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풀어 읽기 · 5장
이 장의 자리 · 5장 · 장로들에게 주는 권면
양 떼를 돌보는 목자와 삼키려는 사자
베드로전서의 마지막 장에는 두 동물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양이고, 다른 하나는 사자입니다.
양은 돌봄을 받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목자가 없으면 위험에 노출되기 쉽습니다. 반면 사자는 먹잇감을 찾아 돌아다니며 삼킬 대상을 노립니다. 베드로는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하나님의 양 떼를 … 기꺼이 살피며 치십시오」라고 권하고, 조금 뒤에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으며 돌아다닙니다」라고 경고합니다.
그런데 목자가 양을 보호하려다가 오히려 양을 지배하고 억누른다면 어떻게 될까요? 양을 지키기 위해 맡겨진 권한이 양에게 상처를 주는 도구가 된다면 말입니다.
베드로는 바로 그 위험을 알고 있는 것처럼 지도자들에게 세 가지를 경계하라고 말합니다. 억지로 돌보지 말고, 부끄러운 이익을 탐하지 말고, 맡겨진 사람들을 주인처럼 누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참된 목자일까요?
베드로는 교회의 장로들을 마지막 목자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들 위에 「목자장」이 계신다고 말합니다. 장로들도 그분의 양 떼를 잠시 맡아 돌보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전서 5장의 출발점입니다.
하지만 이 장은 교회 지도자들에 관한 가르침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낮은 마음을 두르라고 권하고, 걱정을 하나님께 던지라고 하며, 마귀에게 맞서라고 명령합니다. 그러고는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 직접 그들을 굳게 세우실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여 안전해지는 공동체가 아니라, 목자장이신 그리스도를 신뢰하며 서로를 돌보고 함께 굳게 서는 공동체입니다.
장로들에게 권하는 사람은 왜 자신도 장로라고 말하는가
나는 여러분 가운데 있는 장로들에게 권합니다. 나도 같은 장로이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증인이며, 앞으로 드러날 영광을 함께 나눌 동반자이기도 합니다.베드로전서 5:1 · 본디새김
자신을 소개하는 방식이 뜻밖입니다.
그는 편지 첫머리에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소개했습니다(1:1). 하지만 여기서는 그 권위를 앞세우지 않습니다. 「같은 장로」는 함께 장로인 사람을 가리킵니다. 베드로는 다른 장로들과 자신이 공통된 책임을 지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물론 이 표현만으로 사도와 장로의 권한이 모든 면에서 동일하다거나, 교회 안에 서로 다른 책임이 없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는 분명히 다른 장로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그들 위에 군림하는 사람으로 소개하지 않고, 그들과 같은 자리에서 양 떼를 돌보는 책임을 가진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권하는 지도자의 모습을, 먼저 자신의 말하는 방식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신을 설명하는 말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증인」이며, 「앞으로 드러날 영광을 함께 나눌 동반자」라고 합니다.
고난과 영광이 한 문장에 나란히 등장합니다.
고난에 대해서는 증인이고, 장차 드러날 영광에 대해서는 함께 나눌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이미 일어났지만, 그분의 영광이 완전히 드러나는 일은 아직 기다리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도 그 기다림 가운데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자기소개는 단순한 이력 소개가 아닙니다. 장로들에게 앞으로 무엇을 바라보며 양 떼를 돌봐야 하는지 보여 줍니다. 지금의 권력이나 인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과 장차 드러날 영광입니다.
지도자도 아직 목자장의 영광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그가 돌보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은혜를 받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조금 더 깊이
「증인」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편지에 제시된 베드로의 사도적 정체성을 고려하면 자연스러운 이해입니다. 동시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증언하는 사람이라는 역할도 포함할 수 있습니다. 이 표현만으로 목격의 범위나 구체적인 장면을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양 떼의 주인은 장로가 아닙니다
여러분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양 떼를 억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꺼이 살피며 치십시오. 부끄러운 이익을 좇아서가 아니라 열성을 다해 그리하십시오.베드로전서 5:2 · 본디새김
베드로는 장로들에게 여러분의 양 떼를 돌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양 떼를 돌보라고 합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양 떼의 소유자가 아닙니다. 자기 소유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상대방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권리가 있다고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다른 이에게 속한 것을 맡은 사람은 그것을 맡기신 분의 뜻을 따라 관리해야 합니다. 「살피며 치십시오」는 양을 먹이고 이끌고 위험에서 보호하는 목자의 일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양을 먹이지 않고 자신만 먹이는 목자들
에스겔 34장에서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책망하십니다. 그들은 양 떼를 먹여야 할 사람들이었지만 자신들을 먹이는 데 몰두했습니다. 약한 양을 강하게 하지 않았고, 병든 양을 고치지 않았으며, 상한 양을 싸매지 않았습니다. 흩어진 양을 찾아오지도 않고, 오히려 폭력과 가혹함으로 양들을 다스렸습니다(에스겔 34:2–4).
문제는 목자들이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닙니다. 그 권한을 누구를 위해 사용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야훼는 자신이 친히 양들을 찾고 돌보시겠다고 선언하시고, 그들 위에 한 목자, 자신의 종 다윗을 세우겠다고 말씀하십니다(에스겔 34:11–16, 23). 에스겔의 본래 문맥에서 이것은 이스라엘의 실패한 지도자들에 대한 심판과 흩어진 백성의 회복 약속입니다.
베드로가 에스겔 34장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양 떼와 목자의 책임, 그리고 목자장에 관한 언어는 이 예언과 뚜렷한 주제적 연결을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하시며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으신다고 말씀하신 요한복음 10장 11–15절과도 연결됩니다.
억지로가 아니라 기꺼이
먼저 장로들은 억지로 양 떼를 돌보아서는 안 됩니다. 책임을 맡았지만 마음은 그 일에 없고, 어쩔 수 없어서 마지못해 수행하는 태도를 경계하는 것입니다.
그 대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꺼이」 돌보라고 합니다. 자발적인 행동도 자기 욕망을 위한 것일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자발성 자체가 아닙니다. 양 떼를 돌보는 의지가 하나님의 돌보심과 같은 방향을 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이익이 아니라 열성
두 번째는 이익을 얻으려는 동기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은 지도자가 생활에 필요한 재정적 지원을 받는 모든 경우를 금지하는 말은 아닙니다. 신약의 다른 본문은 공동체를 위해 수고하는 사람들의 물질적 지원을 인정합니다(고린도전서 9:7–14).
문제는 돌봄의 대상인 사람들을 자신의 이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것입니다. 목자의 책임을 맡았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재산이나 지위, 영향력을 얻으려 한다면, 그 지도자는 자신이 돌보아야 할 사람들을 이용하고 있는 셈입니다. 베드로가 권하는 열성은 더 많은 사람을 지배하려는 야심이 아니라, 맡겨진 사람들을 잘 돌보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누르지 말고 본이 되십시오
몫으로 맡겨진 이들을 주인처럼 누르지 말고, 도리어 양 떼의 본이 되십시오.베드로전서 5:3 · 본디새김
「몫」은 제비나 제비로 배정된 몫을 가리킬 수 있는 말입니다. 이 구절에서는 맡겨진 사람들을 소유물이 아니라 위탁된 몫으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에 적절합니다. 「주인처럼 누르다」(κατακυριεύω)로 옮긴 동사는 권력을 행사하여 지배하고 압도한다는 뜻을 지닙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방 사람들의 통치자들이 백성을 지배하지만 너희 가운데서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시며, 큰 사람이 되려면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자신도 섬기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가복음 10:42–45). 베드로의 권면도 그 방향을 따릅니다.
지도자가 본이 된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삶을 자신이 먼저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겸손을 요구한다면 스스로 겸손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라고 가르친다면 자신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지도자의 권위를 없애는 명령이 아닙니다. 권위가 행사되는 방식을 바꾸는 명령입니다.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
그리고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은 시들지 않는 영광의 관을 받을 것입니다.베드로전서 5:4 · 본디새김
「목자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장로들은 양 떼를 돌보는 목자들이지만, 그들 위에는 목자장이 계십니다. 장로가 교회를 자기 소유처럼 다룰 수 없는 이유는 단순히 겸손해야 하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 교회가 목자장의 양 떼이기 때문입니다. 장로도 그분 앞에서 자신의 돌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관」은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관이나 화관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고대의 경기나 축제에서 사용되는 화관은 영예로운 것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시들었습니다. 지도자가 지금 얻는 칭찬과 명예도 그와 같습니다.
마지막에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자기 아래 두었느냐가 아닙니다. 목자장의 양 떼를 어떻게 돌보았느냐입니다.
낮은 마음을 옷처럼 두르십시오
그와 같이 젊은 사람 여러분, 장로들에게 복종하십시오. 그리고 모두 서로를 대하며 낮은 마음을 두르십시오. 「하나님은 교만한 자들에게 맞서시고 낮은 이들에게는 은혜를 주신다」라고 하기 때문입니다.베드로전서 5:5 · 본디새김
장로들에게 양 떼를 돌보는 책임을 권한 뒤, 베드로는 젊은 사람들에게 장로들을 따르라고 권합니다. 「젊은 사람들」이 단순히 연령상 젊은 사람들인지, 장로라는 직책을 맡지 않은 공동체 구성원들을 보다 넓게 가리키는지는 논의할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앞의 「장로들」과 직접 대조된다는 점에서 공동체의 지도자들과 그 지도를 받는 사람들의 관계가 중심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구절을 장로들의 모든 요구에 무조건 복종하라는 명령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앞에서 장로들은 사람들을 주인처럼 누르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지도자에게는 지배하지 말라는 책임이 주어지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지도자를 존중하고 따르라는 책임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양쪽 모두를 하나의 명령 아래 놓습니다. 「모두 서로를 대하며 낮은 마음을 두르십시오.」 이제 더 이상 장로와 젊은 사람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왜 하필 옷을 입는 이미지일까
「두르십시오」(ἐγκομβόομαι)는 신약에서 이곳에만 등장하는 동사로, 옷이나 천을 몸에 묶어 두르는 행동과 관련된 말입니다. 분명한 것은 겸손을 몸에 걸치는 옷처럼 묘사한다는 점입니다.
옷은 사람의 모습을 바깥으로 드러냅니다. 겸손은 속으로 자신을 낮게 평가하는 생각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고,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로 드러나야 합니다.
장로는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억누르지 않아야 합니다. 젊은 사람은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여기며 지도자를 업신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서로를 대할 때 자신을 높이려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그 이유로 드는 말씀은 잠언 3장 34절의 그리스어 전통을 따르며, 야고보서 4장 6절에서도 같은 표현이 사용됩니다. 교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려고 하지만, 하나님 자신이 그런 사람에게 맞서십니다. 반면 자신을 낮추는 사람에게는 은혜를 주십니다.
장로가 하나님의 양 떼를 자신의 소유처럼 여기고 주인처럼 누른다면, 그는 단순히 지도 방법을 잘못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방식으로 권력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요구하는 겸손은 아무 능력도 없는 사람의 무기력함이 아니라, 힘과 책임을 가진 사람일수록 자신의 자리를 올바르게 이해해야 한다는 요구입니다.
그러므로 때가 되면 그분이 여러분을 높이시도록, 하나님의 강한 손 아래 여러분 자신을 낮추십시오.베드로전서 5:6 · 본디새김
성경에서 하나님의 강한 손은 특히 출애굽의 기억과 연결됩니다. 신명기 5장 15절에서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때에 여호와야훼께서 강한 손과 펼친 팔로 그들을 이끌어 내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강한 손은 단순히 사람을 눌러 굴복시키는 힘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능력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방향이 함께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을 높이지 말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을 높이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겸손하게 행동하면 반드시 가까운 시일 안에 사회적으로 성공하거나 높은 지위에 오를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그 때가 언제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도 않습니다. 편지 전체의 문맥에서는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날 때를 바라보는 소망과 연결해 읽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높이시는가 하는 점입니다.
걱정을 던지는 일도 겸손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걱정을 그분께 던지면서 말입니다. 그분이 여러분을 돌보시기 때문입니다.베드로전서 5:7 · 본디새김
왜 걱정을 맡기는 일이 겸손과 연결될까요?
원문에서 「던지면서」(ἐπιρίπτω)는 앞의 「자신을 낮추십시오」에 이어지는 분사입니다. 따라서 7절은 앞의 명령과 분리된 새로운 주제가 아니라, 자신을 하나님의 강한 손 아래 낮추는 일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것은 시편 55편 22절과 연결됩니다. 시편 55편은 적대와 배신 속에서, 특히 가까운 사람에게서 배신당하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사람의 기도입니다. 시편 기자는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짐을 여호와야훼께 맡기라고 권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실제로 걱정할 만한 일이 많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믿음 때문에 비방받을 수 있고, 경제적·사회적 불이익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공동체를 돌보는 장로들에게도 책임과 부담이 있었을 것입니다.
걱정의 모든 무게를 스스로 감당하려 한다면, 자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모든 사람을 지켜야 하며, 모든 결과를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겸손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책임까지 버리는 태도가 아닙니다. 바로 앞에서 베드로는 장로들에게 양 떼를 열성으로 돌보라고 명령했습니다. 책임을 수행하되, 모든 것을 자기 힘으로 통제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이어집니다. 「그분이 여러분을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장로들은 하나님의 양 떼를 돌보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그 장로들 자신도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누가 그들을 돌보십니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돌보시기 때문에, 그 백성 가운데 일부가 다른 사람들을 돌보도록 부름받습니다. 이 사실은 돌보는 사람을 교만에서 지켜 주고, 동시에 자신의 책임에 짓눌리지 않게 합니다. 자신이 모든 사람의 최종적인 보호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두르십시오」를 고대의 종이나 일꾼이 일을 하기 위해 몸에 앞치마 같은 천을 동여매는 모습과 연결해 설명하기도 합니다. 다만 이 단어 하나만으로 베드로가 특정한 형태의 노예용 앞치마를 정확히 가리켰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사자가 돌아다니지만 양 떼는 혼자가 아닙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대적인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으며 돌아다닙니다.베드로전서 5:8 · 본디새김
걱정을 하나님께 맡겼다면 더 이상 위험을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닐까요?
베드로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과 위험을 분별하는 것은 서로 반대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기 때문에 두려움에 휘둘리지 않고 정신을 차려 현실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울부짖는 사자」는 위협적인 힘을 생생하게 드러냅니다. 그리고 사자는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먹잇감을 찾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대적은 단순히 힘센 적이 아닙니다
「대적」은 법적인 분쟁에서 상대편에 서는 사람, 곧 고소하거나 법정에서 맞서는 상대방을 가리킬 수 있는 단어입니다. 「마귀」 역시 헐뜯거나 고발하는 자라는 의미와 연결됩니다. 이 때문에 베드로의 표현에는 강한 적이 공격한다는 이미지뿐 아니라, 대적하고 고발하는 존재라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본문은 마귀의 구체적인 활동 방식을 모두 설명하지 않습니다. 마귀가 독자들이 겪는 각각의 고난을 직접 일으켰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이 편지에서 독자들이 경험하는 비방과 고난을 생각하면 그 위험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비난을 받으며 자신의 믿음이 옳은지 의심할 수 있습니다. 고난을 피하기 위해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어질 수도 있고, 자신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에게 악으로 맞서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마귀를 사자에 비유함으로써 그 위험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5장 앞부분에는 양 떼와 목자장이 등장했습니다. 이제 양 떼를 삼키려는 사자가 등장합니다. 목자는 양을 돌보지만, 사자는 양을 삼키려 합니다.
양 떼는 위협받고 있지만, 주인 없는 양 떼가 아닙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목자장이 계시므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맞서라고 명령합니다.
어떻게 사자에게 맞설 수 있을까
믿음에 굳게 서서 그에게 맞서십시오. 세상에 있는 여러분의 형제 무리도 같은 고난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베드로전서 5:9 · 본디새김
베드로는 마귀와 싸우기 위한 의식이나 비밀스러운 기술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더욱 큰 영적인 능력을 획득하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누구신지, 하나님이 그분을 통해 무엇을 하셨는지, 자신들이 어떤 은혜를 받았는지를 신뢰하며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난 가운데서 현실을 부정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고난 때문에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왜 다른 사람들도 고난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마귀에게 맞서는 데 도움이 될까요? 고난받는 사람은 자신만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평안하게 살아가는 것 같은데 자신만 어려움을 겪는다는 생각은, 자신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느낌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독자들에게 그들이 혼자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같은 고난이라는 표현이 모든 그리스도인이 동일한 강도의 박해를 경험하고 있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고난을 겪는 일이 이 공동체만의 예외적인 경험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베드로는 그들을 「형제 무리」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지역에 흩어져 있지만, 같은 그리스도께 속해 있습니다. 공동체는 흔들리는 사람이 다시 굳게 설 수 있도록 서로를 붙드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사람들의 상호 돌봄을 마지막 보장으로 삼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구약의 욥기 1–2장에서는 사탄이 하나님 앞에서 욥의 신앙을 문제 삼는 장면이 나옵니다.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유가 정말 하나님 자신 때문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주신 복 때문인지를 의심하게 만듭니다. 베드로가 욥기의 그 장면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앙을 시험하는 대적이라는 주제에서 연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여러분을 세우실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자기의 영원한 영광으로 부르신 분은 여러분이 잠시 고난을 받은 뒤에 친히 여러분을 온전하게 하시고, 굳게 세우시고, 힘 있게 하시고, 터 위에 세우실 것입니다.베드로전서 5:10 · 본디새김
이 문장은 「그러나」로 시작합니다. 대적의 활동이 아무리 위협적이어도 그것이 이야기의 마지막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5장의 앞부분에서는 하나님이 낮은 이들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그 하나님을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그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독자들을 자신의 영원한 영광으로 부르신 분이라고 밝힙니다. 부르신 일은 이미 일어났지만, 영원한 영광에 완전히 참여하는 일은 아직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무엇이 있습니까?
고난입니다.
베드로는 그 고난을 「잠시」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고난받는 사람이 느끼는 시간이 짧다는 뜻이 아닙니다. 고난이 실제로 오랜 세월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표현을 고난은 곧 끝나니 조금만 기다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약속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는 잠시의 고난을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과 대조하고, 그 대조 속에서 고난은 마지막 현실이 아닙니다.
이어 베드로는 네 가지 동사를 연달아 사용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온전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굳게 세우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터 위에 세우십니다.
모든 행동의 주체가 하나님입니다.
앞에서 베드로는 양 떼를 돌보라, 낮은 마음을 두르라, 걱정을 던지라, 깨어 있으라, 믿음에 굳게 서서 맞서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오직 인간의 의지와 능력에 맡겨 두지 않습니다. 그들이 굳게 설 수 있는 궁극적인 근거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친히」라는 표현대로, 하나님은 그들의 고난을 멀리서 지켜만 보시는 분이 아니라 직접 그들을 회복시키고 세우실 분입니다.
무너질 수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세우십니다
아무리 훌륭한 지도자가 있어도 인간 공동체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지도자가 잘못할 수도 있고, 돌봄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충분한 도움을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공동체 전체가 고난 앞에서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런 가능성 앞에서 모든 은혜의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것은 고난을 겪으면 자동으로 더 강한 사람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고난 자체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드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도 아닙니다. 베드로는 고난 뒤에 이루어질 회복의 주체를 하나님이라고 명확하게 밝힙니다.
그분께 능력이 영원무궁토록 있습니다. 아멘.베드로전서 5:11 · 본디새김
마귀는 울부짖는 사자처럼 돌아다니고, 세상의 권력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원한 능력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양 떼를 돌보는 사람들도, 양 떼를 위협하는 대적도 마지막 권력을 가진 존재가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네 동사의 세밀한 의미 차이를 지나치게 구별할 필요는 없습니다. 표현들이 서로 겹치면서 하나님의 회복과 견고하게 하시는 일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터 위에 세우실 것입니다」라는 표현은 편지 앞부분의 하나님의 집에 관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5장 10절은 건축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하기보다는 하나님이 독자들을 견고하게 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반복적으로 강조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입니다
내가 믿음직한 형제로 여기는 실루아노를 통해 여러분에게 몇 마디로 썼습니다. 여러분에게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려는 것입니다. 그 은혜 안에 서십시오.베드로전서 5:12 · 본디새김
베드로는 이제 편지를 마치며 실루아노를 언급합니다. 실루아노는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실라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이 절만으로 두 이름이 반드시 동일 인물을 가리킨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실루아노를 통해」는 실루아노가 편지를 받아 적은 서기였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편지를 수신자들에게 전달한 사람이었다는 뜻일까요? 두 해석 모두 가능합니다. 일반적으로 편지를 전달한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근거가 있으며, 편지의 작성 과정에 참여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 하나로 실루아노가 베드로전서의 그리스어 문장을 실제로 작성했다고 단정하거나, 그가 단지 운반만 했다고 확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그를 「믿음직한 형제」로 여긴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앞에서 하나님은 「모든 은혜의 하나님」으로 불렸고, 4장 마지막에서는 「믿음직하신 창조주」로 불렸습니다. 물론 하나님과 실루아노의 신실함이 동일한 차원에 있다는 뜻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일에 신뢰할 만한 한 형제가 참여하고 있습니다. 편지는 실제 사람들을 통해 전해집니다.
베드로전서에는 많은 고난이 등장했습니다. 비방받는 사람들, 부당하게 대우받는 노예들, 믿지 않는 남편과 살아가는 아내들,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욕받는 사람들, 그리고 마귀의 위협 앞에서 믿음을 지켜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모든 이야기를 마친 뒤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라고 말합니다.
왜 고난에 관한 편지를 은혜에 관한 증언이라고 부를까요?
그리스도인의 고난 자체가 은혜이기 때문이라고만 말하면 본문의 의미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베드로는 고난을 선한 것으로 미화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억울한 고난과 악행 때문에 받는 고난을 구별했고, 부당한 행동을 악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참된 은혜는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셨지만 하나님이 예수님을 일으키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죄를 짊어지셨고, 우리를 하나님께 이끄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사람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새로운 소망을 주시며, 마지막에는 친히 굳게 세우실 것이라는 약속에 있습니다. 그 은혜가 고난을 겪는 사람들의 현실 속에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명령은 간결합니다. 「그 은혜 안에 서십시오.」 여기서 「서십시오」는 9절에서 믿음에 굳게 서서 대적에게 맞서라는 명령과 연결됩니다.
무엇이 그들을 굳게 서 있게 합니까? 스스로 강한 사람이 되었다는 확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참된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인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아닙니다. 동시에 그들의 순종이 은혜를 얻기 위한 대가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주어졌기에, 그들은 그 은혜 안에서 살아가고 굳게 설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사도행전 15장 22–32절에서 실라는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으로 보낸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이후 바울과 함께 사역했습니다. 바울의 편지에서도 실루아노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데살로니가전서 1:1; 고린도후서 1:19).
바벨론에서 보내는 문안
바벨론에 있으며 여러분과 함께 뽑힌 이가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합니다.베드로전서 5:13 · 본디새김
베드로는 자신이 있는 곳을 바벨론이라고 부릅니다.
구약에서 바벨론은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성전을 파괴했으며, 유다 백성의 일부를 포로로 끌고 간 제국의 중심지였습니다(열왕기하 25장). 이스라엘의 기억 속에서 바벨론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백성이 고향을 잃고 다른 권력 아래 살아가던 역사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전서의 바벨론이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갈립니다.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해석은 로마를 상징적으로 가리킨다는 것이고, 실제 메소포타미아의 바벨론이나 이집트에 있던 같은 이름의 장소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자체는 이 지명을 직접 풀이하지 않으므로, 본문만으로 정확한 집필 장소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바벨론을 로마의 상징으로 읽는다면, 편지의 시작과 마지막에 연결이 생깁니다. 편지의 첫머리에는 여러 지역에 흩어져 나그네로 사는 사람들이 등장했는데, 편지를 보내는 쪽도 바벨론에 있다고 합니다. 이 편지는 낯선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또 다른 낯선 땅에 있는 공동체가 보내는 편지가 됩니다. 이것은 강제적인 역사적 재구성이 아니라, 바벨론을 상징적으로 읽을 때 드러나는 문학적 연결입니다.
편지 첫머리에서는 수신자들이 뽑힌 사람들이라고 불렸습니다. 이제 마지막에서는 보내는 쪽에 있는 사람도 함께 뽑힌 사람이라고 불립니다. 사는 곳도 다르고 처지도 다를 수 있지만, 같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서로 낯선 지역에 살아가지만, 예수님 안에서는 서로에게 낯선 사람이 아닙니다.
함께 뽑힌 이는 누구인가
원문의 「함께 뽑힌 이」(συνεκλεκτός)는 여성 단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특정한 여성을 가리킨다고 읽는 견해가 있습니다. 베드로와 가까운 어떤 여성이나 그의 아내일 가능성을 제안하는 해석도 있었습니다.
반면 교회를 여성 단수형으로 의인화한 표현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리스어에서 교회를 뜻하는 에클레시아는 여성 명사이므로 문법적으로 가능합니다. 그러나 본문에는 「교회」라는 단어가 직접 쓰여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표현을 반드시 특정한 여성이라고 확정하거나, 반드시 바벨론에 있는 교회라고 단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다만 문안의 대상이 여러 교회라는 사실과 「함께 뽑힌」이라는 표현을 고려하면 공동체를 가리키는 읽기는 충분히 자연스럽습니다.
마가는 베드로와 특별히 가까운 사람으로 소개됩니다. 「아들」이라는 표현은 반드시 생물학적인 부자관계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영적인 관계나 사역을 통해 형성된 친밀한 관계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마가도 수신자들에게 문안을 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는 혼자서 편지를 쓰고 혼자서 독자들을 격려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곁에는 실루아노와 마가, 그리고 바벨론에서 함께 뽑힌 이가 있습니다. 편지를 읽는 사람들 역시 그런 공동체의 일부입니다.
사랑의 입맞춤과 평화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십시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 모두에게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베드로전서 5:14 · 본디새김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입맞춤은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 사이의 인사와 친밀함을 나타내는 행동으로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에서도 서로 인사할 때 입맞춤을 나누라는 권면이 여러 편지에 등장합니다(로마서 16:16; 고린도전서 16:20; 데살로니가전서 5:26). 이 표현의 의미는 특정한 인사 방식을 의무화하는 데 있지 않고, 서로를 가족처럼 환영하고 존중하는 관계에 있습니다.
장로도 있고 젊은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돌볼 책임이 있는 사람도 있고, 돌봄을 필요로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모든 사람들이 서로 사랑의 인사를 나누도록 권고받습니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 위에 높이 서는 장면이 아닙니다. 서로에게 문안하는 장면입니다.
베드로가 편지를 마치는 시점에도 그들이 겪는 어려움은 끝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마귀의 위협이 사라졌다는 선언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평화를 빕니다.
그들의 처지가 모두 같아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바벨론을 로마로 보는 해석의 근거로, 요한계시록에서도 바벨론은 하나님의 백성과 대립하는 강대한 제국의 이미지로 사용되며, 특히 요한계시록 17–18장의 바벨론은 로마 제국의 권력을 배경으로 이해하는 해석이 널리 받아들여집니다. 또한 초기 기독교 전승은 베드로가 로마에서 활동했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마가를 사도행전 12장 12절에 등장하는 요한 마가와 동일 인물로 이해하는 전통도 널리 알려져 있고, 고대 교회 전승은 마가와 베드로의 관계를 마가복음의 형성과 연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베드로전서 5장 13절 자체는 마가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그가 마가복음을 기록했는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참된 목자 아래에서 굳게 서는 사람들
베드로전서 5장에는 여러 종류의 힘이 등장합니다. 장로들에게는 공동체를 돌볼 권한과 책임이 있고, 마귀는 사람들을 삼키려는 사자처럼 묘사됩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그 힘들 가운데 어느 것도 마지막 권위를 가진 것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장로들 위에는 목자장이 계시고, 마귀의 위협 앞에는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 계십니다.
베드로는 독자들에게 목자처럼 살라고만 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목자장이 계신다고 말합니다.
겸손하게 살라고만 하지 않습니다.
낮은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 계신다고 말합니다.
걱정을 버리라고만 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이 계신다고 말합니다.
굳게 서라고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그들을 굳게 세우실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이 장의 명령들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얻어 내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이미 그분의 돌보심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지도자는 양 떼를 돌보아야 하지만, 양 떼의 주인은 아닙니다.
그래서 편지는 멀리 떨어진 공동체들이 서로 문안을 주고받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바벨론에 있는 사람들이 흩어진 형제들에게 인사를 전합니다. 마가의 문안이 이어지고, 실루아노라는 믿음직한 형제를 통해 그 편지가 전달됩니다.
그들 앞에 놓인 고난은 아직 모두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그들의 삶을 낯설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를 향해 사랑의 문안을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양 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에게 마지막 인사가 전해집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 모두에게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