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3장 ·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
하나님의 자녀는 누구를 닮아 가는가
사람은 누구의 자녀인지를 여러 방법으로 확인합니다. 이름과 가족관계로 확인하기도 하고, 얼굴이나 말투에서 부모를 닮은 모습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는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요?
요한일서 3장은 이 질문을 두 가지 전혀 다른 장면으로 풀어 갑니다. 하나는 장차 하나님 앞에서 일어날 일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분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분과 같아지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다른 하나는 지금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누군가 도움이 필요한 형제자매를 보았을 때, 자기 재산을 움켜쥘 것인지 그에게 내어줄 것인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일과 가난한 형제자매를 돕는 일이 어떻게 연결될까요? 그 사이에는 하나의 질문이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낳으셨다는 사실은 사람을 어떻게 바꾸는가?
앞 장의 마지막에서 저자는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태어났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3장은 그 말의 의미를 펼쳐 보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이 얼마나 놀라운 선물인지 밝힌 다음, 그 자녀에게 죄와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아버지이시며, 그분의 아들이 무엇을 하셨고, 그 생명을 받은 사람들이 왜 서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자녀라 불릴 뿐 아니라, 정말 그렇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도록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 보십시오. 우리는 실제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것은 그분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요한일서 3:1 · 두루새김
저자가 보라고 하는 것은 눈앞에 있는 물체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베푸신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는 그 결과를 통해 설명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저자가 놀라는 것은 사랑의 양만이 아닙니다. 그 사랑이 사람에게 가져온 전혀 새로운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시거나 잘못을 용서하시는 데서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자신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여기에 저자는 「우리는 실제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라는 짧은 문장을 하나 더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단지 듣기 좋은 이름이거나, 장차 노력해서 얻어야 할 지위라면 이런 말은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관계는 신자들이 스스로 붙인 이름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사랑을 베푸심으로써 이루신 현실입니다.
요한복음 1:12–13에서도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받으며, 그들이 새로 태어나는 일은 인간의 혈통이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고 설명됩니다. 요한일서는 그 사실을 자녀의 입장에서 바라봅니다. 자녀에게는 자신이 태어나는 일을 만들어 낼 능력이 없습니다. 먼저 생명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은 인간이 하나님을 닮아 가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주어진 보상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사랑에서 시작된 관계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곧바로 예상하지 못한 사실을 말합니다.
이토록 놀라운 신분을 받았는데도 세상은 그들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들의 아버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했으므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도 세상의 인정과 환영을 당연하게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 사실을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의심할 근거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세상의 평가가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지금은 자녀이지만, 앞으로 무엇이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분과 같아지리라는 것을 압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요한일서 3:2 · 두루새김
이 구절에는 「지금」과 「아직」이라는 두 가지 시간이 맞닿아 있습니다. 저자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 자체가 불확실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현재의 확실한 현실입니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장차 어떤 모습으로 완성될 것인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존재이지만, 아직 자녀가 아닌 존재는 아닙니다.
미래의 구체적인 모습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미래를 결정하는 중심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실 때 그분과 같아질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과 똑같은 존재가 된다거나, 창조주와 창조된 존재의 구별이 사라진다는 뜻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문맥에서는 예수님께서 나타나실 때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분을 닮은 모습으로 변화될 것이라는 소망이 중심입니다. 요한일서의 관심은 그 변화의 구체적인 몸의 형태가 아니라 「그분을 있는 그대로 볼 것」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에 의해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다는 사실과, 장차 그분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된다는 약속이 대조를 이룹니다.
현재에는 알아보지 못함이 있습니다.
미래에는 분명히 보게 됨이 있습니다.
미래의 소망은 오늘을 어떻게 바꾸는가
그분께 이런 소망을 둔 사람은 누구나 그분께서 깨끗하신 것처럼 자신을 깨끗하게 합니다.요한일서 3:3 · 두루새김
저자는 미래를 말하다가 곧바로 현재의 삶으로 돌아옵니다. 장차 그분과 같아질 것이므로, 지금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순서를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자신을 충분히 깨끗하게 만들면 장차 예수님과 같아질 자격을 얻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의 자녀이며, 장차 그분과 같아질 소망이 있기 때문에 현재의 삶을 그 소망에 맞추어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미래에 관한 확신이 현재의 삶을 만들어 갑니다.
그리고 깨끗한 삶의 기준은 자기 자신이 아닙니다. 「그분께서 깨끗하신 것처럼」이라는 말대로, 예수님께서 누구신지가 하나님의 자녀가 어떤 사람이 되어 가야 하는지를 결정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자신이 장차 닮게 될 분을 바라보면서, 지금부터 그분에게 어울리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제 저자는 그 깨끗한 삶과 정반대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죄입니다.
조금 더 깊이
1절의 「얼마나 큰지」로 옮긴 그리스어 포타포스는 본래 어떤 종류나 출신을 묻는 말에서 발전했습니다. 문맥에 따라 크기에 대한 감탄을 나타내기도 하고,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낯선 종류의 것에 대한 놀라움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문장을 「하나님이 우리를 아주 많이 사랑하신다」는 뜻으로만 읽으면 놓치는 것이 있습니다. 1절의 「알지 못하는」은 정보가 없다는 뜻 이상으로, 그들이 누구에게 속한 사람인지를 참되게 알아보고 인정하지 못한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요한복음 1:10–11에서도 세상은 자신을 창조하신 말씀이 오셨으나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2절의 「그분께서 나타나시면」은 원문에서 주어가 분명히 적혀 있지 않습니다. 앞의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습니다」를 이어 받아 그 사실이 드러날 때로 이해할 여지도 있지만, 바로 앞 2:28에서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는 일을 말했으므로 예수님께서 나타나실 때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분을 닮게 되는 소망은 고린도후서 3:18(예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 모습으로 변화됨), 빌립보서 3:20–21(우리의 낮은 몸을 자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바꾸심)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죄를 없애려고 오셨는데, 어떻게 죄 가운데 머물 수 있는가
죄를 짓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법을 어깁니다. 죄는 곧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요한일서 3:4 · 두루새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ἀνομία)으로 옮긴 말은 법이나 규범을 거스르는 상태를 가리키며, 성경의 문맥에서는 하나님의 뜻과 권위에 대한 거역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구약 율법의 개별 조항들을 하나씩 나열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예수님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죄를 설명합니다.
죄는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루신 일에 반대되는 방향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죄가 무엇인지 밝힌 다음 곧바로 예수님께서 왜 나타나셨는지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예수께서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셨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 안에는 죄가 없습니다.요한일서 3:5 · 두루새김
저자가 「그분 안에는 죄가 없습니다」라는 말을 덧붙인 것은 죄를 없애시는 분 자신은 죄에 속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와 싸우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분이라는 정도로 소개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죄가 없는 분이시며, 죄를 없애기 위해 나타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점에서 그리스도인의 깨끗한 삶은 그저 바른 행동을 따르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의 목적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그분이 죄를 없애려고 오셨는데, 그분에게 속한 사람이 죄를 자신의 삶을 이끄는 기준으로 삼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바로 이 질문에서 다음의 강한 진술이 나옵니다.
그분 안에 머무는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을 본 적도 없고 그분을 알지도 못합니다.요한일서 3:6 · 두루새김
이 말씀은 요한일서 전체에서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저자는 앞에서 그리스도인에게도 죄를 고백할 필요가 있다고 했고(1:8–10), 누가 죄를 지으면 예수님께서 아버지 앞에서 변호하신다고 했습니다(2:1). 그런데 여기서는 예수님 안에 머무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다고 선언합니다.
어떻게 두 진술을 함께 이해할 수 있을까요?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의 어려움
해석은 크게 세 방향으로 갈립니다. 죄를 계속 짓고 살아가는 생활 방식을 부정한다는 읽기, 하나님께서 낳으신 사람의 삶과 죄가 근본적으로 함께할 수 없음을 절대적인 언어로 선언한다는 읽기, 공동체를 떠난 사람들의 특별한 죄를 가리킨다는 읽기입니다. 이처럼 해석들이 갈리는 까닭은 본문의 강한 진술과 편지 전체의 현실적인 죄 이해를 모두 존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느 한 해석을 확정하여 본문을 부드럽게 바꾸기보다는 저자가 분명히 주장하는 핵심을 먼저 붙드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수님 안에 머무는 삶과 죄를 받아들이는 삶은 같은 방향을 향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죄를 지은 경험이 한 번이라도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낳으신 사람이 아니라는 식으로 곧바로 판정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에게 죄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뜻도 아닙니다. 저자의 관심은 예수님께서 죄를 없애러 오셨다는 사실과 그분에게 속한 사람의 삶이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죄를 없애는 일은 마귀의 일을 허무는 일입니다
자녀 여러분, 아무도 여러분을 속이지 못하게 하십시오.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은 그분께서 의로우신 것처럼 의롭습니다.요한일서 3:7 · 두루새김
「아무도 여러분을 속이지 못하게 하십시오」라는 말은 독자들이 실제로 잘못된 가르침을 접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어떤 가르침이 문제였는지 모든 내용을 알아낼 수는 없지만, 저자가 경계하는 잘못의 방향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믿음과 실제 삶을 분리하는 것입니다.
저자는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이 의롭다고 말하면서 그 기준을 다시 「그분께서 의로우신 것처럼」 예수님에게 둡니다. 옳은 행동 자체가 사람을 구원하는 독립적인 수단으로 제시되는 것은 아닙니다. 의로우신 예수님과의 관계가 삶에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마귀에게 속해 있습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죄를 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마귀의 일을 무너뜨리려고 나타나셨습니다.요한일서 3:8 · 두루새김
5절과 8절을 나란히 놓으면 구조가 드러납니다.
3:5 — 예수님께서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셨습니다.
3:8 — 하나님의 아들께서 마귀의 일을 무너뜨리려고 나타나셨습니다.
죄를 없애는 일과 마귀의 일을 무너뜨리는 일은 분리된 두 일이 아닙니다. 마귀의 일이 죄와 거짓과 파괴를 통해 나타난다면, 죄를 없애시는 예수님의 일은 그 지배를 무너뜨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마귀의 일이 무엇인지는 바로 이어지는 가인의 이야기가 단서를 줍니다. 마귀에게 속한 삶은 형제를 미워하고 죽이는 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마귀의 일을 무너뜨리신다는 말은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에서 일어난 권력 싸움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을 죄에서 구원할 뿐 아니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파괴하는 악의 지배를 무너뜨리는 방향을 향합니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죄를 지을 수 없습니까?
하나님께서 낳으신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씨가 그 사람 안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낳으셨으므로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요한일서 3:9 · 두루새김
저자의 표현은 6절보다 더 강해집니다.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낳으셨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하나님께서 낳으셨다는 신분을 두 번 강조하면서 그 사이에 「씨」라는 이미지를 놓습니다. 자녀의 삶이 자신이 태어난 일과 무관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씨」는 식물의 씨앗을 가리킬 수도 있고 생명을 낳는 씨를 가리킬 수도 있는데,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낳으셨다는 표현과 결합되어 있으므로 새로 태어나는 일과 생명의 근원이라는 의미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씨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영, 또는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새로운 생명의 원리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이 해석들은 서로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으며, 요한일서 3:9만으로 씨가 무엇인지 하나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저자가 왜 씨라는 이미지를 사용했는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녀는 부모에게서 생명을 받고, 그 생명은 자녀 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성품과 정반대되는 삶을 아무 문제 없이 지속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낳으셨다는 사실의 의미를 부정하는 일이 됩니다.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에도 6절과 같은 해석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 표현을 단순히 「죄를 자주 짓지 않는다」 정도로 약화하는 것도, 신자는 실제로 어떤 죄도 지을 수 없다고 단정하는 것도 본문의 모든 증거를 충분히 고려한 결론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저자는 강한 표현으로 하나님께서 낳으신 생명과 죄가 근본적으로 어울릴 수 없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어울릴 수 없음은 삶에서 어떻게 확인됩니까? 10절에서 마침내 구체적인 답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는 이렇게 드러납니다. 옳은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 속해 있지 않습니다.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요한일서 3:10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앞의 긴 설명을 하나의 실제적인 기준으로 모읍니다.
옳은 일을 합니까.
그리고 형제자매를 사랑합니까.
저자는 의로운 삶을 설명하다가 형제자매 사랑을 덧붙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주제가 아니라 앞에서 말한 의로움이 실제로 어디에서 드러나는지를 보여 주는 결정적인 전환입니다. 하나님께서 낳으신 생명은 막연한 종교적 깨끗함이 아니라, 형제자매를 향한 사랑에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이 강조되었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어떻게 드러나는지가 문제 됩니다. 그 답은 혈통이나 특별한 지식이 아닙니다. 옳은 일을 하고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삶입니다.
이제 저자는 인간 역사에서 형제 사랑과 정반대의 길을 걸었던 첫 번째 사람을 불러옵니다. 가인입니다.
조금 더 깊이
5절의 「없애려고」로 옮긴 말은 들어 올리다, 치우다, 제거하다 등의 의미를 가지며, 문맥에 따라 짊어지거나 떠맡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의 번역은 죄를 없애는 목적을 강조하며, 죄를 대신 짊어져 죗값을 치르시는 측면과도 연결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6절의 세 읽기는 각기 근거가 있습니다. 첫째 읽기는 「죄를 짓지 않습니다」가 현재형이고, 그리스어 현재형이 문맥에 따라 반복적이거나 습관적인 행동을 표현할 수 있다는 데 기댑니다. 1장과 2장의 죄에 관한 진술과 함께 이해하기에 유리하지만, 현재형이라는 사실만으로 반드시 「습관적으로」라는 의미가 성립하지는 않으므로 문맥의 뒷받침이 필요합니다. 둘째 읽기는 이 편지가 빛과 어둠, 진리와 거짓을 뚜렷하게 대조하는 글의 방식에 기댑니다. 본문의 강한 표현을 약화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지만, 신자도 실제로 죄를 짓는다는 다른 구절들과의 관계를 설명해야 합니다. 셋째 읽기는 예수님에 관한 진리를 거부하거나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태도에 집중하여, 2장의 거짓 가르침에 관한 경고와 3:10 이후의 형제자매 사랑을 긴밀하게 연결합니다. 그러나 4절에서 죄를 일반적으로 정의하므로 특정한 한 가지 죄로만 제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8절의 「무너뜨리려고」로 옮긴 말은 묶인 것을 풀거나 결합된 것을 해체하는 의미를 가지므로, 마귀가 이루어 놓은 일을 무너뜨리고 그 힘을 깨뜨린다는 이미지로 읽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8:44에서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처음부터 살인한 자이며 진리 안에 서지 않는 자로 말씀하시는데, 살인과 거짓을 마귀의 일로 연결한다는 점에서 요한일서와 뚜렷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9절의 「씨」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해석은 베드로전서 1:23에서 살아 있고 영원히 머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새로 태어난다는 표현과, 하나님의 영으로 보는 해석은 요한복음 3:5–8에서 영으로 태어나는 일을 설명하는 본문과 연결됩니다.
형제를 미워한 최초의 형제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다고 말한 까닭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소식은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인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은 악한 자에게 속해 있었고 자기 형제를 죽였습니다. 왜 형제를 죽였습니까? 자기가 한 일은 악했고 형제가 한 일은 의로웠기 때문입니다.요한일서 3:11–12 · 두루새김
저자는 다시 「처음부터 들은 소식」을 언급하는데, 이번에는 그 내용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가인이 등장합니다.
가인은 성경에서 처음으로 살인을 저지른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자기 형제를 죽였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4장을 보면 인류의 첫 살인 사건은 낯선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형제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함께 살아가도록 주신 가장 가까운 관계가 죽음의 자리로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은 일반적인 악인의 대표가 아닙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인물입니다.
「왜 형제를 죽였습니까?」라는 물음에 요한일서는 가인이 한 일은 악했고 아벨이 한 일은 의로웠다고 답합니다. 강조점은 제물의 종류나 제사 절차가 아니라 가인의 악과 아벨의 의로움입니다. 가인은 자신의 악을 고치는 대신 의로운 형제를 없앴습니다.
아벨이 의롭다는 사실은 가인에게 자신을 돌아볼 기회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그 기회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자기 형제의 의로움이 자신에게 견딜 수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형제를 죽였습니다.
미움은 단순히 다른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 감정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깊어지면 다른 사람의 존재 자체를 견디지 못하는 상태에 이를 수 있습니다. 특히 그 사람이 올바르게 살아간다는 사실이 나의 잘못을 드러낼 때, 미움은 더욱 위험한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이제 저자는 가인의 이야기를 독자들이 겪는 현실과 연결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세상이 여러분을 미워하더라도 놀라지 마십시오.요한일서 3:13 · 두루새김
가인이 의로운 아벨을 미워한 사건은 세상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미워하는 현실을 이해하게 하는 사례가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의 비판이나 반대를 받는다고 해서 언제나 자신이 아벨의 위치에 있다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세상이 의로움을 미워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할 뿐, 모든 비판이 불의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세상이 자신을 미워한다는 사실만으로 하나님의 자녀임이 증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자녀인지는 형제자매를 어떻게 대하는가에서 드러납니다.
미움은 죽음에 속하고, 사랑은 생명에 속합니다
우리는 형제자매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갔다는 것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요한일서 3:14 · 두루새김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일은 단순히 좋은 성품을 가졌다는 표시가 아닙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갔다는 증거입니다.
「옮겨 갔다는」 표현은 이미 이루어진 변화를 나타냅니다. 그리스도인은 장차 생명으로 옮겨 갈 가능성만 가진 사람이 아니라,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간 사람입니다. 이 점은 요한복음 5:24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듣고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가졌으며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갔다고 말씀하신 것과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요한일서는 그 생명이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일에서 확인된다고 보여 줍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갔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전에는 하나님 안에 머무는 일이 강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죽음 안에도 머물 수 있습니다. 죽음 안에 머문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지배하지 않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가인은 자기 형제의 생명을 빼앗았습니다.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 반대 방향을 향하여, 자기 형제자매의 생명을 귀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저자는 미움과 살인을 더욱 직접적으로 연결합니다.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나 살인자입니다. 어떤 살인자 안에도 영원한 생명이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은 압니다.요한일서 3:15 · 두루새김
이 말씀은 실제 살인과 미움이 법적으로 동일한 행위라는 뜻은 아닙니다. 저자는 미움의 도덕적 본질을 드러냅니다. 살인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행동이고, 미움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태도입니다. 그 둘은 결과와 책임에서 구별되지만, 형제자매의 생명을 부정하는 방향이라는 점에서는 연결됩니다.
마태복음 5:21–22에서 예수님께서 살인에 관한 계명을 설명하시며 형제에게 분노하는 문제를 다루신 말씀도 같은 방향으로 옳고 그름을 깊이 살피게 합니다.
그러나 요한일서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가인이 보여 준 미움의 길을 설명한 뒤, 그와 정반대의 길을 보여 주신 한 분을 제시합니다. 예수님이십니다.
가인은 형제의 목숨을 빼앗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기 목숨을 내놓으셨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해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요한일서 3:16 · 두루새김
이 구절은 3장의 중심을 이루는 대목입니다. 앞에서는 가인의 살인을, 이제는 예수님의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두 사람은 모두 다른 사람의 생명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방향이 정반대입니다.
가인은 자기 형제의 목숨을 빼앗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가인은 다른 사람을 없애 자신의 삶을 지키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저자는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을 배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 자체를 알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기준이 인간의 감정이나 일반적인 도덕적 이상에서 나오지 않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으셨다는 사실에서 나옵니다.
이것은 사랑에 관한 정의를 바꿉니다. 사랑은 무엇보다 먼저 상대방을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일로 드러납니다.
사랑의 기준이 된 예수님의 죽음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라는 표현은 요한복음 10장에서 선한 목자가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으신다는 말씀에 반복됩니다(요한복음 10:11, 10:15, 10:17–18). 거기서 예수님께서는 양들을 돌보는 좋은 지도자에 그치지 않고, 양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놓으시는 목자이십니다. 요한일서 3:16은 바로 그 예수님의 행동을 사랑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자녀가 예수님을 닮는다는 말의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예수님의 능력이나 영광을 따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생명을 내어주신 사랑을 따라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죽음과 그리스도인의 희생을 완전히 같은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구원을 이루는 특별한 사건이며, 그리스도인이 형제자매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죄를 씻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똑같이 되풀이할 수는 없지만,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의 방향을 따라갈 수는 있습니다. 그 방향은 자신에게서 다른 사람을 향합니다.
이제 저자는 그 사랑을 아주 구체적인 일상의 장면으로 가져옵니다.
누구든지 살아가는 데 쓸 재산이 있으면서, 도움이 필요한 형제자매를 보고도 마음을 닫아 버린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물겠습니까?요한일서 3:17 · 두루새김
방금 전까지는 예수님의 죽음과 자기 목숨을 내놓는 사랑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재산을 가진 사람과 도움이 필요한 형제자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대한 희생의 이야기에서 아주 일상적인 재산의 문제로 내려옵니다.
목숨을 내놓는 사랑은 특별한 순간에만 나타나는 영웅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놓아야 하는 평범한 순간에도 그 사랑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형제자매를 보고도 마음을 닫는 사람
「보고도」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정보를 알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의 눈앞에 도움이 필요한 형제자매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본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마음을 닫아 버립니다.
그리스어 원문은 「마음」(σπλάγχνον) 자리에 내장이나 속을 가리키는 말을 사용합니다. 고대의 언어에서 속 깊은 곳은 감정과 애정,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움직이는 자리로 표현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마음을 닫는다는 말은 재산을 내놓지 않는 행동만이 아니라, 상대방의 고통을 보고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자신의 마음을 닫는 태도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사랑의 반대는 미움만이 아닙니다. 무관심도 사랑의 반대편에 설 수 있습니다.
가인은 형제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재산을 가진 사람은 형제자매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저 도움을 주지 않았을 뿐입니다. 저자는 이 둘을 법적으로 똑같이 취급하지 않지만, 앞에서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일을 죽음과 연결한 뒤 이제는 사랑이 없는 상태가 아주 평범한 무관심으로도 드러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앞에서 하나님의 씨가 사람 안에 머문다고 했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물겠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이 그 사람 안에 있다는 주장은, 형제자매에게 도움이 필요한데도 자신의 삶을 닫아 버리는 행동과 어떻게 함께할 수 있겠습니까?
2장에서는 재산을 내세우는 허세가 세상에 속한 욕망으로 등장했습니다. 3장에서는 재산을 가진 사람이 그 재산을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문제 됩니다. 저자는 재산 자체를 악하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그 재산을 가진 사람이 누구를 사랑하는지를 묻습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합시다.요한일서 3:18 · 두루새김
저자는 사랑을 말로 표현하는 것 자체를 금지하지 않습니다. 말은 위로하고 격려하고 약속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에게 실제로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서 그 말을 뒷받침할 행동이 없다면, 그 사랑이 진실한지 의문이 생깁니다.
원문에서는 「행동으로 진실하게」 자리에 행동과 진리를 가리키는 말이 함께 쓰입니다. 이 편지에서 진리는 예수님에 관한 바른 믿음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한다는 말은 친절한 행동을 많이 한다는 의미로 좁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을 실제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모든 사랑이 반드시 재산을 나누는 형태여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른 상황에서는 시간과 수고를 내어놓거나, 누군가의 고통을 함께 감당하는 일이 그 사랑의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또 그리스도인이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의 어려움을 혼자 해결해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러나 본문의 직접적인 요구를 지나치게 넓혀서 무디게 만들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도움이 필요한 형제자매를 실제로 보았고, 도울 수 있는 재산이 있다면, 그 형제자매를 돕는 일이 사랑의 진실성을 보여 줍니다. 저자는 막연하게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지금 눈앞에 있는 형제자매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행동은 다음 단락에서 우리의 마음과 하나님 앞에서 누리는 확신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우리 마음이 우리에게 죄가 있다고 판단하더라도
이렇게 사랑함으로써 우리는 진리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놓게 될 것입니다.요한일서 3:19 · 두루새김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하라는 권면 다음에 마음을 놓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자는 독자들이 진리에 속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무엇으로 알 수 있는지 설명해 왔고, 그 답 가운데 하나가 실제로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삶입니다. 그 사랑은 자신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도록 돕습니다. 두루새김은 앞의 18절에서 강조한 사랑의 실천을 받아 이 연결을 「이렇게 사랑함으로써」라고 풀어 옮겼습니다.
그런데 형제자매를 충분히 사랑했다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만 하나님 앞에서 평안을 얻는다는 뜻일까요? 그렇다면 자신이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다고 느끼는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마음이 우리에게 죄가 있다고 판단하더라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요한일서 3:20 · 두루새김
저자는 우리 마음이 우리에게 죄가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던 기억, 도울 수 있었지만 돕지 않았던 순간, 말만 앞세웠던 행동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런 마음 앞에서 저자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크시다는 말씀은 위로인가, 경고인가
이 말씀은 두 가지로 읽힙니다. 위로로 읽으면, 우리 마음은 자신이 실패한 부분에 지나치게 집중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뿐 아니라 진실하게 그분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과 실제로 행한 사랑의 일도 아시므로, 마음의 판단보다 크신 하나님 앞에서 확신을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읽기는 19절의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놓게 될 것입니다」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경고로 읽으면, 우리 마음조차 사랑이 없는 삶에 죄가 있다고 판단한다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을 더욱 분명하게 아신다는 뜻입니다. 이 읽기는 사랑 없는 삶을 경계하는 앞의 논증과 연결됩니다. 그리스어 문장의 연결 방식에도 해석상 어려움이 있어 어느 한쪽으로만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두 해석 사이에서 본문이 확실하게 말하는 것은, 우리 마음이 최종적인 판단의 기준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잘못을 무시해서도 안 되지만, 자기 마음의 비난을 하나님의 최종 판단과 똑같이 여겨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이미 자신의 아들을 통해 사랑을 보여 주신 아버지이십니다. 사랑의 행동은 진리에 속한 삶의 표지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확신은 자기 행동을 완벽하게 평가할 수 있다는 능력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당당하게 구하는 사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마음이 우리에게 죄가 있다고 판단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당당합니다.요한일서 3:21 · 두루새김
앞에서 마음을 놓는 일이 나왔다면, 이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담대함이 등장합니다. 이 담대함은 자기의 완전함에 대한 확신과 다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이 아버지의 사랑에서 시작되었고 예수님께서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셨으므로, 이 담대함을 인간이 도덕적으로 이룬 일에 대한 보상으로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담대함은 실제 삶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감추거나 거짓으로 꾸밀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관계에서 기도가 나옵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하나님께 받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요한일서 3:22 · 두루새김
본문을 따로 떼어 읽으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은 원하는 모든 것을 그대로 얻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편지는 기도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은 자기 욕망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지 않습니다.
뒤의 5:14에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무엇을 구하면 그분이 들으신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함께 고려하면 3:22를 어떤 요구든 자동으로 이루어진다는 보장으로 읽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순종은 하나님을 움직이는 거래의 수단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은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며, 그 관계 안에서 하나님께 구합니다.
지금까지 계명을 지키라는 말이 여러 번 나왔지만, 그 계명이 무엇인지는 길게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 내용을 단 하나의 문장으로 밝힙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믿음과 사랑이다
그분의 계명은 이것입니다.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요한일서 3:23 · 두루새김
이 구절은 3장 전체를 모아 주는 문장입니다. 원문에서는 「그분의 계명」(ἐντολή)에 해당하는 말이 단수입니다. 하지만 그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일.
서로 사랑하는 일.
저자가 이 둘을 하나의 계명 안에 넣는 것은 이 편지에서 예수님에 관한 바른 믿음과 형제자매 사랑을 서로 분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의 진실성에 문제가 생깁니다. 반대로 예수님에 관한 진리를 버리면서 사랑만 남기겠다고 한다면, 저자가 말하는 사랑의 근거를 잃게 됩니다.
믿음과 사랑은 서로를 대신하는 두 선택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하나의 계명이 두 방향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
저자는 단순히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지 않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으라고 하며,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그 이름이 가리키는 분이 누구신지, 그 이름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를 받아들이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는 인물이 역사에 존재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보다 깊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바로 다음의 사랑과 연결됩니다. 16절에서 보았듯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인정하면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자신의 삶과 분리할 수는 없습니다.
사랑은 믿음에 나중에 덧붙이는 좋은 성품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믿는 사람이 예수님의 삶과 죽음으로부터 배우게 되는 삶의 방향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머물고, 하나님께서도 우리 안에 머무신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물고,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십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신다는 것을 압니다.요한일서 3:24 · 두루새김
「머물고」와 「머무십니다」라는 표현이 다시 등장하지만, 이번에는 관계가 더 분명해집니다. 사람이 하나님 안에 머물고,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머무십니다. 인간이 하나님에게 가까이 다가가려고 애쓰는 모습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신다는 선언이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삶은 단순히 어떤 외부의 법을 따르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신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저자는 마지막 문장에서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해」 안다고 답합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성령이 분명하게 등장하는데, 이것은 갑자기 덧붙인 새로운 주제가 아니라 그 질문에 대한 결정적인 대답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자기 능력만으로 하나님을 닮아 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그들 안에 머무십니다.
다만 저자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는 사실을 개인이 느끼는 특별한 감정만으로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장에서 하나님의 자녀를 알아보는 표지로 제시된 것은 옳은 일을 하는 삶과 형제자매 사랑이었습니다. 성령은 그러한 삶과 동떨어진 신비한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그분 안에 머무는 관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저자는 다음 장에서 영을 분별하는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룹니다.
맺음 — 사랑을 보는 눈
요한일서 3장은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 보십시오」라는 초대로 시작했고, 장차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분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장의 중간에는 또 하나의 보는 장면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도움이 필요한 형제자매를 봅니다.
그에게는 재산이 있습니다.
그는 도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닫아 버립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보도록 초대받고, 마지막에는 장차 그분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될 소망을 품습니다. 그 사이에서 우리는 지금 눈앞에 있는 형제자매를 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아는 것과 형제자매에게 필요한 도움을 외면하지 않는 일은 서로 다른 두 영역이 아닙니다. 한 생명이 드러나는 두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장차 그분을 닮게 될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닮아 감은 미래에만 속한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미 보여 주신 사랑을 따라 지금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놓는 길을 배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버지를 닮아 가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 삶의 시작과 끝에는 언제나 먼저 주어진 아버지의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이제 그 자녀는 도움이 필요한 형제자매를 봅니다.
그리고 마음을 닫는 대신, 손을 엽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