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장 · 인사와 감사
복음이 바꾼 도시의 삶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뜻밖의 고백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1:8). 복음을 전하는 것이 사명인 사람이, 이제 자신이 말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자신이 세운 교회가 너무나 훌륭해서 더 가르칠 것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편지의 뒷부분에는 그들이 여전히 배워야 할 것들과 바로잡아야 할 문제들이 나옵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자신이 전한 복음이 그 도시에서 실제로 어떤 일을 일으켰는지, 사람들이 이미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바울이 데살로니가를 방문한 일뿐 아니라, 그곳 사람들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선 일까지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 변화가 일어난 환경은 평안이 아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신자들은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큰 환난」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이 환난 속에서도 기뻐했고, 바로 그 사람들이 다른 지역의 믿는 이들에게 본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바울의 대답은 1장의 마지막에 이르러 분명해집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예수님을 믿었고, 그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다시 오심에 대한 소망이 그들의 현재를 바꾸고 있었던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인들의 교회 — 그들은 어디에 속한 사람들인가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들의 교회에 씁니다. 여러분에게 은혜와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데살로니가전서 1:1 · 본디새김
데살로니가전서는 현존하는 바울의 편지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기록된 것으로 널리 여겨집니다. 대체로 서기 50~51년경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하지만, 정확한 연도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이 편지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하기 시작한 지 불과 20년 남짓 지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들여다볼 수 있는 문서입니다.
실루아노는 사도행전에서 실라라고 불리는 인물입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따르면 바울과 실라는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했고, 디모데도 이 선교 여정에 참여했습니다. 이들은 데살로니가 신자들에게 낯선 권위자가 아니라, 복음이 처음 전해지던 시간을 함께 기억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는 마케도니아의 주요 도시였습니다. 로마 제국의 동서 교통로인 에그나티아 가도가 지나고, 항구를 통해 지중해 세계와 연결되는 상업 도시였습니다. 도시에는 다양한 신을 섬기는 종교적 환경이 있었고, 유대인 공동체와 회당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바로 그 도시의 사람들을 단순히 데살로니가에 사는 사람들로 부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두 소속이 나란히 나타납니다. 그들은 여전히 데살로니가인이고, 그 사회와 무관한 사람들이 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의 공동체를 규정하는 더 근본적인 관계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공동체, 그 존재와 신앙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뿌리를 둔 공동체입니다.
데살로니가 신자들은 로마 제국의 도시에서 살면서 다른 주님을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7:7에 따르면 바울 일행의 반대자들은 그들이 황제의 명령을 거스르고 예수라는 다른 왕을 선포한다고 고발했습니다. 이것이 데살로니가 신자들이 경험한 모든 환난을 설명하지는 않지만,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일이 당시 사회에서 단순한 개인의 종교적 선택에 그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바울은 그런 사람들에게 은혜와 평화를 빕니다.
그 평화는 세상과 아무런 마찰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이 편지의 독자들은 이미 환난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와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 편지의 출발점입니다.
믿음은 일하고, 사랑은 수고하며, 소망은 견딘다
우리는 여러분 모두에 대해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기도할 때 여러분을 두고 아뢰며, 쉬지 않고 여러분이 믿음으로 한 일과 사랑으로 치른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소망으로 견딘 일을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기억하며 드리는 감사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1:2–3 · 본디새김
바울은 데살로니가 신자들에게 감사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두고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세운 공동체가 잘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삶에서 나타나는 변화를 하나님의 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가 기억하는 것은 믿음, 사랑, 소망입니다. 이 세 가지는 고린도전서 13:13과 데살로니가전서 5:8에서도 함께 나타나지만, 이곳에서는 세 덕목이 무엇과 이어지는지가 드러납니다.
바울은 믿음을 칭찬하지 않고 「믿음으로 한 일」을 기억합니다. 사랑이 많다고 말하지 않고 「사랑으로 치른 수고」를 기억합니다. 소망이 크다고 말하지 않고 「소망으로 견딘 일」을 기억합니다.
각각의 덕목에 행동이 따라붙습니다.
「수고」는 단순한 활동이 아니라 힘을 들여 애쓰는 수고를 뜻합니다. 사랑은 상대방에게 따뜻한 감정을 품는 데 머물지 않고, 실제로 시간과 힘을 사용하게 합니다. 「견딘 일」은 어려움 속에서 버티고 지속하는 인내를 가리킵니다. 소망은 현실을 잊고 미래를 낙관하는 감정이 아니라, 현재의 고난 때문에 포기하지 않게 하는 힘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믿음이 만들어 낸 일을 강조할까요? 혹시 행위를 통해 하나님께 인정받는다는 뜻일까요? 이 문맥에서 바울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조건을 논증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미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나타난 변화를 이야기하며, 믿음이 삶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보여 줍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일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수고하며, 소망하기 때문에 견딥니다.
그들은 복음을 듣고 어떤 교리를 인정하는 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무엇인가를 했고, 누군가를 위해 수고했으며,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견디게 한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소망」입니다. 원문의 표현은 주님을 향한 소망으로도, 주님이 주시는 소망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그 소망이 예수 그리스도와 떨어져 있지 않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 소망의 내용은 1장의 마지막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뽑혔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1:4 · 본디새김
바울은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누구를 선택하셨는지 사람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선택을 이야기하기 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언급합니다. 이 표현은 구약의 이스라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신명기 7:7–8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보다 수가 많아서 여호와야훼께서 그들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여호와야훼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고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의 선택은 민족적 우월함을 인정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바울은 이제 데살로니가의 이방인 신자들이 포함된 공동체에 선택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이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내고 자격을 증명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부르심이 그들의 새로운 삶의 출발점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 선택을 알게 된 근거는 바로 다음 절에 나옵니다.
이를 알고 있는 것은 우리가 전한 복음이 여러분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능력과 거룩한 영과 충만한 확신으로도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러분 가운데서 여러분을 위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는 여러분이 알고 있는 그대로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1:5 · 본디새김
바울은 하나님의 감추어진 결정을 들여다보았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복음이 데살로니가에 전해졌을 때 실제로 일어난 일을 근거로 말합니다. 복음은 분명히 말로 선포되었지만, 단지 듣기 좋은 주장이나 설득력 있는 철학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일에 하나님의 능력과 거룩한 영이 함께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곧바로 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덧붙입니다. 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전달할 내용을 정확하게 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데살로니가 신자들이 자신들의 말뿐 아니라 삶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호소합니다.
이것은 뒤이어 나올 「본받는 이들」이라는 표현을 준비합니다. 복음을 전한 사람들과 받아들인 사람들 사이에는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관계만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며 서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관계가 있었습니다. 그 구체적인 모습은 2장에서 더 자세하게 설명됩니다.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삶과 무관하게 떠 있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복음이 전해지고 받아들여지는 사건 속에서, 그리고 그 복음으로 변화된 사람들의 삶 속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일을 알아봅니다.
조금 더 깊이
「능력」을 반드시 기적이나 놀라운 치유 사건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사건이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이유도 없지만, 1장 자체는 구체적인 이적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직접 설명하는 변화는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환난 중에도 기뻐하며, 이전의 신앙과 생활에서 돌아섰다는 사실입니다. 「충만한 확신」이 누구의 확신인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복음을 전한 바울 일행의 확신으로 읽을 수도 있고,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 안에 생긴 확신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앞뒤 문맥은 두 가능성을 모두 열어 두지만, 어느 한쪽만을 확정하지는 않습니다.
환난과 기쁨이 함께 있는 사람들
여러분도 큰 환난 속에서 거룩한 영의 기쁨을 안고 말씀을 받아들여 우리와 주님을 본받는 이들이 되었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1:6 · 본디새김
이 절에서 바울은 복음을 전한 사람들에게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로 시선을 옮깁니다.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상황은 「큰 환난」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7:1–9에는 바울의 데살로니가 선교가 반대에 부딪힌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군중이 모여 소란이 일어났고, 바울 일행을 맞아들였던 야손이 도시 당국 앞에 끌려갔습니다. 두 기록을 함께 읽으면 데살로니가 신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이후에도 상당한 사회적 압박을 경험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1:6은 그 환난의 모든 구체적 원인이나 형태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환난과 기쁨이 한 문장 안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기쁨을 환난의 반대편에 놓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환난을 벗어난 뒤 기뻐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환난 속에서 말씀을 받아들였고, 그때 거룩한 영의 기쁨이 함께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 기쁨을 낙천적 성격이나 강한 의지로 설명하지 않고 「거룩한 영의 기쁨」이라고 부릅니다.
환난이 사라졌기 때문에 기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시고, 그들이 받아들인 복음이 새로운 소망을 주었기 때문에 환난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다는 것이 바울의 이해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와 주님을 본받는 이들」이 되었다는 말로 이어집니다. 바울 일행은 직접 만나 함께 지냈으니 본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 주님을 본받았을까요?
이 문맥에서는 고난 속에서 보인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과정에서 거절과 고난을 겪으셨고, 데살로니가 신자들 역시 환난 속에서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바울이 두 고난을 하나하나 대응시키지는 않지만, 고난을 겪으면서도 하나님께 신실하게 머무는 삶이라는 점에서 그들의 경험은 주님의 길과 연결됩니다.
여기에 1장의 마지막이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습니다(1:10). 그러므로 주님을 본받는다는 것은 고난을 감수하는 태도를 모방하는 일만이 아니라, 고난을 통과하신 분이 하나님에 의해 다시 일으켜지셨다는 사실을 믿고 그분에게 자신의 미래를 맡기는 삶입니다. 데살로니가 신자들의 기쁨은 바로 그런 소망과 분리해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본받던 사람들이 본이 되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 있는 믿는 모든 이들에게 본이 되었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1:7 · 본디새김
그들은 처음에 바울 일행과 주님을 본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본받게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비교적 새롭게 형성된 공동체였고, 아직 배우고 성장해야 할 부분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들이 이미 다른 믿는 이들에게 본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를 다음 절에서 설명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여러분에게서 주님의 말씀이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서 울려 퍼졌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 둔 여러분의 믿음도 모든 곳에 퍼져 나갔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1:8 · 본디새김
「울려 퍼졌다」(ἐξηχέομαι)는 소리가 울려 나가는 것을 나타내는 동사입니다. 어떤 곳에서 시작된 소리가 주변으로 퍼지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데살로니가는 주요 교통로와 항구를 가진 도시, 사람들이 드나들고 소식이 오가는 곳이었습니다.
퍼져 나간 것은 둘입니다. 「주님의 말씀」과 「하나님께 둔 여러분의 믿음」입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들었을 뿐 아니라, 그 말씀을 받아들인 데살로니가 신자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복음이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켰고, 그 변화가 또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알리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다른 지역을 다니며 조직적인 선교 활동을 벌였는지는 본문이 말하지 않습니다. 직접 말씀을 전하는 활동이 있었을 수도 있고, 여행자들과 상인들, 다른 신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소식이 퍼졌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들의 믿음이 자신들의 모임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다른 지역에서도 이야기될 만큼 알려졌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바울이 더 이상 복음을 전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이미 데살로니가에서 일어난 일을 알고 있어서, 바울 일행이 그 이야기를 처음부터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복음을 전하던 사람이, 자신이 전한 복음의 열매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전하는 그 이야기의 내용이 9절과 10절에 등장합니다.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선다는 것
그 모든 곳의 사람들이 우리에 관해, 우리가 여러분을 찾아간 일이 어떠했는지와 여러분이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섰는지를 직접 알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돌아선 것은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고데살로니가전서 1:9 · 본디새김
당시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신들을 섬기는 일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개인의 종교 생활보다 훨씬 넓은 사회적 의미를 가졌습니다.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축제에 참여하고, 신전과 관련된 활동을 하는 것은 도시와 가족, 공동체의 삶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우상을 버린다는 것은 집에 있던 종교적 물건을 없애는 정도의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전에 참여하던 종교적 관습과 관계를 새롭게 정리해야 했을 가능성이 있고, 그런 변화는 주변 사람들에게 낯설게 보이거나 갈등을 일으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본문은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관습을 중단했는지 설명하지 않지만, 우상을 버렸다는 사실을 그들의 변화 가운데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제시합니다.
그들은 우상에게서 멀어졌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 돌아섰습니다.
우리에게 회개는 흔히 잘못된 행동을 중단하는 일로 먼저 이해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은 회개의 내용을 새로운 관계의 시작으로 보여 줍니다. 단순히 이전의 종교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주님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그 하나님을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이방인들이 이제 그 하나님을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으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데살로니가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본래 이방 우상 숭배자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사도행전 17:4에는 복음을 받아들인 유대인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던 그리스 사람들도 나옵니다. 하지만 바울이 우상에서 돌아선 일을 공동체의 대표적인 변화로 묘사한다는 점에서, 이전에 우상을 섬기던 이방인들이 그 공동체에서 중요한 부분을 이루었다고 보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돌아선 목적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 그리고 하늘에서 오실 그분의 아들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이스라엘의 성경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10장에서 예언자는 사람들이 만든 우상과 여호와야훼를 대조합니다. 우상은 사람이 만든 것이며 스스로 말하거나 움직일 수 없지만, 예레미야 10:10은 여호와야훼를 참된 하나님, 살아 계신 하나님, 영원한 왕으로 선포합니다. 이사야 45:20–23 역시 사람들이 만든 신상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지적하면서, 모든 땅의 사람들이 여호와야훼께 돌아와 구원을 얻도록 부릅니다. 이 본문들은 각각 바벨론의 우상 숭배를 비판하거나 여호와야훼만이 참된 하나님이라는 신앙을 선포하던 역사적 문맥을 가지고 있고, 바울이 1장에서 이 구절들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구약의 한 구절이 그대로 실현되었다는 직접 인용의 관계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민족들이 알게 된다는 약속과 소망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새로운 전개를 맞았다는 신학적 연결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의 아들을 기다린다
하늘에서 오실 그분의 아들, 곧 하나님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다가오는 진노에서 우리를 건져 내시는 예수를 기다리기 위해서였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1:10 · 본디새김
바울은 하나님께 돌아선 사람들의 새로운 삶을 두 동사로 표현합니다.
섬기는 것과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현재의 일입니다. 지금 누구에게 충성하고, 무엇을 가치 있게 여기며, 누구의 뜻에 따라 살아갈 것인가에 관한 문제입니다. 기다리는 것은 아직 눈앞에 나타나지 않은 미래를 향합니다. 바울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기다림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기다리는 미래가 확실하다고 믿는 사람은 그 미래를 기준으로 지금의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미래는 막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한 분을 기다립니다.
우리말 번역은 그 이름 앞에 두 가지 설명을 놓습니다. 하나님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분, 다가오는 진노에서 우리를 건져 내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 이름을 밝힙니다.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예수님
여기서 부활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그 정신을 이어 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겪으셨고, 하나님이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데살로니가 신자들은 환난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현재만 보면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오히려 삶을 어렵게 만든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믿는 주님 역시 고난과 죽음을 겪으셨고, 하나님은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습니다.
그들의 소망은 고난을 겪지 않는 삶에 있지 않습니다. 고난과 죽음이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이 환난 속에서도 말씀을 받아들이고 기뻐할 수 있었던 이유를 강한 정신력에서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행하신 일이 그들이 미래를 바라보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이 부활 신앙은 데살로니가전서 4:13–18에서 죽은 신자들의 미래를 설명하는 토대가 됩니다.
다가오는 진노에서 건져 내시는 예수님
앞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과 선택, 거룩한 영의 기쁨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갑자기 진노가 등장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진노는 하나님이 순간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화를 내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문맥에서 진노는 하나님이 악과 불의에 대해 내리실 심판을 가리킵니다. 5:9에서도 바울은 하나님이 신자들을 진노에 이르도록 정하신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얻도록 하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참되신 분이므로 인간의 불의와 악을 영원히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사람들을 그 심판에서 건져 내시는 분입니다. 심판을 지워 버리면 하나님이 악과 불의를 바로잡으신다는 의미가 희미해지고, 구원을 지워 버리면 복음은 두려운 심판의 소식으로만 남습니다.
진노가 다가오고 있지만, 그들을 건져 내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기다리는 분은 단지 미래에 나타나실 심판자가 아니십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건져 내시는」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현재 분사입니다. 반드시 지금 구출 행위가 완료되고 있다는 뜻이라기보다,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특징짓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데살로니가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 하나님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아들을 기다립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돌아서는 일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일이 하나의 신앙 안에서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바울이 전한 복음은 단지 우상 숭배를 버리고 유대교적 유일신 신앙을 받아들이라는 요청이 아니었습니다.
첫 장에 담긴 복음의 모양
바울은 처음부터 신앙생활의 의무를 나열하지 않습니다. 먼저 그들의 삶에서 나타난 변화를 바라보고, 그 변화가 어디에서 시작되었으며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보여 줍니다. 사람들의 변화가 먼저 있고 그 결과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고 복음이 능력으로 임했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믿음의 행동,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신앙을 증명하기 위해 억지로 만들어 내야 할 성과의 목록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기다리는 삶이 세상 속에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여전히 환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들의 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도 아니었고, 미래에 관한 모든 의문이 풀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첫 장을 마칠 때 바울의 눈앞에는 한 가지 분명한 모습이 있습니다.
로마 제국의 길과 바닷길이 만나는 데살로니가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이전에 섬기던 우상을 버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 돌아섰습니다. 그들은 환난 속에서도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였고, 그들의 믿음은 다른 지역에까지 알려졌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그 도시에서 살아갑니다. 사랑으로 수고하고, 믿음으로 일하며, 어려움을 견딥니다.
그러면서 기다립니다.
하나님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예수님, 다가오는 진노에서 자신들을 건져 내시는 그분이 하늘에서 오시기를.
그들이 기다리는 분은 아직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삶은 이미 달라져 있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