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전서 풀어 읽기 · 2장

이 장의 자리 · 2장 · 기도와 모임의 질서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와 구원

교회가 세상을 위해 기도할 때, 누구까지 그 기도에 포함해야 할까요?

믿음을 함께하는 사람들은 당연할 것입니다. 어려움을 겪는 이웃이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디모데에게 기도를 가르치면서 「왕들과 높은 자리에 있는 모든 이」라는 뜻밖의 사람들을 명시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일까요? 교회를 위해 좋은 일을 했기 때문일까요? 바울은 그런 조건을 붙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이유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고 진리를 온전히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라는 데서 찾고, 더 깊이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의 중개자도 한 분」이라는 데서 찾아냅니다.

이것이 디모데전서 2장의 출발점입니다. 교회의 기도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시고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자신을 내주셨기 때문에, 교회의 관심도 자기 공동체의 울타리에 갇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장의 후반부에 들어서면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바울은 남자들의 분노와 다툼을 경계하고, 여자들의 화려한 치장을 제한하며, 마침내 여자가 가르치거나 남자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아담과 하와의 창조와 타락에서 찾습니다.

이 두 부분을 어떻게 함께 읽어야 할까요?

앞부분은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을 말하고, 뒷부분은 공동체 안의 행동과 역할에 경계를 설정합니다. 그러나 이 둘을 단순히 개방과 제한이라는 대립으로 읽으면 본문의 흐름을 놓칩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공동체가, 그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기도의 범위를 넓힌 뒤, 그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의 삶을 살핍니다. 그리고 그 삶의 질서가 무엇에 근거해야 하는지 창조 이야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읽는 시간 27분소단락 82장 본문 읽기 →

왕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라

디모데전서 2:1–2 본문 →

그러므로 무엇보다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청원과 감사를 드리기를 권합니다.디모데전서 2:1 · 본디새김

「그러므로」는 앞 장에서 디모데에게 믿음과 선한 양심을 지키며 잘못된 가르침에 맞서라고 당부했던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그런데 그 당부에 이어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교회의 조직이나 가르침을 위한 새로운 규정이 아니라 기도입니다.

왜 기도가 먼저일까요?

바울은 간구와 기도와 청원과 감사를 나란히 놓습니다. 각 낱말에는 조금씩 다른 강조점이 있지만, 네 가지를 엄격하게 구분된 기도의 종류로 나눌 필요는 없습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라는 풍성한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의 종류보다 기도의 대상입니다.

바울은 기도할 사람의 범위를 처음부터 넓게 열어 놓고, 2절에서 그 범위에 속하는 특별한 사람들을 언급합니다.

왕들과 높은 자리에 있는 모든 이를 위하여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경건과 품위 가운데 평온하고 조용한 삶을 보내기 위해서입니다.디모데전서 2:2 · 본디새김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와 여러 통치자가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는 로마 제국 안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이 통치자들과 언제나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도행전에는 복음 전파가 지역 사회의 권력자들과 충돌하는 장면이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사도행전 16:19–24, 17:6–9).

그런데 바울은 통치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권합니다.

이 말은 통치자의 모든 행동을 지지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의 권력이 하나님의 뜻과 언제나 일치한다고 선언하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이 바라는 것은 권력과 가까워져 특권을 누리는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경건하고 품위 있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평온입니다.

「평온하고 조용한 삶」은 세상일에 관심을 끊고 자기 신앙생활에만 몰두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갈등이나 소란에 휘말리지 않고 신앙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상태와 연결됩니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인들이 평온하게 살기를 바라는 기도가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의 대표적인 사례로 제시될까요? 그 답은 다음 단락에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디모데전서 2:3–7 본문 →

바울은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좋고 받아들일 만한 일입니다.디모데전서 2:3 · 본디새김

바울은 통치자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이유를 그들의 지위나 권력에서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자」이시라는 사실에서 찾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자의 뜻을 밝힙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고 진리를 온전히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디모데전서 2:4 · 본디새김

이 구절은 디모데전서 2장의 논증을 이해하는 중심축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다스리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기도의 범위가 하나님의 구원 의지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정말 모든 사람인가

1절에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고, 2절에서는 그 가운데 「왕들과 높은 자리에 있는 모든 이」를 특별히 언급합니다. 4절에서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이 구원받고」 진리를 알기를 원하신다고 하고, 6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모든 이를 위하여」 자신을 내주셨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기도에서 출발하여 하나님의 뜻을 지나 예수님의 자기희생에 이르기까지, 같은 범위를 거듭 가리킵니다. 이 반복을 놓치면 1–2절은 단순히 통치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윤리적 교훈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의 정확한 범위에 관해서는 신학적 해석이 갈립니다. 모든 개인을 빠짐없이 가리킨다고 읽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왕과 통치자와 이방 사람을 포함한 모든 부류의 사람을 강조한다고 읽는 견해도 있습니다. 문맥상 분명한 것은 복음의 대상을 어떤 특정한 집단으로 좁혀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이 실제로 구원받는다는 보편구원론을 곧바로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4절은 하나님의 구원 의지를 말하며, 모든 개인의 최종적인 운명을 확정하는 문장은 아닙니다.

한 분 하나님, 한 분 중개자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의 중개자도 한 분,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이시기 때문입니다.디모데전서 2:5 · 본디새김

이 문장에서는 「한 분」이 두 번 반복됩니다. 그리스어 원문에서도 「하나」(εἷς)가 두 진술의 앞부분에 놓여, 먼저 한 분 하나님을 말하고 이어서 한 분 중개자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고백은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에 놓여 있었습니다. 신명기 6:4는 이스라엘에게 여호와야훼가 한 분이심을 선포하며, 이스라엘이 오직 여호와야훼만을 하나님으로 섬긴다는 신앙을 표현합니다. 바울은 그 고백을 버리지 않고, 오히려 그 고백에서 결론을 이끌어 냅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면, 하나님은 유대 사람들만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로마서 3:29–30에서도 바울은 하나님이 유대 사람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이방 사람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고백과 연결합니다. 디모데전서에서도 같은 논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기에 그분의 구원은 민족과 신분의 경계 안에 갇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의 중개자도 한 분이십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바울은 여기에 「사람이신」이라는 표현을 덧붙입니다. 왜 하필 예수님의 인간성을 강조할까요? 중개자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분이기에, 예수님께서 참으로 사람이시라는 사실이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과 무관한 높은 곳에서 인간을 바라보기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의 역사 안에 들어오셨고, 인간으로서 자신을 내주셨습니다. 이 구절이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 문맥에서 바울의 관심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를 중개하시는 분이 바로 사람이시라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중개하셨을까요?

중개자는 자기 자신을 내주셨다

그분은 모든 이를 위하여 대신 치르는 몸값으로 자기 자신을 내주셨습니다. 이는 알맞은 때에 이루어진 증언입니다.디모데전서 2:6 · 본디새김

「대신 치르는 몸값」(ἀντίλυτρον)은 몸값이나 풀려나는 대가를 뜻하는 표현에 대신한다는 의미가 결합된 말로, 신약에서 이 형태의 낱말은 이 구절에만 등장합니다. 이 표현은 마가복음 10:45와도 연결됩니다. 거기서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으며, 많은 사람을 위해 자기 생명을 몸값으로 주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디모데전서는 그 자기희생을 「모든 이를 위하여」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이 몸값이라는 비유를 지나치게 세밀하게 풀어, 그 돈을 정확히 누구에게 지불했는지까지 본문에서 찾아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거래의 모든 과정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기 자신을 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5절의 중개자라는 표현에 깊이를 더합니다. 우리는 흔히 중개자라고 하면 양쪽의 이야기를 듣고 조건을 조정하는 사람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는 중개자는 단순히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의견을 전달하신 분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내주신 분입니다.

여기서 디모데전서 2장의 앞부분이 하나로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자신을 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람들은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가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해 자신을 내주셨다는 사실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7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이 증언을 위해 선포자와 사도, 그리고 이방 사람들의 선생으로 세워졌다고 말합니다. 「나는 진리를 말하고 거짓말하지 않습니다」라는 강한 삽입구는 자신의 사도적 사명에 대한 확신을 강조합니다.

특히 「이방 사람들의 선생」이라는 호칭은 앞의 논증과 정확히 맞물립니다. 유대 사람인 바울이 이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르치는 이유는, 그 복음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게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한 분이시며,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한 한 분 중개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바울은 다시 기도의 자리로 돌아옵니다.

거룩한 손은 분노를 품은 채 들 수 있는가

디모데전서 2:8 본문 →

그러므로 나는 남자들이 어디서나 노여움과 다툼 없이 거룩한 손을 들고 기도하기를 원합니다.디모데전서 2:8 · 본디새김

앞에서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했던 바울은, 이제 그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살핍니다.

손을 들어 기도하는 모습은 구약에서도 발견됩니다. 시편 63:4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손을 드는 장면이 나오고, 열왕기상 8:22에서는 솔로몬이 성전 봉헌 기도를 하면서 하늘을 향해 손을 펼칩니다. 손을 드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기도의 몸짓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손을 드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 기도하는 사람의 분노와 다툼을 이야기할까요? 교회 안에서도 사람들은 서로 다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고,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고, 논쟁에서 이기려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위해 싸운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앞에서 제시한 기도의 범위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리스도인은 자신과 의견이 같은 사람만이 아니라, 높은 권력을 가진 사람과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향한 분노와 다툼에 사로잡혀 있다면,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를 드리는 일에 어떤 모순이 생기지 않을까요?

여기서 손의 거룩함은 단순히 외적인 깨끗함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의 삶과 태도에 관계됩니다. 바울은 손을 드는 자세 자체를 유일하게 올바른 방식으로 규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의 몸짓과 내면이 서로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손은 하나님을 향해 들려 있는데 마음은 다른 사람을 향한 분노로 가득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바로 그 모순을 경계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여자들에게도 예배에 합당한 태도를 요구합니다.

무엇으로 자신을 꾸밀 것인가

디모데전서 2:9–10 본문 →

마찬가지로 여자들도 단정한 옷차림으로 삼가는 태도와 분별을 지니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비싼 옷으로가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공언하는 여자들에게 걸맞게 선한 행실로 자신을 꾸미기를 원합니다.디모데전서 2:9–10 · 본디새김

이 구절을 읽으면 머리를 땋거나 장신구를 착용하는 것이 죄인지 궁금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대조하는 것을 살펴보면, 그의 관심은 단순한 복장 규정에 머물지 않습니다. 한쪽에는 땋은 머리와 금, 진주, 값비싼 옷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선한 행실이 있습니다.

왜 이런 대조를 만들었을까요?

화려한 옷은 무엇을 보여 주었을까

고대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복장과 장신구는 개인의 취향만이 아니라 부와 신분, 명예를 나타내는 중요한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화려한 치장은 단순한 사치뿐 아니라 여성에게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영향력을 표현하는 수단이 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사회적 상황에서 읽으면, 교회 안에서도 사람들이 옷차림과 장신구를 통해 자신의 부유함이나 지위를 드러내려 할 수 있다는 문제가 드러납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러 모인 자리에서도 서로의 신분과 경제적 차이를 의식하게 됩니다. 바울은 그런 외적 과시를 신앙의 본질과 구별합니다.

이것이 모든 형태의 장신구나 단정한 꾸밈을 절대적으로 금지하는 문장인지는 해석상 논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화려한 외모가 경건의 증거가 될 수 없다는 바울의 대조는 분명합니다.

그런데 10절은 단순히 외모에 관심을 덜 두라고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꾸밈을 완전히 없애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공언하는 여자들에게 걸맞게 「선한 행실로 자신을 꾸미기를」 원합니다. 무엇으로 자신을 꾸밀 것인지를 바꾸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귀하게 여기는 것을 드러내려 합니다. 값비싼 옷은 재산을 보여 줄 수 있고, 화려한 장신구는 지위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무엇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드러낼까요?

바울의 대답은 선한 행실입니다.

앞에서 남자들에게 요구한 것이 노여움과 다툼 없는 기도였다면, 여자들에게는 화려한 과시가 아니라 선한 행실로 드러나는 경건을 요구합니다. 두 권면은 서로 다른 문제를 다루지만,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하나님 앞에 모인 사람은 겉으로 보이는 종교적 모습만이 아니라 실제 삶으로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9–10절의 그리스어에는 꾸밈과 관련된 같은 어근이 이어집니다. 한국어 번역에서는 「단정한 옷차림」과 「자신을 꾸미기」로 표현되었지만, 원문은 외적인 단장과 선한 행실을 통한 단장을 더욱 긴밀하게 연결합니다. 다만 「선한 행실로」가 직접 「자신을 꾸미다」에 연결되는지, 아니면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공언하다」에 연결되는지에는 문법적 여지가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더라도 경건의 고백이 실제 행동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여자는 조용히 배워야 한다

디모데전서 2:11–12 본문 →

이제 이 장에서 가장 논쟁적인 단락으로 들어갑니다.

여자는 조용히, 온전히 복종하면서 배워야 합니다. 나는 여자가 가르치는 것도 남자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여자는 조용히 있어야 합니다.디모데전서 2:11–12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오랫동안 교회 안에서 여성의 가르침과 지도력에 관해 논쟁을 불러왔습니다. 해석이 갈리는 부분이므로, 먼저 본문이 분명하게 말하는 것을 살펴보고 그다음에 논쟁의 핵심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나오는 명령은 「배워야 합니다」이다

11절을 읽을 때 흔히 시선이 머무는 곳은 「조용히」와 「복종하면서」입니다.

그러나 문장의 중심 동사는 「배워야 합니다」입니다.

바울은 여자들에게 배우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여자가 가르칠 수 없다는 금지의 다른 표현이 아니라, 여자가 가르침을 받고 배워야 한다는 적극적인 명령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여성의 교육 기회는 신분과 가정환경 등에 따라 달랐으므로, 이 명령이 당시 모든 여성에게 전례 없이 새로운 교육 기회를 제공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본문에서 바울은 여성들을 배움의 자리에서 배제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배움이 어떤 태도와 관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는가입니다.

「조용히」에 해당하는 헤쉬키아(ἡσυχία)는 반드시 한마디도 하지 않는 절대적인 침묵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조용하고 평온한 태도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2절의 「평온하고 조용한 삶」도 같은 어근의 낱말입니다. 완전히 동일한 상황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만, 바울은 이 장에서 조용하고 질서 있는 삶을 반복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조용히」를 평온한 태도로 설명하기만 하면 12절의 실제 금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명시합니다.

여기서부터 중요한 해석의 갈림길이 나타납니다.

무엇을 금지한 것인가

12절의 「권위를 행사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아우텐테인(αὐθεντέω)은 신약에서 이곳에만 등장하며, 정확한 의미와 뉘앙스를 두고 논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크게 둘입니다. 이 동사가 일반적으로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뜻하는지, 아니면 독단적으로 권위를 장악하거나 지배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뜻하는지가 하나이고, 「가르치는 것」과 「권위를 행사하는 것」이 각각 금지된 두 활동인지, 아니면 하나로 연결된 특정한 가르침의 방식을 가리키는지가 또 하나입니다. 여기에 본문의 역사적 상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가 더해집니다.

한 가지 해석은 이 금지를 교회의 지속적인 직무 질서로 이해합니다. 바울이 여자가 교회에서 남자를 대상으로 공적으로 가르치며 권위를 행사하는 지도자의 역할을 맡는 것을 제한한다는 것입니다. 특정한 지역 문제를 넘어 13절의 창조 순서에 호소한다는 점이 중요한 근거이며, 이어지는 3장의 감독 직무에 관한 설명과도 연결됩니다.

다른 해석은 에베소 교회의 구체적인 상황에 주목합니다. 디모데전서에는 잘못된 가르침에 대한 경계가 반복되므로, 바울이 당시의 부적절하거나 잘못된 가르침과 권위 행사를 제한한 것으로 읽습니다. 여기서는 여성에게 배움을 명령한다는 사실과, 「권위를 행사하다」라는 동사의 가능한 부정적인 의미가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두 해석 모두 본문에서 근거를 찾지만, 각각 설명해야 할 어려움이 있습니다. 지속적인 직무 질서로 보는 해석은 신약의 다른 본문에서 여자들이 기도하고 예언하며 가르침에 참여하는 모습을 어떻게 함께 이해할 것인지 설명해야 합니다. 특정한 지역 문제에 대한 제한으로 보는 해석은 바울이 왜 그 근거를 에베소의 상황만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의 창조 이야기에서 찾는지 설명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근거로 모든 여성이 언제나 모든 남성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일반화하는 것도, 반대로 이 구절에는 여성의 가르침을 제한하는 내용이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도 본문보다 앞서 나가는 판단입니다.

이 논쟁에서 특별히 중요한 사실은 바울이 다음 두 절에서 자신의 이유를 직접 제시한다는 점입니다.

조금 더 깊이

「가르치는 것」과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연결하는 그리스어 문법 자체도 연구 대상입니다. 신약의 다른 장면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1:5는 여자들이 기도하거나 예언하는 상황을 전제하고, 사도행전 18:26에서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에게 하나님의 길을 더 정확하게 설명하며, 로마서 16장에는 교회를 위해 일하는 여러 여성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이 본문들은 여성들이 초기 교회에서 아무런 발언이나 가르침의 역할도 하지 않았다는 이해를 어렵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 장면들만으로 디모데전서 2:12의 특정한 금지가 정확히 어떤 역할을 제한하는지까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왜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꺼냈을까

디모데전서 2:13–14 본문 →

먼저 아담이, 그다음에 하와가 빚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담은 속지 않았고, 그 여자는 완전히 속아 명령을 어긴 상태에 이르렀습니다.디모데전서 2:13–14 · 본디새김

바울은 갑자기 창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가 언급하는 두 가지, 곧 아담이 먼저 빚어진 일과 하와가 속임을 받아 명령을 어긴 일은 창세기 2–3장의 서로 다른 장면을 가리킵니다.

먼저 빚어졌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은 먼저 사람을 지으시고 그다음에 여자를 지으십니다. 이 순서는 분명히 본문에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지어졌다는 사실만으로 그 존재가 나중에 지어진 존재보다 언제나 우월하거나 더 큰 권위를 갖는다는 원리가 자동으로 성립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단순히 시간적인 선후관계를 알리려는 것이 아니라, 창조 이야기 속에서 그 순서가 갖는 의미를 자신의 논증에 적용하려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를 창조 때부터 주어진 남녀의 역할 질서로 이해하는 해석이 있습니다. 이 견해에서는 아담이 먼저 지어진 사실이 교회에서의 가르침과 지도력에 관한 구분의 근거가 됩니다. 반면 창조의 순서 자체를 위계적 권위의 근거로 보기는 어렵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은, 바울이 당시의 왜곡된 가르침에 대항하여 창세기의 실제 이야기를 다시 제시하고 있다고 이해합니다.

어느 경우든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창세기 1:27은 남자와 여자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말하고, 창세기 2:18에서도 여자는 남자를 위한 적합한 돕는 이로 등장합니다. 따라서 창조의 순서를 언급한 바울의 말을 여성이 남성보다 덜 인간적이거나 하나님 앞에서 가치가 낮다는 주장으로 확대할 근거는 없습니다.

하와는 속았고 아담은 속지 않았다는 말

14절은 더욱 어렵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는 뱀이 여자에게 접근하여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왜곡하고, 여자는 그 말을 받아들여 열매를 먹습니다. 그리고 남편에게도 주어 그 역시 먹습니다. 바울은 이 장면에서 하와가 속았다는 사실을 특별히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아담은 죄를 짓지 않았다는 뜻일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창세기 3:17–19에서 하나님은 아담에게도 불순종에 대한 책임을 물으십니다. 로마서 5:12–19에서는 오히려 아담 한 사람의 범죄를 통해 죄와 죽음의 문제가 인간에게 들어온 것을 설명합니다.

따라서 「아담은 속지 않았다」는 진술은 아담이 무죄라는 말이 아닙니다. 창세기에 묘사된 속임의 과정에서 하와가 뱀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이 사실을 언급했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한 해석은 창조에서의 순서와 타락에서의 사건을 연결하여, 교회가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를 따라야 한다는 교훈으로 이해합니다. 다른 해석은 속임을 받아 잘못된 판단을 내린 하와의 사례가 잘못된 가르침에 빠질 위험을 경고하는 기능을 한다고 봅니다.

어느 쪽이든 이 구절에서 여자들이 본성적으로 남자들보다 더 쉽게 속는다는 결론을 도출하기는 어렵습니다. 본문은 하와가 속았다고 말할 뿐, 모든 여자가 남자보다 지적으로 부족하거나 영적으로 분별력이 약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디모데전서 1장은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그들의 성별을 특정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왜 하와의 속임을 선택했는지 정확한 역사적 배경은 모두 확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13–14절이 여성 일반에 대한 성격 평가가 아니라, 창조와 타락의 이야기를 교회 질서에 적용하려는 논증이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다음 절에서 전환이 일어납니다. 하와가 속아 명령을 어겼다는 이야기가 끝나자, 바울은 구원을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아이를 낳는 일을 통하여 구원받을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2:15 본문 →

그러나 여자는 아이를 낳는 일을 통하여 구원받을 것입니다. 그들이 분별을 지니고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머물러 있으면 말입니다.디모데전서 2:15 · 본디새김

이것은 디모데전서뿐 아니라 신약 전체에서도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앞에서는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자신을 내주셨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는 오직 예수님 한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여자가 아이를 낳는 일을 통해 구원받는다고 말합니다. 출산이 여자에게만 주어진 또 다른 구원의 방법이라는 뜻일까요?

구원의 의미가 달라졌을까

15절의 「구원받을 것입니다」(σῴζω)에는 4절에서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신다고 할 때와 같은 그리스어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15절을 단순히 출산 과정에서 살아남는다는 뜻으로 읽을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과 연결할지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아이를 낳는 일을 통하여」에서 「통하여」가 정확히 어떤 관계를 나타내는지도 명백하지 않습니다. 출산을 구원에 이르는 통로로 이해할 수도 있고, 출산이라는 삶의 경험을 겪는 가운데 구원받는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여자가 구원받는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세 가지 주요 해석

해석은 크게 셋으로 갈립니다. 출산의 위험에서 보호받는다는 읽기, 출산과 가정생활을 포함한 자신의 삶 속에서 믿음을 지키며 구원에 이른다는 읽기, 한 여자를 통해 태어나신 예수님을 가리킨다는 읽기입니다. 어느 쪽을 택하느냐에 따라 「구원」이 출산 과정에서의 보호인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인지, 그리고 출산이 그 구원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가 달라집니다. 이 구절에 관해서는 문법적 연구를 비롯해 여러 해석이 제시되어 왔으며, 출산과 구원의 관계에 대한 합의된 단일 해석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는 무엇을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까요?

「여자」에서 「그들」로

15절은 처음에 「여자는……구원받을 것입니다」라고 단수로 말하다가, 뒤에서는 「그들이……머물러 있으면」이라고 복수로 바뀝니다. 이 변화는 원문에서도 실제로 나타납니다. 구원받는다는 동사는 단수이고, 머물러 있다는 동사는 복수입니다.

앞에서 하와 한 사람을 이야기하던 바울이 이제 일반적인 여성들로 시선을 옮겼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인 하와의 이야기에서 여자들 전체의 삶으로 관심이 확대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문법적 변화만으로 앞의 여러 해석 가운데 하나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출산을 언급한 다음, 「그들」이 분별을 지니고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머물러야 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이 조건은 출산의 경험 자체에 붙어 있는 공로나 자격을 강조하는 것과는 방향이 다릅니다.

본문은 여성이 얼마나 많은 자녀를 낳아야 하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출산하지 못하는 여자가 구원에서 제외된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이 아닌 다른 중개자를 통해 구원받는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 자신을 내주신 한 분 예수님을 이야기했던 흐름을 고려하면, 이 구절을 출산이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대체하는 별도의 조건이라는 뜻으로 읽기는 어렵습니다.

이 조건은 2장 앞부분과도 연결됩니다. 9절에서는 「분별」을 지니라고 했고, 10절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걸맞은 선한 행실을 요구했습니다. 이 장에서 여자들에게 주어진 권면은 외적인 꾸밈에서 시작하여 배움과 질서를 지나, 결국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머무는 삶으로 나아갑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은 외적인 치장이나 사회적인 지위만이 아니며, 출산이라는 생물학적 능력만으로 규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을 지키며 살아가는 일이 중요하게 제시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15절의 어려운 출산 표현이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그 표현이 왜 선택되었는지, 구원과 정확히 어떤 관계를 갖는지는 여전히 열린 문제로 남겨 두어야 합니다. 다만 바울은 하와의 타락을 말한 뒤 「그러나」라고 시작했습니다.

그가 이야기를 끝내는 곳은 하와의 속임이나 명령 위반이 아닙니다.

구원입니다.

조금 더 깊이

첫째, 출산의 위험에서 보호받는다는 해석은 구원을 출산 과정에서의 보호나 보존으로 이해합니다. 창세기 3:16에서 출산의 고통이 언급되었으므로, 하와의 타락을 이야기한 직후 출산의 위험을 넘어서는 보호를 약속했다고 읽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지만, 믿음이 깊은 여자들도 출산 과정에서 죽거나 심각한 위험을 겪었다는 문제를 설명하기 어렵고, 바울이 모든 신앙인 여성에게 안전한 출산을 보장했다고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둘째, 삶 속에서 믿음을 지키며 구원에 이른다는 해석은 4:3에서 어떤 사람들이 혼인을 금지한다고 한 말, 5:14에서 젊은 과부들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을 돌보기를 바란다고 한 권면과 연결됩니다. 바울이 결혼과 출산을 부정적으로 여기는 가르침을 반대하면서, 그리스도인 여성들이 평범한 가정생활 속에서도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을 지키도록 권했다는 것입니다. 편지 전체의 흐름과 연결된다는 장점이 있지만, 출산을 하지 않는 여성들에게도 동일한 구원이 주어진다는 사실과 출산이 구원의 수단인 것처럼 표현된 이유를 설명해야 합니다. 셋째, 예수님의 탄생을 가리킨다는 해석은 창세기 3:15에서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말씀, 예수님께서 여자에게서 태어나셨다는 갈라디아서 4:4의 진술과 연결합니다. 구원의 근거를 예수님께 두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매력적이지만, 「아이를 낳는 일」이 예수님의 탄생이라는 특정 사건을 직접 가리킨다는 명확한 표지가 부족합니다. 정관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특정한 한 번의 출산을 뜻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한 분 중개자 앞에 모인 사람들

디모데전서 2:1–15 본문 →

디모데전서 2장을 끝까지 읽고 나면, 처음에는 서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던 이야기들이 한 분 중개자 앞에 모인 사람들의 이야기로 연결됩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당부한 뒤, 그 기도를 드리는 공동체의 분노와 다툼, 옷차림, 가르침과 배움의 질서를 살피고, 그 질서를 설명하기 위해 창조와 타락의 이야기를 불러옵니다.

여성의 가르침과 지도력에 관한 제한의 정확한 범위는 여전히 중요한 해석의 갈림길로 남습니다. 그러나 이 논쟁 때문에 앞부분의 복음 선언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사이의 신분이나 부의 차이에 따라 다른 구원의 길을 마련하지 않으셨고, 남자에게는 한 중개자를 주시고 여자에게는 다른 중개자를 주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의 중개자도 한 분」이라는 사실은 2장 후반부의 권면을 읽는 기준이 됩니다.

어떤 역할 구분을 받아들이든,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가치가 다르다는 주장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권위를 행사하든, 그 권위를 자신의 우월함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어떤 신앙의 자유를 강조하든, 그것이 공동체를 향한 사랑과 책임에서 벗어나는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이 장에서 예수님께서 행사하시는 중개는 자신의 권세를 과시하는 방식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내주셨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 예수님을 선포한 뒤, 기도하는 사람들의 손과 옷차림과 말과 태도를 살피기 시작합니다. 교회의 경건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여야 하는지를 먼저 계산하는 데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 자신을 내주신 예수님을 아는 데서 시작하고, 그 앎이 사람들의 행동을 바꾸어 놓아야 합니다.

답하기 어려운 물음들을 품고 다시 앞부분으로 돌아가면, 바울이 처음 제시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왕들과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까지 포함하여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공동체입니다. 그 가운데 남자들은 노여움과 다툼 없이 거룩한 손을 들고, 여자들은 값비싼 장신구보다 선한 행실로 경건을 드러내도록 권면받습니다.

그들이 기도하는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주신 중개자도 한 분이십니다.

바로 사람이신 예수님이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