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1–6장 · 밤에 본 환상들

더러운 옷을 입은 대제사장을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

하나님 앞에 선 대제사장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까요? 정결한 옷을 입고, 거룩한 직무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스가랴가 본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모습은 정반대였습니다.

그는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 오른쪽에는 그를 대적하는 자가 서 있었고, 그 앞에는 여호와야훼의 천사가 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변호하지도 않고, 대적자와 논쟁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먼저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대제사장이 부정한 상태라면, 그가 정결하게 된 뒤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런데 이 환상에서는 하나님 앞에 선 자리에서 그가 정결하게 됩니다.

스가랴 3장은 죄인을 정결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어떻게 그를 다시 자신의 일에 참여시키시고, 그 회복을 공동체 전체의 미래로 넓혀 가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앞 장에서는 하나님이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3장은 그 거룩한 임재 앞에서 하나님을 섬겨야 할 사람이 어떤 상태에 있으며, 어떻게 다시 세워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읽는 시간 17분소단락 73장 본문 읽기 →

대적자 앞에 선 여호수아 — 누가 그를 변호할 것인가

스가랴 3:1–2 본문 →

대제사장이 법정에 서 있다

환상은 세 인물이 마주 선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가 내게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보여 주었다. 여호수아는 여호와야훼의 천사 앞에 서 있었고, 대적자는 그를 대적하려고 그의 오른쪽에 서 있었다.스가랴 3:1 · 본디새김

여호수아는 포로 귀환 이후의 대제사장입니다. 학개 1:1에서는 그를 여호사닥의 아들이라고 소개하며, 스룹바벨과 함께 성전 재건 시기의 지도자로 등장시킵니다. 스룹바벨이 유다 공동체의 정치적 지도자였다면, 여호수아는 제사장 직무를 대표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여호수아가 지금 하나님 앞에서 직무를 수행하는 모습이 아니라, 대적을 받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 장면은 법정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시편 109:6에도 고발자가 오른쪽에 서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본문은 대적자의 고발 내용을 들려주지 않습니다. 여호수아가 자신을 변호하는 말도 없습니다.

독자가 듣는 첫 번째 발언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대적자의 말보다 먼저 말씀하신다

여호와야훼가 대적자에게 말했다. 「대적자야, 여호와야훼가 너를 꾸짖기를. 예루살렘을 선택한 여호와야훼가 너를 꾸짖기를. 이는 불에서 건져 낸 불붙은 나무토막이 아니냐?」스가랴 3:2 · 본디새김

하나님은 여호수아가 아무 잘못도 없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을 선택한 여호와야훼”라는 표현은 개인의 자격보다 먼저 하나님의 선택을 내세웁니다.

여호수아는 예루살렘 공동체를 대표하는 대제사장입니다. 따라서 그의 처지는 그 공동체의 처지와 분리해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 공동체는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했습니다. 성전은 파괴되었고, 백성은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제 겨우 돌아와 다시 시작하는 중입니다.

불에서 건져 낸 나무토막

불붙은 나무토막은 이미 불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타 버리기 전에 건져졌습니다.

아모스 4:11에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불붙는 가운데서 건져 낸 나무토막에 비유하십니다. 그때는 심판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유다는 실제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 역사를 없었던 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심판이 유다의 완전한 소멸을 뜻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건져 내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와 그가 대표하는 공동체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그들의 과거를 근거로 한 고발이 아닙니다. 그들을 불에서 건져 내시고 예루살렘을 다시 선택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과거의 죄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죄가 하나님이 시작하시는 회복의 마지막 말을 차지하게 두지도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대적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하사탄(⁨שָׂטָן⁩)입니다. 정관사가 붙어 있어 ‘그 대적자’ 또는 ‘고발자’라는 역할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같은 단어는 욥기 1–2장에서도 하늘의 회의에 등장하는 고발자에게 사용됩니다. 그러나 스가랴 3장의 대적자가 후대 성경과 신학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존재로 이해되는지부터 출발할 필요는 없습니다.

더러운 옷을 벗기다 — 정결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스가랴 3:3–5 본문 →

대제사장이 입은 더러운 옷

여호수아는 더러운 옷을 입고 그 천사 앞에 서 있었다.스가랴 3:3 · 본디새김

성경에서 제사장의 의복은 단순한 겉치장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28장은 제사장의 옷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입는 옷입니다. 특히 대제사장의 의복은 그가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스가랴가 본 대제사장은 더러운 옷을 입고 있습니다.

이는 대제사장의 직무와 어울리지 않는 심각한 부정함을 보여 줍니다. 하지만 그 옷의 더러움이 여호수아 개인의 어떤 구체적인 죄를 가리키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제사장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서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서 직무를 수행합니다. 따라서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은 포로와 심판을 겪은 공동체 전체의 죄악과 부정함을 드러내는 상징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옷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죄악을 없애다

그가 자기 앞에 서 있는 이들에게 응답하여 말했다. 「그에게서 더러운 옷을 벗겨라.」 또 그가 여호수아에게 말했다. 「보아라, 내가 네 죄악을 네게서 없앴다. 네게 예복을 입히겠다.」스가랴 3:4 · 본디새김

이것은 단순한 의복 교체가 아닙니다. 옷의 변화가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지는 정결함의 회복을 눈에 보이도록 드러내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 장면 내내 자기 정결함을 증명할 기회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직접 옷을 벗지도 않습니다. 주변에 서 있는 이들이 명령을 받아 옷을 벗기고 새 옷을 입힙니다.

그의 상태를 바꾸는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부정함은 하나님 앞에 아무렇지 않게 가져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직무를 위해서는 정결함이 필요합니다.

용서는 단지 과거의 잘못을 문제 삼지 않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다시 살아가고 섬길 수 있도록 사람을 세우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스가랴가 환상에 끼어들다

내가 말했다. 「그들이 그의 머리에 정결한 두건을 씌우게 하십시오.」 그들은 그의 머리에 정결한 두건을 씌우고 그에게 옷을 입혔다. 여호와야훼의 천사는 서 있었다.스가랴 3:5 · 본디새김

그동안 스가랴는 환상을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장면을 보고, 천사에게 묻고, 대답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직접 말을 합니다.

여호수아는 대제사장입니다. 대제사장에게는 정결한 의복뿐 아니라 머리에 쓰는 관도 중요합니다. 출애굽기 28:36–38에서는 제사장의 머리에 쓰는 관과 그 위에 붙이는 거룩함의 표지가 설명됩니다.

스가랴가 요청한 정결한 두건은 여호수아가 다시 제사장 직무를 감당할 수 있도록 온전히 갖추어지는 모습을 완성합니다. 스가랴는 그 모습을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고, 환상 속에서 그 회복이 완성되기를 요청합니다.

고발의 장면이 회복을 위한 참여의 장면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모습은 처음과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대적자의 고발은 더 이상 장면을 이끌지 않습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 다시 세워진 대제사장이 있습니다.

하지만 환상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의 히브리어도 일인칭인 바오마르(⁨אָמַר⁩), ‘내가 말했다’입니다. 일부 번역 전통에서는 주변 문맥에 맞추어 다른 화자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제시된 본문의 읽기에서는 스가랴 자신이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네가 내 길들을 걷는다면” — 용서받은 사람에게 맡겨진 책임

스가랴 3:6–7 본문 →

여호수아가 정결한 옷을 입자 여호와야훼의 천사가 그에게 엄숙히 당부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네가 내 길들을 걷는다면, 또 네가 내가 맡긴 일을 지킨다면, 너도 내 집을 다스리고 또 내 뜰들을 지킬 것이다. 나는 네게 여기 서 있는 이들 사이를 오갈 길을 주겠다.』」스가랴 3:7 · 본디새김

하나는 하나님의 길들을 걷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비슷하게 들리지만 강조점이 다릅니다. 첫째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께 맡겨 받은 직무에 대한 충실함입니다.

레위기 10:10–11에서는 제사장들에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고,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규례를 가르치라는 책임이 주어집니다. 제사장은 단지 의식을 집행하는 기술자가 아닙니다. 자신의 삶과 직무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야 하는 사람입니다.

용서와 순종의 순서

여호수아는 먼저 정결하게 됩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의 길을 걸으라는 당부를 받습니다.

하나님은 “네가 충분히 순종하면 더러운 옷을 벗겨 주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더러운 옷을 벗기셨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는 여호수아의 책임을 없애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시 맡겨진 일을 충실히 감당하도록 부릅니다.

용서는 관계와 직무를 회복시키고, 순종은 그 회복된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거룩한 옷을 입는 것과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를 모두 요구하십니다.

“여기 서 있는 이들 사이를 오갈 길”

여기 서 있는 이들은 환상 속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존재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하늘의 천상적 수행자들이라면, 이 약속은 여호수아에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특별한 접근과 직무상의 특권을 주신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다만 본문은 그 길의 정확한 성격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죽음 이후의 천국 출입권이나 특정한 영적 능력에 관한 약속으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문맥에서 분명한 것은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집과 뜰을 돌보는 직무를 다시 수행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그는 하나님의 집을 맡아 섬기는 사람으로 다시 인정받습니다.

대적받던 자리에서 섬기는 자리로 옮겨진 것입니다.

“내 종 싹” — 대제사장의 회복이 가리키는 더 큰 미래

스가랴 3:8 본문 →

이제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개인의 직무를 넘어갑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아 있는 네 동료들은 부디 들어라. 그들은 징표가 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보라, 내가 내 종 싹을 데려올 것이다.』」스가랴 3:8 · 본디새김

이 말은 그들의 존재와 직무가 단순히 그 시대의 일만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앞으로 하나님이 하실 일을 가리킨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방금 더러운 옷을 벗고 새 옷을 입었습니다. 그 회복 자체가 앞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일을 보여 주는 징표가 됩니다.

왜 하필 싹인가

예레미야 23:5에서는 하나님이 다윗에게 의로운 싹을 일으키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 싹은 왕으로 다스리며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입니다. 예레미야 33:15에서도 다윗에게서 의로운 싹이 돋아날 것이라는 약속이 반복됩니다.

이사야 11:1에서는 표현에 사용된 히브리어 낱말은 다르지만,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새순이 나오는 이미지가 나타납니다. 이런 예언들은 모두 왕조의 몰락 이후에도 하나님이 새로운 통치를 일으키실 수 있다는 희망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스가랴의 시대에는 다윗 왕조의 왕이 예루살렘을 다스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유다는 페르시아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시대에 하나님은 자신의 종인 싹을 데려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큰 나무는 이미 베어졌습니다. 왕조의 위엄은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새로운 생명이 돋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약속은 여호수아에게 주어집니다.

여호수아는 제사장이지 왕이 아닙니다. 그는 이 환상에서 정결하게 되어 다시 섬기는 사람으로 세워집니다. 하지만 앞으로 오게 될 싹은 여호수아의 회복을 넘어서는 미래를 가리킵니다.

싹은 누구인가

한편으로 「싹」은 예레미야의 약속과 연결되어 다윗 왕조의 회복을 나타내는 인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가랴 6:12에서도 같은 이름이 등장하며, 그가 여호와야훼의 성전을 건축할 것이라는 말씀이 주어집니다. 따라서 다윗 왕조의 통치와 성전 재건이 연결되는 전망으로 읽을 근거가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포로 귀환 공동체에서 다윗 가문의 후손인 스룹바벨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하여, 이 약속이 그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가랴 3장은 싹의 신원을 직접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곧바로 특정한 인물로 확정하는 것은 본문의 설명을 넘어섭니다.

또한 「싹」이 장차 올 이상적인 다윗 왕을 가리키는 약속으로 이해되더라도, 그 인물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등장하는지는 이 절만으로 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제사장 공동체를 회복시키시는 데서 일을 마치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앞으로 이루실 더 큰 회복을 가리키는 징표가 되도록 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대제사장이자 다윗 계열의 왕으로 제시되는 것(히브리서 4:14–16; 누가복음 1:32–33)은 이런 구약의 주제들과 연결됩니다. 다만 스가랴 3장은 예수의 이름이나 신약의 특정 사건을 직접 명시하지 않으므로, 그 관계는 본문 자체의 직접 인용이나 명시적 신원 확인이 아니라 정경 전체에서 발전하는 신학적 연결로 이해해야 합니다.

일곱 눈이 있는 돌 — 하루 만에 없어질 죄악

스가랴 3:9 본문 →

이제 하나님의 말씀은 새로운 물체를 가리킵니다.

「『참으로 보아라, 내가 여호수아 앞에 놓은 그 돌을. 돌 하나 위에 일곱 눈이 있다. 보라, 내가 그 돌에 새김을 새기겠다. 만군의 여호와야훼의 선언이다. 나는 그 땅의 죄악을 하루 만에 없애겠다.』」스가랴 3:9 · 본디새김

이 이미지들이 서로 어떤 관계인지 본문은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가장 확실한 사실은 이 돌이 하나님이 여호수아 앞에 놓으신 돌이라는 점입니다.

“그 땅의 죄악을 하루 만에 없애겠다”

앞에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내가 네 죄악을 네게서 없앴다.」 이제는 땅 전체의 죄악이 제거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대제사장에게 일어난 일이 공동체 전체에 대한 약속으로 넓어집니다.

여호수아는 백성을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정결하게 되는 모습은 개인적인 명예 회복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가 대표하는 백성과 그 땅 전체가 정결해질 미래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일이 하루 만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그 땅의 죄악을 없애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그 일을 자신의 능력으로 완성하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백성을 대표하여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자신도 먼저 죄악을 제거받아야 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정결함이 필요한 백성을 대표할 수 있지만, 자신의 힘만으로 모든 죄악을 끝낼 수 있는 존재는 아닙니다.

이 환상에서 인간 제사장에게 맡겨진 일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구별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성전 재건이 진행되는 문맥이므로, 이 돌을 성전 건축과 관련된 돌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가랴 4:7에서는 스룹바벨이 머릿돌을 내놓는 장면이 나오고, 4:9에서는 그가 성전의 기초를 놓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 돌을 기초석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머릿돌이라고 명시하지도 않습니다. 어떤 해석에서는 이 돌을 하나님의 통치나 앞으로 오게 될 싹과 관련된 상징으로 이해합니다. 그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지만, 본문이 돌과 싹을 동일한 존재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일곱이라는 수는 성경에서 완전함이나 충만함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자주 사용됩니다. 스가랴 4:10은 일곱 눈과 관련된 장면을 설명하면서, 온 땅을 두루 살피는 여호와야훼의 눈을 언급합니다. 이 연결을 고려하면 3장의 일곱 눈도 하나님의 충만한 살피심 또는 감찰과 관련된 이미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3:9의 「일곱 눈」을 돌에 새겨진 일곱 눈의 형상으로 볼 것인지, 돌의 일곱 면 또는 표면에 나타난 특징과 관련된 표현으로 이해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표현만으로 구체적인 물체의 모양을 복원할 수는 없습니다. 「하루 만에」라는 표현을 반드시 어느 특정한 달력상의 날짜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날의 날짜를 밝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결정적으로 행동하시면 오랫동안 이어져 온 죄악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약속이 강조됩니다. 이것은 레위기 16장의 속죄일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그날 대제사장은 자신과 백성을 위한 속죄 의식을 수행하고, 이스라엘의 부정함과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감당했습니다. 하지만 스가랴 3:9이 직접 속죄일을 지칭한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 죄악의 제거가 만들어 내는 삶

스가랴 3:10 본문 →

마지막 절에서 환상의 분위기가 다시 크게 달라집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는 법정도, 대적자도, 더러운 옷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사람들이 서로를 초대합니다.

「『그날에, 만군의 여호와야훼의 선언이다. 너희는 저마다 자기 동료를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부를 것이다.』」스가랴 3:10 · 본디새김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가 있는 풍경

이스라엘의 농경 사회에서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일상적인 풍요와 안정된 생활을 나타내는 중요한 이미지였습니다. 열왕기상 4:25에서는 솔로몬 시대의 평화를 묘사하면서, 유다와 이스라엘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안전하게 살았다고 말합니다.

미가 4:4도 비슷한 약속을 전합니다. 사람들이 각자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고, 그들을 두렵게 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전쟁의 혼란에서 벗어나 다시 땅을 일구고 열매를 얻을 수 있는 삶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이웃을 그 아래로 초대하는 행동은 그 삶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죄악의 제거는 공동체의 삶과 연결된다

하나님은 그 땅의 죄악을 없애겠다고 말씀하신 뒤, 그 결과를 단순히 성전 제사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모습으로만 보여 주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이 서로를 초대하는 일상의 장면으로 마무리하십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회복은 성전 안의 정결함과 성전 밖의 삶을 갈라놓지 않습니다.

마지막 장면 — 서로를 초대하는 사람들

스가랴 3:1–10 본문 →

하나님은 더러운 옷을 입은 여호수아를 정결하게 하시는 데서 일을 마치지 않으십니다. 그를 다시 섬기는 사람으로 세우시고, 앞으로 오게 될 회복의 징표가 되게 하시며, 마침내 온 땅이 평화를 누리는 미래를 약속하십니다.

스가랴 3장의 마지막에는 더 이상 여호수아의 옷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가 입었던 더러운 옷도, 새로 입은 예복도 보이지 않습니다. 대적자 역시 나타나지 않습니다.

대신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가 자라는 평범한 마을의 풍경입니다.

누군가 자기 나무 아래에 앉아 있습니다. 그곳에는 그늘이 있고, 열매가 있으며,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자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이웃을 부릅니다.

처음에 여호수아는 누군가 자신을 대적하는 가운데 홀로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사람들이 서로를 자신의 자리로 초대합니다.

하나님의 정결하게 하시는 일이 지향하는 미래는, 서로를 밀어내는 대신 함께 앉을 자리를 내어 주는 삶입니다.

그날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동료를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부를 것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