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3장 · 혼인에 빗댄 이야기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다
호세아서는 한 가정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한 남자가 결혼하고, 아이들이 태어나고, 아버지가 아이들의 이름을 짓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들은 축복이나 기쁨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첫째 아이는 피 흘린 땅의 이름을 받고, 둘째 아이는 자비를 받지 못한다는 이름을 받으며, 셋째 아이는 아예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이름을 받습니다.
왜 하나님은 한 가정의 가장 사적인 자리에 이토록 무거운 말씀을 두셨을까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 자체가 한 가정의 관계를 통해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단지 율법을 어긴 백성으로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자신과 맺은 관계를 저버린 백성으로 말씀하십니다.
왕국의 몰락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결국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가」라는 질문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번영하던 나라에 들려온 멸망의 말씀
호세아서는 여러 왕의 이름을 나열하면서 시작합니다. 유다의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그리고 이스라엘의 여로보암입니다.
여기서 여로보암은 북왕국을 처음 세운 여로보암이 아니라,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 2세입니다. 열왕기하 14:23–29에 따르면 여로보암 2세 시대의 이스라엘은 상당한 영토를 회복했습니다. 한때 아람의 압박 아래 약해졌던 북왕국이 다시 나라의 힘을 되찾은 것입니다.
그러나 열왕기하는 그 왕을 평가하면서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일을 했으며, 이스라엘을 죄에 빠뜨렸던 옛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기록합니다(열왕기하 14:24).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회복되고 있었지만, 그 회복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 있다는 증거는 아니었습니다.
호세아의 첫째 아들에게 주어질 이름은 바로 이 간격을 드러냅니다. 왕조가 굳건해 보이는 시대에 하나님은 그 왕조의 끝을 선언하실 것입니다.
한편 1절에는 유다 왕들이 네 명이나 나열되어 있습니다. 이 첫머리는 호세아의 말씀이 놓인 긴 역사적 범위를 보여 주지만, 이 장의 결혼과 세 자녀의 출생이 모두 어느 왕의 통치 기간에 일어났는지까지 알려 주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왜 호세아에게 이런 결혼을 명령하셨는가?
여호와야훼께서 처음 호세아를 통해 말씀하실 때, 호세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음행하는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음행의 자녀들을 두어라. 이 땅의 백성이 여호와야훼를 따르던 길에서 떠나 심하게 음행하고 있기 때문이다.」호세아 1:2 · 두루새김
호세아서에서 처음으로 주어지는 명령은 백성에게 설교하라는 것도, 왕을 찾아가 책망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아내를 맞아들이고 자녀들을 두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고멜이라는 여자의 잘못을 설명하면서 결혼을 명령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 땅의 백성이 여호와야훼를 따르던 길에서 떠나 심하게 음행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고멜의 이야기를 가지고 이스라엘의 문제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관계를 배반했다는 사실이 호세아의 가정을 이해하는 출발점이 됩니다.
음행이라는 말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이 장은 그 행위를 구체적으로 나열하지 않지만, 표현 속에 중요한 단서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음행하는 것은 「여호와야훼를 따르던 길에서 떠나」 행하는 일입니다. 단순히 성적인 방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맺은 관계를 저버리는 일이 핵심입니다.
이 비유는 결혼을 언약 관계의 언어로 사용합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 신실함이 요구되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자신을 구원하시고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하나님께 신실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다른 신들에게 의지하고, 하나님이 아닌 존재에게서 자신의 삶을 보장받으려 합니다.
원문에서는 「이 땅」이 음행한다고 말하여 그곳에 살아가는 공동체 전체를 가리킵니다. 언약을 저버린 일이 한 사람의 일탈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회 전체에 퍼진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고멜은 결혼하기 전부터 음행했는가?
본문은 「음행하는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이고」라고 명령하지만, 고멜이 언제 어떤 일을 했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는 호세아가 이미 그러한 삶을 살고 있는 여자를 아내로 맞이했다는 읽기입니다. 명령의 표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가능한 해석입니다. 다른 하나는 결혼 이후 드러날 불성실함을 앞서 표현한 것이라는 읽기입니다. 호세아의 가정이 앞으로 이스라엘의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을 미리 밝힌 말로 이해합니다.
1:2–3만으로 어느 쪽인지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호세아는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고멜은 임신하여 호세아의 아들을 낳았습니다.호세아 1:3 · 두루새김
호세아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 명령을 듣고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고멜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기록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침묵 속에서 이야기는 곧바로 첫 아이의 출생으로 넘어갑니다.
이제 말로 선포된 하나님의 심판이 한 아이의 이름이 됩니다.
조금 더 깊이
2절의 히브리어에는 같은 동사가 반복됩니다. 같은 동사를 겹쳐 그 행위가 두드러지거나 심각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두루새김이 「심하게 음행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옮긴 것은 이러한 강조를 살린 것입니다. 또 「음행의 자녀들」이라는 표현만으로 자녀들이 다른 남자에게서 태어났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3절은 첫째 아들에 관하여 분명히 「호세아의 아들을 낳았습니다」라고 말하고, 뒤의 두 아이에 대해서는 그와 같은 표현을 반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차이만으로 누가 친아버지인지 판단하기에는 근거가 부족합니다.
이스르엘 — 승리의 역사가 심판의 증거가 되다
여호와야훼께서 호세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고 하여라. 머지않아 내가 이스르엘에서 피를 흘리게 한 책임을 예후 집안에 묻고, 이스라엘 왕국을 끝내겠다.」호세아 1:4 · 두루새김
이스르엘은 단순한 지명이 아니었습니다. 왕권과 피 흘림의 기억이 깊이 새겨진 곳이었습니다.
이스르엘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열왕기상 21장에서 이스르엘 사람 나봇은 자기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포도원을 아합 왕에게 넘기지 않으려다가, 이세벨이 꾸민 거짓 고발로 죽임을 당합니다. 그 뒤 열왕기하 9–10장에서 예후는 아합 집안을 무너뜨립니다. 그는 이스르엘에서 요람 왕을 죽이고, 이세벨의 죽음에도 관여하며, 아합 집안의 사람들을 제거합니다.
예후의 행동은 앞서 아합 집안에 대해 선포된 하나님의 심판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실제로 열왕기하 10:30에서 하나님은 예후가 아합 집안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일을 인정하시고, 그의 자손들이 사 대에 걸쳐 왕위에 앉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호세아 1:4에서는 「이스르엘에서 피를 흘리게 한 책임」을 예후 집안에 물으십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한 역사조차 그 수행자에게 영구적인 정당성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이스르엘은 예후 왕조가 권력을 얻었던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 이름을 통해 예후 왕조의 끝을 선언하십니다.
한때 왕조의 시작을 보여 주었던 장소가 이제 왕조의 심판을 예고하는 표지가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활을 부러뜨리겠다」
「그날에 내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부러뜨리겠다.」호세아 1:5 · 두루새김
활은 고대 전쟁의 주요 무기였습니다. 여기서 활을 부러뜨린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의지하던 군사적 힘을 무너뜨린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스르엘 골짜기는 지중해 연안에서 내륙으로 이어지는 주요 통로와 연결된 넓은 평야 지대였습니다. 따라서 이 이름은 과거의 왕권 투쟁을 기억하게 할 뿐 아니라 장차 벌어질 군사적 패배의 장소로도 적합했습니다.
왕조를 세울 때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군사적 힘이 이제 그 왕조를 지켜 주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활을 다른 나라가 부러뜨릴 것이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부러뜨리겠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운명은 강대국의 힘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열왕기하 10:31은 예후가 온 마음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지 않았으며,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기록합니다. 아합 집안에 대한 심판을 수행한 일과 예후 자신의 통치가 하나님 앞에 온전히 옳았는지는 별개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두 가지 읽기가 가능합니다. 하나는 예후가 아합 집안을 심판하는 과정에서 저지른 폭력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는 이해입니다. 하나님이 심판을 명하셨다는 사실이 그 과정에서 이루어진 모든 행위까지 무조건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스르엘의 피가 예후 왕조의 폭력적인 시작과 통치의 역사를 대표한다고 보는 이해입니다. 예후 집안이 하나님의 뜻을 수행한 역사를 가졌더라도, 이후 그 집안이 계속 하나님께 불충실했다는 사실까지 면제받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쪽이든 1:4 자체는 어떤 희생자의 피를 구체적으로 문제 삼는지 모두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후의 특정 행위를 단정하여 심판의 유일한 이유로 제시할 수는 없습니다.
로루하마 — 자비를 거두신다는 말씀의 무게
고멜은 다시 임신하여 딸을 낳았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호세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을 로루하마라고 하여라. 내가 더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엾이 여기지 않고,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호세아 1:6 · 두루새김
로 루하마는 「자비를 받지 못한 여자아이」, 또는 「가엾이 여김을 받지 못한 자」라는 뜻입니다. 이스르엘이라는 이름은 특정 장소와 왕조의 역사를 가리켰습니다. 그러나 로루하마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대하실 것인지를 직접 말합니다.
심판이 정치의 문제에서 관계의 문제로 깊어진 것입니다.
「더는」이라는 작은 말
하나님은 단순히 이스라엘을 가엾이 여기지 않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더는」 가엾이 여기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이 표현은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가 있었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실제로 열왕기하 14:26–27에서는 여로보암 2세 시대의 이스라엘이 회복된 이유를 설명하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심한 고통을 보셨고 그들의 이름을 지워 버리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라고 기록합니다. 나라의 회복은 왕이 뛰어났기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백성의 고통을 보셨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그 백성을 향해 더는 가엾이 여기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이스라엘의 불성실함을 영원히 덮어 주는 자동적인 보장이 아니었습니다.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는 표현의 어려움
따라서 두루새김처럼 앞의 부정적 선언을 이어 받아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로 이해할 수 있지만, 동사의 기본 의미를 살려 「그들을 반드시 데려가겠다」는 식으로 읽을 가능성도 논의됩니다. 칠십인역은 이 구절을 ‘그들에게 맞서겠다’는 뜻으로 옮겼습니다. 이 차이는 심판이 용서의 거절로 표현되는가, 적극적으로 맞서거나 제거하는 행동으로 표현되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구원하신다
바로 다음 절에서 예상하지 못한 전환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은 가엾이 여기겠다. 그들의 하나님인 나 여호와야훼가 그들을 구해 주겠다. 활이나 칼이나 전쟁으로, 말이나 말을 탄 군사들로 구해 주지는 않겠다.」호세아 1:7 · 두루새김
여기서 가엾이 여긴다는 뜻의 동사는 로루하마라는 이름에 사용된 말과 같은 어근을 가집니다. 동일한 하나님의 자비가 한쪽에서는 거두어지고, 다른 쪽에서는 베풀어집니다.
이것을 유다가 본래 이스라엘보다 의롭기 때문에 구원받는다는 선언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7절은 유다가 도덕적으로 더 낫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의지를 선언할 뿐입니다.
이스라엘의 활은 부러질 것이지만, 유다 역시 활과 칼과 군사력을 통해 구원받지는 않을 것입니다.
군사력은 하나님의 심판을 막아 주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만들어 내지도 못합니다.
이 말씀은 이후 히스기야 시대 예루살렘이 아시리아의 위협 속에서 구원을 경험한 사건과 연결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열왕기하 19:32–36). 다만 호세아 1:7이 오직 그 사건 하나만을 가리킨다고 본문 자체가 밝히는 것은 아닙니다.
원문에서는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면서도 「나를 통해」라고 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야훼를 통해」라고 하십니다. 두루새김은 이 말씀을 「그들의 하나님인 나 여호와야훼가 그들을 구해 주겠다」로 풀어 옮겼습니다. 누가 구원하시는지를 분명히 하려는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유다에게는 여전히 「그들의 하나님인 나 여호와야훼」라고 말씀하신 분이, 이스라엘에게는 「나도 너희의 하나님이 되지 않겠다」고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암미 — 언약의 언어가 거꾸로 뒤집히다
고멜은 로루하마의 젖을 뗀 뒤에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호세아 1:8 · 두루새김
젖을 떼는 일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출생 직후에 이루어지는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아이가 일정 기간 성장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첫 번째 심판 선언과 마지막 심판 선언 사이에는 실제 삶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호세아의 가정이 어떻게 지냈는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경고에 어떻게 반응했는지도 기록하지 않습니다.
대신 셋째 아이가 태어나고, 마지막 이름이 주어집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을 로암미라고 하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고, 나도 너희의 하나님이 되지 않겠다.」호세아 1:9 · 두루새김
이스라엘에게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강한 왕국이라는 것도, 넓은 영토를 가진 민족이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언약의 중심 문장이 부정되다
레위기 26:12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자신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자신의 백성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신앙을 지탱하는 핵심적인 관계의 선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건져 내셨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으며, 그들 가운데 머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지위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호세아 1:9에서는 그 관계의 언어가 정반대로 뒤집힙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배반한 결과, 하나님이 그 관계의 부정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맺은 특별한 언약 관계를 더 이상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나도 너희의 하나님이 되지 않겠다」
여기서 부정되는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특별한 언약적 소속 관계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다.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들을 이집트에서 건져 내신 역사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역사와 신앙적 지식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난 삶을 정당화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백성답게 그분과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는 사실은 같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바뀌는 청중
4절에서 하나님은 「예후 집안」과 「이스라엘 왕국」을 말씀하셨습니다. 6절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을 가엾이 여기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9절에서는 갑자기 「너희」라고 말씀하십니다.
앞에서는 이스라엘에 관하여 말씀하셨지만, 이제 이스라엘을 직접 향해 말씀하십니다. 호세아에게 아이의 이름을 짓도록 명령하시는 말씀 속에서, 듣는 백성이 하나님과 직접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무엇을 잃을 것인지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누구와의 관계를 잃고 있는지를 말씀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9절의 마지막 문장을 직역하면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있지 않을 것이다」, 또는 「나는 너희의 것이 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원문에는 이 마지막 문장에 「하나님」이라는 명사가 없습니다. 두루새김은 「나도 너희의 하나님이 되지 않겠다」라고 옮겨, 앞의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고」와 짝을 이루는 언약 관계의 뜻을 풀어 드러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스라엘의 죄가 심각한 까닭은 단지 잘못된 종교적 행위를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신을 백성으로 삼으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릇되게 대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도 단순한 처벌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이미 훼손해 온 관계의 진실을 드러내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있다는 이유로 고통받는 사람을 곧바로 하나님의 자비 밖에 있는 사람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호세아 1장은 특정한 역사적 공동체를 향한 예언이며, 모든 개인의 고난을 설명하는 보편적인 공식이 아닙니다.
특히 아이들에게 주어진 이름은 그 아이들 자신의 잘못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 아이들은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몸으로 전하는 표지가 됩니다. 공동체의 불성실함과 그에 대한 심판은 추상적인 논쟁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실제 사람들의 삶과 가정, 다음 세대가 살아갈 현실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세 아이 가운데 마지막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에게는 로암미라는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아버지는 아이를 부르기 위해 그 이름을 말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름은 아버지와 아이만의 말로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아이의 이름이 불릴 때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선언이 다시 들렸을 것입니다.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고, 나도 너희의 하나님이 되지 않겠다.」
한 아이를 부르는 이름 속에 한 민족이 하나님과 맺은 관계의 위기가 담겨 있습니다.
호세아서는 그 이름을 남겨 놓은 채 첫 장을 닫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