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풀어 읽기 · 32장
이 장의 자리 · 25–36장 · 이삭과 야곱
형의 얼굴을 보기 전에 하나님과 마주하다
야곱은 형 에서를 만나기 위해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형과의 만남 자체가 아닙니다.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형에게서 장자의 복을 가로챘고, 형의 분노를 피해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야곱에게는 이제 아내들과 자녀들, 수많은 가축과 종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재산이 늘어났다고 해서 과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야곱은 돌아오는 길에 하나님께 보호를 구합니다. 형에게 선물을 보내고, 가족을 나누어 배치하고, 여러 차례에 걸쳐 형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려 합니다. 그런데 정작 형을 만나기 직전, 뜻밖의 일이 벌어집니다.
형의 얼굴을 보려고 준비하던 야곱이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말을 듣지만, 다리를 절게 됩니다. 복을 받았으나 상처도 입습니다. 새로운 이름을 얻었으나 예전의 이름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어떻게 이것을 승리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진영을 보았지만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라반과의 관계가 정리되면서 야곱은 다시 길을 떠납니다. 라반은 딸들과 손주들에게 입 맞추고 돌아갑니다. 지난 장에서 야곱을 뒤쫓았던 사람이 이제 자기 길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과의 갈등이 끝나자 다른 사람과의 갈등이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야곱이 길을 가는 동안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를 만납니다.
야곱은 그들을 보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진영이구나!」 그는 그곳의 이름을 마하나임이라고 지었습니다.창세기 32:3 · 두루새김
마하나임은 「두 진영」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지명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 속한 진영이 등장합니다. 그다음에는 야곱이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진영을 둘로 나눕니다. 앞의 장면은 하나님이 야곱의 길에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지만, 뒤의 장면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위험 앞에서 흔들리는 야곱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2절의 「하나님의 천사들」과 4절에서 야곱이 형에게 보낸 「사람들」은 히브리어 원문에서 모두 같은 명사인 말아킴(מַלְאָךְ)으로 표현됩니다. 이 말은 기본적으로 보냄을 받은 이들을 가리킵니다. 문맥에 따라 하늘의 천사일 수도 있고 사람이 보낸 심부름꾼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들은 그를 만났지만, 형에게서 돌아온 사람들이 전하는 소식은 그를 안심시키지 못합니다.
그 사람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말했습니다. 「주인님의 형님 에서에게 다녀왔어요. 형님도 주인님을 만나러 오고 계세요. 남자 400명이 함께 있어요.」창세기 32:7 · 두루새김
이 말에는 에서가 야곱을 죽이겠다고 했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에서가 어떤 목적으로 400명을 데리고 오는지도 밝혀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야곱에게 400명은 무서운 숫자입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형을 떠날 때, 형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창세기 27:41–43). 형의 마음이 바뀌었다는 확실한 소식도 받지 못했습니다. 야곱이 예상하는 재앙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야곱은 즉시 대비합니다.
야곱이 말했습니다. 「에서가 한 진영을 공격하면, 남은 진영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창세기 32:9 · 두루새김
이것은 현실적인 위기 대응입니다. 야곱은 모든 것을 한곳에 모아 두었다가 한꺼번에 잃는 일을 막으려 합니다. 그의 행동을 믿음이 없다는 말로 간단히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보호를 약속하셨다고 해서 위험을 무시해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 속에서 야곱은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지팡이 하나에서 두 진영까지 — 야곱의 기도가 달라졌다
이전에도 야곱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었습니다. 벧엘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서원을 했습니다(창세기 28:20–22). 그러나 여기서는 그때보다 훨씬 직접적으로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께 드러냅니다.
야곱이 기도했습니다. 「제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 제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제게 『네 땅으로, 네 친척들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잘해 주겠다.』 하고 말씀하신 여호와야훼여,」창세기 32:10 · 두루새김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단지 고향이 그리워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돌아가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창세기 31:3). 성경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길이 언제나 위험 없는 길이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돌아가라고 하신 바로 그 길에서 자신이 두려워하던 과거와 마주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곧 고백으로 바뀝니다.
「주님께서 이 종에게 베풀어 주신 그 모든 사랑과 신의를 받기에 저는 너무나 보잘것없습니다. 저는 지팡이 하나만 가지고 이 요단강을 건넜는데, 이제는 두 진영을 이루게 되었습니다.」창세기 32:11 · 두루새김
야곱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푸신 것을 「사랑」과 「신의」라는 두 가지 말로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좋게 대해 주셨을 뿐 아니라, 그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 오셨다는 고백입니다.
앞에서는 두 진영이 야곱의 두려움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기도에서는 같은 두 진영이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켜 오셨음을 보여 줍니다.
똑같은 재산이 야곱의 눈에는 잃을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을 기억할 때에는 이미 받은 은혜의 증거가 됩니다.
두 관점은 서로를 지우지 않습니다. 야곱은 감사하면서도 여전히 두렵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장 솔직한 말을 꺼냅니다.
「제 형 에서의 손에서 저를 구해 주십시오. 형이 와서 저뿐 아니라 아이들과 그 어머니들까지 공격할까 봐 두렵습니다.」창세기 32:12 · 두루새김
「아이들과 그 어머니들까지 공격할까 봐」라는 표현은 어머니와 자녀를 함께 공격하는 끔찍한 폭력을 떠올리게 합니다. 야곱의 두려움은 자신이 살아남는 문제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붙듭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반드시 네게 잘해 주고, 네 후손을 너무 많아 셀 수 없는 바닷가의 모래처럼 만들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창세기 32:13 · 두루새김
「바닷가의 모래」라는 표현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에도 나타납니다(창세기 22:17). 야곱의 기도는 자신이 받은 말씀과 조상에게 주어진 약속의 말을 함께 떠올립니다.
그가 호소하는 근거는 자신이 잘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약속입니다.
과거 그는 장자의 복을 얻기 위해 형과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에게 복을 주신 하나님께 그 복을 지켜 달라고 간청합니다.
형의 얼굴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기도를 마친 야곱은 에서에게 보낼 선물을 준비합니다.
암염소와 숫염소, 암양과 숫양, 낙타와 소, 나귀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의 가축이 등장합니다. 가축들을 여러 떼로 나누고, 각 떼 사이를 띄워서 가게 합니다. 앞서 가는 종뿐 아니라 뒤따르는 종들에게도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합니다.
「이렇게 대답하여라. 『주인님의 종 야곱의 것입니다. 주인님이신 에서께 보내는 선물입니다. 야곱도 저희 뒤에 오고 있습니다.』」창세기 32:19 · 두루새김
계획의 핵심은 에서가 야곱을 직접 만나기 전에 여러 차례 선물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한순간의 선물보다 여러 번에 걸친 만남이 형의 마음에 더 큰 영향을 줄 것으로 기대한 듯합니다.
과거 이삭은 야곱에게 형제들을 다스리고 형제들이 그에게 절하게 될 것이라는 축복을 주었습니다(창세기 27:29). 그런데 이제 야곱은 형을 주인으로 부르며 자신을 낮춥니다. 이것은 단순히 겸손해졌다는 증거만은 아닙니다. 상대를 달래려는 외교적인 표현이기도 합니다.
형보다 높은 자리에 서려고 했던 야곱이 이제 형 앞에서 낮은 자리에 서려고 합니다.
「또 『주인님의 종 야곱도 저희 뒤에 오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야곱이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먼저 보내는 선물로 형의 마음을 누그러뜨린 다음에 형을 만나야겠다. 그러면 형이 나를 받아 줄지도 모른다.」창세기 32:21 · 두루새김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얼굴」을 뜻하는 파님(פָּנִים)이 여러 차례 반복됩니다. 직역에 가깝게 표현하면 형의 「얼굴을 누그러뜨리고」, 그다음 「얼굴을 보고」, 어쩌면 형이 자기 「얼굴을 들어 줄」 것이라는 말입니다. 두루새김은 이 표현들을 「형의 마음을 누그러뜨린 다음에 형을 만나야겠다」와 「형이 나를 받아 줄지도 모른다」로 풀어 옮겼습니다.
누군가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그 사람 앞에 나아가 관계를 맺는다는 뜻을 지닙니다. 상대가 자신의 얼굴을 들어 준다는 것은 좋게 여기며 받아 준다는 의미가 됩니다.
야곱은 자신이 준비한 선물로 형의 마음을 반드시 바꿀 수 있다고 확신하지 않습니다. 모든 계획을 세웠지만 결과는 여전히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관계에서 그가 맞닥뜨린 한계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장면에서 이야기는 뜻밖의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야곱이 형의 얼굴을 보기 전에, 누군가가 밤중에 그를 찾아옵니다.
홀로 남은 야곱 — 밤의 씨름
야곱은 밤에 일어나 가족들과 소유를 얍복강의 건널목 건너편으로 보냅니다.
그가 왜 이 시각에 강을 건너게 했는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가족들과 소유물이 강을 건너는 모습을 보여 준 뒤, 짧은 문장 하나로 모든 움직임을 멈춥니다.
야곱은 혼자 남았습니다. 어떤 남자가 동이 틀 때까지 야곱과 씨름했습니다.창세기 32:25 · 두루새김
그의 곁에는 아내들과 자녀들, 여자 종들, 남자 종들, 많은 가축 떼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들을 나누고, 배치하고, 앞으로 보내고, 뒤에 남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에게는 아무도 없습니다.
본문은 처음부터 그 사람을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지 않습니다. 그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왜 야곱과 씨름하기 시작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독자는 야곱과 마찬가지로 상대의 정체를 알지 못한 채 씨름을 지켜보게 됩니다.
그 남자는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건드렸습니다. 둘이 씨름하는 동안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어긋났습니다.창세기 32:26 · 두루새김
어떻게 야곱을 이길 수 없었던 자가 단 한 번의 접촉으로 그를 다치게 할 수 있을까요?
본문은 이 역설을 풀어 주지 않습니다.
그 남자가 말했습니다. 「동이 텄으니 나를 놓아주어라.」 야곱이 대답했습니다. 「제게 복을 주시지 않으면 놓아드리지 않겠습니다.」창세기 32:27 · 두루새김
여기서 씨름의 성격이 바뀝니다.
이제 야곱이 원하는 것은 상대를 쓰러뜨리는 일이 아닙니다. 복을 받는 일입니다. 그는 다리를 다쳤지만 상대를 놓지 않습니다.
여기서 복을 받는다는 것은 단순한 성공이나 재산의 증가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야곱은 이미 풍부한 재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복을 달라고 합니다.
지금 그에게는 재산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다.
형과의 관계, 자기 가족의 생존,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이 앞으로 어떻게 이어질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본문은 야곱이 구체적으로 어떤 복을 요구했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미 많은 것을 얻은 사람인데도 절박하게 복을 구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씨름의 상대는 뜻밖의 질문을 던집니다.
조금 더 깊이
한편으로 야곱은 밤새 버텼습니다. 상대는 그를 쉽게 굴복시키지 못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상대에게는 야곱을 순식간에 다치게 할 수 있는 힘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야곱이 강한 힘으로 하나님을 제압했다고 읽는 것은 이 장면 전체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그 남자가 물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 대답했습니다. 「야곱입니다.」창세기 32:28 · 두루새김
창세기 25:26에서 야곱은 태어날 때 형 에서의 발꿈치를 붙잡고 있었습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그 장면과 연결됩니다. 창세기 27:36에서는 형 에서가 야곱이라는 이름을 언급하면서, 동생이 자신을 두 번 속였다고 말합니다. 이름과 속이는 행동을 연결하는 말장난입니다.
따라서 그가 자기 이름을 말하는 순간, 독자는 그의 출생과 형을 둘러싼 과거를 함께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 남자가 말했습니다. 「이제 네 이름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 불릴 것이다. 네가 하나님과도 사람들과도 겨루어 이겼기 때문이다.」창세기 32:29 · 두루새김
그는 형과 겨루었고, 외삼촌 라반과 오랜 세월 다투었으며, 이제 하나님과도 겨루었습니다. 야곱은 실제로 상처를 입었습니다. 씨름의 상대를 완전히 제압한 것도 아닙니다. 그는 상대에게 복을 간청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상대는 야곱이 이겼다고 말합니다.
야곱은 상대를 자기 뜻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이긴 것이 아니라, 끝까지 매달린 자리에서 복을 받았기 때문에 승리자로 불립니다.
그런데 야곱도 상대의 이름을 묻습니다.
야곱이 물었습니다. 「이름을 알려 주십시오.」 그 남자가 대답했습니다. 「어째서 내 이름을 묻느냐?」 그러고는 그곳에서 야곱에게 복을 주었습니다.창세기 32:30 · 두루새김
상대는 야곱의 이름을 묻고 그에게 새로운 이름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상대의 이름을 알아내지 못합니다.
야곱에게는 상대를 자기 이해 안에 완전히 붙잡아 둘 능력이 없습니다.
상대는 자신을 모두 설명하지 않았지만, 야곱의 간청은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야곱이 받은 것은 모든 의문에 대한 해답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복을 받았습니다.
조금 더 깊이
새 이름을 받았다고 해서 야곱의 성격이 단번에 완전히 변화했다고 본문이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창세기는 이후에도 그를 야곱이라고 부르며, 창세기 35:10에서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다시 선언됩니다. 새 이름은 그의 이전 삶이 흔적 없이 사라졌다는 선언이라기보다, 하나님이 그에게 새로운 정체성과 미래를 주시는 사건으로 읽는 편이 본문에 가깝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도 살아남았다
씨름이 끝나자 야곱은 그곳에 이름을 붙입니다.
야곱은 그곳의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지으며 말했습니다. 「내가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하여 뵙고도 목숨을 건졌구나!」창세기 32:31 · 두루새김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제 앞에서 원문에 반복되던 「얼굴」이라는 말이 새로운 의미로 돌아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이겼다고 자랑하는 대신, 하나님을 보고도 목숨을 건졌다고 말합니다.
승리의 선언보다 생존에 대한 놀라움이 앞섭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얼굴은 두려움과 복이 함께 존재하는 자리였습니다. 창세기 33:10에서 야곱은 에서의 얼굴을 보는 일을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에 비유하게 됩니다. 두 얼굴의 연결은 다음 장에서 분명해지지만, 그 연결을 준비하는 것은 바로 이 밤의 경험입니다.
이것이 형과의 관계가 반드시 회복될 것이라는 보장은 아닙니다. 본문은 아직 에서의 마음을 알려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제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형을 만날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출애굽기 33:20에서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아남을 수 없다는 말이 등장합니다. 사사기 6:22–23에서도 기드온은 하나님의 천사를 보았다는 사실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평안을 약속받습니다. 다만 야곱이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을 보았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후대의 호세아 12:3–4는 야곱의 이 사건을 돌아보면서 그가 하나님의 천사와 겨루었다고 말합니다. 창세기의 「남자」와 야곱이 말한 「하나님」, 호세아가 말한 천사는 함께 읽을 수 있지만, 각각의 본문이 선택한 표현도 그대로 보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해가 떠올랐지만 야곱은 절뚝거렸다
마지막 장면은 놀라울 만큼 조용합니다.
야곱이 브누엘을 지날 때 해가 떠올라 그를 비추었습니다. 그는 다친 허벅지 때문에 절뚝거렸습니다.창세기 32:32 · 두루새김
이 장면은 창세기 28장의 벧엘 이야기와도 대조를 이룹니다. 그때 야곱은 해가 져서 한곳에 머물렀습니다(창세기 28:11). 그는 돌을 베개 삼아 잠들었고, 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들었습니다.
그때는 돌을 베고 잠들었다가 깨어났지만, 지금은 밤새 씨름한 뒤 다리를 절며 걸어갑니다. 벧엘에서는 하나님이 먼저 약속하셨습니다. 얍복강에서는 야곱이 하나님께 매달려 복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은 몸에 흔적을 남겼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야곱의 죄를 벌하시려고 다리를 다치게 하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상처를 복 자체와 같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본문은 복과 상처를 나란히 놓을 뿐, 그 관계를 하나의 공식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다음 33절은 갑자기 야곱 개인의 이야기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관습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은 오늘날까지 허벅지 관절에 있는 힘줄을 먹지 않습니다. 그 남자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에 있는 그 힘줄을 건드렸기 때문입니다.창세기 32:33 · 두루새김
여기서 「오늘날까지」는 이 이야기를 전하는 공동체의 현재를 가리킵니다. 야곱 개인의 경험이 공동체의 기억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가 기억하는 조상의 모습은 흠 없는 영웅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씨름하다 다리를 다친 사람의 모습입니다.
조금 더 깊이
호세아 12:3–6은 야곱이 태중에서 형의 발꿈치를 붙잡았던 일과 하나님과 겨루었던 일을 함께 돌아봅니다. 특히 야곱이 울며 은혜를 구했다는 표현을 덧붙입니다. 창세기 32장 자체에는 야곱이 울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것은 후대 예언자가 이 사건을 해석하면서 전하는 내용입니다. 호세아는 그 기억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 돌아가고 사랑과 정의를 지키라고 촉구합니다. 야곱의 이야기는 후손들이 자기 조상의 뛰어난 힘을 자랑하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 의지해야 하는 자신들의 처지를 되돌아보게 하는 이야기가 됩니다.
야곱의 승리는 무엇을 보여 주는가
야곱은 이번에는 자기 힘으로 복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복을 주실 수 있는 분에게 복을 구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는 데 성공한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자신의 한계를 드러낸 사람입니다. 본문은 과거의 문제를 지우지 않은 채, 하나님이 그에게 새로운 미래를 열어 주시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끝까지 매달리면 원하는 것을 반드시 얻는다는 성공의 원리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야곱이 실제로 얻은 복은 그가 처음부터 계획한 내용과 같지 않습니다. 그는 형에게서 안전하게 살아남기를 구했고, 하나님과의 만남에서는 새로운 이름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32장은 에서가 야곱을 어떻게 맞이했는지 아직 말하지 않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 장에 남겨 둡니다.
성경은 야곱이 얼마나 당당하게 일어섰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이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걸음걸이를 기록합니다.
해는 떠올랐고, 야곱은 절뚝거렸습니다.
그는 여전히 앞으로 걸어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이름이 있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