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3–4장 · 헐뜯김 속의 선한 생활

두려움의 자리에 예수님을 모실 때

베드로전서 3장에는 얼핏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두 가지 권면이 나옵니다.

먼저 베드로는 믿지 않는 남편을 둔 아내들에게 말 없이 자신의 처신으로 남편이 돌아서게 하라고 권합니다. 그런데 조금 뒤에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자신이 품은 소망의 까닭을 묻는 사람에게 언제든지 답할 준비를 하라고 말합니다.

한쪽에서는 말하지 말라고 하고, 다른 쪽에서는 말할 준비를 하라고 합니다. 도대체 언제 침묵하고, 언제 말해야 할까요?

베드로가 관심을 갖는 것은 단순히 말을 많이 하느냐 적게 하느냐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반응이 두려울 때, 다른 사람의 힘에 눌릴 때,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는데도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기준으로 행동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장에는 두려움이라는 말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아내들은 두려움 가운데 깨끗하게 살아가라는 권면을 듣지만, 동시에 어떤 두려운 일에도 겁내지 말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으면서도,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자신의 소망을 설명하라고 권고받습니다.

두려움 자체가 문제일까요? 아니면 누구를 두려워하는지가 문제일까요?

베드로는 그 대답을 15절의 「마음속에서 그리스도를 주로 거룩히 여기십시오」에서 밝힙니다. 그리고 장의 마지막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계시며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예수님께 복종하게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세상의 권력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던 이 장이, 모든 권세 위에 계신 예수님을 보여 주며 끝나는 것입니다.

그 결말에 이르기까지 베드로는 가정생활에서 시작하여 공동체의 관계, 세상 사람들의 비방, 부당한 고난을 차례로 다룹니다. 그리고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노아의 홍수와 옥에 있는 영들에 관한 이야기까지 끌어옵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람들의 반응을 통제할 수 없지만, 자신이 누구를 주로 모시고 살아갈지는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읽는 시간 31분소단락 93장 본문 읽기 →

말 없이 남편을 얻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베드로전서 3:1–6 본문 →

그와 같이 아내 여러분,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십시오. 남편들 가운데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이가 있더라도 말 없이 아내인 여러분의 처신으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베드로전서 3:1 · 본디새김

왜 베드로는 아내에게 복종하라고 말할까요? 특히 남편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경우에도 그렇게 하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정이 어떤 사회적 구조 안에 있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같은 집에서 서로 다른 신을 섬긴다면

로마 시대의 가정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부부 중심의 사적인 공간과 달랐습니다. 가정은 경제활동과 사회적 지위, 종교적 관습이 결합된 중요한 생활 단위였고, 남성 가장은 가족과 가정에 속한 사람들에 대해 법적·사회적으로 큰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가정에서 어떤 신들을 섬기고 어떤 종교적 의례에 참여하는가 역시 가족의 질서와 밀접하게 연결되었습니다.

그런 사회에서 아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남편은 그렇지 않다면, 아내의 새로운 믿음은 남편에게 단순한 개인적 취향의 변화로 보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정의 전통적인 종교적 관습과 권위에 도전하는 행동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권면은 이런 상황에 놓인 여성들을 향합니다. 다만 베드로의 권면이 당시의 가부장적 관습을 어느 정도 수용하는지, 그 안에서 여성의 신앙적 주체성을 얼마나 새롭게 드러내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남편이 「말 없이」 돌아서게 된다는 표현에는 대조가 있습니다. 그리스어 원문에서는 두 표현에 같은 로고스(λόγος)라는 단어가 사용되는데, 앞에서는 복음의 말씀을, 뒤에서는 말이나 발언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아내가 남편에게 자신의 신앙에 관해 절대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뜻일까요? 그렇게 읽기는 어렵습니다. 같은 장 15절에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소망의 까닭을 묻는 사람에게 답할 준비를 하라고 명령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강조점은 말의 전면적인 금지가 아니라, 말로 설득하려는 노력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 증언의 방식에 있습니다.

그들이 두려움 가운데 있는 여러분의 깨끗한 처신을 눈으로 보고 말입니다.베드로전서 3:2 · 본디새김

남편이 듣지 않더라도 볼 수는 있습니다.

그는 아내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지만, 아내의 삶이 달라졌다는 사실까지 언제나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말하는 「두려움」을 남편에 대한 공포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원문에는 두려움의 대상이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이 편지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권면이 반복되고, 바로 6절에서 겁내지 말라고 명령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하나님을 향한 경외의 태도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처신을 결정하는 기준은 남편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이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입니다.

물론 본문은 남편이 변화할 것을 보증하지 않습니다. 1절의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는 권면이 지향하는 목적을 나타낼 뿐, 모든 남편이 아내의 선한 처신을 보고 믿게 된다고 약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믿음을 삶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남편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아내가 통제할 수 없습니다.

머리를 꾸미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여러분의 꾸밈은 머리를 땋고 금붙이를 두르고 옷을 차려입는 겉의 것이 아니라, 도리어 썩지 않는 온유하고 조용한 영으로 꾸민 마음속의 숨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값집니다.베드로전서 3:3–4 · 본디새김

이 말씀은 머리를 땋거나 장신구를 착용하는 것을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구절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겉으로 드러나는 꾸밈과 마음속에 있는 사람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머리를 땋는 일, 금붙이를 두르는 일과 함께 「옷을 차려입는」 일도 열거하므로, 이를 모든 외적 꾸밈의 절대적인 금지로 읽는다면 옷을 입는 행위 자체까지 문제 삼아야 하는 곤란함이 생깁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외적인 단장을 모두 죄로 규정하기보다는, 진정한 아름다움과 가치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를 강조하는 것으로 읽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당시 옷과 장신구는 부와 신분을 드러낼 수 있는 수단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런 외적인 요소와 다른 것, 곧 「마음속의 숨은 사람」을 제시합니다. 겉모습처럼 즉시 눈에 들어오지는 않지만, 실제 행동을 통해 드러나는 그 사람의 성품입니다.

베드로는 그 성품을 「온유하고 조용한 영」이라고 설명합니다. 온유함은 아무 의견도 내지 못하거나 자신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태도와 같지 않습니다. 문맥상 자신의 믿음을 지키면서도 다른 사람을 공격하거나 지배하려 하지 않는 평온하고 온유한 태도와 연결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값집니다.」 사람들은 눈에 드러나는 꾸밈을 보고 그 사람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다른 것을 값지게 여기십시다. 여기에는 앞 장의 대조가 떠오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버렸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값지게 여기셨습니다. 이제 아내들의 아름다움과 가치 역시 사람들의 외적 평가보다 하나님의 판단을 기준으로 설명됩니다.

사라는 왜 등장하는가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인이라 부르며 그에게 순종한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은 선을 행하고 어떤 두려운 일에도 겁내지 않으면서 사라의 자녀가 되었습니다.베드로전서 3:6 · 본디새김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인」이라고 불렀다는 말은 창세기 18장 12절에 근거합니다. 그런데 그 장면에서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순종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늙었는데 아이를 낳을 수 있겠느냐며 속으로 웃고 있습니다. 바로 그때 아브라함을 주인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창세기 18장 12절 자체가 사라의 순종을 직접 보여 주는 장면은 아닙니다. 베드로는 사라가 남편을 부르는 표현을 가져와 그녀가 남편에게 보인 태도를 설명하는 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라의 순종을 어떤 구체적 행동에서 찾아야 하는지는 창세기 전체의 이야기와 베드로의 적용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권면은 사라를 본받으라는 말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선을 행하고 어떤 두려운 일에도 겁내지 않으면서 사라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여성들에게 남편이 두려우니 그에게 복종하라고 말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선을 행하면서 두려운 일에도 겁내지 않는 모습을 사라의 자녀다운 삶과 연결합니다.

5절은 사라를 포함한 거룩한 여인들이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의 삶에서 궁극적인 의지의 대상은 남편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이 권면을 남편의 모든 요구를 무조건 따르라는 명령으로 확대하는 것은 본문에 없는 내용을 덧붙이는 것입니다. 특히 남편의 폭력이나 학대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삼는다면, 선을 행하면서 두려움에 지배되지 말라는 이 문단의 방향과도 충돌합니다. 베드로의 권면 중심에는 남편의 무제한적인 권한이 아니라,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선을 행하는 아내의 삶이 놓여 있습니다.

남편에게 주어진 경고 — 기도가 막힐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7 본문 →

그와 같이 남편 여러분, 아내를 헤아려 함께 사십시오. 더 약한 그릇이면서 생명의 은혜를 함께 물려받을 이인 아내에게 존귀를 돌리십시오. 여러분의 기도가 막히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베드로전서 3:7 · 본디새김

아내들에게 여섯 절을 사용한 베드로는 남편들에게 한 절을 할애합니다. 그러나 이 한 절에는 매우 강한 요구가 담겨 있습니다.

남편은 자신의 권한을 행사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아내가 어떤 처지에 있는지 이해하고, 그에 맞게 살아가야 합니다.

「더 약한(ἀσθενής) 그릇」이라는 표현은 현대 독자에게 상당히 불편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원문에서 「더 약한」은 비교급이지만, 어떤 면에서 약한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신체적 힘의 차이를 가리킬 수도 있고, 당시 사회에서 아내가 상대적으로 취약한 법적·사회적 지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인지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표현이 사용된 논증의 방향은 분명합니다. 베드로는 아내가 더 약하므로 남편이 더 강하게 지배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정반대로, 아내에게 「존귀를 돌리십시오」라고 명령합니다.

그 이유는 「생명의 은혜를 함께 물려받을 이」라는 표현에 있습니다. 당시의 사회적 질서 안에서는 남편에게 더 큰 권한이 주어질 수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아내와 남편은 생명의 은혜를 함께 물려받을 사람들입니다. 남편이 아내보다 더 많이 물려받거나, 아내가 남편의 지위를 통해서만 구원에 참여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마지막에 더욱 강한 경고를 덧붙입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막히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어떻게 대하는지가 그의 기도와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가정생활의 조언이 아니라 하나님과 맺은 관계에 관한 경고입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부당하게 행동하면서도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아무 문제 없이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베드로는 기도가 막힌다는 표현의 정확한 방식이나 조건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아내에게는 남편의 변화 가능성을 바라보며 선하게 살아가라고 하고, 남편에게는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직면하게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강한 위치에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 더 높은 가치를 갖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책임은 가정 안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시선을 넓힙니다.

복을 받은 사람이 복을 빌어 주는 이유

베드로전서 3:8–12 본문 →

끝으로, 모두 한마음이 되고, 함께 아파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자비를 품고, 자기를 낮추십시오.베드로전서 3:8 · 본디새김

여기서 「끝으로」라는 말은 편지 전체를 마무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러 사회적 관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설명한 뒤, 모든 독자에게 적용되는 권면을 제시하는 전환입니다.

한마음이 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언제나 같은 생각을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그다음에 「함께 아파하고」, 곧 자신이 겪지 않은 고통이라도 다른 사람의 고통이라는 이유로 외면하지 않는 태도를 요구합니다. 서로 다른 신앙을 가진 부부, 힘의 차이가 있는 관계, 사회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의 처지를 생각하면 이 태도는 앞의 가정생활에 관한 권면과도 잘 어울립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 이 모든 태도가 실제로 시험받는 상황이 등장합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어 주십시오. 여러분은 복을 물려받도록 이 일을 위하여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베드로전서 3:9 · 본디새김

단순히 보복을 자제하는 소극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에게까지 좋은 것을 구하는 적극적인 태도입니다.

복을 받으려면 먼저 원수에게 복을 빌어 주어야 한다는 거래의 조건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복을 물려받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받은 은혜에 합당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상대방이 모욕하면 모욕으로 응답하고, 상대방이 악을 행하면 악으로 대응한다면 결국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사람은 상대방이 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다른 기준을 제시합니다.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부름받았는지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평화를 뒤쫓는다는 표현

베드로는 자신의 권면을 뒷받침하기 위해 시편 34편 12–16절을 인용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을 보려는 사람은 혀가 악한 말을 하지 못하게 막고 입술로 속임을 말하지 않아야 한다.」베드로전서 3:10 · 본디새김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평화를 찾고 그것을 뒤쫓아야 한다.」베드로전서 3:11 · 본디새김

시편 34편 전체는 두려움과 환난 가운데서 여호와야훼의 구원을 경험한 사람의 찬양과 권면입니다. 그래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을 보려는 사람에게 가장 먼저 요구되는 행동은 자신의 혀를 지키는 것입니다. 사람은 위협받거나 모욕당할 때 말이 거칠어지기 쉽고, 자신이 옳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말을 과장하거나 왜곡할 수도 있습니다. 시편은 바로 그런 순간에 악한 말과 속임을 멀리하라고 권합니다.

「뒤쫓다」는 말에는 어떤 대상을 적극적으로 추구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평화가 저절로 찾아오기를 기다리거나 갈등 앞에서 무관심하게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이루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평화를 추구한다는 것은 잘못된 일을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바로 앞에서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평화는 악을 묵인하는 평화가 아니라, 악을 행하지 않으면서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평화입니다.

시편 인용의 마지막 절에서 이 모든 행동의 근거가 드러납니다.

「주의 눈은 의로운 이들을 향해 있고 그 귀는 그들의 간구를 향해 있으나, 주의 얼굴은 악을 저지르는 자들에게 맞서 있기 때문이다.」베드로전서 3:12 · 본디새김

눈과 귀와 얼굴은 하나님이 인간과 같은 신체를 지니고 계시다는 설명보다, 하나님이 의로운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의 간구를 들으시며 악에 맞서신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 주는 시적인 언어입니다.

이제 앞의 남편들에게 주어진 경고가 새롭게 들립니다. 베드로는 남편들에게 기도가 막히지 않게 하라고 했고, 이제 하나님이 의로운 사람들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와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서로 분리된 영역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악에 대한 판단과 보복을 모두 자신의 손에 쥐려고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억울함은 하나님 앞에서 보이지 않는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선을 행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안전하다는 뜻일까요?

조금 더 깊이

9절의 권면은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마태복음 5:44)과 직접적인 주제적 연결을 이룹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그 말씀을 인용하지는 않지만, 복을 받은 사람이 자신의 적대자에게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라는 동일한 문제를 다룹니다.

선을 행하는데도 고난받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13–17 본문 →

그리고 여러분이 선한 것에 열심을 낸다면 누가 여러분을 해치겠습니까?베드로전서 3:13 · 본디새김

일반적으로 선한 일을 행하는 사람은 악을 행하는 사람보다 적대감을 덜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베드로가 앞에서 말한 선한 처신의 사회적 효과도 이런 기대와 연결됩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절에서 베드로는 그 기대가 언제나 실현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의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 해도 여러분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흔들리지 마십시오.베드로전서 3:14 · 본디새김

베드로는 의를 행했기 때문에 고난받을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고난 가운데서도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고난 자체가 즐거운 일이기 때문은 아닙니다. 베드로는 이미 이 편지에서 고난이 슬픔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그렇다면 복은 어디에 있을까요? 베드로는 독자들의 시선을 고난의 원인보다, 고난 앞에서 누구를 두려워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로 돌립니다.

누구를 두려워할 것인가

도리어 마음속에서 그리스도를 주로 거룩히 여기십시오. 여러분 안에 있는 소망을 두고 까닭을 묻는 이에게는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답할 준비를 갖추되, 다만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선한 양심을 지니고 하십시오. 여러분이 헐뜯음을 받는 바로 그 점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의 선한 처신을 욕하는 이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는 것입니다.베드로전서 3:15–16 · 본디새김

14절의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와 15절의 「그리스도를 주로 거룩히 여기십시오」는 이사야 8장 12–13절과 깊이 연결됩니다. 주변 강대국의 위협과 정치적 불안 속에서 흔들리던 유다 백성에게, 이사야는 백성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함께 두려워하지 말고 만군의 여호와야훼를 거룩하게 여기며 그분을 두려워하라고 권했습니다.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가 하나님의 백성이 행동해야 할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서에서는 거룩하게 여겨야 할 분이 여호와야훼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15절에서는 예수님을 주로 거룩하게 여기라고 말합니다.

구약에서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고 거룩하게 여기라는 명령을, 이제 예수님을 주로 모시는 삶에 적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무조건 삼위일체 교리 전체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으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의 말씀을 예수님께 적용한다는 사실 자체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예수님 이해에서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거룩히 여기십시오」는 우리가 예수님을 거룩하게 만들어 드린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을 거룩한 주님으로 인정하고 마음속에서 예수님께 합당한 자리를 드리라는 뜻입니다.

상대방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지, 어떤 손해를 끼칠지, 무엇을 빼앗아 갈지 두려워하다 보면 그 사람의 행동이 자신의 삶을 지배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주로 모신다는 것은 세상의 위협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위협이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마지막 권위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제 처음에 제기했던 말과 침묵의 문제가 다시 등장합니다.

소망의 까닭을 묻는 사람에게 답하십시오

여기서 「답」(ἀπολογία)에 해당하는 말은 자신의 입장이나 행동에 대해 해명하거나 변호하는 말을 가리킵니다. 법정에서 사용하는 변론의 의미도 지니지만, 여기서는 법적인 재판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흔히 기독교 신앙의 모든 교리를 논리적으로 증명할 준비를 하라는 명령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물론 신앙을 지적으로 설명하는 일에도 적용할 수 있지만, 베드로는 「여러분 안에 있는 소망」의 까닭을 묻는 사람에게 답하라고 합니다. 왜 이 사람들이 보복하지 않는지, 왜 손해를 보면서도 선한 일을 계속하는지, 왜 고난을 겪으면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설명하라는 것입니다. 삶에서 드러난 소망을 말로 설명하는 일입니다.

이 점에서 1절의 「말 없이」라는 권면과 연결됩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자신의 삶으로 믿음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누군가 그 믿음의 까닭을 묻는다면 답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삶과 말은 경쟁하지 않습니다.

삶은 말이 공허해지지 않도록 하고, 말은 삶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설명합니다.

베드로는 답변의 내용만큼 방식도 중요하게 여깁니다. 「온유함과 두려움으로」의 두려움은 사람들의 위협에 굴복하는 공포라기보다 하나님을 의식하는 경외의 태도로 읽을 수 있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을 포함한다고 이해하는 견해도 가능합니다. 확실한 것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믿음을 설명한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모욕하거나 억압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자신이 진리를 알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상대방을 무시하기 쉽고, 논쟁에서 승리하려는 마음이 상대방을 존중하는 태도를 밀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소망의 까닭을 설명하는 방식 자체가 그 소망의 성격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 보복하지 않으시고 의롭게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셨다면, 예수님에 대한 소망을 설명하는 사람 역시 같은 방향의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그리스도인을 헐뜯는 사람들은 그들의 실제 선한 처신을 보고 부끄러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언제나 회개한다는 약속은 아니지만,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선한 양심과 처신을 강조합니다.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선을 행하며 고난을 받는 것이 악을 저지르며 고난을 받는 것보다 낫기 때문입니다.베드로전서 3:17 · 본디새김

「하나님의 뜻이라면」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으므로, 모든 고난을 곧바로 하나님이 직접 원하신 사건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것은 고난이 닥치는 경우 무엇 때문에 고난받는 것이 나은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 이유는 단지 도덕적으로 훌륭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베드로는 이제 결정적인 근거를 제시합니다.

조금 더 깊이

14절의 의 때문에 고난받는 사람의 복은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의 때문에 박해받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하신 말씀(마태복음 5:10)과도 직접적인 주제적 연결을 이룹니다. 15절의 「답」은 그리스어로 아폴로기아입니다.

의로운 분이 의롭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고난받으셨습니다

베드로전서 3:18 본문 →

그도 그럴 것이, 의로운 분이신 그리스도께서도 의롭지 않은 이들을 위하여 죄를 두고 한 번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여러분을 하나님께 이끌어 가시려고 그리하셨습니다.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셨고 영으로는 살아나셨습니다.베드로전서 3:18 · 본디새김

베드로는 선을 행하면서 고난받는 것이 악을 행하며 고난받는 것보다 낫다고 말한 근거로 예수님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고난은 다른 사람의 고난과 결정적으로 다릅니다.

「의로운 분」이 「의롭지 않은 이들」을 위하여 고난받으셨습니다.

이 짧은 대조 안에 복음의 핵심이 들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단순히 억울한 고난의 모범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고난받으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여러분을 하나님께 이끌어 가시려고」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음이 도덕적 교훈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고만 말하지 않고, 사람들을 하나님께 이끌어 가는 구원의 사건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에게 길을 보여 주는 일인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일입니다.

「한 번」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죄를 위한 고난은 반복해서 이루어져야 하는 불완전한 행위가 아니라, 결정적인 효력을 지닌 사건으로 제시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야기는 죽음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셨고 영으로는 살아나셨습니다.」 이 대조를 인간적 존재 방식과 부활의 새 생명으로 읽든, 육체의 죽음과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나심으로 읽든,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셨지만 그 죽음이 예수님의 마지막 상태는 아니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제 베드로는 성경 전체에서도 특별히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꺼냅니다. 옥에 있는 영들에게 가서 선포하셨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육으로는…영으로는」에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육으로는」 예수님의 죽을 수 있는 인간적 존재 방식을, 「영으로는」 부활로 나타난 새로운 생명의 방식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육체적으로 죽임을 당하셨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나셨다고 읽는 견해입니다. 원문의 두 여격 표현은 이러한 관계를 명확하게 한 가지로 고정하지 않으므로, 이 문장만으로 예수님께서 죽으신 뒤에 어떤 형태로 존재하셨는지 상세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또 「한 번」은 히브리서 9장 26–28절 및 10장 10–14절에서 예수님의 단번에 이루어진 제사를 설명하는 내용과 직접적인 주제적 연결을 이룹니다. 다만 베드로는 이곳에서 히브리서처럼 제사 제도의 논증을 길게 전개하지는 않습니다.

옥에 있는 영들에게 무엇을 선포하셨는가

베드로전서 3:19–20 본문 →

그 영으로 그분은 옥에 있는 영들에게도 가서 선포하셨습니다. 그들은 전에 순종하지 않던 이들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오래 참음이 노아의 날에 방주가 지어지는 동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방주 안으로 몇 사람, 곧 여덟 목숨이 들어가 물을 통해 구원을 받았습니다.베드로전서 3:19–20 · 본디새김

여기는 베드로전서에서 가장 어려운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 그 영들에게 가셨을까요? 그 영들은 죽은 사람들일까요, 타락한 천사들일까요? 옥은 어디이며,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선포하셨을까요? 이 본문은 그 질문들에 모두 직접 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해석은 크게 셋으로 갈립니다. 노아 시대에 불순종하다 죽은 사람들에게 죽음 이후 선포하셨다는 읽기, 갇혀 있는 타락한 천사들에게 승리를 선포하셨다는 읽기, 그리스도께서 노아 시대에 노아를 통해 선포하셨다는 읽기입니다. 이 차이는 선포의 대상과 시점, 그리고 선포가 구원의 소식인지 심판과 승리의 선언인지를 가릅니다. 이러한 해석들은 고대부터 지금까지 논의되어 왔으며, 어느 하나가 본문의 모든 어려움을 완전히 해결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또 본문은 죽은 사람들에게 회개할 기회가 다시 주어졌다고 직접 말하지 않으므로, 이 구절을 근거로 죽음 이후에 모든 사람에게 다시 구원의 기회가 주어진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은 분명한가

해석이 갈리더라도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들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셨지만 살아나셨다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예수님의 선포는 노아 시대의 불순종 및 하나님의 심판과 연결됩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 모든 천사와 권세가 복종하게 되었다는 선언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이 단락의 전체 흐름을 생각하면, 예수님의 죽음이 패배가 아니며 예수님의 살아나심과 높아지심이 하나님의 결정적인 승리를 드러낸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베드로가 고난을 견디라고 권하면서 이 이야기를 꺼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는 때로 너무 강하게 느껴지는 권세들이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죽임당하셨다가 살아나셨고, 마지막에는 모든 권세 위에 계신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의 선포에 관해 말하다가 갑자기 방주 안에 있던 여덟 사람을 언급합니다.

왜 하필 노아의 방주일까요?

조금 더 깊이

첫 번째 해석은 「영들」을 노아 시대에 살다가 홍수로 죽은 사람들로 이해합니다. 20절에서 그들이 노아 시대에 순종하지 않았던 이들이라고 설명한다는 점이 근거이며, 선포의 내용을 심판이나 승리의 선언으로 보는 견해와 구원의 소식으로 읽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예수님께서 정확히 언제 선포하셨는지 명시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 해석은 창세기 6장 1–4절의 「하나님의 아들들」 이야기와 그것을 발전시킨 고대 유대교 문헌의 전승을 배경으로 합니다. 『에녹1서』의 일부 전승에서는 하늘의 존재들이 죄를 짓고 심판을 기다리며 갇히며, 유다서 6절도 자기 자리를 지키지 않은 천사들이 심판을 위하여 갇혀 있다고 하고, 베드로후서 2장 4–5절 역시 범죄한 천사들의 심판과 노아 시대의 홍수를 가까이 연결합니다. 이 해석은 22절의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의 복종과 잘 연결되지만, 베드로는 그 영들이 천사들이라고 직접 밝히지 않으며 『에녹1서』를 명시적으로 인용하지도 않습니다. 세 번째 해석은 그 말을 들었던 사람들이 불순종했고 지금은 옥에 있는 영들이 되었다고 보며, 베드로후서 2장 5절이 노아를 의의 선포자라고 부르는 것과 연결됩니다. 하지만 18–19절은 예수님의 죽음과 살아나심을 언급한 뒤 그 영으로 가서 선포하셨다고 말하므로, 노아 시대의 선포로 읽으려면 문장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홍수의 물이 어떻게 세례와 연결되는가

베드로전서 3:21 본문 →

베드로가 노아의 홍수에서 주목하는 것은 방주 안에 들어간 사람들의 수와 그들이 구원받은 방식입니다. 20절은 「여덟 목숨이 들어가 물을 통해 구원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창세기 7장 7절과 13절에 따르면 노아와 그의 아내, 세 아들과 그들의 아내들이 방주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홍수의 물은 창세기에서 심판의 수단이었습니다. 세상의 생명들이 그 물로 인해 멸망했습니다. 어떻게 심판의 물이 구원과 연결될 수 있을까요?

물이 본질적으로 생명을 주는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은 아닙니다.

방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홍수는 이전 세상의 부패와 악에 대한 심판이었지만, 하나님은 방주를 통해 노아의 가족을 보존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이 이야기를 세례와 연결합니다.

그 물에 대응하는 세례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어나심으로 여러분도 구원합니다. 세례는 살에 묻은 때를 벗는 일이 아니라 선한 양심이 하나님께 드리는 간구입니다.베드로전서 3:21 · 본디새김

베드로는 분명히 세례가 구원한다고 말합니다. 동시에 그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도 밝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어나심으로」입니다. 따라서 세례를 그 자체로 신비한 힘을 가진 물의 의식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구원을 이루는 결정적인 근거는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대응하는」이라는 표현은 노아 시대의 홍수와 그리스도인의 세례 사이에 대응 관계가 있음을 나타냅니다. 베드로는 둘이 완전히 같은 사건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홍수 속에서 방주에 들어간 사람들이 구원받은 것처럼, 이제 세례는 예수님의 부활을 통한 구원과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두 사건 사이에는 심판과 구원, 옛 상태와 새로운 삶이라는 주제적 대응이 있습니다.

세례는 단순히 몸을 씻는 일이 아닙니다

물이 몸에 닿아 때가 벗겨지는 것은 물리적인 변화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말하는 세례의 의미는 그런 변화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선한 양심이 하나님께 드리는 간구」라는 표현입니다. 이 구절은 선한 양심이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선한 양심을 구하는 간구로, 또는 하나님 앞에서 선한 양심으로 살아가겠다는 서약으로 읽힙니다. 간구라는 읽기는 하나님을 향하여 도움과 구원을 구하는 태도를, 서약이라는 읽기는 세례받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믿음과 새로운 삶을 고백하고 약속하는 측면을 강조합니다.

어느 쪽을 택하든 이 구절의 더 큰 논증은 분명합니다. 세례는 단순한 외적인 세척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양심의 문제이며,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이루어진 구원과 연결됩니다.

「선한 양심」은 16절에서 소망의 까닭을 설명할 때 지니라고 한 바로 그 양심입니다. 이 반복은 세례를 단지 과거에 한 번 받은 종교적 의식으로만 이해하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구원에 참여한 사람은 실제 생활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선한 양심을 유지하는 행위가 예수님의 부활을 대신한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구원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삶의 방식과 분리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베드로는 지금 노아와 세례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요?

노아의 가족은 심판의 물 가운데 있었지만 그 물 속에서 구원받았습니다. 베드로의 독자들 역시 자신들을 적대하는 세상 한가운데서 살아가며, 믿음 때문에 모욕을 받고 선을 행했는데도 오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구원은 세상이 얼마나 우호적인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구원은 예수님의 부활에 근거합니다.

노아가 방주 밖의 물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자신들을 둘러싼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는 분명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제 예수님께서 어디에 계신지를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대응하는」은 그리스어 안티튀폰으로, 어떤 것과 대응하거나 그것에 상응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간구」로 옮긴 에페로테마는 질문이나 요청을 나타낼 수 있으며, 문맥에 따라 서약이나 다짐과 관련된 의미로도 해석됩니다. 초기 세례 전승에 비추어 서약 또는 신앙고백의 의미로 보는 읽기도 있으며, 하나님을 향해 나아감으로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모든 권세가 그분께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전서 3:22 본문 →

그분은 하늘로 가시어 하나님의 오른쪽에 계시고,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분께 복종하게 되었습니다.베드로전서 3:22 · 본디새김

베드로전서 3장은 이 선언으로 끝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오른쪽은 단순한 공간적인 위치가 아니라 특별한 영예와 권위를 나타내는 자리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 계신다고 선언함으로써 예수님의 권위를 드러냅니다.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은 단순히 땅 위의 왕과 총독만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라, 하늘의 존재들과 초인간적인 권세까지 포함하는 언어입니다. 각 명칭이 정확히 어떤 종류의 존재들을 구분하는지는 본문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지만, 그 모든 것 위에 예수님께서 계신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이 장 전체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보다 강한 존재들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다루었기 때문에 이 선언은 무게를 갖습니다. 베드로는 권력을 가진 사람이 언제나 옳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지닌 권력과 하늘의 권세들까지 예수님 아래에 놓여 있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두려움을 새롭게 정리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실제 위험을 무시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강한 권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마지막 권위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예수님의 권위가 없다는 증거가 아니었습니다. 의로운 분이 의롭지 않은 사람들을 위하여 고난받으신 그 사건을 통해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모든 권세 위에 높이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의 소망은 세상의 모든 권력을 이겨 낼 만큼 자신이 강해진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속한 예수님께서 이미 모든 권세 위에 계신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에는 시편 110편 1절의 배경이 있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자신이 높이시는 왕에게 자신의 오른쪽에 앉으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며, 신약의 여러 본문은 이 시편을 예수님의 높아지심과 연결합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모신 사람의 삶

베드로전서 3:1–22 본문 →

부부관계, 공동체의 사랑, 선을 행하면서 받는 고난, 노아의 홍수와 세례, 그리고 권세들의 복종. 느슨하게 이어진 듯한 이 장을 관통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자신보다 강한 힘 앞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선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베드로는 그 힘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리스도인의 삶을 결정하는 최종적인 기준은 사람들의 반응이 아니라 예수님이시라고 답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다른 사람을 공격하거나 지배하는 것으로 증명되지 않습니다. 때로는 말 없이 자신의 삶으로 진실을 보여 주어야 하고, 때로는 소망의 까닭을 온유하게 분명히 설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선한 삶은 먼저 예수님께서 의롭지 않은 사람들을 위하여 고난받으시고 그들을 하나님께 이끌어 가신 구원 위에 세워집니다.

그러므로 이 장을 오늘의 삶에 적용할 때 그리스도인의 인내를 부당한 관계에 대한 무조건적인 순응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고난받는 사람이 안전을 구하거나, 부당한 일을 밝히거나, 해를 막기 위한 정당한 조치를 취하는 일을 이 장이 금지한다고 볼 근거는 없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더 이상 독자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령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절에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과 예수님께서 계신 자리가 나올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오른쪽에 계십니다.

그리고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예수님께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앞에서 사람들의 위협 때문에 마음이 흔들릴 수 있었던 독자들에게, 베드로는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계신 자리를 보여 줍니다.

그들이 마음속에서 주로 거룩히 여겨야 할 분이 바로 그곳에 계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