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3장 ·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
하나님의 자녀는 누구를 닮아 가는가
사람은 누구의 자녀인지를 여러 방법으로 확인합니다. 이름과 가족관계로 확인하기도 하고, 얼굴이나 말투에서 부모를 닮은 모습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는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요?
요한일서 3장은 이 질문을 두 가지 전혀 다른 장면으로 풀어 갑니다. 하나는 장차 하나님 앞에서 일어날 일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분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분과 같아지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다른 하나는 지금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누군가 궁핍한 형제를 보았을 때, 자기 재산을 움켜쥘 것인지 그에게 내어줄 것인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일과 가난한 형제를 돕는 일이 어떻게 연결될까요? 그 사이에는 하나의 질문이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사람을 어떻게 바꾸는가?
앞 장의 마지막에서 저자는 의를 행하는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태어났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3장은 그 말의 의미를 펼쳐 보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이 얼마나 놀라운 선물인지 밝힌 다음, 그 자녀에게 죄와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아버지이시며, 그분의 아들이 무엇을 하셨고, 그 생명을 받은 사람들이 왜 서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자녀라 불릴 뿐 아니라,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 불리도록 아버지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셨는지 보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정말 그렇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것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요한일서 3:1 · 본디새김
저자는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눈앞에 있는 물체를 보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사랑을 보라고 합니다. 그 사랑의 결과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저자가 놀라는 것은 사랑의 양만이 아닙니다. 그 사랑이 사람에게 가져온 전혀 새로운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시거나 잘못을 용서하시는 데서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자신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그리고 우리는 정말 그렇습니다」라는 짧은 문장을 더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단지 듣기 좋은 명칭이거나, 장차 노력해서 얻어야 할 지위라면 이런 말은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관계는 신자들이 스스로 붙인 이름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사랑을 주심으로써 이루신 현실입니다.
요한복음 1:12–13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받으며, 그들의 새로운 출생은 인간의 혈통이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고 설명됩니다. 요한일서는 그 사실을 자녀의 입장에서 바라봅니다. 자녀에게는 자신의 출생을 만들어 낼 능력이 없습니다. 먼저 생명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은 인간이 하나님을 닮아 가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주어진 보상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사랑에서 시작된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토록 놀라운 신분을 받았는데도 세상은 그들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들의 아버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알지 못한다」는 말은 정보가 없다는 뜻 이상으로, 그들이 누구에게 속한 사람인지를 참되게 알아보고 인정하지 못한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요한복음 1:10–11에서도 세상은 자신을 창조하신 말씀이 오셨으나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했으므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도 세상의 인정과 환영을 당연하게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 사실을 자녀 됨에 대한 의심의 근거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은 세상의 평가가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지금은 자녀이지만, 앞으로 무엇이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이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분과 같아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있는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요한일서 3:2 · 본디새김
이 구절에는 「지금」과 「아직」이라는 두 가지 시간이 맞닿아 있습니다.
저자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 자체가 불확실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현재의 확실한 현실입니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은 그 자녀 됨이 장차 어떤 모습으로 완성될 것인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존재이지만, 아직 자녀가 아닌 존재는 아닙니다.
미래의 구체적인 모습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미래를 결정하는 중심은 분명합니다. 그분과 같아질 것입니다. 「그분이 나타나시면」은 직전 2:28의 문맥을 따라 예수님께서 나타나실 때로 읽습니다.
「그분과 같아진다」는 말을 사람이 하나님과 똑같은 존재가 되어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별이 사라진다는 뜻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문맥에서 중심은 예수님께서 나타나실 때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분을 닮은 모습으로 변화될 것이라는 소망입니다. 요한일서의 관심은 그 변화의 구체적인 형태가 아니라 「그분을 있는 그대로 볼 것」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에 의해 제대로 알려지지 않습니다. 장차 그들은 그분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됩니다. 현재에는 알아보지 못함이 있고, 미래에는 분명히 보게 됨이 있습니다.
미래의 소망은 오늘을 어떻게 바꾸는가
그리고 그분에게 이 소망을 두고 있는 사람은 다 그분이 정결하신 그대로 자기를 정결하게 합니다.요한일서 3:3 · 본디새김
저자는 미래를 말하다가 곧바로 현재의 삶으로 돌아옵니다.
여기서 순서를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자신을 충분히 정결하게 만들면 장차 예수님과 같아질 자격을 얻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의 자녀이며, 장차 그분과 같아질 소망이 있기 때문에 현재의 삶을 그 소망에 맞추어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정결의 기준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그분이 정결하신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자신이 장차 닮게 될 분을 바라보면서, 지금부터 그분에게 어울리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제 저자는 그 정결한 삶과 정반대되는 것, 죄를 이야기합니다.
조금 더 깊이
1절에서 「얼마나 큰」으로 옮긴 그리스어 포타포스는 본래 어떤 종류나 출신을 묻는 말에서 발전했습니다. 문맥에 따라 크기에 대한 감탄을 나타내기도 하고,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낯선 종류의 것에 대한 놀라움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2절의 「그분이 나타나시면」은 원문에서 주어가 명시되지 않은 형태여서, 앞의 「우리가 무엇이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를 이어 받아 그 사실이 드러날 때라고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직전 2:28에서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말했으므로 예수님께서 나타나실 때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분을 닮는 변화의 소망은 고린도후서 3:18(예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 형상으로 변화됨), 빌립보서 3:20–21(우리의 낮은 몸을 자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바꾸심)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죄를 없애려고 오셨는데, 어떻게 죄 가운데 머물 수 있는가
죄를 짓는 사람은 다 불법도 저지릅니다. 그리고 죄는 곧 불법입니다.요한일서 3:4 · 본디새김
저자는 죄를 「불법」이라고 정의합니다. 법이나 규범을 거스르는 상태, 성경의 문맥에서는 하나님의 뜻과 권위에 대한 거역을 나타낼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율법의 개별 조항들을 열거하지 않고, 이어지는 구절에서 예수님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죄를 설명합니다. 죄는 하나님의 아들이 이루신 일에 반대되는 방향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분이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줄 알고 있습니다. 그분 안에는 죄가 없습니다.요한일서 3:5 · 본디새김
죄를 없애시는 분 자신은 죄에 속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와 싸우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분이라는 정도로 소개되지 않으십니다. 죄가 없는 분이시며, 죄를 없애기 위해 나타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정결한 삶은 예수님의 사역이 지향하는 목적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그분이 죄를 없애려고 오셨는데, 그분에게 속한 사람이 죄를 자신의 삶의 원리로 삼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바로 이 질문에서 다음의 강한 진술이 나옵니다.
그분 안에 머무는 사람은 다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다 그분을 본 적도 없고 알게 된 적도 없습니다.요한일서 3:6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요한일서 전체에서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저자는 앞에서 그리스도인에게도 죄를 고백할 필요가 있다고 했고(1:8–10), 누가 죄를 지으면 예수님께서 아버지 앞에서 변호하신다고 했습니다(2:1). 그런데 여기서는 예수님 안에 머무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다고 선언합니다.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의 어려움
해석은 크게 세 방향으로 갈립니다. 죄를 계속 짓고 살아가는 생활 방식을 부정한다는 읽기,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삶과 죄가 원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음을 절대적인 언어로 선언한다는 읽기, 공동체를 떠난 사람들의 특별한 죄를 가리킨다는 읽기입니다. 해석들이 갈리는 까닭은 본문의 강한 진술과 편지 전체의 현실적인 죄 이해를 모두 존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느 한 해석을 확정하여 본문을 부드럽게 바꾸기보다는 저자가 분명히 주장하는 핵심을 먼저 붙드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수님 안에 머무는 삶과 죄를 받아들이는 삶은 같은 방향을 향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죄를 지은 경험이 한 번이라도 있는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식으로 곧바로 판정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에게 죄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뜻도 아닙니다.
죄를 없애는 일은 마귀의 일을 허무는 일입니다
자녀 여러분, 아무도 여러분을 헤매게 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분이 의로우신 그대로 의롭습니다.요한일서 3:7 · 본디새김
「아무도 여러분을 헤매게 하지 못하게 하십시오」라는 말은 독자들이 실제로 잘못된 가르침에 노출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 가르침의 모든 내용을 복원할 수는 없지만, 저자가 경계하는 오류의 방향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믿음과 실제 삶을 분리하는 것입니다.
저자는 의의 기준을 다시 예수님에게 둡니다. 「그분이 의로우신 그대로」. 의로운 행동 자체가 사람을 구원하는 독립적인 수단이 아니라, 의로우신 예수님과의 관계가 삶에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마귀에게 속해 있습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죄를 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허물려는 것이었습니다.요한일서 3:8 · 본디새김
5절과 8절을 나란히 놓으면 구조가 드러납니다.
3:5 — 그분이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셨습니다.
3:8 — 하나님의 아들이 마귀의 일을 허물려고 나타나셨습니다.
죄를 없애는 일과 마귀의 일을 허무는 일은 분리된 두 사업이 아닙니다. 「허물다」는 묶인 것을 풀거나 결합된 것을 해체하는 말로, 마귀가 이루어 놓은 일을 무너뜨리고 그 효력을 깨뜨린다는 이미지로 읽을 수 있습니다.
마귀의 일이 무엇인지는 바로 이어지는 가인의 이야기가 보여 줍니다. 마귀에게 속한 삶은 형제를 미워하고 죽이는 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마귀의 일을 허무신다는 말은 보이지 않는 세계의 권력 싸움으로만 읽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사람 사이의 관계를 파괴하는 악의 지배를 허무는 방향을 향합니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죄를 지을 수 없습니까?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다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분의 씨가 그 사람 안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요한일서 3:9 · 본디새김
저자의 표현은 6절보다 더 강해집니다.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저자는 하나님에게서 태어났다는 신분을 두 번 강조하면서 그 사이에 「씨」라는 이미지를 놓습니다. 자녀의 삶이 그 출생과 무관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씨는 새로운 출생과 생명의 근원을 가리키지만, 하나님의 씨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영,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새 생명의 원리로 해석이 갈립니다. 요한일서 3:9만으로 씨의 정체를 하나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저자가 왜 씨라는 이미지를 사용했는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녀는 부모에게서 생명을 받고, 그 생명은 자녀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성품과 정반대되는 삶을 아무 문제 없이 지속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 출생의 의미를 부정하는 일이 됩니다.
여기서도 6절과 같은 어려움이 생깁니다. 이 표현을 「죄를 자주 짓지 않는다」 정도로 약화하는 것도, 신자는 실제로 어떤 죄도 범할 수 없다고 단정하는 것도 본문의 모든 증거를 충분히 고려한 결론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저자는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생명과 죄의 근본적인 불일치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불일치는 삶에서 어떻게 확인됩니까?
이것으로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환히 드러납니다. 의를 행하지 않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 속해 있지 않고,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그렇습니다.요한일서 3:10 · 본디새김
앞의 긴 논증이 하나의 실제적인 기준으로 모입니다. 의를 행합니까. 그리고 형제를 사랑합니까.
저자는 의로운 삶을 설명하다가 형제 사랑을 덧붙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주제가 아니라 앞에서 말한 의로움이 실제로 어디에서 드러나는지를 보여 주는 결정적인 전환입니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생명은 추상적인 종교적 순결이 아니라, 형제를 향한 사랑에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이 강조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어떻게 드러나는지가 문제 됩니다. 그 답은 혈통이나 특별한 지식이 아니라 의를 행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삶입니다.
이제 저자는 형제 사랑과 정반대의 길을 걸었던 첫 번째 사람, 가인을 불러옵니다.
조금 더 깊이
5절의 「없애다」로 옮긴 그리스어 아이로는 들어 올리다, 치우다, 제거하다를 뜻하며 짊어지거나 떠맡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죄를 대신 짊어지는 속죄의 측면과도 연결할 수 있지만, 이 절의 가장 직접적인 강조점은 죄를 제거하러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6절을 둘러싼 세 읽기의 근거는 이렇습니다. 첫째, 「죄를 짓지 않습니다」의 동사는 현재형이고 그리스어 현재형은 문맥에 따라 반복적·습관적 행동을 나타낼 수 있으므로 죄를 지속적인 삶의 방식으로 삼을 수 없다는 뜻으로 읽습니다. 1장과 2장의 진술과 함께 이해하기에 유리하지만, 현재형이라는 사실만으로 「습관적으로」라는 의미가 성립하지는 않으며 문맥의 뒷받침이 필요합니다. 둘째, 이 편지는 빛과 어둠, 진리와 거짓을 뚜렷하게 대조하는 문체를 쓰므로 절대적인 대조로 읽습니다. 본문의 강한 표현을 약화하지 않지만, 신자도 실제로 죄를 짓는다는 다른 구절들과의 관계를 설명해야 합니다. 셋째, 예수님에 관한 진리를 거부하거나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태도 같은 특정한 죄로 읽습니다. 2장의 거짓 가르침 경고와 3:10 이후의 형제 사랑 논증을 긴밀하게 연결하지만, 4절이 죄를 일반적으로 정의한다는 점에서 한 가지 죄로만 제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8절과 관련해, 요한복음 8:44에서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처음부터 살인한 자이며 진리 안에 서지 않는 자로 말씀하시는데, 살인과 거짓을 마귀의 일로 연결하는 점에서 요한일서와 뚜렷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9절의 「씨」(스페르마)는 식물의 씨앗이나 생명을 낳는 씨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해석은 살아 있고 영원히 머무는 말씀으로 새로 태어난다는 베드로전서 1:23과, 하나님의 영으로 보는 해석은 영으로 태어나는 일을 말하는 요한복음 3:5–8과 연결됩니다. 이 해석들은 서로 겹치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형제를 미워한 최초의 형제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가인처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해 있었고 자기 형제를 쳐 죽였습니다. 그리고 무엇 때문에 그를 쳐 죽였습니까? 자기 일은 악하고 자기 형제의 일은 의로웠기 때문입니다.요한일서 3:11–12 · 본디새김
이 구절에서 중요한 것은 가인이 누군가를 죽였다는 사실이 아니라, 자기 형제를 죽였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4장에서 인류의 첫 살인 사건은 낯선 두 사람 사이가 아니라 형제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함께 살아가도록 주신 가장 가까운 관계가 죽음의 자리로 바뀐 것입니다.
가인은 일반적인 악인의 대표가 아닙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인물입니다.
창세기 본문은 하나님이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고 말할 뿐, 무엇이 달랐는지에 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요한일서는 그 사건을 다시 읽으면서 강조점을 제물의 종류나 제사 절차가 아니라 가인의 악과 아벨의 의에 둡니다.
가인은 자신의 악을 고치는 대신 의로운 형제를 제거했습니다. 아벨의 의로움은 자신을 돌아볼 기회가 될 수 있었지만, 가인에게는 견딜 수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형제를 죽였습니다.
미움은 다른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 감정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깊어지면 다른 사람의 존재 자체를 견디지 못하는 상태에 이를 수 있고, 특히 그 사람의 올바름이 나의 잘못을 드러낼 때 더욱 위험한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그리고 형제 여러분, 세상이 여러분을 미워해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요한일서 3:13 · 본디새김
가인이 의로운 아벨을 미워한 사건은 세상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미워하는 현실을 이해하게 하는 사례가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비판이나 반대를 받는다고 해서 언제나 자신이 아벨의 위치에 있다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세상이 의를 미워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할 뿐, 모든 비판이 불의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세상이 자신을 미워한다는 사실만으로 하나님의 자녀임이 증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인지는 형제를 어떻게 대하는가에서 드러납니다.
미움은 죽음에 속하고, 사랑은 생명에 속합니다
우리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우리가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 안에 머뭅니다.요한일서 3:14 · 본디새김
형제를 사랑하는 일은 좋은 성품의 표시가 아니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갔다는 증거입니다. 「옮겨 갔다」는 표현은 이미 이루어진 변화를 나타냅니다. 요한복음 5:24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밀접하게 연결되는데, 요한일서는 그 생명이 형제 사랑에서 확인된다고 보여 줍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갔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 안에 머뭅니다.
이전에는 하나님 안에 머무는 일이 강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죽음 안에도 머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육체적인 죽음을 기다린다는 뜻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이 지배하지 않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가인은 자기 형제의 생명을 빼앗았지만,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 생명을 귀하게 여깁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다 살인자입니다. 그리고 어떤 살인자에게도 자기 안에 머무는 영원한 생명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요한일서 3:15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실제 살인과 미움이 법적으로 동일한 행위라는 뜻이 아닙니다. 저자는 미움의 도덕적 본질을 폭로합니다. 살인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행동이고, 미움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태도입니다. 둘은 결과와 책임에서 구별되지만, 형제의 생명을 부정하는 방향이라는 점에서는 연결됩니다.
그러나 요한일서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가인과 정반대의 길을 보여 주신 한 분을 제시합니다.
예수님이십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서 11:4는 아벨이 믿음으로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설명합니다. 마태복음 5:21–22에서 예수님께서 살인에 관한 계명을 설명하시며 형제에게 분노하는 문제를 다루신 말씀도 15절과 같은 방향의 윤리적 통찰을 보여 줍니다.
가인은 형제의 목숨을 빼앗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기 목숨을 내놓으셨다
우리는 이것으로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요한일서 3:16 · 본디새김
이 구절은 3장의 중심을 이루는 대목입니다.
가인은 자기 형제의 목숨을 빼앗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가인은 다른 사람을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지키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저자는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을 배웠다」고 하지 않고, 사랑 자체를 알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사랑의 기준은 인간의 감정이나 일반적인 도덕적 이상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서 나옵니다. 사랑은 무엇보다 먼저 상대방을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일로 드러납니다.
사랑의 기준이 된 예수님의 죽음
「목숨을 내놓으셨다」는 표현은 요한복음 10장에서 선한 목자가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으신다는 말씀에 반복됩니다(요한복음 10:11, 10:15, 10:17–18). 요한일서 3:16은 바로 그 행동을 사랑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은 그분의 능력이나 영광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명을 내어주신 사랑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죽음과 그리스도인의 희생을 완전히 같은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구원을 이루는 독특한 사건이며, 그리스도인이 형제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죄를 속죄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똑같이 재현할 수는 없지만, 그분이 보여 주신 사랑의 방향을 따라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세상의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 궁핍한 자기 형제를 보고도 그에게 자기 속을 닫아 버린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물겠습니까?요한일서 3:17 · 본디새김
거대한 희생의 이야기에서 아주 일상적인 재산의 문제로 내려옵니다.
목숨을 내놓는 사랑은 특별한 순간에만 나타나는 영웅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놓아야 하는 평범한 순간에도 그 사랑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형제를 보고도 자기 속을 닫는 사람
「보고도」는 궁핍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정보를 아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도움이 필요한 형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본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자기 속을 닫아 버립니다. 원문은 내장이나 속을 가리키는 말로, 고대의 언어에서 감정과 연민이 움직이는 자리를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자기 속을 닫는다는 것은 상대방의 고통을 보고도 연민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자신의 내면을 닫는 태도입니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만이 아닙니다. 무관심도 사랑의 반대편에 설 수 있습니다.
가인은 형제를 죽였습니다. 재산을 가진 사람은 형제를 죽이지 않았고, 그저 도움을 주지 않았을 뿐입니다. 저자는 이 둘을 동일하게 취급하지 않지만, 사랑이 없는 상태가 아주 평범한 무관심으로도 드러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앞에서 하나님의 씨가 사람 안에 머문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 안에 머무는가를 묻습니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생명이 그 사람 안에 있다는 주장은, 형제의 필요 앞에서 자신의 삶을 닫아 버리는 행동과 어떻게 양립할 수 있겠습니까? 저자는 재산 자체를 악하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그 재산을 소유한 사람이 누구를 사랑하는지를 묻습니다.
말로도 혀로도 사랑하지 말고
자녀 여러분, 말로도 혀로도 사랑하지 말고 행위와 진리로 사랑합시다.요한일서 3:18 · 본디새김
저자는 사랑을 말로 표현하는 것 자체를 금지하지 않습니다. 말은 위로하고 격려하고 약속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서 그 말을 뒷받침할 행동이 없다면, 그 사랑이 진실한지 의문이 생깁니다.
이 편지에서 진리는 예수님에 관한 바른 믿음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행위와 진리로 사랑한다는 것은 친절한 행동을 많이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을 실제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다른 상황에서는 시간과 수고를 내어놓거나 누군가의 고통을 함께 감당하는 일이 사랑의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직접적인 요구를 지나치게 넓혀서 무디게 만들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궁핍한 형제를 실제로 보았고 도울 수 있는 재산이 있다면, 그 형제를 돕는 일이 사랑의 진실성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행동은 뜻밖에도 하나님 앞에서 누리는 마음의 확신으로 이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목숨을 내놓으셨다」는 그리스어로 티테미 텐 프쉬켄, 곧 자신의 목숨을 내려놓는다는 표현입니다. 17절과 관련해, 2장에서는 재산을 내세우는 허세가 세상에 속한 욕망으로 등장했다면 3장에서는 재산을 가진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문제 됩니다. 재산은 자신을 높이는 도구가 될 수도, 궁핍한 형제를 살리는 수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우리를 나무라더라도
그리고 우리는 이것으로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그분 앞에서 우리 마음을 가라앉힐 것입니다 —요한일서 3:19 · 본디새김
왜 사랑의 행동이 마음의 평안과 연결될까요?
「이것으로」는 앞의 18절에서 강조한 행위와 진리로 사랑하는 일을 받는다고 이해하는 것이 문맥에 잘 어울립니다. 형제를 실제로 사랑하는 삶은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줄 뿐 아니라, 자신이 진리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도록 돕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다고 느끼는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마음이 우리를 나무라더라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요한일서 3:20 · 본디새김
저자는 우리 마음이 우리를 나무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던 기억, 도울 수 있었지만 돕지 않았던 순간, 말만 앞세웠던 행동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런 마음 앞에서 저자는 하나님의 크심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크시다는 말씀은 위로인가, 경고인가
첫째는 위로로 읽는 해석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실패에 지나치게 집중하여 자신을 불완전하게 판단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뿐 아니라 진실하게 그분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과 실제로 행한 사랑의 일도 아십니다. 이 읽기는 19절의 「우리 마음을 가라앉힐 것입니다」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둘째는 경고로 읽는 해석입니다. 우리 마음조차 사랑이 없는 삶을 나무란다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을 더욱 분명하게 아신다는 뜻입니다. 이 해석은 사랑 없는 삶을 경계하는 앞의 논증과 연결됩니다.
그리스어 문장의 연결 방식에도 어려움이 있어 어느 한쪽으로만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이 말을 무조건적인 자기위안으로 만들거나, 하나님은 우리보다 더 엄격하게 정죄하신다는 뜻으로만 고정해서는 안 됩니다.
두 해석 사이에서 본문이 확실하게 말하는 것은 우리 마음이 최종적인 판단의 기준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잘못을 무시해서도 안 되지만, 자기 마음의 비난을 하나님의 최종 판단과 동일하게 여겨서도 안 됩니다. 그 하나님은 이미 자신의 아들을 통해 사랑을 보여 주신 아버지이십니다. 사랑의 행동은 진리에 속한 삶의 표지가 되지만, 우리의 확신은 자기 행동을 완벽하게 평가할 수 있다는 능력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거리낌 없이 구하는 사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마음이 우리를 나무라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거리낌 없이 말할 자유가 우리에게 있습니다.요한일서 3:21 · 본디새김
이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는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담대함입니다. 이 장에서 자녀 됨은 아버지의 사랑에서 시작되었으므로, 이 담대함을 인간의 도덕적 성취에 대한 보상으로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실제 삶과 무관하지도 않습니다. 사랑을 행위와 진리로 실천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감추거나 꾸밀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그분에게서 받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요한일서 3:22 · 본디새김
이 구절을 고립시켜 읽으면 순종하는 사람은 원하는 모든 것을 얻는다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은 자기 욕망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지 않습니다. 뒤의 5:14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구하면 그분이 들으신다고 말하므로, 3:22를 어떤 요구든 자동으로 이루어진다는 보장으로 읽기는 어렵습니다.
순종은 하나님을 움직이는 거래의 수단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은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며, 그 관계 안에서 구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계명을 지키라는 말이 여러 번 나왔지만, 그 계명이 무엇인지는 길게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 내용을 단 하나의 문장으로 밝힙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믿음과 사랑이다
그분의 계명은 이것입니다 —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분이 우리에게 계명을 주신 그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요한일서 3:23 · 본디새김
「그분의 계명」은 단수입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일과 서로 사랑하는 일, 두 가지입니다.
이 편지에서는 예수님에 관한 바른 믿음과 형제 사랑을 분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의 진실성에 문제가 생깁니다. 반대로 예수님에 관한 진리를 버리고 사랑만 남기겠다고 한다면 저자가 말하는 사랑의 근거를 잃게 됩니다. 믿음과 사랑은 서로를 대체하는 두 선택지가 아니라, 하나의 계명이 두 방향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
저자는 단순히 「하나님을 믿으십시오」라고 하지 않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라고 말합니다.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라는 인물이 역사에 존재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보다 깊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여기서 16절이 다시 중요해집니다.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고백은 그분이 보여 주신 사랑의 권위를 인정하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믿음에 나중에 덧붙이는 부가적인 미덕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머물고, 하나님도 우리 안에 머무신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물고 그분도 그 사람 안에 머무십니다. 또 그분이 우리 안에 머무신다는 것을 우리는 이것으로, 곧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그 영으로 압니다.요한일서 3:24 · 본디새김
사람이 하나님 안에 머물고,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머무십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다가가려고 애쓰는 모습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신다는 선언이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삶은 외부의 법을 준수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신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영으로 압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영」이 명시적으로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자기 능력만으로 하나님을 닮아 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으로 그들 안에 머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사실을 개인이 느끼는 특별한 감정만으로 확인할 수 있다고 저자가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장에서 하나님의 자녀를 알아보는 표지는 의로운 삶과 형제 사랑이었고, 영은 그러한 삶과 동떨어진 신비한 경험이 아니라 계명을 지키며 그분 안에 머무는 관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영을 분별하는 문제는 4장에서 본격적으로 다룹니다.
사랑을 보는 눈
요한일서 3장은 「보십시오」라는 말로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얼마나 큰 사랑을 주셨는지 보라고 했고, 장차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분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장의 중간에는 또 하나의 보는 장면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궁핍한 형제를 봅니다. 그에게는 재산이 있고, 그는 도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속을 닫아 버립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을 보도록 초대받습니다. 마지막에는 장차 그분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될 소망을 품습니다. 그 사이에서 우리는 지금 눈앞에 있는 형제를 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일과 형제의 궁핍을 외면하지 않는 일은 서로 다른 두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받은 한 생명이 드러나는 두 장면입니다.
그 닮아 감은 미래에만 속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보여 주신 사랑을 따라 지금 시작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모든 궁핍을 혼자 해결해야 한다거나, 가진 것을 모두 내놓아야만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이 요구하는 것은 자기 앞에 실제로 놓인 필요를 외면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삶의 시작과 끝에는 언제나 먼저 주어진 아버지의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 불리도록 아버지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셨는지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이제 그 자녀는 궁핍한 형제를 봅니다.
그리고 자기 속을 닫는 대신, 손을 엽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