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풀어 읽기 · 9장
이 장의 자리 · 8–15장 · 첫 왕이 된 사울
암나귀를 찾으러 간 사람,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하자, 여호와야훼께서는 그들에게 왕을 세워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상 9장은 왕을 세우는 이야기답지 않게 시작합니다.
왕을 선출하기 위한 회의도, 여러 지파의 대표들이 모인 자리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어느 집에서 암나귀들이 없어졌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것들을 찾아오라고 시키고, 아들은 종을 데리고 길을 떠납니다.
그 아들의 이름이 사울입니다.
이처럼 사무엘상 9장에는 두 이야기가 동시에 진행됩니다. 사울은 암나귀를 찾고 있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스릴 사람을 사무엘에게 보내고 계십니다. 그러나 사울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동안 독자도 하나님의 계획을 알지 못합니다. 본문의 한가운데 이르러서야 그동안 일어난 일들의 또 다른 의미가 밝혀집니다.
사울은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길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눈에 띄는 청년의 평범한 하루
왕의 이야기는 한 집안의 소개로 시작된다
본문은 먼저 사울의 아버지 기스를 소개합니다.
베냐민 출신으로 기스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아비엘의 아들이었다. 아비엘은 스롤의 아들, 스롤은 베고랏의 아들, 베고랏은 아비아의 아들, 아비아는 베냐민 사람의 아들이었다. 기스는 유력한 사람이었다.사무엘상 9:1 · 본디새김
히브리어 깁보르 하일은 용맹한 전사나 능력 있는 사람을 가리킬 수 있는 표현입니다. 문맥에 따라 군사적 능력뿐 아니라 재력이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기스의 전투 경력이 소개되지 않습니다. 대신 그에게 가축과 종들이 있다는 사실이 이어집니다. 따라서 그가 어느 정도 기반을 갖춘 집안의 사람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의 아들 사울에 대해서는 훨씬 인상적인 설명이 나옵니다.
그에게는 사울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잘생긴 젊은이였다.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그보다 잘생긴 사람은 없었다. 그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키가 더 컸다.사무엘상 9:2 · 본디새김
외모가 뛰어나고 키가 크다는 사실은 왕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 앞에 서서 군대를 이끌어야 하는 왕에게 위엄 있는 외모는 분명 매력적인 특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아직 사울이 지혜롭다거나 용맹하다거나 정의롭다고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의 외적인 모습만 말합니다.
이것은 나중에 사무엘상 16:7에서 여호와야훼께서 사무엘에게 사람의 외모와 키를 기준으로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장면과 함께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9장에 등장하는 사울의 외모를 처음부터 부정적인 징조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 그것은 사울이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보일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특징이지, 그의 내면에 대한 판결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특별해 보이는 청년에게 맡겨진 첫 번째 일은 놀라울 만큼 평범합니다.
아버지의 암나귀들을 찾는 일입니다.
찾지 못하는 일이 이야기를 앞으로 움직인다
사울은 종을 데리고 여러 지역을 돌아다닙니다.
에브라임 산지를 지나 살리사와 사알림을 거치고 베냐민 땅까지 찾아보지만, 암나귀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본문은 지명들을 차례로 기록하면서도 각 지역에서 일어난 특별한 사건은 전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같은 결과를 되풀이합니다.
찾지 못했습니다.
이 지명들의 정확한 위치는 모두 확정되어 있지 않으므로, 사울이 지나간 경로를 현대 지도 위에 정밀하게 복원하기는 어렵습니다.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여러 지역을 거쳤는데도 암나귀를 찾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숩 땅에 이르자 사울이 함께 있던 종에게 말했다. 「자, 돌아가자. 아버지께서 암나귀들은 그만 생각하시고 우리를 걱정하실까 염려된다.」사무엘상 9:5 · 본디새김
이 말은 사울의 첫 번째 직접적인 발언입니다. 그런데 그가 걱정하는 것은 자신의 체면이나 실패가 아닙니다. 집에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을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여기서 사울은 아직 왕도, 지도자도 아닙니다. 아버지의 일을 맡은 아들입니다.
그리고 그가 돌아가기로 결심하는 바로 그때, 이름조차 밝혀지지 않은 종이 새로운 길을 제안합니다.
길을 아는 종, 때를 아는 소녀들
사울을 사무엘에게 데려가는 사람
종이 말합니다.
종이 그에게 말했다. 「보십시오. 이 성읍에 하나님의 사람이 계십니다. 존경받는 분이고, 그분이 하시는 말씀은 모두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제 그리로 가 보시지요. 우리가 나선 길에 관해 우리에게 알려 주실지도 모릅니다.」사무엘상 9:6 · 본디새김
사울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면서도 현실적인 문제를 제기합니다.
사울이 종에게 말했다. 「그래, 간다고 하자. 그런데 그 사람에게 무엇을 가져가겠느냐? 우리 자루에는 빵이 다 떨어졌고, 하나님의 사람에게 가져갈 선물도 없는데, 우리에게 무엇이 있느냐?」사무엘상 9:7 · 본디새김
당시 권위 있는 사람이나 도움을 구하는 사람에게 선물을 가져가는 일은 낯선 관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이 장면을 예언자가 돈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알려 주는 제도로 이해할 근거는 없습니다. 사울과 종이 선물을 준비하는 모습은 그들의 방문 예절과 기대를 보여 줄 뿐입니다.
종은 자신에게 은 사분의 일 세겔이 있다고 말합니다. 사울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종이 해결한 것입니다.
사울은 주인이고 종은 그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순간 더 많은 정보를 가진 사람은 종입니다. 사울이 돌아가자고 할 때 종은 다른 길을 알고 있었고, 사울이 선물을 걱정할 때 종은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사울은 말합니다. 「네 말이 좋다. 자, 가자.」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을 사무엘에게 데려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이름 없는 종입니다.
종도 사울이 왕으로 선택될 것이라는 사실은 모릅니다. 그저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말하고, 가진 것을 내놓고, 주인에게 길을 제안할 뿐입니다.
하지만 그 평범한 제안이 이야기의 방향을 바꿉니다.
선견자는 무엇을 보는 사람인가
9절에서는 이야기의 흐름이 잠시 멈추고 설명이 삽입됩니다.
예전에 이스라엘에서는 하나님께 물으러 갈 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자, 선견자에게 가자.」 오늘날 예언자라고 하는 이를 예전에는 선견자라고 불렀기 때문이다.사무엘상 9:9 · 본디새김
이 문장은 등장인물의 말이 아니라 이야기를 전달하는 서술자의 설명입니다. 서술자는 독자가 익숙하게 알고 있을 ‘예언자’라는 표현을 가지고, 이야기 속 인물들이 사용하는 ‘선견자’라는 명칭을 설명합니다. 이것은 본문이 서술되는 시점과 이야기 속 시대 사이에 언어 사용의 차이가 있음을 보여 주지만, 이 설명만으로 본문의 구체적인 집필 시기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단순히 앞날을 점친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이 직접 설명하듯, 사람들은 하나님께 묻기 위해 선견자를 찾아갔습니다.
사울은 암나귀가 어디 있는지 알고 싶어서 선견자를 찾아갑니다. 그러나 실제로 더 중요한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사울이 아니라 선견자 사무엘입니다.
사울은 무엇을 찾으러 왔는지 알고 있지만, 사무엘은 그가 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조금만 늦었어도 만나지 못했을 사람
사울과 종은 성읍으로 올라가다가 물을 길으러 나오는 소녀들을 만납니다.
소녀들이 그들에게 대답했다. 「네, 계십니다. 바로 이 앞에 계십니다. 지금 서두르십시오. 오늘 백성이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기 때문에, 그분이 오늘 성읍에 오셨으니까요.」사무엘상 9:12 · 본디새김
「성읍에 들어가시면 그분이 식사하러 산당으로 올라가시기 전에 곧 만나실 것입니다. 백성은 그분이 오실 때까지 먹지 않습니다. 그분이 제물을 축복하신 다음에야 초대받은 사람들이 먹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지금 올라가십시오. 지금이면 그분을 만나실 것입니다.」사무엘상 9:13 · 본디새김
짧은 대답 안에서 ‘지금’이라는 말이 거듭 강조됩니다. 이 장면은 사무엘의 역할이 예언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만 한정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그는 공동체의 제사와 식사에도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읍으로 올라갔다. 그들이 성읍 안으로 들어서는데, 마침 사무엘이 산당으로 올라가려고 그들과 마주하여 나오고 있었다.사무엘상 9:14 · 본디새김
이야기는 여러 사람의 작은 행동들을 통해 이 순간에 도착합니다. 암나귀를 찾지 못한 일, 종이 하나님의 사람을 떠올린 일, 소녀들이 그날의 일정을 알려 준 일, 사무엘이 산당으로 향하던 시간이 맞아떨어진 일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그저 우연이라고만 생각하려는 순간, 서술자는 지금까지 알려 주지 않았던 사실을 드러냅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산당은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는 장소로 등장합니다. 본문은 사무엘이 이 제사를 주관하는 일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후대에 산당이 우상숭배와 연결되어 비판받는 장면들을 근거로, 이곳의 제사도 그와 같은 성격이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사울이 오기 전날, 이미 말씀하신 하나님
독자에게 뒤늦게 알려 주는 사실
14절까지 이야기를 따라온 독자는 사울과 비슷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왜 암나귀를 찾지 못하는지, 왜 종이 사무엘을 찾아가자고 했는지, 왜 하필 이 시간에 사무엘을 만나게 되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15절에서 이야기의 시간이 갑자기 하루 전으로 돌아갑니다.
사울이 오기 하루 전에 여호와야훼가 사무엘의 귀에 이렇게 알려 주었다.사무엘상 9:15 · 본디새김
그다음 말씀은 독자가 지나온 여정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합니다.
「내일 이맘때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 보내겠다.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워라.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할 것이다. 내 백성의 부르짖음이 내게 이르러 내가 내 백성을 보았기 때문이다.」사무엘상 9:16 · 본디새김
더욱 중요한 것은 여호와야훼께서 ‘그가 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내가 ... 한 사람을 네게 보내겠다’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사울에게는 암나귀를 찾다가 도착한 장소지만, 여호와야훼의 말씀에서는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도착하는 장소입니다.
그렇다고 여호와야훼께서 암나귀들을 일부러 사라지게 하셨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암나귀가 없어진 원인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울의 여정이 여호와야훼의 계획 안에서 사무엘과의 만남으로 이어졌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여정의 모든 사건을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일으키셨는지까지 알려 주지는 않습니다.
거부당하신 여호와야훼가 백성의 고통을 보신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사울을 보내시는 목적도 밝히십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이스라엘을 세 번이나 ‘내 백성’이라고 부르십니다. 왕을 달라는 요구가 여호와야훼를 거부하는 행위로 평가되었지만, 그 때문에 이스라엘이 여호와야훼의 백성이라는 사실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출애굽기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출애굽기 3:7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이집트에서 고통당하는 백성의 고난을 보셨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무엘상 9:16에서도 백성의 부르짖음이 여호와야훼께 이르렀고, 여호와야훼께서 그들을 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두 본문은 동일한 사건을 설명하지 않지만,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을 비슷한 언어로 묘사합니다. 하나님이 백성의 고통을 보시고, 그 부르짖음에 응답하여 구원할 사람을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사울을 보내시는 하나님의 이유는 단지 왕을 요구한 백성에게 왕을 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 백성을 블레셋의 손에서 구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백성의 잘못된 기대가 있다고 해서 그들의 실제적인 고통까지 부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그들의 요구를 판단하시면서도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십니다. 그리고 사울을 그들을 구원할 사람으로 세우고자 하십니다.
왕이 아니라 지도자라고 부르시는 이유
여호와야훼께서는 사울을 ‘왕’이 아니라 ‘지도자’로 세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을 다스릴 왕을 원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께서는 사무엘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세우라고 하십니다.
백성이 바라보는 왕의 자리는 이스라엘의 통치 권력이 모이는 자리입니다. 반면 여호와야훼의 말씀에서 사울은 그분의 백성을 위해 세워지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맡겨질 사람들은 사울의 소유가 아닙니다. 여전히 여호와야훼의 백성입니다.
17절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사울을 가리키며 그가 자신의 백성을 다스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울은 아직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왕이 되겠다고 나선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께서는 이미 그에게 맡기실 일을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독자는 사울이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사울은 아직 자신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사무엘이라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조금 더 깊이
16절의 ‘지도자’에 사용된 히브리어는 나기드(נָגִיד)입니다. 지도자나 통치자를 가리키며, 사무엘서에서는 특별히 하나님이 세우시는 통치자의 지위를 나타내는 데 사용됩니다. 이는 왕을 뜻하는 일반적인 단어 멜레크와는 다릅니다. 두 단어가 언제나 완전히 분리된 직책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사람이 왕이면서 동시에 나기드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무엘상 10:1에서도 사울은 여호와야훼의 백성을 다스릴 지도자로 기름 부음을 받습니다. 17절에서 ‘다스리다’로 번역된 동사는 아차르(עָצָר)입니다. 본래 붙들다, 억제하다, 제어하다 등의 의미가 있으며, 이 문맥에서는 통치권을 행사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표현에 얼마나 강한 통제나 억제의 의미가 담겨 있는지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바로 앞에서 지도자로 세우라고 말씀하셨으므로 통치의 의미가 적절하지만, 이 동사 하나만으로 사울의 통치가 장차 억압적으로 변할 것이라고 예고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잃어버린 암나귀는 찾았고, 뜻밖의 말씀이 기다리고 있었다
선견자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울
사울은 마침 마주 나온 사람에게 묻습니다.
사울이 성문 안에서 사무엘에게 다가가 말했다. 「선견자의 집이 어디인지 제게 좀 알려 주십시오.」사무엘상 9:18 · 본디새김
독자는 이미 사무엘의 정체를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장면을 사울과 다른 시각으로 봅니다. 사울에게는 길을 묻는 평범한 만남이지만, 독자에게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만남이 성취되는 순간입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대답했다. 「내가 선견자네. 나보다 앞서 산당으로 올라가게. 오늘 자네들은 나와 함께 먹게 될 것이네. 아침에 자네를 보내 주겠네. 자네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을 자네에게 알려 주겠네.」사무엘상 9:19 · 본디새김
사울은 자신이 찾던 정보를 얻으리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먼저 그를 식사 자리에 초대하고, 다음 날까지 머물게 합니다.
사무엘은 먼저 암나귀에 관한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없어진 지 오늘로 사흘이 된 자네 암나귀들에게는 마음 쓰지 말게. 이미 발견되었네.」
그런데 본문의 흥미로운 점은 암나귀가 어디에서 발견되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누가 발견했는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이야기는 암나귀에 관한 정보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사울을 여기까지 데려온 문제는 해결되었고, 이제 전혀 다른 문제가 그의 앞에 놓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소망」은 누구에게 향하는가
사무엘은 이어서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꺼냅니다.
「없어진 지 오늘로 사흘이 된 자네 암나귀들에게는 마음 쓰지 말게. 이미 발견되었네. 그런데 이스라엘의 모든 소망이 누구에게 향해 있는가? 자네와 자네 아버지의 온 집안에게 향해 있지 않은가?」사무엘상 9:20 · 본디새김
사울은 암나귀를 찾으러 온 사람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스라엘 전체의 기대를 받는 사람으로 지목됩니다.
사울의 삶이 놓인 범위가 갑자기 넓어집니다.
「왜 제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사울은 놀라서 대답합니다.
사울이 대답했다. 「저는 이스라엘의 작은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 속한 베냐민 사람이 아닙니까? 제 씨족도 베냐민의 지파들에 속한 모든 씨족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제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사무엘상 9:21 · 본디새김
사울은 자신이 왕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아직 전달받지 못했습니다. 사무엘의 말이 뜻밖이고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출신을 근거로 그 말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리고 사무엘은 그의 질문에 길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사울을 식사 자리로 데려갑니다.
조금 더 깊이
19절의 ‘자네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사울이 암나귀 문제를 염려하고 있다는 사실은 뒤따르는 20절에서 확인됩니다. 그러나 사무엘이 알려 주려는 내용은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소망’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콜 헴다트 이스라엘(חֶמְדָּה)입니다. 여기서 헴다는 바라는 것, 귀하게 여기는 것, 탐내는 것 등을 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크게 두 방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이 간절히 바라는 것이 사울과 그의 집안에 집중된다는 뜻입니다. 문맥상 백성이 원하는 왕의 지위와 그 기대가 사울에게 향한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이 귀하게 여기는 것들이 결국 누구에게 돌아가겠느냐는 뜻입니다. 사울이 왕이 될 때 얻게 될 부와 지위, 명예를 암시하는 말씀으로 읽을 여지도 있습니다. 두 읽기는 서로 완전히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사무엘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켰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말을 왕위나 재물 중 어느 한 가지로만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사기 19–21장에는 베냐민 지파가 다른 이스라엘 지파들과 전쟁을 벌인 끝에 거의 사라질 지경에 이른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울의 말이 반드시 그 사건을 직접 가리킨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사기에서 베냐민이 겪었던 위기를 기억하는 독자라면, 그 지파에서 이스라엘의 첫 왕이 나올 것이라는 사실을 특별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만 사울이 자기 씨족을 가장 보잘것없다고 말하는 부분에는 약간의 긴장이 남습니다. 1절은 그의 아버지 기스를 유력한 사람이라고 소개했기 때문입니다. 한 집안이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기반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지파 내의 정치적 위상은 낮을 수 있습니다. 또는 사울이 자신의 처지를 낮추어 말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본문만으로 어느 설명이 맞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사울을 위해 미리 남겨 둔 자리
말보다 먼저 주어진 자리
사무엘은 사울과 종을 초대받은 사람들 가운데 윗자리에 앉힙니다.
사무엘은 사울과 그의 종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 초대받은 사람들 가운데 윗자리를 내주었다. 초대받은 사람들은 서른 명쯤이었다.사무엘상 9:22 · 본디새김
앞서 소녀들이 설명한 것처럼 이 식사는 제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단순히 사무엘의 집에서 두 사람만 먹는 사적인 식사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함께 참여하는 공동체의 식사입니다. 그 자리에서 사울에게 윗자리를 내주는 것은 그가 특별한 사람으로 대우받고 있음을 다른 참석자들도 볼 수 있게 하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사무엘이 요리하는 사람에게 말했다. 「내가 자네에게 주며 『자네 곁에 두게.』라고 말한 그 몫을 가져오게.」사무엘상 9:23 · 본디새김
이 장면은 앞서 15–16절에서 드러난 사실과 연결됩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사울이 오기 하루 전에 그 사실을 사무엘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특별한 자리를 마련한 행동도 그 말씀에 따른 준비로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암나귀를 찾아 헤매던 사울에게는 모든 일이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의 자리에서는 이미 그를 맞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넓적다리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요리하는 사람이 넓적다리와 그 위에 붙은 것을 들어 사울 앞에 놓았다. 사무엘이 말했다. 「보게, 남겨 둔 것일세. 자네 앞에 놓고 먹게. 내가 『사람들을 불렀다.』고 말했을 때부터, 정한 때를 위해 자네 몫으로 간직해 둔 것이네.」 사울은 그날 사무엘과 함께 먹었다.사무엘상 9:24 · 본디새김
아직 사울에게 기름을 붓는 장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사울 자신도 왕이 될 것이라는 말씀을 명확하게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미 특별한 자리에 앉아 특별한 음식을 받고 있습니다.
사울은 자기에게 맡겨질 일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그 일을 위해 마련된 자리에 앉게 됩니다.
여기서 사무엘은 말로만 사울의 지위를 암시하지 않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실제로 그를 대우하는 방식을 통해 그의 새로운 위치를 보여 줍니다.
공개적인 식사에서 조용한 대화로
식사가 끝나자 사무엘과 사울은 산당에서 성읍으로 내려옵니다.
그들은 산당에서 성읍으로 내려왔다. 사무엘은 지붕 위에서 사울과 이야기했다.사무엘상 9:25 · 본디새김
본문은 지붕 위에서 사무엘이 무슨 말을 했는지 전하지 않습니다. 다음 날 사무엘이 따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 하는 것을 보면, 지붕 위의 대화를 그 말씀의 완전한 전달로 볼 수는 없습니다.
앞에서는 여러 사람이 모인 식사 자리였습니다. 이제는 지붕 위에서 두 사람이 대화합니다. 공개적으로 존중받던 사람이 점차 개인적으로 말씀을 듣는 자리로 옮겨 가는 것입니다.
다음 날 동이 틀 무렵 사무엘은 사울을 깨워 함께 성읍 밖으로 나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장면이 바뀝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 이스라엘의 제사 규정에서 짐승의 특정 부위는 특별한 몫으로 구별되었습니다. 레위기 7:32–34에는 화목제의 오른쪽 넓적다리를 제사장에게 주는 규정이 나옵니다. 그렇다고 사무엘상 9장의 음식이 반드시 그 규정에 따른 제사장의 몫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고기의 구체적인 제의적 지위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중요한 부위를 미리 보관했다가 특별한 손님에게 내놓는 행동이 그 사람에 대한 존중을 드러낸다는 점은 문맥에서 분명합니다. 24절의 마지막 부분은 히브리어 구문이 다소 어려워 누가 언제 어떤 말을 했는지 완전히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내용에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사무엘은 특별한 몫을 미리 남겨 두었고, 그것을 정한 때에 사울에게 내놓았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집에서는 평평한 지붕을 생활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신명기 22:8에 지붕 둘레에 난간을 만들라는 규정이 나오는 것도 그러한 생활 환경을 보여 줍니다.
모든 길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멈춘다
사울은 계속 길을 찾아왔지만, 이제 길을 안내받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사람으로 서 있습니다. 그가 앞으로 맡게 될 일은 자신의 계획이나 종의 조언만으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사람으로 세워지는 것은 그에게 주어질 하나님의 말씀에서 시작됩니다.
사무엘과 사울이 성읍 끝으로 내려가고 있을 때, 사무엘이 말합니다.
그들이 성읍 끝으로 내려가고 있을 때 사무엘이 사울에게 말했다. 「종에게 우리보다 앞서 가라고 이르게.」 종이 앞서 갔다. 「자네는 지금 멈춰 서 있게. 내가 자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겠네.」사무엘상 9:27 · 본디새김
사울은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나 그 여정은 암나귀를 되찾았다는 소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가 찾으려던 것은 이미 발견되었습니다.
이제 사울 자신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이 남아 있습니다.
성읍 끝, 아직 아침이 밝아 오는 길에서 사울은 걸음을 멈춥니다.
그는 여전히 왕관도 군대도 없는 젊은이입니다. 자신의 앞날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 앞에는 길을 알려 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줄 사람이 서 있습니다.
암나귀를 찾아 헤매던 사울의 여정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멈춰 서는 것으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