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풀어 읽기 · 2장

이 장의 자리 · 2장 · 하나님의 백성으로

버림받은 돌로 세워진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집을 짓는다면 어떤 돌을 골라야 할까요?

튼튼하고 반듯한 돌, 건물의 무게를 견딜 수 있는 돌을 고를 것입니다. 특히 건물의 기초가 되는 돌이라면 더욱 신중해야 합니다. 건축자들이 쓸모없다고 판단하여 버린 돌을 가져다가 건물의 가장 중요한 자리에 놓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하나님이 바로 그렇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에게는 버림받았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뽑히고 값진 그 돌」(4절), 사람들이 버린 돌을 하나님이 선택하셨고, 그 돌이 건물의 중심이 되셨습니다. 이 돌은 예수님이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도 살아 있는 돌이 되어 함께 하나님의 집으로 세워진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돌 위에 세워지는 집은 어떤 모습일까요?

그 안에는 하나님의 제사장들이 있고, 하나님의 덕을 널리 알리는 백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세상에서 높은 지위를 누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비방을 받기도 하고, 부당한 권력 아래 놓이기도 하며, 심지어 주인에게 매를 맞는 노예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귀한 백성이라는 선언과 세상에서 겪는 모욕이 같은 장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까요?

그는 독자들에게 더욱 강해져서 세상의 인정을 얻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다시 바라보게 합니다. 사람들에게 버림받으셨지만 하나님께 선택되신 예수님, 아무 죄 없이 고난을 받으셨지만 다른 이들의 죄를 짊어지신 예수님이십니다.

읽는 시간 29분소단락 92장 본문 읽기 →

젖을 사모하는 사람들 — 성장은 무엇으로 시작되는가

베드로전서 2:1–3 본문 →

베드로는 다섯 가지를 벗어 버리라고 권합니다.

그러므로 온갖 악함과 온갖 속임과 위선과 시기와 온갖 헐뜯음을 벗어 버리고,베드로전서 2:1 · 본디새김

속임과 위선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거짓되게 드러내는 행동입니다. 시기는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마음이며, 헐뜯음은 다른 사람의 평판을 해치는 말입니다. 악함은 더 넓은 의미지만, 나머지 항목들은 특별히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파괴하는 행동들입니다.

베드로는 1장 22절에서 서로 힘껏 사랑하라고 권했습니다. 이제 그 사랑을 가로막는 것들을 벗어 버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형제라고 부르면서 속이고, 시기하고, 헐뜯는다면 그 공동체는 제대로 자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나쁜 행동을 버리라는 명령에 이어, 전혀 다른 이미지를 제시합니다.

갓난아기처럼 말씀에 속한 순수한 젖을 사모하십시오. 그것으로 자라 구원에 이르게 하려는 것입니다.베드로전서 2:2 · 본디새김

아기는 자신에게 생명을 주는 것을 본능적으로 찾습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젖을 찾고, 젖을 먹으며 자랍니다. 베드로는 독자들이 바로 그런 갈망을 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 1–2절에서 바울은 젖을 단단한 음식과 대조하며 미성숙한 신앙을 설명합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그런 대조를 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갓난아기의 모습은 미성숙함에 대한 책망이 아니라, 생명을 유지하고 자라게 하는 양식을 간절히 찾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들도 계속해서 그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3절에서 드러납니다.

여러분이 주께서 자애로우시다는 것을 맛보았다면 말입니다.베드로전서 2:3 · 본디새김

이 말은 시편 34편 8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야훼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라고 권합니다. 시편 34편은 두려움과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그분이 구원하셨음을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은 추상적인 명제가 아니라, 어려움 속에서 그분께 피하며 경험하는 현실입니다.

여기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자애로우심을 맛보았습니다. 이미 그분의 자애를 경험했기 때문에 더 깊이 그분을 알고자 하여, 그분에게서 오는 양식을 계속 사모하는 것입니다.

곧바로 이어지는 4절에서 베드로는 그 자애로우신 분이 누구신지 드러냅니다. 사람들에게 버림받으신 돌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시편에서 여호와야훼의 선하심을 맛보라고 했던 권면이, 이제 예수님께 나아가라는 초청으로 이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말씀에 속한」으로 번역한 그리스어는 로기코스(λογικός)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에서 이곳과 로마서 12장 1절에 등장하며, 이성적이거나 이치에 맞는 성격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영적인 젖」이나 「이치에 맞는 젖」이라는 번역도 가능합니다. 다만 바로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언급되었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말씀과 연결하여 이해할 근거가 충분합니다.

버려진 돌이 가장 중요한 돌이 되었습니다

베드로전서 2:4–8 본문 →

살아 있는 돌, 곧 사람들에게는 버림받았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뽑히고 값진 그 돌이신 그분께 나아가,베드로전서 2:4 · 본디새김

「살아 있는 돌」이라는 표현부터 이상합니다.

돌은 생명이 없습니다. 움직이지 않으며 스스로 자라지도 않습니다. 이 표현에는 두 가지 이미지가 겹쳐 있습니다. 돌은 건물의 기초가 되는 견고함을 나타내고, 살아 있다는 말은 죽음에서 일어나신 예수님의 생명을 떠올리게 합니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새로운 집을 세우시는 중심이심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이 돌에는 특이한 이력이 있습니다.

건축자들이 돌을 버린다는 것은 그 돌이 건물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혀 다르게 판단하셨습니다. 그 돌은 하나님 앞에서 「뽑히고 값진」 돌이십니다. 베드로는 이 대조를 뒷받침하기 위해 구약의 세 본문을 차례로 가져옵니다.

먼저 이사야 28장 16절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보아라, 내가 시온에 모퉁이 머릿돌을, 뽑히고 값진 돌을 둔다. 그를 믿는 이는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베드로전서 2:6 · 본디새김

이사야 28장에서는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거짓된 안전을 믿고 있는 모습이 비판받습니다. 그들은 다가오는 심판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정치적 계산과 피난처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와 대조되는 참된 기초를 시온에 두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이 말씀을 예수님께 적용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선택한 안전한 기초가 아니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예수님을 새로운 집의 기초로 삼으셨습니다.

이어서 시편 118편 22절이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믿는 여러분에게는 존귀가 돌아갑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집 짓는 이들이 버린 그 돌, 그것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습니다.베드로전서 2:7 · 본디새김

시편 118편은 고난과 위협 속에서 여호와야훼의 구원을 경험한 사람이 드리는 감사의 노래입니다. 시편 안에서 버림받은 돌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해석상 논의가 있지만, 본래의 노래에서는 멸시받고 위협당하던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으로 새로운 지위를 얻는 반전이 나타납니다. 공동체적 차원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비추어 읽을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반전의 이미지를 예수님께 적용합니다. 예수님의 거절당하심과 하나님의 높이심이 이 말씀 안에서 하나로 이어집니다. 사람들이 쓸모없다고 판단한 예수님을 하나님은 자기 집의 없어서는 안 될 중심으로 세우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명예 회복이 아닙니다. 건축자들의 판단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선언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 돌 위에 집을 세우는 것은 아닙니다.

또 걸림돌과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 걸려 넘어지며, 또한 그렇게 되도록 세워졌습니다.베드로전서 2:8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이사야 8장 14절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이사야 8장에서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에게 거룩한 피난처가 되시는 동시에, 그분을 신뢰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걸림돌과 함정이 되십니다. 같은 돌이 어떤 사람에게는 건물의 기초가 되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넘어지는 원인이 되십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베드로는 믿음과 불순종을 대조합니다. 6절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고, 7절에서는 믿는 이들에게 존귀가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반면 8절에서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이들이 걸려 넘어진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믿음은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니라, 예수님을 신뢰하고 예수님에 관한 말씀에 응답하는 관계입니다.

다만 8절 마지막의 「그렇게 되도록 세워졌습니다」는 해석이 갈리는 구절입니다.

한 견해는 하나님이 불순종하는 사람들이 걸려 넘어질 결과를 정하셨다고 읽습니다. 다른 견해는 그들의 불순종 자체까지 정해져 있었다고 읽습니다. 원문에서 「이것에」 해당하는 표현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가 논점이며, 본문은 그 주어가 하나님이라고 명시하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이 문장만으로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을 처음부터 믿지 못하도록 정하셨다는 포괄적인 예정론을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분명한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거부하는 일이 아무 결과도 없는 선택이라고 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살아 있는 돌들이 이루는 집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기꺼이 받으시는 영의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 무리가 되도록 영의 집으로 세워져 갑니다.베드로전서 2:5 · 본디새김

앞에서 독자들은 말씀의 젖을 먹으며 자라는 갓난아기와 같았습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집을 이루는 돌들입니다. 아기는 스스로 자라는 생명의 이미지이고, 돌은 다른 돌들과 함께 건물을 이루는 공동체의 이미지입니다.

한 사람이 혼자서는 집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온 사람들은 각자 따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함께 하나님의 집을 이루게 됩니다.

「영의」라는 표현은 집과 제사에 모두 붙어 있습니다. 여기서 영적인 것은 현실과 무관한 비물질적인 것이라기보다, 하나님이 영을 통해 형성하시는 공동체와 그분께 합당한 예배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성전은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그림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집이면서 동시에 제사장 무리입니다. 제사장 한 사람에게만 특별한 역할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제사장 무리로 세워집니다.

그들이 드리는 「영의 제사」는 무엇일까요? 베드로는 구체적인 목록을 제시하지 않지만, 이어지는 본문에서 선한 처신, 다른 사람을 존귀하게 여김, 형제 사랑, 부당한 상황에서도 의롭게 살아가는 태도를 강조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와 연결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그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받아들여집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스스로 완전한 제사를 만들어 그분의 인정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고, 예수님을 통해 제사를 드립니다.

조금 더 깊이

머릿돌을 단지 건물의 가장 높은 곳에 놓이는 장식용 돌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모퉁이의 기초가 되는 돌인지, 건물의 결합을 이루는 중요한 돌인지에 대해서는 세부적인 논의가 있지만, 그 돌이 건축물의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신다는 베드로의 주장은 분명합니다. 「영의 제사」는 로마서 12장 1절에서 바울이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산 제사라고 설명하는 것과도 주제적으로 연결되지만, 두 본문의 표현이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5절의 「세워져 갑니다」(οἰκοδομέω)는 원문 형태상 직설법과 명령법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직설법으로 읽으면 공동체가 예수님께 나아올 때 하나님의 집으로 세워져 가는 모습을 강조하고, 명령법으로 읽으면 예수님께 나아와 함께 집을 이루라는 권면이 됩니다. 어느 쪽이든 예수님께 나아가는 일과 공동체의 형성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제사장 무리가 된 사람들 — 백성이 아니었던 이들이 백성이 되었습니다

베드로전서 2:9–10 본문 →

그러나 여러분은 뽑힌 겨레요 왕 같은 제사장 무리요 거룩한 민족이요 그분의 것이 된 백성입니다. 어둠에서 여러분을 불러 그분의 놀라운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분의 덕을 널리 알리게 하려는 것입니다.베드로전서 2:9 · 본디새김

이 이름들의 가장 중요한 배경은 출애굽기 19장 5–6절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여 시내산으로 이끄신 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언약을 지키면 모든 민족 가운데 그분의 특별한 소유가 되고,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사장 나라라는 말은 이스라엘이 다른 모든 민족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하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특별히 속한 백성으로서 그분의 뜻을 드러내고, 그분과 맺은 언약에 합당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소명과 연결됩니다. 베드로는 구약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이 언약 백성의 이름을 이제 예수님께 속한 공동체에게 사용합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곧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고 다른 백성으로 대체하셨다는 선언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구절 자체는 이스라엘의 미래나 언약의 폐기를 논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직접 말하는 것은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제사장적 소명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신분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덕」은 하나님의 훌륭하심, 찬양받으실 만한 성품과 행위를 가리킵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여 지으신 백성이 그분을 찬양하게 될 것이라는 이사야 43장 21절과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이사야 43장에서는 이스라엘의 구원과 회복이 하나님의 행위를 드러내는 사건으로 제시되는데, 베드로는 그 언어를 가져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하나님이 이루신 일을 널리 알리도록 부름받았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특별한 신분을 자랑하기 위해 선택된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부르신 분을 알리기 위해 선택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름은 특권인 동시에 사명입니다.

여러분은 전에는 백성이 아니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전에는 자비를 입지 못했으나 이제는 자비를 입은 이들입니다.베드로전서 2:10 · 본디새김

이 말씀의 배경은 호세아서입니다. 호세아 1장에서 예언자의 자녀들에게는 「자비를 입지 못함」과 「내 백성이 아님」이라는, 이스라엘의 언약적 단절을 나타내는 이름들이 주어집니다. 하지만 호세아 2장 23절에서는 그 이름들이 뒤집힙니다. 호세아서의 본래 맥락에서 이것은 심판을 겪은 이스라엘의 회복 약속입니다.

베드로는 그 약속의 언어를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적용합니다. 그들이 받은 이름은 대단하지만, 그 이름의 근거는 그들의 사회적 지위나 도덕적 성취가 아닙니다. 예수님께 나아왔고 하나님의 자비를 입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여 그 이름을 얻은 사람들이 아니라, 자비를 입음으로 그 이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그 이름을 삶 속에서 어떻게 드러내야 하는지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그 설명은 성전 안의 예배가 아니라, 이방 사람들 사이의 일상생활로 향합니다.

나그네의 싸움은 세상 사람들을 향하지 않습니다

베드로전서 2:11–12 본문 →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몸 붙여 사는 이요 나그네인 여러분에게 목숨을 거슬러 싸우는 육의 욕망을 멀리하라고 권합니다.베드로전서 2:11 · 본디새김

이제 말투가 달라집니다.

베드로는 앞에서 독자들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선언하고는 곧바로 그들을 나그네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집을 이루는 사람들이 세상에서는 여전히 나그네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이들이 세상에서 벗어나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좋은 처신을 하라고 권합니다.

「싸우는」이라는 말은 군사적인 표현입니다. 욕망들이 마치 군대처럼 공격한다는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공격의 대상은 다른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신의 목숨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모욕과 비방을 당한다면, 가장 자연스러운 반응은 비방하는 사람들을 적으로 여기고 맞서 싸우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먼저 경계하라고 말하는 것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무너뜨리는 욕망입니다.

이 욕망은 몸이나 물질적인 삶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거슬러 사람을 움직이는 욕망입니다. 그것은 시기, 속임, 헐뜯음처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사람들을 미워하는 싸움이 아니라, 사람을 미워하고 해치도록 자신을 움직이는 욕망에 맞서는 싸움입니다.

그런데 이 싸움에는 분명한 사회적 목적이 있습니다.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여러분의 처신을 좋게 하십시오. 그들이 여러분을 악을 저지르는 자라고 헐뜯는 바로 그 점에서 여러분의 좋은 일들을 눈으로 보고, 찾아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것입니다.베드로전서 2:12 · 본디새김

헐뜯는 말과 좋은 일이 맞서 있습니다. 베드로는 비방에 맞서 더 큰 목소리로 자신을 변호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행실을 통해 비방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라고 권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인정받아 명예를 회복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마지막에 그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앞의 제사장적 소명이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덕을 널리 알리는 일은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좋은 일을 행함으로써, 자신들을 부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드러내는 일이기도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이방 사람들」은 그리스도인 공동체 밖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수신자들 가운데 이방계 출신이 있었더라도, 이제 그들은 예수님께 속한 공동체로 자신을 이해합니다. 따라서 이 말은 반드시 혈통적 구분만을 나타내지는 않습니다. 「찾아오시는 날」은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살피시거나 판단하시는 때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회개와 구원이 일어나는 방문의 때로 볼 수도 있고 마지막 심판의 때로 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그리스도인들의 선한 삶이 하나님의 영광과 연결된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왕을 존귀히 여기되, 두려워할 분은 하나님입니다

베드로전서 2:13–17 본문 →

주를 위하여 사람이 지어 세운 모든 질서에 복종하십시오. 으뜸가는 왕에게든, 악을 저지르는 이들에게 벌을 주고 선을 행하는 이들을 칭찬하도록 그를 통해 보내진 총독들에게든 그리하십시오.베드로전서 2:13–14 · 본디새김

앞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왕 같은 제사장 무리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세상의 왕과 총독들에게 복종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면 세상의 권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이 아닐까요?

베드로는 그렇게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지만, 동시에 현실의 사회 안에서 살아갑니다. 하나님께 속했다는 사실이 사회적 책임에서 벗어날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지어 세운 모든 질서」는 일반적으로 인간이 세운 제도나 권위로 번역하지만, 인간인 피조물 곧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읽는 견해도 있습니다. 뒤에서 왕과 총독을 언급하기 때문에 사회적 권위에 대한 권면이라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리스어 표현 자체는 한 가지 해석으로 완전히 고정되지 않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복종의 이유입니다. 「주를 위하여」입니다. 사람들이 세운 권력이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위하여 사회 안에서 책임 있게 행동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14절에서 악을 벌하고 선을 칭찬한다는 말은 통치 권력의 정당한 기능에 관한 설명이지, 당시의 모든 왕과 총독이 실제로 그 기능을 공정하게 수행했다는 역사적 평가가 아닙니다. 편지의 후반부가 부당한 권력 아래서 고난받는 사람들을 다룬다는 점만 보아도, 베드로가 현실의 권력 행사가 언제나 정의롭다고 생각했다고 읽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16절에서 다시 역설적인 표현이 등장합니다.

자유로운 이로서 그리하되, 그 자유를 악함의 가리개로 삼지 말고 하나님의 노예로서 그리하십시오.베드로전서 2:16 · 본디새김

베드로가 말하는 자유는 다른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자기 뜻대로 행동할 권리가 아닙니다.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은 이전의 삶을 지배하던 것들에서 해방되었지만, 그 자유는 이제 하나님께 속한 사람답게 살아갈 자유입니다. 예수님께 속했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무시하거나,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거나,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한다면 그 자유는 본래 목적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17절에서 네 가지 짧은 명령이 등장합니다.

모든 사람을 존귀히 여기십시오. 형제 무리를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을 두려워하십시오. 왕을 존귀히 여기십시오.베드로전서 2:17 · 본디새김

왕에 관한 명령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명령과 구별되어 있습니다. 왕에게는 존귀함을 표해야 하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두려움과 왕에게 드리는 존중은 같지 않습니다. 더욱이 왕은 모든 사람을 존귀히 여기라는 명령의 범위 안에도 포함됩니다. 왕이기 때문에 다른 인간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권력을 존중할 수 있지만, 권력을 하나님과 같은 자리에 놓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어디까지 복종해야 하는지를 모두 해결해 주는 규칙은 아닙니다. 이 장은 불의한 명령에 대한 저항의 구체적인 절차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사람에게 복종하는 이유가 예수님께 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일이 가장 근본적인 기준이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이제 베드로는 더 어려운 상황으로 들어갑니다. 왕과 총독의 권력보다 더욱 직접적으로 개인의 삶을 지배하는 권력, 곧 노예의 주인입니다.

조금 더 깊이

「사람이 지어 세운 모든 질서」의 원문 파세 안트로피네 크티세이는 문자적으로 인간과 관련된 모든 창조물이나 설립된 것을 가리킬 수 있는 표현입니다.

매를 맞는 노예에게 베드로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베드로전서 2:18–20 본문 →

집안의 노예 여러분, 온갖 두려움 가운데 주인들에게 복종하십시오. 선하고 너그러운 주인들에게만이 아니라 비뚤어진 주인들에게도 그리하십시오.베드로전서 2:18 · 본디새김

오늘날 독자에게 이 구절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왜 부당한 주인에게도 복종하라고 말할까요? 그런 가르침은 학대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될 위험이 있지 않을까요? 이 문제를 피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베드로가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 보아야 합니다. 집안의 노예들은 현대의 직장인처럼 자유로운 고용계약을 맺고 자신의 의사에 따라 직장을 옮길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로마 사회에서 노예는 법적·사회적으로 주인에게 종속되어 있었으며, 주인의 처벌과 폭력에 취약했습니다. 노예들의 처지는 다양했지만, 그들의 자유와 권리가 크게 제한되어 있었다는 점은 공통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도 앞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백성, 왕 같은 제사장 무리의 구성원입니다. 사회적으로는 주인의 재산으로 취급되는 사람이지만,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립니다. 이 사실은 18절의 명령을 읽는 배경이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노예제도가 정의롭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비뚤어진 주인의 행동을 정당화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노예제도를 직접 폐지하라고 요구하거나, 노예들에게 주인을 떠날 방법을 제시하지도 않습니다. 본문이 실제로 하는 일은 이미 그런 종속 관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권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이 구절은 오늘날의 모든 불평등한 관계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 복종 명령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특히 학대받는 사람들에게 폭력의 현장에 계속 머무르라고 요구하는 근거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런 명령은 본문이 직접 말하지 않는 내용을 덧붙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그들에게 무엇을 강조하려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의식하는 양심 때문에 억울하게 고난을 받으면서 슬픔을 견디면, 그것이 은혜이기 때문입니다.베드로전서 2:19 · 본디새김

베드로는 고난을 많이 받는 사람이 훌륭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는 양심 때문에」, 그분 앞에서 옳게 살려고 하는 가운데 부당한 고난을 견디는 일을 말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죄를 짓고 매를 맞으면서 견딘다면 무슨 명예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선을 행하고 고난을 받으면서 견딘다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입니다.베드로전서 2:20 · 본디새김

베드로는 모든 고난에 동일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잘못을 저질러 그 결과를 감당하는 것과, 옳은 일을 했는데 부당하게 고난을 받는 것은 다릅니다.

이 말을 고난 자체가 선하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악한 주인의 폭력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뜻도 아닙니다. 은혜라고 평가되는 것은 하나님을 의식하여 옳은 일을 하면서도 부당한 고난을 견디는 태도입니다.

세상에서 억울하게 매를 맞는 노예는 자신의 결백을 인정받기 어려웠을 수 있습니다. 주인의 판단이 곧 처벌로 이어질 수 있는 관계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주인의 평가가 마지막 평가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주인은 그 사람을 잘못한 노예로 취급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가 옳은 일을 하다가 고난을 받았다는 사실을 아십니다.

이것은 현실의 부당함을 제거해 주는 설명은 아닙니다. 그러나 부당한 권력 아래 있는 사람의 도덕적 존엄을 그 권력자의 판단에 맡겨 두지 않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그 존엄의 근거를 더욱 깊이 설명하기 위해 예수님께 시선을 돌립니다.

예수님께서 남기신 발자취 — 본을 보이신 분이 우리의 죄도 짊어지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21–24 본문 →

여러분이 이것을 위하여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며 여러분이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가도록 여러분에게 본을 남기셨습니다.베드로전서 2:21 · 본디새김

본문의 흐름에서 「이것」은 바로 앞의 선을 행하면서도 부당한 고난을 견디는 일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소명이란 고난 자체를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니라, 옳은 일을 행하다 고난이 닥치는 경우에도 예수님께 속한 사람답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문맥에 가깝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걸어가신 길이 있고,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은 그 발자취를 따라갑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남기신 본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그분은 죄를 짓지 않으셨고 그 입에서 속임이 발견되지도 않았습니다.베드로전서 2:22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이사야 53장 9절을 직접 가져온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은 다른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자신의 잘못 때문이 아닌 고통을 짊어집니다. 베드로는 그 종의 모습을 예수님께 적용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예수님께서 저지르신 죄에 대한 처벌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가 바로 앞에서 잘못을 저질러 받는 고난과 옳은 일을 하고도 부당하게 받는 고난을 구분했으니, 예수님께서는 후자의 가장 결정적인 본으로 제시되십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특별히 예수님의 입에서 속임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왜 하필 입과 말일까요?

그분은 욕을 먹으면서도 되받아 욕하지 않으셨고, 고난을 받으면서도 으르지 않으셨으며,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께 맡기셨습니다.베드로전서 2:23 · 본디새김

부당한 대우를 받는 사람은 자신이 억울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어 합니다. 특히 그럴 힘이 없을 때에는 말로라도 갚아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리에서 모욕과 폭력에 똑같은 악으로 대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고 불의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여기신 것도 아닙니다.

무엇을 맡기셨는지는 원문에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 자신과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께 맡기셨다고 읽을 수 있고, 자신을 해친 사람들에 대한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셨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중심에는 의롭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여기서 2장의 앞부분과 연결이 이루어집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버림받아 마땅한 돌이라고 판단했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뽑히고 값진 돌로 세우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고난에서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죄인처럼 대하고 모욕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복하지 않으신 것은 예수님께 정의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정의로운 판단을 하나님께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설명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단지 부당한 고난을 훌륭하게 견디신 모범이실 뿐이라면, 독자들에게 남는 것은 예수님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과제일 것입니다. 그런데 24절에서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 등장합니다.

본보기이신 분이 구원자이시기도 합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친히 나무 위에서 자기 몸에 짊어지셨습니다. 우리가 죄에서 떠나 의를 위하여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분이 맞은 자국으로 여러분은 나았습니다.베드로전서 2:24 · 본디새김

「나무」는 십자가를 가리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다른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는 행위로 설명합니다. 이사야 53장의 본래 문맥에서도 종은 다른 이들의 죄와 허물 때문에 고난을 겪는 존재로 그려지며, 종의 고난이 다른 이들에게 유익을 가져온다는 사실이 그 장의 핵심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대로 따라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다른 모든 사람의 죄를 짊어져 그들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따라야 할 발자취를 남기셨고, 동시에 우리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짊어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보기이시지만, 본보기이시기만 한 분은 아니십니다.

그 목적은 「우리가 죄에서 떠나 의를 위하여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죄책의 문제만을 다루는 사건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이 죄에서 의로 방향을 바꾸게 하는 구원의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속임과 위선과 시기와 헐뜯음을 벗어 버리라는 처음의 명령, 선한 처신을 하고 자유를 악함의 가리개로 삼지 말라는 권면, 부당한 고난 가운데서도 옳은 일을 행하라는 권면은 단순히 더 훌륭한 인간이 되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목적에 참여하는 삶입니다.

그분이 맞은 자국으로 여러분은 나았습니다

상처를 입으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치유받은 사람들은 우리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처음 듣던 사람들 가운데에는 실제로 매를 맞았거나 그런 위험 아래 놓인 노예들이 있었습니다. 몸에 매가 닿는 것이 어떤 일인지 아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맞으셨다는 이야기는 매우 구체적인 고통의 언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상처와 그들의 상처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상처는 다른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신 구원의 사건과 연결됩니다. 반면 노예들이 받은 부당한 매질이 그 자체로 다른 사람들의 죄를 속량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또한 이 구절을 모든 신체적 질병이 지금 반드시 치유된다는 보증으로 읽기도 어렵습니다. 바로 앞에서 죄에서 떠나 의를 위하여 사는 것이 목적이라고 밝혔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치유는 죄로 인해 훼손된 인간이 예수님을 통해 회복되는 구원의 의미를 중심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받는 사람들에게 인내의 모범을 보여 주시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들이 의롭게 살아가는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구원자이십니다.

조금 더 깊이

「본」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휘포그람모스(ὑπογραμμός)는 본보기나 모범을 뜻하며, 글씨를 배우는 사람이 따라 쓸 수 있도록 제시된 글씨의 본을 가리킬 때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22–25절에서 베드로는 이사야 53장의 표현들을 집중적으로 사용합니다. 22절은 53장 9절을 직접 인용하고, 23절은 53장 7절의 잠잠히 고난받는 종을 떠올리게 합니다. 24절은 종이 다른 사람들의 죄를 짊어진다는 53장 4절과 12절의 표현을 연결하고, 그가 맞은 자국으로 사람들이 낫는다는 53장 5절의 말씀을 직접 적용합니다. 종이 누구인지,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지에는 해석의 갈림이 있습니다. 「죄에서 떠나」에 해당하는 아포게노메노이는(ἀπογίνομαι) 신약에서 이곳에만 등장하는 표현으로, 문자적인 죽음을 가리킬 때 사용될 수 있고 이전의 어떤 상태에서 벗어남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본문의 죄와 의의 대조에서는 죄에 대하여 죽거나 죄의 지배에서 결정적으로 벗어났다는 의미가 적절합니다.

헤매던 양들이 돌아온 곳

베드로전서 2:25 본문 →

여러분은 양처럼 헤매고 있었으나 이제는 여러분의 목숨을 돌보시는 목자시며 감독이신 분께 돌아왔으니 말입니다.베드로전서 2:25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이사야 53장 6절의 이미지를 이어받습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모두 양처럼 헤매며 각자 자기 길로 갔고, 하나님이 그들의 죄악을 종에게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돌아왔다는 말은 단순히 원래의 생활로 복귀했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로 돌아와 예수님의 돌봄 아래 놓였다는 뜻입니다.

목자는 양들을 돌보고 이끄는 사람이고, 감독은 살피고 지켜보는 사람입니다. 여기서는 교회의 직분을 설명하기보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목숨을 보살피고 지켜보시는 분이라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이것은 앞의 노예들에게 주어진 권면과 깊이 연결됩니다. 그들은 현실에서는 주인의 권력 아래 놓여 있습니다. 잘못이 없어도 매를 맞을 수 있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자신의 결백을 인정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들의 목숨을 돌보시는 또 다른 분이 계시다고 말합니다. 그분은 그들을 소유물처럼 다루시는 주인이 아니라, 그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그들을 위해 고난받으신 예수님이십니다.

여기서 16절의 「하나님의 노예」라는 표현도 더 깊은 의미를 얻습니다. 하나님께 속한다는 것은 더 높은 권력자에게 종속된다는 뜻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들을 위해 자신의 몸으로 죄를 짊어지신 분의 돌봄 아래 놓인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주인은 노예에게 고난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양들을 위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집은 어떤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는가

베드로전서 2:1–25 본문 →

하나님의 집은 사람들이 버린 돌 위에 세워집니다. 이 장의 처음에는 젖을 찾는 갓난아기와 살아 있는 돌들, 왕 같은 제사장 무리가 있고, 후반부에는 왕과 총독, 노예와 주인, 모욕과 매질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두 장면을 하나의 예수님 안에서 연결합니다. 하나님께 뽑히시고 값진 돌이셨지만 사람들에게는 버림받으셨고, 죄가 없으셨지만 죄인처럼 고난을 받으셨으며, 예수님께서 입으신 상처로 다른 사람들이 치유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의 존귀함은 세상이 그들을 어떻게 대하는가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고난받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처지를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하는 말이 아닙니다. 부당한 권력의 행사가 정당하다는 뜻도 아닙니다. 베드로 자신이 그 고난을 「억울하게」 받는 고난이라고 부르며, 하나님이 의롭게 판단하시는 분임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 장의 선한 삶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름을 얻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이미 자비를 입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베드로는 이 장의 마지막에서 다시 건물의 이미지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대신 양 떼를 보여 줍니다. 제 길을 찾지 못해 헤매던 양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지킬 능력도, 안전하게 이끌어 줄 길도 갖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목숨을 돌보시는 목자시며 감독이신 분께」 돌아왔습니다. 그분은 멀리서 명령만 내리시는 분이 아니라, 자기 몸으로 그들의 죄를 짊어지셨고 자신이 맞으신 자국으로 그들을 낫게 하신 분이십니다.

사람들에게 버림받으신 돌이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 머릿돌이 되셨고, 고난받으신 예수님께서 이제 그 집을 이루는 사람들의 목자가 되셨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