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풀어 읽기 · 4장
이 장의 자리 · 4장 · 영들을 가리는 기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자신에게 말씀하셨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특별한 영적 경험을 이야기하고, 어떤 사람은 누구보다 깊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말들이 정말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요한일서 4장은 이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모든 영을 다 믿지 말고 그 영들이 하나님께 속해 있는지 가려 보십시오.」 하지만 이 장의 끝에 이르면 저자는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눈으로 본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본 적 없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는 영을 구별하는 문제였습니다. 마지막에는 눈에 보이는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 두 질문은 어떻게 연결될까요?
그 사이에서 저자는 요한일서 전체에서 가장 유명한 선언을 두 번 반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십니다.
이 선언은 하나님에 관한 아름다운 감상을 표현하기 위해 등장하지 않습니다. 어떤 영이 참된 영인지, 누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인지,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을 드러내셨는지, 그리고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 없이 설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논증의 중심에 놓여 있습니다.
저자가 경계하는 것은 진리 없는 사랑만이 아닙니다. 사랑 없는 진리의 주장도 경계합니다. 하나님에게서 나온 영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증언하는데, 그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께서 사랑으로 보내신 아들이시며, 죄인을 살리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일과 사랑하는 일은 서로 다른 두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신 사건에서 시작되는 하나의 길입니다.
영을 시험하라 — 하나님에게서 온 말은 무엇을 증언하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영을 다 믿지 말고 그 영들이 하나님께 속해 있는지 가려 보십시오. 많은 거짓 예언자가 세상에 나왔기 때문입니다.요한일서 4:1 · 두루새김
앞 장의 마지막에서 저자는 하나님이 주신 영으로 그분이 우리 안에 머무신다는 것을 안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곧바로 영에 관한 모든 주장을 하나님의 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성령의 활동을 의심하라는 말이 아니라, 참으로 하나님에게서 온 영의 활동이 있기에 그것과 거짓된 주장을 구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히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들이 아닙니다. 실제로 말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고 주장하지만, 저자는 그들의 말이 정말 하나님에게서 왔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가려 보십시오」는 어떤 것이 참인지 살피고 확인하라는 말로, 단순히 의심하거나 거부하는 것보다 적극적으로 구별하는 일을 요구합니다.
무엇을 기준으로 구별해야 할까요?
성경의 전통에서 예언자의 주장이 강렬하다고 해서 그 말이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되지는 않았습니다. 신명기 13:1–5는 표징이나 놀라운 일을 보여 주더라도 다른 신들을 따르도록 이끈다면 그 말을 따르지 말라고 경고하고, 신명기 18:20–22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한다는 예언자의 말을 구별하는 기준을 제시합니다. 예언의 권위는 주장하는 사람의 특별함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가 전하는 내용이 하나님께서 자신에 관해 밝히신 진리와 일치해야 합니다.
요한일서는 이 원칙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고백에 적용합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하나님의 영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지니고 오셨다고 고백하는 영은 모두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 영은 어느 것도 하나님께 속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온다고 들었던 적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 영은 지금 이미 세상에 있습니다.요한일서 4:2–3 · 두루새김
저자는 그 사람이 얼마나 감동적으로 말하는지, 얼마나 대단한 경험을 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따르는지를 첫 번째 기준으로 삼지 않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무엇을 말하는지를 묻습니다.
왜 하필 「사람의 몸을 지니고 오셨다」는 사실인가?
원문은 육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내용을 담고 있고, 두루새김은 이를 「사람의 몸을 지니고 오셨다고」 풀어 옮겼습니다. 단순히 인간의 겉모습을 갖추셨다는 뜻이 아니라 실제로 인간으로 오셨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삶을 멀리서 관찰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삶 속에서 걸으셨고, 사람들을 만나셨으며, 실제로 죽음을 겪으셨습니다. 이 편지에서 그리스도는 죄를 없애기 위해 나타나신 분이며,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심을 받으신 분입니다. 그러니 그분이 실제로 몸을 지니고 오셨음을 부정한다면, 그분이 이 땅에서 사신 삶과 죽음이 구원에서 갖는 의미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편지의 반대자들이 정확히 어떤 교리를 가졌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 확인되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에 관한 저자의 고백과 충돌하는 가르침을 전했다는 점이며, 저자는 이를 여러 신학적 견해 가운데 하나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3절의 적그리스도의 영은 먼 미래에만 나타날 가능성이 아니라 「지금 이미 세상에」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그 영의 정체를 추측하라고 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고백을 확인하라고 합니다.
다만 올바른 신앙 고백의 문장을 입으로 말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이 진실하다고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요한일서는 곧 사랑의 삶을 함께 다루기 때문입니다. 참된 영을 구별하는 일은 올바른 말을 찾아내는 일에서 시작하지만, 그 말이 가리키는 그리스도의 생명과 사랑을 떠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2절은 문법적으로 「육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전체를 고백의 대상으로 읽을 수도 있고, 예수님을 육으로 오신 그리스도로 인정한다는 구조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몸을 지니고 오셨음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의 역사에서는 예수님의 몸이 겉모습에 불과했다고 보거나 인간 예수님과 하늘의 그리스도를 나누어 설명하는 사상이 등장했고, 요한일서의 논쟁을 이와 연결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생긴 특정한 교리 체계를 이 편지의 반대자들에게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여러분 안에 계신 분이 더 크시다
저자는 거짓 예언자들의 위험을 설명한 다음, 경고를 계속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독자들이 이미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선언합니다.
자녀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께 속해 있고 그 거짓 예언자들을 이겼습니다. 여러분 안에 계신 분이 세상 안에 있는 자보다 크시기 때문입니다.요한일서 4:4 · 두루새김
저자는 독자들이 지적으로 뛰어나서, 혹은 더 강한 정신력을 갖추어서 이겼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 안에 계신 분이 더 크시기 때문입니다. 문맥에서 「여러분 안에 계신 분」은 하나님 또는 그분이 주신 영이 그들 안에 머무시는 것을, 「세상 안에 있는 자」는 하나님을 거스르는 악한 영적 세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들은 앞으로 이길 것이라는 약속만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이미 이긴 사람들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거짓 예언자들은 여전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승리는 거짓된 가르침이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이 그 가르침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진리에 속해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나는 승리입니다.
그들은 세상에 속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생각을 따라 말하고, 세상은 그들의 말을 듣습니다.요한일서 4:5 · 두루새김
어떤 주장이 널리 받아들여지면 그 주장에 진리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속해 있습니다」 「세상의 생각을 따라 말하고」 「세상은 그들의 말을 듣습니다」로 이어지는 세 번의 반복은, 말의 내용과 듣는 사람들의 반응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묻습니다. 저자의 논증은 인기의 유무가 아니라 그 말이 어디에서 나왔으며 무엇을 전하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그는 곧바로 반대편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사람은 우리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진리의 영과 사람을 속이는 영을 구별합니다.요한일서 4:6 · 두루새김
4절의 「여러분」, 5절의 「그들」에 이어 6절에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속해 있다고 말합니다. 이 「우리」는 편지의 첫머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던 사람들과 이어지며, 4:14에서도 「우리는 … 보았고 증언합니다」라는 표현이 다시 나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말을 듣고」는 저자의 모든 판단에 무조건 동의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을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이 구절을 근거로 오늘날 어떤 지도자가 자기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면, 그 지도자가 바로 본문의 권위를 자기 것으로 옮겨 놓는 문제가 생깁니다. 이 장에서 진리의 기준은 개인 지도자의 절대적인 권위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참된 증언입니다.
6절 끝의 「사람을 속이는」은 잘못된 길로 벗어나게 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거짓의 문제는 잘못된 정보 하나를 알고 있는 차원을 넘어, 사람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끄는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게서 온 진리는 사람을 어디로 이끌까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삶으로 이끕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 그런데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고 하나님을 압니다.요한일서 4:7 · 두루새김
지금까지 저자는 어떤 영이, 어떤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나왔는지 구별하라고 했습니다. 이제 같은 질문을 사랑에 적용합니다. 주제가 갑자기 바뀐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앞의 질문을 더 깊은 자리로 가져가는 일입니다. 참된 진리와 참된 사랑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비롯됩니다.
저자는 사랑이 하나님의 명령이라고만 말하지 않고,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고 말합니다. 사랑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하나님께 바치는 아름다운 행동만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어 인간의 삶에 나타나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과 사랑하는 삶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요한일서 4:8 · 두루새김
이 구절을 잘못 읽으면 「사랑은 하나님」이라는 말로 바꾸기 쉽습니다. 그러나 두 문장은 같지 않습니다. 저자는 사랑이라는 개념을 하나님으로 높이지 않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사랑으로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일까요? 어떤 사람에게 사랑은 감정의 따뜻함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상대방의 모든 선택을 인정해 주는 일이며, 다른 사람에게는 희생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의 경험에서 사랑의 정의를 찾아 하나님께 적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보여 줌으로써 사랑이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사랑이 드러난 사건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우리 가운데 드러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뿐인 아들을 통해 살도록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요한일서 4:9 · 두루새김
이 구절은 하나님의 사랑을 추상적인 성품으로 남겨 두지 않고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사건과 연결합니다. 하나님이 사랑을 표현하신 방식은 많은 선물 가운데 하나를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을 보내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목적은 우리를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그 생명을 스스로 얻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인간이 살도록 행동하시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아들을 보내신 데 있습니다.요한일서 4:10 · 두루새김
여기서 사랑의 방향이 뒤집힙니다.
보통 종교적 삶을 생각할 때에는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도하고, 헌신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랑에 응답하신다고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충분히 사랑을 표현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아들을 보내셨고, 그 사건을 통해 인간은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죄인을 살리는 사랑
9절은 아들을 보내신 목적을 생명으로, 10절은 같은 사건을 속죄로 설명합니다. 우리가 살도록 아들을 보내신 일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아들을 보내신 일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죄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시지 않습니다. 죄인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죄의 문제를 다루십니다.
「속죄 제물」로 옮긴 그리스어 힐라스모스(ἱλασμός)는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키는 쪽과 죄를 없애고 깨끗하게 하는 쪽, 두 측면에서 논의됩니다. 본문은 이 논쟁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지만, 속죄 제물로 아들을 보내신 분이 바로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사람을 사랑할 마음이 없으셨는데, 예수님께서 희생하심으로써 마침내 사랑하게 되신 분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이 이루신 속죄를 서로 대립시키는 것은 이 구절의 논리와 맞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사랑으로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 되셨습니다.
여기서 4장의 첫 부분과 예상하지 못했던 연결이 드러납니다. 한쪽에는 세상에 나온 거짓 예언자들이 있습니다. 다른 한쪽에는 아버지께서 세상에 보내신 아들이 있습니다. 진리는 이 아들을 고백하는 일에서 드러나고, 사랑은 이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행동에서 드러납니다.
따라서 진리와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만납니다.
조금 더 깊이
9절의 「하나뿐인」은 단 하나뿐인 자녀 또는 유일하고 독특한 존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낱말 하나만으로 아들이 영원히 나셨다는 것에 관한 자세한 철학적 설명을 끌어낼 수는 없지만, 예수님께서 독특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10절의 힐라스모스는 2:2에서도 쓰인 말입니다. 진노를 돌이키는 쪽에 무게를 두면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죄인이 어떻게 구원받는지가, 죄를 없애는 쪽에 무게를 두면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떻게 회복되는지가 강조됩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본 적이 없지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다면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요한일서 4:11 · 두루새김
「사랑하셨다면」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는지 확실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미 9절과 10절에서 선언한 사실에서 결론을 이끌어 내는 말입니다. 「이렇게」라는 말이 사랑의 방식을 정합니다. 저자가 요구하는 사랑은 일반적인 친절이나 호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시고 그 사랑으로 아들을 보내셨다는 사실에 근거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어느 정도 응답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받은 사랑을 같은 양으로 계산하여 되갚는 일은 아닙니다. 저자의 관심은 하나님에게서 시작된 사랑이 우리 사이에서도 실제가 되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저자는 뜻밖의 말을 합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시고, 그분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져 있습니다.요한일서 4:12 · 두루새김
왜 사랑하라는 말 바로 뒤에 하나님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말이 나올까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자리
이 표현은 요한복음 1:18과 거의 같은 주제를 다룹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아무도 하나님을 본 적이 없지만, 아버지와 특별한 관계에 계신 아들이 하나님을 알려 주셨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직접 관찰하여 모두 파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지만, 자신을 완전히 감추신 분도 아닙니다. 아들을 보내심으로써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요한일서 4:12는 여기에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머무시고 그분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더합니다. 인간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완전하게 드러낸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심으로써 보여 주신 사랑이, 이제 그 아들을 믿는 사람들의 삶 안에서도 나타납니다.
「온전히 이루어져 있습니다」(τελειόω)는 완성하다, 목적에 이르게 하다라는 뜻의 동사입니다. 하나님이 불완전한 사랑을 가지고 계셨다가 인간의 도움으로 완전해지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이 인간에게 전달되어, 믿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할 때 그 목적을 이룬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서로 사랑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으로 보여 달라는 질문에 저자는 마음속의 신비한 경험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이 머무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간의 선한 행동으로 증명하는 철학적 논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자신을 드러내셨다는 믿음 안에서 그분의 사랑이 어디에서 실제로 나타나는지를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머무신다는 사실을 무엇으로 알 수 있는지도 설명합니다.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이 자신의 영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물고 그분도 우리 안에 머무신다는 것을 압니다.요한일서 4:13 · 두루새김
1절에서는 어떤 영이 하나님께 속해 있는지 가려 보아야 했습니다. 1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실제로 주신 성령이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신다는 것을 알게 하는 근거로 제시됩니다. 두 말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영이 계시기 때문에 거짓된 주장을 가려 보아야 하며, 성령을 주신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들과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저자의 관심은 성령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재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을 주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 확신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셨다는 사실을 보았고 증언합니다.요한일서 4:14 · 두루새김
저자는 성령을 말한 다음 곧바로 직접 본 일과 증언으로 돌아옵니다. 성령의 활동을 경험한다는 주장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실제적인 증언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영은 그 증언과 일치합니다.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아들
9절에서는 아들을 보내신 행동이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냈다면, 14절에서는 그 아들이 누구를 위해 어떤 역할로 보내심을 받으셨는지가 강조됩니다. 그분은 세상의 구원자이십니다.
1–6절과 함께 읽으면 대조가 드러납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세상에 속해 있고 세상은 그들의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바로 그 세상에 아들을 구원자로 보내셨습니다. 이 편지에서 세상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질서가 존재하는 곳이면서도,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신 구원의 대상입니다.
누구든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시고 그 사람도 하나님 안에 머뭅니다.요한일서 4:15 · 두루새김
2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지니고 오셨다는 고백이, 15절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고백이 중요합니다. 이 둘은 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신지를 두 방향에서 밝힙니다. 그분은 실제로 사람의 몸을 지니고 오셨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편지에서 고백은 입술로 정해진 문장을 발음하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신지를 진실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막연한 종교적 감정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보내신 아들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이 고백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제한하는 인위적인 규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신 사건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알게 되었고 믿게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알게 되었고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머물고,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십니다.요한일서 4:16 · 두루새김
저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일과 믿는 일을 함께 놓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역사 속에서 드러났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셨고, 그 아들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는 것은 근거 없이 사랑받고 있다고 상상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실제로 행하신 일을 통해 그 사랑을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동시에 믿음의 대상입니다. 사람은 고난을 겪고, 공동체 안에서 갈등을 경험하고,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다는 것은 모든 일이 자기 기대대로 이루어진다고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행동에 근거하여 그분의 사랑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십니다」라는 선언은 이제 8절에서보다 더욱 풍성하게 들립니다. 8절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했지만, 이제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시고 성령을 주셨으며 믿는 사람들 안에 머무신다는 사실을 설명한 뒤에 등장합니다. 그분의 사랑 안에서 실제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이 하나님을 자기 안에 소유하거나 통제하게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주신 사랑이 사람의 삶을 이끌고, 그 사랑 안에서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를 누린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의 사랑을 잠시 경험하고 지나가는 삶이 아닙니다.
그 사랑 안에 머무는 삶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렇게 머무는 관계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 놀라운 방향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 없이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어떻게 심판 날의 두려움을 내쫓는가
이렇게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온전히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심판 날에 당당할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도 예수와 같기 때문입니다.요한일서 4:17 · 두루새김
사랑과 심판은 서로 반대되는 개념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결과로 심판 날에 당당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셔서 아들을 보내셨고, 성령을 주셔서 믿는 사람들 안에 머무십니다. 그러므로 심판 날에 대한 확신은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 되었는가에만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이미 행하신 일과 그분 안에 머무는 관계에 근거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도 예수님과 같다
「이 세상에서 우리도 예수와 같기 때문입니다」라는 문장은 무엇이 같은지 밝히지 않습니다. 원문도 「그분이 그러하신 그대로 우리도 그러하다」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사람으로 산다는 읽기, 예수님처럼 아버지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읽기, 그분이 누구신지와 그분의 생명에 함께 참여한다는 읽기가 있고, 본문은 어느 하나를 명시적으로 확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공통된 중심이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무관한 존재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속해 있고, 그분 안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분의 사랑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것도 장차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거짓된 가르침과 미움과 갈등을 겪는 지금 그렇습니다. 이 현재의 관계가 미래에 당당할 수 있다는 확신과 연결됩니다.
두려움은 벌과 연결되어 있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오히려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움은 벌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랑 안에서 온전해지지 않았습니다.요한일서 4:18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자주 인용되지만, 문맥을 떠나 읽으면 뜻이 쉽게 달라집니다. 일상적인 불안, 위험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까 걱정하는 마음까지 한꺼번에 다루는 말씀으로 읽기는 어렵습니다. 바로 앞에서 심판 날을 언급했으므로, 여기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고 벌을 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의 잘못을 모른 체하는 사랑이 아니라,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아들을 보내신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알고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자신에게 벌을 내리려는 분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자신을 살리기 위해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로 알게 됩니다. 사랑은 심판이 없다고 선언함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이미 행동하셨다는 사실을 통해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온전한 사랑이란 무엇인가
「온전한 사랑」을 완벽한 감정 상태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앞에서 본 것처럼 온전해진다는 말에는 목적에 이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에게 전해지고 삶에서 실제가 되어 그 목적을 이루어 갈 때, 하나님을 오직 두려운 심판자로만 바라보는 관계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잠언 1:7은 여호와야훼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이라고 말합니다. 그러한 경외와 이 구절의 벌에 대한 두려움은 구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참되게 알기 때문에 그분의 사랑을 신뢰하면서 그분을 경외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근거로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의 믿음이 가짜라거나, 마음에 불안을 겪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저자는 감정의 모든 불안을 재는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이루는 관계의 변화와 심판 날에 당당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붙들어야 할 것은 두려움의 크기가 아니라, 그 두려움을 내쫓는 사랑이 어디에서 왔는가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주셨습니다.
조금 더 깊이
17절의 세 읽기는 각각 근거가 다릅니다. 사랑을 중심으로 읽는 쪽은 앞뒤 문맥에서 사랑이 반복되고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을 이야기한다는 점에, 관계를 중심으로 읽는 쪽은 13–16절에서 반복되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시고 우리도 하나님 안에 머무는」 관계에, 참여를 중심으로 읽는 쪽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에 근거합니다. 두루새김은 「그분」을 예수님으로 밝혀 옮겼지만 무엇이 같은지는 여전히 해석의 몫입니다. 18절의 「벌」은 형벌이나 처벌을 뜻하는데, 원문의 「두려움이 형벌을 지니고 있다」는 표현은 두려움 자체에 고통이 따른다는 뜻으로도, 앞으로 받을 벌을 예상하기 때문에 두려워한다는 뜻으로도 읽힙니다. 17절의 심판 날과 연결하면 벌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읽기에 무게가 실립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요한일서 4:19 · 두루새김
이 짧은 문장은 앞의 긴 설명을 하나로 모읍니다.
저자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이라고 대상을 밝히지 않습니다. 앞뒤 문맥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형제자매를 향한 사랑이 모두 등장하므로, 이 문장은 두 방향의 사랑을 함께 담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서로 사랑하는 것도 먼저 받은 사랑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곧바로 사랑이 진실한지 살펴보는 질문을 던집니다.
누구든지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한다면, 그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으로 본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본 적 없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요한일서 4:20 · 두루새김
이 구절은 4장 첫머리의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처음에는 어떤 영이 하나님께 속해 있는지 가려 보라고 했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고백이 기준이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사람의 주장이 참인지 살피고, 형제자매를 향한 사랑이 기준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주장은 다른 사람들이 쉽게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는 눈에 보이는 형제자매를 대하는 방식에서 드러납니다. 12절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 안에 머무신다고 했고, 20절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주장이 눈에 보이는 형제자매를 향한 미움과 함께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보이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것을 사람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믿음은 중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이 장의 앞부분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참된 고백을 강조했고,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셨다는 사실이 사랑의 근거였습니다. 형제자매 사랑은 예수님을 믿는 일을 대체하지 않고, 그 믿음이 실제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보이는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가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더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의 부족함을 잘 알고, 갈등을 겪었으며, 상처를 받았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저자가 눈앞의 형제자매를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주장이 현실의 구체적인 관계를 피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이 편지에서 「형제자매」는 함께 예수님을 믿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저자는 공동체 안에서 서로 미워하고 갈라지는 상황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장에서는 무엇보다 공동체 안의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일이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결정적인 자리로 제시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자매도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분께 받은 계명입니다.요한일서 4:21 · 두루새김
하나님께서 형제자매 사랑이라는 어려운 조건을 덧붙여 더 많은 의무를 지우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셨고, 그 사랑을 통해 사람들을 자신의 생명 안으로 불러들이셨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덧붙여진 별개의 과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의 삶에서 드러나는 방식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 구절의 직접적인 대상이 공동체 안의 형제자매라고 해서 성경 전체의 사랑의 명령을 교회 안으로만 제한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이웃 사랑과 원수 사랑(마태복음 5:43–48 등)을 함께 생각하면,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공동체 밖의 사람들에게도 향합니다.
맺음 — 아무도 하나님을 본 적이 없지만
요한일서 4장은 보이지 않는 영을 가려 보라는 말로 시작해, 눈에 보이는 형제자매를 사랑하라는 말로 끝납니다. 첫 질문에 대한 대답은 사람의 몸을 지니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참된 고백이었고, 둘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행동이었습니다. 두 질문은 하나의 중심으로 모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보내신 아들, 실제로 사람의 몸을 지니고 오셔서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실제 인간의 삶 속에서 실제로 자신을 내어주셨기에, 그분을 믿는 사람의 사랑도 생각 속에 머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사랑이 구원의 값을 치르는 행동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사랑받기 위해 서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서로 사랑합니다. 형제자매를 미워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향한 경고도, 하나님께서 먼저 주신 사랑이라는 근거 위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을 감추어 두지 않으셨습니다. 아들을 보내셨고, 성령을 주셔서 우리 안에 머무십니다. 그리고 장의 마지막에서 저자는 대단한 영적 체험이나 특별한 지식을 다시 요구하지 않습니다.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바로 앞에 있는 사람입니다. 눈으로 볼 수 있고, 말을 들을 수 있고, 때로는 서로의 부족함 때문에 갈등을 겪을 수도 있는 그 사람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그분의 사랑은 우리 가운데서 그 목적을 이룹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