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풀어 읽기 · 8장
이 장의 자리 · 4–9장 · 갈릴리에서의 활동
말씀을 들은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
예수님과 제자들이 탄 배에 거센 돌풍이 몰아칩니다. 배에는 물이 차오르고, 제자들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잠들어 계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자 예수님께서는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십니다. 호수는 곧 잔잔해집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이 질문은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위험에 처했을 때 예수님을 찾아가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구하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깨운 것 아닐까요?
이 질문을 이해하려면 앞에서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읽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곧 빼앗깁니다. 어떤 사람은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시험을 겪을 때 믿음에서 떠납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을 간직한 채 살아가다가 걱정과 재물과 삶의 즐거움에 숨이 막힙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말씀을 듣고 굳게 간직하며, 끈기 있게 열매를 맺습니다.
이 비유가 끝난 뒤 누가는 제자들이 폭풍을 만나고, 귀신에게 사로잡힌 사람이 자유를 얻으며, 열두 해 동안 병을 앓던 여자가 예수님께 손을 대고, 죽어 가는 딸의 아버지가 믿음을 요구받는 이야기들을 이어 놓습니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치신 뒤, 그 말씀이 두려움과 고통과 죽음 앞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말씀하시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놀랍도록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고, 어떤 사람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떠나 달라고 하며,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잃을 것 같은 순간에도 예수님을 신뢰하도록 부름받습니다.
누가복음 8장은 이렇게 묻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사실과 그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그 말씀을 믿는 사람에게는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예수님과 함께 길을 걷는 여자들
열두 제자만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널리 알리고 그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한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먼저 열두 제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악한 영과 병에 시달리다가 고침을 받은 여자들도 함께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귀신 일곱이 나간 막달라 사람 마리아와,누가복음 8:2 · 두루새김
누가는 그 가운데 막달라 사람 마리아, 구사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의 이름을 기록합니다. 이들 외에도 많은 여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여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잠시 찾아온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니고 있었고, 자기 재산으로 예수님 일행을 도왔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여러 도시와 마을을 다니려면 음식과 머물 곳 등 생활에 필요한 것이 있었을 것이고, 누가는 그 필요를 채우는 일에 여자들이 참여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들은 도움을 받은 뒤 예수님의 사역을 돕는 사람들로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이름을 굳이 기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
먼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누가는 그녀에게서 귀신 일곱이 나갔다고 기록합니다. 이 사실은 그녀가 일곱 가지 죄를 지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적으로 부도덕한 사람이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앞 장에서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발랐던 죄인인 여자와 막달라 마리아를 같은 인물로 보는 전통이 있지만, 누가는 두 사람이 같은 인물이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누가가 알려 주는 것은 마리아가 악한 영에게서 풀려났고, 이후 예수님과 함께했다는 사실입니다.
요안나는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녀는 헤롯의 살림을 맡은 구사의 아내였습니다. 살림을 맡았다는 말은 재산이나 집안일 등을 관리하는 일을 가리키므로, 요안나가 사회적으로 상당한 자원을 이용할 수 있는 환경에 있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안나 개인의 재산 규모나 구사의 신앙에 대해서는 본문이 말하지 않습니다.
악한 영에게서 풀려난 마리아가 있고, 헤롯의 살림을 맡은 구사와 연결된 요안나가 있습니다. 수산나와 다른 많은 여자도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과 만나 예수님의 사역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뒤에 다시 등장합니다. 누가복음 24:10에서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는 예수님의 빈 무덤에 관한 소식을 사도들에게 전하는 여자들 가운데 등장합니다. 누가는 그들의 이름을 마지막에 갑자기 소개하지 않습니다. 이미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과 함께했던 사람들로 소개한 것입니다.
따라서 8장 첫머리는 여행 경비를 누가 부담했는지 알려 주는 짧은 기록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이 어떤 사람들의 참여로 이루어지고 있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에 응답하여 실제 삶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누가는 자기 재산으로 돕던 여자들을 보여 준 직후,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려줍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 문제는 씨가 아니라 땅에 있다
네 종류의 땅에 떨어진 같은 씨
큰 무리가 모입니다. 여러 도시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졌습니다. 사람들에게 밟히고 새들에게 먹혔습니다. 어떤 씨는 바위 위에 떨어져 싹이 났지만 물기가 없어 말랐습니다. 어떤 씨는 가시덤불 한가운데 떨어졌습니다. 가시덤불이 함께 자라면서 그 싹을 숨 막히게 했습니다. 마지막 씨는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백 배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씨는 같습니다.
다른 것은 씨가 떨어진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뒤에서 씨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설명하십니다. 비유의 관심은 말씀이 사람에게 주어졌을 때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가에 있습니다.
세 가지 실패도 같은 방식이 아닙니다. 길가에서는 씨가 아예 자라지 못합니다. 바위 위에서는 싹이 나지만 오래가지 못합니다. 가시덤불 사이에서는 자라기는 하지만 열매가 여물지 못합니다.
실패의 시점이 서로 다릅니다.
말씀을 처음 듣는 순간에 잃어버릴 수도 있고, 한동안 받아들였다가 포기할 수도 있으며,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어도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듣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거부하는 사람으로만 구분하지 않으시고, 말씀을 받아들인 뒤에도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게 하십니다.
「말씀을 들은 사람들」에게서 마귀가 말씀을 빼앗는다
「씨가 길가에 떨어진 경우는 말씀을 들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 뒤 마귀가 와서 그들의 마음에서 말씀을 빼앗아 간다. 그들이 믿어서 구원받는 일을 막으려는 것이다.」누가복음 8:12 · 두루새김
이들은 처음부터 듣기를 거부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분명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그들의 마음에 남아 믿음으로 이어지지 못합니다.
말씀은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이 그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응답하여 구원받도록 주어집니다. 그 말씀이 마음에서 사라진다면, 듣는 행위는 있었지만 그 말씀이 이루려는 결과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실패를 듣는 사람의 의지 부족으로만 설명하지 않으시고 마귀의 활동을 분명히 언급하십니다. 말씀을 듣는 일은 사람의 마음 안에서만 벌어지는 심리적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빼앗으려는 악한 세력과도 관련됩니다.
그렇다면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어떨까요?
기쁨이 있는데도 뿌리가 없을 수 있다
「씨가 바위 위에 떨어진 경우는 말씀을 들으면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뿌리가 없다. 잠시 믿다가 시험을 겪을 때 믿음에서 떠난다.」누가복음 8:13 · 두루새김
예수님은 처음의 기쁨이 진실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문제는 기쁨이 없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뿌리가 없다는 데 있습니다.
바위 위에 떨어진 씨는 싹을 틔울 수는 있지만 물기를 충분히 얻지 못해 마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기쁘게 시작했는가보다, 시험을 겪을 때 그 말씀을 계속 간직하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곧이어 제자들은 거센 돌풍 속에서 죽음의 위협을 느끼게 됩니다. 물론 비유의 각 땅을 이후 등장인물에게 하나씩 맞춰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일과 시험 속에서 그 말씀을 간직하는 일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은 이후 사건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것은 고난만이 아니다
「씨가 가시덤불에 떨어진 경우는 말씀을 들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걱정과 재물과 삶의 즐거움에 숨이 막혀 열매를 여물게 하지 못한다.」누가복음 8:14 · 두루새김
말씀을 잃게 하는 것이 시험이나 박해만은 아닙니다. 걱정과 재물과 삶의 즐거움도 말씀의 숨을 막을 수 있습니다.
가시덤불 사이의 씨는 자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것들도 함께 자라 마침내 그 싹을 숨 막히게 합니다. 말씀을 완전히 버리지 않고도 그 말씀이 맺어야 할 열매를 잃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걱정, 재물, 삶의 즐거움을 모두 그 자체로 악한 것이라고 하시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말씀의 숨을 막을 만큼 커지는 경우입니다. 걱정이 삶을 온통 차지하고, 재물을 얻고 지키는 일이 모든 판단의 중심이 되고, 삶의 즐거움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일보다 더 중요해질 때, 말씀은 마음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처럼 보여도 열매를 맺을 만큼 자라지 못합니다.
싹이 났다는 것과 열매가 여물었다는 것은 다릅니다. 믿음은 순간적인 반응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삶 속에서 열매가 여물어 가는 과정과 관련됩니다.
좋은 땅에는 무엇이 다른가?
「씨가 좋은 땅에 떨어진 경우는 바르고 선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굳게 간직하며, 끈기 있게 열매를 맺는 사람들을 가리킨다.」누가복음 8:15 · 두루새김
듣습니다.
굳게 간직합니다.
끈기 있게 열매를 맺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그 말씀을 마음에 굳게 간직하고 끈기를 가져야 합니다. 두루새김이 「끈기 있게」로 옮긴 원문의 낱말은 휘포모네(ὑπομονή)로, 어려움 속에서도 버티고 지속하는 인내를 뜻합니다. 여기서는 오래 기다린다는 뜻보다 말씀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일을 계속하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좋은 땅의 특징은 모든 상황이 순조롭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어려움과 유혹 속에서도 말씀을 놓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좋은 땅은 처음부터 좋은 땅으로 정해져 있었을까요? 비유 자체는 땅이 어떻게 좋은 땅이 되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은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간직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비유의 끝에서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또 어떤 씨는 좋은 땅에 떨어져 싹이 나고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이 말을 하며 예수께서 외치셨습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누가복음 8:8 · 두루새김
이것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들으라는 말이 아니라, 말씀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응답하라는 촉구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어려운 문제가 남습니다. 예수님은 왜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직접 설명하지 않고 비유로 말씀하셨을까요?
감추어진 말씀과 밝혀지는 빛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듣고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인가?
제자들이 비유의 뜻을 묻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일이 허락되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유로 전해진다. 그들이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듣고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누가복음 8:10 · 두루새김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왜 어떤 사람들은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듣고도 깨닫지 못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실까요?
여기서 「비밀」은 아무리 노력해도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해 있다가 그분이 드러내 주심으로 알게 되는 진리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아는 것은 인간이 자기 지혜만으로 밝혀낸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 6:9–10과 연결됩니다. 이사야는 백성에게 말씀을 전하라는 사명을 받지만, 그 백성은 듣고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예언의 언어를 사용하십니다.
여기에는 해석의 갈림이 있습니다. 하나는 비유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거절하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감추는 심판의 역할을 한다는 해석입니다. 다른 하나는 비유가 사람들의 기존 태도를 드러내어, 듣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깨달음을 일으키지만 마음을 닫은 사람에게는 그저 하나의 이야기로 남는다는 해석입니다.
두 해석은 반드시 서로를 배제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10절은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말하므로, 사람들이 우연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약화해서도 안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사람들이 진리를 알지 못하기를 바라셨을까요? 예수님은 비유의 뜻을 묻는 제자들에게 설명을 주시고, 곧이어 등불을 켜서 감추어 두는 사람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감추어짐이 이야기의 마지막 목적은 아닙니다.
등불을 켜서 침대 밑에 두는 사람은 없다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대 밑에 두지 않는다. 등잔대 위에 놓아 들어오는 사람들이 빛을 보게 한다.」누가복음 8:16 · 두루새김
「감추어진 것은 모두 드러날 것이고, 숨겨진 것도 모두 알려지고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누가복음 8:17 · 두루새김
앞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일이 어떤 사람들에게 허락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이제는 감추어진 것이 드러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진리는 모든 사람에게 즉각적으로 이해되지는 않지만, 영원히 감추어 놓기 위해 주어진 것도 아닙니다.
등불의 비유는 제자들이 알게 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져야 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앞의 씨 뿌리는 비유와 연결하여 말씀을 제대로 받아들인 사람에게 그 진리가 더욱 분명해진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드러내시는 진리를 올바르게 듣는 사람은 그 진리를 자신의 삶에서 나타낼 수 있으므로 두 읽기는 서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다만 누가는 등불이 정확히 무엇을 상징하는지 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다음에 하신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지 주의하여라. 가진 사람은 더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가지지 못한 사람은 자기가 가진 줄 아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누가복음 8:18 · 두루새김
이것이 앞선 비유들을 하나로 묶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나 많은 말씀을 들었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듣는지 주의하라고 하십니다. 문맥은 부유한 사람이 더 부유해진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문제입니다. 말씀을 참으로 간직하는 사람은 더 풍성한 깨달음과 열매를 얻지만, 말씀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실제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가졌다고 여기는 것마저 잃을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그리고 누가는 이 말씀을 바로 다음 사건으로 이어 줍니다.
누가 예수님의 가족인가?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지만 무리 때문에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 서서 뵙고 싶어 합니다」라는 말이 전해지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이다.」누가복음 8:21 · 두루새김
처음 읽으면 예수님께서 가족을 냉정하게 거절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마리아와 형제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막으려 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무리 때문에 만날 수 없었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가족의 범위를 새롭게 정의하고 계십니다. 좋은 땅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굳게 간직하며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가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마리아를 배제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누가복음 1:38에서 마리아는 자신에게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고, 2:19에서는 자신이 들은 일을 마음에 간직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8:21은 핏줄로 맺어진 관계를 부정하는 말씀이라기보다, 예수님과의 참된 관계가 무엇을 통해 드러나는지를 밝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 원칙은 제자들의 실제 삶 속에서 시험받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예수님과 함께 배에도 오릅니다. 그런데 호수 한가운데에서 예수님은 잠드시고, 거센 돌풍이 몰아칩니다. 그때 제자들은 무엇을 붙들고 있을까요?
호수 한가운데 — 「너희 믿음은 어디 있느냐?」
예수님은 잠들어 계셨다
어느 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시며 「호수 건너편으로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그 말씀에 따라 배를 타고 떠납니다.
그런데 배를 타고 가는 동안 예수님께서 잠드십니다.
그때 거센 돌풍이 호수에 몰아칩니다. 배에 물이 차오르고, 제자들은 죽음의 위협을 느낍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깨웁니다.
제자들이 다가와 예수를 깨우며 말했습니다. 「스승님, 스승님! 저희가 죽게 생겼습니다!」 예수께서 깨어나 바람과 거센 물결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러자 바람과 물결이 그치고 호수가 잔잔해졌습니다.누가복음 8:24 · 두루새김
두 번 반복되는 「스승님」이라는 부름에는 급박함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외침은 분명한 요청이라기보다 절박한 상황을 알리는 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일을 당하고 있는지 압니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는 아직 충분히 알지 못합니다.
바람과 물결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
예수님은 앞서 더러운 영을 꾸짖으셨고(4:35), 시몬의 장모를 괴롭히던 열을 꾸짖으셨습니다(4:39). 이제는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십니다. 누가가 폭풍을 귀신으로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은 바람과 물결을 자연 현상으로 묘사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더러운 영과 질병이 물러났습니다. 이제 바람과 물결까지 그 명령을 따릅니다.
누가는 이것을 신학적 주장으로 증명하지 않고, 제자들이 그 권능을 보고 어떤 질문을 하는지 기록합니다.
조금 더 깊이
갈릴리 호수는 주변 지형의 영향으로 갑작스러운 강풍과 거친 물결이 일어날 수 있는 곳이지만, 누가는 기상 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또 시편 107:23–30은 바다에서 폭풍을 만난 사람들이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께서 폭풍을 잠잠하게 하시는 모습을 노래합니다. 누가복음 8장은 이 시편을 직접 인용하지 않지만, 시편에서는 하나님께서 바다를 잠잠하게 하시고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신다는 점에서 분명한 주제적 연결이 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묘사되는 자연을 다스리는 권능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나타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 있는가를 물으시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믿음은 어디 있느냐?」 그들은 두려워하며 놀라서 서로 말했습니다. 「대체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까지 그 명령을 따르는 거지?」누가복음 8:25 · 두루새김
이 질문을 왜 그렇게 무서워했느냐는 꾸지람으로만 읽으면 중요한 것을 놓칩니다. 제자들이 처한 위험은 실제였고, 배에 물이 차오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감정만을 문제 삼지 않으시고,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호수 건너편으로 가고 있었고,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나 폭풍이 닥쳤을 때 그들이 붙들고 있던 것은 눈앞의 물결과 가라앉을 것 같은 배였을까요, 아니면 자신들과 함께 계신 예수님이었을까요?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과 시험을 겪을 때 그 말씀을 간직하는 일은 다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배를 탔지만, 그 말씀을 하신 분이 누구신지는 여전히 배워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사건이 끝난 뒤 「대체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라고 서로 묻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의 두려움도 바뀝니다. 폭풍이 몰아칠 때에는 죽을까 봐 두려워했습니다. 폭풍이 잠잠해진 뒤에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 두려워하며 놀랍니다.
위험에 대한 두려움이, 자신들이 함께하고 있는 분의 정체를 마주한 경외의 두려움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데 호수를 건너 도착하신 곳에서는 예수님의 권위가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고, 이번에는 예수님께 떠나 달라고 요청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거라사 — 자유를 얻은 사람과 두려워하는 사람들
사람들은 그를 묶었지만 붙잡아 둘 수 없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갈릴리 맞은편에 있는 거라사 사람들의 지역에 도착합니다.
예수께서 뭍에 내리시자 그곳 도시 출신의 귀신 들린 사람이 마주 나왔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옷을 입지 않았고, 집이 아니라 무덤에서 지냈습니다.누가복음 8:27 · 두루새김
죽은 사람들이 묻히는 무덤에서 지냈다는 것은 그가 사람들의 일상적인 생활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는 쇠사슬과 발목에 채우는 쇠고리에 묶여 감시받곤 했지만, 자신을 묶은 것을 끊고 귀신에게 내몰려 광야로 나가곤 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쇠사슬을 끊고 달아나는 사람이었지만, 그는 스스로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묶어 놓은 데서 벗어나도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누가는 그의 이름을 알려 주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집이 있었겠지만 그곳에서 살지 못했고, 사람들 가운데 속해 있었겠지만 그들과 함께 살아가지 못했습니다. 그의 삶을 설명하는 것은 거의 전부 그가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만나십니다.
「군대입니다」
그는 예수를 보자 소리를 지르며 그분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왜 저에게 간섭하십니까? 간청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마십시오.」누가복음 8:28 · 두루새김
제자들은 조금 전 호수에서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귀신이 예수님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과 함께 다니는 제자들은 예수님을 계속 알아 가고 있는데, 예수님께 적대적인 영들은 그분의 정체와 권위를 알아봅니다. 그렇다고 귀신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귀신은 예수님을 두려워하며 괴롭히지 말라고 간청합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대답했습니다. 「군대입니다.」 많은 귀신이 그 사람에게 들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누가복음 8:30 · 두루새김
두루새김이 「군대」로 옮긴 그리스어 레기온(λεγιών)은 라틴어에서 온 말로, 로마 군대의 큰 부대인 군단을 가리킵니다. 이 이름은 많은 귀신이 그 사람을 사로잡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는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는 많은 귀신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초자연적인 힘을 행사하는 사건이 아니라, 한 사람을 사로잡고 있던 세력에게서 그를 되찾는 사건입니다.
귀신들도 예수님에게 간청한다
귀신들은 자신들을 끝없는 구렁으로 보내지 말아 달라고 간청합니다. 끝없는 구렁은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깊은 곳으로, 이 문맥에서는 귀신들이 보내지기를 두려워하는 곳입니다. 귀신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할 권위를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산에서 먹이를 먹고 있던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요청하고, 예수님께서는 허락하십니다. 귀신들이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자, 돼지 떼는 벼랑 아래로 내달려 호수에 빠져 죽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허락하셨을까요? 돼지 떼의 손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본문은 그 이유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돼지가 유대 율법에서 부정한 동물이기 때문에 죽어도 괜찮았다고 설명하는 것은 본문에 없는 이유를 덧붙여 정당화하는 일입니다.
이야기 속에서 분명하게 대조되는 것은 귀신들의 파괴적인 성격과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가져오신 회복입니다. 귀신들은 죽음으로 이어지는 사건을 일으키지만, 귀신에게 사로잡혀 있던 사람은 살아서 회복됩니다.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있다
돼지를 돌보던 사람들이 도시와 시골에 사건을 알리자, 사람들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러 옵니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예수께 왔습니다. 귀신이 나간 그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예수의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했습니다.누가복음 8:35 · 두루새김
이 한 문장은 앞에서 그 사람을 설명했던 모든 내용을 뒤집습니다.
그는 옷을 입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제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는 무덤에서 살았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있습니다.
그는 귀신에게 내몰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제정신입니다.
그는 끊임없이 묶이거나 광야로 내몰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한곳에 앉아 있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0:39에서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습니다. 두 장면이 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있는 모습은 이 사람이 예수님 곁에 평온하게 머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기뻐하지 않고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떠나 달라고 요청합니다.
왜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떠나 달라고 했을까?
거라사 지방 일대의 온 무리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예수께 자기들을 떠나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예수께서 배에 올라 되돌아가셨습니다.누가복음 8:37 · 두루새김
제자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두려워하며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물었습니다. 거라사 사람들도 두려워하지만, 예수님께 떠나 달라고 합니다.
같은 두려움이 서로 다른 반응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들이 돼지 떼를 잃은 경제적 손실 때문에 예수님을 떠나보내려 했다는 해석도 있고, 그럴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그들이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떠나 달라고 부탁했다고 분명히 설명하므로, 경제적 손실을 주된 이유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들이 통제하지 못하던 사람이 회복되었지만, 그를 회복시키신 예수님 역시 자신들의 통제를 넘어서는 권위를 지니고 계셨습니다.
여기서 이야기는 또 한 번 반전됩니다.
거라사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떠나시기를 바랍니다. 회복된 남자는 예수님과 함께 가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요청대로 배에 오르시고, 남자의 요청은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 왜일까요?
예수님을 따라가지 못하게 하시고 집으로 보내시다
「네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을 자세히 이야기하여라.」 그 사람은 떠나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일을 온 도시에 널리 알렸습니다.누가복음 8:39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그를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역할을 맡기십니다. 처음에 그는 집에서 살지 못하고 무덤에서 지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그에게는 배를 타는 것보다 먼저, 떠나 있었던 삶의 자리로 돌아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전하는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을 이야기하라고 하셨는데, 누가는 그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일」을 널리 알렸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과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같은 사건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표현 하나만으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데 관한 모든 교리를 증명할 수는 없지만, 예수님의 행동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 활동이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신학적 표현입니다.
거라사 사람들은 예수님께 떠나 달라고 했고, 예수님께서는 떠나셨습니다. 하지만 그 지역에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증언하는 사람이 남았습니다.
그는 더 이상 무덤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해 주신 일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곳의 지명은 사본에 따라 ‘거라사’, ‘가다라’, ‘게르게사’ 등으로 다르게 읽히고, 각 지명이 가리키는 도시의 위치도 달라 구체적인 장소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누가는 갈릴리 호수 맞은편 지역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또 레기온이 로마 군단을 가리키는 군사적 표현이기 때문에 이 사건을 로마 제국의 지배에 대한 상징적 이야기로 읽는 해석도 있고, 돼지와 군단을 연결하는 시도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이 사건이 로마 군대를 상징한다고 설명하지 않으므로, 정치적 의미의 가능성을 살필 수는 있지만 이 이야기를 로마 제국에 대한 풍자로만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돼지 떼에 대해서도 누가는 소유자가 누구였는지, 실제 손실이 어느 정도였는지 해설하지 않습니다.
열두 살 딸과 열두 해를 앓은 여자
한 아버지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리다
예수님께서 돌아오시자 무리가 예수님을 맞아들입니다. 거라사 사람들은 예수님께 떠나 달라고 했지만, 이쪽 사람들은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회당 책임자인 야이로가 찾아옵니다. 회당의 운영과 예배 질서 등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자기 집에 와 달라고 간청합니다.
열두 살쯤 된 하나뿐인 딸이 죽어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가시는 동안 무리가 그분을 에워싸고 밀어댔습니다.누가복음 8:42 · 두루새김
하나뿐인 딸이라는 말은 앞서 나인에서 하나뿐인 아들을 잃은 과부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그런데 나인의 과부는 도움을 청하지 않았고, 예수님께서 먼저 그녀를 보시고 행동하셨습니다. 야이로는 직접 찾아와 간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의 집으로 향하십니다. 딸은 죽어 가고 있는데, 무리가 예수님을 에워싸고 밀어댑니다.
그런데 누가는 여기서 야이로의 이야기를 잠시 멈춥니다.
열두 해 동안 피가 멎지 않은 여자
그 가운데 열두 해 동안 피가 흐르는 병을 앓아 온 여자가 있었습니다. 의사들에게 치료비로 재산을 다 쓰고도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했습니다.누가복음 8:43 · 두루새김
야이로의 딸은 열두 살쯤 되었습니다. 이 여자는 열두 해 동안 피가 흐르는 병을 앓았습니다. 한 아이가 태어나 자라는 동안, 다른 한 여자는 계속 같은 병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 사람에게 열두 해는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시간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열두 해는 오래 지속된 고통의 시간입니다. 두 사람의 삶은 전혀 다르지만, 이제 예수님을 만나는 같은 사건 안에 놓입니다.
여자는 야이로처럼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도움을 청하지 않습니다. 뒤에서 조용히 다가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댑니다.
조금 더 깊이
열둘이라는 숫자를 이스라엘 열두 지파와 연결하는 해석도 가능하지만, 이 문맥에서 그 상징이 직접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의사들에게 치료비로 재산을 다 쓰고도」에 해당하는 구절은 그리스어 사본에 따라 있고 없는 부분이어서 누가의 원래 문장이라고 확정하기 어렵지만, 어느 읽기를 따르든 그녀가 열두 해 동안 병을 앓았고 고침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공통됩니다. 또 레위기 15:25–27에는 여자가 오랫동안 피를 흘리는 경우의 부정과 접촉에 관한 규정이 나오므로, 그녀의 질병은 정결과 관련된 어려움도 가져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열두 해 내내 공동체에서 완전히 격리되어 있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누가는 그런 사실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에게 닿았지만
그러자 곧 피가 멎었습니다. 열두 해 동안 계속 흐르던 피가 그 순간 멎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고 「누가 나에게 손을 댔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베드로에게는 이 질문이 이상하게 들립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밀어붙이고 있는데, 누가 손을 댔는지 묻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손을 댔다. 나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내가 알았기 때문이다.」누가복음 8:46 · 두루새김
수많은 접촉이 일어나고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어떤 한 사람의 접촉을 다른 접촉과 구별하십니다. 그리고 나중에 그 여자의 믿음을 언급하십니다. 따라서 이 장면은 예수님의 옷 자체가 마법적 힘을 지녔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이 실제로 사람을 회복시키고 예수님을 신뢰하여 손을 내민 여자의 믿음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 사건입니다.
여자는 이미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굳이 그 사람을 찾으셨을까요? 누가는 그 모든 이유를 직접 설명하지는 않지만, 그 결과를 보면 중요한 변화가 나타납니다.
숨어서 손을 댄 사람이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하다
여자는 자신이 드러난 것을 알고, 떨면서 나아와 예수 앞에 엎드렸습니다. 모든 사람 앞에서 왜 예수께 손을 댔는지 말하고, 병이 곧바로 나았다고 알렸습니다.누가복음 8:47 · 두루새김
조금 전에는 뒤에서 조용히 손을 댔던 사람입니다. 그녀의 치유는 개인적인 경험으로만 남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여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평안히 가라.」누가복음 8:48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그녀를 「여자야」라고만 부르지 않으시고 「딸아」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아버지의 딸을 살리러 가시는 길입니다. 그런데 도중에 만난 여자를 「딸」이라고 부르십니다.
그 여자는 사람들 틈에 숨어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녀를 이름 없는 병자로 남겨 두지 않으시고 사람들 앞에서 그녀의 믿음을 인정하십니다.
앞 장 마지막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죄를 용서받은 여자에게 믿음이 그녀를 구원했으니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7:50). 앞 장의 여자는 죄의 용서에 관한 선언을 들었고, 이번 장의 여자는 오랫동안 앓던 병에서 회복되었습니다. 같은 표현이 두 사건에서 사용됨으로써, 예수님의 구원이 죄의 용서와 몸의 회복을 모두 아우른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여기서 그녀의 이야기는 완성됩니다. 그런데 야이로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 여자가 평화를 얻는 동안, 다른 딸의 죽음이 전해졌다
예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 회당 책임자의 집에서 한 사람이 와서 야이로에게 말했습니다. 「따님이 죽었어요. 이제 선생님을 더 수고롭게 하지 마세요.」누가복음 8:49 · 두루새김
이 한 문장은 이야기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꿉니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어 여자를 찾으시고,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동안 시간이 흘렀습니다. 예수님께서 조금만 더 빨리 가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지만 누가는 예수님께서 지체하셨기 때문에 아이가 죽었다고 설명하지 않고, 딸이 정확히 언제 죽었는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 죽음의 책임을 여자의 행동이나 예수님의 지체에 돌릴 수는 없습니다.
한 사람의 치유가 이루어지는 동안, 다른 사람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예수께서 그 말을 듣고 야이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그러면 그 아이가 구원받을 것이다.」누가복음 8:50 · 두루새김
믿음은 상황이 좋아진 뒤에 필요한 것이 아니다
호수에서 제자들은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 두려워했고, 예수님께서는 「너희 믿음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제 야이로는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두 장면 모두 생명의 위협 앞에서 믿음이 문제 됩니다.
그런데 차이도 있습니다. 제자들은 바람과 물결이 잠잠해지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야이로는 아직 딸이 살아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가 방금 들은 것은 딸이 죽었다는 소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기대가 무너졌다고 해서 믿음까지 버리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믿음은 상황이 곧 좋아질 것이라는 막연한 낙관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사건을 근거로 모든 믿는 사람이 병에서 낫거나 죽어 가는 가족이 반드시 살아날 것이라고 약속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특별한 상황에서 야이로에게 아이가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이 말씀을 모든 경우에 적용되는 결과 보장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은 눈앞의 상황이 기대한 방향으로 흘러갈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기대가 무너진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예수님의 말씀을 붙드는 일과 관련됩니다.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는 말씀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그리고 아이의 부모만 함께 들어오게 하십니다.
모두 아이를 두고 울며 가슴을 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울지 마라.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누가복음 8:52 · 두루새김
사람들은 아이가 죽은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예수를 비웃었습니다.누가복음 8:53 · 두루새김
그렇다면 아이는 실제로 죽지 않았던 것일까요? 그렇게 해석하기는 어렵습니다. 누가는 사람들이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뒤에서는 아이의 영이 돌아왔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에게 아이의 죽음은 돌이킬 수 없는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이 실제가 아니라고 부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이 잠에서 깨듯 뒤집혀 최종적인 결론이 되지 않을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행동으로 드러내십니다.
「아이야, 일어나라」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아이야, 일어나라.」누가복음 8:54 · 두루새김
앞서 피가 흐르는 병을 앓던 여자는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댔습니다.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아이의 손을 잡으십니다.
한 사람은 예수님께 손을 뻗었고, 다른 사람에게는 예수님께서 손을 뻗으셨습니다.
여자는 살아 있었고 예수님께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야이로의 딸은 죽어 있었고, 스스로 예수님께 다가가거나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아이에게 예수님께서 다가가십니다.
아이의 영이 돌아왔고, 아이는 곧 일어났습니다. 예수께서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지시하셨습니다.누가복음 8:55 · 두루새김
죽은 아이가 살아난 직후, 누가는 아주 평범한 명령 하나를 기록합니다. 이 명령에는 아이가 실제로 살아 있고, 이제 다시 일상적인 삶을 이어 가야 한다는 사실이 담겨 있습니다.
더 이상 장례의 대상이 아닙니다. 먹고 자라고 살아갈 아이입니다.
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을까?
아이의 부모는 몹시 놀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일어난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거라사의 남자에게는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께서 해 주신 일을 이야기하라고 하셨는데, 야이로의 집에서는 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명성을 관리하기 위한 것이었다거나 정치적 오해를 피하려는 것이었다는 설명이 가능할 수 있지만, 누가는 구체적인 이유를 밝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두 명령의 차이를 하나의 확정적인 원리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반응하도록 요구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각 사람에게 주어진 말씀은 달랐습니다.
「어떻게 듣는지 주의하여라」 — 누가복음 8장이 보여 주는 믿음
누가복음 8장은 말씀을 어떻게 듣는지에 관한 가르침으로 시작하지만, 그 말씀을 듣고 믿는 일이 무엇인지는 여러 사건 속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람과 물결을 잠잠하게 하시고, 무덤에서 살던 사람을 집으로 돌려보내시며, 열두 해 동안 앓던 여자를 고치시고, 죽은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십니다. 같은 예수님 앞에서 제자들은 두려워했고, 거라사 사람들은 놀라운 회복을 보고도 떠나 달라고 했으며, 여자는 떨면서도 손을 뻗었고, 야이로는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믿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들었다는 사실과 그 말씀을 믿는 것은 다릅니다. 믿음은 두려움이 전혀 없는 상태가 아니라, 자신이 처한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현실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더 깊이 신뢰하는 일입니다. 바람과 물결을 잠잠하게 하시고 죽은 아이를 일으키신 분은 예수님이시며, 믿음이 그런 능력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그 능력을 지니신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이고, 그렇게 믿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회복을 주시고 그를 자신의 삶으로 돌려보내십니다.
죽어 있던 아이가 일어났습니다. 부모는 몹시 놀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놀라운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보다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아이의 필요를 먼저 말씀하십니다.
누가는 그 아이가 무엇을 먹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어떤 말을 했는지도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그 아이의 마지막이 될 것처럼 보였던 집에서, 이제 살아 있는 아이를 먹이는 일이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생명은 그렇게 다시 평범한 삶 속으로 돌아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