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장 · 생명의 말씀과 사귐
빛 가운데 드러나는 생명
누군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는데, 무엇으로 그 관계가 사실인지 확인할 수 있을까요?
요한일서는 뜻밖의 자리에서 답을 시작합니다. 얼마나 깊이 깨달았는지, 얼마나 특별한 영적 경험을 했는지 묻지 않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 것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사귐을 나누는 삶을 설명하면서, 자기 죄를 인정할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보고 만졌다는 증언과,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는 일이 어떻게 이어질까요?
이 연결을 이해하면 요한일서 1장의 중심이 드러납니다. 저자가 전하려는 것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께 도달하는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에게 자신을 드러내셨으며, 그 드러남이 사람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가입니다.
처음부터 있었던 것을 손으로 만지다
편지는 인사도 없이 시작합니다.
우리는 생명의 말씀에 관해 전합니다. 처음부터 있었던 것, 우리가 듣고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을 전합니다.요한일서 1:1 · 두루새김
듣는 일에서 보는 일로, 다시 자세히 살펴보고 손으로 만지는 일로 증언이 구체화됩니다. 「우리 눈으로」와 「우리 손으로」는 강조할 필요가 없어 보일 만큼 당연한 말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바로 그 당연한 사실을 굳이 말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생명은 머릿속에서 만들어 낸 생각이나 철학적인 생각을 통해 얻은 진리가 아닙니다. 인간의 역사 안에서 실제로 만날 수 있었던 무엇입니다.
그러면 「처음부터」는 어느 때를 말할까요? 요한복음 1:1과 연결하여 창조 이전부터 있었던 생명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면 예수님께서 땅에서 일하시기 시작한 때부터 증인들이 듣고 보았던 것을 가리킨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이 읽기는 이 절이 실제로 보고 겪은 일에 집중한다는 점과, 편지의 다른 곳에서 처음이라는 말이 독자들이 가르침을 받은 때를 가리키기도 한다는 점(2:24)에 근거합니다.
어느 쪽을 택하더라도 이어지는 2절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그 생명을 보았고 증언합니다. 아버지와 함께 계셨고 우리에게 나타나신 그 영원한 생명을 여러분에게 전합니다.요한일서 1:2 · 두루새김
생명이 단순히 하나님에게서 주어졌다고 하지 않고, 「아버지와 함께 계셨고」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이 생명을 주시고 인간이 그 생명을 받아 누린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성경의 중요한 가르침이지만, 요한일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생명이 아버지와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도 이 자리에서는 단순히 끝없이 계속되는 삶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는 하나님이 주신 영원한 생명이 그분의 아들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5:11–12). 따라서 영원한 생명은 예수님께서 나중에 주실 복일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 분리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요한복음 1:1은 말씀이 처음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고 말하고, 1:14는 그 말씀이 사람의 몸이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요한일서는 이와 주제가 밀접하게 연결되지만 같은 문장을 그대로 인용하지는 않습니다. 요한복음이 그 사건을 선포한다면, 요한일서는 그 사건을 증언하는 사람들의 경험을 앞에 놓습니다.
저자가 증언하는 영원한 생명은 인간의 몸을 입고 살아가신 예수님과 따로 존재하는 신비한 지식이 아닙니다.
아버지와 함께 계셨던 생명이 사람의 눈앞에 나타나셨고, 사람의 손이 닿는 곳에 계셨습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에서는 1절에서 무엇인가를 계속 늘어놓다가 2절에서 다른 설명이 끼어들고, 3절에 이르러서야 「여러분에게도 전합니다」라는 말로 문장이 완성됩니다. 두루새김은 「우리는 생명의 말씀에 관해 전합니다」라고 먼저 밝혀 이 긴 문장을 풀었습니다. 또 저자는 「처음부터 있었던 분」이 아니라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라고, 어떤 것을 가리키는 중성 관계대명사를 반복합니다. 그렇다고 인격이 없는 원리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2절은 「영원한 생명」, 3절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말합니다. 중성 표현은 예수님뿐 아니라 그분 안에서 드러난 생명과 그 증언 전체를 아우르는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중성형 하나만으로 그 범위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편지 뒤쪽에서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음을 인정하는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고(4:2–3), 공동체를 떠난 사람들도 언급합니다(2:19). 공동체 안에 예수님께서 누구신지에 관한 갈등이 있었다고 이해할 만하지만, 어떤 가르침이 오갔는지, 상대방이 누구인지까지 확정할 자료는 편지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생명을 알리는 이유는 함께 나누기 위해서다
저자는 드디어 자신이 증언하는 이유를 밝힙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전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사귐을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사귐은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사귐입니다.요한일서 1:3 · 두루새김
앞에서는 계속 「우리」가 들었고, 보았고, 만졌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등장합니다. 저자는 특별한 경험을 내세워 독자들과 거리를 두려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독자들도 함께 사귐을 나누도록 하려고 전합니다.
「사귐」(κοινωνία)으로 옮긴 말은 서로 만나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는 뜻보다 넓습니다. 어떤 현실에 함께 참여하고, 공통의 몫을 나누는 관계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친밀한 감정 자체가 아니라 함께 나누는 생명의 근거입니다.
독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똑같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증언을 통해 그 증언이 가리키는 생명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증인들은 경험을 독점하지 않고, 전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그 생명 안으로 초대합니다. 과거의 목격이 현재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곧바로 사귐의 범위를 더 넓힙니다.
증인들과 독자들이 사귐을 나눌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아버지와 아들이 주시는 생명에 함께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야기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건너뛰지 않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나누는 생명은 그분의 아들과 함께 나누는 생명과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쁨이 가득 차도록 이 글을 씁니다.요한일서 1:4 · 두루새김
독자들이 생명을 얻는 일이 목적이라면, 당연히 독자들의 기쁨을 말할 법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저자의 기쁨은 혼자 지닐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경험한 생명에 독자들도 함께 참여하게 될 때 그 기쁨이 가득 차게 됩니다. 저자가 말하는 생명 자체가 함께 나누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전하는 사람과 받아들이는 사람 사이에는 경험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가 생명을 나눌 수 있는 사람과 나눌 수 없는 사람의 차이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사귐을 나누게 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5절이 그 질문에 답합니다.
조금 더 깊이
4절은 사본에 따라 「우리의 기쁨」이라고 하거나 「여러분의 기쁨」이라고 하는 차이가 있습니다. 위 설명은 두루새김이 따른 「우리의 기쁨」을 기준으로 한 것입니다. 또 요한복음 17:20–23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말을 통해 자신을 믿게 될 사람들까지 기도에 포함하시며 그들이 하나가 되기를 구하십니다. 요한일서 1:3은 그 기도를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사도들의 증언을 통해 사람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점에서 깊이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 그분과 함께 나누는 삶의 조건
우리가 그분께 듣고 여러분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빛이시며, 그분 안에는 어둠이 조금도 없습니다.요한일서 1:5 · 두루새김
앞의 네 절이 생명이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말했다면, 이제 그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선언합니다. 빛은 하나님이 밝은 곳에 계신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하나님과 거짓, 진실과 죄 사이의 관계입니다.
하나님 안에는 어둠이 조금도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사귐을 나눈다고 하면서 어둠을 자신의 삶의 방식으로 삼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을 나눈다고 말하면서도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며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요한일서 1:6 · 두루새김
저자는 말하는 것과 살아가는 것을 대조합니다. 하나님과 사귐을 나눈다는 주장이 참인지는 실제로 어떻게 살아가는지와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살아간다면」(περιπατέω)에 해당하는 원문의 말은 걷는다는 뜻으로, 한 번의 행동보다 지속적인 삶의 방향을 나타내는 비유입니다(신명기 8:6 등).
저자는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진리를 모른다고 하지 않고,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진리는 알고 말할 수 있는 내용으로만 남지 않고, 삶으로 실천해야 하는 현실입니다. 저자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한다고 했는데, 이제 그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진리는 듣고 인정하는 데서 끝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빛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 가운데 살아간다면, 우리는 서로 사귐을 나누고, 그분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합니다.요한일서 1:7 · 두루새김
앞절의 반대라면 당연히 하나님과 사귐을 나눈다고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서로 사귐을 나누고」라고 말합니다.
「서로」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로 이해하려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러나 3절에서 이미 사람들 사이의 사귐을 언급한 점과, 서로를 가리키는 그리스어 대명사가 일반적으로 나타내는 관계를 고려하면 믿는 사람들 사이의 사귐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두 해석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밀접하게 연결된다는 점에서는 일치합니다.
하나님의 빛 가운데 살아가는 삶은 개인의 신비한 경험에 갇히지 않고, 같은 생명을 나누는 사람들과의 관계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의 주장이 거짓이라는 말씀(4:20)도 같은 방향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이 더 뜻밖입니다. 빛 가운데 살아간다면 죄가 없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왜 빛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죄를 깨끗하게 하는 피가 필요합니까?
이 질문은 요한일서 1장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빛 가운데 살아간다는 것은 죄가 전혀 없는 상태에 도달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7절에서 예수님의 피가 그를 깨끗하게 한다는 말도, 9절에서 죄를 고백하라는 말도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조금의 어둠도 없으신 분이며,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여전히 깨끗하게 되어야 할 죄가 있습니다.
이 둘이 함께 있을 수 있는 까닭에 대한 저자의 대답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피는 예수님께서 실제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고 죽으셨음을 가리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빛을 가르치기 위해서만 오신 분이 아니라, 죄인들이 그 빛 가운데 살아갈 수 있도록 자신을 내어주신 분이십니다. 첫머리에서 증언한, 손으로 만질 수 있었던 예수님의 삶이 이제 죄를 깨끗하게 하는 그분의 피와 연결됩니다.
1장 자체는 그 죽음이 어떻게 죄를 씻는지 길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2:1–2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하시는 분이자 죄를 씻기 위한 제물로 소개하면서 그 의미를 발전시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에 어둠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아들을 통해 어둠 가운데 있던 사람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빛 가운데 살아가는 일과 예수님의 피로 깨끗하게 되는 일은 경쟁하는 두 방법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깨끗하게 되는 것이 빛 가운데 살아가는 삶을 가능하게 하고 지탱합니다.
그렇다면 그 빛 가운데 있는 사람은 자신의 죄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죄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과 죄를 고백하는 사람
저자는 이제 앞의 설명을 더 깊이 밀고 갑니다.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며 우리 안에는 진리가 없습니다.요한일서 1:8 · 두루새김
6절의 사람은 자신의 행동과 하나님에 대한 주장이 서로 맞지 않았습니다. 8절의 사람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잘못 판단합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속이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속입니다.
자기에게 죄가 없다고 확신하면, 자신의 삶에서 죄를 발견할 가능성 자체를 막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지적을 받아들일 이유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다시 살펴볼 필요도 느끼지 못합니다. 진리를 충분히 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진리가 자신을 바로잡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하면, 신실하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잘못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요한일서 1:9 · 두루새김
나는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비교적 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어떤 잘못을 저질렀고, 무엇이 하나님 앞에서 옳지 않았는지를 인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원문에서도 8절의 「죄」는 단수형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 9절의 「우리의 죄」는 복수형 하마르티아스, 곧 죄들입니다. 8절이 죄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문제를 다룬다면, 9절은 실제로 범한 죄들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고백하면」은 인정하고 시인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에게 새로운 정보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참인 사실을 더 이상 부인하지 않는 것입니다.
저자는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신실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셔서 용서하신다는 말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왜 의로우시기 때문에 용서하실까요? 보통 의로움은 죄를 심판하는 것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두 읽기가 있습니다. 한 해석은 신실함과 의로움이 함께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가리키며, 죄를 인정하는 사람을 용서하시는 일이 그 참되고 올바른 성품에 맞는다고 봅니다. 다른 해석은 7절의 예수님의 피에 무게를 두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죄를 다루셨기에 의로우심을 지키면서 용서하신다고 봅니다. 두 해석이 반드시 서로를 배제하지는 않지만, 1:9 자체는 그 관계를 체계적으로 설명하지 않으므로 뒤의 설명을 이 한 구절이 직접 말하는 내용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7절과 함께 읽으면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죄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긴 결과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셨다는 사실이 그 용서의 배경에 있습니다.
용서는 죄로 인해 생긴 책임과 관계의 문제를 다루고, 깨끗하게 한다는 말은 죄가 사람에게 남긴 더러움까지 다루는 그림을 보여 줍니다. 7절에서는 예수님의 피가, 9절에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두 표현은 같은 구원의 현실을 서로 다른 방향에서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죄를 고백하는 것이 하나님께 용서를 얻어 내기 위한 대가일까요?
저자는 고백하는 사람이 얼마나 간절한지, 얼마나 충분히 후회하는지, 얼마나 완벽하게 자신의 죄를 기억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신실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성품을 이야기합니다. 용서에 대한 확신은 고백하는 사람의 완벽함이 아니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에 놓여 있습니다.
죄의 고백은 용서를 만들어 내는 공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빛 앞에서 자기 죄를 감추지 않고, 그분이 베푸시는 용서를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며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 없습니다.요한일서 1:10 · 두루새김
8절의 「죄가 없다」가 자신에게 죄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말이라면, 10절의 「죄를 지은 적이 없다」는 실제로 죄를 범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말입니다. 그 결과도 자신을 속이는 데서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데까지 무거워집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실제로 거짓된 분으로 바꿀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기에게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죄에 관한 하나님의 판단이 틀렸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 없습니다」는 8절의 「우리 안에는 진리가 없습니다」와 대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 안에 있다는 것은 바른 가르침을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말씀이 자신에 대한 판단까지 바로잡게 하는 관계를 포함합니다. 말씀을 안다고 하면서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만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말씀은 아직 그 사람 안에서 진리로 작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 경고들을 「그들이」가 아니라 계속 「우리가」라고 씁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을 나눈다고 말하면서도」,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하면」, 「우리가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말한다면」. 독자들 가운데 실제로 죄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가능성은 있고, 뒤에는 공동체의 분열과 잘못된 가르침을 경계하는 대목도 나옵니다. 그러나 1장은 그 문제를 특정 집단만의 것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보고 들었다고 증언하는 저자도, 그 증언을 받아들이는 독자들도 하나님 앞에서는 같은 진실을 마주합니다.
조금 더 깊이
8절의 단수와 9절의 복수 차이가 죄의 본성과 하나하나의 행동을 반드시 엄격하게 분리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앞뒤 흐름에서 의미 있는 진전입니다. 「용서하시고」와 「깨끗하게 하십니다」가 별개의 구원 단계를 뜻하는지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또 시편 32:5에서도 시인은 죄를 숨기지 않고 하나님께 아뢰었을 때 용서를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요한일서가 이 시편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죄를 숨기는 일과 인정하는 일의 대조가 이어지며, 요한일서는 고백과 용서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라는 사건과 더 분명하게 연결합니다.
빛은 죄를 숨길 곳이 아니라, 죄를 드러낼 수 있는 곳이다
하나님이 빛이시라는 선언은 죄인에게 두려운 말씀일 수 있습니다. 그분 앞에서는 어둠을 숨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장의 흐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이 죄를 어떻게 관리하는가가 아니라, 빛이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인을 깨끗하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1장의 죄에 관한 경고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몰아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함께 나누려는 목적 안에 놓여 있습니다.
빛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빛 아래서 자신의 삶을 바라보고, 드러나는 죄를 감추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자신의 부족함을 끊임없이 들여다보며 스스로를 검열하는 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의 관심은 자기 자신을 분석하는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함에 있습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지 훌륭한 도덕 교사이셨다면, 그분의 가르침은 우리의 잘못을 드러내는 데 머물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함께 계셨던 영원한 생명이 인간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셨고, 사람들은 그분을 보고 들었으며 손으로 만졌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예수님의 피가 죄에서 사람들을 깨끗하게 합니다.
사람에게 다가오신 그분이 사람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귐을 나누는 삶은 인간의 완전함에 기초한 불안정한 관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죽음에 기초한 관계가 됩니다. 첫머리에서 저자가 바랐던 가득 찬 기쁨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며 그분의 용서에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자기에게 죄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진리가 자기 안에 없음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자기 죄를 고백하는 사람 앞에는 신실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잘못에서 깨끗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는 죄를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의 아들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