하고 짓밟은 그들의 폭력적인 권세입니다. 반면 15절에서는 여러 민족이 여호와야훼께 합류하여 그분의 백성이 됩니다.
본문이 모든 적대 민족이 아무런 변화 없이 자동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합류하다”라는 동사가 나타내듯, 그들이 여호와야훼와 관계를 맺는 일이 중심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무너뜨리시는 것은 폭력적인 지배입니다. 하나님이 열어 놓으시는 것은 그분을 향해 나아오는 민족들의 참여입니다.
성벽 없는 도시의 더 깊은 의미
이제 앞에서 본 성벽 없는 예루살렘의 의미도 한층 풍성해집니다.
성벽이 없다는 환상을 처음부터 이방 민족의 유입을 뜻하는 상징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8절은 분명히 인구와 가축의 증가를 직접적인 이유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장 전체의 흐름 속에서 보면 두 이미지가 서로 잘 어울립니다.
도시는 점점 넓어지고, 그 도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백성도 여러 민족을 포함하게 됩니다.
이러한 전망은 이사야 56:6–7의 약속과도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는 여호와야훼를 섬기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 나아오고, 하나님의 집이 모든 민족을 위한 기도의 집으로 불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스가랴서 자체도 이 주제를 발전시킵니다. 스가랴 8:20–23에서는 여러 성읍의 주민들과 많은 민족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여호와야훼를 찾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유다는 특별한 자리를 잃는가
여호와야훼가 거룩한 땅에서 유다를 자기 몫으로 차지하고, 다시 예루살렘을 선택할 것이다.스가랴 2:16 · 본디새김
여러 민족이 하나님의 백성에 합류한다고 해서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이 취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자기 몫”이라는 표현은 신명기 32:9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도 여호와야훼의 몫은 그분의 백성이라고 말합니다.
땅과 백성의 관계는 소유권에 관한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누구와 관계를 맺으시고, 누구 가운데 거하시느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스가랴의 관심은 그 땅이 다른 땅보다 자연적으로 특별한 성질을 지녔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문맥에서 그 땅이 거룩한 까닭은 하나님이 그곳을 자신의 몫으로 삼으시고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특정한 현대 국가의 국경이나 영토 정책을 본문에서 직접 끌어낼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환상은 포로기 이후 유다의 회복과 하나님의 임재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과 민족들을 향한 약속이 이 두 절에서 나란히 나타납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약속은 출애굽기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임재라는 주제와 이어지고, 스가랴서 후반부에서 여러 민족이 여호와야훼를 섬기는 전망으로 더욱 발전합니다(스가랴 14:16). 신약의 요한계시록 21:23–26에서도 하나님의 영광과 여러 민족이 새 예루살렘의 모습 속에 함께 등장합니다. 이는 스가랴 2장을 직접 인용한 것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임재와 민족들의 참여라는 주제가 이어지는 정경적 연결로 읽을 수 있습니다.
“모든 육체여, 잠잠하여라” — 이제 하나님이 움직이신다
마지막 절에서 분위기가 갑자기 달라집니다.
모든 육체여, 여호와야훼 앞에서 잠잠하여라. 그가 자기의 거룩한 거처에서 깨어 일어났기 때문이다.스가랴 2:17 · 본디새김
왜 기뻐하라고 하던 말씀이 침묵하라는 명령으로 끝날까요? 그것은 서로 다른 반응이 하나님의 동일한 행동을 향하기 때문입니다.
시온은 하나님이 자기 가운데 오시므로 기뻐합니다.
모든 육체는 하나님이 일어나셔서 행동하시므로 잠잠해야 합니다.
“모든 육체”라는 표현은 유다 주민에게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을 포괄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침묵은 단순히 두려움 때문에 말을 잃는 반응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행동 앞에서 인간이 자신의 힘이나 판단을 앞세우지 않는 태도로 읽을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하박국 2:20에서도 여호와야훼께서 자신의 거룩한 성전에 계시므로 온 땅이 그 앞에서 잠잠하라고 합니다. 스가랴의 마지막 문장은 그와 비슷하지만 특별히 하나님의 움직임을 강조합니다. “그가 자기의 거룩한 거처에서 깨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실제로 잠들어 계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제 행동을 시작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시적인 표현입니다. 시편 44:23에서도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깨어나시라고 부르짖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처럼 잠을 주무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백성의 고난 앞에서 하나님의 구원 행동을 간절히 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보호는 더 큰 성벽을 세우는 것보다 깊다
하나님은 폭력을 행사하는 권세를 심판하시지만, 민족들이 자신에게 합류하는 길을 여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지만, 보호의 근거를 단지 그들이 세운 성벽의 높이에 두지 않으십니다.
이 장에서 말하는 안전은 모든 위험이 영원히 사라졌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실제로 예루살렘은 이후에도 역사 속에서 수많은 위협을 겪습니다.
이 약속을 듣는 사람들은 아직 완성된 도시를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도시의 크기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도시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몇 사람이 그 안에 살 수 있는지, 어떤 성벽이 그들을 지킬 수 있는지 계산하기 전에, 그 도시 가운데 누가 거하시려 하는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모든 말이 멈춥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거룩한 거처에서 깨어 일어나셨기 때문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