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3–4장 · 헐뜯김 속의 선한 생활
두려움의 자리에 예수님을 모실 때
베드로전서 3장에는 얼핏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두 가지 권면이 나옵니다.
먼저 베드로는 믿지 않는 남편을 둔 아내들에게 말하지 않아도 자신의 삶으로 남편이 믿음으로 이끌려 오게 하라고 권합니다. 그런데 조금 뒤에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자신이 품은 소망의 이유를 묻는 사람에게 언제든지 대답할 준비를 하라고 말합니다.
한쪽에서는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고, 다른 쪽에서는 말할 준비를 하라고 합니다. 도대체 언제 침묵하고, 언제 말해야 할까요?
이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이 장의 더 깊은 주제가 드러납니다. 사람들의 반응이 두려울 때, 다른 사람의 힘에 눌릴 때,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는데도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기준으로 행동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장에는 두려움에 관한 말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아내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깨끗하게 살아가라는 권면을 듣지만, 동시에 어떤 위협에도 겁내지 말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해치려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으면서도, 온화한 태도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소망을 설명하라고 권고받습니다.
두려움 자체가 문제일까요? 아니면 누구를 두려워하는지가 문제일까요?
베드로는 그 대답을 15절에서 밝힙니다. 「오히려 마음속에서 그리스도를 거룩하신 주님으로 받드십시오.」 그리고 장의 마지막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계시며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예수님께 복종하게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그 결말에 이르기까지 베드로는 가정생활에서 시작하여 공동체의 관계, 세상 사람들의 비방, 부당한 고난을 차례로 다룹니다. 그리고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노아의 홍수와 감옥에 있는 영들에 관한 이야기까지 끌어옵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람들의 반응을 통제할 수 없지만, 자신이 누구를 주로 모시고 살아갈지는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말 없이 남편을 얻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마찬가지로 아내 여러분,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십시오. 남편 가운데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있더라도, 여러분이 말하지 않아도 그런 남편이 여러분의 삶을 통해 믿음으로 이끌려 오게 하려는 것입니다.베드로전서 3:1 · 두루새김
왜 베드로는 아내에게 복종하라고 말할까요? 특히 남편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경우에도 그렇게 하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같은 집에서 서로 다른 신을 섬긴다면
로마 시대의 가정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부부 중심의 사적인 공간과 달랐습니다. 가정은 경제활동과 사회적 지위, 종교적 관습이 결합된 중요한 생활 단위였습니다. 남성 가장은 가족과 가정에 속한 사람들에 대해 법적·사회적으로 큰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고, 가정에서 어떤 신들을 섬기는가 역시 가족의 질서와 밀접하게 연결되었습니다.
그런 사회에서 아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남편은 그렇지 않다면, 아내의 새 믿음은 남편에게 단순한 개인적 취향의 변화로 보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가정의 전통적인 종교적 관습과 권위에 도전하는 행동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다만 베드로의 권면이 당시의 남성 중심 관습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는지, 그 안에서 여성이 스스로 믿음을 지키고 행동하는 모습을 얼마나 새롭게 드러내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남편이 아내가 「말하지 않아도」 믿음으로 이끌려 오게 된다는 표현에는 말놀이가 있습니다. 그리스어 원문에서는 두 표현에 같은 로고스(λόγος)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앞에서는 복음의 말씀을, 뒤에서는 말이나 발언을 가리킵니다.
그렇다고 아내가 남편에게 자신의 신앙에 관해 절대로 말해서는 안 된다고 읽기는 어렵습니다. 같은 장 15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소망의 이유를 묻는 사람에게 대답할 준비를 하라고 명령하기 때문입니다. 강조점은 말로 설득하려는 노력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 증언의 방식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깨끗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말입니다.베드로전서 3:2 · 두루새김
남편이 듣지 않더라도 볼 수는 있습니다.
그는 아내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지만, 아내의 삶이 달라졌다는 사실까지 언제나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원문에는 두려움의 대상이 분명히 적혀 있지 않지만, 이 편지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권면이 반복되고 바로 6절에서 겁내지 말라고 명령한다는 점에서 두루새김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로 옮겼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결정하는 기준은 남편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이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입니다.
물론 본문은 남편이 변화할 것을 보증하지 않습니다. 1절의 「믿음으로 이끌려 오게 하려는 것입니다」는 권면이 향하는 목적입니다. 아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믿음을 삶으로 드러내는 것이고, 남편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아내가 통제할 수 없습니다.
머리를 꾸미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여러분의 꾸밈은 머리를 땋고 금붙이를 두르고 옷을 차려입는 겉치장이 아니라, 마음속에 숨은 사람의 아름다움이어야 합니다. 온화하고 차분한 마음은 썩지 않는 아름다움이며, 하나님 앞에서 매우 귀합니다.베드로전서 3:3–4 · 두루새김
이 말씀은 머리를 땋거나 장신구를 착용하는 것을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구절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머리를 땋는 일, 금붙이를 두르는 일과 함께 「옷을 차려입는」 일도 열거합니다. 이를 절대적인 금지로 읽는다면 옷을 입는 행위 자체까지 문제 삼아야 하는 곤란함이 생깁니다. 이 말씀은 참된 아름다움과 가치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를 강조하는 것으로 읽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당시 옷과 장신구는 부와 신분을 드러내는 수단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마음속에 숨은 사람의 아름다움」을 제시합니다. 겉모습처럼 즉시 눈에 들어오지는 않지만, 실제 행동을 통해 드러나는 그 사람의 성품입니다.
베드로는 그 성품을 「온화하고 차분한 마음」이라고 설명합니다. 온화함은 아무 의견도 내지 못하거나 자신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태도와 같지 않습니다. 문맥상 자신의 믿음을 지키면서도 다른 사람을 공격하거나 지배하려 하지 않는 평온한 태도와 연결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하나님 앞에서 매우 귀합니다」가 놓여 있습니다. 사람들은 눈에 드러나는 꾸밈을 보고 가치를 평가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다른 것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앞 장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버렸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귀하게 여기셨듯이, 아내들의 가치 역시 하나님의 판단을 기준으로 설명됩니다.
사라는 왜 등장하는가
사라도 아브라함을 주인이라고 부르며 그에게 순종했습니다. 여러분이 선한 일을 하고 어떤 위협에도 겁내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사라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베드로전서 3:6 · 두루새김
베드로의 권면은 사라를 본받으라는 말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남편이 두려우니 복종하라고 말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선한 일을 하면서 어떤 위협에도 겁내지 않는 모습을 사라의 자녀다운 삶과 연결합니다. 5절은 사라를 포함한 거룩한 여자들이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이 끝까지 의지할 대상은 남편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이 권면을 남편의 모든 요구를 무조건 따르라는 명령으로 확대하는 것은 본문에 없는 내용을 덧붙이는 것입니다. 특히 남편의 폭력이나 학대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삼는다면, 선한 일을 하면서 두려움에 지배되지 말라는 이 문단의 방향과도 충돌합니다. 권면의 중심에는 남편의 무제한적인 권한이 아니라,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선한 일을 하는 아내의 삶이 놓여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인」이라고 불렀다는 말은 창세기 18장 12절에 근거합니다. 그런데 그 장면에서 사라는 순종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늙었는데 아이를 낳을 수 있겠느냐며 속으로 웃다가 아브라함을 주인이라고 부릅니다. 창세기 18장 12절 자체가 사라의 순종을 직접 보여 주는 장면은 아니며, 베드로는 사라가 남편을 부르는 표현을 가져와 그녀의 태도를 설명합니다. 사라의 순종을 어떤 구체적 행동에서 찾아야 하는지는 창세기 전체의 이야기와 베드로의 적용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남편에게 주어진 경고 — 기도가 막힐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남편 여러분, 아내를 이해하며 함께 사십시오. 아내는 더 약한 그릇이며 여러분과 함께 생명의 은혜를 물려받을 사람이니, 귀하게 여기십시오. 여러분의 기도가 막히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베드로전서 3:7 · 두루새김
아내들에게 여섯 절을 사용한 베드로는 남편들에게 한 절을 할애합니다. 그러나 이 한 절에는 매우 강한 요구가 담겨 있습니다. 남편은 자신의 권한을 행사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아내가 어떤 처지에 있는지 이해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더 약한(ἀσθενής) 그릇」이라는 표현은 현대 독자에게 불편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원문에서 「더 약한」은 비교급이지만 어떤 면에서 약한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신체적 힘의 차이를 가리킬 수도 있고, 아내가 상대적으로 약한 법적·사회적 지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고 볼 수도 있으며, 어느 쪽인지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아내가 더 약하므로 남편이 더 강하게 지배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정반대로 아내를 「귀하게 여기십시오」라고 명령합니다. 그 이유는 「여러분과 함께 생명의 은혜를 물려받을 사람」이라는 말에 있습니다. 당시 사회 질서 안에서는 남편에게 더 큰 권한이 주어질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구원을 물려받는 일에서 아내는 남편보다 낮은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함께 물려받는 사람들입니다.
마지막 경고는 더 강합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막히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어떻게 대하는지가 그의 기도와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아내에게 부당하게 행동하면서도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아무 문제 없이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베드로는 기도가 막히는 방식이나 조건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며, 모든 기도의 응답 여부를 부부관계 하나로 판단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내에게는 남편의 변화 가능성을 바라보며 선하게 살아가라고 하고, 남편에게는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강한 위치에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 더 높은 가치를 갖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책임은 가정 안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시선을 넓힙니다.
복을 받은 사람이 복을 빌어 주는 이유
끝으로, 여러분 모두 한마음을 품고 서로의 아픔을 함께 느끼며 믿음의 형제자매를 사랑하십시오.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 자신을 낮추십시오.베드로전서 3:8 · 두루새김
여기서 「끝으로」는 편지 전체를 마무리한다는 뜻이 아니라, 여러 사회적 관계를 설명한 뒤 모든 독자에게 적용되는 권면으로 넘어가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한마음, 서로의 아픔을 함께 느끼는 마음,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마음, 서로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 자신을 낮추는 태도를 연달아 제시합니다.
한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언제나 같은 생각을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그다음에 자신이 겪지 않은 고통이라도 다른 사람의 고통이라는 이유로 외면하지 않는 태도를 요구합니다. 서로 다른 신앙을 가진 부부, 힘의 차이가 있는 관계를 생각하면 이 태도는 더욱 중요해집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 이 모든 태도가 실제로 시험받는 상황이 등장합니다.
악을 악으로,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마십시오. 오히려 복을 빌어 주십시오. 여러분은 복을 물려받도록 바로 이렇게 하라고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베드로전서 3:9 · 두루새김
단순히 보복을 참는 소극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에게까지 좋은 것을 구하는 적극적인 태도입니다. 복을 받으려면 먼저 원수에게 복을 빌어 주어야 한다는 거래의 조건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물려받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이 받은 은혜에 걸맞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모욕하면 모욕으로, 악한 일을 하면 악으로 대응한다면 결국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사람은 상대방이 됩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부름받았는지를 기억하라는 다른 기준을 제시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마태복음 5:44)과 같은 문제를 다룹니다.
평화를 뒤쫓는다는 표현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들을 보려는 사람은 혀로 악한 말을 하지 않고 입술로 속이는 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베드로전서 3:10 · 두루새김
「악에서 떠나 선한 일을 하고, 평화를 찾으며 그것을 힘써 추구해야 한다.」베드로전서 3:11 · 두루새김
베드로가 인용한 시편 34편 12–16절은 평온한 상황에서 착하게 살라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시편 34편 전체는 두려움과 어려움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사람의 찬양과 권면입니다. 그래서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은 자신의 혀를 지키는 일입니다.
사람은 위협받거나 모욕당할 때 말이 거칠어지기 쉽습니다. 자신을 보호하려고 상대방을 공격하고, 옳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말을 과장하거나 사실을 비틀 수도 있습니다. 시편은 바로 그런 순간에 악한 말과 속이는 말을 하지 말라고 권합니다.
이어지는 명령은 더욱 적극적입니다. 원문에서는 평화를 「뒤쫓다」(διώκω)라는 표현을 씁니다. 갈등이 발생했을 때 무관심하게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이루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바로 앞에서 악에서 떠나 선한 일을 하라고 했기 때문에, 이 평화는 악을 눈감아 주는 평화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의로운 사람들을 보살피시고 그들의 간청에 귀를 기울이시지만, 악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맞서시기 때문이다.」베드로전서 3:12 · 두루새김
원문에서는 여기에 눈과 귀와 얼굴이 등장합니다. 주님의 눈은 의로운 사람들을, 귀는 그들의 간청을 향해 있고, 얼굴은 악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맞서 있습니다. 이 시적인 표현의 뜻을 두루새김은 「보살피시고」, 「귀를 기울이시지만」, 「맞서시기」로 풀어 옮겼습니다.
이제 남편들에게 주어진 경고가 새롭게 들립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와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서로 떨어진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도 보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악에 대한 판단과 보복을 모두 자신의 손에 쥐려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들의 억울함은 하나님 앞에서 보이지 않는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선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안전하다는 뜻일까요?
선을 행하는데도 고난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선한 일을 하는 데 열심을 낸다면 누가 여러분을 해치겠습니까?베드로전서 3:13 · 두루새김
이 문장은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해를 입지 않는다는 약속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적대감을 덜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절에서 베드로는 그 기대가 언제나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옳은 일을 하다가 고난을 받는다 해도 여러분은 복이 있습니다. 여러분을 해치려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마음이 흔들리지 마십시오.베드로전서 3:14 · 두루새김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선한 일을 했다는 이유로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옳은 일을 하다가 받는 고난 가운데서도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의 때문에 박해받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마태복음 5:10)과 이어지는 주제입니다.
고난 자체가 즐거운 일이기 때문은 아닙니다. 베드로는 이미 이 편지에서 고난이 슬픔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그렇다면 복은 어디에 있을까요? 베드로는 독자들의 시선을 고난 앞에서 누구를 두려워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로 돌립니다.
누구를 두려워할 것인가
오히려 마음속에서 그리스도를 거룩하신 주님으로 받드십시오. 여러분이 품은 소망의 이유를 묻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언제든 대답할 준비를 하십시오. 다만 바른 양심을 지키며, 온화한 태도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대답하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의 선한 삶을 헐뜯고 모욕하는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는 것입니다.베드로전서 3:15–16 · 두루새김
14절의 「두려워하지 말고」와 15절의 「거룩하신 주님으로 받드십시오」는 이사야 8장 12–13절과 깊이 연결됩니다. 주변 강대국의 위협 속에서 흔들리던 유다 백성에게 이사야는, 백성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함께 두려워하지 말고 만군의 하나님을 거룩하게 여기며 그분을 두려워하라고 권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서에서 거룩하게 여겨야 할 분은 하나님입니다. 베드로는 그 자리에 그리스도를 놓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거룩하게 여기라는 명령을 예수님을 주로 모시는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삼위일체 교리 전체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으로 확대할 필요는 없지만,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했는지에서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거룩하신 주님으로 받드십시오」는 우리가 예수님을 거룩하게 만들어 드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거룩한 주님으로 인정하고, 마음속에서 예수님께 걸맞은 자리를 드리라는 뜻입니다. 상대방이 무엇을 빼앗아 갈지 두려워하다 보면 그 사람의 행동이 삶을 지배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주로 모신다는 것은 세상의 위협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라, 그 위협이 삶을 지배하는 마지막 권위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제 처음에 제기했던 말과 침묵의 문제가 다시 등장합니다.
소망의 까닭을 묻는 사람에게 답하십시오
여기서 「대답」은 자신의 입장이나 행동을 설명하거나 변호하는 말을 가리킵니다. 법정의 변론이라는 뜻도 지니지만, 여기서는 재판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모든 교리를 논리적으로 증명할 준비를 하라는 명령으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베드로는 「여러분이 품은 소망」의 이유를 묻는 사람에게 대답하라고 합니다.
왜 이 사람들은 보복하지 않는지, 왜 손해를 보면서도 선한 일을 계속하는지, 왜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설명하라는 것입니다. 삶에서 드러난 소망을 말로 설명하는 일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삶으로 믿음을 드러내지만, 누군가 그 믿음의 이유를 묻는다면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삶과 말은 경쟁하지 않습니다.
삶은 말이 공허해지지 않도록 하고, 말은 삶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설명합니다.
베드로는 대답의 내용만큼 방식도 중요하게 여깁니다. 원문은 여기서도 두려움의 대상을 밝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는 경외의 태도로 읽을 수 있어 두루새김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옮겼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을 포함한다고 이해하는 견해도 가능합니다.
확실한 것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믿음을 설명한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모욕하거나 억압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진리를 알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상대방을 무시하기 쉽고, 논쟁에서 이기려는 마음이 존중을 밀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망의 이유를 설명하는 방식 자체가 그 소망의 성격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 보복하지 않으시고 의롭게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셨다면, 예수님에 대한 소망을 설명하는 사람 역시 같은 방향의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그리스도인을 헐뜯는 사람들은 그들의 실제 선한 삶을 보고 부끄러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언제나 회개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악한 일을 하다가 고난을 받는 것보다 선한 일을 하다가 고난을 받는 것이 낫기 때문입니다.베드로전서 3:17 · 두루새김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으므로, 모든 고난을 곧바로 하나님이 직접 원하신 사건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것은 고난이 닥치는 경우 무엇 때문에 고난받는 것이 나은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 이유는 단지 도덕적으로 훌륭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베드로는 이제 결정적인 근거를 제시합니다.
의로우신 분이 의롭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사람들의 죄 때문에 단 한 번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의로우신 분이 의롭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고난을 받으신 것은 여러분을 하나님께 이끄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몸으로는 죽임을 당하셨지만 영으로는 살아나셨습니다.베드로전서 3:18 · 두루새김
그런데 예수님의 고난은 다른 사람의 고난과 결정적으로 다릅니다.
「의로우신 분」이 「의롭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보통 사람이 자신의 잘못 때문에 받는 고난은 자신의 행동과 연결되지만, 예수님께서는 의로우신 분이셨는데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억울한 고난의 모범만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 목적은 「여러분을 하나님께 이끄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도덕적 교훈만이 아니라 사람들을 하나님께 이끄는 구원의 사건입니다. 「단 한 번」이라는 표현은 그 고난이 반복해서 이루어져야 하는 불완전한 행위가 아니라 결정적인 효력을 지닌 사건임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야기는 죽음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몸으로는 죽임을 당하셨지만 영으로는 살아나셨습니다.」 이 구절은 두 가지로 읽힙니다. 「몸으로는」이 죽을 수 있는 인간으로서의 존재 방식을, 「영으로는」이 부활로 나타난 새로운 생명의 방식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가 있고,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나셨다고 읽는 견해가 있습니다. 원문의 문법 형태가 이 관계를 한 가지로 고정하지 않으므로, 이 문장만으로 예수님께서 죽으신 뒤 어떤 형태로 존재하셨는지 자세히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대조는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임을 당하셨지만, 그 죽음이 예수님의 마지막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단 한 번」은 히브리서 9장 26–28절과 10장 10–14절에서 예수님의 단번에 이루어진 제사를 설명하는 내용과 같은 주제로 이어집니다. 다만 베드로는 히브리서처럼 제사 제도에 관한 설명을 길게 펼치지는 않습니다.
감옥에 있는 영들에게 무엇을 선포하셨는가
그 영으로 그리스도께서는 감옥에 있는 영들에게도 가셔서 선포하셨습니다. 그들은 전에 노아 시대에 순종하지 않았던 영들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방주가 만들어지는 동안 오래 참고 기다리셨습니다. 그 방주 안으로 들어간 몇 사람, 곧 여덟 명이 물을 통해 구원을 받았습니다.베드로전서 3:19–20 · 두루새김
여기는 베드로전서에서 가장 어려운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 그 영들에게 가셨을까요? 그 영들은 죽은 사람들일까요, 타락한 천사들일까요? 감옥은 어디이며, 무엇을 선포하셨을까요? 본문은 그 질문들에 모두 직접 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해석은 크게 셋으로 갈립니다. 예수님께서 죽음 이후 노아 시대에 홍수로 죽은 사람들에게 선포하셨다는 읽기, 갇혀 있는 타락한 천사들에게 승리를 선포하셨다는 읽기, 그리스도께서 노아 시대에 노아를 통해 당시 사람들에게 선포하셨다는 읽기입니다. 이 차이는 선포가 언제 이루어졌는지, 구원의 소식인지 심판과 승리의 선언인지를 가릅니다. 이러한 해석들은 고대부터 논의되어 왔으며, 어느 하나가 본문의 모든 어려움을 완전히 해결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은 분명한가
해석이 갈리더라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들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셨지만 살아나셨다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예수님의 선포는 노아 시대의 불순종 및 하나님의 심판과 연결되고, 이 이야기는 모든 천사와 권세가 예수님께 복종하게 되었다는 선언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며, 살아나심과 높아지심이 하나님의 결정적인 승리를 드러냅니다.
베드로는 독자들에게 고난을 견디라고 권하면서 이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들이 사는 세상에는 너무 강하게 느껴지는 권세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죽임을 당하셨다가 살아나셨고, 마지막에는 모든 권세 위에 계신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갑자기 방주 안에 있던 여덟 사람을 언급합니다. 왜 하필 노아의 방주일까요?
조금 더 깊이
첫째 읽기는 20절이 그 영들을 노아 시대에 순종하지 않았던 영들이라고 설명한다는 점을 근거로 삼습니다. 선포의 내용을 심판이나 승리의 선언으로 보는 견해도, 구원의 소식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선포의 시점을 밝히지 않고 죽은 사람들에게 회개할 기회가 다시 주어졌다고 직접 말하지도 않으므로, 이 구절을 근거로 죽음 이후에 모든 사람에게 다시 구원의 기회가 주어진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둘째 읽기는 창세기 6장 1–4절의 하나님의 아들들 이야기와 그것을 발전시킨 고대 유대교 전승, 특히 하늘의 존재들이 죄를 짓고 심판을 기다리며 갇히는 『에녹1서』의 일부 전승을 배경으로 합니다. 유다서 6절도 자기 자리를 지키지 않은 천사들이 심판을 위해 갇혀 있다고 말하고, 베드로후서 2장 4–5절은 죄를 지은 천사들의 심판과 노아의 홍수를 가까이 연결합니다. 이 읽기는 22절의 결말과 잘 이어지지만, 베드로는 그 영들이 천사들이라고 직접 밝히지 않으며 『에녹1서』를 인용하지도 않습니다. 셋째 읽기는 베드로후서 2장 5절이 노아를 의를 선포하는 사람이라고 부른다는 점과 연결됩니다. 하지만 18–19절이 예수님의 죽음과 살아나심을 언급한 뒤 「그 영으로」 가셔서 선포하셨다고 말하므로, 노아 시대의 선포로 읽으려면 문장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홍수의 물이 어떻게 세례와 연결되는가
베드로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를 자세하게 반복하지 않습니다. 20절에서 그가 짚는 것은 방주 안에 들어간 사람들의 수와 그들이 구원받은 방식입니다. 「곧 여덟 명이 물을 통해 구원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7장 7절과 13절에 따르면 노아와 그의 아내, 세 아들과 그들의 아내들입니다.
홍수의 물은 창세기에서 심판의 수단이었습니다. 세상의 생명들이 그 물 때문에 멸망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노아의 가족이 그 물을 통해 구원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물 자체에 생명을 주는 힘이 있었기 때문은 아닙니다.
방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물과 짝을 이루는 세례가 이제 여러분도 구원합니다. 세례는 몸에 묻은 때를 씻어 내는 일이 아니라, 바른 양심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하는 일입니다. 이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살아나신 일을 통해 이루어집니다.베드로전서 3:21 · 두루새김
베드로는 분명히 세례가 구원한다고 말합니다. 동시에 그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살아나신 일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세례를 그 자체로 신비한 힘을 가진 물의 의식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구원을 이루는 결정적인 근거는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짝을 이루는」은 어떤 것과 서로 맞아 연결되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홍수와 세례가 완전히 같은 사건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두 사건 사이에는 심판과 구원, 옛 상태와 새로운 삶이라는 주제들이 서로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세례는 단순히 몸을 씻는 일이 아닙니다
물이 몸에 닿아 때가 벗겨지는 것은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일 뿐입니다. 문제는 「바른 양심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하는 일」이라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에페로테마는 질문이나 요청을 나타낼 수 있으며, 문맥에 따라 서약이나 다짐과 관련된 의미로도 해석됩니다.
그래서 두 읽기가 갈립니다. 간청이라는 읽기는 하나님을 향하여 도움과 구원을 구하는 태도를 강조하고, 두루새김도 이 뜻으로 옮겼습니다. 서약이라는 읽기는 초기 세례 전승을 근거로, 세례받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믿음과 새로운 삶을 고백하고 약속하는 측면을 강조합니다.
어느 쪽을 택하든 세례는 겉으로 몸을 씻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양심의 문제이며,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이루어진 구원과 연결됩니다.
베드로는 16절에서 바른 양심을 지키며 소망의 이유를 설명하라고 했고, 이제 세례를 설명하면서 다시 바른 양심을 언급합니다. 이 반복은 세례를 과거에 한 번 받은 종교적 의식으로만 이해하지 못하게 합니다. 바른 양심을 지키는 행동이 예수님의 부활을 대신한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구원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삶의 방식과 떨어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노아의 가족은 심판의 물 가운데 있었지만 그 물 속에서 구원받았습니다. 베드로의 독자들 역시 믿음 때문에 모욕을 받고 선한 일을 했는데도 오해를 받는 세상 한가운데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들의 구원은 세상이 얼마나 우호적인가가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에 근거합니다.
노아가 방주 밖의 물을 마음대로 다스릴 수 없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자신들을 둘러싼 모든 상황을 마음대로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는 분명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제 예수님께서 어디에 계신지를 보여 줍니다.
모든 권세가 그분께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로 가셔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계십니다.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분께 복종하게 되었습니다.베드로전서 3:22 · 두루새김
베드로전서 3장은 이 선언으로 끝납니다.
「오른쪽」은 공간적인 위치를 알려 주기 위한 표현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오른쪽은 특별한 영예와 권위를 나타내는 자리입니다.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은 땅 위의 왕과 총독만이 아니라 하늘의 존재들과 인간을 넘어서는 권세까지 포함하는 말입니다. 각각의 이름이 정확히 어떤 존재들을 구분하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지만, 그 모든 것 위에 예수님께서 계신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베드로는 권력을 가진 사람이 언제나 옳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지닌 권력과 하늘의 권세들까지 예수님 아래에 놓여 있다고 선언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위험을 무시하는 태도가 아니라, 강한 권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마지막 권위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예수님의 권위가 없다는 증거가 아니었습니다. 의로우신 분이 의롭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고난을 받으신 그 사건을 통해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모든 권세 위에 높이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의 소망은 자신이 강해진다는 데 있지 않고, 그들이 속한 예수님께서 이미 모든 권세 위에 계신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하나님의 오른쪽이라는 표현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높이시는 왕에게 자신의 오른쪽에 앉으라고 말씀하시는 시편 110편 1절의 배경이 있습니다. 신약의 여러 본문은 이 시편을 예수님의 높아지심과 연결합니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드는 사람의 삶
부부관계, 공동체의 사랑, 선한 일을 하다가 받는 고난, 노아의 홍수와 세례, 그리고 권세들의 복종까지, 이 장을 관통하는 질문은 하나입니다. 자신보다 강한 힘 앞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선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베드로는 그 힘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리스도인의 삶을 결정하는 마지막 기준은 사람들의 반응이 아니라 예수님이라고 답합니다. 그리고 그 선한 삶은 인간의 강한 의지가 아니라, 의롭지 않은 사람들을 하나님께 이끄시려고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의 구원 위에 세워집니다.
그래서 처음의 물음에도 답이 나옵니다. 때로는 말 없이 자신의 삶으로 진실을 보여 주어야 하고, 때로는 소망의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상대방을 모욕하거나, 악을 악으로 갚거나,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것으로 자신의 믿음을 증명해서는 안 됩니다.
이 장을 오늘의 삶에 적용할 때 그리스도인의 인내를 부당한 관계에 대한 무조건적인 순응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고난을 받는 사람이 안전을 구하거나, 부당한 일을 밝히거나, 해를 막기 위한 정당한 조치를 취하는 일을 이 장이 금지한다고 볼 근거는 없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더 이상 독자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령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절에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과 예수님께서 계신 자리가 나올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오른쪽에 계십니다.
그리고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예수님께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앞에서 사람들의 위협 때문에 마음이 흔들릴 수 있었던 독자들에게, 베드로는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계신 자리를 보여 줍니다. 그들이 마음속에서 거룩하신 주님으로 받들어야 할 분이 바로 그곳에 계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