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풀어 읽기 · 33장

이 장의 자리 · 25–36장 · 이삭과 야곱

형의 포옹과 동생의 절

야곱은 형 에서가 남자 400명과 함께 다가오는 모습을 봅니다. 오랫동안 두려워하던 순간이 마침내 찾아왔습니다.

두 형제는 서로를 끌어안고 울지만, 그 뒤에도 함께 길을 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만남은 완전한 화해인가, 아니면 잠시 적대감이 가라앉은 것입니까? 야곱은 여전히 형을 믿지 못합니까? 에서가 동생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이 장은 관계가 회복되는 순간의 기쁨을 생생하게 보여 주면서도, 그 뒤에 남아 있는 거리와 복잡함을 지우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형제의 포옹으로 이야기를 끝내지 않고, 야곱이 가나안 땅에 제단을 세우는 장면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읽는 시간 16분소단락 733장 본문 읽기 →

일곱 번 절하는 야곱과 달려오는 에서

창세기 33:1–4 본문 →

야곱은 눈을 들어 에서가 오는 것을 봅니다.

전날 밤 하나님과 씨름한 그는 이제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던 사람을 직접 마주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형을 만나는 일을 대신해 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두 여자 종과 그들의 아이들을 맨 앞에 세웠습니다. 그 뒤에는 레아와 그 아이들을, 맨 뒤에는 라헬과 요셉을 세웠습니다.창세기 33:2 · 두루새김

이 순서는 야곱의 가족 안에 존재하는 차이를 드러냅니다. 창세기는 이미 야곱이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했다고 설명했습니다(창세기 29:30). 따라서 맨 뒤쪽의 비교적 안전해 보이는 자리에 라헬과 요셉을 둔 것은 그들을 특별히 아끼는 마음과 연결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야곱이 실제로 누구를 희생시키려고 이런 순서를 정했는지는 본문이 말하지 않습니다. 앞에 선 사람들이 먼저 위험에 놓일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각 사람을 그 자리에 세운 이유를 모두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야곱은 그들보다 앞서 나아갔습니다. 형에게 가까이 가면서 일곱 번 땅에 엎드려 절했습니다.창세기 33:3 · 두루새김

앞장에서는 재산과 종들을 먼저 보냈지만, 정작 형과 마주하는 순간에는 자신이 가족보다 앞에 섭니다. 고대 근동에서 땅에 엎드리는 행동은 높은 지위의 사람에게 존경과 복종을 나타내는 방식이었습니다. 여러 차례 반복하는 절은 상대를 높이며 자신을 낮추는 행동입니다.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했을 때는 형제들이 그에게 절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창세기 27:29).

하지만 지금 절하고 있는 사람은 야곱입니다.

과거 야곱은 형보다 높은 자리를 얻으려 했습니다. 지금은 형 앞에서 스스로 몸을 낮춥니다. 이것이 순수한 회개의 표현인지,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방법인지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두 마음이 함께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에서가 달려옵니다.

지금까지 야곱은 에서가 어떤 행동을 할지 몰라 두려워했습니다. 남자 400명은 언제든 위협적인 군대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그 사람들의 행동을 전혀 묘사하지 않습니다.

에서는 야곱을 맞으러 달려와 끌어안고, 목을 감싸 안으며 입을 맞추었습니다. 두 사람은 울었습니다.창세기 33:4 · 두루새김

앞의 행동들은 모두 에서가 합니다. 그러나 눈물은 두 사람의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을 낮추어 형에게 다가갔고, 에서는 달려와 그 사이의 거리를 없앴습니다.

독자가 그동안 야곱의 이야기를 따라왔다고 해서, 에서를 단순히 야곱을 위협하는 악한 사람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받았다는 사실이 곧 에서의 모든 행동이 그릇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사람이 도덕적으로 더 낫고 못한 것을 곧바로 같다고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이 장은 잘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전해 내려온 마소라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입을 맞추었습니다」에 해당하는 단어 위에 특별한 점들이 찍혀 있습니다. 이 표기에 근거하여 후대에는 에서의 입맞춤이 진심이었는지 의심하는 해석도 생겼습니다. 반대로 진실한 애정의 표현으로 이해하는 읽기도 있습니다. 달려와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함께 우는 행동은 자연스럽게 형제의 다정한 재회로 읽힙니다. 그러나 이 점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형의 눈앞에 나타난 야곱의 가족

창세기 33:5–8 본문 →

포옹과 눈물이 지나간 뒤, 에서는 야곱의 가족을 바라봅니다.

에서가 눈을 들어 여자들과 아이들을 보고 물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너와 어떤 사이냐?」 야곱이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이 종에게 주신 아이들입니다.」창세기 33:5 · 두루새김

에서가 마지막으로 알던 야곱은 집을 떠나던 젊은 동생이었습니다. 이제 그의 앞에는 아내들과 아이들을 거느린 한 가족의 가장이 서 있습니다.

야곱은 자녀를 얻기 위해 오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의 가족은 경쟁과 갈등, 사랑과 시기, 아이를 낳는 일을 둘러싼 고통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창세기 29–30장은 그 과정이 얼마나 복잡했는지를 숨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제 야곱은 그 모든 이야기를 형에게 설명하는 대신, 아이들을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로 소개합니다.

이후 가족들은 차례로 나아와 절합니다. 두 여자 종과 아이들, 레아와 아이들, 마지막으로 요셉과 라헬입니다. 앞에서 세웠던 순서가 실제 만남의 순서로 이어집니다.

독자는 앞서 야곱이 가족 모두의 죽음을 두려워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두려워하던 그 순간, 가족들은 형 앞에서 인사를 나누고 있습니다.

에서가 물었습니다. 「내가 만난 그 가축 떼는 다 왜 보낸 것이냐?」 야곱이 대답했습니다. 「주인님께서 저를 좋게 보아 주시기를 바라며 보냈습니다.」창세기 33:8 · 두루새김

여기서도 야곱은 자신을 낮추는 표현을 유지합니다. 반면 에서는 야곱에게 별다른 조건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는 선물의 의미를 듣고도 곧바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제 이 만남은 서로의 재산과 복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로 이어집니다.

「내게도 많이 있다」와 「제게는 모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3:9–11 본문 →

에서가 말합니다.

에서가 말했습니다. 「동생아, 내게도 많이 있다. 네 것은 네가 가져라.」창세기 33:9 · 두루새김

야곱은 계속해서 에서를 「주인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에서는 야곱을 종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는 동생이라고 부릅니다.

이 부름은 앞서 서로를 끌어안고 울었던 행동과 어울립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에서는 야곱을 자신에게 복종해야 하는 사람으로만 대하지 않습니다.

에서는 자신이 가난하거나 부족하기 때문에 동생의 선물을 받아야 하는 처지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과거의 형제 갈등은 맏아들의 권리와 아버지의 축복을 누가 차지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폭발했습니다. 한 사람이 얻는 것이 다른 사람이 잃는 것으로 이어지는 경쟁이었습니다.

과거에는 서로 빼앗거나 빼앗길까 두려워했던 형제들이, 이제 서로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놓거나 돌려주려고 합니다.

야곱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야곱이 말했습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저를 좋게 보아 주신다면 이 선물을 받아 주십시오. 주인님의 얼굴을 뵙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것 같았고, 주인님께서 저를 반갑게 받아 주셨기 때문입니다.」창세기 33:10 · 두루새김

앞장에서 야곱은 자신이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했는데도 목숨을 건졌다고 고백했습니다(창세기 32:30). 그 경험에 비추어 보면, 형의 얼굴을 마주한 뒤에도 자신이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은 야곱에게 매우 특별하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야곱은 두 만남 모두에서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두 만남에서 모두 예상하지 못했던 호의를 경험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에서는 복을 받았고, 형과의 만남에서는 환영을 받았습니다.

야곱이 두려워하던 형의 얼굴은 이제 자신을 받아들이는 얼굴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내 드린 이 선물을 꼭 받아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제게 은혜를 베푸셨고, 제게는 모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거듭 권하자 에서는 선물을 받았습니다.창세기 33:11 · 두루새김

그러나 야곱은 자신의 만족을 하나님의 은혜와 직접 연결합니다. 복을 받기 위해 남의 것을 차지하려 했던 야곱이, 이제는 하나님께 충분히 받았으므로 자기 것을 내어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선물이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은 야곱에게 의미가 큽니다. 그는 형에게 자신의 호의와 존중을 표현하려 했고, 형은 그것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형은 동생을 받아들였고, 동생이 내민 선물도 받았습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에서는 앞서 선물을 가리키던 말 대신 축복을 뜻하는 말을 씁니다. 이 말은 상대에게 가져다주는 선물을 가리키는 데에도 사용됩니다. 따라서 여기서 반드시 축복의 권리를 돌려준다는 뜻으로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창세기의 이야기 안에서 복이라는 말이 지닌 무게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때 야곱은 형의 몫이라고 여겨졌던 축복을 속임수로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이 가진 것 가운데 일부를 형에게 내어놓으면서, 원문에서는 그것을 축복을 뜻하는 말로 부릅니다. 여기서 「모든 것」을 야곱이 세상의 모든 재산을 가졌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충분하다는 뜻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두 표현의 차이만으로 에서는 물질적인 사람이고 야곱은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내려서도 안 됩니다. 에서 역시 자신의 재산이 충분하다며 동생에게 너그럽게 행동합니다.

화해했지만 함께 걷지는 않는다

창세기 33:12–16 본문 →

이야기가 여기서 끝났다면 독자는 두 형제가 함께 길을 떠났으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창세기는 그 뒤의 대화를 기록합니다.

에서가 말했습니다. 「이제 길을 떠나자. 내가 네 앞에서 가마.」창세기 33:12 · 두루새김

이 제안은 적대적인 명령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형이 동생에게 함께 가자고 제안하는 말입니다.

야곱은 거절하지 않는 듯하면서도 다른 계획을 내놓습니다.

야곱이 대답했습니다. 「주인님도 아시듯이, 아이들은 몸이 약합니다. 또 저는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양과 염소와 소를 돌보고 있습니다. 하루만 거칠게 몰아붙여도 양과 염소가 모두 죽을 것입니다.」창세기 33:13 · 두루새김

어린 아이들과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가축들은 건장한 남자들의 이동 속도를 따라가기 어렵습니다. 특히 새끼를 돌보는 가축들을 무리하게 이동시키면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주인님께서 이 종보다 먼저 가십시오. 저는 제 앞에 있는 가축과 아이들의 걸음에 맞추어 천천히 가서, 세일에서 주인님을 뵙겠습니다.」창세기 33:14 · 두루새김

무리 가운데 가장 느리고 약한 존재들이 전체 이동의 속도를 결정하게 하는 방식입니다. 그들이 야곱의 재산이고 가족인 동시에, 야곱이 돌보아야 할 대상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에서는 그 말을 듣고 사람들을 남겨 주겠다고 제안합니다. 야곱은 그것도 사양합니다. 결국 에서는 그날 세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다음 절을 보면 야곱은 세일로 가지 않습니다.

야곱은 형에게 세일로 가겠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숙곳과 세겜으로 향합니다.

두 형제는 기쁨으로 재회했지만, 계속해서 함께 살아가거나 여행하지는 않았습니다.

서로를 받아들이는 것과 언제나 같은 길을 가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에서도 자기 삶과 사는 곳이 있었고, 야곱에게도 가족과 가축을 돌보며 가야 할 길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의 적대감이 없어졌다고 하더라도, 각자의 삶이 하나로 합쳐질 필요는 없었습니다.

다만 야곱의 마음이 완전히 평안했는지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앞장에서 그토록 두려워했던 형을 만난 직후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거리를 두고 싶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한 번의 따뜻한 만남이 관계의 모든 문제를 즉시 해결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따뜻한 만남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사실도 약화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한 가지 읽기는 야곱이 형과 함께 가는 것을 피하려고 세일에 가겠다는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는 이 만남 뒤 야곱이 세일에 가서 형을 다시 만났다는 이야기를 전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읽기는 야곱이 그때는 세일로 갈 생각이었으나 이후에 계획을 바꾸었거나, 먼 훗날의 방문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입니다. 야곱의 말 자체에는 정확한 도착 날짜가 없습니다. 또한 이후의 모든 행적이 창세기에 기록되었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야곱이 처음부터 거짓말을 했다고 확정하는 것도, 약속을 실제로 지켰다고 말하는 것도 본문 이상의 판단입니다.

숙곳과 세겜 — 도망자의 생활에서 정착하는 생활로

창세기 33:17–19 본문 →

형과 헤어진 야곱은 숙곳으로 갑니다.

야곱은 숙곳으로 가서 자기가 살 집을 짓고, 가축들을 위해 움막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의 이름을 숙곳이라고 했습니다.창세기 33:17 · 두루새김

숙곳(숙코트)은 움막이나 초막을 뜻하는 말의 복수형입니다. 그가 이곳에 얼마나 오래 머물렀는지는 밝혀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집을 지었다는 표현은 단순히 지나가는 여행자처럼 잠시 머무는 것과는 다른 정착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라반의 집에서는 품삯과 가축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다투었습니다. 그곳을 떠난 뒤에는 쫓기는 처지가 되었고, 형을 만나는 문제로 두려워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자기 가족과 가축을 위한 거처를 마련합니다.

밧단 아람을 떠나온 야곱은 가나안 땅의 세겜 성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그는 성 앞에 천막을 쳤습니다.창세기 33:18 · 두루새김

이 표현은 오래전 야곱이 벧엘에서 했던 서원을 떠올리게 합니다. 창세기 28:20–21에서 야곱은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하시고 지켜 주셔서 아버지의 집으로 평안히 돌아오게 하시면 어떻게 하겠다고 서원했습니다.

그때 야곱은 고향을 떠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그는 가나안 땅에 무사히 돌아온 사람입니다.

아직 아버지의 집에 도착한 것은 아니므로 서원의 모든 내용이 이 순간 완결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이 야곱의 길을 지켜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과 그의 실제 귀환이 연결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어서 야곱은 땅을 삽니다.

야곱은 천막을 친 땅을 하몰의 아들들에게서 100크시타에 샀습니다. 하몰은 세겜이라는 사람의 아버지였습니다.창세기 33:19 · 두루새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 가운데 하나는 가나안 땅을 후손에게 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창세기 12:7; 17:8). 그러나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의 시대에 그들은 그 땅 전체를 소유한 지배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를 묻기 위해 막벨라의 밭과 굴을 값을 치르고 샀습니다(창세기 23장).

약속된 땅이라고 해서 야곱이 다른 사람의 소유를 마음대로 차지하지는 않습니다.

그가 차지한 것은 가나안 전체가 아니라 들판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그 작은 땅은 그가 이제 이곳에서 살아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아브라함이 처음 가나안 땅에 들어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장소 가운데 하나가 세겜이었습니다(창세기 12:6–7).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여러 세대가 지난 지금, 야곱도 세겜 근처에 이르러 땅을 얻습니다.

창세기는 서로 떨어진 두 세대의 이야기를 같은 땅 위에서 연결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제단이 세워집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샬렘(⁨שָׁלֵם⁩)은 온전함이나 평안한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 자리를 지명으로 읽는 전통도 있으나, 두루새김은 「무사히 도착했습니다」라고 옮겨 야곱이 안전한 상태로 도착했다는 뜻을 나타냈습니다. 크시타라는 단위의 구체적인 가치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엘 엘로헤 이스라엘 — 조상의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이 되다

창세기 33:20 본문 →

창세기 33장의 마지막 문장은 짧습니다.

야곱은 그곳에 제단을 세우고, 그 이름을 엘 엘로헤 이스라엘이라고 지었습니다.창세기 33:20 · 두루새김

고향을 떠나던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며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셨습니다(창세기 28:13).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야곱이 형을 두려워하며 기도했을 때도, 그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며 이삭의 하나님을 불렀습니다(창세기 32:9).

그런데 이제 제단의 이름에는 새로운 표현이 등장합니다.

「엘 엘로헤 이스라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이스라엘은 앞장에서 그가 하나님과 씨름한 뒤 받은 이름입니다.

야곱은 더 이상 하나님을 조상들의 하나님으로만 고백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새로 주어진 이름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부릅니다.

여기에는 창세기 28장의 벧엘 경험과도 중요한 연결이 있습니다. 그때 야곱은 돌을 세우고 기름을 부으며 서원했습니다. 자신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다면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조건을 담은 서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더 이상 그런 조건문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야곱은 이미 돌아왔고, 땅을 얻었으며, 제단을 세웠습니다. 그의 행동은 미래의 안전을 구하는 약속이 아니라 지나온 삶에 응답하는 예배의 모습으로 읽힙니다.

그렇다고 해서 벧엘에서의 서원이 여기서 완전히 이행되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창세기 35장에서 하나님은 다시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 제단을 세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엘 엘로헤 이스라엘은 문법적으로 「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다」라는 고백문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두 읽기는 문법적으로 구별되지만, 이 장면에서 전달하는 중심 의미는 비슷합니다. 야곱이 자신에게 새 이름을 주신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왔지만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창세기 33:1–20 본문 →

이 장이 보여 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여기까지 이끄셨다는 약속의 신실함과, 그 약속을 받은 야곱의 삶이 여전히 복잡하게 펼쳐진다는 사실입니다. 에서가 동생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두 사람이 계속 함께 살게 된 것도 아닙니다. 가나안 땅에 무사히 도착했다고 해서 앞으로 그곳에서 어떠한 문제도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에서의 마음을 직접 변화시키셨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에서가 왜 동생을 따뜻하게 맞이했는지, 그 마음이 언제 어떻게 달라졌는지도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야곱이 실제로 형을 만나 해를 입지 않았고, 그 경험을 하나님의 은혜와 연결하여 이해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창세기 33장은 두 형제가 끌어안고 우는 장면에서 가장 큰 감정의 절정에 이릅니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은 그보다 훨씬 조용합니다.

에서는 세일로 돌아갔습니다. 야곱도 자기 길을 갔습니다. 그를 둘러싼 가족과 가축들이 함께 움직였고, 그는 숙곳을 거쳐 세겜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천막을 친 땅에 제단을 세웠습니다.

형의 얼굴을 두려워하며 돌아오던 사람은 마침내 형의 품에 안겼고, 가나안 땅에 도착하여 제단을 세웠습니다.

그가 돌아온 곳은 조상에게 약속된 땅이었고, 그곳에서 그가 부른 이름은 자신의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