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서 풀어 읽기 · 25장
이 장의 자리 · 24–43장 · 지혜의 찬양
아름다운 동행에서 두려운 관계로
집회서 25장은 부부가 서로 어울려 살아가는 모습을 아름답다고 찬양하며 시작합니다.
그런데 장의 마지막에 이르면 전혀 다른 말이 등장합니다.
처음에는 서로 어울려 사는 부부가 아름다움의 절정이었는데, 마지막에는 남편의 뜻을 따라 행동하지 않는 아내와 갈라서라는 명령으로 끝납니다. 이 변화는 단순히 좋은 아내와 나쁜 아내의 차이 때문일까요? 아니면 본문을 기록한 지혜 교사가 생각하는 결혼의 모습 자체에 긴장이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과 사람 앞에 아름다운 세 가지
지혜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세 가지로 아름답게 꾸며져, 주와 사람들 앞에 아름답게 섰다. 형제들이 한마음으로 지내는 것, 이웃끼리 우정을 나누는 것, 아내와 남편이 서로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집회서 25:1 · 두루새김
이 장의 첫 문장은 앞 장의 지혜 찬양을 떠올리게 합니다.
24장에서는 지혜가 직접 말하면서 자신을 나무와 향기와 포도나무의 열매에 비유했습니다. 그런데 원문에서는 25장 첫 절에서도 여성형 표현으로 아름다움을 말하는 일인칭 화자가 등장합니다. 이를 근거로 앞 장에서 여성의 모습으로 표현된 지혜가 계속 말한다고 이해할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절은 화자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으므로 반드시 같은 화자의 연설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화자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설명하면서 금이나 은, 귀한 보석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세 종류의 인간관계를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형제들이 한마음으로 지내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웃끼리 우정을 나누는 것입니다.
셋째는 아내와 남편이 서로 어울려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세 관계는 사람이 살아가는 생활의 여러 범위를 보여 줍니다.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 가까운 곳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웃, 그리고 일상을 가장 가까이에서 나누는 부부입니다.
그런데 세 관계 모두 한 사람만 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형제가 한마음이 되려면 서로를 인정해야 합니다. 이웃의 우정도 한쪽만 친구라고 생각해서는 이어지지 않습니다. 부부 역시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관계입니다.
본문이 아름답다고 묘사하는 것은 남편이 아내를 일방적으로 다스리는 모습도, 아내가 남편을 무조건 따르는 모습도 아닙니다.
두 사람이 서로 어울려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더욱이 이 관계들은 「주와 사람들 앞에」 아름답다고 평가됩니다. 사람들 사이의 화목은 단지 함께 사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귀한 것으로 여겨지는 삶의 모습입니다.
가난한 사람과 부자를 나란히 비판하는 까닭
2절에서는 아름다운 세 가지와 대조되는 세 부류가 등장합니다.
내 마음은 세 부류의 사람을 미워했고, 나는 그들의 삶을 몹시 싫어했다. 가난하면서 거만한 사람, 부유하면서 거짓말하는 사람, 깨달음이 모자라고 아내가 아닌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해 부부의 약속을 깨뜨리는 노인이다.집회서 25:2 · 두루새김
그런데 교사는 가난하기 때문에 첫 번째 사람을 비판하지 않고, 부자이기 때문에 두 번째 사람을 비판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의 행동을 문제 삼습니다.
가난한 사람의 문제는 거만함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과 관계없이 다른 사람을 낮추어 보고 자기 자신을 높이는 태도입니다. 부자의 문제는 거짓말입니다. 재산이 많다고 해서 정직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가난하면서 거만한 사람」이라는 표현에는 가난한 사람에게 겸손을 더 강하게 기대하는 사회적 편견이 끼어들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두 인물 모두 경제적 처지가 아니라 그 처지와 결합된 잘못된 행동으로 비판받는다는 점이 이 격언의 직접적인 내용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아내가 아닌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해 부부의 약속을 깨뜨리는 노인입니다. 노인은 오랜 세월을 살아왔으므로 그에 걸맞은 지혜와 분별을 갖추었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나이만 들었을 뿐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는 깨달음은 부족합니다.
백발이 아름다워지는 조건
젊을 때 모으지 않은 것을 늙어서 찾을 수 있는가
젊을 때 지혜를 모아 두지 않았다면, 늙어서 어떻게 찾겠느냐?집회서 25:3 · 두루새김
원문에서 무엇을 모으는지 밝히지 않은 이 문장은 재산을 저축하라는 교훈으로만 읽기 쉽습니다.
실제로 「모아 두다」라는 말에는 재산이나 물건을 쌓아 두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는 지혜가 부족한 노인을 이야기했고, 뒤에서는 흰머리가 난 사람의 바른 판단과 노인들의 지혜를 찬양합니다. 두루새김은 이 흐름을 따라 「지혜를 모아 두지 않았다면」이라고 옮겼습니다.
이는 세월을 보내는 일과 세월을 통해 배우는 일이 다르다는 관찰입니다.
나이는 특별한 노력이 없어도 들어갑니다. 하지만 지혜는 시간이 지난다는 사실만으로 저절로 쌓이지 않습니다. 사람은 오랫동안 살아도 같은 잘못을 반복할 수 있습니다. 많은 일을 경험했어도 그 경험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모은다는 것은 단순히 정보를 많이 저장한다는 뜻을 넘어섭니다. 살아가면서 겪는 일들을 돌아보고, 잘못을 바로잡으며, 더 나은 판단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그렇게 모인 것이 노년에 이르러 지혜와 조언이 됩니다.
노인의 면류관은 세월이 아니라 경험이다
흰머리가 난 사람이 바르게 판단하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이 든 사람이 좋은 조언을 알아보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집회서 25:4 · 두루새김
흰머리는 나이가 들었다는 표시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옳은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교사가 찬양하는 사람은 자신의 오랜 삶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판단과 조언을 할 수 있게 된 사람입니다.
노인들의 지혜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존경받는 이들의 생각과 조언은 얼마나 아름다운가!집회서 25:5 · 두루새김
여기서 「아름다운가」라는 표현이 되풀이됩니다. 앞에서는 사람들 사이의 화목이 아름다웠습니다. 이제는 노인의 지혜와 조언이 아름답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며, 갈등을 지혜롭게 판단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의 경험은 공동체에 도움이 되는 것이 됩니다. 6절에서는 그 경험을 머리를 장식하는 관으로 묘사합니다.
풍부한 경험은 노인들의 머리를 장식하는 관이고, 그들의 자랑거리는 주를 경외함이다.집회서 25:6 · 두루새김
머리를 장식하는 관은 사람을 돋보이게 하는 명예의 표시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왕의 권력이나 재산이 관이 아닙니다. 풍부한 경험이 관입니다.
경험이 많아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오만해질 수 있습니다. 자신이 오랫동안 살아왔다는 이유로 언제나 옳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를 경외하는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지 않습니다.
자신이 아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이 더 크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세월은 사람에게 경험을 주지만, 그 경험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가르치는 기준은 주를 경외함입니다.
아홉 가지 복과 열 번째 복
사람이 복되다고 느끼는 순간들
나는 마음속으로 아홉 가지를 복되다고 여겼고, 열 번째도 내 입으로 말하겠다. 자녀들 때문에 기뻐하는 사람, 살아서 원수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는 사람은 복이 있다.집회서 25:7 · 두루새김
이것은 지혜문학에서 자주 사용되는 수를 세는 격언의 형식입니다.
잠언 30:18–19와 30:21–23에서도 몇 가지를 나열한 뒤 마지막 항목에 특별히 관심을 집중시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집회서의 이 단락에서도 중요한 것은 단순히 숫자를 세는 일보다 여러 복을 차례로 말한 뒤 무엇을 가장 높은 복으로 제시하는가에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자녀는 가족이 이어지는 것과 미래의 희망을 상징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자녀를 많이 두었다는 사실 자체보다 자녀들로 인해 기쁨을 누리는 관계를 강조합니다.
이어 살아서 원수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고대의 공동체 사회에서 원수는 단순히 개인적으로 사이가 나쁜 사람만을 뜻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나 가족의 생존을 위협하는 적대자일 수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원수가 쓰러지는 것을 본다는 표현에는 위험에서 벗어나고 억압이 끝나는 경험이 담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그 원수가 누구이며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모든 개인적 원한이 이루어지는 것을 하나님의 복이라고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잠언 24:17–18에서는 원수가 넘어질 때 기뻐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두 본문을 함께 읽으면 적대자의 위협에서 벗어나는 기쁨과, 다른 사람의 불행 자체를 즐기는 태도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깨달음 있는 아내와 함께 사는 사람은 복이 있다. 말로 실수하지 않은 사람도, 자기를 부릴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종노릇하지 않은 사람도 복이 있다.집회서 25:8 · 두루새김
여기서 아내의 중요한 자질은 겉모습의 아름다움이나 재산이 아닙니다. 깨달음입니다. 적어도 이 지혜 교사는 아내가 지혜를 갖추는 일을 가정의 복으로 분명하게 인정합니다.
말로 실수하지 않았다는 것은 말 때문에 자신과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23장에서 말의 습관을 다루었던 교훈과도 이어집니다.
「자기를 부릴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종노릇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표현에는 고대 사회의 신분과 명예에 대한 생각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자기를 부릴 자격이 없는」은 도덕적으로 반드시 악하다는 뜻으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본문에는 자신의 자유와 명예를 잃지 않는 삶을 복으로 여기던 시대의 관점이 드러납니다.
슬기를 찾은 사람은 복이 있다. 귀 기울여 듣는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도 복이 있다.집회서 25:9 · 두루새김
앞에서는 사람이 누리는 가정과 사회의 복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슬기를 찾는 사람과 그 지혜를 귀 기울여 듣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말하는 사람만 지혜롭다고 해서 좋은 가르침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들으려는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교사는 지혜를 가진 사람과 그것을 받아들이려는 사람의 만남을 복된 것으로 여깁니다.
모든 복 위에 놓인 한 가지
이제 교사는 앞에서 나열한 복들을 넘어 더 높은 기준을 제시합니다.
지혜를 찾은 사람은 얼마나 훌륭한가! 그러나 주를 경외하는 사람보다 앞서지는 못한다.집회서 25:10 · 두루새김
집회서에서 지혜는 하나님과 무관하게 인간이 스스로 완성하는 능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혜가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그 지혜가 어디에서 오며 무엇을 위한 것인지 잊어버린다면 자신이 가진 능력을 잘못 사용할 수 있습니다.
주를 경외함은 모든 것을 뛰어넘는다. 그것을 굳게 붙드는 사람을 누구와 견줄 수 있겠느냐?집회서 25:11 · 두루새김
이 말은 7절에서 시작된 복의 목록을 절정으로 이끕니다. 이것은 인간이 누리는 복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복들이 올바른 자리를 갖도록 해 줍니다.
자녀가 기쁨이 되더라도 자녀를 자기 소유물처럼 대하지 않게 하고, 지혜를 얻더라도 그 지혜로 다른 사람을 억누르지 않게 하며, 사회적 명예를 얻더라도 그것을 절대적인 가치로 여기지 않게 하는 기준입니다.
그러나 13절부터 분위기가 급격히 달라집니다.
조금 더 깊이
다만 두루새김이 따르는 그리스어 본문에서는 7–9절에 분명하게 나열된 복이 일곱 항목입니다. 10절에는 지혜를 찾은 사람과 주를 경외하는 사람이 등장하지만, 아홉 가지와 열 번째를 하나씩 정확하게 맞추기는 어렵습니다. 본문에 없는 항목을 마음대로 보충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름다운 동행이 어떻게 두려운 동거로 바뀌었는가
마음의 상처에서 여자의 악의로
어떤 상처라도 마음의 상처만은 아니기를 바란다. 어떤 악한 마음이라도 여자의 악한 마음만은 아니기를 바란다.집회서 25:13 · 두루새김
이 구절의 처음에는 이해할 만한 경험이 담겨 있습니다.
몸의 상처도 고통스럽지만 마음에 깊이 남은 상처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특히 가까운 사람에게 받은 상처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문제는 다음 행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악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위험하다는 일반적인 교훈이 아닙니다. 특정 성별을 지목하면서 그 성별의 악한 마음을 특별히 두려운 것으로 표현합니다.
14절에서는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불러오는 재앙과 원수들의 보복을 피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15절에서는 뱀의 머리와 원수의 분노를 비교합니다.
뱀의 머리보다 더한 머리는 없고, 원수의 분노보다 더한 분노는 없다.집회서 25:15 · 두루새김
이 표현에서는 뱀의 머리가 가진 위협적인 인상이 살아납니다. 이 비유는 원수의 분노와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핵심은 뱀의 몸 구조보다, 사람이 가까이하기 두려워하는 위험을 강조하는 데 있습니다.
사자와 용보다 두렵다는 표현
악한 여자와 함께 사느니, 나는 차라리 사자와 용과 함께 살겠다.집회서 25:16 · 두루새김
이것은 명백한 과장입니다.
사자와 용은 인간이 안전하게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동물이 아닙니다. 여기서 「악한 여자」는 문맥상 배우자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비유는 여성 일반과의 접촉을 피하라는 말이라기보다, 악한 배우자와 한집에서 살아가는 고통을 강조합니다.
교사는 악한 남편과 사는 아내의 고통을 같은 방식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남편의 시선에서 아내를 평가하고, 그 아내가 남편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지를 강조합니다.
물론 배우자의 악한 마음과 폭력이 가정생활을 파괴할 수 있다는 관찰 자체는 성별과 무관하게 타당합니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반복되는 적대감과 모욕은 심각한 상처를 남길 수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이 주는 상처가 깊다는 통찰과, 여자의 악한 마음이 특별히 더 크다는 주장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첫 번째는 인간관계에 관한 관찰입니다. 두 번째는 그 관찰을 특정 성별에 집중시키는 판단입니다.
웃을 수 없는 남편과 모래투성이 오르막길
아내의 얼굴과 남편의 탄식
여자의 악한 마음은 그 여자의 모습을 바꾸고, 그 얼굴을 거친 베옷처럼 어둡게 만든다.집회서 25:17 · 두루새김
이 표현을 실제로 얼굴이 어둡거나 표정이 좋지 않은 사람은 악한 사람이라는 판단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이는 마음의 상태가 겉모습에 드러난다는 지혜문학적 비유입니다.
처음에는 관계의 조화가 아름다움을 만들었습니다. 여기서는 관계를 파괴하는 악한 마음이 그 아름다움을 훼손합니다.
그 여자의 남편은 이웃들 가운데 기대어 앉아, 말을 듣고 쓰라리게 한숨을 내쉰다.집회서 25:18 · 두루새김
주변 사람들은 평범한 대화를 나누거나 식사를 하고 있을 수 있지만, 그는 가정의 문제 때문에 마음이 무겁습니다. 본문은 무엇을 들었는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교사는 이처럼 부부 사이의 문제가 가정 안에서만 끝나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도 마음을 짓누를 수 있다고 묘사합니다.
노인의 발과 조용한 남편
19절은 매우 극단적인 표현으로 이어집니다.
다른 모든 악도 여자의 악에 비하면 작다. 죄인이 받을 몫이 그 여자에게 떨어지기를 바란다.집회서 25:19 · 두루새김
이는 자신이 두려워하는 악을 극대화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과장법이라고 해서 그 표현의 성별 편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표현은 악한 배우자의 행동을 비판하는 데서 더 나아가, 여성이라는 성별에 대한 부정적 인상을 강화합니다.
조용한 남편에게 말 많은 아내는 노인의 발 앞에 놓인 모래투성이 오르막길과 같다.집회서 25:20 · 두루새김
3–6절에서는 지혜로운 노인의 흰머리와 경험이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노인의 발은 약하고 지치기 쉬운 것으로 등장합니다. 모래투성이 오르막길은 걷기 어렵습니다. 발을 내디뎌도 모래가 밀리기 때문에 힘이 많이 듭니다.
부부는 서로 말하는 방식이 다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조용히 생각할 시간을 필요로 하고, 다른 사람은 말을 많이 나누면서 관계를 확인하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차이만으로 어느 한쪽을 어리석거나 악하다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이 구절이 보여 주는 고통의 실제적인 측면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성향과 태도가 충돌할 때 서로를 지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지혜 교사는 그 충돌을 남편의 관점에서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편적인 부부 관계의 원리로 발전시키려면 남편 역시 자신의 말과 행동이 아내에게 어떤 부담을 주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그리스어 전승에는 얼굴을 베옷처럼 어둡게 한다는 읽기와 곰처럼 어둡게 한다는 읽기가 있어, 비유의 구체적인 대상에 차이가 있습니다.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기대어 눕는 자세는 식사나 모임의 자리와 연결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는 원문상 주목할 차이도 있습니다. 두루새김의 「말을 듣고」처럼 듣는 행동을 나타내는 아쿠사스를 사용하는 그리스어 전승이 있는 반면, 아쿠시오스를 사용하는 전승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본의 아니게」라는 뜻이 됩니다. 후자로 읽으면 남편이 이웃들 가운데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쓰라린 한숨을 내뱉는 장면이 됩니다.
아내가 남편을 부양하는 것이 왜 수치인가
외모를 향한 욕망에서 가정의 권력으로
여자의 아름다움에 빠지지 말고, 여자를 탐내지 마라.집회서 25:21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앞에서 묘사한 악한 아내의 문제와 조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이것은 결혼할 상대를 선택할 때 외모만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권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어 표현은 여자를 향한 욕망 자체를 경계하는 형태이므로, 단순히 외모보다 성품을 보라는 온건한 충고로만 줄여 읽을 수는 없습니다.
8절에서는 깨달음 있는 아내와 함께 사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21절에서는 아름다움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는 아내의 외모보다 지혜와 분별을 더 귀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는 그 판단에 또 다른 기준이 들어옵니다.
아내의 경제적 능력이 수치로 여겨지는 사회
아내가 남편을 먹여 살리면, 분노와 뻔뻔함과 큰 수치가 생긴다.집회서 25:22 · 두루새김
본문은 아내가 어떤 방식으로 돈을 벌었는지, 남편이 왜 도움을 받아야 하는지, 그 가정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단지 아내가 남편을 먹여 살린다는 상황을 분노와 뻔뻔함과 수치에 연결합니다.
남편이 가정의 경제적 책임과 권위를 맡아야 한다고 기대하는 사회에서, 아내가 남편을 먹여 살린다는 사실은 남편의 역할과 지위가 뒤바뀐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회적 기대를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같다고 볼 근거는 이 구절에 없습니다.
오히려 잠언 31:10–31은 다른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곳의 유능한 아내는 밭을 사고, 포도원을 마련하며, 물건을 만들어 팔고, 집안의 경제적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잠언 31:16, 24). 그 여자의 경제적 능력은 수치가 아닙니다. 오히려 가정에 이익을 주고 존경을 받는 근거로 묘사됩니다.
물론 잠언 31장의 여자가 남편을 전적으로 먹여 살린다는 동일한 상황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성이 경제적 능력을 가지고 가정의 살림을 풍요롭게 하는 일이 존경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는 집회서 25:22의 부정적인 평가와 분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따라서 집회서의 이 구절을 여자가 남편보다 돈을 많이 벌거나 남편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면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일이라는 보편적인 규범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실제로 그러한 상황을 수치로 여깁니다. 그 사실을 감출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평가는 고대의 특정한 사회 질서 속에서 형성된 판단으로 구별해야 합니다.
마음의 상처가 남편에게만 있는가
악한 아내는 마음을 짓누르고 얼굴을 어둡게 하며, 마음에 상처를 준다. 남편을 복되게 하지 않는 아내는 그의 손을 축 늘어뜨리고 무릎에서 힘이 빠지게 한다.집회서 25:23 · 두루새김
이 절은 악한 배우자와 함께 사는 고통을 몸의 여러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여기서 교사는 배우자에게서 받는 상처가 단순히 한순간의 기분 나쁨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지속적인 적대감과 모욕은 사람의 마음을 지치게 하고, 일상생활을 감당할 힘까지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도 고통을 겪는 사람은 남편이고, 그 고통을 일으키는 사람은 아내입니다. 남편이 아내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다는 반대 방향의 문제는 다루지 않습니다. 배우자가 다른 배우자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줄 수 있는지는 사실이지만, 그 상처를 줄 가능성이 어느 한 성별에만 있다고 볼 근거는 없습니다.
더욱이 아내가 남편을 「복되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를 아내의 잘못으로 규정하는 표현에는 남편이 아내에게서 존경과 만족을 받아야 한다는 기대가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실제로 존경받을 만하게 행동했는지, 아내가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는 이 단락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제 그는 그 관점을 가정생활의 경험에서 창세기의 이야기로까지 확대합니다.
「여자에게서 죄가 시작되었고」라는 말의 의미
여자에게서 죄가 시작되었고, 그 여자 때문에 우리 모두가 죽는다.집회서 25:24 · 두루새김
이 절은 집회서 25장에서 가장 중요한 해석상의 갈림 가운데 하나입니다.
본문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앞에서 이야기한 악한 아내일까요? 아니면 창세기에 등장하는 첫 여자일까요?
첫 번째 읽기 — 창세기 3장의 여자
가장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는 대상은 창세기 3장의 여자입니다.
집회서의 「죄가 시작되었고」와 「우리 모두가 죽는다」는 표현을 함께 놓으면, 창세기의 불순종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떠올리게 됩니다. 반면 창세기의 첫 여자를 가리킨다는 읽기는 그러한 표현들을 자연스럽게 설명하지만, 부부 관계에 관한 격언에서 갑자기 인류 전체의 시작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간다는 점을 설명해야 합니다.
두 번째 읽기 — 악한 아내가 불러오는 죄와 파멸
문맥을 더 좁게 읽으면 다른 가능성도 있습니다.
13절부터 교사는 계속해서 악한 아내 때문에 남편이 겪는 고통을 이야기해 왔습니다. 그 흐름에서 24절을 읽으면, 여자의 악한 행동 때문에 남편이 죄와 파멸에 빠지며 결국 삶이 무너진다는 극단적인 격언으로 이해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경우 「우리 모두」는 남성 독자들의 처지를 대표하는 표현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읽기는 「죄가 시작되었고」와 「우리 모두가 죽는다」는 넓은 범위를 아우르는 표현을 충분히 설명해야 하는 부담이 있습니다. 따라서 창세기 3장을 배경으로 읽는 것이 유력하지만, 현재 단락의 악한 아내에 관한 경고가 그 표현에 영향을 주었다는 가능성도 함께 고려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이 말하지 않는 것
두 읽기 가운데 어느 쪽을 따르더라도, 이 구절만으로 모든 여성이 남성보다 본질적으로 더 죄가 많거나 더 악하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창세기 3장의 이야기는 여자 혼자 잘못을 저질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열매를 먹었고, 남자도 그 열매를 먹었습니다(창세기 3:6). 하나님은 여자에게도 말씀하시고 남자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남자 역시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집니다(창세기 3:17–19).
그런데 집회서 25장의 문맥은 여자의 악을 극단적으로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이 문장이 여성 전체에 대한 부정적인 일반화로 사용될 위험이 실제로 존재합니다. 그 위험을 인정하면서 본문이 무엇을 주장하고 무엇을 주장하지 않는지 구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구절은 죄와 죽음에 관한 완성된 신학 체계를 제시하는 문장이 아닙니다. 악한 아내를 경계하는 단락에서 창조 이야기 또는 그에 준하는 보편적인 표현을 끌어와 경고를 극대화하는 격언입니다.
조금 더 깊이
신약의 로마서 5:12–19에서는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을 통해 죄와 죽음이 인류에게 미친다는 방식으로 같은 창세기 이야기를 해석합니다. 이는 집회서 25:24의 직접 인용이 아니라, 첫 인간의 불순종을 서로 다르게 부각하는 후대의 정경적 읽기입니다. 이 차이는 성경의 여러 저자가 같은 이야기를 사용하면서도 서로 다른 부분을 강조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물길을 막으라는 명령과 한 몸을 잘라 내라는 명령
물이 빠져나갈 틈을 내주지 말라는 말
물이 빠져나갈 틈을 내주지 말고, 악한 아내에게 마음대로 할 권한을 주지 마라.집회서 25:25 · 두루새김
이 비유에는 실제 생활에서 익숙한 위험이 담겨 있습니다.
저장된 물이나 농사에 쓰는 수로의 물이 통제되지 않은 곳으로 흘러나가면, 필요한 물이 사라지거나 주변에 피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물을 관리하는 사람은 물길을 적절히 통제해야 합니다. 교사는 이 이미지를 악한 아내에게 적용합니다.
22절에서는 아내가 남편을 먹여 살리는 상황을 수치로 여겼습니다. 25절에서는 아내에게 「마음대로 할 권한」을 주지 말라고 합니다. 두 구절에는 공통된 전제가 있습니다. 가정의 권위는 남편에게 있어야 하고, 아내가 그 질서를 뒤바꾸는 일은 위험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곧바로 하나님께서 모든 가정에서 남편에게 아내의 삶을 일방적으로 통제할 권한을 주셨다는 선언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그 주장은 본문이 사용하는 사회적 비유를 보편적인 신학 명령으로 확대하는 것입니다.
「네 몸에서 잘라 내듯 그 여자와 갈라서라」는 무엇을 뜻하는가
그 여자가 네 뜻을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면, 네 몸에서 잘라 내듯 그 여자와 갈라서라.집회서 25:26 · 두루새김
이 표현을 여자의 몸을 실제로 해치라는 명령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문맥상 부부 관계를 끊거나 아내를 자신에게서 분리하라는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또한 「네 뜻을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면」이라는 조건 자체에도 남성 중심적인 전제가 있습니다. 아내가 남편의 뜻에 따라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관계를 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배우자의 독립적인 판단과 의사를 존중하는 상호적인 관계보다, 남편의 권위를 중심으로 혼인 관계를 이해하는 관점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25절의 그리스어 전승에는 권한·지배할 수 있는 힘에 해당하는 표현이 있고, 다른 전승에는 거리낌 없이 말하거나 행동하는 자유가 나타납니다. 전자는 권한을 주지 말라는 뜻에, 후자는 거리낌 없이 행동하거나 말할 자유를 주지 말라는 뜻에 무게가 있습니다. 특히 창세기 2:24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룬다고 말합니다. 집회서 25:26은 그와 동일한 문구를 그대로 인용하지는 않지만, 아내를 자기 몸에서 잘라 내듯 갈라서라는 표현은 부부가 한 몸으로 결합된 관계라는 생각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이 절을 법률적인 이혼 절차에 관한 완전한 규정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남편에게 행동을 권하는 격언이지, 혼인 관계를 끝내는 데 관한 세부 법률이 아닙니다.
서로 어울려 서 있는 두 사람
집회서 25장은 부부의 화목을 가장 아름다운 인간관계 가운데 하나로 제시하면서도, 그 화목을 유지하기 위한 관계의 질서를 남편의 권위에 크게 의존하여 설명합니다. 이 장은 지혜로운 관계의 아름다움을 보여 주는 동시에, 고대의 지혜 교사가 관계를 바라보던 시선의 한계까지 드러냅니다. 그 둘을 함께 살펴볼 때 본문이 가르치려는 지혜와 그 지혜가 표현된 시대의 생각을 더 정확하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파괴적인 관계가 지속될 때에는 그 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것만이 지혜로운 선택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가정 안에서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그의 말을 들으며, 자기 권위를 남용하지 않는 일도 주를 경외하는 삶과 무관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집회서 25장이 명시적으로 완성해 놓은 상호적인 혼인 윤리라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의 앞부분이 제시한 가치와 다른 구약 본문들을 함께 읽으면서 발전시킬 수 있는 신학적 성찰입니다.
집회서 25장의 첫 장면에는 그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습니다.
「아내와 남편이 서로 어울려 살아가는 것」.
이 장이 가장 먼저 아름답다고 부른 모습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