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풀어 읽기 · 2장
이 장의 자리 · 1–3장 · 혼인에 빗댄 이야기
광야에서 다시 말을 거시는 하나님
호세아 2장에는 뜻밖의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잊고 다른 애인들을 따라간 이스라엘에게 책임을 묻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곡식과 포도주를 거두고, 포도밭을 망가뜨리며, 모든 즐거움과 축제를 끝내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그 심판의 말씀이 절정에 이른 순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선언이 이어집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잊었으므로, 하나님은 그에게 다시 말을 건네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자신이 주셨던 것을 거두십니까? 왜 이스라엘이 가야 할 길을 가시덤불로 막으십니까? 그리고 왜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광야가 새로운 관계의 출발점이 됩니까?
호세아 2장은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을 단순히 벌과 용서의 순서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무엇을 잘못 알았으며, 하나님이 그 잘못된 관계를 어떻게 바로잡으시는지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을 먹이고 입히시는 분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심판이 끝나기도 전에 들려오는 회복의 이름
이스라엘 자손의 수는 잴 수도 셀 수도 없는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질 것입니다. 그들이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말을 들었던 바로 그곳에서, 이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불릴 것입니다.호세아 2:1 · 두루새김
호세아 1장은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선언으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2장은 바로 그 선언을 뒤집는 말로 시작합니다.
바다의 모래라는 표현은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창세기 22:17). 이삭과 야곱에게도 자손과 땅에 관한 약속을 거듭 확인하셨습니다(창세기 26:4; 28:14).
이것은 단지 인구가 늘어난다는 희망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주셨던 약속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선언입니다.
심판의 장소와 회복의 장소가 서로 나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과거를 없었던 일로 만들지 않으시고, 그들이 부정당했던 자리에 새로운 선언을 놓으십니다.
또한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이 장에서 곧 드러날 바알 숭배와 대비됩니다. 이스라엘이 의지한 다른 신들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이 그들이 누구인지를 새롭게 정하신다는 뜻입니다.
흩어진 두 나라가 하나가 되다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지도자를 세우고, 그 땅에서 올라올 것입니다. 이스르엘의 날은 큰 날이 될 것입니다.호세아 2:2 · 두루새김
이스라엘과 유다는 솔로몬 이후 서로 다른 왕국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열왕기상 12장). 회복은 북왕국 이스라엘이 과거의 정치적 힘을 되찾는 일에 그치지 않습니다. 오랜 분열을 넘어 하나의 백성으로 다시 모이는 일이 포함됩니다.
여기서 「한 지도자」가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습니다. 호세아 3:5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그들의 왕 다윗을 찾을 것이라고 말하므로, 두 본문을 연결하여 다윗 왕조와 관련된 회복의 약속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2:2만으로 특정 인물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 땅에서 올라올 것입니다」라는 표현도 여러 읽기의 여지를 남깁니다. 흩어져 살던 땅에서 나오는 움직임으로 볼 수 있고, 뒤에 나오는 이스르엘의 이름과 연결하여 땅에서 싹이 올라오는 모습을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특히 이스르엘이라는 이름에는 ‘하나님이 씨를 뿌리신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어느 읽기든 여기서 이스르엘은 더 이상 멸망만을 떠올리게 하지 않습니다. 이스르엘의 날이 큰 날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이름이 새로운 미래를 가리키기 시작했음을 보여 줍니다.
「너희 형제들에게는 『내 백성』이라고, 너희 자매들에게는 『가엾이 여김을 받은 이』라고 말하여라.」호세아 2:3 · 두루새김
이는 회복이 하나님과 개인 사이의 관계에만 머무르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서로를 바라보고 부르는 공동체의 말까지 바뀌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희망찬 선언 바로 뒤에 어머니를 고발하라는 명령이 등장합니다.
독자는 회복의 약속을 먼저 들었지만, 아직 무엇이 회복되어야 하는지는 충분히 알지 못합니다. 이어지는 긴 고발과 심판의 말씀은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드러냅니다.
어머니에게 따져라 — 무너진 관계의 실상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어머니에게 따져라. 따져 물어라. 그 여자는 내 아내가 아니고, 나도 그 여자의 남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여자는 얼굴에서 음행을 지우고, 젖가슴 사이에서 간음을 없애야 한다.」호세아 2:4 · 두루새김
여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어머니로, 그 백성의 구성원들을 자녀들로 부르십니다.
두루새김의 「따져라. 따져 물어라」(רִיב)는 원문에서 같은 말이 두 번 반복된 것을 옮긴 표현입니다. 이 되풀이는 고발의 엄중함을 드러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문제가 이제 공개적으로 드러납니다. 그 관계에 속한 백성도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의 잘못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자녀들과 어머니를 실제 가족 구성원에게 그대로 대응시키며 이 명령을 현실의 가족 다툼에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저버렸음을 드러내기 위한 예언적 비유입니다.
「그들의 어머니가 음행했고, 그들을 배었던 여자가 부끄러운 짓을 했다. 그 여자는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빵과 물, 양털과 아마, 기름과 마실 것을 주는 애인들을 따라가겠어.』」호세아 2:7 · 두루새김
빵과 물은 살아가는 데 필요합니다. 양털과 아마는 옷감을 만드는 재료입니다. 기름과 마실 것은 일상생활의 풍요와 관계됩니다.
그녀가 애인들을 따라가는 이유는 단순히 마음이 끌려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자신의 삶을 유지해 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지역에서 바알은 비와 폭풍, 농작물을 자라게 하는 힘과 관련된 신으로 숭배되었습니다. 비가 제때 오고 땅에서 곡식이 자라는 일은 농경사회에서 생존이 걸린 문제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바알들에게 기대한 것은 막연한 종교적 만족만이 아니었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 풍요로운 수확과 안정된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존재에게서 삶의 근원을 찾는 일, 그것이 여기서 음행이라는 말로 표현됩니다.
원문에서 여자는 빵과 양털과 기름을 각각 자기 것이라고 부릅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나에게 빵과 물, 양털과 아마, 기름과 마실 것을 주는 애인들」로 풀어 옮겼습니다.
광야처럼 만들겠다는 위협
5절에서 하나님은 그 여자를 벌거벗기고 광야와 메마른 땅처럼 만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표현은 매우 거칠고 불편합니다. 공개적인 수치와 생존의 위협을 포함하는 심판의 이미지입니다. 이를 인간관계에서 상대를 수치스럽게 하거나 위협하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말씀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비유가 가리키는 대상은 이스라엘 공동체이며, 메마른 땅의 이미지는 백성이 살아갈 기반이 무너지는 상황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의지하던 풍요를 거두어, 자신들이 무엇에 기대고 있었는지를 드러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그 여자는 내 아내가 아니고, 나도 그 여자의 남편이 아니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관계가 얼마나 심각하게 망가졌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 문장만으로 고대 이스라엘의 법적 이혼 절차가 실제로 끝났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혼인 관계가 더는 정상적으로 유지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가시로 길을 막으시는 하나님
「그러므로 보아라. 내가 그 여자의 길을 가시덤불로 막고, 둘레에 담을 쌓겠다. 그 여자는 제 길을 찾지 못할 것이다.」호세아 2:8 · 두루새김
가시덤불과 담이라는 두 이미지는 서로 연결됩니다. 가시덤불은 길을 통과하기 어렵게 만들고, 담은 아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 여자는 애인들을 뒤쫓아도 따라잡지 못하고, 찾아다녀도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첫 남편에게 돌아가야겠어. 그때가 지금보다 내게 더 나았어.』」호세아 2:9 · 두루새김
그녀는 자신이 첫 남편을 배반했다는 사실 때문에 돌아가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첫 남편과의 관계가 귀중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때가 지금보다 나았기 때문에 돌아가려 합니다.
애인들을 따라가던 사람이 방향을 돌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그녀가 더 나은 삶을 찾아 돌아오는 데서 멈추지 않으시고, 자신의 삶을 실제로 누가 지탱하고 있었는지를 알게 하실 것입니다.
8절에서 하나님은 길을 막으십니다. 16절에서는 다정하게 말을 건네십니다.
가시덤불로 길을 막는 일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지만, 다정하게 말을 건네는 일은 관계를 새롭게 이해하도록 합니다. 본문은 이 두 행동을 하나님이 이루시는 회복 안에 함께 놓습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이 은혜의 근원을 잊었을 때
「그 여자는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준 이가 나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은과 금도 내가 넉넉히 주었는데, 그들은 그 금을 바알을 위해 썼다.」호세아 2:10 · 두루새김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전혀 들어 본 적 없는 민족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자신들의 구원 역사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상의 풍요를 누구에게서 받았는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이 누리는 좋은 것들과 그것을 주신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곡식은 땅이 농작물을 자라게 하는 힘만으로 설명되었고, 하나님이 주신 풍요는 다른 신들의 선물로 여겨졌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이 다른 신을 섬기는 일에 사용되었다는 고발의 방향은 분명합니다.
「그 여자의 것」이 아니라 「내 것」
11절에서는 소유를 나타내는 말이 바뀝니다.
「그러므로 제철이 되면 내 곡식을 도로 가져가고, 정해진 때가 되면 내 새 포도주를 되찾겠다. 그 여자의 알몸을 가리라고 준 내 양털과 아마도 빼앗겠다.」호세아 2:11 · 두루새김
원문에서는 같은 물건이 서로 다른 소유자의 말로 불립니다. 이것은 단순한 소유권 다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삶의 근원을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관한 문제입니다.
땅의 생산물은 인간의 노동을 통해 얻어지지만,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관점에서는 그 생산물이 하나님의 돌보심과 무관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명기 11:13–17에서도 비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 안에서 설명됩니다. 그 본문은 다른 신들을 섬기는 일이 결국 하늘이 닫히고 땅에서 수확을 얻지 못하는 심판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호세아 2장의 심판은 바로 그 언약의 경고와 맞닿아 있습니다.
농작물은 사람이 원하는 아무 때나 거둘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철과 시기를 따라 자라며, 때가 되어야 수확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당연하게 여겼던 계절의 풍요가 결코 저절로 보장되는 것이 아님을 드러내십니다.
축제마저 끝나게 되는 이유
13절에서 심판은 종교생활로 넓어집니다.
「그 여자의 모든 즐거움을 끝내겠다. 축제와 초하루와 안식일, 모든 절기를 끝내겠다.」호세아 2:13 · 두루새김
축제, 초하루, 안식일은 이스라엘의 종교적 삶에서 중요한 시간들이었습니다. 특히 안식일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과 깊이 연결되어 있었습니다(출애굽기 31:16–17).
이 말은 안식일이나 절기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의미를 갖는 종교적 행위가 하나님을 잊은 삶 속에서는 그 관계를 회복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이스라엘은 종교적 행위를 계속하면서도 자신들의 풍요를 바알에게 돌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것으로 여겨지는 종교적 시간과 실제 삶에서 신뢰하는 대상이 서로 다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분열을 그대로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14절에서는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도 망가뜨리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여자는 그것들을 자신이 몸을 판 대가로 애인들에게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구약에서 풍요롭고 안전한 삶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이미지입니다. 솔로몬 시대의 평화를 묘사하는 열왕기상 4:25에서도 사람들이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안전하게 살았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호세아 2장에서는 그 나무들이 들짐승의 먹이가 됩니다.
심판의 마지막 이유
15절의 끝은 이 긴 고발을 하나의 짧은 문장으로 마무리합니다.
「그 여자가 바알들에게 향을 피워 바치던 날들의 죄를 묻겠다. 그 여자는 고리와 장신구로 몸을 꾸미고 애인들을 따라갔다. 그러면서 나를 잊었다.」 여호와야훼의 말입니다.호세아 2:15 · 두루새김
그러나 여기서 ‘잊었다’는 것은 기억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의 삶을 움직이는 신뢰와 감사와 의지하는 관계에서 하나님이 밀려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누리면서도 하나님 없이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하나님의 말씀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펼쳐집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금으로 바알의 형상을 만들었는지, 바알 숭배를 위해 금을 사용했다는 뜻인지는 원문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메마른 광야가 다시 만남의 장소가 되다
「그러므로 보아라. 내가 그 여자의 마음을 끌어 광야로 데려가고, 다정하게 말을 건네겠다.」호세아 2:16 · 두루새김
여기서 놀라운 것은 「광야로 데려가고」라는 말만이 아닙니다. 그 앞에 붙은 「그러므로」입니다.
15절까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잘못을 드러내시고 심판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독자는 16절에서도 더 큰 심판이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관계를 시작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하필 광야인가?
5절에서 광야는 메마름과 죽음의 장소였습니다. 이스라엘의 풍요가 사라지고 생존이 위협받는 상태를 나타냈습니다.
그런데 16절에서 하나님은 바로 그 광야로 이스라엘을 데려가십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광야는 이집트에서 해방된 백성이 하나님과 함께 걸었던 장소였습니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만나와 물을 주셨고(출애굽기 16–17장), 시내산에서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출애굽기 19–24장).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자신의 생존이 하나님의 돌보심에 달려 있음을 경험했습니다.
물론 그 시절이 언제나 믿음을 지키며 평화롭게 지내던 때는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도 불평했고, 금송아지를 만들었으며,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그럼에도 광야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 시작한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장소입니다. 바알에게 풍요를 기대하던 이스라엘을 광야로 데려간다는 것은, 그 풍요가 없어도 자신들의 생존을 책임지셨던 하나님을 다시 만나게 한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정하게 말을 건네겠다」
9절에서 이스라엘은 형편이 더 나았기 때문에 첫 남편에게 돌아가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지 더 나은 생활 조건을 다시 제공하는 데서 관계를 회복시키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본문은 인간관계에서 강압적인 설득을 정당화하는 본보기를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적 혼인 비유를 통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다시 관계를 제안하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거기서 그 여자에게 포도밭들을 돌려주고, 아골 골짜기를 희망의 문으로 바꾸어 주겠다. 그 여자는 젊었던 시절처럼, 이집트 땅에서 올라오던 날처럼 거기서 응답할 것이다.」호세아 2:17 · 두루새김
아골 골짜기가 희망의 문이 된다는 뜻
아골 골짜기는 여호수아 7장에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정복한 뒤 아간은 하나님께 바쳐야 할 물건들을 자기 것으로 가져갔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아이 성 전투에서 패배했고, 아간의 죄가 드러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 사건과 관련된 장소가 아골 골짜기입니다.
이스라엘이 처음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죄와 심판을 경험했던 장소가, 이제 새로운 시작을 향해 열리는 문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실패가 없었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 실패의 기억을 가진 장소가 새로운 미래로 이어지게 하십니다. 이는 2장 1절에서 심판을 들었던 장소가 새로운 이름을 듣는 장소가 된 것과 닮아 있습니다.
회복은 과거를 지워 버리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과거에 갇힌 백성에게 새로운 길을 여시는 일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이 응답한다
앞에서 이스라엘은 다른 애인들을 따라가겠다고 말했고(2:7), 상황이 나빠지자 첫 남편에게 돌아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이동 방향이 바뀌는 것보다 더 깊은 변화입니다. 일방적으로 뒤쫓고 계산하던 말에서 관계를 맺는 응답의 말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응답이 구체적으로 어떤 말인지는 17절에서 아직 밝혀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장의 마지막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무엇이라고 응답할 것인지 분명히 나타납니다.
「저의 주인」이 아니라 「저의 남편」 — 관계의 언어가 바뀌다
「그날에 너는 나를 『저의 남편』이라고 부르고, 더는 『저의 주인』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여호와야훼의 말입니다.호세아 2:18 · 두루새김
바알(בַּעַל)은 소유자나 주인을 뜻하는 일반 명사이면서, 이스라엘이 섬기던 다른 신의 이름이기도 했습니다.
「내가 그 여자의 입에서 바알들의 이름을 없애겠다. 그 이름들은 다시는 입에 오르지 않을 것이다.」호세아 2:19 · 두루새김
호칭의 변화는 바알 숭배와의 단절을 나타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부르면서도 다른 신을 섬기는 말과 생각을 자신의 신앙 속에 섞어 놓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생존과 풍요를 보장한다고 믿었던 바알들의 이름을 버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분명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호세아 2장의 회복은 땅의 풍요를 다시 얻는 것보다 먼저,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관계의 회복입니다.
그 관계가 회복될 때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평화는 이스라엘 내부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저의 남편」은 이시이고, 「저의 주인」은 바알리입니다. 그런데 이 두 단어는 모두 남편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시는 기본적으로 ‘나의 남자’, 곧 ‘나의 남편’이라는 뜻입니다. 바알리도 ‘나의 주인’이라는 의미 외에 ‘나의 남편’이라는 뜻으로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단순히 지배적인 남편에서 평등한 남편으로 호칭이 바뀌는 이야기로만 이해하면 중요한 점을 놓칩니다.
하나님은 사람만이 아니라 땅의 평화까지 회복하신다
「그날에 내가 그들을 위해 들짐승과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것들과 언약을 맺겠다. 그 땅에서 활과 칼을 부수고 전쟁을 없애어, 그들이 안전하게 누워 쉴 수 있게 하겠다.」호세아 2:20 · 두루새김
이 구절에서 혼인 비유는 갑자기 더 넓은 세계로 펼쳐집니다.
이는 노아의 홍수 이후 하나님이 노아뿐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생물과 언약을 맺으셨던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창세기 9:9–17). 앞서 14절에서 들짐승은 망가진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먹어 치우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들짐승은 인간을 위협하지 않는 평화로운 질서 안에 놓입니다.
호세아 1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활을 부러뜨리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것은 군사적 패배를 뜻하는 심판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활과 칼을 부수는 일이 평화의 약속이 됩니다.
이스라엘은 더 강한 군사력을 얻어서 안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전쟁과 위협을 없애셔서 안전하게 누워 쉬게 됩니다.
여기서 「안전하게 누워 쉴 수 있게 하겠다」는 표현은 단순한 군사적 승리와 다릅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언제든 공격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시달리는 상태가 아니라, 몸을 눕혀 쉴 수 있는 안전을 가리킵니다.
세 번 반복되는 약혼의 선언
그다음 하나님은 다시 혼인 관계의 말로 돌아오십니다.
「너를 영원히 내 아내로 맞겠다고 약속하겠다. 올바르고 공정하게, 한결같은 사랑과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너를 내 아내로 맞겠다고 약속하겠다.」호세아 2:21 · 두루새김
「변함없이 진실한 마음으로 너를 내 아내로 맞겠다고 약속하겠다. 너는 나 여호와야훼를 알게 될 것이다.」호세아 2:22 · 두루새김
여기서 「너를 내 아내로 맞겠다고 약속하겠다」는 말이 세 번 반복됩니다. 첫 번째 약속에는 「영원히」라는 말도 붙습니다.
하나님은 앞에서 이스라엘과의 혼인 관계가 깨졌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회복을 말씀하시면서 단순히 옛 결혼생활로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원문에서는 새롭게 약혼하겠다고 하십니다.
이 비유는 관계가 처음 시작되는 자리로 돌아가, 그 관계를 새롭게 세우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올바름과 공정함은 올바른 질서와 정의로운 관계를 가리킵니다. 한결같은 사랑과 가엾이 여기는 마음은 언약을 지키시는 사랑과 자비를 드러냅니다. 변함없이 진실한 마음은 관계를 한결같이 지키는 성품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불의를 무시하는 사랑이 아니며, 하나님의 공정함은 자비를 밀어내는 공정함이 아닙니다.
10절에서는 이스라엘이 자신에게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주신 분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너는 나 여호와야훼를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같은 ‘알다’라는 동사가 심판의 이유와 회복의 결과를 연결합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많이 쌓는 일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누구와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호세아 6:6에서 하나님이 제사보다 한결같은 사랑을,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신다고 말씀하시는 대목과도 연결됩니다.
하늘에서 곡식까지, 모든 것이 응답하기 시작하다
「그날에 내가 응답하겠다. 내가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할 것이다.」 여호와야훼의 말입니다.호세아 2:23 · 두루새김
「땅은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에 응답하고, 그것들은 이스르엘에게 응답할 것이다.」호세아 2:24 · 두루새김
하늘과 땅, 땅의 산물은 실제로 말을 하는 존재가 아니지만, 예언자는 이 모든 것이 서로에게 응답하는 것처럼 묘사합니다. 이 장면에는 비가 직접 언급되지 않지만, 하늘과 땅과 농작물의 관계는 농경사회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질서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스라엘이 잘못 이해했던 세상의 질서가 바로잡힌다는 약속입니다.
10절에서 하나님이 주셨지만 이스라엘이 그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은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이었습니다. 그런데 24절에서 다시 등장하는 것도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입니다.
같은 선물이 돌아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선물을 주시는 분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응답의 관계가 회복되다
여기서 응답이라는 표현은 17절과도 연결됩니다.
17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네시고, 이스라엘은 응답합니다. 23–24절에서는 하나님이 하늘에 응답하시고, 하늘과 땅과 땅의 산물이 차례로 응답합니다.
앞에서 이스라엘은 애인들을 찾아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길은 막혔고, 풍요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었던 존재들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회복시키시는 세계에서는 응답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하늘과 땅, 땅의 산물까지 연결되는 이 장면은 하나님의 구원이 인간 마음속의 변화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인간이 살아가는 땅과 생활의 질서까지 새롭게 하는 약속으로 펼쳐집니다.
그리고 이 응답의 사슬 끝에 뜻밖의 이름이 다시 등장합니다.
이스르엘입니다.
이스르엘이 다시 심겨지고, 이름들이 뒤집히다
「내가 나를 위해 그 여자를 땅에 심겠다. 로루하마를 가엾이 여기고, 로암미에게 『너는 내 백성이다』라고 말하겠다. 그러면 그는 『주님은 저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말할 것이다.」호세아 2:25 · 두루새김
이스르엘은 ‘하나님이 씨를 뿌리신다’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처음 그 이름이 등장했을 때 이스르엘은 피 흘림과 심판의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이스라엘을 땅에 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같은 이름이 전혀 다른 미래를 가리키게 된 것입니다.
이름을 없애지 않고 그 뜻을 뒤집으시다
하나님은 그 이름들을 없애 버리지 않으십니다.
로루하마라는 이름을 그대로 부르면서 가엾이 여기겠다고 하십니다.
로암미라는 이름을 그대로 부르면서 「너는 내 백성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과거에 심판받았던 일이 전혀 없었던 것처럼 새로운 출발을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심판의 이름을 가진 백성을 다시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이름이 선언했던 상태를 자신의 말씀으로 바꾸십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일방적인 선언만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이라고 부르시자, 그 백성도 「주님은 저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름은 과거의 신분을 주장하는 말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부르시고, 백성이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살아 있는 관계의 말이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이것은 레위기 26:12에서 약속된 언약 관계의 말과 이어집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호세아 2장에서는 그 관계가 깨어졌다는 사실을 지나 다시 회복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신약의 로마서 9:25–26은 호세아의 이 회복 선언을 직접 인용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던 이들이 백성으로 불리는 일을 설명하고, 베드로전서 2:10도 같은 말을 교회에 적용합니다. 이는 본래 이스라엘과 유다의 회복을 말하던 호세아의 약속을 신약에서 더 넓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주제로 확장하여 읽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회복은 무엇인가
문제는 좋은 것을 누리는 데 있지 않습니다. 좋은 것을 주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 좋은 것들에 가려지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장이 보여 주는 회복은 풍요를 버리고 가난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풍요를 다시 받더라도 그것을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바르게 이해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대화에 이르기까지 곡식이 거두어지고, 포도나무가 망가지고, 길이 가시덤불로 막혔습니다. 메마른 광야를 지나야 했고, 심판의 기억이 남아 있는 아골 골짜기를 통과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장의 마지막에서 하나님은 더 이상 땅을 메마르게 하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 땅에 다시 심겠다고 하십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주신 것을 알아보지 못하던 이스라엘이, 이제 자신을 심으시는 하나님을 알아보고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합니다.
하나님이 씨를 뿌리시는 땅에서, 한때 부정당했던 백성의 이름이 다시 불립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