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전서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장 · 엉뚱한 가르침 바로잡기

죄인 가운데 첫째가 가르침을 지키는 이유

교회 안에 잘못된 가르침이 퍼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율법 선생이 되려 하고, 성경에 관해 자신 있게 말하며, 복잡한 이야기와 족보를 파고듭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들을 막으라고 당부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뜻밖의 방향으로 이야기를 돌립니다. 잘못된 가르침을 반박하다 말고,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죄인이었는지를 길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는 과거에 예수님을 모독했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했으며,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그리고 그 고백 한가운데에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 죄인들 가운데 첫째가 나입니다」(15절)라는 문장을 놓습니다.

왜 가르침을 바로잡는 이야기의 한복판에 이런 고백이 들어 있을까요?

이 질문을 붙들고 읽으면 디모데전서 1장의 구성이 새롭게 보입니다. 바울은 먼저 참된 가르침이 무엇을 이루어야 하는지 밝히고(3–7절), 잘못 사용되는 율법의 본래 역할을 설명합니다(8–11절). 그러고는 그 가르침과 율법이 가리켜야 할 복음이 자신의 삶에서 어떻게 드러났는지 보여 주고(12–17절), 디모데에게 다시 처음의 당부를 맡깁니다(18–20절).

이 장의 중심에는 올바른 지식을 가진 사람의 우월함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자비가 있습니다. 바울이 지키라고 당부하는 가르침이 바로 그 자비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읽는 시간 24분소단락 61장 본문 읽기 →

구원자이신 하나님, 소망이신 그리스도

디모데전서 1:1–2 본문 →

편지의 첫머리에서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라고 소개하면서, 그 사도직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밝힙니다.

우리 구원자이신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바울이,디모데전서 1:1 · 본디새김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개인적인 결심이나 능력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의 명령에서 비롯된 것으로 밝힙니다. 이 표현은 뒤에 나오는 그의 회고와 맞물립니다. 예수님을 박해하던 사람에서 예수님의 사도가 된 것은 그 자신의 경력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변화가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을 구원자라고 부르지만, 이 편지의 첫 문장은 하나님을 「우리 구원자」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심판하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들을 구원하는 일을 시작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구체적인 모습을 얻습니다. 여기서 소망은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며, 예수님께서 누구시고 무엇을 하셨는가에 따라 신자의 미래가 결정된다는 고백입니다.

이 두 호칭은 편지 전체의 방향을 미리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구원자이시고 예수님께서 소망이시라면, 교회가 지켜야 할 가르침 역시 그 구원과 소망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합니다.

믿음 안에서 참된 자녀인 디모데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께로부터 오는 은혜와 자비와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디모데전서 1:2 · 본디새김

「믿음 안에서 참된 자녀」는 혈연이 아니라 믿음으로 맺어진 관계이며, 디모데가 그 믿음을 진정으로 함께 나누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바울의 여러 편지에는 일반적으로 은혜와 평화라는 두 가지 인사가 나타나는데, 이 편지에서는 그 사이에 「자비」가 들어갑니다.

이 한 가지 차이에서 특별한 의도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1장을 끝까지 읽고 돌아오면 이 인사가 유난히 깊게 다가옵니다. 바울은 자신이 자비를 받았다고 두 번이나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13, 16절). 그가 디모데에게 비는 자비는 자신이 이미 경험한 것이기도 합니다.

가르침은 무엇을 이루어야 하는가

디모데전서 1:3–7 본문 →

바울은 디모데에게 에베소에 머물러 있으라고 당부합니다. 자신은 마케도니아로 떠났지만, 어떤 사람들이 다른 가르침을 펴고 있기 때문에 디모데에게는 그곳에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다른 가르침」이 정확히 어떤 내용을 가리키는지는 1장만으로 완전히 복원할 수 없습니다. 4절의 「꾸며 낸 이야기와 끝없는 족보」, 7절의 율법 선생이 되려는 열망을 보면, 구약의 이야기나 계보를 바탕으로 한 사변적인 가르침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정확히 무엇을 주장했고 어떤 집단에 속했는지까지는 본문이 알려 주지 않습니다.

바울은 구체적인 주장 하나하나를 반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가르침이 무엇을 만들어 내는지를 묻습니다.

꾸며 낸 이야기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도 말라고 당부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가져오는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영보다는 도리어 사변적인 물음들입니다.디모데전서 1:4 · 본디새김

한쪽에는 끝없이 이어지는 질문과 추측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경영이 있습니다. 바울은 질문하는 행위 자체나 성경을 연구하는 일을 금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활동이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을 가리는 데 있습니다.

성경을 가지고 끝없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어떤 계보의 숨은 뜻을 찾아내고, 다른 사람이 모르는 지식을 내세우고, 복잡한 설명을 만들어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활동이 사람들을 예수님께 더 가까이 이끌지 못한다면, 무엇을 위한 가르침이겠습니까?

가르침의 목표는 사랑이다

이 당부의 목표는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꾸밈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입니다.디모데전서 1:5 · 본디새김

이 문장은 디모데전서 1장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바울은 가르침의 목표를 지식의 축적이나 논쟁에서의 승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막연하게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가 말하는 사랑에는 세 가지 근원이 있습니다.

깨끗한 마음은 단순히 감정이 순수한 상태가 아니라, 사람의 내면에서 무엇을 원하고 추구하는가와 관계가 있습니다. 선한 양심은 자신의 행동을 도덕적으로 분별하고 책임지는 일과 관련됩니다. 꾸밈없는 믿음은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신앙이 아니라 진실한 신뢰를 뜻합니다. 이 셋은 서로 떨어진 덕목이 아닙니다. 가르침이 사람의 내면과 판단과 믿음에 영향을 미치고, 그 결과가 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사랑을 가르침의 목표로 삼는다고 해서, 가르침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정확한 가르침이 왜 필요한지를 설명합니다. 참된 가르침은 사랑을 대신하는 지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믿음에서 사랑이 자라나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 모든 것에서 빗나가 헛된 말로 돌아섰습니다.디모데전서 1:6 · 본디새김

5절의 「목표」와 6절의 「빗나가」는 짝을 이룹니다. 「빗나가」(ἀστοχέω)로 옮긴 동사는 목표를 맞히지 못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가르침에는 도달해야 할 목표가 있는데, 그 사람들은 바로 그 목표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듯합니다.

그들은 율법 선생이 되려 하면서도,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무엇을 두고 확신 있게 주장하는지도 깨닫지 못합니다.디모데전서 1:7 · 본디새김

그들에게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해가 없습니다.

바울은 말하는 사람의 자신감과 그가 가진 지식의 진실성을 구별합니다. 자신 있게 주장한다고 해서 반드시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을 가르치려는 열망이 있다고 해서 율법을 제대로 이해한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율법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조금 더 깊이

4절의 「경영」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오이코노미아(οἰκονομία)는 본래 집안을 관리하거나 맡은 일을 운영하는 것과 관련된 말입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이루시는 구원 계획, 또는 그 계획에 따라 맡겨진 일을 수행하는 책임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 의미 가운데 정확한 강조점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지만, 하나님의 구원 활동이 중심에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율법은 선하다. 그러나 어떻게 사용하는가

디모데전서 1:8–11 본문 →

바울은 먼저 예상 밖의 말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율법이 좋은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다음 사실을 알고 그것을 율법에 맞게 쓴다면 말입니다.디모데전서 1:8 · 본디새김

잘못된 율법 선생들을 비판한 뒤에도 바울은 율법을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하지 않습니다. 율법을 잘못 사용하는 사람들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는 로마서 7:7–12에서도 발견되는 구분입니다. 바울은 거기서 율법 자체를 죄와 동일시하지 않고, 율법이 죄를 드러내는 역할을 설명합니다.

율법은 의로운 사람을 위해 제정된 것이 아니라 무법한 자들과 복종하지 않는 자들, 경건하지 않은 자들과 죄인들, 거룩하지 않은 자들과 속된 자들, 아버지를 죽이는 자들과 어머니를 죽이는 자들, 살인자들,디모데전서 1:9 · 본디새김

처음 읽으면 당황스럽습니다. 의로운 사람에게는 율법이 필요 없다는 뜻일까요? 그렇다면 율법을 공부하거나 가르치는 일 자체가 잘못이라는 말일까요?

이 문장은 앞절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바울이 설명하는 것은 율법의 존재 이유와 올바른 용도입니다. 율법은 악을 드러내고, 악한 행동을 규정하며, 사람들이 마음대로 행해서는 안 되는 경계를 제시합니다. 의롭게 사는 사람을 억압하거나 자신을 남보다 우월하게 만드는 도구로 율법을 사용하는 것은 그 목적에 어긋납니다.

「의로운 사람을 위해 제정된 것이 아니라」는 표현을 어떻게 이해할지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율법의 주된 역할이 악행을 제어하는 데 있다는 해석이 있고, 복음 안에서 의롭게 된 사람과 율법의 관계가 달라졌다는 신학적 의미를 더 강하게 읽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이 문장만으로 의로운 사람이 도덕적 가르침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결론지을 수는 없습니다.

십계명의 흔적

9–10절에는 경건하지 않은 사람, 거룩하지 않은 사람, 부모를 죽이는 사람, 살인자, 성적 잘못을 행하는 사람, 사람을 붙잡아 노예로 파는 사람, 거짓말쟁이와 거짓 맹세하는 사람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무작위로 모인 것처럼 보이지만, 목록의 뒤쪽은 십계명과 상당한 대응 관계를 보입니다.

부모를 죽이는 것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을 극단적으로 거스르는 행동입니다. 살인은 살인 금지 계명과 연결됩니다. 성적인 잘못은 간음 금지 계명의 영역과 관련되고, 사람을 납치하여 파는 행위는 도둑질을 금지하는 계명 및 사람을 유괴하는 일을 금지한 출애굽기 21:16과 연결됩니다. 거짓말과 거짓 맹세는 거짓 증언에 관한 계명을 떠올리게 합니다.

목록 전체가 십계명의 순서를 정확히 재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구조를 배경으로 읽으면 율법 선생이 되려는 사람들을 향한 바울의 비판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율법은 복잡한 추측을 만들어 내는 재료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를 분별하게 하는 가르침입니다.

음행하는 자들, 남자와 성관계를 맺는 남자들, 사람을 붙잡아 노예로 파는 자들, 거짓말쟁이들, 거짓 맹세하는 자들을 위해 제정된 것입니다. 그 밖에 건전한 가르침에 맞서는 것이 있다면 모두 이 율법의 대상입니다. 이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에 따른 것입니다. 그 복음은 다름 아닌 나에게 맡겨졌습니다.디모데전서 1:10–11 · 본디새김

「사람을 붙잡아 노예로 파는 자들」은 당시 사회에 노예 제도가 존재했다는 사실과 별개로, 사람을 납치하거나 강제로 노예화하여 거래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사람을 그런 식으로 다루는 행위를 건전한 가르침에 맞서는 악 가운데 놓습니다. 「남자와 성관계를 맺는 남자들」은 번역과 해석에 주의가 필요한 표현인데, 그 논의는 이 소단락 끝에 정리합니다.

여기서 뜻밖의 연결이 일어납니다. 바울은 죄의 목록 끝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기준으로 제시합니다.

율법과 복음은 서로 경쟁하는 두 가지 가르침이 아닙니다. 적어도 이 문맥에서 바울은 율법을 폐기하고 복음만 남기려 하지 않고, 율법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기준을 복음과 연결합니다. 율법이 죄를 드러낸다면, 복음은 하나님께서 그 죄인들을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를 떼어 놓으면 율법은 사람을 정죄하는 데만 사용될 수 있고, 복음은 죄의 실상을 외면하는 값싼 위로로 오해될 수 있습니다. 바울의 설명에서는 죄에 대한 분별과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이 함께 놓입니다.

11절 끝의 「그 복음은 다름 아닌 나에게 맡겨졌습니다」가 다음 단락으로 넘어가는 문이 됩니다. 바울은 방금까지 율법이 드러내는 죄들을 열거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자신에게 맡기셨다는 사실을 말하자마자, 그 목록을 다른 사람들에게만 적용할 수 없는 이유를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자신 역시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10절의 「남자와 성관계를 맺는 남자들」의 원어 아르세노코이테스(ἀρσενοκοίτης)는 남성과 성관계라는 요소가 결합된 낱말입니다. 남성 간 성행위 일반을 가리킨다는 해석과, 고대의 특정한 착취적·불평등한 성행위에 초점을 둔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전자는 낱말의 결합과 레위기 18:22, 20:13의 표현을 근거로 삼고, 후자는 고대의 성적 관행과 이 낱말의 제한된 사용례를 중시합니다. 정확한 적용 범위는 논쟁이 있으므로, 이를 현대의 성적 지향이나 정체성이라는 범주와 곧바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 죄인들 가운데 첫째가 나입니다」

디모데전서 1:12–17 본문 →

이 단락은 편지의 논증을 잠시 중단하고 개인적인 추억을 이야기하는 부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앞에서 설명한 복음이 어떤 것인지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는 자리입니다.

나에게 힘을 주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께 감사합니다. 그분께서 나를 믿음직하게 여겨 섬김을 맡도록 세우셨기 때문입니다.디모데전서 1:12 · 본디새김

그런데 곧이어 나오는 말이 이 감사의 의미를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내가 전에는 모독자였고 박해하는 자였고 오만한 폭력자였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나는 불쌍히 여김을 받았습니다. 믿지 않는 상태에서 모르고 그렇게 했기 때문입니다.디모데전서 1:13 · 본디새김

믿음직한 사람으로 여겨져 사도가 되었다는 고백 바로 뒤에, 자신이 얼마나 믿음의 적대자였는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과거는 사도행전 9:1–19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위협했고 그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다마스쿠스로 향했습니다. 갈라디아서 1:13–16에서도 자신이 하나님의 교회를 심하게 박해했던 일을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13절의 말은 막연한 겸손의 표현이 아니라 그의 삶에 실제로 있었던 일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사도가 될 만한 자격이 있었기 때문에 부름받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힘을 주시고 섬김을 맡기셨다는 사실은 그의 이전 삶만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 사이에 무언가 결정적인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무지했기 때문에 용서받았다는 뜻일까?

13절 끝에서 바울은 자신이 불쌍히 여김을 받은 것이 「믿지 않는 상태에서 모르고 그렇게 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잘못이 고의적인 악행이 아니었고, 진실을 몰랐으므로 책임이 적었다고 주장하는 것일까요?

본문은 그의 무지를 자비를 받은 이유로 제시합니다. 따라서 그 표현을 지워 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을 오만한 폭력자라고 부르며, 자신이 저지른 일이 실제로 악했다는 판단은 철회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구별해야 할 두 가지가 있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옳다고 믿었다는 사실과, 그 일이 실제로 옳았다는 사실은 다릅니다. 바울은 과거에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고 생각하면서 도리어 예수님의 사람들을 박해했습니다. 자신의 확신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 그는 그 경험을 하나님의 자비로 설명합니다.

이 고백은 앞의 율법 선생들과 대조를 이룹니다. 그 사람들은 자신 있게 주장하지만 무엇을 말하는지 깨닫지 못합니다(1:7). 바울 역시 과거에는 자신이 옳다고 여기며 잘못된 일을 행했지만, 이제 그는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자신이 받은 자비를 말합니다.

한쪽은 자신의 확신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다른 한쪽은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삶을 얻었습니다.

은혜는 죄보다 더 크게 넘쳤다

우리 주님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고도 넘쳤습니다.디모데전서 1:14 · 본디새김

바울은 단순히 용서를 받았다고 하지 않고, 은혜가 넘쳤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에는 믿음과 사랑이 함께 나타납니다. 5절에서 가르침의 목표를 꾸밈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라고 했던 바울이, 자신의 이야기에서는 그 믿음과 사랑이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와 함께 나타났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던 바울이 예수님 안에서 믿음과 사랑을 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생각을 바꾸거나 새로운 윤리적 기준을 받아들인 일이 아니라, 이전의 삶과는 다른 방향으로 살아가게 된 변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정죄의 대상으로만 남겨 두지 않으시고, 죄인이 믿음과 사랑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 15절이 놓입니다.

이 말은 믿음직하며 온전히 받아들일 가치가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 죄인들 가운데 첫째가 나입니다.디모데전서 1:15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우월감을 주시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고백에 자기 자신을 집어넣습니다. 「첫째」는 시간적으로 가장 먼저라는 뜻이 아니라, 바울이 자신을 죄인의 대표적인 경우, 가장 두드러진 경우로 제시하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는 「첫째였습니다」라고 하지 않고 「첫째가 나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과거의 죄를 이미 끝나 버린 남의 이야기처럼 다루지 않고, 현재의 자신이 받은 은혜를 이해하는 데 그 과거를 여전히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 표현으로 바울이 세상 모든 사람의 죄를 실제로 비교하여 자신을 객관적인 최악의 죄인이라고 판정했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강조점은 죄의 양을 비교하는 데 있지 않고, 자신처럼 예수님을 적대했던 사람까지 구원받았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첫째 죄인이 첫째 본보기가 되다

그러나 내가 불쌍히 여김을 받은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첫째인 나에게서 자신의 오래 참음을 남김없이 드러내 보이시어, 앞으로 그분을 믿어 영원한 생명에 이를 이들에게 내가 본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디모데전서 1:16 · 본디새김

이 문장은 15절의 「첫째」를 다시 받아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합니다. 바울이 자신을 첫째라고 말하는 까닭은 자신의 죄가 더 크다는 사실을 끝없이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베풀어진 예수님의 자비를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의 본보기입니까?

그가 본보기가 되는 것은 자신의 탁월한 인내나 노력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보이신 오래 참음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누군가를 본받으라고 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의 훌륭한 행동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을 박해했던 자신의 과거를 드러내어,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의 성품을 보여 주려 합니다.

예수님의 오래 참음은 예수님께서 죄를 가볍게 여기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의 박해는 실제로 악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죄인을 즉시 멸망의 대상으로만 대하지 않으시고, 그를 구원하시고 섬기는 자리에 세우셨습니다. 바울이 본보기가 되는 까닭은 예수님께서 어떤 죄인에게까지 자비를 베푸실 수 있는지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자기 삶을 돌아보며 예수님의 자비를 받을 수 있을지 의심하는 사람이라면, 바울의 이야기를 통해 그 자비의 깊이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신의 신앙과 올바른 지식을 자랑하는 사람이라면, 복음을 맡은 사도조차 자신을 자비가 필요한 죄인으로 기억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의 고백은 마침내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로 나아갑니다.

모든 시대의 왕이시며 썩지 않으시는 분, 보이지 않으시는 분, 홀로 하나님이신 분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토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디모데전서 1:17 · 본디새김

한 사람의 과거를 이야기하던 바울이 모든 시대의 왕이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모든 시대의 왕」은 하나님이 한 시대나 한 지역의 지배자가 아니라 모든 시대를 다스리시는 분임을 고백하고, 썩지 않으시고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와 생명의 한계를 넘어서 계십니다.

모든 시대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어느 시대의 한 죄인을 외면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 사도가 되었는지 이야기할 이유보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오래 참으시고 자비를 베푸셨는지 이야기할 이유가 더 컸습니다. 그래서 그의 회고는 자기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끝납니다.

조금 더 깊이

15절의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서도 발견되는 주제입니다. 누가복음 19:10에서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사람을 찾아 구원하시려는 자신의 사명을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셨던 그 장면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죄인의 집에 들어가셨다고 수군거렸지만,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곳에서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디모데전서 1:15는 그 장면을 직접 인용한 것은 아니지만, 같은 복음의 방향을 보여 줍니다.

믿음과 선한 양심을 붙들고 싸우라

디모데전서 1:18–20 본문 →

17절의 찬양이 끝나자 바울은 다시 디모데에게 말을 건넵니다.

나의 자녀인 디모데여, 전에 그대에 관하여 주어진 예언들을 따라 이 당부를 맡깁니다. 그 예언들을 힘입어 믿음과 선한 양심을 지닌 채 훌륭한 싸움을 싸우게 하려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 양심을 밀쳐 내고 믿음의 문제에서 배가 부서지는 일을 겪었습니다.디모데전서 1:18–19 · 본디새김

3절에서 에베소에 머물며 다른 가르침을 막으라고 당부했던 바울이, 그 당부를 디모데에게 다시 맡깁니다.

그런데 이제 독자는 그 당부를 처음과 똑같이 들을 수 없습니다.

그 사이에 바울이 왜 그 가르침을 지키려 하는지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권위나 지위를 보호하기 위한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복음이 다른 가르침에 가려지지 않게 하기 위한 일입니다.

디모데에 관해 전에 주어졌던 예언이 정확히 어떤 예언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디모데전서 4:14에는 예언과 장로들의 안수를 통해 그에게 은사가 주어졌다는 언급이 있어서, 그의 사역을 맡기는 과정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여기서 예언은 디모데의 사명을 확인하고 그 일을 감당하도록 격려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훌륭한 싸움」입니다. 가르침을 바로잡는 일은 편안하고 손쉬운 일이 아닙니다. 디모데는 거짓된 가르침에 맞서야 하고, 공동체를 지켜야 하며, 그 과정에서 자신의 믿음도 잃지 않아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더 큰 목소리로 주장하라거나 상대를 논쟁에서 완전히 제압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믿음과 선한 양심을 지니라고 말합니다. 5절에서 가르침이 이루어야 할 내적인 모습으로 제시되었던 믿음과 양심이, 장의 마지막에서는 가르침을 지키는 사람 자신이 붙들어야 할 것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잘못된 가르침에 맞서 싸우는 동안, 자신도 잘못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지키려는 열심이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을 잃게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정확성을 강조하면서 자기 양심의 경고를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옳다는 확신 때문에 자기 행동이 옳은지는 더 이상 묻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런 위험을 알고 있는 듯, 믿음만이 아니라 선한 양심도 함께 지니라고 말합니다.

배가 부서지는 일

19절 후반부에서 바울은 전투의 이미지에서 바다의 이미지로 넘어가, 믿음의 실패를 항해 도중 배가 난파하는 일에 비유합니다. 무엇이 배를 부서지게 했습니까? 본문은 그들이 「그 양심을 밀쳐 내고」 그렇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밀쳐 내고」는 단순히 어떤 사실을 알지 못하는 상태와 다르며,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거부하고 밀어내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앞에서 바울은 자신이 믿지 않는 상태에서 모르고 죄를 지었다고 말했습니다. 두 경우를 똑같은 종류의 실패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앞에서는 무지와 불신의 상태에서 행한 박해를 말했고, 여기서는 믿음과 함께 지켜야 할 양심을 거부한 일을 말합니다.

믿음은 자신의 삶과 분리되어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양심을 계속 거부하면서 믿음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사탄에게 내주었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 가운데 휘메나이오스와 알렉산드로스가 있습니다. 나는 그들이 모독하지 않도록 징계받게 하려고 그들을 사탄에게 내주었습니다.디모데전서 1:20 · 본디새김

사람을 사탄에게 내준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고린도전서 5:5에서도 바울은 심각한 죄를 저지른 사람을 사탄에게 넘긴다고 말합니다. 이 때문에 이 표현을 교회 공동체에서 그 사람을 배제하는 징계 행위로 이해하는 견해가 널리 제시됩니다. 또 다른 설명은 교회 밖의 영역을 사탄의 지배 아래 있는 곳으로 이해하고, 그곳에 내맡겨지는 징계의 의미를 강조합니다. 두 설명은 서로 연결될 수 있지만, 본문만으로 그 징계의 구체적인 절차나 결과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징계의 목적은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징계는 단순한 보복이나 최종적인 정죄로 설명되지 않고, 그들이 잘못을 배우고 모독을 그치게 하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징계받다」(παιδεύω)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도 교정과 훈련의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실제로 회개했거나 공동체에 돌아왔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이 장은 그들의 이후 이야기를 알려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절에서 앞에서 보았던 한 단어가 다시 떠오릅니다. 「모독」입니다. 바울은 13절에서 자신을 「모독자」였다고 소개했고, 이제 20절에서는 모독하는 일을 그치게 하려고 두 사람을 징계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모독했던 사람이 사도가 되었고, 이제는 모독하는 사람들을 바로잡기 위해 권위를 행사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자비를 받았다는 이유로 공동체 안의 잘못을 그대로 두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실제로 디모데에게 다른 가르침을 막으라고 당부하고, 두 사람에게 징계를 내렸다고 밝힙니다. 그러나 바울이 받은 자비의 이야기를 잊어버린 채 마지막 절만 읽어서도 안 됩니다. 그 자신도 자비를 받지 않았다면 지금의 자리에 있을 수 없었던 사람입니다.

이것이 이 장에 남아 있는 긴장입니다.

복음이 가르침의 중심에 있어야 하는 이유

디모데전서 1:1–20 본문 →

디모데전서 1장은 교회의 가르침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지키려는 가르침이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묻습니다. 바울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그 가르침은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복음을 드러내야 하고, 그 복음을 믿는 사람들에게서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꾸밈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가르침을 바로잡는 이야기의 한복판에 죄인 가운데 첫째라는 고백이 놓여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거짓을 거짓이라고 말해야 하고, 악을 악이라고 분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을 수행하는 사람도 자신이 예수님의 자비로 살아가는 존재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사실을 잊어버리는 순간, 올바른 가르침을 지키려는 열심조차 5절의 목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참된 가르침은 다른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는 데 능숙하게 만듭니까, 아니면 자기 자신도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까?

바울은 잘못된 가르침을 매우 엄중하게 다룹니다. 그러나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중심에서는 한때 잘못된 확신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박해했던 사람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는 그 사람을 다른 곳에서 찾지 않습니다. 바로 자기 자신에게서 찾습니다.

자기 확신으로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 예수님의 오래 참음을 경험하고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믿음 안의 자녀에게 같은 복음을 지키라고 부탁합니다. 그 일을 앞둔 디모데에게 바울이 마지막으로 들려주는 것은 무조건 승리하리라는 약속이 아니라, 이미 어떤 사람들은 선한 양심을 밀쳐 내고 믿음의 문제에서 배가 부서지는 일을 겪었다는 경고입니다.

그 난파의 소식을 전하면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믿음과 선한 양심을 붙들라고 당부합니다.

그것이 그가 싸워야 할 훌륭한 싸움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