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풀어 읽기 · 2장

이 장의 자리 · 2장 · 복음을 전한 삶

복음을 전한 사람이 남긴 것

바울은 데살로니가 신자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진실하게 복음을 전했는지 길게 이야기합니다. 아첨하지 않았고, 돈을 탐하지 않았으며, 사람들에게 영광을 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신의 수고를 기억해 달라고 하고, 하나님까지 증인으로 부릅니다.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진정으로 자신을 내어 준 사람이라면 굳이 이런 말을 해야 할까요? 더구나 바울은 사람들의 인정을 구하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바로 그 사람들에게 자신의 행동을 인정해 달라는 듯 이야기합니다.

이 긴 변명처럼 보이는 글을 이해하는 열쇠는 마지막에 있습니다. 처음에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구하지 않았다고 한 바울이, 마지막에는 데살로니가 신자들에게 「바로 여러분이 우리의 영광이며 기쁨입니다」(20절)라고 말합니다.

모순일까요?

아닙니다. 바울은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영광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다른 사람들 위에 서서 자신을 높이는 영광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사랑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모습을 보는 기쁨입니다.

바울은 첫 번째 영광을 거절했기 때문에 두 번째 영광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은 그 차이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복음을 맡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그 관계를 지탱하는 힘이 무엇인지 드러납니다.

읽는 시간 28분소단락 102장 본문 읽기 →

빌립보에서 모욕을 당한 사람들이 다시 입을 열다

데살로니가전서 2:1–2 본문 →

형제 여러분, 사실 우리가 여러분을 찾아간 일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여러분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2:1 · 본디새김

바울은 지난 장에서 데살로니가 신자들의 변화를 이야기했습니다. 이제는 그 변화가 시작되었던 때, 곧 자신이 데살로니가를 처음 찾아갔던 일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 방문을 설명하며 가장 먼저 언급하는 것은 성공적인 선교 활동이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는 여러분이 알고 있듯이 빌립보에서 앞서 고난을 겪고 모욕을 당했지만,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담대하게 큰 투쟁 가운데서 하나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말했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2:2 · 본디새김

빌립보에서 바울과 실라는 붙잡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후 도시 관리들은 그들이 로마 시민권자라는 사실을 알고 두려워하며 떠나 달라고 요청했고, 바울 일행은 그곳을 떠나 데살로니가로 향했습니다(행 16:16–40; 17:1).

데살로니가 신자들이 처음 만난 바울은 고난을 겪어 본 적 없는 자신만만한 설교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미 복음을 전하다가 모욕을 당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굳이 빌립보의 일을 언급하는 것은 그의 담대함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주장을 전했다가 심한 모욕을 당하면 다시 같은 일을 하는 데 두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다른 도시에서는 조금 더 조심하거나,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도록 메시지를 바꾸고 싶은 유혹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것도 「큰 투쟁 가운데서」 전했습니다.

여기서 담대함은 위험을 모르거나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성격을 뜻하지 않습니다. 원문의 동사는 거리낌 없이, 공개적으로 말하는 태도를 나타내며, 바울은 그런 담대함을 자신의 기질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얻은 것으로 설명합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용감한 사람인지 증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맡은 사람이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그 복음을 포기하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을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헛되지 않았다」는 표현은 단순히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생겼으니 선교가 성공했다는 뜻일까요? 그런 의미도 포함될 수 있지만, 이어지는 문맥에서는 그보다 중요한 문제가 드러납니다. 그가 전한 복음이 참된 것이었는가, 그리고 그것을 전한 사람의 동기와 행동이 그 복음에 어울렸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바울은 이제 바로 그 문제를 다룹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으면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가

데살로니가전서 2:3–6 본문 →

우리가 권하는 말은 헤맴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더러움에서 나온 것도 아니며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2:3 · 본디새김

바울은 자신의 선교를 설명하면서 헤맴, 더러움, 속임수 세 가지를 부정합니다. 이 세 표현은 같은 뜻을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전한 내용의 진실성, 전하는 사람의 동기와 태도,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에 대한 의심을 폭넓게 부정하는 말입니다. 특히 「더러움」은 도덕적 불순함을 가리킬 수 있지만, 여기서 구체적으로 어떤 비행이 문제 되었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실제로 이런 비난을 받았기 때문에 해명하는 것인지, 혹은 당시 사람들이 선교자나 교사를 평가할 때 제기할 수 있는 의혹들을 미리 차단하는 것인지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자신의 선교가 속임수나 사적인 이익을 위한 일이 아니었다는 점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그의 복음 선포는 무엇에서 비롯되었을까요?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께 가려 보임을 받아 복음을 맡은 사람답게 말합니다.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가려 보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것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2:4 · 본디새김

하나님께 「가려 보임을 받아」 복음을 맡았고, 지금도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가려 보십니다」. 원문의 두 표현은 「시험하여 판별하다」(δοκιμάζω)라는 같은 동사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복음을 맡기실 때 그를 가려 보셨고, 복음을 맡긴 뒤에도 그의 마음을 살피십니다.

여기에는 복음을 맡은 사람의 권위와 책임이 동시에 나타납니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만들어 낸 사람이 아니라 맡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복음의 내용을 바꿀 수 없고, 자신에게 복음을 맡기신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 책임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보다 깊은 곳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살피십니다.

사람들에게는 얼마든지 자신을 경건하고 헌신적인 사람으로 보이게 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훌륭한 말을 하면서 실제로는 다른 목적을 추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믿는 하나님 앞에서는 말과 행동뿐 아니라 그것을 움직이는 마음도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을 기쁘게 하지 않겠다는 바울의 말은 사람들의 감정을 무시하겠다는 뜻일까요? 그렇게 읽으면 뒤이어 나오는 어머니의 비유를 이해하기 어려워집니다. 바울은 사람을 사랑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인정과 호의를 얻는 것을 복음 선포의 최종 목적으로 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5–6절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우리는 아첨하는 말을 한 적이 한 번도 없고 — 여러분이 알고 있는 그대로 — 탐욕을 감추는 구실을 댄 적도 없는 까닭입니다. 하나님께서 증인이십니다. 사람들에게서 받는 영광을 구한 적도 없습니다 — 여러분에게서도, 다른 이들에게서도.데살로니가전서 2:5–6 · 본디새김

아첨은 상대방의 호의를 얻기 위해 듣기 좋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탐욕은 상대방에게서 무엇인가를 얻어 내려고 관계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영광을 구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인정과 존경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세 가지를 함께 보면 한 가지 모습이 나타납니다. 겉으로는 상대방을 위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상대방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증인을 부르는 방식도 다릅니다. 아첨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여러분이 알고 있는 그대로」라고 하지만, 탐욕을 감추는 구실을 대지 않았다는 말 뒤에는 「하나님께서 증인이십니다」라고 덧붙입니다. 데살로니가 신자들은 바울의 말을 직접 들었고 그가 어떻게 행동했는지도 기억하지만, 그의 마음속에 숨겨진 동기까지 완전히 들여다볼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사람들이 아는 사실에는 사람들을 증인으로 부르고, 마음의 깊은 동기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증인으로 부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진실해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은 구약의 중요한 주제와 연결됩니다. 사무엘상 16:7에서 여호와야훼는 사울을 대신할 왕을 선택하는 문맥에서 사무엘에게 사람은 겉모습을 보지만 여호와야훼는 마음을 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이 그것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판단이 외적인 모습에 머물지 않는다는 동일한 신학적 관점이 나타납니다.

사도의 권위를 내려놓고 어린아이와 어머니가 되다

데살로니가전서 2:7–8 본문 →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무게를 잡을 수도 있었지만, 여러분 가운데서는 어린아이들처럼 되었습니다. 젖 먹이는 어머니가 제 자식을 따뜻이 품어 기르듯,데살로니가전서 2:7 · 본디새김

바울은 사도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권위를 드러내는 대신 어린아이들처럼 되었다고 합니다.

「무게를 잡을 수도 있었다」는 말은 단순히 거만하게 행동할 수 있었다는 뜻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사도로서 자신의 권위에 상응하는 대우를 요구하거나, 공동체에 일정한 부담을 지울 수 있었다는 의미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가능성을 앞세우지 않았습니다.

이 본문은 「어린아이들처럼」으로 읽지만, 다른 사본에는 「온유한 사람들」이라는 읽기가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처럼」이라는 읽기를 따라가면, 바울은 권위를 가졌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 위에 서려고 하지 않고 자신을 낮추어 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어린아이라는 비유를 순진함이나 무능함으로 지나치게 구체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문맥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권위를 내세울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대조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곧바로 전혀 다른 비유로 넘어갑니다.

어린아이의 모습이 젖 먹이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바뀝니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단순히 전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이가 자신과 아무런 관계없는 대상이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돌보는 것도 아닙니다.

그 아이가 「제 자식」이기 때문에 돌봅니다.

바울은 바로 그 관계를 통해 자신의 선교를 설명합니다. 데살로니가 신자들은 바울에게 가르침을 전달해야 할 대상에 그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여러분을 애타게 사모하며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목숨까지 여러분에게 기꺼이 내어 주고자 했습니다. 여러분이 우리의 사랑을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2:8 · 본디새김

여기서 「목숨」은 육체와 분리된 영혼이라는 뜻보다 살아 있는 자기 자신, 곧 자신의 생명과 존재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복음은 바울이 전해야 할 메시지였지만, 그 메시지를 전하는 동안 바울은 자신도 내어 주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 나면 떠나도 상관없는 사람들을 상대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어려움 속에서 믿음을 지키는지, 하나님 앞에 끝까지 서게 될지를 자신의 기쁨과 슬픔에 연결된 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이유를 바울은 그들이 얼마나 훌륭했기 때문에 사랑받을 자격을 얻었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바울 일행에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사도의 권위를 설명하던 문장이 사랑하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끝납니다.

예수님의 사도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람들 위에 군림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섬김의 방식을 따라 사람들을 대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어린아이들처럼」은 그리스어 네피오이를, 다른 사본의 읽기는 철자 하나가 다른 에피오이(온유한 사람들)를 따른 것입니다. 「온유했다」는 읽기는 곧이어 나오는 어머니의 모습과 자연스럽게 어울립니다. 반면 「어린아이들처럼 되었다」는 읽기는 여러 이른 사본에서 뒷받침되며, 바로 뒤에 어머니의 이미지로 전환되는 다소 뜻밖의 문장을 만들어 냅니다. 어느 읽기가 원래의 것인지는 본문비평에서 논의되어 왔습니다. 또 바울의 이런 모습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길과 이어집니다. 마가복음 10:42–45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지배자들이 권세를 행사하는 방식과 제자들이 살아야 할 방식을 대조하시고,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시고 자기 목숨을 내어 주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빌립보서 2:5–11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종의 모습을 취하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고, 하나님이 그분을 높이셨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이 본문들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권위를 가진 사람이 그 권위로 자신을 높이기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내어 준다는 점에서 바울의 선교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깊이 연결됩니다.

밤낮으로 일했던 이유

데살로니가전서 2:9–10 본문 →

그도 그럴 것이,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의 수고와 고생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짐을 지우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했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2:9 · 본디새김

바울은 이제 어머니의 비유에서 일상적인 노동의 현장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밤낮으로 일하는 것과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 두 활동이 함께 등장합니다.

바울이 손으로 하는 노동을 통해 생활비를 마련했다는 사실은 다른 본문에서도 확인됩니다. 사도행전 18:3에 따르면 그는 고린도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함께 천막 만드는 일과 관련된 생업에 종사했습니다. 다만 데살로니가에서 정확히 어떤 일을 했는지는 이 절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노동의 종류보다 이유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돈을 벌었다는 사실을 자랑하기 위해 이 일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데살로니가 신자들에게 경제적 부담을 지우지 않으려 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모든 복음 사역자는 반드시 다른 생업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9:4–14에서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생활에 필요한 지원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설명하고, 바울 자신도 빌립보 교회에서 물질적 지원을 받은 사실을 말합니다(빌 4:15–16). 문제는 지원받을 권리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그 권리를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였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는 그들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습니다. 그 판단의 모든 이유를 본문이 설명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바울은 자신의 경제적 이익이 복음 선포의 목적을 흐리게 하지 않도록 행동했다고 말합니다.

자기 자신을 내어 준다는 앞의 말은 아름답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일상에서 드러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신자들을 사랑한다고 말했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 짐을 지우지 않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힘을 사용했습니다.

믿는 여러분을 대하면서 우리가 얼마나 경건하고 의롭고 흠 없이 행동했는지, 여러분이 증인이고 하나님도 증인이십니다.데살로니가전서 2:10 · 본디새김

경건하게, 의롭게, 흠 없이. 바울은 자신에게 아무 죄도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데살로니가 신자들을 대했던 자신의 행동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전하는 사람이 불완전하다고 해서 복음 자체가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의 진실성은 사람의 도덕적 완전함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맡은 사람이 그 복음을 이용해 사람들을 속이거나 착취한다면, 듣는 사람은 그가 전하는 메시지와 그의 행동 사이에서 심각한 모순을 경험할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런 모순을 만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데살로니가 신자들의 기억에 호소하여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맡았다는 것은 말의 내용뿐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도 책임이 있다는 뜻입니다.

어머니처럼 품고, 아버지처럼 한 사람씩 권하다

데살로니가전서 2:11–12 본문 →

여러분이 알고 있듯이, 우리는 아버지가 제 자식들을 대하듯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데살로니가전서 2:11 · 본디새김

바울은 조금 전 어머니의 비유를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아버지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바울이 두 비유를 사용하는 목적은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구분하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두 이미지 모두 데살로니가 신자들을 향한 자신의 돌봄을 설명하되, 강조하는 행동이 다릅니다. 어머니의 비유에서는 따뜻이 품어 기르는 사랑과 자기 자신을 내어 주는 헌신이, 아버지의 비유에서는 권면과 위로, 그리고 삶의 방향을 일깨우는 일이 강조됩니다.

바울은 교회 전체를 대상으로 설교했다는 사실만 말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공동체를 이루는 개개인에게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밤낮의 노동과 함께, 이것은 바울의 선교가 얼마나 구체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는지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에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권하고 여러분을 위로하고 엄숙히 증언했습니다. 이는 여러분을 그분 자신의 나라와 영광으로 부르시는 하나님께 합당하게 걷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2:12 · 본디새김

이 문장에서 중심에 있는 분은 바울이 아닙니다.

하나님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닮은 사람들을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합당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도록 돕고 있었습니다. 「걷다」는 본래 걸어 다닌다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삶의 방식과 행동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어떤 상태에 도달하여 가만히 머무르는 것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걸어가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걸음에는 방향이 있습니다. 매일의 움직임이 있고, 계속해서 나아가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걸음의 방향을 정해 주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합당하게 살아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다는 뜻일까요? 문장의 구조는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이미 그들을 자신의 나라와 영광으로 부르시는 분으로 소개하고, 그 부르심에 어울리게 살아가도록 권하고 위로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와 영광은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획득하는 보상으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부르시는 목적지입니다.

바울의 권면은 그 부르심에 근거합니다.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해 더 높은 기준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 사람이 어떤 부르심을 받았는지 일깨우고, 그 부르심에 어울리게 걸어가도록 격려합니다.

바울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권하고 위로하고 엄숙히 증언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제자로 남기를 원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시는 곳을 향해 끝까지 걸어가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지다

데살로니가전서 2:13 본문 →

그래서 우리도 쉬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들었을 때 사람의 말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은 또한 믿는 여러분 안에서 일하고 있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2:13 · 본디새김

이번에는 자신들이 얼마나 진실하게 복음을 전했는지가 아니라, 데살로니가 신자들이 그 복음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분명히 사람의 입을 통해 말씀을 들었지만, 그 말씀을 단순히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전한 말은 실제로 바울이라는 사람이 한 말인데,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을까요? 바울이 앞에서 사용한 「복음을 맡았다」는 표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스스로 복음을 만들어 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복음을 맡은 사람이므로, 그가 전하는 복음의 권위는 바울 자신의 지혜나 명성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행하신 구원의 일을 선포했습니다. 사람의 목소리로 전해졌지만, 그 복음의 근원과 내용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 바울의 확신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어떤 종교 지도자의 말이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 자신도 자신이 무엇을 전하는지, 누구에게서 맡았는지, 어떤 목적으로 전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권위의 중심은 전달하는 사람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과 그분의 복음에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말씀이 지금도 「믿는 여러분 안에서 일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복음은 과거에 한 번 전달되고 끝난 정보가 아닙니다. 바로 다음 절에서 바울은 그 구체적인 모습을 제시합니다. 그들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체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말씀의 역사는 눈에 보이는 기적이나 특별한 체험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고난 가운데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것 역시 그 말씀이 일하고 있다는 증거로 제시됩니다.

바울은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살아 있는 능력으로 작용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일하는 말씀은 예레미야 1:12에서 여호와야훼께서 자신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 지켜보신다고 말씀하시는 장면, 이사야 55:10–11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그분이 뜻하신 일을 이룬다는 선언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그 구약 본문들은 각각 예언자의 소명과 포로기 이후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고유한 문맥을 갖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것들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단순한 정보 전달에 머무르지 않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능력이라는 이해가 이어집니다.

같은 고난을 겪는 교회들, 그리고 가장 어려운 문장

데살로니가전서 2:14–16 본문 →

그도 그럴 것이,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유대에 있으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는 이들이 되었습니다. 그 교회 사람들이 유대 사람들에게서 겪은 것과 똑같은 고난을 여러분도 여러분 자신의 동족에게서 겪었기 때문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2:14 · 본디새김

본받았다는 내용이 뜻밖입니다. 유대의 교회들처럼 예배를 드렸다거나, 같은 제도나 종교적 관습을 따랐다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고난을 겪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속한 사회의 사람들에게서, 데살로니가 신자들은 자신들의 동족에게서 고난을 겪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주변 사람들의 반대를 경험한 데살로니가 신자들은 자신들에게 무언가 잘못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겪는 고난이 그들만의 특이한 실패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다만 바울은 고난 자체를 신앙의 성취로 칭찬하지 않습니다. 고난이 많을수록 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반대와 박해를 겪으면서도 믿음 안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문제는 이어지는 15–16절입니다.

그 유대 사람들은 주 예수와 예언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내쫓았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적대적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2:15 · 본디새김
그들은 이방 사람들이 구원받도록 우리가 그들에게 말하는 것을 막아 자기들의 죄를 언제나 가득 채우게 됩니다. 그러나 진노가 끝내 그 유대 사람들에게 닥쳤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2:16 · 본디새김

이 구절들은 신약성경 전체에서도 해석에 특별한 주의가 필요한 대목입니다. 특히 「모든 사람에게 적대적입니다」라는 표현은 유대인 전체에 대한 포괄적인 비난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14절에서 바울이 이야기한 것은 유대의 교회들을 박해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이어지는 「그 유대 사람들」을 그 박해자들과 연결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읽기에 따르면 바울의 비난은 모든 시대의 모든 유대인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적대적으로 행동하며 복음 선포를 방해한 사람들을 향합니다.

그렇지만 이것만으로 문장의 어려움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원문은 14절의 「유대 사람들」을 받아 그들의 행동을 열거하는데, 문법적으로 앞의 박해자들을 가리킨다고 읽을 수 있지만 당시 유대인 전체에 대한 일반화로 이해하는 읽기도 존재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적대적」이라는 비난은 유대인에 대한 고대 세계의 적대적 표현과 닮아 있어 그 의미와 수사적 기능에 대한 해석이 갈립니다.

따라서 본문을 무리하게 온건한 표현으로 바꾸어서는 안 되지만, 동시에 그 비난을 유대인 전체에 대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서도 안 됩니다.

바울 자신도 유대인이었습니다. 로마서 9:1–5에서 그는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을 향한 깊은 슬픔과 사랑을 표현하고, 로마서 11:1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버리셨느냐고 묻고 자신도 이스라엘 사람임을 밝힙니다. 이것은 바울의 강한 비난을 해석할 때 반드시 함께 고려해야 하는 정경적 문맥입니다. 또한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한 민족 전체에 책임을 돌리는 단순한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처형에는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과 로마 총독 빌라도의 결정과 집행이 함께 등장합니다(막 15:1–15).

바울의 표현을 유대인이라는 민족 전체에 대한 영구적인 정죄로 확대하는 것은 본문이 말하는 구체적 갈등의 범위를 넘어섭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이렇게 격렬하게 말했을까요? 16절의 「이방 사람들이 구원받도록 우리가 그들에게 말하는 것을 막아」에서 그가 문제 삼는 행동이 드러납니다. 그는 자신이 선포하는 구원이 이방 사람들에게도 열려 있다고 믿었고, 그 복음을 전하는 일을 방해하는 사람들에게 강하게 반응했습니다.

4절에서 바울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한다고 말했습니다. 15절에서는 복음을 방해하는 이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보기에 하나님의 뜻은 복음이 전해지고 사람들이 구원받는 데 있으므로, 그 복음을 방해하는 행동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아닙니다.

16절 마지막 문장의 「진노가 끝내 그 유대 사람들에게 닥쳤습니다」도 해석이 갈립니다. 이미 발생한 역사적 재난이나 박해자들에게 닥친 심판을 가리킨다는 견해와,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의 심판이 확실하다는 의미로 이미 닥친 것처럼 표현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정확히 어떤 사건에 대한 진노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며, 70년 예루살렘 함락으로 확정하거나 유대 민족 전체의 미래에 대한 최종 선언으로 읽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방 사람들이 구원받도록 복음이 전해지는 일을 지키려 하고, 고난을 겪는 데살로니가 신자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다른 교회들의 경험과 연결해서 이해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목적이 사용된 모든 표현의 어려움을 없애 주지는 않습니다.

본문의 강한 언어를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후대의 민족적 적대감이나 차별의 근거로 삼지 않는 것이 책임 있는 읽기입니다.

조금 더 깊이

「끝내」라고 번역된 에이스 텔로스는 「마침내」라는 시간적 의미로 읽을 수도 있고, 「철저하게」 또는 「끝까지」라는 정도의 의미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원문만으로 어느 해석을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문장이 서기 70년 예루살렘 함락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고, 이에 따라 14–16절의 일부 또는 전체가 바울의 편지에 나중에 삽입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습니다. 반면 현존하는 사본 전승에서 이 대목이 빠진 사본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과, 바울이 70년 이전에 경험한 갈등이나 하나님의 심판을 설명하는 방식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원래 편지에 속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삽입설과 원래 본문이라는 견해가 모두 있으나, 현재의 사본 증거는 본문을 포함하는 쪽입니다.

고아처럼 된 사도 — 얼굴은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함께 있다

데살로니가전서 2:17–18 본문 →

그런데 형제 여러분, 우리는 잠시 동안 여러분에게서 떼어져 고아처럼 되어 — 얼굴을 마주하지 못할 뿐 마음으로는 함께인 채 — 여러분의 얼굴을 보려고 간절한 그리움으로 더욱 애썼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2:17 · 본디새김

여기서 편지의 분위기가 크게 달라집니다.

바울은 앞에서 자신이 데살로니가 신자들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 설명했습니다. 어머니처럼 품었고, 아버지처럼 권했으며, 밤낮으로 일했습니다. 이제는 헤어진 뒤의 마음을 이야기합니다. 「고아처럼 되어」(ἀπορφανίζω)로 옮긴 원문의 표현은 부모나 자녀를 잃어 가족과 떨어진 상태를 연상시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울은 어머니와 아버지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고아처럼 되었다고 말합니다.

부모처럼 돌보던 사람이 헤어진 뒤에는 자신이 가족을 잃은 사람처럼 느낀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그들에게 얼마나 필요한 사람인지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이 되었는지도 느끼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7:10에 따르면 바울과 실라는 반대자들로 인해 밤중에 데살로니가를 떠나 베뢰아로 향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를 떠난 일은 예정된 선교 일정의 종료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떠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마음까지 떠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몸은 떨어져 있지만 마음은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추상적인 영적 일치로만 설명하지 않고, 실제로 얼굴을 보고 싶어 합니다. 데살로니가 신자들은 고난을 겪고 있었고, 바울은 자신이 떠난 뒤 그들의 믿음이 어떻게 되었는지 걱정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다음 장에서는 그들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디모데를 보낸 일을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그리움은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려는 감정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직접 확인하고, 필요하다면 위로하며 도우려는 마음과 연결됩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가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나 바울 자신은 한 번만이 아니라 두 번이나 그럴 뜻을 품었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우리를 가로막았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2:18 · 본디새김

바울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해를 겪었는지는 이 구절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정치적 상황이었는지, 반대자들의 행동이었는지, 다른 실제적 장애였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그 방해를 사탄의 활동으로 이해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우리가 그 원인을 특정할 근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도였고, 데살로니가 신자들을 다시 만나려는 의도도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왔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계획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믿는 사람에게 언제나 길이 순조롭게 열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은 방해를 경험했다고 해서 그들과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갈 수 없었기 때문에 편지를 썼고, 다음 장에서 보듯이 디모데를 보냈습니다.

그리움은 단순한 감정에 머물지 않고 다른 방식의 돌봄으로 이어졌습니다.

사도가 마지막에 자랑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데살로니가전서 2:19–20 본문 →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주 예수께서 오실 때 그분 앞에서 누가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화관이겠습니까? 여러분도 아니겠습니까?데살로니가전서 2:19 · 본디새김

이제 바울은 시선을 미래로 돌립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실 때 자신이 무엇을 얻을 것인지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무엇이」라고 묻지 않고 「누가」라고 묻습니다.

그가 기다리는 것은 어떤 업적에 대한 상이 아니라 사람들입니다. 「화관」은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경기의 승리자나 영예를 얻은 사람에게 주어지던 관을 떠올리게 하지만, 바울의 관심은 그 관의 재료가 아니라 자신의 자랑이 무엇인지에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몇 개의 도시를 방문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설교했는지, 얼마나 어려운 일을 겪었는지가 아닙니다.

데살로니가 신자들입니다.

바울은 6절에서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구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들이 자신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구한다는 것은 그들을 통해 자신을 높이려는 것입니다. 반면 사람들을 자신의 영광으로 여긴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실 자체를 기뻐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신자들을 자신의 성공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고린도후서 1:14에서도 그는 주 예수님의 날에 고린도 교회가 자신들의 자랑이 되고, 자신들도 그 교회의 자랑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기대하는 자랑은 서로를 통해 자신을 높이는 경쟁이 아니라, 하나님이 서로의 삶 가운데 행하신 일을 함께 기뻐하는 관계입니다.

그 기쁨이 완전히 드러나는 자리는 「우리 주 예수님께서 오실 때 그분 앞」, 장차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앞입니다. 그때 바울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주님 앞에 함께 서게 될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여러분이 우리의 영광이며 기쁨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2:20 · 본디새김

여기에는 더 이상의 설명이 없습니다.

복음이 만드는 관계

데살로니가전서 2:1–20 본문 →

데살로니가전서 2장에서 바울이 보여 주는 것은 단지 훌륭한 선교자의 모범이 아니라, 복음이 만들어 내는 관계입니다. 그 관계의 시작에는 마음을 살피시고 복음을 맡기시며 사람들을 자신의 나라와 영광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람들의 인정을 얻기 위해 복음을 바꾸지 않고, 사도의 권위로 부담을 지우지도 않으면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깊이 사랑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으면서도, 그 사람을 깊이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헌신이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께 달려 있고, 바울은 그 복음을 맡아 전하고 사람들을 돌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을 자기에게 묶어 두려 하지 않습니다. 바울의 사랑은 소유하려는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돕는 사랑입니다.

그 모든 일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들이 바울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한 번만이 아니라 여러 차례 찾아가려고 했지만 길이 막혔고, 지금은 얼굴을 마주할 수도 없습니다. 그는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그들 가운데 있었는지 기억해 달라고 하고,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셨다는 사실을 다시 일깨우고, 여전히 그들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다가 장차 주 예수님께서 오실 때를 떠올립니다. 그때 자신이 자랑할 것은 수많은 설교도, 자신의 희생도, 사도라는 지위도 아닙니다.

그가 품었던 사람들입니다.

아직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한 데살로니가 신자들을 떠올리며 바울은 편지에 적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여러분이 우리의 영광이며 기쁨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