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 풀어 읽기 · 9장

이 장의 자리 · 1–9장 · 아담에서 이어진 족보

다시 열리는 하나님의 집

나라가 무너졌습니다. 백성은 고향에서 쫓겨났고, 예루살렘과 성전은 파괴되었습니다. 그런데 역대상 9장이 이 비극을 언급한 다음 보여 주는 것은 뜻밖에도 성전을 지키는 사람들의 일상입니다.

누군가는 문을 지키고, 누군가는 창고를 관리합니다. 어떤 사람은 기구들을 하나씩 세어 보고, 어떤 사람은 향료를 섞고 빵을 만듭니다. 노래하는 사람들은 맡은 일에 전념하고, 문지기들은 성전 곁에서 밤을 보낸 뒤 아침마다 문을 엽니다.

왜 역대기는 나라가 멸망한 이유를 단 한 문장으로 설명하면서, 문지기들의 업무에는 이렇게 많은 지면을 할애할까요?

나라의 회복은 단지 잃어버린 땅을 되찾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공동체가 다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읽는 시간 21분소단락 79장 본문 읽기 →

모든 이름을 기록한 뒤, 한 문장으로 설명한 멸망

역대상 9:1–2 본문 →

역대상은 1장부터 8장까지 긴 족보를 기록했습니다. 아담에서 시작해 이스라엘의 지파들로 이어지는 수많은 이름이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9장 1절은 그 명단 전체를 정리하듯 말합니다.

온 이스라엘은 계보에 따라 등록되었고, 그들은 이스라엘 왕들의 책에 기록되어 있었다. 유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배신 행위 때문에 바벨론으로 끌려갔다.역대상 9:1 · 본디새김

여기서 역대기는 족보가 단순히 과거를 회상한 기록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의 역사를 보존하는 수단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 왕들의 책’은 역대기가 알고 있던 왕실 또는 역사 기록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그 자료의 정확한 구성이나 내용은 확인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성경의 열왕기와 동일한 책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수많은 세대의 이름을 길게 소개하던 기록이 갑자기 국가적 멸망으로 넘어갑니다. 한 문장 안에서 오랜 역사의 흐름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배신 행위’는 단순히 실수했다거나 규칙 하나를 어겼다는 것보다 무거운 의미를 가집니다. 본래 지켜야 할 관계와 책임을 저버렸다는 뜻입니다.

역대상 5:25–26에서는 요단 동쪽 지파들이 조상들의 하나님을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랐기 때문에 아시리아로 끌려갔다고 기록합니다. 역대하 36:14–21에서는 지도자들과 백성이 불신실하게 행동하고 하나님의 경고를 거절한 끝에 예루살렘과 성전이 파괴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유다의 멸망은 단지 바벨론이라는 강대국이 군사적으로 승리한 사건이 아닙니다. 역대기는 그것을 여호와야훼와 맺은 관계를 저버린 결과로 해석합니다. 이 진술이 포로로 끌려간 각 개인의 죄책을 똑같이 판단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은 유다 공동체의 역사에 대한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멸망에 대한 설명은 이것으로 끝납니다.

자기 성읍들에 있는 자기 소유지에 처음 자리 잡은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느디님이었다.역대상 9:2 · 본디새김

앞에서 바벨론 유배를 언급했으므로, 유배 이후 돌아와 정착한 첫 주민들을 가리킨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에스라 2:70과 느헤미야 11:3에도 백성이 자기 성읍과 소유지에 정착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반면 이 표현을 유배 이전에 각 성읍과 소유지에 살던 초기 주민들에 대한 회고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원문에는 ‘돌아왔다’는 동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2절 이하의 명단 전체를 특정한 귀환 시기의 주민 명부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뒤에 나오는 명단에는 여러 시대의 성막 및 성전 봉사 전통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역대기는 나라가 멸망했다고 말한 직후, 이스라엘이 어디에서 살았으며 어떤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는지 다시 기록합니다. 그것은 멸망이 이스라엘에 관한 이야기의 마지막 문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독자에게 보여 줍니다.

느디님은 누구인가?

느디님은 성전 봉사를 돕도록 배정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히브리어 이름은 ‘주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에서 유래하며, 에스라 8:20은 이들이 레위 사람들의 봉사를 돕는 집단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공동체의 일반 구성원을,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은 예배와 성전의 특별한 직무를 맡은 집단을 가리킵니다. 느디님은 그 봉사를 보조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네 집단은 민족적으로 서로 완전히 분리된 네 부류라기보다, 공동체 안의 역할을 구분한 것입니다.

역대기가 기억하는 이스라엘은 제사를 집전하는 제사장들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일이 가능하도록 뒤에서 돕는 사람들도 공동체를 구성합니다.

이제 본문은 그 사람들이 거주했던 예루살렘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

역대상 9:3–9 본문 →

예루살렘에는 유다 자손과 베냐민 자손과 에브라임과 므낫세 자손 가운데 일부가 살았다.역대상 9:3 · 본디새김

이스라엘 왕국이 분열된 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주로 북왕국 이스라엘과 관련된 지파들이었습니다. 반면 예루살렘은 남왕국 유다의 중심지였습니다. 역대기는 정치적으로 분열되었던 왕국들의 역사를 알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남왕국에만 한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일부가 예루살렘에 살았다는 사실만으로 북쪽 열 지파 전체가 귀환했다고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이 명시하는 것은 일부 후손의 거주입니다.

예루살렘은 유다의 수도였지만, 역대기가 그리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유다 한 지파보다 넓습니다.

4–9절에서는 실제 거주자들의 가문이 소개됩니다. 유다 자손 가운데는 베레스의 후손 우대가 등장합니다. 또 실로 사람들과 세라의 자손이 기록되고, 베냐민 자손 가운데 살루와 이브느야, 엘라와 므술람이 등장합니다.

5절의 ‘실로 사람들’이 실로라는 지역 출신인지, 유다의 아들 셀라의 후손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38:5와 민수기 26:20에는 셀라가 유다의 아들로 등장하므로 후자의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역대상 9장의 표기만으로 어느 쪽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족보는 6절에 690명, 9절에 956명을 기록합니다. 본문은 특정 가문과 그 형제들의 수를 기록하고 있으며, 도시 전체의 인구 조사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 명단과 느헤미야 11:4–9의 예루살렘 주민 명단을 비교하면 구조와 일부 가문이 서로 닮았지만 이름과 숫자는 일치하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두 기록을 동일한 날짜에 작성된 명부처럼 합쳐서는 안 됩니다.

역대상 9장은 조상들이 누구였는가를 기록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 후손들이 어디에 자리를 잡고 공동체를 이루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단락에서, 이 공동체가 중심에 두고 있는 장소가 드러납니다.

왕궁보다 먼저 등장하는 하나님의 집

역대상 9:10–16 본문 →

10절부터 명단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또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아사랴가 있었다. 아사랴는 힐기야의 아들, 힐기야는 므술람의 아들, 므술람은 사독의 아들, 사독은 므라욧의 아들, 므라욧은 아히둡의 아들이었다.역대상 9:11 · 본디새김

지금까지는 예루살렘에 사는 가문들이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집에서 맡은 직무가 등장합니다. 본문은 예루살렘의 주민을 소개한 다음 그 도시에서 예배를 담당하는 사람들을 자세하게 기록합니다.

그들의 형제들, 곧 조상 집안의 우두머리들은 1,760명이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집에서 섬기는 일을 하는 유능한 사람들이었다.역대상 9:13 · 본디새김

‘유능한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다른 문맥에서는 힘센 용사나 용맹한 전사들을 가리킬 수 있는 말입니다. 이 문맥에서는 군사적인 용맹보다 맡은 봉사를 감당할 능력과 역량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전쟁에서 활약하는 용사나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자를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역대상 9장은 하나님의 집에서 맡은 일을 수행하는 사람들에게도 능력을 나타내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역대기가 이곳에서 소개하는 능력은 하나님의 집을 섬기는 능력입니다.

14–16절에서는 레위 사람들 가운데 스마야와 맛다냐, 오바댜와 베레갸 등이 등장합니다. 특히 맛다냐는 아삽의 후손으로, 오바댜는 여두둔의 후손으로 소개됩니다. 아삽과 여두둔은 역대기의 다른 부분에서 성전 음악과 관련된 인물들입니다(역대상 16:37–42; 25:1–3).

이러한 이름들이 여기에서 등장한다는 사실은 뒤에 나오는 노래하는 사람들의 직무와 연결됩니다. 예루살렘 공동체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제사를 집전하는 일만이 아니었습니다. 음악과 찬양, 그리고 그 봉사를 유지하는 사람들의 활동도 포함되었습니다.

그러나 역대기는 이보다 더 많은 지면을 다른 직무에 할애합니다.

바로 문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문지기들의 족보가 이렇게 긴 이유

역대상 9:17–27 본문 →

17절에는 살룸과 악굽과 달몬과 아히만이라는 문지기들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27절까지 문지기에 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이것은 본문에서 가장 길고 구체적인 직무 설명 가운데 하나입니다.

문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인가

성막과 성전의 문지기들에게도 출입을 관리하는 역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책임은 단순한 경비를 넘어섭니다.

이스라엘의 성소는 아무나 원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관련된 구별과 규정이 있었으며,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에게 각각 맡겨진 역할이 있었습니다.

민수기 3:5–10에서는 레위 사람들이 성막을 관리하고 제사장들의 봉사를 돕도록 배정됩니다. 민수기 18:1–7에서도 성소와 제사장의 직무에 관한 책임과 경계가 강조됩니다.

성소의 문은 하나님께 나아오는 길과 관계된 곳이면서, 동시에 아무런 구별 없이 들어갈 수 없는 경계였습니다. 문지기의 일은 단지 문을 닫아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이 정해진 질서에 따라 사용되도록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고라의 후손들이 문을 지키다

살룸은 고레의 아들, 고레는 에비아삽의 아들, 에비아삽은 고라의 아들이었다. 살룸과 그의 조상 집안에 속한 형제들, 곧 고라 자손들은 봉사하는 일을 맡아 천막의 문지방을 지켰다. 그들의 조상들은 여호와야훼의 진영을 맡아 입구를 지켰다.역대상 9:19 · 본디새김

민수기 16장에서는 고라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모세와 아론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반역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민수기 26:11은 뜻밖의 사실을 전합니다. 고라의 아들들은 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고라의 반역은 성소의 권위와 접근에 관한 문제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민수기 16:9–10에서 모세는 고라와 레위 사람들이 이미 받은 봉사를 가볍게 여기고 제사장의 직분까지 요구한다고 책망합니다.

물론 역대상 9장은 고라의 후손들이 조상의 반역을 회개했기 때문에 문지기가 되었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두 사건 사이의 구체적인 과정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한때 성소의 직무와 경계를 둘러싸고 반역했던 가문의 후손들이, 훗날 성소의 입구를 맡아 지키는 사람들로 기록된 것입니다.

이 대조가 보여 주는 것은 고라의 잘못이 정당화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반역은 여전히 반역입니다. 다만 한 조상의 심판이 그에게 속한 모든 후손의 역사까지 끝내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라 자손은 시편에서도 노래하는 공동체로 등장합니다. 시편 42편과 84편 등의 표제는 고라 자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특히 시편 84편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집 문지방에 서 있는 것을 악인의 장막에서 사는 것보다 더 좋아한다고 고백합니다.

그 시편을 역대상 9장의 문지기들과 동일한 상황에서 쓰인 노래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고라 자손과 하나님의 집, 그리고 그 문지방이 성경 안에서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비느하스와 다윗과 사무엘 — 오래된 봉사의 계승

20절은 더 오래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이전에 그들의 지도자였고, 여호와야훼가 그와 함께했다.역대상 9:20 · 본디새김

비느하스는 광야 시대의 제사장입니다. 민수기 25:6–13에서 그는 이스라엘의 배교 사건 가운데 행동했고, 여호와야훼는 그에게 평화의 언약과 제사장 직분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또 여호수아 22:13–34에서는 요단 동쪽 지파들이 세운 제단을 둘러싼 갈등을 조사하고, 그 지파들이 여호와야훼를 떠난 것이 아님을 확인하는 일에 참여합니다.

앞의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 명단에서는 혈통과 직무가 강조되었지만, 여기서는 한 사람과 함께하신 여호와야훼가 명시적으로 등장합니다. 역대상 9장에는 하나님께서 새롭게 기적을 행하시거나 직접 명령을 내리시는 장면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 장의 모든 직무와 활동을 하나님께서 직접 지시하신 결과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다음 22절은 다윗과 선견자 사무엘을 언급합니다.

문지방을 지키는 문지기로 뽑힌 사람들은 모두 212명이었다. 이들은 자기 마을들에서 계보에 따라 등록되었다. 다윗과 선견자 사무엘이 이들을 세워 책임을 맡겼다.역대상 9:22 · 본디새김

비느하스는 광야 시대의 인물이고, 사무엘과 다윗은 왕정이 시작되던 시대의 인물입니다. 9장은 서로 다른 시대의 인물들을 한 단락에 모읍니다. 이는 현재 설명하고 있는 문지기의 직무를 오래된 성막 봉사와 연결하는 방식입니다.

다만 212명 모두가 사무엘과 다윗에 의해 직접 임명되었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이 문지기 직무의 제도와 책임을 세운 인물들로 기억되고, 그 전통이 후대에 이어졌다는 설명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또한 본문은 ‘여호와야훼의 집’과 ‘천막’, ‘만남의 천막’이라는 표현을 함께 사용합니다(19, 21, 23절). 이는 광야 시대 성막의 봉사에서 후대 하나님의 집의 봉사까지 이어지는 전통을 서술하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든 직무가 하나의 건물에서 같은 시대에 수행되었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바뀌고 성소의 형태가 바뀌어도, 하나님의 집을 지키는 직무는 계속 전해졌습니다.

아침마다 문을 여는 사람들

24–27절에 이르면 설명은 더욱 구체적으로 변합니다.

문지기들은 동서남북 네 방향에 배치되었습니다. 주변 마을에 거주하는 형제들은 정해진 때에 와서 이레 동안 함께 봉사했습니다. 네 명의 우두머리 문지기는 방과 창고까지 관리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집 둘레에서 밤을 지냈다. 경비할 책임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아침마다 문을 여는 일을 맡았다.역대상 9:27 · 본디새김

아침마다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반복이 없다면 하나님의 집의 질서 있는 봉사도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역대기는 이 평범한 행동을 아무 의미 없는 잡무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래된 가문의 역사와 책임을 설명한 끝에 이들의 일상을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집을 지키는 일은 한 번의 특별한 행동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맡은 책임을 다음 날에도 계속 수행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역대기는 문지기의 일상에 이어, 성소의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더욱 세밀한 일들을 기록합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의 ‘여는 것’에 해당하는 표현은 문을 여는 행위나 열쇠를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아침마다 수행하는 행동으로 이해했습니다. 어느 쪽이든 핵심은 변하지 않습니다. 문을 열 수 있는 권한과 책임이 그들에게 맡겨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는 물건을 세는 일도 있었다

역대상 9:28–34 본문 →

28절에는 매우 구체적인 업무가 등장합니다.

그들 가운데는 봉사에 쓰는 기구들을 맡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그 기구들을 수를 세어 들여오고, 수를 세어 내갔다.역대상 9:28 · 본디새김

이것은 기구의 분실이나 잘못된 사용을 방지하고, 맡겨진 물건들을 정확히 관리하기 위한 절차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문이 그러한 관리의 구체적인 사유를 설명하지는 않지만, 수량을 반복하여 확인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29절에서는 관리 대상이 더 넓어집니다.

그들 가운데는 기구들과 모든 거룩한 기구들, 고운 가루와 포도주와 기름과 유향과 향료들을 관리하도록 임명된 사람들도 있었다.역대상 9:29 · 본디새김

이 물품들은 성막과 성전의 봉사에 사용되는 것들입니다. 고운 가루와 포도주와 기름은 제물과 제사 규정에 등장하고(민수기 15:1–10), 유향과 향료도 거룩한 봉사와 관련됩니다(출애굽기 30:34–38; 레위기 24:7).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제의는 필요한 물품이 제대로 준비되어 있어야 수행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물건을 보관하고, 누군가는 필요한 것을 준비하며, 누군가는 그것이 제대로 사용되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역대기는 이들을 이름 없는 노동력으로만 취급하지 않습니다. 가문의 계보와 함께 그들이 수행하는 책임을 기록합니다.

향료를 섞는 사람과 빵을 만드는 사람

30절에는 제사장 자손 가운데 향료를 섞어 향품을 만드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출애굽기 30:34–38에는 거룩한 향을 만드는 규정이 있으며, 그 향을 일반적인 목적으로 마음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제한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소에서 향을 만드는 일은 정해진 규정에 따라 이루어지는 봉사였습니다.

31절은 한 사람의 이름을 기록합니다.

레위 사람들 가운데 맛디댜는 고라 자손 살룸의 맏아들이었으며, 넓적한 빵을 만드는 책임을 맡았다.역대상 9:31 · 본디새김

앞에서는 성소의 지도자와 문지기들의 가문이 소개되었는데, 여기서는 빵을 만드는 한 사람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기록합니다. 맛디댜가 만드는 빵이 어떤 의식에 사용되었는지는 31절만으로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직무가 성소 봉사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32절에는 또 다른 빵이 등장합니다.

그들의 형제들인 그핫 자손 가운데 일부는 줄지어 놓는 빵을 맡아 안식일마다 준비했다.역대상 9:32 · 본디새김

이 빵은 레위기 24:5–9에서 규정하는, 여호와야훼 앞에 진설하는 빵과 연결됩니다. 레위기에는 고운 가루로 만든 열두 개의 빵을 두 줄로 놓고, 안식일마다 여호와야훼 앞에 새롭게 차려 놓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 빵은 제사장들이 거룩한 곳에서 먹도록 되어 있습니다.

문지기는 아침마다 문을 엽니다. 빵을 맡은 사람들은 안식일마다 빵을 준비합니다.

성전의 질서는 특별한 절기에만 유지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매일의 경비와 매주의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반복을 신앙의 본질과 무관한 부수적인 활동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노래하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일을 맡기지 않았다

33절에서는 다시 업무의 성격이 바뀝니다.

이들은 노래하는 사람들로서 레위 사람들의 조상 집안 우두머리들이었다. 이들은 방들에 머물며 다른 일을 면제받았다. 밤낮으로 그 일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역대상 9:33 · 본디새김

여기서 ‘이들’은 앞에서 언급한 모든 레위 사람이 노래하는 사람이었다는 뜻이라기보다, 노래하는 사람들의 집단을 새롭게 소개하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 표현을 모든 사람이 하루 스물네 시간 쉬지 않고 노래했다는 뜻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찬양과 관련된 지속적인 봉사 책임이 그들의 주요 직무였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든 레위 사람이 모든 일을 동일하게 수행하는 구조가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경비와 창고 관리가 맡겨졌고, 어떤 사람에게는 빵을 준비하는 일이 맡겨졌으며, 어떤 사람은 노래하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이는 각자의 봉사가 서로 다르면서도 하나님의 집이라는 하나의 목적 안에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한 사람이 모든 일을 수행하는 것이 반드시 좋은 봉사의 모습은 아닙니다. 공동체에는 서로 다른 책임이 필요하고, 어떤 일은 그 일을 맡은 사람이 충분히 집중할 수 있도록 다른 부담을 덜어 주어야 합니다.

본문의 출발점은 효율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에서 수행해야 할 봉사입니다. 그 봉사가 충실하게 이루어지도록 역할이 구분되어 있는 것입니다.

배신 행위와 맡겨진 책임 — 무너진 공동체가 다시 배워야 할 것

역대상 9장에는 눈에 띄는 의미상의 대조가 있습니다.

1절에서는 유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배신 행위’ 때문에 바벨론으로 끌려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17–33절에서는 사람들이 맡은 직무와 책임이 반복해서 강조됩니다.

22절에서는 다윗과 사무엘이 문지기들에게 책임을 맡겼습니다. 26절에서는 네 명의 우두머리 문지기가 방과 창고를 관리하는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31절에서는 맛디댜가 빵을 만드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이 구절들에는 히브리어 에무나(신실함·신뢰할 만함·충실한 책임 수행)와 관련된 표현이 사용됩니다. 에무나는 사람의 믿음이나 신실함을 나타낼 수 있지만, 이 문맥에서는 맡겨진 직무와 그에 따른 책임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것을 모두 개인적인 신앙심에 대한 평가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역대상 9장이 이들의 충실함 때문에 바벨론 유배가 끝났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들의 봉사가 과거의 배신을 속죄했다거나, 성전 봉사의 회복만으로 이스라엘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주장해서도 안 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어떤 일을 맡았는가보다, 그 일이 누구의 집을 위한 일이었는가입니다.

역대상 9장은 반복해서 그 장소를 ‘하나님의 집’ 또는 ‘여호와야훼의 집’이라고 부릅니다(11, 13, 23, 26–27절). 문지기의 직무가 중요한 것은 문 자체가 특별해서가 아닙니다. 그 문이 여호와야훼의 집에 속한 문이기 때문입니다.

기구와 빵이 중요한 것도 물건 자체의 값어치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것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위해 구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이름으로 성전을 소유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집을 맡아 섬깁니다.

맡은 책임을 감당한다는 것은 자신이 공동체의 주인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주어진 것을 충실하게 관리한다는 뜻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에스라 3:1–6에서 귀환한 사람들은 성전의 기초가 놓이기 전부터 제단을 세우고 여호와야훼께 제사를 드립니다. 느헤미야 10:32–39에서는 백성이 하나님의 집에 필요한 물품과 재정을 공급하고, 그 집을 소홀히 하지 않기로 약속합니다. 이 본문들은 역대상 9장과 동일한 사건을 서술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공동체의 회복이 하나님을 섬기는 삶의 회복과 연결된다는 공통된 관심을 보여 줍니다.

성전의 문에서 다시 사울의 집안으로

역대상 9:35–44 본문 →

34절까지 읽고 나면 예루살렘의 주민들과 성전 봉사에 관한 기록이 마무리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35절에서 본문은 갑자기 기브온으로 돌아갑니다.

기브온에는 기브온의 아버지 여이엘이 살았다. 그의 아내 이름은 마아가였다.역대상 9:35 · 본디새김

이후에는 사울의 조상과 후손들이 소개됩니다. 이 명단은 앞 장인 역대상 8:29–38에 등장한 족보와 거의 같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기브온의 아버지에게 여이엘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고, 일부 이름과 계보의 연결 방식에 차이가 있습니다.

8장에서는 사울의 계보가 베냐민 지파 전체의 역사 안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9장에서 사울의 족보는 다른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앞에는 바벨론 유배와 예루살렘 공동체, 하나님의 집에서 수행하는 봉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장인 역대상 10장에서는 사울의 마지막 전투와 죽음이 서술됩니다.

따라서 9장의 마지막 족보는 긴 계보 기록을 마무리하면서, 역대기의 본격적인 왕정 역사로 독자를 데려가는 역할을 합니다.

9장과 10장 사이에서 ‘배신’이라는 표현이 다시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대기가 국가의 멸망과 왕의 몰락을 모두 여호와야훼 앞에서의 신실함이라는 문제와 연결해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왕이든 백성이든 여호와야훼 앞에서의 관계와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9장의 마지막에는 사울의 이름이 다시 등장하고, 역대기는 오래된 왕의 역사로 돌아갈 준비를 마칩니다.

조금 더 깊이

8:35에는 미가의 아들 가운데 아하스가 등장하지만, 9:41에는 아하스가 빠져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은 아하스가 야라를 낳았다고 시작합니다. 이로 인해 9:41–42절 사이에 계보상의 연결이 불완전하게 보입니다. 8:35와 대조하면 그 연결을 이해할 수 있지만, 두 본문의 차이가 원래부터 있었는지 기록의 전승 과정에서 발생했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맺음 — 아침마다 문을 여는 사람

역대상 9:1–44 본문 →

한때 유다의 배신으로 나라가 무너졌다고 말한 뒤, 하나님의 집을 맡은 사람들이 어떻게 매일의 책임을 수행하는지 들려줍니다. 배신은 맡겨진 관계와 책임을 저버리는 일이었습니다. 반면 이 사람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것을 지키고 관리하며 다음 날의 봉사를 준비합니다.

어느 날 밤에도 문지기는 하나님의 집 곁에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아침이 찾아왔을 때, 그가 맡아야 할 일이 여전히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는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