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풀어 읽기 · 4장

이 장의 자리 · 3–4장 · 헐뜯김 속의 선한 생활

낯선 이들이 서로를 맞아들일 때

사람이 이전과 다르게 살아가기 시작하면, 주변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오래도록 함께 어울리던 사람이 갑자기 모임에 나오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당연하게 즐기던 일들을 더 이상 즐기지 않습니다. 함께 웃고 떠들던 자리에 앉아 있어도 이전과 같은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이상하게 여길 것입니다. 무슨 일이 생겼느냐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자신의 새로운 삶을 계속 고집한다면, 그 변화가 못마땅해질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에는 바로 이런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4절은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과 함께 같은 방탕의 물결 속으로 달려가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며 비방」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이전에 함께하던 일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방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장을 읽다 보면 흥미로운 표현이 세 번 등장합니다.

4절에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의 달라진 삶을 이상하게 여깁니다. 9절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서로를 손님으로 반겨 맞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12절에서는 고난을 낯선 일처럼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고 권합니다. 그리스어에서는 이 세 표현에 모두 낯선 사람을 뜻하는 크세노스(ξένος)와 관련된 어휘가 사용됩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낯설게 여깁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낯선 사람을 환영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닥치는 고난을 낯선 일처럼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낯선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들이 이전과 다른 삶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 보여 줍니다.

그 삶의 중심에는 예수님의 고난이 있고, 그 삶을 지탱하는 것은 서로를 향한 사랑이며, 마지막으로 의지할 분은 믿음직하신 창조주입니다.

읽는 시간 30분소단락 84장 본문 읽기 →

죄를 그쳤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베드로전서 4:1–2 본문 →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육으로 고난을 받으셨으니 여러분도 같은 생각으로 무장하십시오. 육으로 고난을 받은 사람은 죄를 그쳤기 때문입니다.베드로전서 4:1 · 본디새김

베드로는 뜻밖에도 전쟁의 언어로 이 장을 시작합니다.

무엇으로 무장하라는 말일까요? 강한 힘이나 다른 사람을 제압할 능력이 아니라 「같은 생각」으로 무장하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신 사실과 예수님의 태도를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기준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앞 장에서 의로운 예수님께서 의롭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고난을 받으셨다고 설명한 베드로는, 이제 그 사실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논증을 이어 갑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문장이 어렵습니다.

「육으로 고난을 받은 사람은 죄를 그쳤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겪으면 죄를 짓지 않게 된다는 뜻일까요? 경험적으로도 그렇지 않습니다. 고난받는 사람도 죄를 지을 수 있고, 심한 고난을 겪었다는 사실만으로 도덕적으로 온전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고난을 받은 사람」을 예수님으로 읽어, 예수님께서 고난을 통해 죄에서 벗어나셨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죄를 짓지 않으셨다고 이미 밝혔습니다(2:22).

이 구절은 크게 세 방향으로 읽힙니다. 그리스도인이 예수님과 함께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뜻, 예수님을 따르기 때문에 고난을 감수하는 사람이 이미 죄와 결별하기로 결단했다는 뜻, 죽음이 죄의 활동을 끝낸다는 뜻입니다. 어느 한 해석으로 모든 어려움을 없애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이어지는 2절은 베드로의 실제 관심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남은 때를 육 안에서 더는 사람의 욕망에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베드로전서 4:2 · 본디새김

베드로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이미 끝난 인생이 아니라 앞으로 남아 있는 삶입니다. 따라서 1절의 「죄를 그쳤다」는 표현을 그리스도인이 이제 어떤 죄도 범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선언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문맥에서 중요한 것은 죄를 향해 살아가던 이전의 방향을 끊고, 하나님의 뜻을 향해 살아가는 변화입니다.

이 점에서 「무장하십시오」라는 명령이 더욱 구체적으로 다가옵니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이 닥치면 그것을 피하려고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비난이 두려워서 다시 그들이 요구하는 생활방식에 맞추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바로 그런 순간을 대비하라고 권합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피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듯이, 여러분도 고난을 피하기 위해 죄와 타협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무장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난을 얼마나 적게 받느냐가 아니라, 남은 삶을 누구의 뜻에 따라 살아가느냐입니다.

2절의 「남은 때」라는 말로 베드로는 독자들의 삶을 과거와 앞으로 남은 시간으로 나눕니다. 그 구분은 나이나 인생의 단계에 따른 것이 아니라, 이전에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와 이제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의 차이입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그들이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게 합니다.

조금 더 깊이

1절의 세 읽기에는 각각 근거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과 함께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읽기는 바울이 로마서 6장 6–11절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사람은 더 이상 죄의 지배 아래 살지 않아야 한다고 설명하는 것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둘째, 결단의 읽기는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면 고난을 피할 수도 있지만 그 길을 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죄와 단절한 사람이라고 봅니다. 셋째는 육으로 겪는 고난을 죽음까지 포함하는 표현으로 보고, 죽음이 죄의 활동을 끝낸다는 의미를 강조합니다.

함께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방받는 사람들

베드로전서 4:3–6 본문 →

지나간 때에 여러분이 이방 사람들의 뜻을 행한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방탕과 욕망과 술 취함과 흥청거림과 술판과 법에 어긋난 우상 섬김에 빠져 지냈으니 말입니다.베드로전서 4:3 · 본디새김

「이미 충분하다」고 말하는 베드로는 과거의 삶을 그리워하며 되돌아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삶에 더 이상 시간을 쓸 이유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 목록은 단순히 개인의 나쁜 습관을 열거한 것만은 아닙니다. 술 취함과 흥청거림, 술판, 우상 섬김이 함께 등장합니다. 고대 그리스·로마 사회에서는 종교적 축제와 공동 식사, 연회와 사교 활동이 서로 연결되는 경우가 있었고, 신들에게 바치는 의례가 공동체의 행사와 결합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이전의 종교적·사회적 관습을 거부한다는 것은 개인적인 취미 하나를 그만두는 일보다 더 큰 변화를 뜻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웃과 친구, 일터와 가정에서 맺어 온 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독자들의 과거를 대표적인 행동들로 묘사하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삶의 성격을 보여 줍니다.

「법에 어긋난 우상 섬김」이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어떤 우상 숭배가 합법적이고 정상적인 종교 관습으로 받아들여졌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기준은 로마의 실정법이 아니라,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입니다. 주변 사회가 정상이라고 여기는 일과 하나님 앞에서 옳은 일이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옛 친구들은 화를 내는가

그래서 그들은 여러분이 자기들과 함께 같은 방탕의 물결 속으로 달려가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며 비방합니다.베드로전서 4:4 · 본디새김

이전에는 함께 달려갔습니다. 같은 일을 즐기고, 같은 자리에 참여하고,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한 사람이 그 흐름에서 빠져나옵니다.

베드로는 그들이 단순히 방탕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고, 「같은 방탕의 물결 속으로 달려가지 않는다」고 표현합니다. 여기에는 함께 휩쓸려 움직이던 무리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들은 왜 이전과 다르게 행동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비방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먼저 그들을 모욕하거나 공격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단지 예전과 같은 생활을 더 이상 함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비방의 계기가 됩니다. 본문은 그들의 정확한 심리적 동기를 설명하지 않지만, 한 사람이 무리의 익숙한 행동을 거부하는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 낯설고 불편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 점에서 베드로전서 4장의 고난은 특별한 모습을 갖습니다. 모든 고난이 감옥에 갇히거나 매를 맞는 형태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관계에서 배제되거나, 이전의 친구들에게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거나, 자신에 대한 나쁜 소문을 듣는 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 비방에 맞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여기서 길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비방하는 사람들에 관해 한 가지 사실을 알려 줍니다.

그들은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을 심판하실 준비가 되어 계신 분께 셈을 바칠 것입니다.베드로전서 4:5 · 본디새김

「셈을 바칠」이라는 표현은 주어진 책임에 대해 설명하고 계산을 내놓는 상황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들은 지금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을 평가하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평가가 마지막 판단은 아닙니다.

그들 역시 하나님 앞에서 판단받을 사람들입니다.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이라는 말처럼, 살아 있는 사람뿐 아니라 이미 죽은 사람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곧이어 매우 어려운 문장이 나옵니다.

죽은 이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졌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도 그럴 것이, 죽은 이들에게도 바로 이를 위해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그들이 사람의 기준으로는 육으로 심판을 받되, 하나님의 기준으로는 영으로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베드로전서 4:6 · 본디새김

이 구절은 3장 19절의 「옥에 있는 영들」에 관한 말씀을 떠올리게 하지만, 두 구절을 곧바로 같은 사건으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4장 6절의 해석은 크게 두 방향으로 갈립니다.

첫 번째는 살아 있을 때 복음을 들었으나 지금은 죽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육체적 죽음을 겪었고 세상 사람들에게 정죄받거나 배척당했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생명의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견해는 앞 절에서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심판을 언급한 사실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두 번째는 이미 죽어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졌다고 읽는 견해입니다. 이 경우 복음 선포가 죽음 이후에 이루어졌다는 의미가 되며, 예수님께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셨다는 앞 장의 말씀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선포의 대상과 시기, 구원의 범위는 이 구절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생전에 복음을 들었다가 나중에 죽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는 해석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이미 죽은 사람들에게 선포되었다는 해석도 재검토할 가치가 있다는 읽기도 있습니다.

베드로의 논증에서 분명한 것은 6절의 목적을 나타내는 문장입니다. 「사람의 기준으로는 육으로 심판을 받되, 하나님의 기준으로는 영으로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사람의 기준과 하나님의 기준, 육으로 겪는 심판과 영으로 사는 생명이 대조되어 있습니다.

독자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비방받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어리석거나 이상한 선택으로 보일 수 있고, 그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판단과 죽음이 그리스도인들의 마지막 운명을 결정하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이 죽음 이후에 새로운 회개의 기회가 주어지는지, 또는 이미 죽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지를 확정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 문제에 대한 결론보다 분명한 것은, 베드로가 사람들의 판단과 하나님의 생명 주시는 일을 구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마지막 때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설명합니다. 그 대답은 세상의 종말에 관한 자세한 예언이 아니라, 기도와 사랑과 손님을 맞아들이는 일입니다.

조금 더 깊이

3장 19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다」고 했고, 4장 6절에서는 「복음이 전해졌다」고 말합니다. 그리스어에서도 서로 다른 동사가 사용됩니다. 또한 3장에서는 노아 시대의 불순종한 영들이 언급되지만, 여기서는 단순히 「죽은 이들」이라고 부릅니다. 6절의 「육으로」와 「영으로」가 각각 인간의 존재 방식인지, 몸과 성령의 작용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도 세부적인 해석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드러나는 처지와 하나님이 이루시는 생명을 대조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모든 것의 끝이 가까우므로 서로를 사랑하십시오

베드로전서 4:7–11 본문 →

모든 것의 끝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위하여 분별력을 지니고 정신을 차리십시오.베드로전서 4:7 · 본디새김

세상의 마지막이 곧 닥칠 것이라는 말은 불안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상생활을 정리하고 세상의 모든 일에서 물러나야 할까요? 베드로가 권하는 것은 「기도를 위하여」 분별력을 지니고 정신을 차리는 일입니다. 끝이 가까웠기 때문에 흥분하거나 혼란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분별력 있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선언을 오늘날의 특정 날짜를 계산할 수 있는 정보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씀은 편지가 쓰인 시대의 종말론적 기대를 반영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결정적인 국면에 들어섰다고 이해하면서, 독자들이 마지막 때를 의식하며 살도록 권합니다. 오늘날 독자는 이 선언 이후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본문의 긴박함을 존중하되 그것을 종말 날짜에 대한 예측으로 바꾸지 않아야 합니다.

그는 기도를 이야기한 뒤 곧바로 사랑을 말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서로 힘껏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많은 죄를 덮기 때문입니다.베드로전서 4:8 · 본디새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적대적인 반응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외부에서 비방과 모욕을 겪는 사람들이 공동체 안에서도 서로 속이고 시기하고 다툰다면, 그 공동체는 어떻게 유지될 수 있겠습니까? 서로 사랑하라는 권면은 좋은 감정을 나누라는 말이 아니라, 어려운 상황 속에서 공동체를 지탱하는 삶의 방식에 관한 명령입니다.

사랑이 죄를 덮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랑은 많은 죄를 덮기 때문입니다」라는 말은 잠언 10장 12절과 연결됩니다. 잠언에서는 미움이 다툼을 일으키지만 사랑은 허물을 덮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덮는다는 것은 죄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만들어 버린다는 뜻일까요? 그렇게 이해하면 이 명령이 잘못을 숨기고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근거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잠언의 본래 대조를 살펴보면 다른 의미가 드러납니다. 미움은 상대방의 잘못을 계속 들추어 내어 관계를 무너뜨립니다. 반면 사랑은 잘못을 용서하고, 불필요하게 퍼뜨리지 않으며, 관계의 회복을 추구합니다. 베드로의 말은 공동체 안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확대하고 서로를 공격하는 방식으로 대응하지 말라는 권면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모든 죄를 무조건 숨겨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폭력이나 학대, 심각한 부정행위를 감추는 것은 피해자를 보호하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는 이 편지의 다른 권면들과 충돌합니다.

사랑은 진실을 없애는 행동이 아니라, 진실을 다루는 방식을 바꾸는 힘입니다.

상대방의 잘못을 이용하여 그를 무너뜨리려 하지 않고, 잘못을 바로잡되 회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베드로는 그 사랑이 어떤 행동으로 나타나야 하는지 보여 줍니다.

투덜거리지 말고 서로를 손님으로 반겨 맞으십시오.베드로전서 4:9 · 본디새김

낯선 사람이 낯선 사람을 환영합니다

「손님으로 반겨 맞으십시오」라는 표현에도 낯선 사람을 뜻하는 크세노스가 들어 있습니다. 낯선 사람이나 손님을 사랑하고 환영하라는 말입니다. 세상에게 낯선 사람이 된 이들에게, 베드로는 낯선 사람을 환영하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믿음 때문에 기존의 사회적 관계에서 소외되었다면, 그들에게는 함께 머물고 서로를 돌볼 수 있는 관계가 더욱 필요했을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손님을 맞아들이는 일에는 여행자에게 숙박 장소를 제공하고, 식사를 나누고, 실제로 필요한 도움을 주는 일이 포함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환대에는 비용이 들었습니다. 집을 내어 주고, 음식을 준비하고, 자신의 시간과 자원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투덜거리지 말고」 맞으라고 권합니다. 손님을 맞아들이는 행동은 하면서도 마음속으로 불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감동적인 선언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머물 자리를 내어 주고, 식탁을 나누고, 필요한 도움을 주는 일로 나타납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을 낯설게 여긴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을 닫을 수도 있었지만, 베드로는 오히려 서로를 환영하는 공동체를 이루라고 권합니다.

세상에서 낯선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이, 다른 낯선 사람을 밀어낼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맡은 관리인들

각 사람이 받은 은혜의 선물을 따라 그것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좋은 관리인으로서 말입니다.베드로전서 4:10 · 본디새김

베드로는 특별한 지도자나 뛰어난 능력을 가진 몇몇 사람에게만 말하지 않습니다. 「각 사람」이 받은 선물을 따라 서로 섬기라고 합니다. 은혜의 선물은 소수에게 주어진 명예로운 지위가 아니라, 공동체를 섬기는 데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그 선물을 받은 사람들을 「관리인」이라고 부릅니다.

관리인은 주인이 아닙니다.

자기 소유가 아닌 것을 맡아 관리하며, 맡겨진 것을 제대로 사용할 책임이 있는 사람입니다. 말을 잘하거나 다른 사람을 돕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그것이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는 수단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맡기신 것이고, 그 기준은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입니다.

「여러 가지 은혜」라는 말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말로 섬기고, 어떤 사람은 실제적인 도움으로 섬깁니다.

누가 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듯 하고, 누가 섬기는 일을 한다면 하나님이 대어 주시는 힘으로 섬기십시오. 모든 일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분께 영광과 능력이 영원무궁토록 있습니다. 아멘.베드로전서 4:11 · 본디새김

말하는 사람과 섬기는 사람은 모든 은혜의 선물을 두 종류로만 제한하는 완전한 목록이라기보다, 은혜의 선물을 사용하는 대표적인 두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된다는 사실을 의식해야 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하는 모든 말이 곧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라고 주장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의견을 함부로 절대화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게 말해야 한다는 책임을 강조합니다.

섬기는 사람은 자신의 힘만으로 모든 일을 감당하지 않고,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에 의지하여 섬깁니다. 두 경우 모두 중심에는 선물을 받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십니다. 은혜의 선물은 자신을 드러내는 도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수단이며, 베드로는 그 말 뒤에 곧바로 찬양을 덧붙입니다.

마지막이 가까웠다는 선언으로 시작한 단락이, 기도와 사랑과 환대와 서로를 섬기는 일로 이어져 찬양으로 끝납니다. 종말을 기다리는 공동체의 모습이 의외로 평범하고 구체적입니다. 그들은 미래를 계산하느라 현재의 삶을 버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서로를 사랑하고, 낯선 사람을 맞아들이고, 하나님이 맡기신 선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베드로는 다시 불과 고난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조금 더 깊이

베드로전서의 「사랑은 많은 죄를 덮는다」는 히브리어 잠언 10장 12절의 의미와 가깝지만, 그리스어의 해당 문장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의 동일 문구 인용보다는 잠언의 지혜를 가져와 사용한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11절의 「대어 주시는」에 쓰인 동사는 공급하고 제공한다는 의미를 지니며, 역사적으로는 공연이나 합창단에 필요한 비용을 지원하는 일에도 사용되었습니다.

불 같은 일이 닥쳐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베드로전서 4:12–14 본문 →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을 시험하려고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불 같은 일을 두고, 낯선 일이 닥친 것처럼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베드로전서 4:12 · 본디새김

베드로는 다시 「사랑하는 여러분」이라고 부릅니다. 앞에서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공동체를 보여 준 그는, 이제 그 공동체가 실제로 겪고 있는 어려움을 이야기합니다.

「불 같은 일」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특정한 역사적 박해 사건이나 실제 화재와 연결하려는 해석도 있지만, 이 구절만으로 그런 사건을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독자들이 이미 어떤 시험을 겪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불은 무엇이 진짜인지 드러내는 시험의 이미지로, 1장 7절에서 믿음이 불로 시험받는 금보다 값지다고 했던 표현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이 비유를 사용했다고 해서 모든 고난이 하나님이 직접 만들어 내신 시험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는 고난을 믿음의 시험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지만, 고난을 가하는 사람들의 악한 행동까지 선한 것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4절에서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전과 다르게 살아가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이 닥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고 권합니다. 같은 종류의 표현이 방향을 바꾸어 나타납니다.

도리어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함께 나누는 만큼 기뻐하십시오. 그분의 영광이 드러날 때에도 크게 즐거워하며 기뻐하게 하려는 것입니다.베드로전서 4:13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셨고, 그리스도인들 역시 예수님께 속했기 때문에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참여는 예수님께 속했다는 이유로, 예수님의 뜻을 따라 선을 행하다 겪는 고난과 연결됩니다(15절).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이 예수님의 속량 사역을 대신하거나 보충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위하여 고난받으신 일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겪는 고난은 구별됩니다. 다만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과 연결되기에, 그들의 고난 역시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갖습니다.

베드로는 현재의 기쁨과 미래의 기쁨을 함께 말합니다. 지금은 고난 가운데서 기뻐하고, 예수님의 영광이 드러날 때에는 더욱 크게 기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셨지만 마침내 영광을 받으신 분이시라는 사실이, 현재 고난받는 사람들에게 소망의 근거가 됩니다.

모욕받는 사람 위에 하나님의 영이 쉬십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욕을 먹는다면 복이 있습니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위에 쉬시기 때문입니다.베드로전서 4:14 · 본디새김

사람들에게 모욕받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그 사람 위에 하나님의 영이 쉬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부끄러운 이름을 붙이고, 그들의 믿음을 비웃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바로 그 사람들 위에 「영광의 영」이 쉬신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영광스럽지 못하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먼 훗날 보상을 받으리라는 약속만이 아닙니다. 「쉬시기 때문입니다」라는 표현은 현재의 현실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의 모욕은 그들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에게서 영광을 빼앗으려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영이 그들 위에 쉬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선언이 모든 고난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지 않도록 곧바로 경계선을 긋습니다.

조금 더 깊이

「쉬시기」라는 표현은 이사야 11장 2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사야 11장은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와 공의와 정의로 다스릴 것을 말하고, 그에게 여호와야훼의 영이 머물며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능력의 영이 함께한다고 합니다. 다윗 왕가의 회복과 이상적인 왕의 통치를 기다리는 문맥입니다. 이 표현상 연결을 고려하면, 예수님께 임하는 하나님의 영이 예수님께 속한 백성에게도 함께하신다는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다만 베드로가 이사야 11장 2절을 직접 인용한다고 명시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 때문에 받는 고난

베드로전서 4:15–16 본문 →

그도 그럴 것이, 여러분 가운데 누구도 살인자나 도둑이나 악을 저지르는 자로서, 또는 남의 일에 참견하는 자로서 고난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베드로전서 4:15 · 본디새김

앞의 세 가지는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런 잘못을 저지른다면 그 결과로 겪는 고난을 예수님 때문에 받는 고난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항목은 조금 뜻밖입니다. 「남의 일에 참견하는 자」는 살인자나 도둑과 나란히 놓이기에는 사소한 잘못처럼 보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속한 일에 간섭하거나 자신이 맡지 않은 일을 감독하려 드는, 단순한 호기심 이상의 부당한 간섭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옳은 신앙을 가졌다는 확신 때문에 다른 사람의 삶을 지나치게 통제하거나 간섭할 수 있고, 그 때문에 갈등과 비난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런 갈등을 모두 예수님 때문에 받는 박해로 해석하지 말라고 합니다. 자신이 정말로 선을 행하고 있는지, 아니면 자신의 잘못 때문에 비난받는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이것은 4장 전체의 논증에서 반드시 필요한 구별입니다. 선을 행하다 받는 고난과 자신의 잘못 때문에 받는 고난은 다르고,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받는 모욕과 자신의 무례한 행동 때문에 받는 비난도 다릅니다. 이 구별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지 않은 채 모든 비판을 박해로 이해하고, 자신을 비판하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적으로 취급할 위험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는 이와 정반대의 상황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받는다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러한 처지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베드로전서 4:16 · 본디새김

베드로전서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고난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이름이 모욕이나 불이익, 사회적 비방의 이유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왜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될까요? 그 이름이 누구의 이름과 연결되어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그 이름을 조롱의 대상으로 사용할 수는 있지만, 그 이름이 가리키는 예수님의 가치를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는 수치의 의미를 뒤집습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누군가를 부끄럽게 만들려고 하지만, 베드로는 바로 그 처지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권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 권면 뒤에 더욱 엄중한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심판과 무관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남의 일에 참견하는 자」의 원어 알로트리에피스코포스는 신약에서 이곳에만 등장하는 드문 단어로, 정확한 행동의 범위는 논의할 여지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은 신약에서 사도행전 11장 26절, 26장 28절, 그리고 베드로전서 4장 16절에 등장하며, 사도행전 11장 26절에 따르면 안디옥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렸습니다. 이 명칭이 처음부터 그리스도인들 스스로 즐겨 사용한 이름이었는지, 외부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었는지는 역사적으로 논의가 있습니다. 또 이 본문은 16절에서 「그러한 처지에서」라는 읽기를 따르고, 다른 주요 본문 계열에서는 「이 이름으로」라고 읽습니다. 어느 쪽이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겪는 고난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연결된다는 점은 같습니다.

심판은 왜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되는가

베드로전서 4:17–18 본문 →

심판이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될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서 먼저 시작된다면, 하나님의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이들의 끝은 어떠하겠습니까?베드로전서 4:17 · 본디새김

베드로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백성이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고난을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되는 심판과 연결합니다.

2장 5절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살아 있는 돌로서 「영의 집」으로 세워져 간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그 집이 심판이 시작되는 장소로 등장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집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판단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에 그분의 거룩함과 뜻에 합당해야 합니다.

구약에서 심판이 시작되는 자리

이 표현은 에스겔 9장 6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루살렘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성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과 관계된 곳이기 때문에 그곳의 죄악은 더욱 심각하게 다루어집니다. 베드로가 이 구절을 직접 인용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주제적 연결이 있습니다.

말라기 3장 1–3절에서도 주님이 자신의 성전에 오셔서 레위 자손을 은을 정련하는 불처럼 정결하게 하십니다. 이러한 본문들은 하나님의 백성 안에서 이루어지는 심판에 드러내고 정결하게 하는 의미도 있을 수 있음을 보여 주며, 실제로 이 단락을 하나님의 백성이 겪는 정련의 과정과 연결하는 해석이 제시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말하는 「심판」을 신앙을 더 성숙하게 만드는 훈련으로만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바로 다음에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의 끝을 묻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엄중한 판단이라는 의미가 분명히 들어 있습니다.

반면 이 구절을 근거로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모든 고난이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벌하시는 행위라고 단정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바로 앞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부당하게 고난받는 사람들을 복이 있다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심판과 고난이 연결되는 방식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지만, 하나님의 백성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18절에서 그 경고는 더욱 깊어집니다.

의로운 이가 겨우 구원을 받는다면, 경건하지 않은 자와 죄인은 어디에 나타나겠습니까?베드로전서 4:18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잠언 11장 31절의 그리스어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겨우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하나님이 구원하실 능력이 부족해서 의로운 사람도 간신히 구원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구원에 이르는 길이 얼마나 엄중한가 하는 점입니다.

의로운 사람도 고난과 시험을 통과하며 하나님의 판단 앞에 서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복음을 거부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들의 처지는 얼마나 더 심각하겠느냐는 논증입니다. 베드로는 「끝은 어떠하겠습니까?」 「어디에 나타나겠습니까?」라는 두 질문에 직접 답하지 않습니다. 그 목적은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우월감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이 얼마나 엄중한지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맡은 관리인들이라고 불렸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심판이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은 책임 없는 특권을 얻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은혜를 맡은 사람은 그 은혜를 어떻게 사용했는지 돌아보며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 역시 하나님 앞에서 셈을 바쳐야 합니다. 비방하는 사람들과 비방받는 사람들 모두가 하나님의 판단 아래 있습니다.

베드로는 마지막 절에서 이 장 전체의 결론을 내립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잠언 11장 31절에서는 의로운 사람도 땅에서 그 행위에 따라 보응을 받는다면 악인과 죄인은 얼마나 더 그러하겠느냐는 의미가 중심을 이룹니다. 반면 그리스어에서는 의로운 사람조차 어렵게 구원을 받는다면 경건하지 않은 사람과 죄인은 어떻게 되겠느냐는 형태로 표현되며, 베드로는 이 표현을 따르고 있습니다. 두 본문 사이의 차이는 번역 및 해석상의 문제입니다.

믿음직하신 창조주께 자기 목숨을 맡기십시오

베드로전서 4:19 본문 →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고난을 받는 이들도 선을 행하면서, 믿음직하신 창조주께 자기 목숨을 맡겨야 합니다.베드로전서 4:19 · 본디새김

베드로는 4장을 시작하면서 「같은 생각으로 무장하십시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기 목숨을 맡겨야 합니다」라고 권합니다. 무장하라는 말은 적극적인 준비를 떠올리게 하고, 맡기라는 말은 자신이 붙들고 있는 것을 내어 놓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두 행동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살겠다는 생각으로 무장하되,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완전히 지킬 수 있다는 생각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고난과 심판을 이야기하다가 마지막에 하나님을 「창조주」라고 부르는 것은 뜻밖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고난은 그들의 삶 전체를 위협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버림받거나, 이전의 친구들과 멀어지거나, 재산과 지위를 잃을 수도 있고, 심한 경우 생명까지 위협받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바로 그 사람의 목숨을 지으신 창조주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이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지만,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창조한 분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창조주는 「믿음직하신」 분입니다. 창조주의 능력과 신실하심이 함께 제시되기에,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목숨을 그분께 맡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 맡김을 수동적인 체념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선을 행하면서」 맡기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고, 어차피 하나님이 판단하실 테니 어떤 행동을 하든 상관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선을 행했는데도 비방받거나 오해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를 스스로 통제하려고 악으로 대응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한 일을 계속하면서 자신의 목숨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삶과도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셨고,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이 버리셨다는 마지막 증거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권면은 근거 없는 낙관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다만 이 구절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고난을 받는 이들」에게 주어진 권면입니다. 이 말을 모든 고난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뜻이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벗어나려 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는 부당한 폭력을 피하거나 피해를 막기 위해 정당한 도움을 구하는 행동을 금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악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을 행하되 자신의 삶을 마지막으로 판단하고 지키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낯선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베드로전서 4:1–19 본문 →

베드로전서 4장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전과 다른 삶을 선택했고, 그래서 이전의 친구들에게 낯선 사람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세상을 미워하거나 사람들과 모든 관계를 끊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낯선 사람을 기꺼이 맞아들이고,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선물로 다른 사람을 섬기라고 합니다. 그 삶 때문에 고난이 닥쳐도 그것은 낯선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이 고난을 받으셨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일으키셨고 영광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비방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셈을 바쳐야 한다고 말했고, 심판이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된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설명을 마친 뒤 독자들이 자신의 목숨을 맡겨야 할 분을 「믿음직하신 창조주」라고 부릅니다.

심판하시는 분이 곧 그들의 목숨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믿음직하십니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을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이 언제나 안전하리라는 보장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맡길 분이 누구신지 알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마지막 절에서 독자들에게 더 강한 무기를 쥐여 주지 않습니다. 더 큰 사회적 힘이나 자신을 비방하는 사람들을 이길 방법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남겨 둡니다.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한 일을 계속하는 가운데, 자신의 목숨을 창조주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손은 선을 행하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손으로 자신의 미래까지 움켜쥐려 하지는 않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