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장 · 생명의 말씀과 사귐
빛 가운데 드러나는 생명
누군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 말이 사실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는데, 무엇으로 그 관계를 확인할 수 있을까요?
요한일서는 뜻밖의 자리에서 답을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깊이 깨달았는지, 얼마나 특별한 영적 경험을 했는지 묻지 않습니다. 오히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 것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나누는 삶을 설명하면서, 자기 죄를 인정할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처음에는 서로 관계없는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의 몸을 보고 만졌다는 증언과,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는 일이 어떻게 이어질까요?
저자가 전하려는 것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께 도달하는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에게 자신을 드러내셨으며, 그 드러남이 사람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가입니다.
처음부터 있었던 것을 손으로 만지다
편지는 인사도 없이 시작합니다.
처음부터 있었던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바라본 것, 우리 손이 만져 본 것 —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요한일서 1:1 · 본디새김
무엇인가를 계속 열거하는데 정작 그것에 관해 무엇을 하겠다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2절에서 잠시 다른 설명이 끼어들고, 3절에 이르러서야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알립니다」라는 말로 문장이 완성됩니다. 저자는 자신이 전하려는 내용을 밝히기 전에, 그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독자가 충분히 듣도록 합니다.
듣는 일에서 보는 일로, 다시 자세히 바라보고 손으로 만지는 일로 증언이 구체화됩니다. 「우리 눈으로」와 「우리 손이」라는 표현은 강조할 필요가 없어 보일 만큼 당연한 말입니다. 눈이 아닌 다른 것으로 볼 수 있고, 손이 아닌 다른 것으로 만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저자는 바로 그 당연한 사실을 굳이 말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생명은 머릿속에서 만들어 낸 관념이나 철학적 추론으로 얻은 진리가 아닙니다. 인간의 역사 안에서 실제로 만날 수 있었던 무엇입니다.
저자는 처음부터 「우리가 만난 분」이라고 말하지 않고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2절에서는 그 대상을 「영원한 생명」이라고 부르고, 3절에서는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명시합니다. 「처음부터」를 창조 이전으로 읽든 예수님의 지상 사역이 시작된 때로 읽든, 이어지는 2절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그 생명이 드러났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었고 우리에게 드러난 그 영원한 생명을 우리는 보았고 증언하며 여러분에게 알립니다 —요한일서 1:2 · 본디새김
생명이 단순히 하나님에게서 주어졌다고 하지 않고, 아버지와 함께 있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이 생명을 주시고, 인간이 그 생명을 받아 누린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성경의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요한일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생명이 아버지와 함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인간에게 드러났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도 이 자리에서는 단순히 끝없이 계속되는 삶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는 하나님이 주신 영원한 생명이 그분의 아들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5:11–12). 따라서 영원한 생명은 예수님께서 나중에 사람들에게 제공하실 복일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 분리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그분의 인간적인 삶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이 점은 편지의 뒤쪽에서 더욱 중요해집니다.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셨음을 인정하는 문제를 매우 중대하게 다루고(4:2–3), 공동체를 떠난 사람들도 언급합니다(2:19). 이 구절들을 고려하면 공동체 내부에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한 갈등이 있었다고 이해할 만합니다. 그러나 그 갈등의 구체적인 교리 체계나 상대방의 이름까지 확정할 자료는 편지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1장의 첫머리에서 분명한 것은 이것입니다. 저자가 증언하는 영원한 생명은 인간의 몸을 입고 살아가신 예수님과 따로 존재하는 신비한 지식이 아닙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생명이 사람의 눈앞에 나타났고, 사람의 손이 닿는 곳에 있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그리스어에서도 1절은 남성 관계대명사 대신 「~한 것」이라는 중성 관계대명사를 반복합니다. 이 중성 표현은 예수님이라는 인물뿐 아니라 그분 안에서 드러난 생명과 그 생명에 관한 증언 전체를 포괄하는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중성형 하나만으로 그 범위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처음부터」에는 두 가지 주요 읽기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1과 연결하여 창조 이전부터 있었던 생명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고, 예수님의 지상 사역이 시작된 때부터 증인들이 듣고 보았던 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후자의 읽기는 이 절이 실제 목격 경험에 집중한다는 점과, 편지의 다른 곳에서 「처음부터」가 독자들이 가르침을 받은 때를 가리키기도 한다는 점(2:24)에 근거합니다. 요한복음 1:1은 말씀이 처음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고 말하고, 1:14는 그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요한일서는 이와 밀접한 주제적 연결을 보여 주지만 같은 문장을 그대로 인용하지는 않습니다. 요한복음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사건을 선포한다면, 요한일서는 그 사건을 증언하는 사람들의 경험을 전면에 놓습니다.
생명을 알리는 이유는 함께 나누기 위해서다
저자는 드디어 자신이 증언하는 이유를 밝힙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알립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함께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나눔은 아버지와 함께, 또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나눔입니다.요한일서 1:3 · 본디새김
앞에서는 계속 「우리」가 등장했습니다. 우리가 들었고, 우리가 보았고, 우리가 만졌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러분」이 등장합니다. 저자는 자신이 가진 특별한 경험을 내세워 독자들과 거리를 두려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도 함께 나누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눔」(κοινωνία)으로 옮긴 그리스어는 흔히 「교제」라고 번역됩니다. 그러나 이 말은 서로 만나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는 뜻보다 넓어서, 어떤 현실에 함께 참여하고 공통의 몫을 나누는 관계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친밀한 감정 자체가 아니라 함께 나누는 생명의 근거입니다.
독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저자와 똑같은 방식으로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증언을 통해, 독자들도 그 증언이 가리키는 생명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증인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독점하지 않고, 경험한 것을 전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그 생명 안으로 초대합니다. 과거의 목격이 현재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곧바로 나눔의 범위를 더 넓힙니다.
「우리의 나눔은 아버지와 함께, 또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나눔입니다.」 증인들과 독자들이 함께 나눌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아버지와 아들이 주시는 생명에 함께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야기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회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나누는 생명은 그분의 아들과 함께 나누는 생명과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것을 씁니다. 우리의 기쁨이 가득 차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일서 1:4 · 본디새김
독자들이 생명을 얻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일이 목적이라면, 당연히 「여러분의 기쁨」이라고 말할 법하지 않습니까? 실제로 이 구절에는 「우리의 기쁨」과 「여러분의 기쁨」이라는 본문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의 기쁨」이라는 읽기를 기준으로 보면, 저자의 기쁨은 혼자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경험한 생명에 독자들도 함께 참여하게 될 때 그 기쁨이 가득 차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전도한 사람이 성과를 보고 기뻐한다는 뜻보다 깊습니다. 저자가 말하는 생명 자체가 함께 나누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전하는 사람과 받아들이는 사람 사이에는 경험의 차이가 있지만, 그 차이가 생명을 나눌 수 있는 사람과 나눌 수 없는 사람의 차이가 되지는 않습니다.
이제 독자는 한 가지 질문을 품게 됩니다. 그렇게 함께 나누게 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조금 더 깊이
요한복음 17:20–23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말을 통해 자신을 믿게 될 사람들까지 기도에 포함하시며, 그들이 하나가 되기를 구하십니다. 요한일서 1:3은 그 기도를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사도적 증언을 통해 사람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점에서 깊이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 그분과 함께 나누는 삶의 조건
우리가 그분에게서 듣고 여러분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고, 그분 안에는 어둠이 조금도 없습니다.요한일서 1:5 · 본디새김
앞의 네 절이 생명이 드러났다는 사실을 강조했다면, 이제 그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선언합니다. 이 문장은 하나님이 밝은 곳에 계신다거나 세상을 비추어 주신다는 뜻에 그치지 않습니다. 빛은 하나님의 성품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요한일서의 빛은 성경의 여러 빛과 연결되지만, 여기서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하나님과 거짓, 진실과 죄 사이의 관계입니다. 하나님 안에는 어둠이 조금도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간다고 하면서 어둠을 자신의 삶의 방식으로 삼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나눔이 있다고 말하면서 어둠 속을 걷는다면, 우리는 거짓말하고 진리를 행하지 않습니다.요한일서 1:6 · 본디새김
저자는 「말하는 것」과 「걷는 것」을 대조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나누는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 주장이 참인지는 실제로 어떻게 살아가는지와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걷는다」는 표현은 한 번의 행동보다 지속적인 삶의 방향을 나타내는 비유로,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길을 걷는다는 말은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간다는 의미로 자주 쓰입니다(신명기 8:6 등).
그런데 저자는 어둠 속을 걷는 사람이 단순히 진리를 모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행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알고 있거나 말할 수 있는 내용으로만 남지 않고, 살아 내야 하는 현실입니다. 저자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한다고 했는데, 이제 그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진리는 듣고 인정하는 데서 끝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빛 가운데 걷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우리가 그분이 빛 가운데 계신 그대로 빛 가운데 걷는다면, 우리는 서로 함께 나누고, 그분의 아들 예수의 피가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합니다.요한일서 1:7 · 본디새김
이 구절에는 예상하지 못할 만한 표현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서로 함께 나누고」입니다. 앞절에서는 하나님과 함께 나눈다고 말하면서 어둠 속을 걷는 사람을 문제 삼았으니, 반대되는 상황에서는 「하나님과 함께 나눈다」고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서로」라고 말합니다.
「서로」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로 이해하려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러나 3절에서 이미 사람들 사이의 나눔을 언급한 점과, 그리스어의 상호대명사가 일반적으로 나타내는 관계를 고려하면 믿는 사람들 사이의 나눔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두 해석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밀접하게 연결된다는 점에서는 일치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회복되면 그것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도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의 주장이 거짓이라는 말씀(4:20)도 같은 방향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빛 안에서 걷는 삶은 개인의 신비한 경험에 갇히지 않고, 같은 생명을 나누는 사람들과의 관계로 드러납니다.
둘째 표현은 그다음에 나옵니다. 「그분의 아들 예수의 피가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합니다.」 빛 가운데 걷는다면 죄가 없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왜 빛 가운데 걷는 사람에게도 죄를 깨끗하게 하는 피가 필요합니까?
이 질문은 요한일서 1장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저자는 빛 가운데 걷는 사람도 예수님의 피로 깨끗하게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빛 가운데 걷는다는 것은 죄가 전혀 없는 상태에 도달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조금의 어둠도 없으신 분이며,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여전히 깨끗하게 되어야 할 죄가 있습니다.
이 둘은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요? 저자의 대답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피는 예수님의 생명이 실제로 죽음에 내어졌음을 가리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빛을 가르치기 위해서만 오신 분이 아니라, 죄인들이 그 빛 가운데 살아갈 수 있도록 자신을 내어주신 분이십니다. 첫머리에서 증언한, 손으로 만질 수 있었던 예수님의 실제 인간적 삶은 이제 죄를 깨끗하게 하는 그분의 피와 연결됩니다.
저자는 하나님과 함께 나누는 삶의 근거를 인간의 완전함에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에 어둠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아들을 통해 어둠 가운데 있던 사람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빛 가운데 걷는 일과 예수님의 피로 깨끗하게 되는 일은 서로 경쟁하는 두 방법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깨끗하게 되는 것이 빛 가운데 살아가는 삶을 가능하게 하고 지탱합니다.
그렇다면 그 빛 가운데 있는 사람은 자신의 죄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죄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과 죄를 고백하는 사람
저자는 이제 앞의 논증을 더 깊이 밀고 갑니다.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헤매게 하고 진리가 우리 안에 없습니다.요한일서 1:8 · 본디새김
6절의 사람은 자신의 행동과 하나님에 대한 주장이 모순됩니다. 8절의 사람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잘못 판단합니다. 죄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속이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 자신을 헤매게 합니다.
자기에게 죄가 없다고 확신하면, 자신의 삶에서 죄를 발견할 가능성 자체를 차단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잘못을 지적해도 받아들일 이유가 없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다시 살펴볼 필요도 느끼지 못합니다. 진리를 충분히 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진리가 자신을 바로잡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한다면, 그분은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는 데 신실하시고 의로우십니다.요한일서 1:9 · 본디새김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비교적 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실제로 어떤 잘못을 저질렀고, 무엇이 하나님 앞에서 옳지 않았는지를 인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그리스어에서도 8절의 「죄」(ἁμαρτία)는 단수형이지만, 9절의 「우리 죄」는 복수형 「죄들」입니다.
8절이 죄가 있는 존재라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문제를 다룬다면, 9절은 실제로 범한 죄들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이 차이가 죄의 본성과 개별 행위를 엄격하게 분리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문맥에서 의미 있는 진전입니다. 「고백한다」는 말도 인정하고 시인한다는 뜻으로, 하나님에게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는 데가 아니라 이미 참인 사실을 더 이상 부인하지 않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시는 데 「신실하시고 의로우십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므로 신실하시다는 말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통 의로움은 죄를 심판하는 것과 연결되는데, 왜 의로우시기 때문에 용서하실까요?
한 가지 해석은 하나님의 신실함과 의로움이 그분의 약속을 지키시는 성품을 함께 가리킨다고 봅니다. 죄를 인정하는 사람을 용서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참되고 올바른 성품에 부합합니다. 또 다른 해석은 7절의 예수님의 피에 무게를 두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죄를 다루셨기에 의로우심을 지키면서 용서하신다고 봅니다.
두 해석은 반드시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다만 1:9 자체는 하나님의 의로움과 속죄의 관계를 체계적으로 설명하지 않으므로, 후자의 설명을 이 한 구절의 직접적인 진술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7절과 함께 읽으면, 하나님의 용서는 죄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긴 결과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셨다는 사실이 그 용서의 배경에 있습니다.
용서는 죄로 인해 생긴 책임과 관계의 문제를 다루는 말이고, 깨끗하게 한다는 말은 죄가 사람에게 남긴 더러움까지 다루는 이미지입니다. 두 표현이 별개의 구원 단계를 뜻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용서가 단순한 묵인이나 무관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풍성하게 보여 줍니다. 7절에서는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하고, 9절에서는 하나님이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십니다. 같은 구원의 현실을 서로 다른 방향에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죄를 고백하는 것이 하나님께 용서를 얻어 내기 위한 대가일까요? 저자는 고백하는 사람이 얼마나 간절한지, 얼마나 충분히 후회하는지, 얼마나 완벽하게 자신의 죄를 기억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의 성품을 이야기합니다. 「그분은 … 신실하시고 의로우십니다.」
죄의 고백은 용서를 만들어 내는 공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빛 앞에서 자기 죄를 감추지 않고, 그분이 베푸시는 용서를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 없습니다.요한일서 1:10 · 본디새김
8절의 「죄가 없다」는 말이 자신에게 죄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라면, 10절의 「죄를 지은 적이 없다」는 말은 실제로 죄를 범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도 더 무겁습니다. 8절에서는 자신을 헤매게 한다고 했지만, 10절에서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든다고 합니다.
물론 인간이 하나님을 실제로 거짓된 분으로 바꿀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기에게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죄에 관한 하나님의 판단이 틀렸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자신을 속이던 일이 마침내 하나님을 거짓된 분으로 취급하는 일에 이릅니다.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 없습니다」는 8절의 「진리가 우리 안에 없습니다」와 대응합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사람 안에 있다는 것은 바른 교리를 알고 있다는 뜻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 대한 판단까지 바로잡게 하는 관계를 포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만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말씀은 아직 그 사람 안에서 진리로 작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구약의 시편 32:5에서도 시인은 자신의 죄를 숨기지 않고 여호와야훼께 아뢰었을 때 용서를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요한일서가 이 시편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죄를 숨기는 일과 인정하는 일의 대조가 중요한 주제적 연결을 이룹니다. 차이가 있다면 요한일서는 죄의 고백과 용서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라는 사건과 더욱 명시적으로 연결한다는 것입니다.
빛은 죄를 숨길 곳이 아니라, 죄를 드러낼 수 있는 곳이다
저자는 잘못된 주장을 비판하면서 「그들이 하나님과 함께 나눈다고 말한다면」이라고 쓰지 않습니다. 대신 계속 「우리가」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나눔이 있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한다면」
「우리가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말한다면」
독자들 가운데 실제로 죄를 부정하거나 하나님의 빛과 무관하게 살아도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가능성은 있고, 뒤에서는 공동체의 분열과 예수님에 관한 잘못된 가르침을 경계하는 대목이 분명히 나옵니다. 그러나 1장은 그런 문제를 특정 집단만의 것으로 돌리지 않고, 저자 자신과 독자들을 포함하는 「우리」로 표현합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보고 들었다고 증언하는 저자도, 그 증언을 받아들이는 독자들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주장할 수 없다는 같은 진실을 마주합니다.
그래서 1장의 죄에 관한 경고는 사람들을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함께 나누려는 목적 안에 놓여 있습니다.
빛과 어둠의 비유를 읽으면 빛 가운데 있는 사람은 선한 사람이고,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은 악한 사람이라는 구도를 쉽게 떠올립니다. 그러나 빛 가운데 걷는 사람에게도 예수님의 피가 필요하다면, 빛과 어둠의 차이를 단순히 죄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어둠 속을 걷는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그분의 진리에 맞추어 살지 않고, 자신의 죄를 부정함으로써 하나님의 판단을 거부합니다. 빛 가운데 걷는 사람은 그분의 빛 아래서 자신의 삶을 바라보고, 드러나는 죄를 감추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자신의 부족함을 끊임없이 들여다보는 종교적 자기검열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의 관심은 자기 자신을 분석하는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함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빛이시라는 선언은 어둠을 숨길 수 없기에 죄인에게 두려운 말씀일 수 있지만, 바로 그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통해 죄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지 훌륭한 도덕 교사이셨다면, 그분의 가르침은 우리의 잘못을 드러내는 데 머물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영원한 생명이 인간의 역사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사람들은 그분을 보고 들었으며 손으로 만졌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예수님의 피가 죄에서 사람들을 깨끗하게 합니다.
사람에게 다가오신 그분이 사람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그 결과 하나님과 함께 나누는 삶은 인간의 완전함에 기초한 불안정한 관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죽음에 기초한 관계가 됩니다. 편지의 첫머리에서 저자는 자신이 보고 들은 생명을 함께 나누어 기쁨이 가득 차기를 바랐습니다. 그 기쁨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서 그분의 용서에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자기에게 죄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진리가 자기 안에 없음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자기 죄를 고백하는 사람 앞에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는 죄를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의 아들 예수님의 피가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