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풀어 읽기 · 2장
이 장의 자리 · 2장 · 빛 가운데 사는 길
영원히 머무는 사람
사람은 새로운 것을 찾아 움직입니다. 지금 알고 있는 것보다 더 깊은 진리, 지금 경험하는 것보다 더 높은 영적 세계, 지금의 믿음보다 더 완전한 깨달음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요한일서 2장은 정반대의 방향을 가리킵니다.
「여러분은 처음부터 들은 말씀이 여러분 안에 머물게 하십시오」(24절).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라고 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비밀을 찾아 나서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이 권면이 특별한 이유는 편지의 상황 때문입니다. 저자가 속한 공동체에서 사람들이 떠나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관해 저자가 전하는 것과 다른 주장을 했고, 남아 있는 사람들도 그들의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저자는 이 상황을 단순한 의견 차이로 여기지 않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알고, 예수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를 맺으며, 무엇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지가 걸린 문제로 봅니다.
그런데 이 장을 자세히 읽으면 「머문다」는 말이 곳곳에 나타납니다.
예수님 안에 머물고, 빛 가운데 머물고,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 안에 머뭅니다. 세상은 사라져 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원문에서는 이때도 머문다는 같은 말을 씁니다. 공동체를 떠난 사람들이 등장한 뒤에는 처음부터 들은 말씀이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권면이 이어집니다.
이 반복은 우연이 아닙니다.
요한일서 2장이 묻는 것은 누가 더 많은 진리를 발견했는가가 아닙니다. 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고 있는가입니다.
그러나 그 머묾은 움직이지 않는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살아가고, 형제자매를 사랑하며, 세상의 욕심을 거절하는 삶입니다.
왜 그런 삶이 가능한지, 그리고 왜 그것이 예수님 안에 머무는 삶인지, 저자는 먼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밝힙니다.
죄를 짓지 않도록 쓰지만, 죄를 지으면 변호자가 있다
나의 자녀 여러분, 여러분이 죄를 짓지 않게 하려고 내가 이 글을 씁니다. 그러나 누가 죄를 짓더라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요한일서 2:1 · 두루새김
앞 장의 마지막에서는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경고했습니다. 이제 저자는 그 말이 오해되지 않도록 방향을 분명히 합니다. 죄를 인정해야 한다고 해서 죄를 당연하게 여겨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저자는 죄를 짓지 말라는 목표를 조금도 낮추지 않으면서, 실제로 죄를 지은 사람에게 어떤 길이 열려 있는지를 알려 줍니다. 「그러나 누가 죄를 짓더라도」 다음에 「그 사람이 이렇게 해야 합니다」라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보다, 그 사람에게 이미 어떤 분이 계시는지를 먼저 말합니다.
아버지 앞에 계신 변호자
「변호해 주시는 분」(παράκλητος)으로 옮긴 말은 누군가의 곁에서 도움을 주고 그를 위해 말하는 사람을 가리킬 수 있으며, 이 문맥에서는 변호자의 의미가 잘 어울립니다.
이 장면을 법정의 이미지로 읽으면, 죄를 지은 사람은 자기의 무죄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를 위해 말씀하시는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부정하시거나 숨기심으로써 변호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저자는 예수님을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죄를 부정함으로써 스스로를 속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죄를 감추거나 자신을 정당화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죄인 편에 서서 변호하시는 분이 의로우신 분이라는 사실이 이 장면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앞에서」 변호하십니다. 저자는 하나님을 무자비한 재판관으로, 예수님을 그런 하나님에게서 인간을 구해 내시는 분으로 대립시키지 않습니다. 편지의 첫머리에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있었고 그 생명이 사람들에게 드러났는데, 이제 그 생명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아버지 앞에서 죄인을 위해 일하십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죄인의 구원을 놓고 서로 다른 뜻을 가진 두 존재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변호는 무엇에 근거할까요? 2절이 대답합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제물이십니다.요한일서 2:2 · 두루새김
저자는 예수님께서 속죄를 이루셨다고만 말하지 않고, 그분 자신이 속죄 제물이시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와 분리되지 않습니다.
「속죄 제물」로 옮긴 그리스어 힐라스모스(ἱλασμός)는 죄를 속하는 일을 나타내는 말인데,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키는 측면과 죄를 없애고 깨끗하게 하는 측면 가운데 어디에 무게를 둘 것인지 논의가 있습니다. 본문에서 확실한 것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에게 변호자가 있다는 말은 죄가 별일 아니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죄를 위해 예수님께서 자신을 내어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예수님의 속죄를 죄를 계속 지어도 된다는 허가로 제시하지 않고, 죄로부터 벗어나 살아야 할 이유와 실패한 사람이 다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근거를 함께 제시합니다.
온 세상을 위한 속죄
2절의 마지막 문장은 시야를 크게 넓힙니다. 「우리」는 편지의 저자와 독자들이 속한 믿음의 공동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속죄는 그 공동체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구원 사역이 한 집단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선언합니다.
그렇다고 본문이 온 세상의 모든 사람이 실제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속죄의 범위와 그 속죄에 사람들이 어떻게 참여하는지는 구별해야 하며, 전통에 따라 속죄의 의도와 적용 범위를 설명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공동체만의 구원자로 가두지 않습니다.
이제 저자는 예수님께 속한다는 것이 삶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이야기합니다.
조금 더 깊이
요한복음에서는 「변호해 주시는 분」과 같은 낱말이 성령을 가리킵니다(요한복음 14:16, 14:26, 15:26, 16:7). 특히 14:16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또 다른 도움을 주시는 분을 보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요한일서 2:1에서는 예수님 자신이 그 역할을 맡으시는 분으로 등장하십니다. 다만 두 문맥에서 그 역할이 완전히 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힐라스모스를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다루는 말로 이해하면 죄인이 어떻게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지가, 죄의 더러움을 없애는 말로 이해하면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깨끗하게 되는지가 강조됩니다. 바로 앞의 1:7과 1:9에서 죄를 깨끗하게 한다는 표현이 사용되므로 깨끗하게 하는 측면을 무시할 수 없지만, 이것만으로 진노와 심판에 관한 의미가 전혀 없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두 측면 가운데 반드시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으로 확인되는가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지킨다면, 그것으로 그분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요한일서 2:3 · 두루새김
이 문장은 「알고 있다」와 「압니다」를 함께 사용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저자는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일을 제시합니다.
저자가 계명을 잘 지키면 비로소 하나님을 알게 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계명을 지키는 삶은 하나님을 알게 되는 값을 치르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안다는 주장이 실제 삶과 일치하는지를 보여 주는 표지입니다.
「나는 그분을 압니다」라고 말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이며, 그 사람 안에는 진리가 없습니다.요한일서 2:4 · 두루새김
문제가 되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안다고 자신 있게 말하면서,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사람입니다. 저자는 그 지식을 참된 지식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관한 지적 이해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편지의 뒤쪽에서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아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다만 올바른 진리를 말할 수 있다는 사실과 하나님을 실제로 알고 있다는 사실을 분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계명을 지키는 사람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온전히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그분 안에 있음을 압니다.요한일서 2:5 · 두루새김
계명을 지키면 지식이 완전해진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시는 사랑으로 읽을 수도 있고,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계명을 지키는 행동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표현하고 5:3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직접 연결한다는 점에서는 두 번째 읽기가 자연스럽습니다. 반면 이 편지 전체에서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는 점이 강조되므로, 하나님에게서 시작된 사랑이 믿는 사람의 삶 안에서 목적을 이룬다는 첫 번째 읽기도 문맥에 어울립니다.
어느 읽기에 무게를 두더라도 이 구절에서 사랑과 순종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을 향해 느끼는 감정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삶을 이끌도록 받아들이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 관계를 설명하는 마지막 구절에서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앞에 세웁니다.
그분 안에 머문다고 말하는 사람은 예수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자신도 살아가야 합니다.요한일서 2:6 · 두루새김
이제 계명의 내용과 방향이 구체화됩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가신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선한 행동의 목록을 따라가는 데 그치지 않고, 이미 인간의 역사 안에서 살아가신 예수님의 삶을 본으로 삼습니다.
1–2절을 기억하면 이 명령의 의미가 더욱 깊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이실 뿐 아니라,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우리를 변호하시고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처럼 완전하게 살았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님께 속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살아가신 삶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 주는 계명은 무엇일까요? 다음 단락이 그 질문에 답합니다.
조금 더 깊이
성경에서 하나님을 안다는 말은 단순히 정보를 얻는 것보다 넓은 의미를 지닙니다. 예레미야 22:15–16에서 하나님은 요시야 왕이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의 재판을 돌본 일을 언급하면서, 그것이 자신을 아는 것이 아니냐고 말씀하십니다. 그 본문은 왕의 정의로운 통치에 관한 말이고 요한일서가 직접 인용하는 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을 아는 일이 그분의 뜻에 맞는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두 본문의 주제가 이어집니다.
오래된 계명이 어떻게 새로운 계명일 수 있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것은 새 계명이 아니라 여러분이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옛 계명입니다. 이 옛 계명은 여러분이 들은 말씀입니다.요한일서 2:7 · 두루새김
저자는 자신이 새로운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독자들은 이미 그 계명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곧바로 말을 바꿉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여러분에게 새 계명을 씁니다. 이 계명은 그분 안에서도 여러분 안에서도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이미 비치고 있기 때문입니다.요한일서 2:8 · 두루새김
방금 새 계명이 아니라고 했는데, 이제는 새 계명이라고 합니다. 저자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무엇이 오래되었고 무엇이 새로워졌는지를 구별하면 이 말이 풀립니다.
사랑의 계명 자체는 오래되었습니다.
레위기 19:18에서 하나님은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사랑은 예수님의 시대에 처음으로 등장한 도덕적 요구가 아닙니다. 요한일서의 독자들에게도 이 계명은 그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였을 때부터 들었던 가르침에 속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계명을 새로운 방식으로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3:34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시면서, 자신이 그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이 새로워진 것은 사랑의 의무가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안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랑의 기준은 단순히 자기 자신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가 그 사랑의 모습과 깊이를 보여 줍니다. 요한일서 3:16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저자가 말하는 새로운 계명은 옛 계명을 없앤 별개의 명령이라기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현실이 된 계명입니다. 사랑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제가 되었고, 이제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의 삶에서도 실제가 되고 있습니다. 저자는 단순히 사랑해야 한다고 명령하지 않고, 그 사랑이 독자들 가운데서도 나타나고 있다고 말합니다.
어둠은 지나가고, 참빛은 이미 비치고 있다
8절 마지막 문장은 사랑의 계명을 훨씬 큰 시간적 배경 안에 놓습니다. 어둠은 완전히 사라졌다고 하지 않고, 지나가고 있다고 합니다. 참빛은 언젠가 비칠 것이라고 하지 않고, 이미 비치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써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지만, 어둠의 현실이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이해입니다.
그렇다면 형제자매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단순히 좋은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윤리적 원칙이 아닙니다. 이미 비치고 있는 참빛에 걸맞게 살아가라는 부름입니다.
이 때문에 저자는 다시 빛과 어둠을 이야기하면서 사랑과 미움을 대조합니다.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있습니다.요한일서 2:9 · 두루새김
참빛이 이미 비치고 있는데도 어떤 사람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있습니다. 빛이 비치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면서도 빛 가운데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사람 사이의 관계와 분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10절은 사랑의 효과를 독특하게 표현합니다.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가운데 머물며, 그 사람 안에는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없습니다.요한일서 2:10 · 두루새김
「걸림돌」은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그 걸림돌 때문에 넘어지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명시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자신이 넘어지지 않는다는 뜻으로도,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만드는 것이 그 사람 안에 없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또한 원문에서 「그 안에」에 해당하는 표현을 사람보다 빛에 연결하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사람에게 연결해 읽으면 사랑하는 사람 안에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원인이 없다는 뜻이 되지만, 그 결과가 자신에게 미치는지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지는 확정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저자는 곧바로 미워하는 사람의 모습을 그려 대조를 완성합니다.
그러나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어둠 속에 있고 어둠 속에서 살아갑니다. 어둠이 그 사람의 눈을 멀게 했기 때문에,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릅니다.요한일서 2:11 · 두루새김
이 구절에서 미움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 힘입니다.
그가 길을 잃은 이유는 충분한 정보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자신이 하나님을 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지만, 저자는 그 확신이 오히려 잘못된 방향을 향하고 있을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이 편지가 뒤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매우 엄격하게 지키는 만큼, 참된 지식과 참된 사랑은 서로 적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바르게 아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살아가신 사랑의 길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경고 한가운데서 갑자기 축복을 선언하다
지금까지 저자는 거짓된 주장과 참된 삶을 날카롭게 대조했습니다.
그런데 12절에 이르면 문장의 리듬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씁니다. 여러분이 그분의 이름 덕분에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요한일서 2:12 · 두루새김
이어서 아버지들과 젊은이들을 부르며, 그들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이루었는지 이야기합니다. 마치 한창 경고하던 사람이 갑자기 독자들을 격려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 같습니다. 저자는 독자들이 자신의 믿음을 의심하도록 만들기 위해 편지를 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이미 받은 것이 무엇인지 기억하게 합니다.
여섯 번에 걸쳐 「내가 여러분에게 씁니다」 또는 「내가 여러분에게 썼습니다」라는 말이 반복되고, 각각 그 이유 또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그 안에는 세 가지 중심 주제가 있습니다.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처음부터 계신 분을 알게 되었습니다.
악한 자를 이겼습니다.
이것은 독자들이 앞으로 이루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이미 그들에게 주어진 현실로 소개됩니다.
자녀, 아버지, 젊은이
저자는 「자녀 여러분」 「아버지 여러분」 「젊은이 여러분」이라고 부르고, 14절에서는 「어린 자녀 여러분」이라는 말도 사용합니다. 이 호칭들이 실제 나이에 따라 구분된 세 집단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공동체 전체와 그 안의 여러 특징을 문학적으로 표현하는지는 논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읽기를 택하더라도 저자는 독자들이 이미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를 확인해 줍니다.
「아버지 여러분」에게는 두 번 똑같이 「여러분이 처음부터 계신 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라는 말이 주어집니다. 「처음부터 계신 분」은 편지 첫머리의 영원한 생명에 관한 표현을 떠올리게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을 가리키는지 예수님을 가리키는지는 해석의 여지가 있지만, 어느 경우든 독자들이 알고 있는 분께서 영원히 계시는 분이라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반면 젊은이들에게는 악한 자를 이겼다는 사실이 반복되는데, 두 번째 반복에서는 설명이 더해집니다.
어린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썼습니다. 여러분이 아버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썼습니다. 여러분이 처음부터 계신 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썼습니다. 여러분이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머물러 있으며, 여러분이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요한일서 2:14 · 두루새김
저자는 젊은이들이 본래부터 강한 성격이나 특별한 능력을 지녔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들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머물러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악한 자를 이겼다는 사실은 자신들에게 어떤 특별한 힘이 있다는 선언이 아니라, 말씀의 머묾과 함께 제시됩니다.
이것이 뒤쪽의 거짓 가르침에 대한 경고를 준비합니다. 새로운 가르침을 찾아 떠나지 않아도 됩니다. 그들에게는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왜 지금 이 말을 할까?
앞에서는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이 어둠 속에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뒤에서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공동체를 떠난 사람들의 거짓된 가르침을 경계합니다. 그 사이에서 저자는 독자들이 죄를 용서받고 아버지를 알게 되었으며 이미 악한 자를 이긴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다시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뒤에 나올 권면은 그들이 아직 얻지 못한 어떤 특별한 신분을 얻기 위한 요구가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께 속한 사람답게 살아가라는 권면입니다. 저자는 진리에 관해서는 조금도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독자들을 두려움으로 몰아붙이지 않고 그들이 이미 받은 은혜를 확신하게 합니다.
이제 그들에게 새로운 명령을 줍니다.
조금 더 깊이
「자녀」와 「어린 자녀」에 해당하는 말은 편지의 다른 곳에서도 공동체 전체를 부르는 말로 사용되므로, 반드시 실제 어린아이들만을 가리킨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반면 「아버지」와 「젊은이」는 신앙의 성숙과 활력을 각각 드러내는 호칭으로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원문만으로 공동체의 나이별 구성이나 집단 구분을 정확히 알아낼 수는 없습니다.
형제는 사랑하되, 세상은 사랑하지 말라
세상도 세상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의 사랑이 없습니다.요한일서 2:15 · 두루새김
앞에서는 형제자매를 사랑하라고 했는데, 이제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을 사랑해서는 안 될까요? 이렇게 이해하면 2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제물이시라고 한 말씀과 충돌합니다. 요한복음 3:16에서도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셔서 아들을 주신 분으로 나타납니다.
요한의 글에서 「세상」은 언제나 같은 뜻으로만 사용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대상인 세상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을 거스르는 욕심과 거짓의 질서를 가리키는 세상도 있습니다. 여기서는 바로 뒤의 16절이 무엇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지 설명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몸의 욕심과 눈에 보이는 것을 탐내는 마음과 가진 것을 뽐내는 태도는 아버지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요한일서 2:16 · 두루새김
저자는 세상에 있는 모든 물질이 악하다고 말하지 않고, 세상을 특징짓는 세 가지 태도를 제시합니다.
첫째, 「몸의 욕심」은 몸 자체가 악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편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 인간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여기서 문제는 인간의 욕심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기 만족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둘째, 「눈에 보이는 것을 탐내는 마음」은 보는 행위 자체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바라보다가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그 욕심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구하는 수준을 넘어, 소유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원하도록 이끌 수 있습니다.
셋째, 「가진 것을 뽐내는 태도」는 더욱 구체적인 사회적 모습을 보여 줍니다. 「가진 것」(βίος)으로 옮긴 말은 문맥에 따라 생활이나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 소유한 재산 등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 표현은 재산이나 생활수단을 자랑한다는 의미로도, 재산에서 오는 안정감이 오만을 낳는다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두 읽기는 강조점이 다르지만, 가진 것을 통해 자신을 높이거나 자신의 삶을 보장받았다고 여기는 태도를 경계한다는 점에서는 만납니다.
저자는 나쁜 행동 세 가지를 늘어놓는 데 그치지 않고, 그러한 욕심과 뽐내는 태도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묻습니다. 앞에서는 아버지의 사랑이 사람 안에 있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이제 저자는 아버지에게서 비롯되는 삶과 세상에서 비롯되는 삶이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한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보면, 그 사람의 삶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드러납니다.
이 대목을 재산을 가진 사람이 모두 잘못되었다는 선언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저자가 문제 삼는 것은 소유 자체보다 가진 것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정하고, 뽐내고, 궁극적인 안전을 얻으려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욕심을 거절해야 할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것들이 오래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도 세상의 욕심도 사라져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요한일서 2:17 · 두루새김
8절에서는 어둠이 지나간다고 했고, 17절에서는 세상이 사라져 간다고 합니다. 원문에서는 두 구절 모두 지나감을 나타내는 같은 동사의 계열을 사용합니다. 처음에는 어둠이 지나가는 장면이 나왔고, 이제 그 어둠에 속한 욕심의 질서 전체가 사라져 갑니다.
그런데 사람은 흔히 사라져 가는 것을 붙들고 살아갑니다.
재산과 명예와 소유는 지금 당장 눈에 보이고, 손에 넣을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자랑할 수도 있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은 당장 눈에 띄는 성과나 안전을 보장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시간의 관점에서 이 둘을 다시 보게 합니다.
지금 강해 보이는 것이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영원히 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은 영원한 생명을 받는 대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그 생명이 지금 어떤 방향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원문에서 되풀이되는 머문다는 말은 이제 무엇이 영원히 남는지에 관한 문제가 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단락에서는 공동체에 머물지 않고 떠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공동체를 떠난 사람들과 마지막 때
어린 자녀 여러분, 지금은 마지막 때입니다. 여러분이 적그리스도가 온다는 말을 들은 것처럼, 지금 이미 많은 적그리스도가 나타났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지금이 마지막 때임을 압니다.요한일서 2:18 · 두루새김
여기서 갑자기 분위기가 긴박해집니다.
「지금은 마지막 때입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세상의 종말과 여러 재난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가 마지막 때의 증거로 제시하는 것은 그런 사건들이 아니라, 많은 적그리스도가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적그리스도」라는 말은 이 구절에서 한 번은 앞으로 온다고 알려진 존재를, 다른 한 번은 이미 나타난 여러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를 단 한 명의 미래 인물에게만 한정하면 이 구절이 말하는 현재의 위기를 놓치게 됩니다. 이 장에서 적그리스도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사람과 연결되며(22절), 저자는 독자들의 시선을 그들의 공동체 안에서 이미 벌어지고 있는 일로 향하게 합니다.
그들은 우리에게서 나갔지만 우리에게 속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 속한 사람들이었다면 우리와 함께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나도록 그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요한일서 2:19 · 두루새김
이 구절에서 처음으로 공동체의 갈등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저자는 그들의 떠남을 단순히 다른 곳으로 옮겨 가거나 모임을 바꾼 일로 설명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공동체의 믿음에서 벗어났다는 사실과 연결합니다. 저자는 그들의 떠남을 공동체에 속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난 사건으로 해석합니다.
앞에서는 빛 가운데 머무는 사람과,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영원히 남는 사람이 나왔습니다. 원문에서는 「함께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에도 같은 동사가 쓰입니다. 이제 그와 대조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함께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모든 교회 이동이나 모든 공동체 이탈을 불신앙의 증거로 삼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문맥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핵심적인 진리를 부인하는 구체적인 갈등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떠난 사람들이 문제인 까닭은 단순히 떠났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큰 불안을 줄 수 있는 이 사건을 다르게 해석하도록 돕습니다. 누군가 떠났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이 더 깊은 진리에 도달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무엇을 떠났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남아 있는 독자들은 어떻게 거짓과 진리를 구별할 수 있을까요? 저자는 그들에게 특별한 비밀 지식을 새로 주겠다고 하지 않고, 이미 그들이 받은 것을 다시 일깨웁니다.
조금 더 깊이
「적그리스도」의 접두사에는 그리스도를 대적한다는 의미와 그리스도의 자리를 대신한다는 의미의 가능성이 있지만, 이 문맥에서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접두사만으로 결정되지 않고 22절이 그들의 특징을 더 직접적으로 설명합니다. 또 본문이 말하지 않는 것도 구별해야 합니다. 떠난 사람들이 정확히 몇 명이었는지, 어떤 지도자를 따랐는지, 어떤 지역으로 떠났는지, 자신들의 주장을 어떤 체계적인 교리로 정리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초기 기독교의 여러 이단 사상과 비교하여 해석할 수는 있지만, 후대에 정리된 특정 사상 체계를 그대로 이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께 기름 부음을 받았으며, 여러분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요한일서 2:20 · 두루새김
떠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저자는 남아 있는 사람들이 떠난 사람들보다 더 높은 학문을 배웠다고 말하지 않고,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을 이야기합니다.
구약에서 기름 부음은 왕이나 제사장 등이 특별한 일을 맡도록 구별되는 것과 연결됩니다. 요한일서의 문맥에서는 실제 기름 자체보다 하나님에게서 주어진 영적 선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많은 해석자는 이것을 성령께서 사람 안에 계시며 가르치시는 것으로 해석하는데, 27절에서 그 기름 부음이 사람들 안에 머물며 진리를 가르친다고 말한다는 점이 그 해석을 뒷받침합니다. 다만 2장 자체는 여기서 「성령」이라는 낱말을 직접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기름 부음을 주시는 「거룩하신 분」도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키는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지 논의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가르침의 근원이 떠난 사람들의 새로운 주장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라는 말은 아는 내용의 끝없는 범위보다, 공동체 구성원들이 모두 진리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저자는 몇몇 특별한 사람만 진리를 알고 있다고 주장하지 않고, 남아 있는 독자들 모두가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 있다고 격려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쓴 것은 여러분이 진리를 몰라서가 아니라, 진리를 알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거짓도 진리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기 때문입니다.요한일서 2:21 · 두루새김
보통 누군가에게 무엇을 가르치는 이유는 그 사람이 그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정반대로 말합니다. 이것은 새로운 지식을 전달하기보다, 이미 알고 있는 진리를 분명하게 붙들도록 하려는 편지입니다.
마지막의 「어떤 거짓도 진리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문장에 따르면, 진리는 거짓과 섞여서 더 높은 형태로 발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주장이 진리와 모순된다면, 그 주장을 더 깊은 깨달음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구별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사람이야말로 거짓말쟁이가 아니겠습니까?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이런 사람이 적그리스도입니다.요한일서 2:22 · 두루새김
여기서 저자는 논쟁의 중심을 분명히 밝힙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인정합니까.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성이 아니라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뜻하는 칭호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은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는 일과 연결되었고,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다윗 왕조에 관한 약속은 장차 올 왕에 대한 기대를 형성하는 중요한 바탕이 되었습니다(사무엘하 7:12–16). 신약은 예수님을 그 약속과 기대가 이루어지는 분으로 선포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인정하는 고백은 예수님이라는 인물에게 존경스러운 칭호를 붙이는 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의 역사와 실제 인간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연결하는 고백입니다.
상대방이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 자체를 부정했는지, 인간 예수님과 하늘의 그리스도를 분리했는지, 혹은 다른 방식으로 그 고백의 의미를 바꾸었는지는 2:22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저자는 그들의 주장을 자세히 되풀이하기보다, 그 주장이 결국 아버지와 아들을 함께 부인하는 일이라고 밝힙니다.
아들을 부인하는 사람에게는 아버지께서도 계시지 않습니다. 아들을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아버지께서도 계십니다.요한일서 2:23 · 두루새김
아버지와 아들을 서로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저자는 예수님을 거부하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편지의 시작에서 아버지와 함께 있던 영원한 생명이 사람들에게 드러났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명과 자신을 드러내시는 행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으므로, 아들을 부인하는 일은 하나님을 알려 주신 예수님의 결정적인 계시를 부인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에 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뜻과 같지 않습니다. 저자의 주장은 구원과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단순한 암기 문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고백을 이어 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저자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조금 더 깊이
20절에는 「여러분이 모두 안다」는 읽기와 「여러분이 모든 것을 안다」는 읽기에 관련된 본문 차이가 있습니다. 두루새김 본문이 따르는 앞의 읽기는 초기 사본들의 지지를 받지만, 다른 읽기가 존재한다는 점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읽기가 거짓 교사들이 자신들만의 특별한 지식을 자랑했다는 확정적인 증거는 아닙니다. 22절에 관해서는, 이 편지의 뒤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음을 인정하는 문제가 등장하므로(4:2–3), 저자가 예수님의 실제 인간적 삶과 그리스도로서 하나님에게서 받은 사명을 분리하는 가르침을 경계했다고 해석할 근거가 있습니다.
처음부터 들은 말씀이 여러분 안에 머물게 하십시오
여러분은 처음부터 들은 말씀이 여러분 안에 머물게 하십시오. 처음부터 들은 말씀이 여러분 안에 머물면, 여러분도 아들 안에, 또 아버지 안에 머물 것입니다.요한일서 2:24 · 두루새김
먼저 말씀이 사람 안에 머뭅니다. 그리고 사람이 아들과 아버지 안에 머뭅니다. 저자는 사람이 하나님 안에 머무는 방법을 말하면서, 하나님에게서 들은 말씀이 그 사람 안에 머물러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머물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메노(μένω)입니다. 원문에서 이 말은 여러 관계를 이어 주는 중심 동사로 반복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일, 빛 가운데 머무는 일, 하나님의 말씀이 안에 머무는 일, 공동체에 함께 남아 있는 일, 영원히 남는 일이 모두 이 동사로 연결되며, 두루새김은 이 동사를 문맥에 따라 「머물다」와 「남다」로 옮겼습니다.
「처음부터 들은 말씀」은 그들이 처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였을 때 들었던 가르침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고, 그 중심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이 머문다는 것은 과거의 교훈을 추억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가 현재의 믿음과 삶을 계속 이끌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말씀을 붙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말씀이 내 안에 머물 때 아들과 아버지 안에 머물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저 사람이 소유하는 정보가 아닙니다. 그 말씀을 통해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그 관계 안에 살아갑니다.
바로 다음 절에서 저자는 그 관계의 약속을 밝힙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바로 영원한 생명입니다.요한일서 2:25 · 두루새김
이 구절에서 편지의 첫머리와 다시 만납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영원한 생명이 인간에게 드러났고, 이제 그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약속으로 등장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시간이 끝없이 늘어난 상태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생명입니다.
이어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그분께 받은 기름 부음이 여러분 안에 머물러 있으므로, 여러분은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분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에 관해 여러분을 가르치며, 그것은 참되고 거짓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 기름 부음이 가르쳐 준 그대로 그분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요한일서 2:27 · 두루새김
이 말을 글자 그대로 읽으면 이상한 결론이 나옵니다. 누구에게도 배울 필요가 없다면, 저자는 왜 이렇게 긴 편지를 쓰고 있을까요?
이 역설은 문맥에서 풀어야 합니다. 26절에서 저자는 「여러분을 속이는 사람들에 관해」 이 글을 썼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27절은 모든 가르침이나 교사의 역할을 부정하는 절대적인 명령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저자가 경계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관한 처음의 진리를 넘어서는 새로운 권위에 독자들이 의존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들에게는 이미 진리를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기름 부음이 있습니다. 저자는 하나님을 알기 위해 언제나 특정 인간 지도자에게 의존해야 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공동체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개인이 자신의 생각을 모두 성령의 가르침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27절은 기름 부음이 「참되고 거짓이 아닙니다」라고 말하고, 앞에서는 그 참됨을 판단할 기준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처음의 가르침을 제시했습니다. 따라서 성령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주장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그리스도인의 분별을 두 가지 극단으로부터 지킵니다. 하나는 새로운 영적 권위를 가진 사람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려는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 안에 성령이 계신다는 이유로 어떤 검증도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태도입니다. 저자가 제시하는 길은 다릅니다. 이미 들은 복음이 마음에 머물러야 하고, 하나님에게서 받은 기름 부음이 그 복음의 진리 안에 머물도록 가르칩니다.
기름 부음이 머무는 사람
27절은 기름 부음이 단순히 한순간 주어졌던 경험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그분께 받은 기름 부음이 여러분 안에 머물러 있으므로」라는 말처럼,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확신하는 근거는 과거의 놀라운 경험만이 아니라 지금도 그들 안에 머물러 있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저자는 공동체가 분열되었다는 이유로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비밀이나 새로운 권위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이미 진리를 알고 있고, 그 진리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계속 그들 안에서 일하신다는 사실을 다시 일깨웁니다.
그러므로 이 단락의 명령은 결국 하나로 모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머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제 그 머묾을 미래의 한 장면과 연결합니다.
조금 더 깊이
27절은 예레미야 31:31–34의 새 언약 약속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자기 율법을 백성의 마음에 두시고, 작은 사람부터 큰 사람까지 모두 하나님을 알게 될 날을 선포합니다. 그 본문은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한 새 언약의 약속이라는 본래 문맥을 가지며 요한일서가 직접 인용하지도 않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을 알고 그분의 말씀이 안에 머문다는 점에서 그 약속과 신학적으로 깊이 연결됩니다.
그분이 나타나실 때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이제, 자녀 여러분, 그분 안에 머무십시오.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 우리가 당당하고, 그분이 오실 때 부끄러워 그분 앞에서 물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일서 2:28 · 두루새김
「이제」라는 말과 함께 편지의 시야가 다시 움직입니다. 지금까지 저자는 처음부터 들은 말씀, 이미 용서받은 죄, 이미 이긴 악한 자, 이미 비치고 있는 참빛, 지금 나타난 거짓 가르침을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미래를 바라봅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는 때입니다.
「당당하고」(παρρησία)로 옮긴 말은 거리낌 없이, 두려움 없이 말할 수 있는 담대함을 뜻합니다. 문맥에 따라 공개적으로 말할 자유를 가리키기도 하고, 누군가 앞에서 두려움 없이 설 수 있는 확신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1절과 나란히 읽으면 연결이 나타납니다. 1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셨고, 28절에서는 우리가 예수님 앞에서 당당하게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장면의 방향은 다르지만, 두 장면을 묶는 중심은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변호해 주신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는 일을 무조건 가볍게 여기게 만들지 않습니다. 저자는 그리스도 안에 머물라고,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떠나지 말라고 합니다. 19절에서 공동체를 떠난 사람들과 대조적으로, 머묾은 결국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드러내는 문제입니다.
28절에서 저자는 「여러분이 당당하고」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가 당당하고」라고 말하며 자신을 독자들과 함께 포함합니다. 그는 자신도 예수님께서 나타나실 때 예수님 앞에서 부끄러워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저자는 독자들 위에서 심판을 선고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 머물기를 바라는 증인입니다.
이제 마지막 구절입니다.
여러분이 그분께서 의로우시다는 것을 안다면,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에게서 태어났다는 것도 압니다.요한일서 2:29 · 두루새김
이 구절은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문이기도 합니다. 앞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것이 중심이었다면, 이제 「그분에게서 태어났다」는 말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순히 어떤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의 관계만이 아니라, 태어남으로 시작되는 가족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분」은 두 가지로 읽을 수 있습니다. 가리키는 대상이 그리스도에서 하나님 아버지로 바뀐다고 읽을 수도 있고, 그리스도의 의로우심과 하나님에게서 태어남이 긴밀히 이어진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문장에 대상이 바뀐다는 뚜렷한 표시가 없으므로 모든 「그분」을 하나의 대상에 기계적으로 고정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의 중심 주장은 분명합니다. 옳은 일을 하는 삶은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에게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옳은 일을 함으로써 하나님에게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이기에 옳은 일을 하는 삶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2장 처음의 논증과도 연결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의로우신 분이시고, 예수님께 속한 사람은 예수님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살아가며, 이제 그 의로운 삶은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의 특징으로 제시됩니다. 이것이 저자가 다음 장에서 더욱 깊이 다룰 주제입니다.
조금 더 깊이
직전인 28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는 일을 말하므로 29절의 「그분께서 의로우시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그분에게서 태어났다」는 표현은 이어지는 3장의 문맥과 요한일서 전체에서 하나님에게서 태어나는 것을 말하는 다른 자리들을 고려할 때 아버지 하나님과 연결됩니다.
이미 비치고 있는 빛
요한일서 2장에는 서로 대조되는 두 움직임이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모든 것이 지나갑니다. 어둠이 지나가고 있고, 세상도 그 욕심과 함께 사라져 가며, 어떤 사람들은 공동체를 떠나갔습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머무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에게서 받은 기름 부음이 믿는 사람 안에 머물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이 모든 대조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 되셨고 먼저 사랑의 길을 걸으셨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 머무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순종은 구원의 가능성을 만들어 내기 위한 시도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생명에 걸맞게 살아가는 응답입니다. 성숙도 언제나 새로운 것을 얻는 방향으로만 이루어지지 않고, 이미 받은 것의 깊이를 더 분명히 깨닫고 그 진리가 삶을 더욱 온전히 빚어 가게 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저자는 어둠이 언젠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이미 비치고 있기 때문입니다」(8절). 우리는 아직 어둠의 흔적이 남아 있는 세상에서 살아가며, 여전히 욕심의 유혹을 받고, 사람을 미워하기도 하며, 거짓을 진리로 착각할 위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장은 출발점을 어둠에 두지 않고, 이미 비치고 있는 참빛에 둡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 머무는 사람은 새로운 빛을 찾아 어둠 속을 헤맬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비치고 있는 빛 가운데서 형제자매를 사랑하고, 사라져 가는 세상의 욕심을 내려놓으며, 처음부터 들은 말씀이 자기 안에 머물게 하면 됩니다.
마침내 저자의 마지막 권면이 다시 들립니다. 「그분 안에 머무십시오.」
예수님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계속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